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8:34:45

2015 개정 교육과정/사회과/고등학교/세계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2015 개정 교육과정/사회과/고등학교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교육과정 체제하의 동명의 과목에 대한 내용은 세계사(과목)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한국교육과정평가원 심볼.svg 이 과목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측에서 수능(및 모의평가) 출제 범위로 정한 시험에 관하여는 대학수학능력시험/사회탐구 영역/세계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5 개정 교육과정 고등학교 사회·역사· 도덕과 과목 ('18~'24 高1)
공통 과목
(1학년)
선택 과목
일반 선택 진로 선택
■ 이전 교육과정: 2009 개정 교육과정 고등학교 사회 교과군 과목('09 고시), 2009 개정 교육과정 고등학교 사회 교과군 과목('11 각론 수정)
■ 이후 교육과정: 2022 개정 교육과정 고등학교 사회 교과군 과목
■ 단 '한국사'는 2020~2024학년도 신입생에게 적용되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 영역 출제 범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ffff,#191919> 2020학년도 해당 교육과정에서 출제하지 않는다. 2009 개정 교육과정(이전 교육과정) 문서 참고 바람.
2021학년도 사회탐구 생활과 윤리 · 윤리와 사상 · 한국지리 · 세계지리 · 동아시아사 · 세계사 · 정치와 법 · 경제 · 사회·문화최대 택 2
과학탐구 물리학Ⅰ · 화학Ⅰ · 생명과학Ⅰ · 지구과학Ⅰ · 물리학Ⅱ · 화학Ⅱ · 생명과학Ⅱ · 지구과학Ⅱ최대 택 2
2022학년도 ~
2027학년도
사회탐구 · 과학탐구 생활과 윤리 · 윤리와 사상 · 한국지리 · 세계지리 · 동아시아사 · 세계사 · 경제 · 정치와 법 · 사회·문화 · 물리학Ⅰ · 화학Ⅰ · 생명과학Ⅰ · 지구과학Ⅰ · 물리학Ⅱ · 화학Ⅱ · 생명과학Ⅱ · 지구과학Ⅱ최대 택 2
2028학년도 해당 교육과정에서 출제하지 않는다. 2022 개정 교육과정(다음 교육과정) 문서 참고 바람.
■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영역 관련 내용은 대학수학능력시험/한국사 영역에서 다룬다. }}}
}}}}}}


1. 개요 및 특징2. 내용 체계
2.1. 01. 인류의 출현과 문명의 발생
2.1.1. 01-01 ( 세계사의 의미)2.1.2. 01-02 (인류의 출현과 선사 문화)2.1.3. 01-03 (문명의 발생)
2.1.3.1. 메소포타미아 문명2.1.3.2. 이집트 문명2.1.3.3. 지중해의 문명들2.1.3.4. 인더스 문명2.1.3.5. 중국 문명
2.2. 02.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
2.2.1. 02-01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
2.2.1.1. 고대 중국사
2.2.1.1.1. 춘추전국시대2.2.1.1.2. 진한시대2.2.1.1.3. 위진남북조시대2.2.1.1.4. 수당시대
2.2.1.2. 고대 한국사2.2.1.3. 고대 일본사
2.2.2. 02-02 (동아시아 세계의 발전)
2.2.2.1. 중세 중국사
2.2.2.1.1. 송나라2.2.2.1.2. 북방 민족 국가2.2.2.1.3. 원나라
2.2.2.2. 중세 한국사2.2.2.3. 중세 일본사
2.2.3. 02-03 (동아시아 세계의 변동)
2.2.3.1. 근세 중국사(명청시대)2.2.3.2. 근세 한국사2.2.3.3. 근세 일본사
2.3. 서아시아·인도 지역의 역사
2.3.1. 03-01 (서아시아의 여러 제국과 이슬람 세계의 형성)
2.3.1.1. 고대 서아시아사
2.3.1.1.1. 신아시리아2.3.1.1.2. 신바빌로니아2.3.1.1.3. 아케메네스 왕조2.3.1.1.4. 파르티아2.3.1.1.5. 사산 왕조
2.3.1.2. 중세 서아시아사(이슬람사)
2.3.1.2.1. 무함마드2.3.1.2.2. 정통 칼리파 시대2.3.1.2.3. 우마이야 왕조2.3.1.2.4. 아바스 왕조2.3.1.2.5. 후우마이야 왕조2.3.1.2.6. 파티마 왕조2.3.1.2.7. 셀주크 튀르크2.3.1.2.8. 이슬람 문화
2.3.1.3. 근세 서아시아사
2.3.1.3.1. 오스만 제국2.3.1.3.2. 티무르 제국2.3.1.3.3. 사파비 제국
2.3.2. 03-02 (인도의 역사와 다양한 종교, 문화의 출현)
2.3.2.1. 고대 인도사
2.3.2.1.1. 불교와 자이나교2.3.2.1.2. 마우리아 제국2.3.2.1.3. 쿠샨 왕조2.3.2.1.4. 굽타 왕조
2.3.2.2. 중세 인도사
2.3.2.2.1. 가즈니 왕조2.3.2.2.2. 고르 왕조2.3.2.2.3. 델리 술탄 왕조
2.3.2.3. 무굴 제국
2.4. 유럽· 아메리카 지역의 역사
2.4.1. 04-01 (고대 지중해 세계)
2.4.1.1. 고대 그리스사
2.4.1.1.1. 미노스 문명2.4.1.1.2. 미케네 문명2.4.1.1.3. 고대 그리스2.4.1.1.4. 헬레니즘 제국
2.4.1.2. 로마사
2.4.1.2.1. 로마 왕국2.4.1.2.2. 로마 공화국2.4.1.2.3. 로마 제국
2.4.1.3. 기독교사
2.4.2. 04-02 (유럽 세계의 형성과 변화)
2.4.2.1. 게르만족의 유입
2.4.2.1.1. 프랑크 왕국2.4.2.1.2. 노르만족
2.4.2.2. 봉건제2.4.2.3. 중세 초기 기독교사2.4.2.4. 중세 문화2.4.2.5. 동로마 제국2.4.2.6. 중세 사회 붕괴
2.4.2.6.1. 십자군2.4.2.6.2. 장원 체제 붕괴, 도시 등장2.4.2.6.3. 중세 후기 기독교사2.4.2.6.4. 잉글랜드 왕국2.4.2.6.5. 프랑스 왕국2.4.2.6.6. 신성 로마 제국2.4.2.6.7. 이탈리아, 이베리아
2.4.2.7. 르네상스2.4.2.8. 종교 개혁
2.4.3. 04-03 (신항로 개척과 절대 왕정)2.4.4. 04-04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
2.4.4.1. 과학 혁명2.4.4.2. 근대 철학사2.4.4.3. 17~18세기 문화2.4.4.4. 시민 혁명
2.4.4.4.1. 영국 혁명2.4.4.4.2. 미국 혁명2.4.4.4.3. 프랑스 혁명2.4.4.4.4. 나폴레옹 전쟁
2.4.4.5. 빈 체제2.4.4.6. 자유주의
2.4.4.6.1. 프랑스2.4.4.6.2. 영국
2.4.4.7. 민족주의와 국민국가2.4.4.8. 산업 혁명
2.4.4.8.1. 산업 사회의 등장2.4.4.8.2. 사회주의2.4.4.8.3. 19세기 문화
2.5. 제국주의와 두 차례 세계 대전
2.5.1. 05-01 (제국주의와 민족 운동)
2.5.1.1. 제국주의
2.5.1.1.1. 아시아 및 태평양2.5.1.1.2. 아프리카
2.5.1.2. 민족 운동
2.5.1.2.1. 중국2.5.1.2.2. 일본2.5.1.2.3. 인도2.5.1.2.4. 동남아시아2.5.1.2.5. 서아시아2.5.1.2.6. 아프리카
2.5.2. 05-02 (두 차례의 세계 대전)
2.5.2.1. 세계 대전 발발 이전2.5.2.2. 제1차 세계 대전2.5.2.3. 러시아 혁명2.5.2.4. 중국2.5.2.5. 인도와 동남아시아2.5.2.6. 서아시아와 아프리카2.5.2.7. 대공황과 전체주의
2.5.2.7.1. 대공황2.5.2.7.2. 이탈리아2.5.2.7.3. 독일2.5.2.7.4. 일본
2.5.2.8. 제2차 세계 대전
2.5.2.8.1. 전쟁 직전 (1936년 ~ 1939년)2.5.2.8.2. 유럽 전선2.5.2.8.3. 태평양 전선2.5.2.8.4. 전후 구상2.5.2.8.5. 전후 처리 (1945년 ~ 1951년)
2.6. 현대 세계의 변화
2.6.1. 06-01 (냉전과 탈냉전)
2.6.1.1. 냉전 체제의 형성
2.6.1.1.1. 진영의 형성2.6.1.1.2. 동양에서의 충돌2.6.1.1.3. 서양에서의 충돌
2.6.1.2. 제3세계의 등장2.6.1.3. 냉전 체제의 완화2.6.1.4. 냉전의 종식
2.6.1.4.1. 소련2.6.1.4.2. 독일 및 동유럽2.6.1.4.3. 중국
2.6.1.5. 탈냉전
2.6.1.5.1. 세계 분쟁2.6.1.5.2. 세계 경제
2.6.2. 06-02 (21세기의 세계)
3. 변화4. 교과서 출판사 목록5. 여담
5.1. 개편 논의

1. 개요 및 특징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의 세계사 과목 구성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

아래의 소단원은 교육과정을 고시하며 가장 기본적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교과서와 교재마다 명칭과 개수가 달라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소단원 번호 옆에 명시된 괄호도 정식 명칭이 아니라 본 문서에서 편의상 붙인 부제로, 실제 교과서에서는 다른 명칭이 쓰일 개연성이 훨씬 높다.

2. 내용 체계

2.1. 01. 인류의 출현과 문명의 발생

[12세사01-01] 세계사의 의미를 이해하고 세계사 학습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12세사01-02] 인류의 출현을 파악하고,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통해 인류 사회의 발전을 이해한다.
[12세사01-03] 여러 지역에서 탄생한 문명의 내용을 조사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한다.

고대사 중에서도 통일 제국들이 등장하기 이전의 선사 시대 문명 시대를 다루는 단원이다.

2.1.1. 01-01 ( 세계사의 의미)

가장 첫 내용은 '세계사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세계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2.1.2. 01-02 (인류의 출현과 선사 문화)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역사 학습에 들어가게 되는데, 먼저 구석기 시대 인류부터 배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 이렇게 네 인류가 등장한다. 라스코 동굴 벽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같은 구석기 유적들도 소개된다. 그 다음은 신석기를 다룬다.

2.1.3. 01-03 (문명의 발생)

본격적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 범위에 들어가는 파트는 바로 세계 4대 문명 파트이다. 4대 문명이라는 용어는 량치차오 청나라 말기에 중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어로 학술적인 용어가 아니지만,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고 2015 과정에서도 4대 문명이라는 용어를 고수하고 있다. 4대 문명에 해당하는 지역은 모두가 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중국 문명이다. 중국 문명은 원래 황하 문명이었으나 최근 창장강도 포함시키는 추세로 바뀌어가면서 명칭이 중국 문명으로 바뀌었다.
2.1.3.1. 메소포타미아 문명
가장 먼저 언급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경우 우루크 시대부터 고바빌로니아까지(기원전 4000년 ~ 기원전 1595년)에 해당하는 시기가 1단원에 배속되었다. 문명 파트가 굉장히 간략하게 나오기 때문에 우루크 시대, 젬데트 나스르 시대, 초기 왕조 시대와 같은 구분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우루크 시대는 기원전 3500년경[1] 수메르인이 문명을 세웠다는 언급으로 대체하며, 젬데트 나스르 시대는 쐐기 문자의 등장, 초기 왕조 시대는 길가메시 서사시에 대한 언급으로 대체한다.

아카드 제국, 우르 제3왕조, 고바빌로니아[2]가 언급된다. 구티 왕조는 알려진 것도 많지 않으므로 아예 언급이 없다. 고바빌로니아 멸망 이후의 메소포타미아사는 3단원 서아시아-인도사 파트에서 이어서 나온다.
2.1.3.2. 이집트 문명
고대 이집트 이집트 초기 왕조부터 이집트 신왕국까지(기원전 3150년 ~ 기원전 1077년)에 해당하는 시기를 1단원에 배속했다. 4대 문명의 관점으로 바라보므로 이집트 문명이라고 나온다. 고대 이집트의 시대 구분으로는 이집트 고왕국, 이집트 중왕국, 이집트 신왕국만 언급되며, 32왕조까지의 숫자+왕조 구분은 아예 나오지 않는다. 이집트 선왕조에서 이집트 초기 왕조로 넘어가는 과정은 기원전 3000년[3] 도시 국가들이 통합되어 통일 왕국이 형성되었다는 정도로 언급한다. 신왕국 이후의 이집트사는 3단원의 서아시아 제국 파트에서 중동 제국에게 정복당하는 역할로 계속 언급된다.
2.1.3.3. 지중해의 문명들
메소, 이집트 다음 바로 인더스로 넘어가지 않고 지중해의 문명들을 짚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주로 히타이트, 페니키아, 이스라엘 왕국(교과 과정에서는 '헤브라이'로 나온다)이 등장한다. 히타이트는 철기로 중동을 제패했다는 구 학설이 아직까지 현장에서 교육되고 있으며, 페니키아는 고대 카르타고의 건설과 페니키아 문자의 확산으로 언급되며, 이스라엘 왕국에 대해서는 솔로몬 및 그의 사후 북이스라엘 왕국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된 것이 언급된다.
2.1.3.4. 인더스 문명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문명 시기부터 베다 시대까지(기원전 2500년 ~ 기원전 500년)가 1단원에 배속되었다. 기원전 2500년경 드라비다인이 건설했다는 서술로 등장하며, 아리아인 베다 문명권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에 자리잡은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의 도시국가를 말하며, 베다 문명권은 갠지스 강을 거점으로 하여 인더스 문명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아인에 대해서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인더스강 유역으로 침입해 기원전 10세기에는 갠지스강까지 진출했다는 서술로 나온다. 종교는 힌두교의 전신 브라만교이고, 베다 시대에 대한 언급은 베다를 제작했다는 정도의 서술로 대체된다. 베다 시대 이후의 인도사는 3단원의 인도사 파트에서 이어서 나온다.
2.1.3.5. 중국 문명
마지막은 중국 문명이다. 하나라부터 서주까지(기원전 2040년 ~ 기원전 771년)가 1단원에 배속되었다. 실제 황하 문명은 미케네 문명과 비교해야 할 정도로 늦게 등장했으나 4대 문명이라는 관점을 택한 교과서에서는 앞선 세 문명과 같이 언급된다. 대신 미케네 문명은 4단원의 유럽사 파트에서 등장한다. 등장하는 왕조는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로, 하나라는 기록상으로만 존재하며, 상나라는 갑골문 순장으로, 주나라는 춘추전국시대 들어가기 이전의 서주 시대만 언급하며 봉건제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춘추전국시대 이후부터는 2단원 동양사에서 나온다.

2.2. 02.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

[12세사02-01] 춘추·전국 시대부터 수나라· 당나라까지 중국사의 전개 과정과 일본 고대 국가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고, 동아시아 문화권의 성격을 이해한다.
[12세사02-02] 북송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살펴보고, 몽골의 팽창이 아시아와 유럽에 미친 영향을 탐구한다.
[12세사02-03] 명나라· 청나라 시대와 에도 시대의 변화를 탐구하여 동아시아 세계의 변동 상황을 파악한다.

동주 춘추전국시대부터 청나라 백련교도의 난까지(기원전 770년 ~ 기원후 1805년)의 동양사 전반이 2단원에 배속되었다.

중국사는 크게 춘추전국시대, 진-한 제국, 위진남북조시대, 수-당 제국, 송나라, 정복 왕조, 몽골 제국(원), 명청시대로 구분하며 이 사이사이에 한국사 일본사가 섞여들어가있다.

2.2.1. 02-01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

동아시아의 고대사로, 중국사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수당시대까지(기원전 770년 ~ 기원후 907년), 한국사는 고조선부터 남북국시대까지(기원전 1천년기 ~ 기원후 926년), 일본사는 조몬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까지(기원전 ~ 기원후 1185년) 다룬다.
2.2.1.1. 고대 중국사
2.2.1.1.1. 춘추전국시대
가장 먼저 등장하는 중국사는 춘추전국시대로, 주나라가 수도를 뤄양으로 옮기며 동주 시대가 시작됨과 동시에 춘추 전국 시대가 열린다. 춘추시대(기원전 770년 ~ 기원전 403년)와 전국시대(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로 나누며, 춘추시대는 제후국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세력균형을 이룬 시대로, 전국시대는 견제에 의한 세력균형이 무너지고 전쟁이 시작되는 시기 정도로 언급된다. 고등학교 교육과정 수준 및 수능 수준에서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요구하지 않는다. 군현제, 철기 시대, 제자백가 등이 관련 개념으로 딸려 나온다.
2.2.1.1.2. 진한시대
춘추전국시대 다음은 진한시대( 기원전 221년 ~ 기원후 220년)로, 교과서 상에서는 진-한 제국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진나라(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6년), 초한전쟁(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2년), 전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신나라( 8년 ~ 23년), 후한( 23년 ~ 220년)으로 나뉘며, 초한전의 경우 그닥 비중있게 등장하지 않거나 아예 언급이 없는 경우도 있다. 신나라는 왕망이 급진적인 개혁을 펼쳤다는 수준만 알아도 끝난다.

이 시대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시황제가 세운 진나라 유방이 세운 한나라이다. 진나라는 진시황으로 제일 유명한 만큼 당연히 진시황과 관련된 내용이 가장 많이 나온다. 황제는 진시황 한 명만 알아도 충분하다. 군현제의 실시, 도량형의 통일, 만리장성 건설 등 전형적인 교과서적 내용이 나오며, 분서갱유 일화도 물론 등장한다. 멸망 원인으로 진승 오광의 난이 언급되는데, 이는 진시황 사후 이세황제[4] 때 일어났다. 이것을 노리고 내신 문제로 내기도 한다.

진나라보다 더 비중이 높은 것은 한나라인데, 황제는 한 고조 유방[5], 한 무제 유철, 광무제 유수 이렇게 세 명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2.2.1.1.3. 위진남북조시대
진한시대 다음은 위진 남북조 시대( 220년 ~ 589년)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삼국지로 대중들에게 가장 유명한 삼국시대가 있으나 이를 의식했는지 삼국시대의 비중은 교과서에서 거의 없는 수준[6]이며,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가 존재했다는 정도로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심지어 교육과정에서 중요하게 나오는 구품중정제 조비가 실시했다는 것도 절대 언급하지 않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태평도 오두미도는 한나라에서 등장했던 종교 정도로 간접 언급하고 넘어간다.

진나라 5호 16국 시대는,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가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밀려나 동진을 세웠다는 정도의 흐름만 파악해도 충분하다. 5호 16국 시대의 국가들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전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지도 자료로 어디에 어느 나라가 있었다는 사진만 보여주고 끝난다. 남북조 중 남조의 송 제 양 진도 크게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았으나, 최근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남조의 송나라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중요해지고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서 제일 중요하게 다뤄지는 나라는 북위( 386년 ~ 534년)이다. 효문제의 한화정책이 펼쳐지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2.2.1.1.4. 수당시대
위진남북조시대 다음은 수당시대로, 교과서에서는 수-당 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수나라의 황제는 문제 양제가, 당나라의 황제는 고조, 태종, 고종, 현종까지 총 여섯 명이 나온다.
2.2.1.2. 고대 한국사
한국사는 한국사 과목이 따로 존재하는 만큼 세계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는 않는다. 2-1 동아시아 세계 형성 단원에서 나오는 한국사는 고조선-> 삼국시대-> 남북국시대까지의 흐름뿐이다.
2.2.1.3. 고대 일본사
중국사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가진 것은 일본사이다.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를 시작으로 야마토 정권을 거쳐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까지를 다룬다. 조몬 시대( ~ 기원전 4세기)는 일본의 선사시대이며 야요이 시대( 기원전 3세기 ~ 3세기)에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국가가 형성된다. 고훈 시대( 3세기 ~ 590년)와 아스카 시대( 538년 ~ 710년)는 야마토 정권이라는 표현으로 묶었으며, 여러 개의 국가들이 야마토라는 하나의 국가로 묶이며 중국과 한국에서 문화를 받아들이며 일본 토착 문화와 융합되는 과정이다.

나라 시대( 710년 ~ 794년)는 수도를 오늘날의 나라현에 해당하는 헤이조쿄로 삼았고, 당나라의 문화를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했던 친당 시대였다. 헤이안 시대( 794년 ~ 1185년)는 수도를 오늘날의 교토부에 해당하는 헤이안쿄로 옮긴 시대로, 당나라가 쇠락하며 당나라를 따라하려는 풍조가 사라지고 일본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귀족의 권력이 성장한 시대다. 천황 하면 떠오르는 허수아비 이미지도 이때 형성된 것이다.

2.2.2. 02-02 (동아시아 세계의 발전)

동아시아의 중세사에 해당하는 시대로, 중국사는 오대십국시대부터 원나라까지( 907년 ~ 1368년), 한국사는 고려 시대( 918년 ~ 1392년), 일본사는 가마쿠라 시대( 1185년 ~ 1333년)에 해당한다.
2.2.2.1. 중세 중국사
2.2.2.1.1. 송나라
수당시대 다음은 송원시대이지만 일반적으로 송나라, 정복 왕조들, 원나라를 분리해서 보며, 교육과정에서도 송나라부터 원나라까지를 딱히 하나로 묶지는 않는다. 송나라( 960년 ~ 1279년)의 중요한 황제는 태조, 신종, 휘종, 흠종, 고종 이 정도가 있으며, 전연의 맹과 관련해서 진종이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특이하게 오대십국시대를 통일한 태종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금나라가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기 이전은 북송( 960년 ~ 1127년), 그 이후는 남송( 1127년 ~ 1279년)으로 나뉘며 상술한 고종이 남송을 세웠다.

태조는 문치주의 및 과거의 전시와 관련해서, 신종은 왕안석의 신법과 관련해서,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에게 수도를 점령당한 정강의 변 때 묶여서 언급되며, 고종은 수도를 항저우로 옮겨 남송을 세웠다는 정도를 알면 충분하다.
2.2.2.1.2. 북방 민족 국가
정복왕조들은 북방 민족 국가라는 표현으로 나오며 요나라, 서하, 금나라가 등장한다. 황제는 건국자인 요 태조, 금 태조, 서하의 이원호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며, 고유의 통치 방식과 고유의 문자를 썼음을 알아야 한다. 서요의 경우 교육과정 상에서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
2.2.2.1.3. 원나라
이러한 송나라와 정복왕조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세계 제국으로 올라선 몽골 제국( 1206년 ~ 1368년 / 1388년 / 1635년)이 뒤를 이어서 등장한다. 칭기즈 칸, 오고타이 칸, 몽케 칸, 쿠빌라이 칸 이 넷이 제일 중요하게 나오며, 수능 과정에서는 칭기즈 칸과 쿠빌라이 칸만 알아도 충분하다. 몽골이 세계의 교통망을 연결한 제국을 세웠던 만큼 원나라 파트에서는 유독 동양 문화권과 서양 세계와의 연결점이 강조된다. 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도 언급되며, 특히 최근에는 색목인에 대한 잘못된 오해인 '눈에 색이 있는 사람'이라는 내용이 삭제되고 원래 의미인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고쳐졌다.
2.2.2.2. 중세 한국사
한국사는 고려에 해당하지만 큰 비중은 없다.
2.2.2.3. 중세 일본사
일본사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있던 가마쿠라 시대( 1185년 ~ 1333년)에 해당하며, 가마쿠라 막부가 생겨나기 이전인 헤이안 시대 말기 사무라이들의 성장부터 설명한다. 가마쿠라 막부의 주요 사건으로는 원나라의 일본원정이 있다.

2.2.3. 02-03 (동아시아 세계의 변동)

동아시아의 근세사에 해당하는 파트로, 중국사에서는 명청시대 백련교도의 난까지( 1368년 ~ 1805년), 한국사에서는 조선 시대 중 근대사 이전( 1392년 ~ 1863년), 일본사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막말 이전의 에도 시대까지( 1336년 ~ 1853년)를 다룬다.
2.2.3.1. 근세 중국사(명청시대)
1368년 홍무제가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낸 뒤부터는 명청시대( 1368년 ~ 1912년)에 해당하는데, 2단원에서는 청나라 건륭제 그리고 그가 물러난 직후 백련교도의 난 때까지를 다룬다. 1805년부터 1840년까지의 청나라는 아예 교육과정에서 다루지 않으며, 1840년 이후부터는 5단원 근대사에서 이어서 나온다.

주요 황제로는 명나라 홍무제, 영락제, 만력제, 후금 청나라 천명제(누르하치), 숭덕제(홍타이지), 순치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나온다. 청나라의 경우 12명의 황제 중 첫 6명이 전부 나오는 것이다.[7] 자주 물어보는 내용으로는 홍무제와 영락제 비교, 그리고 강건성세에 해당하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를 비교하는 것이다. 건륭제의 치세가 끝난 1796년 즉시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며, 이 때 황제였던 가경제는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
2.2.3.2. 근세 한국사
한국에서는 조선에 해당하나 역시나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2.2.3.3. 근세 일본사
일본사에서는 무로마치 막부가 있던 남북조시대( 1336년 ~ 1392년), 무로마치 시대( 1336년 ~ 1573년), 센고쿠 시대( 1467년 ~ 1573년), 그리고 전국시대 삼걸이 활동하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73년 ~ 1603년)와 에도 막부가 있던 에도 시대 중에서도 막말 이전( 1603년 ~ 1853년)을 다룬다. 특히 에도 막부에 대한 비중이 높고 에도 막부는 수능 세계사에서도 빈출되는 주제이다.

2.3. 서아시아·인도 지역의 역사

[12세사03-01] 서아시아 여러 제국의 성립과 발전을 살펴보고,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이슬람 세계의 형성과 확장을 탐구한다.
[12세사03-02] 고대 인도 왕조들의 성립과 발전을 알아보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등장한 배경을 파악함으로써 인도 사회의 성격을 이해한다.

1단원에서 다 설명하지 못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도 문명의 이후 역사를 3단원에 배속시켰다. 3단원은 또 서아시아사와 인도사로 나눌 수 있다.

2.3.1. 03-01 (서아시아의 여러 제국과 이슬람 세계의 형성)

중동의 역사(서아시아사)를 다루는 단원이다. 서아시아사에서는 고바빌로니아 이후 등장한 미탄니 카시트 왕조는 교육과정에 포함하지 않았으며, 신아시리아 때부터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대립기까지를 3단원에 넣었는데, 대략 기원전 7세기부터 18세기까지라고 보면 된다.
2.3.1.1. 고대 서아시아사
2.3.1.1.1. 신아시리아
가장 먼저 나오는 제국은 신아시리아(기원전 911년 ~ 기원전 609년)로, 아슈르바니팔이 수도 니네베에 세운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이 주된 내용으로 언급된다. 교과상에서는 왕립 도서관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잔혹한 통치로 유명하다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아시리아의 멸망 이후에는 리디아,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로 분열되었다.
2.3.1.1.2. 신바빌로니아
다음 제국은 신바빌로니아(기원전 626년 ~ 기원전 539년)로, 주요 황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이고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것이 업적이나, 신바빌로니아는 사실 교육과정 상에서 언급이 매우 적다. 그냥 신바빌로니아가 나타났다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거나, 수능특강처럼 아예 언급조차 안 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2.3.1.1.3. 아케메네스 왕조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한 다음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로, 주요 황제는 페르시아를 제국으로 성장시킨 키루스 2세와 그리스와의 전쟁을 시작한 다리우스 1세이다. 이집트를 정복한 캄비세스 2세 페르시아 전쟁 크세르크세스 1세는 거의 언급이 없다. 수도가 무엇이라고 딱 짚어서 말하지는 않는데, 이는 아케메네스 왕조가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엑바타나 4개의 도시에 수도의 기능을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다음 제국은 헬레니즘 제국이지만 이는 유럽사와 더 밀접하므로 3단원이 아닌 4단원에 배속되었다. 그래서 3단원에서는 페르시아를 멸망시켰다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2.3.1.1.4. 파르티아
이 다음 서아시아를 차지한 나라는 고대 로마 파르티아( 기원전 247년 ~ 기원후 224년)이다. 고대 로마는 헬레니즘과 같은 사유로 유럽사에 더 가깝기 때문에 4단원에 배속되었고, 3단원에서 다룰 서아시아 제국은 파르티아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와 사산 왕조에서는 조로아스터교 관련 언급이 등장하지만 파르티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와 관한 언급을 하지 않는데, 이는 파르티아가 유목적인 성향이 더 강해서 조로아스터교뿐만 아니라 미트라교, 불교의 비중도 강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내용은 교육과정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수도는 크테시폰으로 바빌론을 계승한 도시이다.
2.3.1.1.5. 사산 왕조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제국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 224년 ~ 651년)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와 자주 비교하는 주제가 있는데,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냐 아니냐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까지는 아니었던 반면 사산 왕조에서는 국교의 지위에 올라선다. 그리고 마니교의 출현 시기도 사산 왕조 때이다.
2.3.1.2. 중세 서아시아사(이슬람사)
서아시아에서 고대와 중세를 나누는 기준은 이슬람의 출현으로, 이슬람 이전은 고대이고 이슬람 이후는 중세인 것으로 본다.
2.3.1.2.1. 무함마드
교육과정에서 설명하는 이슬람의 등장 배경은 비잔티움 제국 사산 왕조 간의 전쟁으로 서아시아 정세가 혼란해지자 교역 루트가 홍해-아라비아 루트로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메카 메디나가 대도시가 되어 사회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함마드 610년에 이슬람교를 창시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622년 헤지라를 통해 이슬람을 전파하고 632년 사망할 때까지 아라비아를 이슬람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정통 칼리프 시대 이전에 해당하는 무함마드의 이슬람 시대를 부르는 명칭은 딱히 존재하지 않으나, 시기는 610년 ~ 632년이다.
2.3.1.2.2. 정통 칼리파 시대
무함마드 사후 아부 바크르가 1대 칼리프가 된 시기를 정통 칼리프 시대( 632년 ~ 661년)라고 한다. 첫 세 명의 칼리프의 이름[8]은 물어보지 않는다. 641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651년에는 사산 왕조를 멸망시켰다. 661년 4대 칼리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암살당하면서 시아파 수니파가 갈라섰다.
2.3.1.2.3. 우마이야 왕조
알리 피살 이후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 1세가 칼리프직 세습을 시작하면서 우마이야 왕조( 661년 ~ 750년)가 시작되었다. 주요하게 다루는 칼리파는 무아위야 1세 한 명 뿐이며, 수도는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이며,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부터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더스 강에 이르는 크고 아름다운 판도는 유명하다. 그러나 732년 프랑크 왕국과의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하며 영토 확장이 막혔고, 아랍인을 지나치게 우대하다가 반란이 일어나 아바스 가문에 의해 멸망했다.
2.3.1.2.4. 아바스 왕조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칼리파가 된 아부 알 아바스 아바스 왕조( 750년 ~ 1258년)를 세웠다. 시대는 500년에 달하지만 중요한 칼리파는 바그다드를 건설한 2대 알 만수르뿐이다. 심지어 건국자인 아부 알 아바스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해 당나라의 서진을 막아냈으며 서아시아 이슬람 세계를 장악했으나, 지방 세력이 독립하고 셀주크 제국에게 복속당하며 껍데기만 남게 되었고, 결국 1258년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아바스 왕조와 동시대에 존재해 칼리파를 자처한 다른 이슬람 제국도 언급된다. 아바스의 쇠퇴 이후 분열된 이슬람 국가는 수없이 많지만 교육과정에서는 칼리파의 칭호를 사용하며 이슬람 제국으로 인정받는 나라들 중에서 후우마이야 왕조 파티마 왕조만을 선정해서 교육과정에 포함했다.
2.3.1.2.5. 후우마이야 왕조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여 코르도바 칼리파국이라고도 불리는 후우마이야 왕조( 756년 ~ 1031년)는 750년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자 왕족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쳐서 세운 이슬람 제국이다. 초기에는 아미르를 자처했으나, 929년부터는 스스로를 칼리프로 칭하게 된다. 후우마이야 왕조와 계속해서 싸우며 이베리아에서 기독교를 회복하려고 시도했던 레콩키스타에 대해서는 4단원에서 다룬다. 1031년 이후 후우마이야 왕조는 여러 이슬람 공국인 '타이파'로 분열되며 멸망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교육과정상에서 다루지 않는다.
2.3.1.2.6. 파티마 왕조
북아프리카에서는 파티마 왕조( 909년 ~ 1171년)가 들어섰다. 고대부터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으나 아시리아, 페르시아, 헬레니즘, 로마, 이슬람 등에게 정복당해 지배를 받아온 이집트를 939년에 정복하고 거점을 카이로로 옮겼다. 이후 셀주크 튀르크 십자군과 맞섰으나 1171년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에 의해 멸망한다.
2.3.1.2.7. 셀주크 튀르크
칼리파를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어지간한 칼리파국보다 훨씬 강력했던 제국으로는 셀주크 튀르크( 1037년 ~ 1194년)가 있었다. 아바스 왕조가 약해지자 부와이 왕조라는 국가의 지배를 받았는데, 건국자 토그릴 베그가 부와이 왕조를 몰아내고 아바스 칼리파의 보호자가 되면서 술탄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을 위협하고 십자군과 맞섰으나, 12세기 이후 분열되면서 소멸했다. 간혹 가다 셀주크 제국이 몽골 제국에게 멸망당했다는 식의 잘못된 내용이 교과서상에 올라와 있으나, 몽골 제국은 1206년에 가서야 등장하므로 시기상 맞지 않다. 몽골이 페르시아 땅에 들어올 때는 셀주크는 이미 망해 없어지고 분열된 나라를 호라즘이 수습한 상태였다. 몽골에게 멸망당한 것은 바로 호라즘이었다.
2.3.1.2.8. 이슬람 문화
셀주크까지의 중세 이슬람 왕조들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 이슬람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흔히 이슬람 황금기로 불리는 철학, 법률, 과학 등의 발전과 아라베스크 무늬, 아라비안 나이트, 이슬람의 5대 기둥(교육과정에서는 5행이라는 표현으로 나온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유명한 일부다처제에 대한 이야기와 돼지고기 금지도 언급된다.
2.3.1.3. 근세 서아시아사
그 다음부터는 근세 이슬람 제국들인 오스만 제국, 티무르 제국, 사파비 왕조를 다룬다. 중세와 근세 사이인 13세기 몽골 제국이 침입해오며 호라즘, 아바스 왕조 등을 모두 격파하고 서아시아를 초토화시켜 일 칸국을 세웠다. 일 칸국에 관한 내용은 교육과정에서 중요시하지 않으며 2단원 몽골 제국 파트에서 지도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언급되는 수준이다.
2.3.1.3.1. 오스만 제국
일 칸국이 무너지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는 오스만 제국( 1299년 ~ 1922년)이 등장했다. 2단원에서는 제2차 빈 공방전이 일어난 최절정기 1683년까지만 다룬다. 오스만 제국의 주요 황제는 메흐메트 2세, 셀림 1세, 쉴레이만 1세 이렇게 세 명이 나온다.[9]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무려 2200년을 지속한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10] 셀림 1세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에 있던 맘루크 아바스 왕조로부터 칼리파 직책을 넘겨받으면서 오스만의 술탄이 칼리파를 겸직하게 되었다. 쉴레이만 2세 때는 동유럽에서 영토를 확장해 헝가리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럽 함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11]
2.3.1.3.2. 티무르 제국
오스만 초기에 오스만을 위협하며 몽골 제국의 부활을 알렸던 티무르 제국( 1370년 ~ 1507년)도 교육과정 상에 있다. 건국자 티무르 칭기즈 칸의 후손으로 사마르칸트에서 제국을 형성해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 및 메소포타미아를 손아귀에 넣었다. 1402년에는 앙카라 전투에서 승리해 오스만의 황제를 포로로 잡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명나라로 원정을 떠나던 길에 사망했다. 이후 세력이 약해져 분열되었고 우즈베크인에게 멸망했다.
2.3.1.3.3. 사파비 제국
티무르 제국의 멸망 이후 분열을 수습한 국가는 이스마일 1세가 건국한 사파비 제국( 1501년 ~ 1736년)이었다. 오랫동안 수니파가 다스려오던 이란을 단숨에 시아파 근본주의 국가로 만든 왕조가 바로 이 사파비 제국일 정도로 시아파에 진심인 국가였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처럼 황제를 샤한샤라고 불렀는데 교육과정상에서는 그냥 샤라고 칭한다. 주요 샤한샤는 건국자 이스마일 1세와 중흥 군주 아바스 1세로, 아바스 1세 때 수도를 이스파한으로 정해서 멸망할 때까지 사용했다. 1736년 멸망했다.[12] 여기까지가 서아시아의 전근대사 파트이며, 다음부터는 인도사로 넘어가게 된다.

2.3.2. 03-02 (인도의 역사와 다양한 종교, 문화의 출현)

3단원에 배속된 인도사 파트는 베다 시대가 끝난 후 십육대국부터 무굴 제국- 마라타 제국- 시크 왕국 대립기까지( 기원전 6세기 ~ 19세기 초)이다. 인도사는 수많은 나라들이 난립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교육과정에서는 이렇게 난립하는 나라들을 대부분 생략하고 주요 제국들 위주로만 담았다. 마우리아 왕조, 쿠샨 왕조, 굽타 왕조, 가즈니 왕조, 고르 왕조, 델리 술탄국, 무굴 제국 순서대로 흘러가며, 사타바하나 왕조(안드라 왕국), 촐라 제국 등이 언급되기도 한다.
2.3.2.1. 고대 인도사
2.3.2.1.1. 불교와 자이나교
가장 먼저 나오는 시대는 십육대국인데, 십육대국이라는 표현은 교육과정에서 등장하지 않고, 대신 불교 자이나교의 출현을 위주로 가르친다.
2.3.2.1.2. 마우리아 제국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헬레니즘 제국이 침입했다가 돌아갔고, 이때 사회 혼란이 발생했다가 혼란을 잠재우고 인도를 통일한 나라는 마우리아 제국( 기원전 322년 ~ 기원전 184년)이었다. 초대 군주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였으며 인도 대부분을 통일한 왕은 아소카 대제였다. 참고로 남인도는 장악하지 못했는데 남인도는 아리아인의 침입으로 밀려난 드라비다인의 문화권이었기 때문이다. 마우리아 제국의 키워드는 아소카왕, 산치 대탑, 석주, 상좌부 불교이며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2.3.2.1.3. 쿠샨 왕조
이후 인도에서는 분열기가 이어지다가 인더스강의 푸르샤푸라를 수도로 한 쿠샨 왕조( 30년 ~ 375년)가 세워졌다. 카니슈카 1세의 치하에서 최전성기를 누렸으며 대승불교가 나타나 동양으로 전해졌다. 이때 헬레니즘 예술 양식도 동아시아로 전파되어 불상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2.3.2.1.4. 굽타 왕조
쿠산이 붕괴된 이후에는 굽타 왕조( 320년 ~ 550년)가 북인도를 장악했다. 건국자는 찬드라굽타 1세이며, 찬드라굽타 2세 때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불교 자이나교와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 많은 종교들이 융합되면서 힌두교로 성장했고, 이 시기에 유행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는 인도인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오늘날 인도의 국명에도 '바라트'라는 표현이 들어간다. 아라비아 숫자의 원형이 되는 인도 숫자가 발원했다.
2.3.2.2. 중세 인도사
2.3.2.2.1. 가즈니 왕조
굽타 왕조가 에프탈의 침략으로 붕괴하면서 인도도 중세에 접어들었다. 수 세기 동안 이어진 왕조들의 난립 중에 8세기경 인도에 이슬람이 전파되었고,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가즈니에서 세워진 가즈니 왕조( 977년 ~ 1168년)가 북인도 첫 이슬람 왕조가 되었다.
2.3.2.2.2. 고르 왕조
그러나 속국이었던 고르 왕조( 1011년 ~ 1215년)에게 멸망당하고, 고르 왕조가 북인도를 이슬람교로 다스렸으나, 이들 또한 13세기에 분열되었고 결국 호라즘에 의해 멸망했다.
2.3.2.2.3. 델리 술탄 왕조
이후 인도 이슬람의 중심지는 델리가 되었다. 델리 술탄국( 1215년 ~ 1526년)은 델리를 수도로 삼은 북인도 이슬람 왕조 5개를 일컫는 표현이다.[13] 첫 번째 노예 왕조를 세운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가 델리를 정복하면서 세워졌는데, 이때 쿠투브 미나르를 세웠다.
2.3.2.3. 무굴 제국
페르시아 지역에서 티무르 왕조가 분열되자 티무르의 5대 후손이자 칭기즈 칸의 15대 후손인 바부르 무굴 제국( 1526년 ~ 1857년)을 세웠다.[14] 주요 황제로는 바부르, 악바르, 아우랑제브가 있다. 바부르는 파니파트 전투에서 로디 왕조를 멸망시키고 무굴 제국을 세운 건국자이며, 악바르는 데칸 고원 일대까지 영토를 넓히고, 비무슬림 인두세인 지즈야를 폐지해 관대한 통치를 벌였던 인물이고, 아우랑제브는 관대한 통치를 모두 철폐하고 힌두교 탄압, 이슬람 강요를 벌였으며 인도 남쪽까지 정복해 최대 영토를 이룬 인물이다.

아우랑제브는 청나라의 건륭제와 비슷한 인물로, 영토를 확장해 인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정작 멸망의 원인 또한 제공했다. 결국 아우랑제브 이후에 마라타 제국 시크 왕국이 반란을 일으킨데다가 대영제국이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무굴 제국은 쇠락했다.

무굴 제국의 사회상으로는 타지마할, 우르두어, 시크교 등이 언급된다.

3단원의 마지막 내용은 인도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에 관한 내용이다. 원래 이전 교육과정에서는 동남아 역사의 비중도 적지 않았으나, 2015 과정으로 넘어오면서 두 왕조만이 언급되는 수준으로 줄었다. 지금의 캄보디아인 크메르 제국 앙코르와트를 건축했는데, 원래는 힌두교 사원으로 세워졌으나 이후 불교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보로부두르는 인도네시아의 샤일렌드라 왕조 때 지어진 대승 불교 사원이다. 여기까지가 3단원 서아시아 및 인도사 파트의 끝이다.

2.4. 유럽· 아메리카 지역의 역사

[12세사04-01] 그리스·로마 문명의 특징을 이해하고, 고대 지중해 세계의 형성과 발전에 대해 탐구한다.
[12세사04-02] 서유럽 봉건 사회의 전개 양상을 탐구하고,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세계관의 변동을 설명한다.
[12세사04-03] 신항로 개척이 가져온 유럽의 흥기와 절대 왕정의 등장에 대해 탐구하여 유럽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파악한다.
[12세사04-04] 시민 혁명과 국민 국가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고, 산업 혁명의 세계사적 의미를 해석한다.

기원전 3천년기에 등장한 미노스 문명부터 독일 이탈리아가 통일되고 산업 혁명이 퍼져나가는 1870년대까지의 유럽과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루는 단원으로, 세계사 과목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자랑하며, 단원 하나가 사회 교과 하나(특히 생윤)의 크기와 맞먹는다. 2, 3단원과 달리 근대사 파트인 5단원과 바로 이어지는 만큼 일부 근대사 내용까지 4단원에서 포함하고 있다.

2015 교육과정 내에서 4단원 서양사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영국, 러시아, 미국 등의 역사를 한꺼번에 모아 담은 단원인만큼 분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

2.4.1. 04-01 (고대 지중해 세계)

유럽의 고대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유럽사의 시작이라 일컫어지는 미노스 문명부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기원전 3천년기 ~ 기원후 476년)를 다루며, 크게는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로 분류할 수 있다.
2.4.1.1. 고대 그리스사
그리스 또한 미노스 문명, 미케네 문명,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제국의 4개로 더 나뉜다.
2.4.1.1.1. 미노스 문명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명은 유럽 최초의 문명인 미노스 문명(기원전 3천년기 ~ 기원전 11세기)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왕 미노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으로, 지중해 한가운데의 크레타 섬에서 발생했다. 크노소스 궁전 등을 지었으나 미케네 문명인들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2.4.1.1.2. 미케네 문명
다음 문명은 그리스 본토에 세워진 미케네 문명(기원전 17세기 ~ 기원전 12세기)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모티브가 되는 사건들이 발생했으나, 기원전 12세기 즈음 멸망했다. 2015 교육과정에서는 도리스인의 침략으로 멸망했다는 설을 채택했다.[15]
2.4.1.1.3. 고대 그리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출제되는 범위는 고대 그리스( 기원전 8세기 ~ 기원전 334년 / 기원전 330년)부터이다. 미케네 문명이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멸망한 이후 한동안 암흑시대를 맞이하다가 기원전 8세기부터 호메로스의 기록이 등장한다든가 올림피아 제전이 개최된다든가 기록이 많아지면서 그리스의 부활을 알렸다. 교육과정에서는 그리스는 산악 지형이 많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 국가가 아니라 많은 수의 도시국가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관점을 채택하며 폴리스의 형성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는 아크로폴리스 아고라 등의 시설이 들어섰고, 서로 다른 도시였으면서도 같은 고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족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헬라스('Ελλάς) 또는 헬레네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시작을 알렸던 올림피아 제전에 참여했다.

2015 교육과정에서는 그리스의 수많은 도시국가들 중에서도 고대 아테네 스파르타를 중요하게 다룬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에서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원이 되면서 훌륭한 철학자들이 학문을 발전시킨 아테네의 비중을 더 크게 두고 있다. 아테네를 이끈 지도자로 유명한 솔페클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각각 솔론, 페이시스트라토스, 클레이스테네스, 페리클레스를 말한다. 아테네는 본디 귀족들이 다스리는 귀족정이었으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평민들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시민들에 의한 민주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솔론은 일반적으로는 플라톤와 같은 가문 출신이자 크로이소스에게 조언을 하고 금권정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기원전 600년 전후에 활동했으며, 교육과정에서는 금권정을 실시했다가 반발을 샀다는 일화만을 실어 가르치고 있다.[16]

페이시스트라토스 기원전 6세기 아테네에서 참주정을 실시했던 인물로 기원전 561년에 한 번, 그리고 기원전 546년부터 기원전 527년까지 두 번째로 참주로 재위했다. 교육과정에서의 서술의 부실함 때문에 전두환 같은 사악한 독재자 쯤으로 비춰질 수도 있으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빈민들을 구제하는 등 농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 정책을 펼쳤다.[17]

클레이스테네스 기원전 510년에 참주정을 몰아내고 기원전 508년에 아르콘으로 취임하면서 개혁을 펼쳤다. 교육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업적은 부족제 개편과 500인회 성립, 도편추방제의 실시 이렇게 세 가지이다.[18]

이후 기원전 5세기에는 아테네에서 민주 정치가 펼쳐졌으며, 페르시아 전쟁을 겪고 델로스 동맹을 통해 아테네 제국으로 거듭나면서 고대 그리스 최강국이 되었다. 아테네가 최강이던 시절 아테네를 이끌던 인물은 페리클레스로, 기원전 461년부터 기원전 429년까지 아테네를 다스렸다. 그의 업적으로는 민회에 입법권을 부여하고 관직과 배심원 등을 추첨으로 선출하며 공무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교육과정 상에서 가르쳐지고 있다.[19]

한편 스파르타는 도리스인이 미케네 문명을 파괴한 이후 세운 도시로, 정복당한 사람들은 농업이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페리오이코이 또는 그보다도 더 낮은 천민 헬롯(헤일로타이)이 되었다.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잘 알려진 아고게를 실시해서 어렸을 때부터 한국군 뺨치는 강제 집단생활을 당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고대 그리스의 전쟁은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91년부터 기원전 479년까지 페르시아의 공격을 그리스가 막아낸 전쟁이었다.[20] 상고시대부터 이 때까지의 역사를 책으로 편찬한 인물이 바로 헤로도토스였다.

고대 그리스가 똘똘 뭉쳐 페르시아의 공격을 막아낸 이후 그리스는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양분되었다. 세력균형을 이루다가 세력균형이 무너지자마자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4년)이다.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여 패권은 스파르타가 가져가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에서는 내분이 일어나다가[21] 마케도니아 왕국 필리포스 2세의 공격으로 전부 마케도니아에 정복당했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에 대한 내용도 존재한다.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엠페도클레스 등의 자연 철학을 시작으로 소피스트를 반박한 소크라테스, 그 제자이자 이상주의자인 플라톤, 플라톤의 제자이자 현실주의자로 많은 학문의 공통 조상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문학 작품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시작 중 하나로 꼽히는 호메로스 일리아드 오디세이아가 언급되며, 기원전 5세기 연극 분야에서 소포클레스와 같은 작가들이 인기를 끌었다. 역사서로는 헤로도토스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서술한 <역사>(Ἱστορίαι)와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서술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있다. 건축 분야에서는 아직도 아테네에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
2.4.1.1.4. 헬레니즘 제국
고대 그리스를 제패한 인물은 필리포스 2세였다. 그는 기원전 337년에 그리스 전체를 통일했다.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사망하고 알렉산드로스 3세가 마케도니아의 국왕이 되었다.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면서 헬레니즘 제국( 기원전 334년 / 기원전 330년 ~ 기원전 30년)의 등장을 알렸다. 기원전 333년 이소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기원전 332년 이집트를 페르시아로부터 빼앗았으며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해 수사를 점령했다. 기원전 330년에 아케메네스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켜 헬레니즘 제국이 인도 근처까지 닿게 만들었다. 교육과정에서는 페르시아의 전제군주제를 도입하고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이 부대끼며 살아가게 하여 서로 결혼하도록 만든 것,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를 설치한 것 등이 서술되어 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하면서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교육과정 외 용어로 디아도코이 시대라고 부르며, 굉장히 복잡하므로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시리아와 페르시아의 셀레우코스 제국,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세 개로 갈라졌다고 이해하고 넘어가도 충분하다.[22]

2015 과정에서 헬레니즘 문화는 세계시민주의(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대표되며, 철학 분야에서는 스토아 학파[23] 이성 금욕 중시 철학과 에피쿠로스 학파[24]의 '고통이 없는 상태'의 쾌락 중시 철학이 대립했다. 자연철학자로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를 고안하고 시에네(現 이집트 아스완)와 알렉산드리아를 오가며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에라토스테네스, 달과 태양 간의 거리를 계산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아리스타르코스, 입체도형의 부피를 구하는 방법을 고안한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기하학의 체계를 고안한 유클리드 등이 활동했다. 헬레니즘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은 밀로의 비너스상과 라오콘 군상이 있으며, 헬레니즘 미술 양식은 쿠샨 왕조 간다라 양식에 영향을 끼쳐 한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 야마토 왕권까지 전파되었다.
2.4.1.2. 로마사
여기까지는 그리스사였고, 이제 그리스 다음 지중해를 제패할 고대 로마(기원전 753년 ~ 기원후 1453년) 파트가 시작된다. 무려 2200년을 존속한 고대 로마는 크게 왕정, 공화정, 제정으로 나뉜다. 공화정은 법률이 발전하던 시기,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 공화정의 위기, 삼두 정치 시기 이렇게 크게 4개로 나눌 수 있다. 제정 이후부터 서로마의 멸망까지는 1세기의 제정 초기, 2세기 팍스 로마나, 3세기의 위기(군인 황제 시대), 사두정치(사분할통치 시대), 4세기 기독교 공인 이후, 5세기의 동서분열기 이렇게 6개로 나눌 수 있다. 서로마의 멸망 이후부터는 중세 동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
2.4.1.2.1. 로마 왕국
고대 로마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 레무스가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7명의 왕[25]을 배출한 로마 왕국(기원전 753년 ~ 기원전 509년)은 7번째 왕 대에 귀족들에 의해 축출되었다.
2.4.1.2.2. 로마 공화국
로마 공화국( 기원전 509년 ~ 기원전 27년)은 왕 대신 집정관을 뽑는 정치 체제로, 귀족들이 세웠으나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평민들이 상공업을 통해 성장하고 군대에서 요직을 차지하면서 평민의 지위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호민관[26] 민회가 설치되었다. 이후에도 귀족들이 시민들을 방해하고 호민관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수작을 부리자 평민들은 성문법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이 요구에 따라서 기원전 5세기 십이표법이 제정되었다. 이후 집정관 두 명 중 한 명은 평민 중에서 뽑게 하는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되었고, 기원전 287년에는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호르텐시우스 법을 제정했다.

로마는 시작할 때 에트루리아의 속국이었으나, 점차 세력을 불려 에트루리아를 복속시키고 기원전 275년 이탈리아를 통일했다.[27] 이제 로마의 상대는 과거 페니키아인이 세운 고대 카르타고가 되었다. 이렇게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 ~ 기원전 146년)이라고 한다. 기원전 264년 로마와 카르타고는 처음으로 충돌하여 제1차 포에니 전쟁을 벌였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기원전 241년 로마가 승리해 지중해 패권을 장악했다. 기원전 218년 벌어진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카르타고에서 그 유명한 한니발 바르카를 내보냈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등 활약을 했으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역습으로 기원전 201년에 로마가 승리했고, 카르타고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기원전 149년 제3차 포에니 전쟁 때는 한 번 더 카르타고를 침입해 기원전 146년에 완전히 멸망시키고,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게 소멸시켰다.

카르타고를 제압한 로마는 기원전 2세기에 들어서면 지중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국가가 되었다.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또한 기원전 168년에 로마에게 정복당했다. 그러나 땅이 넓어지면서 귀족들은 새로운 정복지에 라티푼디움이라는 대농장을 운영했고, 기존의 농민들은 땅을 빼앗겼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 포에니 전쟁 영웅이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 그라쿠스 형제가 평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농지법, 곡물법 등을 제정했으나 원로원의 방해[28]로 실패했다.

이후 로마에서는 정치적 혼란[29]으로 인해 제3차 노예 전쟁(스파르타쿠스의 난, 기원전 73년 ~ 기원전 71년) 등이 벌어졌다. 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등에 의해 제압되었고, 이때 스파르타쿠스를 제압한 두 인물과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렇게 세 명이 기원전 50년대~40년대에 제1차 삼두정치를 이끌었다.[30]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이후에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기원전 40년대~30년대에 제2차 삼두정치를 이끌었으며, 기원전 31년에는 안토니우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클레오파트라 7세가 동맹을 맺어 옥타비아누스를 상대하는 악티움 해전이 벌어졌으나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다.[31]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원로원에게서 '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2.4.1.2.3. 로마 제국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 기원전 27년 ~ 기원후 1453년)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거듭남과 동시에 제정이 시작되었다. 1세기의 로마는 별 탈 없이 잘 흘러갔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후술할 기독교가 등장한 것이다.

2세기에는 오현제라고 불리는 5명의 황제[32]가 로마 제국의 역대 최대 영토를 이룩했다.

그러나 3세기부터는 군인 황제 시대(3세기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33] 군인 황제가 난립할 뿐만 아니라 속주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고[34], 게르만족 사산 왕조의 침입이 있었으며, 훗날 중세의 농노와 유사한 농민 '콜로누스'들이 대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콜로나투스가 운영되었다.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 모든 혼란을 제압한 뒤 293년 사두정치(사분할 통치)를 실시했다. 거대한 로마를 4명의 황제(서방정황제, 서방부황제, 동방정황제, 동방부황제)가 다스리도록 하는 제도였다. 국방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실시한 제도였으나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고, 이 내전을 제압한 인물이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06년 즉위했으며, 313년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했다. 324년 사두정치의 막을 내리고 로마를 통합했으며, 330년에는 비잔티움에 신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해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렇게 1100년 간 로마가 로마 제국의 수도로 기능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시대가 열렸다.

379년 즉위한 테오도시우스 1세 391년 기독교를 정식 국교로 삼으면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를 금지했다. 395년에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하면서 로마는 다시 두 명의 황제가 나누어 통치했고, 로마를 수도로 한 서쪽 영토를 서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한 동쪽 영토를 동로마 제국이라고 부른다.[35] 5세기에 접어들고 나면 번영하던 동로마 제국 훈족 게르만족의 침입 등을 잘 막아내지만, 쇠퇴하던 서로마 제국은 이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476년 오도아케르에 의해 마지막 황제가 폐위당하면서 멸망했다. 서로마의 멸망과 동시에 유럽의 고대사는 끝나고 중세에 접어드는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로마 제국 자체가 멸망한 것은 절대 아니며, 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으로 천 년 더 이어진다.

로마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했으며, 보다 현실적인 분야에 집중했다. 법률 분야에서는 십이표법을 시행하던 로마 공화국이 격변기를 거치면서 많은 판례와 학설을 쌓으며 시민법으로 발전했고, 이후에는 제국 전체의 시민에게 로마법을 적용하면서 만민법으로 발전했다. 6세기 동로마 제국 때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로마법 대전)으로 발전했다.

건축 분야에서는 매우 미세한 기울기를 자랑하는 수도교 아치 구조가 인상적인 콜로세움, 판테온, 개선문, 로마 시민들이 자주 이용하던 목욕탕이 지어졌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도로가 잘 닦여 있어 21세기의 오늘날까지도 사용할 정도이다.

문학 분야에서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가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철학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토아 학파에서 활동했다. 역사서로는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로마사>와 플루타르코스의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작성되었다. 과학 분야에서는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업적을 남겼는데, 교육과정 상에서는 천동설을 주장한 인물로만 언급하고 넘어가나, 경선을 도입한 세계 지도를 그리고 알마게스트를 저술해 천문학적 업적을 남겼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적 업적은 훗날 이슬람 세계에서 연구되어 동아시아로 수출되었고, 원나라 때 곽수경이 수시력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2.4.1.3. 기독교사
유럽 고대사 파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오늘날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된 기독교이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사회, 역사, 도덕 교과목에서는 기독교를 일괄적으로 '크리스트교'라고 부르고 있으나, 기독교라는 표현이 대중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므로 본문에서는 기독교로 칭하기로 한다.

기독교도들의 주장을 배제하고 지극히 보편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독교는 유대교의 영향을 강력히 받아 1세기 초에 창시된 종교이다. 1단원의 이스라엘 왕국(헤브라이)과 함께 언급되는 유대교는 이스라엘이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왕조, 헬레니즘 제국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유대인만이 구원받는다는 교리 때문에 보편화될 수가 없었다. 이러던 와중 기원전 4년 또는 기원전 3년 예수가 출생[36]했다. 그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30년경에 십자가형을 당해 사망했으나 그의 가르침은 보편종교로서의 성향을 띄며 널리 퍼져나갔다.[37]

이렇게 퍼져나간 기독교의 신자들은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부했고, 결국 네로와 같은 황제들의 탄압을 300년 간 받아왔다. 기독교도들은 카타콤바라는 지하 교회에 숨어 예배를 드리고 신앙을 유지했으며, 4세기 초에 들어서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도들의 수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1세 313년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를 믿을 자유를 보장했다. 이후 아리우스파와 같은 이단들이 활개치자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한 아리우스파를 파문하고 삼위일체를 긍정한 아타나시우스파만을 인정했다.[38]

사실 말만 '기독교도 종교 중 하나로 인정한다'였지, 실제로는 황제들의 언행이 거의 대부분 기독교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국교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테오도시우스 1세 때인 391년에는 아예 공식적으로 기독교만을 유일한 종교로 인정하면서, 유럽은 완전히 기독교 사회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방대한 4단원 유럽사 파트의 네 단원 중 '첫 번째' 단원에 불과하다.

2.4.2. 04-02 (유럽 세계의 형성과 변화)

유럽의 중세 역사에 해당하는 부분이지만, 일반적으로 중세 시대라 일컫는 476년부터 1453년까지는 아니며, 서로마의 멸망 이전 게르만족 훈족의 침입부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까지 다룬다.
2.4.2.1. 게르만족의 유입
고대사를 그리스인과 라틴족이 주도했다면, 중세사부터는 게르만족 슬라브족이 합류하게 된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슬라브족의 비중이 동로마 제국 역사에 딸려나오는 수준으로 크게 감소했기 때문에 게르만족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지금의 발트 일대에서[39] 독일, 북유럽, 브리튼 섬, 그리고 로마 제국 영내로 진입한 게르만 족은 오랜 기간동안 로마인과 공존하면서 로마의 콜로누스에서 경작하거나 용병 활동을 했다.

4세기부터 훈족[40] 아틸라 등이 침입해오면서 로마에서 사회 혼란을 일으켰고, 게르만족 또한 훈족을 피해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점거했다.[41]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키며 서로마는 476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42]
2.4.2.1.1. 프랑크 왕국
게르만 민족이 세운 수많은 나라들 중에서도 교육과정에서 제일 중요하게 다뤄지면서 유럽 역사에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오늘날 독일 프랑스의 조상이 되는 프랑크 왕국( 481년 ~ 843년[43])이다. 교과서상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프랑크 왕국의 지도자는 메로베우스 왕조 클로비스 1세, 메로베우스 왕가에서 봉사하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과 그 아들이자 카롤루스 왕조의 첫 군주인 피핀 3세, 피핀의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 이렇게 4명이다.

갈리아 북부에서 프랑크 왕국을 처음 세운 인물은 클로비스 1세( 481년 ~ 511년 재위)이다. 로마 교회에서 공인하던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여 게르만 문화권에도 가톨릭이 받아들여졌다.[44] 이후 프랑크족 특유의 토지 상속 때문에 분열이 여러 번 일어났고, 8세기에 접어들면 왕좌가 비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때 왕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권한대행을 했던 인물이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아우스트라시아 궁재 715년 ~ 741년, 국왕 권한대행 737년 ~ 741년)이다. 732년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와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의 아키텐 지역까지 쳐들어오자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군의 진격을 막아낸 바 있다.

이후 실권을 잡은 인물은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국왕 751년 ~ 768년)이다. 그는 왕위를 찬탈하고 싶었고, 이에 교황을 끌어들인다는 발상을 해서 751년 자카리아 교황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았다.[45] 이후 롬바르드족(랑고바르드족)이 교황의 세력을 공격하자 피핀 3세가 이들을 격퇴하고 교황에게 이탈리아 중부를 기증해 교황령을 세웠다.[46]

프랑크 왕국에서 제일 중요한 카롤루스 대제[47]( 768년 ~ 814년 재위)는 피핀 3세의 아들로, 교과서에서는 궁정 학교를 세워 카롤루스 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키고, 서로마의 고토를 수복하고 영토를 추가로 확장한 것과[48], 800년에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은 것이 주된 업적으로 나온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상속 문제에 따른 내부 분열로 843년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어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이 세워졌으며, 870년 메르센 조약을 통해 중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가 나누어 가졌다. 교육과정에서는 서프랑크 왕국 프랑스로, 중프랑크 왕국 이탈리아로, 동프랑크 왕국 독일로 발전한다는 언급을 끝으로 프랑크 왕국의 역사를 마무리한다.[49]
2.4.2.1.2. 노르만족
수능에는 거의 출제되지 않으나 엄연히 교과 상에 있는 내용이다. 흔히 말하는 바이킹이 노르만 족에 해당하며, 9세기 후반부터 대서양, 발트해, 북해, 지중해 등을 돌아다니며 많은 나라를 파괴했다.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노르만 왕조를 세웠으며, 프랑스에서는 봉신국인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지중해로 쳐들어가 시칠리아를 장악했으며, 발트 해로 진입해 노브고로드 공국 키예프 루스[50]을 세웠다. 이렇게 유럽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노르만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닿고 있다.[51]
2.4.2.2. 봉건제
중세의 역사를 언급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훗날 칼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유럽의 경제적 역사 구분인 원시 공산주의-고대 노예제-중세 농노제-근대 자본주의-혁명의 순서에서 중세 농노제에 해당하는 시대에 바로 이 봉건제가 시행된 것이다.

그리고 교육과정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동양의 봉건제와 서양의 봉건제는 이름만 같고 완전히 다른 제도라는 것이다. 서양의 Feudal System을 동양 주나라의 봉건제와 일대일 대응시켜서 19세기 일본의 메이지 유신 때 봉건제로 번역한 것이 그 시초이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왕과 같은 혈통의 사람들을 지방에 임명하는 것이지만 서양의 Feudal System은 봉신이 왕에게 '내가 원래부터 다스리던 땅을 줄 테니 나를 이 땅의 주인으로 인정해라' 격의 제안을 하며 형성되었고, 생판 모르는 남이라도 봉신으로 임명하고 왕 또한 봉신에게 계약을 철저히 지켜야 했다.

교육과정에서 설명하는 봉건제의 탄생 배경은, 노르만족 마자르족, 슬라브족, 이슬람 제국의 침입 등으로 중앙 정부의 능력이 약해지자 지방 세력이 스스로 국방을 책임져야 했고, 이 과정에서 기사 계급이 성장해 왕과 쌍무적 계약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설이다.

군주가 봉신에게 봉토를 수여하고[52] 봉신을 보호하는 대신 봉신은 군주를 군사적으로 보호하거나, 전쟁에서 군주가 사로잡혔을 때 포로에 대한 몸값을 지불하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왕조 및 국가로는 프랑스의 카페 왕조와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 영국의 노르만 왕조 등이 있다.

세계사 과목을 정상적으로 이수했다면 장원의 구조와 경작 방식은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땅을 세 개로 나누어 하나는 봄에, 하나는 가을에, 다른 하나는 쉬게 하며 돌아가서 경작하는 삼포제 또한 이미 유명하다. 농노들은 이동권에 제한이 있었고 영주가 경영하는 시설만을 사용하고 돈을 내야 했으나 노예와 달리 결혼을 하고 가정을 형성하며 약간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2.4.2.3. 중세 초기 기독교사
4세기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지중해의 기독교 교구는 이탈리아의 로마, 그리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크, 그리고 기독교가 발원한 성지 예루살렘 이렇게 5개가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제국이 나타나 예루살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53]를 모두 정복해버리면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만이 남게 되었다. 로마 교구는 프랑크 왕국의 보호 아래서 가톨릭으로 발전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 교구는 로마 황제가 지도하는[54] 정교회로 발전했다.

726년 동로마 제국 레온 3세 성상 파괴주의(Εἰκονομαχία)를 내세우면서 신성을 묘사한 상들을 파괴하는 운동을 벌였다.[55] 이후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서로의 사절을 추방하면서 동서 대분열이 일어난 것으로 교육과정에서는 가르치고 있다.[56]

가톨릭에서는 교황-대주교-주교-사제 순서로 이어지는 계급이 형성되었다. 어느덧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권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교회가 세속화되자 클뤼니 수도원 등에서 교회 개혁의 시도가 일어났는데, 이곳 출신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성직자의 임명권을 두고 다투었다. 결국 1077년 교황이 황제를 파문해버리는 지경에 이르러 황제가 직접 카노사 성에 찾아가 교황에게 파문의 철회를 요청하는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일어났다.[57] 십자군 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인노첸시오 3세( 1198년 ~ 1216년 재위) 때에는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2.4.2.4. 중세 문화
유럽의 문화는 헬레니즘 헤브라이즘의 결합이라고 불리는데, 헬레니즘이 유럽의 고대와 르네상스 이후를 상징한다면 중세의 문화는 헤브라이즘 즉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기독교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2015 교육과정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교부 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 스콜라 철학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 가끔씩 논리학과 관련해서 오컴의 면도날을 주장한 윌리엄 오컴이 언급되기도 한다.

12세기부터는 이슬람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역수출되면서 대학이 등장했는데, 1088년 세워진 볼로냐 대학이 최초로 여겨지고, 현재는 파리 제1대학교 팡테옹 소르본이 된 파리 대학교 1257년에 개교했다.[58] 옥스퍼드 대학교는 정확한 개교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11세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학의 경우 아서왕 전설과 같은 작품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건축 분야에서는 바실리카 양식을 계승한 로마네스크, 아치, 두꺼운 벽 및 좁은 창문의 양식을 띠며 11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12세기에는 고딕이 등장해 스테인드글라스를 창문에 도입했다.
2.4.2.5. 동로마 제국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동로마 제국에 대해 시종일관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대중적으로는 비잔티움이라는 명칭이 가장 유명하고, 실제로 당대에 로마 제국 스스로를 비잔티움, 비잔티온이라고 칭한 사례도 여럿 발견되었으나, 로마 제국과의 연속성이 강조되지 않아 마치 고대의 로마 제국과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효과를 준다. 당연히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과 별개의 나라가 절대 아니며 엄연히 로마 제국(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이라는 국명을 사용했다. 중세 로마의 민중들은 스스로를 로마니아(Ῥωμανία)라고 불렀다.

최근에는 많이 줄었으나, 7세기 이라클리오스 황제 때 군대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꾼 것을 교과서에서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 '공용어가 라틴어이던 시절이 로마 제국, 그리스어이던 시절은 비잔티움 제국' 이라는 인식을 학생들에게 심어왔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탄생하기 이전부터 계속 그리스어권이었고, 법적 공용어가 라틴어이든 그리스어이든 일상에서는 계속 그리스어만을 사용해왔다. 그러므로 공용어의 변화를 가지고 로마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하튼, 교육과정에서 설명하는 동로마 제국의 특징은 황제가 교회의 실질적 수장 역할을 하는 황제 교황주의가 있다. 다만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겸임했다는 것은 아니고 총대주교의 권력을 넘어설 정도로 정교회를 이끌었다는 뜻인데, "교황" 이라는 이름이 붙다 보니 가톨릭 뿐 아니라 동방 정교회에도 교황이 있었냐거나 황제가 정교회의 수장을 겸했냐거나 하는 오해를 하기 십상이다.

6세기에 활동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벌여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카르타고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심지어 지브롤터 해협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했다. 교육과정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라고 부르는 로마법 대전이 편찬되었고, 성 소피아 대성당도 이때 건축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공격이 심해지자 드넓은 영토를 잃고 아프리카와 레반트를 빼앗기고 그리스 및 아나톨리아 반도만이 남게 되었다. 이를 방비하기 위해 테마 제도를 실시했는데, 교육과정에서는 군관구제 및 둔전병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름 그대로 전국을 여러 개의 군관구로 나누어[59], 군사령관을 군관구에 배속시켜 다스리게 한 것이다. 또한 군과 농업을 통합한 둔전을 설치했다.

11세기에는 셀주크 제국의 침입을 받아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빼앗기고, 1204년에는 제4차 십자군이 침입해서 동로마 제국을 잠시 멸망시켰다. 1261년에 동로마가 다시 부활하지만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된다.

비잔틴 문화라고도 부르는 동로마 제국의 문화는 유럽의 다른 문화들처럼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결합되어 있었는데, 헬레니즘이 단절됐던 서유럽과 다르게 헬레니즘을 직접 계승한 동로마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사료들이 많이 보존되어 훗날 일어날 르네상스에 많은 영향을 줬다. 로마 제국의 계승자답게 판테온에서 의 아이디어를 따 왔고 비잔틴 미술에서는 모자이크를 적극 활용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슬라브족에 관한 내용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동로마 제국의 문화 파트에서 딸려 나오는 챕터 정도로 격하되었다. 이들은 유럽 동북부에 거주하다가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동로마 제국에서 개발된 키릴 문자[60]를 받아들이고 정교회를 믿기 시작했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나라가 키예프 루스로, 수도인 키이우(키예프)에도 성 소피아 대성당이 존재한다.
2.4.2.6. 중세 사회 붕괴
일반적인 중세의 종료 시점은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3년이나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1488년 또는 1492년을 꼽으나,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까지 하나의 중세 단원으로 포함시켰다. 1492년 이후의 대항해시대 전개상은 또 근세사로 묶어서 분류한다.

2015 교육과정에서는 중세가 끝나고 근세로 넘어가는 중세 붕괴 과정을 1095년 십자군 전쟁부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까지의 550년간의 기간으로 보고 가르친다.
2.4.2.6.1. 십자군
중세 사회가 붕괴하고 교황의 권위를 추락하게 만든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이 기독교 vs 이슬람의 구도로만 이루어졌다느니, 제국주의의 시발점이라느니, 기독교가 일방적으로 죄 없는 이슬람을 괴롭혔다느니 하는, 지금은 대부분 반박되고 사학계에서 발도 들일 수 없는 잘못된 관점들이 여전히 대중들 사이에서 만연하지만, 다행히도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같은 기독교 세력끼리도 싸웠다는 가장 큰 증거인 제4차 십자군을 언급하고 넘어가면서 최대한 일반적인 관점으로 십자군을 서술하고 있다.

2015 교육과정에서는 십자군 전쟁의 배경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 번째는 삼포제의 성공과 이에 따른 도시의 성장, 대외 팽창을 위한 욕구이며[61], 두 번째는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교황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무작정 성지 탈환에 미쳐서 십자군을 보냈다는 구시대적인 관점은 최대한 지양하고 있고, 오히려 성지 탈환은 명분일 뿐이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간다.

일반적으로 십자군 전쟁은 9~10차례에 걸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교육과정에서는 가장 중요한 제1차 십자군 원정 제4차 십자군 원정만을 선정해서 가르친다. 이에 따라 대중들에게 살라흐 앗 딘 vs 프리드리히 1세, 리처드 1세, 필리프 2세의 대결로 유명한 제3차 십자군 원정도 배제되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1095년 교황의 성지 탈환 선포인 클레르몽 공의회를 계기로 1096년부터 1099년까지 진행되었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에 성공하여 예루살렘 왕국이 수립되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1202년부터 1204년까지 벌어졌는데, 실제로는 예루살렘 왕국 동로마 제국, 교황,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 수많은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엮여서 벌어진 사건이었으나, 지나치게 복잡하므로 교육과정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농간을 벌여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사건으로 소개한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잠시 멸망했고, 라틴 제국이 수립되었다.[62]

결국 1291년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 아크레를 잃었고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마무리되었다.[63]

교육과정 상에서는 십자군 전쟁의 종료와 함께 크게 4가지의 영향이 있었다. 먼저 교황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교황의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고, 두 번째로 전쟁의 여파로 영주들이 몰락하면서 봉건제 농노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국왕의 권위가 강력해진 것이었다. 이는 절대왕정의 출현에도 간접적 영향을 끼쳤다. 세 번째로는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이슬람 세력과 싸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교류도 잦아서 지중해 무역 체제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로마 및 이슬람과의 문화 교류로 인해 동방의 선진 철학이 유럽으로 전해져서 르네상스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2.4.2.6.2. 장원 체제 붕괴, 도시 등장
도시는 11세기부터 성장하고 있었으나 앞서 설명한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무역이 확대되면서 규모가 커졌다. 영주들의 지배에서 벗어난 도시에는 자유를 얻은 도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탈리아반도에는 제노바, 피렌체, 피사, 밀라노, 그리고 베네치아가 대성장을 이루었고, 지중해 무역에서 큰 이익을 챙겼다. 동로마 제국을 침략한 제4차 십자군 원정도 도시로서 성장한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일어났다. 북독일- 북해- 발트해의 무역도 성장했는데, 함부르크 뤼베크 등이 결성한 한자동맹(die Hanse)이 결성되었다.[64] 프랑스의 샹파뉴 지방에서는 지중해 교역권과 북유럽 교역권을 잇는 정기 시장이 발생했다. 지금의 벨기에 북부가 된 플란데런(플랑드르)에서는 면직물 산업이 발전했는데, 이는 백년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은 오늘날에는 게임으로 더 잘 알려져있는 길드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교육과정에서는 길드의 목적을 1. 회원의 공동 이익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며 2. 도시의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3. 상업 독점권을 얻으며 4. 도시의 행정을 이끌며 5. 직업에 따라서 결성된 것으로 가르친다. 이 중에서도 수공업자 길드는 장인(master)이 도제(apprentice)를 가르쳐 직인으로 성장시키고, masterpiece를 만들어내면 길드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도시가 성장하면서 기존의 장원 제도는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장원제 및 농노제의 해체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은 1346년부터 1353년까지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행한 중세 흑사병이었다. 14세기 중세 흑사병의 발원지로는 몽골 제국, 북아프리카, 인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유럽 인구의 1/3과 전 세계 인구의 20%를 없애버린 중세 흑사병으로 인해 노동력이 사라져버렸고 농노의 노동력은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농노의 지위도 올라갔고, 아예 농노에서 시민으로 전직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따른 반동으로 일부 영주들이 가혹한 통치를 벌였고, 이에 대한 반발로 여러 농민의 난이 일어났는데, 2015 교육과정에서는 백년전쟁 도중에 발생한 자크리의 난 와트 타일러의 난이 소개되어 있다. 실제 원인은 영주들의 가혹한 통치보다는 백년전쟁의 전개와 관련이 더 깊으나, 본 교육과정에서는 일단 장원제-농노제 해체 과정과 엮어서 설명하고 있다.
2.4.2.6.3. 중세 후기 기독교사
십자군 전쟁 종료 이후 교황의 권력은 계속 추락했다. 반대로 세속 군주들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의 국왕 필리프 4세( 1285년 ~ 1314년 재위)는 성직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으려는 시도를 보였고, 교황청에서는 이에 반발했고 보니파시오 8세는 성직자세를 내는 성직자들을 파문하는 등의 대응을 했다. 그는 마침내 필리프 4세까지 파문하려는 시도를 보였으나, 필리프 4세가 선수를 쳐서 보니파시오 8세를 납치해 폭행했다. 이후 교황청을 1309년 아비뇽으로 옮기는 아비뇽 유수[65] 사건이 발생했다.

내신 시험이나 수능에서 자주 물어보는 것이 백년 전쟁과 아비뇽 유수 간의 관계이다. 아비뇽 유수 기간은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이므로 40년 간 겹치는 기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난 1077년 보름스 협약이 체결된 1122년 사이에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와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

교황은 1377년이 되어서야 로마로 복귀했으나 1378년 프랑스에서 대립교황이 세워져 하나의 유럽 문화권에 두 명의 교황이 생기는 서방교회 대분열이 발생했다.[66]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가 소집되어 기존의 대립교황들을 모두 부정한 뒤, 1415년에 종교 개혁을 시도한 얀 후스를 화형하고 존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단죄한 뒤, 1417년이 되어서야 대분열은 종료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8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2.4.2.6.4. 잉글랜드 왕국
영국이 자리잡은 브리튼 섬 켈트족이 자리잡던 곳으로, 43년에 브리타니아 속주( 로만 브리튼)가 되었으나 410년 서로마 제국 군대가 브리튼에서 철수하고 앵글로색슨 7왕국이 세워졌다. 이들 중 웨식스가 잉글랜드를 통일하고 927년 잉글랜드 왕국을 건국했다.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 윌리엄 1세( 1066년 ~ 1087년 재위)가 승리하면서 노르만 왕조가 들어섰다. 그는 영국에서 봉건제를 실시했고 1086년에 인구를 조사해 둠즈데이 북을 편찬했다.

영국에서 왕조가 여러 번 바뀐 이후 존 왕( 1199년 ~ 1216년 재위)이 즉위했으나, 무능한 통치를 벌이며 무리하게 프랑스를 침입했다가 격퇴당했고, 결국 1215년 귀족들에게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할 것을 강요받는다. 교육과정에서는 번역명인 대헌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마그나 카르타는 영국의 왕권을 약화시켜 의회민주주의의 탄생에 기여했다.[67]

1337년에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며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 과정에서 흑사병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도 했고,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벌어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15세기 초 프랑스를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으나 잔 다르크에게 격퇴당하고 1453년에 전쟁은 종료되었다.

1455년에는 랭커스터 왕조 요크 왕조 사이에서 장미 전쟁이 벌어졌다.[68] 1485년까지 30년 간 진행되었으며, 헨리 7세가 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를 개창하면서 영국은 중세를 끝마치고 절대왕정 시대에 접어들었다.
2.4.2.6.5. 프랑스 왕국
프랑스는 프랑크 왕국에서 갈라져나온 국가로,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형성된 서프랑크 왕국이 그 전신이다. 서프랑크 왕국과 프랑스 왕국은 동일한 국가이며, 카롤루스 왕조가 다스리던 시기를 서프랑크 왕국으로, 987년 위그 카페( 987년 ~ 996년 재위)가 카페 왕조( 987년 ~ 1328년)를 개창한 이후부터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왕정이 폐지되는 1792년까지를 프랑스 왕국이라고 부른다.

카페 왕조가 수립된 이후에는 봉건제를 받아들여 왕권이 미약했다. 그러다가 존엄왕(Auguste) 필리프 2세( 1180년 ~ 1223년 재위)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앙주 가문을 막아내고 프랑스의 중앙집권을 이끌었다. 필리프 4세( 1285년 ~ 1314년 재위) 때는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로 대립하던 교황을 제압하고 1309년 아비뇽 유수가 일어났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1302년에 교황을 견제하기 위해 소집한 것이 삼부회의 시초로, 훗날 프랑스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필리프 6세( 1328년 ~ 1350년 재위)가 즉위하며 카페 왕조의 방계인 발루아 왕조( 1328년 ~ 1589년)가 들어섰다. 왕위 계승 관련 문제 및 플랑드르의 지배권 문제로 에드워드 3세와 대립했는데, 이에 따라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 또한 흑사병에 휘말렸으며 1358년에는 자크리의 난이 발생했다. 15세기 초에는 영국의 공세로 인해 위기에 처했으나, 잔 다르크라는 영웅이 나타나 영국군을 격퇴했다. 이후 샤를 7세( 1422년 ~ 1461년 재위)가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16세기부터 프랑스는 종교 개혁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맞이하게 된다.
2.4.2.6.6.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은 2015 개정 교육과정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로, 신성 로마 제국이 형성되는 과정은 거의 생략하고 갑툭튀급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언급하다 보니 이 나라가 왜 등장하는 건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의 형성 과정을 먼저 설명하고 교육과정의 내용을 이어서 소개하기로 한다.

오늘날의 독일에 해당하는 신성 로마 제국(제1제국)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프랑크 왕국을 그 전신으로 둔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국이 갈라져나오고, 10세기 카롤루스 왕조가 끊기고 하인리히 1세( 919년 ~ 936년 재위) 대에 오토 왕조가 들어서면서 독일 왕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음 국왕인 오토 1세( 936년 ~ 973년 재위)는 955년 레히펠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영토를 넓혔고, 962년에는 교황에게서 서로마 황제로 인정받으면서 카롤루스 대제가 물려받았던 서로마 황제의 정통성은 독일의 오토 1세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독일이 서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하여 '신성 로마 제국'이 된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들이 황제를 뽑았다. 1254년부터 1273년까지는 황위가 비는 대공위시대가 일어났다. 1356년에는 금인 칙서가 반포되면서 교황의 간섭은 줄어들었으나 선제후의 권위는 올라갔고, 황제의 권력 또한 줄어들었다. 즉 신성 로마 제국은 이때부터 명목상의 국가가 되고 실질적으로는 제후국들이 난립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 또한 16세기부터 종교 개혁의 혼란을 겪게 된다.
2.4.2.6.7. 이탈리아, 이베리아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는 너무 복잡하여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다만 북쪽에서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이 활동했으며, 중부에는 교황령이 있었고, 남부에는 나폴리 왕국이 있었다는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

이베리아 반도는 원래 서고트 왕국이 지배했으나 우마이야 왕조의 침입으로 이슬람화되었다.[69] 우마이야 왕조가 아바스 왕조에 의해 750년 멸망하자 756년 아브드 알 라흐만 1세 후우마이야 왕조(코르도바 아미르국)를 세웠다. 아스투리아스를 시작으로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갈리시아 왕국, 포르투갈 왕국 등의 기독교 왕국이 세워지며 이슬람의 지배에 저항했고, 이것을 레콩키스타(Reconquista) 또는 교육과정 용어로 재정복 운동이라고 한다.

재정복 운동은 무려 700년 이상 진행되었고, 마지막 이슬람 세력인 나스르 왕조(그라나다 아미르국)가 1492년 카스티야 연합왕국에게 정복당하며 끝났다. 같은 해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결혼 동맹을 맺으면서 통일된 에스파냐 왕국으로 거듭났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에스파냐에 합류하지 않은 나라는 포르투갈이 유일했다.[70]
2.4.2.7. 르네상스
흔히 르네상스라고 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같은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르네상스의 극히 일부일 뿐이며, 기독교를 필두로 한 유일신 사상 헤브라이즘이 지배하던 중세 사회의 한계를 이겨내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필두로 한 헬레니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인간을 우선시하는 인문주의적 문화를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Renaissance는 프랑스어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71]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르네상스를 지역별로 나누어, 르네상스의 시초가 된 14세기~ 15세기 이탈리아반도와, 16세기 알프스산맥 이북으로 구분하고 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곳은 14세기 이탈리아반도로, 고대 로마가 발원한 장소였던데다가 동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 이후 많은 학자들이 유입된 장소였다. 또한 지중해 무역이 발전해 문화 발전이 이루어졌다. 기독교 외의 인간과 관련된 것에도 신경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자 이탈리아에서 인문학이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72]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최초의 인문주의자이자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불리는 인물로, 교과서에서는 라틴어 고전 연구에 대한 업적을 조명하고 있다.[73] 교과서에서는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이 소개되며 현재 교육과정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단테 알리기에리가 쓴 신곡도 큰 인기를 끌었다.

제일 유명한 그림 분야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가 활동했다. 건축물로는 오늘날 바티칸 시국에 위치한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졌는데, 이것을 짓는 과정에서 면벌부를 파는 바람에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을 유도하기도 했다.

알프스 이북 르네상스는 교회 비판 위주로, 에라스뮈스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 등이 있다.[74] 브뤼헐과 반 에이크 형제가 미술 분야에서 활약했고 문학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많은 작품을 남김과 동시에 상당수의 영어 관용 표현을 만들어냈다. 피레네 이남의 에스파냐에서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를 발표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과학도 발전했다. 과학 하면 학교에서 배우는 자연과학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으나, 과학은 의심과 관찰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는 근대의 과학 혁명의 발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술도 유입되었는데, 중국에서 넘어온 화약 나침반 대항해시대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인쇄술을 개발[75]하여 기존에는 귀족들만 읽고 쓸 수 있던 글을 일반인들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고위층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하층민들의 언어로 여겨지던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성경을 편찬할 수 있게 되어 시민들의 지식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2.4.2.8. 종교 개혁
16세기 교황령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면벌부를 판매하는 행위에 분노한 마르틴 루터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해 개신교로 떨어져나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면벌부라는 용어에 대해서 대사부, 면죄부, 면벌부 중 어느 것이 맞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고, 2000년대의 교육과정까지는 면죄부를 사용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면벌부로 교체되어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면벌부라는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 면죄부/명칭 논란은 Indulgence에 대한 번역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고, 국립국어원에서는 대사부, 면벌부, 면죄부 세 단어를 모두 표제어로 인정하고 있다.

루터의 개신교가 확산되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1555년 드디어 루터 개신교가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것이 절대 아니며, 공국이나 왕국이 가톨릭이나 개신교 중 하나를 선택하면 국민들이 모두 그에 따라가야 하는 체제였다. 스위스의 장 칼뱅은 예정설을 내세우고 자신의 할 일을 충실히 다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당시 상업으로 성장하던 부르주아층에게 받아들여졌다.

여기까지는 개신교 이야기였고, 영국에서는 헨리 7세의 아들 헨리 8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가톨릭 세력의 반대가 있자 1534년 수장령을 발표해 대륙의 간섭을 차단하며 잉글랜드 국교회( 성공회)가 만들어졌다.[76]

그렇게 어찌저찌 해서 새로운 아내로 앤 불린을 맞이했으나 또 아들을 낳지 못하고 을 낳는 바람에 이혼당했다. 그런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 딸이 바로 잉글랜드 식민 제국의 시작을 알린 엘리자베스 1세였다.[77] 엘리자베스 1세 이후의 영국사는 절대왕정 파트에서 이어서 나온다.

발루아 왕조 치하의 프랑스 왕국도 종교 개혁의 여파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프랑스 지역의 신교도들을 위그노라고 부른다. 이들은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에서 강력한 탄압을 받았으며, 1562년에는 위그노 전쟁으로 번졌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과 같은 살육이 프랑스에서 벌어졌다.[78] 결국 부르봉 왕조[79]( 1589년 ~ 1792년, 1815년 ~ 1830년)의 첫 국왕 앙리 4세( 1589년 ~ 1610년 재위)가 위그노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는 낭트 칙령 1598년에 발표하면서 마무리된다. 그러나 낭트 칙령은 1685년 루이 14세에 의해 폐지되고 만다.

종교 개혁의 여파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다. 1618년 가톨릭 세력과 신교도 세력 간의 충돌로 30년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80]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30년 전쟁은 종료되었다. 교육과정에서 언급되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내용은 칼뱅 파에 대한 인정, 네덜란드 공화국 스위스의 독립에 대한 인정, 신성 로마 제국 영방 국가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81]

여기까지가 세계사 4단원의 절반이다.

2.4.3. 04-03 (신항로 개척과 절대 왕정)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전개된 대항해시대에 대해서 신항로 개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대항해시대라는 용어가 '서양인에게 대항해시대이지 원주민들에게는 폭압과 착취의 역사였다'라고 비판받으면서 중립적인 시각을 나타내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용어는 대항해시대이므로 하단에서는 대항해시대라는 용어로 일괄적으로 서술하였다.
2.4.3.1. 대항해시대
2.4.3.1.1. 배경
원인으로는 4가지를 꼽는다.
2.4.3.1.2. 주도 인물
대항해시대를 이끈 인물들은 수없이 많지만, 교과서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각각 2명씩 총 4명을 다룬다.
2.4.3.1.3. 영향
이와 같은 항로 개척을 통해 지중해무역이 쇠퇴하고 대서양 무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가격 혁명으로 물가가 크게 올랐고, 동인도 회사가 등장했으며, 상업이 대성장하는 상업혁명이 일어나 경제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85] 항해하는 행위 자체가 큰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보호하기 위해 보험이 등장했고, 리스크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며 금융 분야도 성장했다.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대발견된 이 동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은본위제도가 전세계적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대서양 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8세기부터 이슬람 세력에 의해 주도되던 노예 무역이 유럽인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전염병이나 유럽인의 학살로 인구가 크게 줄었고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로 넘어와 혼혈들이 탄생했다.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단일경작이 이루어져 생태계가 파괴되기도 했다.
2.4.3.2. 아메리카사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역사를 크게 축소해서 아메리카사는 유럽 역사에서 딸려 나오는 개념이 되었다. 교과서에서는 마야 문명, 아즈텍 제국, 잉카 제국만을 다룬다. 정복자인 콩키스타도르의 경우 용어는 나오지 않고 해당하는 인물 두 명이 나온다.
2.4.3.2.1. 마야
마야 문명 제1천년기에 번성한 멕시코~유카탄반도 지역의 문명으로 20진법을 사용하고 그림 문자와 달력[86]을 만들었으며 치첸이트사라고 불리는 피라미드를 건축했다. 그러나 15세기 즈음에 멸망했다. 특이하게도 마야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당도했을 때 이미 멸망해있었다.
2.4.3.2.2. 아스테카 (아즈텍)
아즈텍 제국은 마야와 비슷하게 멕시코 일대에서 발전한 문명이다. 수도는 오늘날 멕시코시티 자리에 있는 테노치티틀란이라는 계획도시로, 그림 문자와 달력, 피라미드를 지었다. 그러나 에르난 코르테스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2.4.3.2.3. 잉카
잉카 제국은 위의 문명들과 관련이 없는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의 쿠스코에서 지어진 문명이다. 키푸라는 새끼줄 매듭으로 기록을 했으며, 산맥에 있는지라 계단식 밭이 발달했다. 건축, 금 세공업, 직물업, 도로가 발달했으나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멸망당했다. 이 과정에서 지어진 유적이 마추픽추이다.
2.4.3.3. 서유럽 절대 왕정
교황, 귀족의 권력이 약해지고 시민과 왕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근세 시대에는 어용 학자들이 내세운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절대왕정을 이룩했다. 교과서에서는 중세 봉건제와 근대 국민국가의 과도기 단계라고 보고 있다. 봉건세력과 시민세력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관료제가 확립되고 상비군이 유지되며 지탱되었고, 사상적으로는 왕권신수설을 설파하는 학자들이 있었다.[87] 경제적으로는 상업 혁명에 뒤따라 발생한 중상주의 자유방임주의 등장 이전까지 존재했다.

서유럽의 절대 왕정은 서유럽에서 봉건제가 빨리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이 상대적으로 강한 경향을 보인다. 교과서에서는 스페인, 영국, 프랑스 이렇게 세 나라를 꼽는다.
2.4.3.3.1. 에스파냐 왕국 ( 압스부르고 왕조)
에스파냐(스페인)의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인물은 펠리페 2세( 1556년 ~ 1598년 재위)이다. 절대왕정의 시초로 여겨지며 중남미와 필리핀에 달하는 거대한 식민 제국인 스페인 제국을 이루었다. 1571년 발발한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했으나 경제적으로 성장하던 네덜란드에서 신교가 유행하자 이를 탄압했고, 결국 1568년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일어나게 만드는 실책도 벌였다.[88]
2.4.3.3.2. 잉글랜드 왕국
헨리 8세( 1509년 ~ 1547년 재위)가 수장령을 선포하고 해군을 강화해 영국의 독자성과 왕권을 강화한 데에 이어, 딸인 엘리자베스 1세( 1558년 ~ 1603년 재위) 때에는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다. 대표 업적으로는 1559년 통일령을 반포해 성공회를 확립하고, 1588년 펠리페 2세 시대의 에스파냐와 싸워 이겨 무적함대를 박살낸 바 있다. 1600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고,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민들이 빈민으로 몰락하자 빈민 구제법을 시행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즉위한 인물이 스튜어트 왕조의 개창자 제임스 1세( 1603년 ~ 1625년)인데, 여기서부터는 시민 혁명 파트에서 다뤄진다.
2.4.3.3.3. 프랑스 왕국 ( 부르봉 왕조)
프랑스의 절대 왕정을 상징하는 인물은 루이 14세( 1643년 ~ 1715년 재위)이다.[89] 그의 재위기간은 무려 72년으로, 유럽의 '국왕' 중에서는 그보다 더 오래 재위한 인물이 없다.[90]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중용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것이 대표 업적이며, 태양왕과 '짐이 곧 국가다'에 대한 일화도 교육과정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계로는 지나치게 전쟁을 많이 해서 국고가 거덜날 지경에 이른 것과, 낭트 칙령 1685년에 폐지함으로서 상공업에 종사하던 위그노들을 해외로 유출시켰다는 것이 교과서상의 서술이다.[91]
2.4.3.4. 동유럽 절대 왕정
동유럽은 서유럽보다 사회 발전이 늦어 농노제도 유지되었고, 봉건제가 늦으면 19세기까지도 유지되었기 때문에 절대 왕정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늦게 일어났다는 것이 특징으로 꼽힌다. 귀족들이 장교로서 권력을 유지했고, 17세기~ 18세기에 유행했기 때문에 계몽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다만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동유럽은 우리가 생각하는 동유럽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훗날의 독일)을 포함하기 때문에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다.
2.4.3.4.1. 오스트리아 대공국 (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트리아는 자주 언급되지는 않으며, 요제프 2세 때 개혁을 시도했던 일화 정도가 언급된다.[92]
2.4.3.4.2.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와 함께 동유럽 절대왕정 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다.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의 성립 이후 3번째 국왕으로 즉위한 프리드리히 2세( 1740년 ~ 1786년 재위)가 제일 많이 언급된다. 계몽전제군주로서 '짐은 국가의 첫 번째 심부름꾼이다'라고 말한 일화도 가르친다. 상수시 궁전을 건축했고 1740년부터 1748년까지 벌어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56년부터 1763년까지 벌어진 7년 전쟁에 참전해 슐레지엔을 차지했다. 1772년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러시아 제국과 함께 제1차 폴란드 분할을 주도했다.[93]
2.4.3.4.3. 러시아 제국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러시아사가 상당히 축소되어, 키예프 루스의 멸망 이후부터는 계속 언급이 없다가 표트르 1세에 가서야 러시아가 다시 언급된다.[94] 그럼에도 러시아는 여전히 절대왕정 개념에서 2명의 군주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표트르 1세( 1682년 ~ 1725년 재위)는 러시아 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군주이다.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지었으며, 1700년부터 1721년까지 스웨덴 제국과 벌인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해 발트 해를 장악했고, 혁명 이후 레닌그라드로도 불리는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가 건설되어 러시아 제국의 새 수도가 되었다. 서양화 정책을 통해 유럽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예카테리나 2세( 1762년 ~ 1796년 재위) 또한 절대왕정의 상징적인 인물이다.[95] 그녀는 농노제를 오히려 강화해 백성들의 불만을 샀고, 1~3차 폴란드 분할에 모두 참여함으로서 영토를 확장했다.[96]

2.4.4. 04-04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

여기서부터는 유럽의 근대사로 넘어가서, 16세기~ 17세기 유럽의 과학 혁명부터 19세기 후반 민족 국가가 형성되고 산업 혁명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이렇게 4단원을 마무리하고 나서 5단원부터는 전 세계의 1945년까지의 근대사로 넘어가게 된다.
2.4.4.1. 과학 혁명
4-4단원의 첫 파트를 장식한다. 말 그대로 과학 혁명에 관해 다루고 있다. 배경으로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고안한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유럽인의 학문적 성장, 르네상스를 통한 자연과학 발전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추론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6~17세기는 천문학 물리학의 발전 위주로 이루어졌고, 화학이나 생물학은 18~19세기부터 발전하기 때문에 현행 교육과정에서 과학 혁명 파트는 천문학과 물리학을 위주로 소개한다. 화학사 및 생물학사는 19세기 문화 파트에서 등장한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출신 천문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했던 천동설의 주전원설이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보아 이를 단순화해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가 사망하던 1543년에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대화 형식의 책을 발간했다.[97]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요하네스 케플러 케플러의 법칙을 고안하면서 더 탄탄해졌다. 그는 행성의 궤도가 완전한 원형이 아닌 타원형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만들어서 많은 관측 결과를 남겼고 지동설의 증거로 활용했다.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떨어뜨리면 둘 다 동시에 떨어지게 된다는 사고실험을 고안하기도 했다.[98]

아이작 뉴턴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물질 세계가 하나의 기계이고 인간의 이성으로 기계를 파악해야 한다는 우주관을 주장했다. 이외에도 해부학 분야에서 베살리우스가, 혈액의 순환 원리를 하비가 발견했다. 제너는 종두법을 발견해서 천연두의 확산을 막았고, 로버트 보일 보일 법칙을 발견해서 부피와 압력이 반비례함을 밝혀냈다.

이와 같은 과학 혁명은 합리적 생각의 필요성을 강화했으며, 기계론적 세계관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고, 계몽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2.4.4.2. 근대 철학사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 철학 사조는 경험주의 합리주의로 나뉜다.

경험주의 철학은 주로 영국에서 발전했는데, 다수의 예시에서 법칙을 찾아내는 귀납추론을 사용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토마스 홉스, 존 로크, 데이비드 흄이 대표적이다.

합리주의 철학은 유럽 대륙에서 발전했다고 해서 대륙 철학이라고도 불린다. 보편 법칙을 통해 일반 사례들을 만들어내는 연역추론을 활용했다. 르네 데카르트가 저술한 방법서설이 가장 유명하며, 이외에도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등이 있다.

생윤, 윤사, 정법 등등 많은 사회, 도덕과 교육과정에서 등장하는 사회계약설 3인방은 세계사에서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고정 출연한다. 토마스 홉스( 1588년 ~ 1679년)는 리바이어던의 저자이자 절대왕정을 옹호한 인물이지만 왕권신수설에는 비판적이어서 신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악한 본성 때문에 위험한 자연 상태로부터 자연권을 군주에게 양도해서 절대 왕정이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존 로크( 1632년 ~ 1704년)는 인간의 본성은 백지 상태라고 주장하며 권리를 일부 양도하는 사회 계약을 군주와 맺었으며, 군주가 이 권리를 악용할 경우 백성은 저항권을 발동시켜 시민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 등장한 저항권 사상이 명예혁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 자크 루소( 1712년 ~ 1778년)는 권리를 절대 양도할 수 없다고 보았고, 일반 의지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법은 일반 의지를 통해서만 결정할 수 있다는 인민주권을 주장했다. 이는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끼쳤다.[99]

경제학의 시조 애덤 스미스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해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수요와 공급의 원칙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잘 조정할 것이므로 정부의 개입은 자제해야 한다는 자유방임주의 사조를 창시했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많아지고 합리적인 사고가 요구되자 계몽주의가 발전했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처음으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3권이 서로를 견제해야 한다는 삼권분립을 주장했다. '18세기 버전 키보드 워리어'로도 잘 알려진 볼테르는 라이프니츠를 비판하기 위해 소설 캉디드를 저술했으며, 톨레랑스 사상이 정착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드니 디드로[100] 장바티스트 드 롱 달랑베르는 백과사전을 번역하다가 아예 새로운 백과사전을 만들기로 하고 그대로 <백과전서>를 편찬했다. 장 자크 루소 또한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이다.
2.4.4.3. 17~18세기 문화
17세기는 화려하고 복잡한 바로크, 18세기는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 이렇게만 알아둬도 크게 무리는 없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17세기에 활동해서 바로크 음악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활동했다. 문학으로는 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가 있다.
2.4.4.4. 시민 혁명
위의 내용은 내신에서 많이 사용되고 수능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 반면, 시민 혁명 파트는 수능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만큼 꼼꼼한 학습이 필요하다. 내신과 수능을 막론하고 킬러가 빈출되는 파트이기 때문이다.
2.4.4.4.1. 영국 혁명
17세기 중후반에 걸쳐서 일어난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다. 연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베스트팔렌 조약 같은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사건과 비교해서 물어볼 수도 있으므로 당시 유럽의 사건들도 병기하도록 한다.

그리고 유독 스튜어트 왕조 출신의 군주들(제임스 1,2세, 찰스 1, 2세)에 대해서 지나치게 비판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 현재 제임스 1세 찰스 2세, 제임스 2세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지만 교과서에서는 마치 민생 따윈 신경쓰지 않고 전제적 통치를 벌인 악역처럼 등장하는지라 많은 오해를 심어주고 있다.

기존의 장원 제도가 붕괴하면서 젠트리라고 불리는 지주 세력이 제2차 인클로저 운동을 벌였다. 이에 따라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갔고, 도시에서는 상공업이 발달해 시민층이 발전했다. 이들 중에는 영국의 개신교도인 청교도들이 있었고, 이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명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 교육과정에서는 보고 있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영국 혁명 시기 군주는 제임스 1세( 1603년 ~ 1625년 재위)이다. 교과서에서는 그냥 전제 정치를 강화해서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 한 마디로 퉁치고 넘어간다.[102]

그 다음 즉위한 찰스 1세( 1625년 ~ 1649년 재위) 때부터 교과서에서 자세하게 다룬다.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서 독자적 과세를 하고 청교도를 탄압했다. 1628년 의회에서 권리청원을 내놓자 이를 수용하는 척 했으나, 이듬해인 1629년 의회를 해산하고 없었던 것으로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할 비용을 얻기 위해 1640년에 의회를 재소집했다. 의회는 소집되자마자 왕의 측근들을 제거했고, 결국 1642년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잉글랜드 내전으로 번졌다. 7년 간의 내전이 끝나고 의회파가 1649년에 승리해 찰스 1세를 처형했다.

이후 11년간 영국에서는 왕이 없는 공화정이 들어섰다. 이를 잉글랜드 연방이라고 부르나 본 용어는 교육과정에서 쓰이지 않는다. 새로운 잉글랜드 연방의 지배자가 된 올리버 크롬웰 1651년 네덜란드 상인들을 박살내기 위해 항해법을 제정했고, 이에 따라 1652년 영국-네덜란드 전쟁( 제1차 영란전쟁)이 일어났다.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강력히 진압했고, 1653년에는 호국경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스스로 취임했다. 지나친 청교도 금욕 독재 때문에 민심을 잃었다. 크롬웰은 1658년 사망했고 1660년 왕정이 복고되었다.[103]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영국의 새로운 왕은 찰스 2세( 1660년 ~ 1685년)가 되었다.[104] 1673년 의회에서 심사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성공회 신자만 공직에 임용할 수 있도록 한 법이었다.[105] 의회는 1679년에는 인신보호조례를 제정했는데 국왕이 불법적으로 사람을 구속할 수 없게 한 법이었다.

1685년 찰스 2세가 사망하자 제임스 2세( 1685년 ~ 1688년 재위)가 즉위했다.[106] 제임스 2세를 반대한 당파가 휘그당, 찬성한 당파가 토리당이 되었다.[107] 여하튼 의회에게 안 좋게 비춰진 제임스 2세는 상비군 양성을 시도하자 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를 끌어들여 제임스 2세를 몰아냈으니 이것이 바로 명예혁명이다.

이후 영국의 공동 왕으로 메리 2세( 1689년 ~ 1694년 재위)와 윌리엄 3세( 1689년 ~ 1702년 재위)가 즉위했다. 그들은 1689년] 권리장전을 승인했다. 앤 여왕( 1702년 ~ 1714년)은 1707년 영국 통일로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아일랜드를 모두 합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세웠다. 그녀가 사망하며 스튜어트 왕조는 종식되었다.

조지 1세( 1714년 ~ 1727년 재위)는 하노버 왕국 출신으로 하노버 왕조를 개창했다. 1721년 의회의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의원내각제(내각책임제)가 실시되고 로버트 월폴 경이 초대 재무경이 되면서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영국 혁명 시대는 끝이 난다.[108]
2.4.4.4.2. 미국 혁명
미국 독립 전쟁을 교과서에서 일컫는 명칭이다. 현재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등장하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도 선후관계로 장난을 많이 치므올 잘 알아야 한다. 미국사의 시대 구분으로는 혁명 시대라고 부른다.
세계사 교과 첫 미국사 파트로,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한다.[109]

미국의 전신인 13개 식민지 1607년 잉글랜드 왕국이 지금의 미국 동북부에 세운 식민지 제임스타운으로 시작되었다. 조지 시대에 해당하는 1732년 조지아 식민지까지 개척되면서 13개가 되었고, 처음에는 자치권을 보장받으며 별 탈 없이 살았다.

이런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독립에 대한 요구가 튀어나오게 된 계기는 1756년부터 1763년까지 벌어진 7년 전쟁이다. 7년 전쟁은 18세기 유럽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이지만 본 교육과정에서는 동유럽 절대왕정 파트에서 한 번, 미국 독립 전쟁 파트에서 한 번, 인도 식민지화 역사에서 플라시 전투 언급으로 한 번 이렇게 세 번에 걸쳐 나누어 설명되어 있다.

1740년부터 1748년까지 벌어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영국-오스트리아 동맹이 패배하고 프로이센 왕국 프랑스 왕국이 승리해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을 차지하자 오스트리아를 믿을 수 없었던 영국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철천지 원수로서 항상 싸워왔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는 동맹의 역전이 벌어졌다.

이렇게 영국+프로이센 vs 프랑스+오스트리아 구도로 벌어진 전쟁이 7년 전쟁이며, 인도에서의 영국 지배권을 공고히 한 플라시 전투도 7년 전쟁의 일부이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동맹이 패배해 프랑스에서는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훗날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며, 오스트리아도 주도권을 프로이센 왕국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승리한 영국도 큰 손해를 봤고, 그 손해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메꾸려고 했다. 그래서 종이에 세금을 매기는 아이디어를 낸다.

1765년 영국은 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에서 인지조례를 시행했다.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모든 종이에 세금을 매겼는데, 이에 반발한 미국인들은 이참에 식민지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표 없이는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인지조례는 이듬해인 1766년 폐지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동인도회사가 어려워지자 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기 위해 홍차조례를 1773년에 제정했고, 동인도 회사가 홍차를 식민지에 직접 납품하자 가격이 훨씬 저렴해졌다. 그러나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린 상인들은 보스턴 차 사건을 벌였다.[110] 결국 영국에서는 더 강압적인 통치를 하려고 했다.

1774년 제1차 대륙 회의가 개최되었다. 영국에서는 13개 식민지를 별개의 지역으로 생각했고, 반대로 13개 식민지에서는 자신들이 영국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식민지 대표들은 자치권을 보장해달라는 요구 정도에만 그쳤다. 그러나 1775년 렉싱턴-콩코드 전투가 발발하고 토마스 페인 1776년 상식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표하자마자 여론이 뒤집혀 '13개 식민지는 더 이상 영국의 일부가 아니며 떨어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결국 같은 해 제2차 대륙 회의가 소집되었고, 이듬해인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미국 독립 전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영국의 힘이 강해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프랑스 왕국 에스파냐 왕국의 지원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의 승리로 미국의 실질적인 승리가 되었으며, 178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어 미국의 독립이 인정되었다. 그리고 독립한 13개 식민지가 1789년 연방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선출하면서 오늘날의 미국이 건국되었다.

미국의 독립 사례는 프랑스 혁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같은 시기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19세기 초에 좋은 예시로 받아들여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대거 독립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2.4.4.4.3. 프랑스 혁명
제2차 세계 대전과 함께 세계사에서 가장 어렵게 출제할 수 있는 파트이다. 2차 대전은 밀리터리 동호인 역사 동호인의 존재 때문에 극복할 수 있다고 해도, 프랑스 혁명의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역덕들이 상당히 많다. 이 때문에 내신 시험을 내는 고교 교사들에게나 수능 출제 위원들에게나 모두 사랑받는 파트이다. 더군다나 교육 방침의 변화로 개념어를 삭제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엄연히 명칭이 있는 사건도 그 명칭을 명시하지 않고 애매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버리는지라, 나중에 가서야 '아, 이게 이 사건을 말하는 거였어?' 하는 반응을 내보이게 만든다.

더 자세한 연표는 프랑스 혁명/연표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프랑스 혁명의 배경에는 다양한 것이 있지만 교육과정에서는 크게 3가지를 꼽았다.
당연히 제일 유명한 것은 마지막의 앙시앵 레짐이다. 제1신분에 속한 성직자층과 제2신분에 속한 귀족층이 특권을 누렸고, 정작 인구가 가장 많은 제3신분의 평민들은 차별을 받았다. 삼부회 1789년 5월 5일에 소집되었으나 제1신분과 제2신분이 편을 먹어 제3신분의 의견을 묵살했다.

결국 제3신분끼리 모여서 6월 17일 국민 의회를 소집하고 6월 20일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했다. 루이 16세가 이를 탄압하자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으로 번져서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다. 8월 4일에 먼저 봉건제를 폐지하고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했다. 식량난으로 인해 10월 5일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듬해 1791년 6월 20일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다가 붙잡히는 바렌 사건이 벌어졌다. 9월 3일에는 1791년 헌법을 제정해 입헌군주제와 제한 선거제[111]를 규정했다.

1791년 10월 1일 입법 의회가 수립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것은 지롱드파였으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왕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한 프랑스 혁명 전쟁은 입법 의회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시험에서 생각보다 자주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므로 잘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에 따라 물가가 오르고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서 1792년 8월 10일에 상퀼로트(Sans-Culotte)들이 봉기를 일으켰고[112]

1792년 9월 20일에는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국민 공회(Convention Nationale)[113]가 수립됨과 동시에 프랑스 왕국은 왕정이 폐지되어 프랑스 제1공화국이 되었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처형당했고,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새로운 공화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혁명재판소와 공안위원회가 사회를 통제했고, 8월 10일에는 보통 선거와 관한 1793년 헌법이 반포되었으며 9월 26일에는 지나치게 치솟는 물가를 통제하기 위해 최고가격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1794년 봄에 로베스피에르가 정적들을 대거 숙청했고, 이에 대한 반발이 커지며 결국 7월 27일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 본인도 처형당했다.

이후 1795년총재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무능한 행보를 보여주었고, 이들도 1799년 11월 9일 일어난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사라지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통령 정부가 수립되었다.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프랑스 혁명의 의의는 아주 고전적인 관점으로,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으로 앙시앵 레짐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인권,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있었던 비인권적이고 비윤리적인 행태들에 대한 비판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좋든 싫든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를 완전히 뒤바꾸어서 오늘날의 인권관념이 형성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2.4.4.4.4. 나폴레옹 전쟁
일반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끝난 시기를 고르라고 하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1799년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부터는 급진적인 개혁과 파괴가 아니라 나폴레옹이라는 강력한 개인의 주도 아래서 프랑스가 제국으로 거듭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원래 총재 정부 시절에 활동하던 군인으로 1796년에는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고 1798년 오스만 제국 이집트 이집트 원정을 떠났으나, 나폴레옹의 국민적 인기가 높아지자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통령 정부를 성립시켰다. 1800년 프랑스은행을 설립하고 프랑스 민법전의 토대를 닦았다.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은 끝났으나 1803년 영국이 조약을 깨고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1804년 나폴레옹은 국민 투표를 통해 황제로 즉위해 프랑스 제1제국이 형성되었으며, 1805년 영국 본토를 침공하려 했다.[114] 그러나 같은 해 벌어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패배해서 영국을 굴복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제압하는 성과를 거뒀다. 1806년에는 이름만 남은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서 기원전 27년부터 이어져오던 로마-서로마-신성로마 황제의 정통성은 단절되었다.[115]

프랑스는 1806년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과 유럽 국가들의 무역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교역으로 엄청난 이득을 챙기던 국가들이 이를 따를 리가 없었고, 러시아가 영국과 계속 교역하자 1812년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다.[116] 그러나 모스크바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비어있는 도시만 마주했을 뿐이었고,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패퇴하며 되돌아갔다.

이후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1814년 파리를 점령당하며 프랑스 제1제국은 1차로 멸망하고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당했다. 빈 회의가 개최되어 새로운 국제 질서를 논의했고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는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루이 18세( 1814년 ~ 1815년, 1815년 ~ 1824년 재위)가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이 돌아와 프랑스 제1제국을 재건했고, 다시 황제가 되었으나 영국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해 1815년에 다시 멸망하고 이번에는 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당했다.[117] 부르봉 왕조는 또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고, 유럽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이끄는 빈 체제 아래에 놓였다.

비록 나폴레옹 전쟁은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났으나, 프랑스의 원동력인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이 유럽 전체로 퍼졌고, 프랑스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의 나라라는 인식인 민족주의가 탄생했다.[118] 대표적인 예시로, 신성로마제국이 있던 시절만 해도 오스트리아는 좁은 의미로는 알프스 지역의 원래 오스트리아, 넓은 의미로 봐도 합스부르크의 영지를 가리킬 뿐이었으나,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하기 2년 전 이 영지들을 모아 오스트리아 제국이라는 실체가 있는 국가로 거듭났다. 독일에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존재가 사라지자 이를 통일해야 된다는 여론이 프로이센 왕국의 주도로 퍼져나갔다.
2.4.4.5. 빈 체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패배한 이후 오스트리아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빈 회의가 개최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모든 것을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는 조치가 취해졌고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루이 18세가 즉위했다. 동유럽의 지배자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1815년 9월 러시아의 제안으로 신성 동맹을 맺었고, 1815년 11월 대영제국이 합류해 사국동맹이 되었다.

이에 대해 독일에서는 부르셴샤프트 운동이 일어났고, 이탈리아에서는 카르보나리 당이 결성되어 주세페 마치니 등이 활동했다.[119] 그리스에서는 1821년부터 그리스 독립 전쟁이 일어났고,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영제국, 프랑스 왕국, 러시아 제국이 이를 도와, 1822년 그리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829년 독립을 인정받았다.[120]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때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국이 정복당하자 정치적 권력이 강해졌고 결국 1810년대~ 1820년대 시몬 볼리바르, 산 마르틴 등에 의해 독립해서 나갔다.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에서는 프랑스[121]로부터 독립한 아이티 1804년 최초로 독립했다.[122]

미국사 러시아사에서도 사건이 있었다. 미국[123]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먼로 선언을 함으로서 유럽의 정치와 아메리카의 정치에 대한 분리를 선언했다. 교육과정에서는 이를 라틴아메리카의 독립과 엮어서 설명한다. 러시아 제국[124]에서는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나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고 농노를 해방하려고 했으나 니콜라이 1세( 1825년 ~ 1855년 재위)에 의해 진압당했다.
2.4.4.6. 자유주의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이 퍼지고, 한번 자유를 누려본 시민들은 다시 빈 체제 아래서 압제를 받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와 영국에서 자유주의 혁명 및 개혁이 이루어졌다.
2.4.4.6.1. 프랑스
나폴레옹 몰락 이후의 프랑스사를 이어서 설명하자면, 1815년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루이 18세가 즉위했다. 그는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면서도 혁명이 일어날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시민들을 자극하는 정책은 펼치지 않아 별 탈 없이 1824년 사망했다. 문제는 샤를 10세( 1824년 ~ 1830년 재위)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자유권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고 전제군주제에 대한 추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국민들의 분노를 사서 1830년 7월 혁명이 발발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그림은 보통 프랑스 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이 1830년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다.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는 다시 퇴출되고, 루이필리프 1세( 1830년 ~ 1848년 재위)가 오를레앙 왕조를 개창했는데 이를 7월 왕정이라고도 부른다.

7월 왕정은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을 보장했고, 이에 따른 불만이 쌓여 18년 뒤인 1848년 프랑스는 또 혁명을 맞이했다. 산업혁명이 이루어지면서 노동자 계층이 등장하고 아나키즘, 공산주의 등이 등장했는데, 마침 경제가 나빠지자 노동자들이 시위를 일으켜 프랑스 2월 혁명이 발생했다. 루이필리프 1세는 쫓겨났으며 1804년 이후 44년만에 공화정이 들어서며 프랑스 제2공화국이 되었다. 그리고 2월 혁명은 유럽 전체로 퍼져 1848년 혁명으로 번졌고,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실각하면서 33년 간 유럽을 지탱한 빈 체제는 붕괴하게 되었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가 강해져, 나폴레옹의 조카였던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852년에는 황제 나폴레옹 3세( 1852년 ~ 1870년 재위)로 즉위해 프랑스 제2제국이 세워졌다. 제2제국은 1855년 발발한 크림 전쟁에 참전했으며, 1862년에는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와 사이공 조약을 체결해 베트남과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식민지화를 시작했다. 같은 해 멕시코에 진입해 1864년에는 막시밀리아노 1세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1867년에 3년 만에 폐위당하고 프랑스 세력은 멕시코에서 쫓겨났다. 나폴레옹 3세 본인도 1870년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해 왕좌에서 쫓겨났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제3공화국( 1870년 ~ 1940년)이 들어섰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프랑스사를 재정리해 보자.
2.4.4.6.2. 영국
1721년 의원내각제 형성 이후의 영국사를 왕사 위주로 이어서 설명하자면, 1727년 조지 1세가 사망하고 조지 2세가 즉위했다. 이 시기에는 산업 혁명이 시작되고 7년 전쟁에 영국이 참전해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하고 인도에 대한 주도권을 얻고 7년 전쟁에서도 최종 승리했다. 1760년에는 조지 3세가 즉위해 60년 간 통치했다. 이 기간 동안은 미국에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해 미국이 떨어져나가고, 나폴레옹 전쟁을 일으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제압했다.[125] 이후 영국은 빈 체제를 이끄는 주도국이 되었다. 1820년 조지 4세가 즉위해 10년 간 재위하며 조지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했고, 1830년부터 1837년까지 재위한 윌리엄 4세를 조지 시대에 포함하기도 한다. 1837년 그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며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인 빅토리아 시대가 열렸다.

1820년대는 의회 위주로 종교적인 자유가 보장된 시기다. 1828년 심사법[126]이 폐지되어 성공회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공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이듬해인 1829년에는 가톨릭 해방법이 제정되어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법적 차별을 폐지했다.

1830년대는 선거권과 관련된 개혁이 일어났다. 특정 세력에 지나치게 유리한 부패 선거구를 폐지하기 위해 1832년 1차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져 도시의 신흥 상공업자 남성을 선거권자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노동자가 배제된 것이 문제가 되었고, 1838년 인민 헌장을 발표하며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나 1848년까지 진행되었다.[127] 휘그당 토리당의 대립은 자유당 보수당의 대립 구조로 바뀌었다.[128]

1840년대에는 경제적인 자유가 보장되었는데, 1846년 곡물법[129]이 폐지되고 1849년 항해조례를 폐지함으로서 경제의 자율화와 자유 무역이 이루어졌다. 이후 영국은 전 세계에 대량생산된 물건을 판매하면서 19세기 최강국인 영국 식민제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2.4.4.7. 민족주의와 국민국가
한편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 이탈리아에서는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하나의 국체로 통일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신흥 강대국인 미국 러시아 제국도 성장해갔다.
2.4.4.7.1. 이탈리아 통일
고대 로마를 배출하며 세계 최강 제국을 이루어낸 이탈리아는 동서 분리 이후 게르만족 훈족의 침입으로 신음하다가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고, 이후 오도아케르, 동고트 왕국, 동로마 제국, 바이킹, 프랑크 왕국, 교황령,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등이 거쳐갔다.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나폴리 왕국 등의 나라로 나뉘어있던 이탈리아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민족주의가 급격히 확산되면서 다시금 통일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퍼졌다. 주세페 마치니, 카밀로 카보우르, 주세페 가리발디 이렇게 세 명의 인물이 이탈리아 통일(Risorgimento)을 주도했다.

처음으로 통일을 시도한 인물은 주세페 마치니였다. 그는 원래 카르보나리의 멤버였으나 진압당한 이후 청년 이탈리아당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통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130]

카밀로 카보우르 사르데냐 왕국을 위해 봉사하면서 통일 운동을 벌였다. 1859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베네치아를 제외한 북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력을 빼앗았다. 대신 사보이아 니차 1860년에 프랑스로 할양했다. 이탈리아 남부는 주세페 가리발디 양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을 무너뜨리면서 통일되었다. 가리발디는 점령지를 북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왕국에게 헌납했고, 이렇게 교황령 베네치아만 제외하고 모든 이탈리아가 통일되어 1861년 사르데냐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이탈리아 왕국( 1861년 ~ 1947년)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131] 초대 총리는 카밀로 카보우르가 되었다.

아직 이탈리아에 포함되지 않았던 베네치아는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개입해 프로이센 편에 선 대가로 이탈리아에게 넘어갔고, 교황령은 1870년까지 프랑스의 도움을 받으며 버티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교황령의 프랑스군이 떠나자 이탈리아 왕국이 침입하여 멸망시켰다. 이탈리아의 수도는 다시금 로마가 되었다.[132]
2.4.4.7.2. 독일 통일
역사에서 독일 통일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1871년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의 국가들을 모두 통합하고 독일 제국(제2제국)을 수립한 것이고 두 번째는 1990년 제1세계 서독과 제2세계 동독이 통일되어 현대 독일이 된 사건이다. 본문에서의 독일 통일은 당연히 1871년 통일을 다룬다. 6단원에서 다룰 1990년 독일 통일은 독일 재통일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프랑크 왕국 때 개척된 독일에는 962년 신성 로마 제국(제1제국)이 세워졌으나 여러 혼란으로 황권이 약화되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라인 동맹을 만들었으나,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빈 체제가 수립되자 독일 땅에는 35개 국가와 4개 도시가 참여한 독일 연방이 세워졌다.

이탈리아에서 그랬듯이 독일에서도 통일에 대한 필요성이 논의되었다. 독일 민족이 세워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는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그리고 독일 땅의 군소국가들이었으며, 이 모든 국가들을 하나로 합쳐 한 개의 독일어권 국가를 만드는 것이 대독일주의였다. 반면 오스트리아가 지나치게 다문화, 다민족화되어 독자성을 띠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만 제외하고 통일하는 방안이 소독일주의였다. 즉 소독일주의는 프로이센 왕국 주도의 통일 이후 독일어권 국가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2개가 되는 것이다.

1834년 프로이센의 주도로 관세동맹이 체결되었다. 관세동맹 협정국들끼리는 관세를 매기지 않거나 아주 약간만 매기며, 반면 협정국이 아닌 외부와는 모든 협정국이 동일한 관세를 매기게 된다. 즉 독일어권 사이에서 경제 통합을 시도해 훗날의 정치 통합을 위한 발판을 놓은 것이다.[133]

이 와중 1848년 3월 혁명[134]이 벌어졌다. 3월 혁명은 실패했지만 그 흐름에 편승해서 통일 독일을 이루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에 따라 1848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개최되었다. 상술한 대독일주의 소독일주의가 대립했는데, 오스트리아 제국이 발칸 반도의 영토와 다문화주의를 포기할 의도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고 프로이센에서는 의회 따위가 왕위를 결정한다는 것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1849년을 끝으로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1861년 빌헬름 1세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고,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총리가 되었다. 철혈 재상이라는 명칭으로 유명한 그는 군사력으로 독일을 통일하고자 하는 철혈 정책을 펼쳤다.[135] 먼저 1864년 덴마크를 제압하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비스마르크의 탁월한 외교 수완으로 러시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지지를 받아내 승리했으며, 같은 해 북독일 연방이 성립되어 통일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136]

1870년~ 1871년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해 프랑스 제2제국을 무너뜨리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병합한 뒤 남독일까지 흡수하며 독일 통일이 완수되었다. 1871년 독일 제국(제2제국)이 수립되고 빌헬름 1세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초대 황제로 즉위,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초대 수상이 되었다.
2.4.4.7.3. 미국
미국사 파트는 바로 서부 확장 시기와 남북전쟁 직전의 내전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137] 미국은 독립 이후 1803년 루이지애나 구입으로 영토가 넓어졌고, 1818년 1842년에 영국에게서 영토를 추가로 받았고, 1819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받았다. 1840년대부터는 서부개척시대가 열려 명백한 운명이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영토가 파죽지세로 늘어났다. 1845년 텍사스를 병합하고 1846년 오리건을 병합했으며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해 서부를 넘겨받았다. 1853년에는 개즈던을 매입해 오늘날의 미국 판도가 형성되었다.

미국에서도 산업 혁명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자유 노동자의 상공업 위주로 돌아가던 보호무역주의 북부와 흑인 노예를 부리며 목화 등을 재배하던 자유무역주의 남부의 갈등이 일어났다.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자 남북 대립은 더 심해졌고 남부에서 아메리카 연합국[138]을 건국하면서 1861년 남북 전쟁이 발발했다. 1863년 링컨이 노예를 해방할 것을 선언하고 같은 해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았고, 1865년 아메리카 연합국을 멸망시키면서 북부의 승리로 끝났다.

남북전쟁이 끝난 미국은 1867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알래스카를 구입했고, 1869년 대륙횡단철도가 부설되며 국토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민자[139]를 대거 받아들이며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인구 강국이 된 미국은 제2차 산업 혁명을 주도하면서 자본주의의 선도 국가가 되었다.
2.4.4.7.4.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에서는 1825년 즉위한 니콜라이 1세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고 30년 간 전제 정치를 펼쳤다. 러시아는 해안의 대부분이 얼어 있어 일 년 내내 얼지 않는 부동항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려는 남하 정책을 펼쳤다.[140] 이때 가장 자주 충돌한 나라 중 하나가, 제2차 빈 공방전 실패 이후 18세기 19세기 내내 쇠퇴하던 '유럽의 병자' 오스만 제국이었다. 1853년 러시아와 오스만 사이에서 크림 전쟁이 벌어졌으나,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이 오스만을 지원하면서, 1855년 니콜라이 1세 사후 알렉산드르 2세 때인 1856년에 전쟁이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다.

1855년부터 1881년까지 러시아를 다스린 알렉산드르 2세 1861년 농노 해방령을 내리고 지방 통치 제도, 재정, 사법, 교육, 군제를 전부 개혁했으나, 지식인층들은 전제 정치는 변하지 않았다면서 반발했고, 1870년대에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농민들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으나 농민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거나 오히려 그들을 간첩으로 신고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는 급진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고, 다음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 1881년 ~ 1894년 재위)는 전제 정치를 강화했다.[141]
2.4.4.8. 산업 혁명
중세 또는 근세 근대의 분기점을 나누는 중대한 사건이다. 교과에서 언급하는 산업 혁명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까지 걸쳐서 벌어진 대영제국 주도의 제1차 산업 혁명을 의미하며, 미국이 주도한 19세기 중후반의 제2차 산업 혁명을 언급하는 교과서도 존재한다.[142]

산업 혁명은 프랑스 혁명 같이 특정 시기에 갑자기 터진 사건이 아니다. 15세기 시작된 대항해시대부터 상업과 금융이 성장했으며,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 여파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는데, 이때 도시에서 많은 노동력을 바탕으로 선대제와 공장제수공업을 기반으로 한 공장들이 생겨났다. 이는 빠른 속도로 기존의 길드를 대체했다. 이런 배경들이 갖춰진 상태에서 명예혁명 이후 18세기 영국의 정치가 안정되자 많은 기술들이 개발되었다.[143]

18세기에는 영국에서 면직물이 유행했는데 이 때문에 면직물 공업이 발전했고, 속도를 더 빨리 만들기 위해 기계 장치를 개발했다. 그 시초가 1733년 존 케이가 개발한 플라잉 셔틀이다. 1767년 제임스 하그리브스가 제니 방적기를 개발했고,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1768년 수력 방적기를 개발했다. 1785년 에드먼드 카트라이트가 역직기를 발명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방직 산업이 자동화되었다.

산업 혁명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제임스 와트 증기기관을 개량한 것이다.[144] 증기 기관의 개량으로 동력의 효율이 극도로 향상되자 수많은 산업 분야에서 적용되었다. 미국의 로버트 풀턴은 증기기관을 통해 증기선 '클레르몽'을 개발했고 1807년 운행했다. 증기 기관차 1804년 리처드 트레비식이 개발했으며 1825년 조지 스티븐슨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 철도를 운행시키면서 교통 분야에서도 혁신을 이뤘다. 1863년에는 런던 지하철이 만들어졌는데, 조선과 비교하면서 대동여지도( 1861년 제작)와 함께 자주 언급된다.

통신 분야에서도 산업 혁명이 큰 영향을 끼쳤다. 새뮤얼 모스가 개발한 모스 부호는 아직도 쓰이고 있으며, 그는 유선 전신 기술도 개발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전화기의 특허를 냈으며[145] 무선 전신 기술은 마르코니가 개발했다.

산업 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나 1830년대 프랑스로 퍼져서 섬유 공업이 발전했고 7월 혁명의 여파로 막 건국된 벨기에로도 퍼져 광업과 제철이 발전했다. 19세기 후반에는 통일된 독일에서 중화학 공업이 발전했고, 미국에서도 중화학 공업을 육성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전신, 전화, 전구 등의 전기 기술이 발전해 제2차 산업 혁명을 주도했다는 평도 듣는다. 1880년대 1890년대19세기 말기에는 러시아 제국[146] 일본 제국[147]에서도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2.4.4.8.1. 산업 사회의 등장
고대 노예제-중세 농노제-근대 노동자의 흐름에서 마지막의 근대 노동자 사회가 바로 산업 시대의 사회이다. 기존의 귀족과 평민 간의 계급 구도가 붕괴하고 신분제가 사라지자 자본가( 부르주아)와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자 주택 부족 문제와 교통 혼잡 문제, 상하수도 시설의 취약함으로 인해 위생이 악화되고 범죄가 잦았다.[148] 노동자들은 상당히 열악한 환경에서 오랜 시간동안 적은 월급을 받아가며 일했고, 금방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아동 노동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영국에서는 이 문제가 너무 심각해지자 1833년 공장법을 제정해 아동과 부녀자의 노동을 제한했다.
2.4.4.8.2. 사회주의
위와 같은 문제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온 노동자의 주도로 노동 운동이 벌어졌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 산업사회를 상징하는 기계를 파괴하고 다닌 러다이트 운동이었다. '러드'라는 지도자가 이끌었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실체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기계 파괴 운동은 강력한 탄압을 받고 사그라들었다. 이후에는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초기 자본가들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탄압했으나[149]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정받았다.

이렇게 혼란한 세상이었으니 사회주의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는 빈부격차를 없애고 생산 수단을 공유하자는 사상으로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주장된 사상이었으나, 근현대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18세기 말~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초기의 사회주의는 공상적 사회주의[150]라고 불린다. 공상적 사회주의의 대표 학자는 생 시몽, 샤를 푸리에[151], 로버트 오언[152]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아는 사회주의는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만든 것으로, 위의 초기 형태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난하고 자신의 사회주의는 '과학적' 사회주의라며 유물론[153]을 들고 나왔다. 1848년 혁명 당시 공산당 선언을 하여 사회주의의 일파인 공산주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정과 반의 대립이 더 발전된 합을 이루는 패턴이 반복되는 변증법을 사용해서, 역사적 필연인 계급 투쟁이라는 정반 대립을 통해서 다음 단계의 역사 시대로 넘어간다는 주장을 했다. 근대 자본가-노동자 투쟁에서 노동자가 폭력 혁명을 일으켜서 사회주의를 이룩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때 주장한 폭력 혁명 떡밥이 훗날 블라디미르 레닌, 마오쩌둥 등에게 사용된다.

이외에도 정부를 없애고 노동자들이 협력하는 체제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아나키즘이 나타났다.
2.4.4.8.3. 19세기 문화
16세기~ 17세기 과학 혁명이 천문학 물리학 위주로 진행되었다면 19세기의 과학 발전은 생물학 화학의 발전을 이루었다. 생물학 영역에서는 1859년 찰스 다윈이 기독교도들에게 만연한 창조론에 도전해 종의 기원을 편찬하며 진화론을 주장했다. 루이 파스퇴르 세균을 발견했다. 화학 분야에서 마리 퀴리 피에르 퀴리 부부는 라듐을 발견했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X선을 발견했다.[154] 토머스 에디슨 전구 축음기의 특허를 낸 것으로 유명하며[155] 마이클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를 발견하고 발전기를 발명했다.

철학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공리주의에서는 제러미 벤담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며 양적 공리주의를 주장했고, 존 스튜어트 밀은 질적 공리주의자로서 영국 자유주의의 기반을 마련했고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변증법을 주장했다.

사회학이 만들어졌다. 오귀스트 콩트가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개척했으며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가 발전시켰다.

역사학에서는 레오폴트 폰 랑케가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중시하는 실증적[156] 역사 연구를 강화했다.

경제학에서는 애덤 스미스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한 이래로 데이비드 리카도 비교우위론을 주장하고 토머스 맬서스 맬서스 트랩[157]을 주장하면서 고전 경제학의 토대를 닦았다.

예술 분야에서 19세기 초에는 낭만주의 사조가 유행했다. 문학에서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활동했고 회화에서는 외젠 들라크루아[158]가 활동했다. 음악에서는 프레데리크 쇼팽, 프란츠 슈베르트가 대표적이다. 음악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 루트비히 판 베토벤 고전파 낭만주의의 중간 단계에 위치해 두 사조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사실주의 자연주의가 유행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찰스 디킨스가 문학에서 활동했고, 미술에서는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등이 인상주의를 유행시켰다. 음악에서는 민족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리하르트 바그너 표트르 차이콥스키 등이 활동했다.

2.5. 제국주의와 두 차례 세계 대전

[12세사05-01]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이에 대항한 아시아·아프리카의 민족 운동에 대해 조사한다.
[12세사05-02] 제1, 2차 세계 대전의 원인과 결과를 알아보고, 세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토론한다.

2, 3, 4단원의 전근대사 파트이자 지역사 파트가 끝나고 근대사로 접어들면서 다시 전 세계를 한꺼번에 다루는 단원이다.

18세기 제국주의가 처음 시작되는 시기부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될 때까지를 다룬다.

첫 번째 소단원은 근대 시점에서 가장 발전한 유럽의 제국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다룬다. 라틴 아메리카는 4단원을 끝으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으며, 유럽과 북미의 식민제국들이 정복한 지역을 동아시아-아프리카 순서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제국주의에 저항한 민족 운동에 대해서 동아시아-인도-동남아시아-서아시아-아프리카 순서대로 보여준다.

두 번째 소단원은 세계사 최대의 하이라이트이자 전 세계의 역사가 전부 모여드는 양차대전을 다룬다.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을 시작으로 전간기의 중국사, 인도사, 동남아시아사, 중동사를 다루고 대공황- 전체주의-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다루고 마지막에는 국제 연합에 대해 설명하며 끝난다.

2.5.1. 05-01 (제국주의와 민족 운동)

제국주의 파트와 민족 운동 파트 이렇게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제국주의 파트에서는 유럽과 북미의 식민제국들이 아시아 아프리카를 어떻게 식민지화하고 괴롭혔는지를 다루며, 민족 운동 파트에서는 이런 침략에 대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준다.
2.5.1.1. 제국주의
유럽 열강들이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로 식민지를 정복한 팽창 정책을 의미하며 그 개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교육과정에서는 제국주의의 등장 배경을 4가지 정도로 본다.
  • 독점 자본주의 - 19세기 중반 정치적 격동기가 끝나고 벨 에포크라고 불리는 평화로운 시대가 오면서 대기업들이 성장했고 대기업들이 시장을 지배하면서 원료, 판매지, 투자처 등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대외 팽창이 필요했다.
  • 침략적 민족주의 - 나폴레옹 전쟁 이후 민족주의가 성장하면서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갈망하게 되었다.[159]
  • 사회진화론 - 진화론을 사회 이론으로 응용한 것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을 자연의 섭리라고 주장하며 정당화했다.
  • 인종주의 - 백인 황인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관점이 만연했다.[160]
2.5.1.1.1. 아시아 및 태평양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예전부터 문명의 영향을 받아서 여러 문명과 국가들이 이미 들어선 상태였다. 그만큼 알려진 것도 많았고 대항해시대 도래 이후에는 가기도 쉬워졌기 때문에 일찍이부터 식민지화되었다. 다음은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서양 열강의 아시아태평양 식민지들과 관련 정책이다.
2.5.1.1.2. 아프리카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아프리카의 전근대사는 전부 잘려나가고 근대사부터만 다룬다. 말리 제국이나 송가이 제국, 콩고 왕국 등의 국가들이 제2천년기 내내 등장했으나 대부분 이슬람 세계에 가깝거나 해안가에 위치한 국가들이어서 유럽과 이슬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아프리카는 아시아 지역보다 더 늦게 개척되었다. 대항해시대 18세기에 마무리되어 거의 모든 세계를 세계지도로 나타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나, 아프리카의 내륙은 불과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탐사를 했으며 그를 찾으러 간 헨리 스탠리가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알리면서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에 눈독을 돌렸다.
2.5.1.2. 민족 운동
위와 같은 서양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해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다룬다.

중국-일본-인도-동남아시아-서아시아-아프리카 순서대로 살펴보며 조선의 근대사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지 않는 편이다.
2.5.1.2.1. 중국
2단원에서 이어지는 중국 근현대사 중에서 청나라 말기( 1840년 ~ 1912년)을 다룬다. 중화민국( 1912년 ~ 1949년)은 5-2단원에서 다뤄지며 중화인민공화국( 1949년 ~ 현재)은 6단원에서 다룬다.

2차에 걸친 아편전쟁과 그 이후에 중국에서 벌어진 운동( 태평천국운동,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 의화단 운동, 신해혁명)까지가 주제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일본 근대사 파트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며 본 파트에서는 중간에 언급하는 수준으로 넘어간다.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대영제국 건륭제 시대에 청과 교역을 시도했다. 이에 따라 1757년 청 정부는 광저우에서만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공행 무역 체제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역은 적자가 많이 나는 사업이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당시 청나라에서 퍼지고 있던 마약 아편을 영국령 인도에서 재배해서 팔기로 했다. 당시 세계는 은본위제가 이루어지고 있어 청나라와 거래할 때 은을 사용했는데, 인도가 청나라에 아편을 수출하며 청나라의 은이 대량으로 인도로 유출되었고 영국은 인도에 유입된 은을 사용해 다시 청나라에서 물건(차, 비단, 도자기 등)을 구매했다. 영국만 은을 지불하는 구조에서 은이 계속 돌고 도는 구조로 바뀌었고, 그마저도 청나라에서 유출되는 양이 더 많아서 은의 가치가 치솟았고 세금 제도에 타격을 입혔다. 더군다나 마약중독자의 수가 치솟아서 건강이 악화되고 사회 구조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결국 임칙서가 광저우에서 아편을 전부 압수해 폐기했고, 이를 명분으로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 1840년 ~ 1842년)을 일으켰다. 영국군은 난징과 톈진까지 함락시켰고 청나라는 2년만에 영국에 항복했다.[184] 1842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아시아의 근대사를 논하면서 반드시 언급되는 영사 재판권[186] 최혜국 대우[187]의 경우 그냥 추가 조약을 통해서 체결했다고 언급하고 넘어간다.[188] 이후 아편 전쟁의 배상금을 갚느라 경제적인 어려움이 커졌고 한족들 사이에서 만주족을 다시 쫓아내야 한다는 감정이 생겼는데, 이는 하술할 1851년 벌어지는 태평천국운동으로 이어진다.

서양 열강들은 청나라가 상상 이상으로 무능하고 허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한 번 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명분을 찾던 중 1856년 애로호 사건이 벌어진다. 해적선 애로호[189]를 정당하게 단속하는 과정에서 국기가 훼손되었다는 핑계를 대며 전쟁 안건이 영국 하원에 올라와 통과된 것이다.[190] 프랑스도 선교사 오귀스트 샤프들랭 처형 사건을 구실로 개입했다. 이제는 청나라 vs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의 구도로 제2차 아편전쟁( 1856년 ~ 1860년)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1858년 톈진 조약을 체결해 끝내려고 했으나 청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추가 진격했고, 당연하게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까지 점령하며 끝났다. 이번에는 러시아 제국의 중개로 베이징 조약을 체결했다.

상술했듯이 아편 전쟁 패전 이후 세금 부담이 늘어나며 한족의 반 만주족 감정이 강해졌고, 결국 두번의 아편전쟁 사이의 1851년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났다. 홍수전이 스스로를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며 배상제회를 조직하고 멸만흥한(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흥하게 하자)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난을 일으킨 것이다. 난징을 점령해 태평천국을 건국하고 스스로 '천왕'으로 즉위했다. 태평천국에서는 천조전무제도를 내세우며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했고 남녀평등을 추구하고 신분제를 폐지하고 전족을 강력히 탄압했으며 변발도 금지했다. 그러나 제2차 아편전쟁이 종료된 이후 이홍장, 증국번 등의 한족 신사 출신 군인들에게 1864년에 진압당했다.[192] 교과서에서는 반봉건적 사회 개혁 운동이라고 서술하지만 홍수전과 홍천귀복이 많은 첩을 두었던 것을 보면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하자 당시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고 있던 한인 신사 출신 관료들이 서양 문물 도입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홍장, 증국번의 주도로 양무운동( 1861년 ~ 1895년)을 진행했다. 구호로는 중체서용(중국의 정체성으로 서양의 것을 이용하자)[193]을 내세웠다. 주된 내용은 서양의 군사기술을 가져와 군사력 증강에 활용하고, 공장을 짓고 신식 학교를 설립하고 해외에 유학생을 보내는 것이 있었다.[194] 그러나 정책의 계획성이 없었고 정부의 간섭이 있어서 한계가 있었고 결국 1895년 북양함대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며 양무운동은 종료되었다.

청일전쟁 패배 이후 중국과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캉유웨이 량치차오[195]의 주도로 변법자강운동( 1898년)이 이루어졌다. 육십갑자 연도로 무술년이었기 때문에 무술변법이라고도 불린다. 일본 메이지 유신을 모티브로 의회를 설치하고 입헌 군주제 도입을 시도했으며 과거제, 교육 제도 개혁 및 상공업 육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중국사 최악의 인물로 손꼽히는 서태후 위안스카이 무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뒤엎으면서 실패했다.

서양의 이권 침탈이 심해지는 와중 백련교의 일파가 산둥 반도에서 의화단을 조직해 의화단 운동( 1899년 ~ 1901년)을 일으켰다. 이들은 구호로 부청멸양(청나라를 도와 서양을 멸하자)을 내세우고 서양과 관련된 것이라면 모두 파괴하고 살해했다.[196] 권력자인 서태후는 이를 진압하지 않고 오히려 도왔다. 베이징에 주둔하던 열강들의 공관이 습격당하자 대영제국, 프랑스,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일본 제국, 미국의 8개국 연합군이 이들을 진압하고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후 1901년 신축년에 신축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 베이징에 외국 군대가 주둔할 수 있게 할 것
  •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것

이후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세력도 개혁을 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꼈고, 광서신정이 이루어져 입헌군주제가 실시되었고[197], 수나라 문제 때 실시된 이래로 1400년 만에 과거제가 폐지되었다. 군대 제도도 개편하여 신군을 창설했다.

한편 혁명가인 쑨원 1905년 일본 제국 도쿄에서 기존의 흥중회와 기타 세력을 규합해 중국 동맹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삼민주의(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 이론을 만들었다.[198]

이 와중에서 청나라 정부가 민간에서 운영하던 철도를 국유화하려는 시도를 보이자 강력한 반발을 샀고 쓰촨성과 우창(지금의 우한시)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청나라의 각 성이 독립하면서 신해혁명( 1911년 ~ 1912년)으로 번졌다. 이후 쑨원이 중국으로 귀국해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해 초대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혁명을 진압하러 온 위안스카이와 협상하여, 위안스카이는 혁명군의 편이 되었고 대신 2대 임시 대총통 직은 위안스카이가 가져갔다. 1912년 2월 12일 최후의 황제 선통제[199]가 폐위당하면서 청나라는 멸망했고, 중국은 기원전 221년 시황제 중화제국을 이룩한 이후 2천 년 만에 제정이 폐지되었다.

1913년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위안스카이는 돌변해 혁명파를 탄압했다. 급기야 1915년 12월 12일에는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중국에는 잠시 중화제국이라는 막장 국가가 탄생했다. 그러나 강력한 반발로 세 달 만에 폐지되었고 위안스카이도 얼마 안 가 사망했다. 이후 중국에서는 수많은 군벌들이 날뛰며 사실상 분열의 상태에 접어들었다.
2.5.1.2.2. 일본
일본의 근대화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다른 측면이 많았다. 일본은 16세기 센고쿠 시대 때부터 이미 서양과의 교역을 시작했다. 17세기 에도 막부가 들어서며 쇄국 정책을 펼쳤지만 네덜란드 공화국과는 데지마를 통해 계속 교역했고, 이에 따라 서양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많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대외적인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가 가능했고 이것이 일본으로 하여금 메이지 유신을 성공하게 만들었다.

5-1단원에서 다루는 일본사는 막부 말기( 1853년 ~ 1868년)와 메이지 시대( 1868년 ~ 1912년)에 해당한다.

19세기 이후 일본을 처음으로 개항시킨 국가는 미국이었다.[200] 미국은 산업 혁명으로 개발된 증기선을 가지고 1853년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다. 이를 쿠로후네 사건 또는 흑선내항이라고 부르나 세계사 교육과정에서 그 명칭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매튜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개항을 이끌어낸 것을 '포함 외교'라고 부르며,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맺어졌다.

1858년 미국은 일본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개항에 대한 불만으로 하급 사무라이들이 존황양이를 내세우며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주장을 벌였다. 이때 가장 크게 활약한 곳이 사츠마 번[202] 쵸슈 번[203]이었으며, 서양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서양을 배척하자는 것이 불가능함을 직시하자 '양이'를 포기하고 '존황'만을 남긴 채로 메이지 덴노를 내세워 막부를 타도했다. 이렇게 에도 막부는 소멸했고 다시 천황에게 권력이 돌아가는 일본 제국으로 거듭났다.[204]

일본 근현대의 첫 번째 시대인 메이지 시대[205]가 열리며 대규모 개혁인 메이지 유신이 진행되었다.
1870년대에는 메이지 정부의 독재에 맞서 자유민권운동이 벌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이를 탄압했으나, 이들이 주장한 것들 중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은 받아들여졌다.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이 제정되고 1890년 시행되어 제국의회가 개원했다.[209] 교과상에서는 민의를 배제하고 정부의 멋대로 만들었으며, 천황에게 전제군주권을 보장했다고 비판한다.[210] 1890년 교육에 관한 칙어를 발표해 암기를 강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주의는 대외 침략으로 이어졌다. 1870년대 초기에는 정한론[211]이 대두되었고, 1874년에는 대만 출병[212]으로 청나라가 영유권을 쥐고 있던 타이완 섬을 침입했고, 1875년에는 조선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이를 명분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1879년에는 마지막 남은 번인 류큐 번[213]을 현으로 전환해 영토로 편입하는 제2차 류큐 처분을 내렸다. 이후 류큐는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청일전쟁( 1894년 ~ 1895년)을 일으켜 승리했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청나라는 아주 오랜 기간 변방에 숨어 사는 오랑캐 따위로 여겼던 일본에게 패배하자 큰 충격을 받고 변법자강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번에는 조선을 넘어 만주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서양 열강인 러시아 제국에게 도전해 러일전쟁( 1904년 ~ 1905년)을 일으켰다.[216] 여기서 일본이 승리하며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패전한 러시아 또한 큰 충격에 빠졌으며 훗날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반면 일본은 서양 열강을 상대로 한 도장깨기에서 이기면서 서양 열강으로 인정받았고 많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했다.
이후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7조약 등을 거치며 1910년 대한제국[217]을 강제 합병했다. 이후 일본은 일본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제1차 세계 대전 등에 참여해 태평양 식민지를 얻었다.
2.5.1.2.3. 인도
인도의 근대사 시작 시점은 명확하게 잡을 수 없으나, 무굴 제국 아우랑제브 시대 최전성기 이후 마라타 제국 시크 왕국 등이 분리되고 대영제국이 인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18세기부터로 본다.

무굴 제국의 황제 아우랑제브가 이슬람 강요 정책을 펼치다 사망한 이후, 인도에서는 무굴 제국에 대한 반발이 커졌고, 힌두교도 위주로 세워진 마라타 제국과, 새로운 종교 시크교가 펀자브(인도 서북부)에서 세운 시크 왕국 등이 분리되었다. 인도 동북부 벵골 지역의 지배권은 벵골 술탄국 영국 동인도 회사가 차지했고, 무굴은 델리 일대만 통치할 정도로 영역이 줄어들었다.[218]

인도의 식민지화는 대영제국 프랑스 식민제국이 주도했는데, 7년 전쟁 도중인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 벵골 술탄국 동맹을 영국이 격파했고 프랑스는 인도 식민화의 주도권을 잃었고 영국이 벵골을 차지했다. 향후 100년 간 인도를 야금야금 먹어간 영국은 19세기 중반에 인도 대부분을 차지했다.[219] 영국은 산업 혁명의 힘으로 가격 경쟁력 있는 면직물을 판매했고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망했다. 동인도 회사는 세금을 무겁게 매겼으며 인도의 전통을 무시하고 기독교 선교를 했다.

이러던 도중, 영국 동인도 회사를 위해 복무하는 인도인 용병 세포이들에게 지급되는 총기의 탄약에 돼지의 기름이 발라져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220] 이 때문에 분노한 세포이들은 세포이 항쟁( 1857년 ~ 1859년)을 벌이고 델리를 점령해 무굴 제국 황제를 내세웠다. 그러나 영국군에게 진압되었다.

명목만 남은 무굴 제국은 1858년 영국에 의해 사라졌으며, 동인도 회사도 해체되어 인도 통치 개선법( 1858년)이 시행되어 영국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졌다. 1877년에는 인도 제국을 건국해 영국 국왕이 인도 제국의 황제를 겸했다.

19세기 힌두교를 개혁하려는 브라흐마 사마지 운동도 있었다. 힌두교의 순수한 교리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며, 람 모한 로이를 중심으로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카스트 제도 사티를 반대했다.

인도 제국이 수립된 이후 인도의 지식인과 관료, 부자 등 고위층들은 1885년 인도 국민 회의[221]를 창당했다. 영국은 인도인을 회유하기 위해 당을 지원했고 인도 국민 회의도 영국의 통치에 협조했다.

그러나 벵골 분할령( 1905년 ~ 1911년)이 내려지면서 인도 국민 회의는 반영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벵골 지역의 서부는 힌두교도가 많으며 동부는 이슬람교도가 많다.[222] 이에 따라 두 지역을 분리하고 종교 갈등을 조장해 민족 운동을 약화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인도 국민 회의가 틸라크의 콜카타 대회( 1906년)에서 스와라지(자치), 스와데시(국산품 사용), 영국제 불매운동, 교육 진흥의 4대 강령을 채택하면서 격렬한 반대를 벌였다. 영국은 1906년 전인도 이슬람교도 연맹이라는 단체를 지원해서 힌두교를 견제했으나 전인도 이슬람교도 연맹 역시 영국에 저항하자 결국 1911년 벵골 분할령은 취소되었다.
2.5.1.2.4. 동남아시아
교과서에서는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을 중심으로 다룬다.

먼저 중국과 가까워 오랜 기간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어온 베트남에서는 1884년~ 1885년 청나라가 청프전쟁에서 패배하자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고 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들어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유학자와 관료들은 프랑스를 몰아내고 응우옌 왕조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근왕(꼰브엉) 운동을 벌였으나 프랑스가 유화책을 펼쳐 사그라들었다.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 1904년 베트남 유신회를 조직했으며, 러일 전쟁 이후 동유 운동을 벌여 일본 제국에 유학생들을 벌였으나 프랑스가 방해하면서 일본에서 쫓겨났다.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벌어진 이후 1912년에는 광저우에서 베트남 광복회를 조직했고, 량치차오와 만난 이후 <베트남 망국사>를 작성했다. 독립운동가 판쩌우찐은 통킹 의숙이라는 교육기관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필리핀은 300년 이상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왔다. 독립운동가 호세 리살은 이에 저항해 1892년 필리핀 연맹을 조직해 필리핀인과 스페인인을 대등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했다. <나에게 손대지 말라>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했으며, 1896년 스페인 정부에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독립운동가 에밀리오 아기날도도 스페인에 저항했고, 미국-스페인 전쟁 중 독립을 선언해 필리핀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해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223]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독립운동가 카르티니는 인도네시아의 국모로 여겨지며 여성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학교를 설립했다. 민중 계몽을 위해 자바 섬에서 결성된 '부티 우토모'라는 조직도 있었고, 1912년에는 이슬람 상인들이 이슬람 동맹을 결성해 독립을 시도했다.

태국은 동남아 국가들 중 유일하게 서양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다. 짜끄리 왕조[224] 라마 4세가 근대화의 기틀을 닦았고, 라마 5세 때 일부 영토와 이권을 대영제국 프랑스 식민제국에 넘겨주면서 독립을 유지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충돌하는 완충지대로서의 성질을 활용했다. 사법 제도와 기술, 교육을 서양화했으며 철도를 건설하는 등의 개혁이 이뤄졌다.
2.5.1.2.5. 서아시아
오스만 제국( 튀르키예), 와하브파( 사우디아라비아), 카자르 왕조( 이란)에 대해 다룬다.

오스만 제국 1299년 건국되어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16세기~ 17세기에 최전성기를 누렸으나 제2차 빈 공방전에서 패배한 이후 쇠락했다. 18세기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발칸 반도 북부를 빼앗겼고, 러시아-튀르크 전쟁 동안 오스만의 봉신국 크림 칸국을 비롯해 북부 영토를 빼앗겼다. 19세기에는 프랑스에게 알제리를 빼앗겼고 발칸 반도 강역도 줄어들었으며 1829년에는 그리스가 독립하면서 영토가 크게 줄었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압뒬메지트 1세 탄지마트(은혜 개혁, 1839년 ~ 1876년)를 선포했다. 징병제를 실시하고 행정과 사법을 중앙집권적으로 개혁했고 의회의 권한을 키워 백성의 기본권을 확대했다. 이와 같은 정책 기조는 압뒬하미트 2세 시기까지 이어졌고 후기에는 미드하트 파샤라는 인물이 주도해 헌법을 제정했으나,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패배하고 각지에서 반기를 들자 압뒬하미트 2세는 개혁 정책을 그만두고 전제군주제를 부활시켜 강압적인 독재를 펼쳤다.

1908년 청년 튀르크당[225]이 쿠데타를 일으켜 오스만 제국의 정권을 장악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언론의 자유, 헌법 부활, 교육 개혁, 조세 제도 개혁 등을 실시했다. 그러나 튀르크 민족주의로 인해 다른 민족을 탄압하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1912년 발칸 전쟁이 일어나 발칸 반도의 영토도 수도 코스탄티니예가 있는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상실했다.

아라비아는 해안가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내륙에서는 여러 토후국들이 존재했다. 18세기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하브가 와하브파를 만들어 과거의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주장했다. 와하브파[226]가 세운 와하브 왕국은 1800년을 전후로 하여 거대해졌으나, 1810년대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후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1932년에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합하며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했다.

이란은 한때 사파비 제국을 세워 전성기를 누렸으나 사파비 제국 멸망 이후 분열을 겪다가 카자르 왕조에 의해 재통일되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과, 인도에서 북상하는 대영제국의 완충지대에 위치하는 바람에 영국과 러시아의 괴롭힘이 심해졌다. 1890년 영국이 담배 제조권을 손쉽게 구매하자 담배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활동한 인물이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이다.

이후 1906년 입헌 혁명이 일어나 의회가 수립되고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란은 이미 열강들의 반식민지가 된 상태였다.[227]
2.5.1.2.6. 아프리카
2015 개정에서 아프리카사는 대거 잘려나갔다. 이에 따라 근대사에서의 서양의 침입과 이에 대한 저항에 대해서 다루는 정도가 되었다. 이집트의 경우 아프리카로 묶였지만 사실은 서아시아와 더 가깝다.

이집트, 수단 공화국, 줄루 왕국(남아프리카), 나미비아,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정도의 내용이 남아 있다.

이집트 1517년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이래로 300년 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1805년 메흐메드 알리[228]가 자치권을 받아 이집트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이후 명목상으로는 오스만의 속령이었으나 사실상 독립국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되었다.[229] 1849년 메흐메드 알리가 사망한 후 1869년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를 지어주었으나 이에 따른 빚으로 수에즈 운하 회사의 주식을 영국에 대거 매도했고, 이때부터 사실상 영국의 영향권에 들어왔다.

이러한 외세의 간섭을 막고자 아라비 파샤 1881년에 난을 일으켜 민족주의 반영 운동을 벌이고 입헌 혁명을 주도했으나 진압당했고, 1882년 영국 치하 이집트가 되어 식민지화되었다.[230]

수단은 메흐메드 알리의 이집트에게 정복당한 이래로 이집트의 착취를 받았고, 이집트가 영국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영국인과 이집트인의 이중 착취를 당했다. 결국 1881년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마흐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17년간의 전쟁 끝에 1898년에 옴두르만에서 마흐디군이 궤멸되면서 마흐디국은 멸망했고 수단은 완전히 식민지가 되어 이집트와 영국의 이중 지배를 받는 앵글로-이집트 수단이 되었다.

줄루 왕국은 검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리는 영웅 샤카 1816년에 건국했다. 1879년 줄루 전쟁 도중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해 영국의 위상을 떨어지게 만들었으나, 결국에는 영국에게 패배해 멸망했다.[231]

나미비아에서는 헤레로족 1904년 독일 제국의 착취에 저항해 들고 일어났으나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로 인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232] 탄자니아(탕가니카)에서는 1905년 주술사들이 마지마지 운동을 벌였으나 역시나 독일 제국에게 진압당했다.

반면 에티오피아 제국에서는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이탈리아 왕국과 벌어진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도중 메넬리크 2세가 이끄는 에티오피아군이 아드와 전투(아도와 전투)에서 승리하며 독립을 유지했다.

2.5.2. 05-02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의 역사가 한 곳에 모이는 세계사의 하이라이트이자, 교과 과정에서 세세한 과정을 다루면서 내신시험이나 수능 등에서 학생들을 괴롭히기 좋은 단원이다.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전간기,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그 이전의 동맹국 협상국이 있던 시절부터 다룬다. 즉 1882년부터 1945년까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2.5.2.1. 세계 대전 발발 이전
교육과정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을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세력 갈등으로 보는 아주 일반적인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삼국 동맹 vs 삼국 협상, 범슬라브주의 vs 범게르만주의, 발칸 전쟁 이렇게 세 가지의 갈등을 위주로 배경을 다룬다.

삼국 동맹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이 맺은 동맹으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제국을 이끌던 1870년대 1880년대에 오로지 프랑스만을 고립시키기 위해 일궈낸 업적이었다. 그러나 3번째 황제인 빌헬름 2세( 1888년 ~ 1918년 재위)[233]가 즉위하면서 '비스마르크 체제'는 엎어지게 된다. 비스마르크 체제의 핵심은 독일이 평화를 유지하면서 유럽 모든 나라가 프랑스를 왕따시키는 것이었는데, 빌헬름 2세는 세계 정책(Weltpolitik)을 내세우면서 대외 팽창을 시도했고, 유럽 국가들은 오히려 독일에 위협을 느껴 독일을 견제하도록 태도를 바꿨다. 국내 교육과정에서는 3B 정책이라는 표현으로 독일의 팽창을 설명한다.[234]

이러한 독일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대영제국, 프랑스 공화국, 러시아 제국 삼국 협상이 이루어졌다. 삼국 협상은 한 순간에 맺어진 것이 아니며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1892년 러불동맹[235]이 먼저 체결되었고, 1904년 영불협상[236]이 이루어졌으며 1907년 영러협상[237]까지 이루어지며 완성되었다.

한편 동유럽에서 민족주의가 확산되자 러시아 제국은 발칸 반도로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범슬라브주의를 주장했다.[238] 이에 맞서 독일 제국은 통일 과정에서 나왔던 대독일주의를 계승한 범게르만주의[239]를 내세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유대감을 강화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08년에 보스니아를 합병하고 세력을 불리자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은 약해졌다. 이러던 도중 1912년 1913년에 두 차례에 걸친 발칸 전쟁이 벌어졌다. 제1차 발칸전쟁( 1912년)은 불가리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vs 오스만 제국의 구도로 벌어졌으며 오스만 제국이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며 패배했다. 제2차 발칸전쟁( 1913년)은 승전 이후 영토 배분 문제로 세르비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루마니아 왕국, 오스만 제국이 연합해 불가리아 왕국을 일방적으로 구타한 전쟁이었다. 불가리아 왕국의 패배로 끝났다. 이때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도왔고,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 러시아에 대한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
2.5.2.2. 제1차 세계 대전
발칸 전쟁 이후 국제사회의 위기는 매우 커졌다. 이 와중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 찾아왔다가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살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했다.[240] 이후 7월 위기로 번져서 전쟁 직전까지 갔다. 각국은 외교적 수단을 통해 어떻게든 전쟁으로 번지는 것은 막으려 했다.

그러나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가 세르비아 왕국에게 선전포고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동맹국에 가담했고, 대영제국, 프랑스 공화국, 러시아 제국, 세르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241], 미국 등이 협상국으로 참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특징은 기관총, 탱크, 잠수함, 전투기 등의 신무기가 등장하고 독가스와 같은 화학 대량살상무기가 등장해 반인륜적인 면모를 크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참호가 등장해 전선을 교착시키고 진격을 불가능하게 만든 참호전이 벌어졌고 세계 대전의 특징인 총력전이 이뤄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년 세계 평화를 위해 미국의 국제연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우드로 윌슨의 참여 의지에도 불구하고 미국 의회의 방해로 가입하지 못했다. 패전국인 독일과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가입은 많은 방해를 받았다. 독일은 1926년에, 소련은 1934년이 되어서야 가입할 수 있었다. 군사적 제재 수단이 존재하지 않아, 기구의 존재가 의미가 없어졌다.

1921년 각국의 군비를 축소하기 위해 워싱턴 회의가 열렸다. 1925년에는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 이후 생긴 국경 문제를 해결하고 독일이 다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928년에는 외교의 수단으로 전쟁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켈로그-브리앙 조약(일명 부전조약)이 체결되었다.

독일의 배상금은 배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높았기에 1924년 도스 안 1929년 영 안을 통해 크게 경감되었다.

전근대적인 제국들이 붕괴하고 민주주의가 생겨난 것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이다. 독일 제국이 무너진 이후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어 1918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패전 이후 계속 국권을 침탈당하다가 무스타파 케말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서 외국군을 무찌르고 1922년 오스만 제국을 폐지해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스만 제국이 사라졌다. 대신 1923년 튀르키예라는 튀르크 민족 공화국을 세웠다.[243]

제국들이 무너진 자리에는 동유럽 신생국들이 생겨났다. 헝가리 제1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폴란드 제2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등이 새로 건국된 것이다.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전쟁을 나가서 남자들이 없어지자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여성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져 여성 참정권 운동이 결실을 맺어 여성의 투표권이 확산되었다.
2.5.2.3. 러시아 혁명
4-4단원에 이어서 러시아사로 돌아가보자. 알렉산드르 2세( 1855년 ~ 1881년 재위) 암살 이후 알렉산드르 3세( 1881년 ~ 1894년 재위) 시기에 세르게이 비테를 중용해 러시아의 산업 혁명을 이끌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 계급이 나타나고 사회주의가 러시아에서 확산되었다.[244] 1894년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하자 니콜라이 2세( 1894년 ~ 1917년 재위)가 차르[245]로 즉위했다.

산업화로 사회문제가 심각해지자 1905년 1월 22일 노동자들이 니콜라이 2세에게 급료를 올려 달라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차르의 삼촌이 이들을 상대로 발포를 명령하며 시위를 이어나가던 노동자들이 학살당했다.( 피의 일요일 사건) 이는 차르가 노동자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 인민들에게 보여주었고, 러시아의 혼란을 가중시켜 당시 벌어지던 러일전쟁의 패배 요인이 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1906년 의회인 두마가 설치되어 형식상으로나마 입헌군주제를 도입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차르의 전제 군주권이 강력했다.

1907년 영러협상 타결, 1912년 1913년 발칸 전쟁 개입,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등을 거치며 러시아는 민생보다는 전쟁에 집중했다. 경제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1917년 수도 페트로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위가 일어나 노동자-군인-농민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군인까지 차르에게 등을 돌리자 당시 전쟁터에 있었던 니콜라이 2세는 폐위당했다. 이 사건을 러시아력 2월 혁명 또는 3월 혁명이라고 부른다.[246]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로마노프 왕조도 끝장났으며, 러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새로운 공화국의 주된 지도자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였다. 사실 러시아 공화국의 국호는 제대로 결정된 바가 없었고, 이 때문에 1917년의 이 과도기를 보통 '임시정부'라고 표현한다. 당시 러시아의 세력은 진보-보수 순서대로 볼셰비키- 멘셰비키-임시정부 세력-제국 세력이 있었고, 앞의 세 세력이 제국 세력을 몰아낸 것이 3월 혁명이었다. 이제 남은 세 개의 세력끼리 정권 다툼이 벌어졌다. 집권한 임시정부가 제1차 세계 대전을 이어나갔으나,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1차대전 반대파였던 볼셰비키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그리고 독일로 망명했던 혁명가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독일 제국의 도움으로 러시아로 돌아왔다.

1917년 11월 6일(러시아력 10월 24일)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를 따르는 볼셰비키는 행동을 개시해 임시정부의 거점을 공격해 러시아력 10월 혁명 또는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러시아 공화국도 붕괴되었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반혁명 세력들은 멘셰비키, 임시정부 세력, 제정 세력 할 것 없이 볼셰비키에 맞서 백군을 조직했고, 볼셰비키는 적군이 되어 러시아 내전( 1917년 ~ 1923년)이 발발했다.

소비에트의 첫 번째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 1917년 ~ 1924년 집권)은 1918년 독일 제국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공산주의 정책을 펼치며 토지와 산업을 국유화하고 부유층의 식량을 강탈해갔다. 이에 따라 경제 혼란이 일어나자 1921년 신경제정책을 시행해 자본주의적인 소유권의 개념을 일부 허용했다.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자마자 혼란스러웠던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내전이 거의 끝에 다다르자 1922년 12월 30일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건국되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얼마 뒤 병으로 앓아누웠고 실권은 후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이 가져갔다. 1924년 사망하면서 권력이 스탈린에게 넘어갔다.

소련의 두 번째 지배자 이오시프 스탈린( 1924년 ~ 1953년 집권)은 소련을 전체주의 공포정치 독재국가로 만든 인물이다. 인민들을 갈아넣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28년 ~ 1937년)을 시행했고 농업을 집단화한 중공업을 육성해 다음 공업화에 성공했다. 스탈린에게 먼저 대항했던 레프 트로츠키에 대한 숙청을 시작으로 1937년~ 1938년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대숙청을 당했다.

그러나 소련은 세계 최대 규모의 대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2.5.2.4. 중국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해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중국은 오랜 기간의 제정을 끝내고 중화민국이라는 공화국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 1912년 ~ 1916년 집권)가 집권해 혁명파를 다시 탄압했다. 그는 국내의 혁명파에게는 가혹했으나 일본 제국, 대영제국과 같은 열강들 앞에서는 약한 전형적인 강약약강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민족 운동은 신문화운동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창당자인 천두슈와 훗날 대만의 외교관이 되는 후스[247]가 주도하여, 잡지 신청년을 만들었다. 후스는 구어체를 문어체에 도입해 사용하자는 백화운동을 벌였다.[248]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다. 승전국인 일본이 독일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산둥반도의 이권을 요구하는 등 21개조 요구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으나 중화민국 북양정부( 1912년 ~ 1928년)가 이를 받아들이려고 했고, 분노한 대학생들이 베이징에서 21개조 요구를 철폐하고 산둥반도 이권을 반환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전국으로 퍼져 5.4 운동이 되었다.[249] 5.4 운동은 반제국주의 및 반군벌 운동이 되었고, 이 여파로 1919년 중국국민당이,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쑨원은 다시금 군벌 세력을 몰아내고 제대로 된 중화민국을 세우고자 했고, 소련의 볼셰비키들과 접촉해 공산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제1차 국공합작( 1924년 ~ 1927년)이 이루어졌다. 1925년 쑨원이 사망하자 국민당의 지도자는 장제스( 1925년 ~ 1975년 국민당 집권)가 되었다.

군벌들을 토벌하는 국민혁명( 1926년 ~ 1928년)이 시작되었고,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배신하며 제1차 국공 합작은 파기되었다. 1928년 수도 베이핑(現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를 난징으로 옮기면서 북벌이 완성되었다. 1928년 이후부터의 중국은 중화민국 국민정부( 1928년 ~ 1949년)라고 부른다.

공산당은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웠으나 국민당 정부의 탄압이 강해지자 대장정( 1934년 ~ 1936년)을 감행했다. 이때 많은 공산군이 사망했으며, 10만의 인원 중 산시성 도착 기준 6000명만이 살아남았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의 민심을 얻었다.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250] 등으로 중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내비치던 일본 제국의 위협이 커지고 있었는데 장제스는 공산당 때려잡기에만 바빴다. 결국 장쉐량 시안시에서 장제스를 감금하는 시안 사건( 1936년)[251]이 발생했다.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그만두고 일본과의 싸움에 임하기로 합의하고 풀려났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제2차 국공합작( 1937년 ~ 1945년)이 이루어졌다.
2.5.2.5. 인도와 동남아시아
인도 제국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하면 자치권을 부여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영국으로부터 받았으나, 막상 전쟁이 끝나자 그런 것은 없었고 되려 롤럿법( 1919년)이 제정되어 영장 없이도 인도인의 체포가 가능해졌다.

이에 맞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사탸그라하 운동을 벌여서 롤럿법을 폐지하고 자치권을 요구했다. 이때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의 일환으로 1930년대 초 소금 행진을 한 사례가 유명하다.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독립 동맹을 결성해 무력 투쟁을 벌였다.[252]

영국도 통치 방식을 바꾸어 1935년 신인도 통치법을 제정해, 군사와 외교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분야에서 인도의 자치를 허용했다.

베트남에서는 독립운동가 호찌민이 중국에서 베트남 청년 혁명 동지회를 창당했고, 1930년에는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다.[253]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 동맹이 독립운동을 벌였고, 독립운동가 수카르노 1927년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창당했다.[254]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냈고 계속해서 독립 요구가 있었다. 태국에서는 1932년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라마 7세 때부터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다.
2.5.2.6. 서아시아와 아프리카
튀르키예 오스만 제국의 제정을 폐지하고 무스타파 케말이 튀르크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건국한 나라다. 엄격한 세속주의와 정교분리 원칙, 일부다처제의 금지가 이루어졌으며 어려운 아랍 문자 대신 로마자를 도입해 식자율을 높였다.[255]

팔레스타인 지역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1915년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인의 독립 국가가 약속되었고, 1917년에는 밸푸어 선언으로 유대인의 독립 국가가 약속되었다.[256] 이중 조약이 체결된 셈인데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큰 문제가 되어 오늘날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간의 끊임없는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이집트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이집트 왕국이 세워졌으나,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관리하고 있어 1956년까지는 영국의 영향력에 놓였다.

이란에서는 레자 샤 팔라비( 1925년 ~ 1941년 재위)가 1925년 쿠데타를 일으켜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팔라비 왕조를 개창했다. 1935년 국명을 '이란 제국'으로 통일하고 서양식 교육을 도입하는 등의 개혁을 벌였다.[257]
2.5.2.7. 대공황과 전체주의
2.5.2.7.1. 대공황
미국사를 이어서 설명하자면, 남북 전쟁 종료 이후 미국은 재건 시대( 1865년 ~ 1877년)에 접어들어 국토 통합이 이루어졌고, 도금 시대( 1877년 ~ 1896년)에 경제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뤄 자본주의의 주도 국가가 되었다. 진보 시대( 1896년 ~ 1917년)에는 도금 시대에 생긴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인권 향상이 이뤄졌다. 1917년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시대( 1917년 ~ 1918년)를 맞이했고, 승전 이후에는 광란의 20년대( 1918년 ~ 1929년)에 접어들었다. 5-2단원에서 다루는 대공황 파트는 바로 이 광란의 20년대와 대공황 시대( 1929년 ~ 1941년)를 다룬다.

광란의 20년대가 진행되는 1920년대 네온사인 마천루로 상징되며, 오늘날의 대중문화, 대중음악 등의 기원도 이 시대이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 정부는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하면서 경제 문제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1929년 10월 24일 주가 대폭락 사건이 발생한다.( 1929년 월가 대폭락) 당시 미국은 세계대전 이후 공장을 과잉 가동하면서 과잉 생산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투자도 과도했다. 그런데 주가가 폭락하자 많은 투자자들이 망했고, 은행과 기업도 망했다. 실업자들이 늘어나 미국 경제가 무너졌고 이러한 경제 위기는 전 세계로 번져서 대공황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당선되어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수정자본주의( 케인스주의)를 받아들이고 뉴딜 정책이 시작되었다.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공공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향의 뉴딜 정책의 대표적인 내용으로는 최저 임금, 노동 3권 보장, 사회보장제도 실시, 테네시강 유역 개발, 농업 조정법, 라틴아메리카와의 무역 확대 등이 있었다.

영국 프랑스에서는 식민지를 하나의 경제 블록으로 묶어서 대응했다. 영국은 영연방을 활용해 파운드 블록을 형성했고, 프랑스는 프랑 블록을 형성했다.

한편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국민들을 선동하려는 이념으로 전체주의가 두각을 드러냈다. 개인보다는 국가와 집단을 우선시하고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 사상은 주로 이탈리아 왕국, 독일, 일본 제국, 소련 등에서 만연했다.
2.5.2.7.2. 이탈리아
이탈리아 왕국 동맹국을 배신하고 협상국에 붙어 승전국이 되었으나, 막상 얻어낸 것은 오스트리아의 일부 영토 정도로, 거의 없었다. 이때 등장한 베니토 무솔리니는 한때는 사회주의자였으나, 불공정한 전후 처리에 반발하면서 1919년 '전투 파쇼(Fascio)'를 창당하며 파시즘 사상을 내세웠는데, 1921년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발전했다. 1922년 로마 진군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이루어냈다.

1935년에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켜 에티오피아 제국을 불법 점거했으며, 국제연맹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1937년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1939년에는 알바니아 왕국을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2.5.2.7.3. 독일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다. 도스 안과 영 안 등으로 배상금이 감경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많은 액수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공황이 발생해 물가가 치솟았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나라에서 세계 역사를 뒤흔들어놓을 한 인물이 등장한다.

1889년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태생으로, 미대 입시에서 떨어진 것은 워낙 유명하고, 자국의 다민족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독일 제국으로 넘어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20년 만들어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나치)에 가입해 1년만에 당을 장악하고 1923년 뮌헨 폭동을 일으키다가 실패했다. 하지만 이때의 실패는 오히려 히틀러의 존재와 그의 사상을 독일 전체에 알렸다.

1933년 총선에서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압승했고, 아돌프 히틀러는 총리가 되었다. 3월 24일 수권법이 제정됨과 동시에 히틀러 독재 체제가 형성되었고, 명목상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는 남아 있었으나 유명무실해진지라 이 때부터를 나치 독일( 제3제국, 1933년 ~ 1945년)의 시작으로 본다.

베르사유 조약 내용의 불이행을 선언했고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으로 다시 국방력을 갖게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즘은 무솔리니의 파시즘에서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 게르만족 우월주의 등의 극단적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섞었다. 나치즘에서 열등한 인종으로 바라본 상대는 유대인, 슬라브족 등이 있었고 이 중에서도 유대인이 가장 잔혹한 학살( 홀로코스트)을 당했다.
2.5.2.7.4. 일본
일본 제국 메이지 시대( 1868년 ~ 1912년) 동안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되었고, 다이쇼 시대( 1912년 ~ 1926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해 쏠쏠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쇼와 시대( 1926년 ~ 1989년)가 시작되며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여파가 일본을 덮치면서 많은 실업자들이 나타났고, 일본군 군부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군국주의가 만연했으며 1932년 5.15 사건 1936년 2.26 사건으로 군부의 폭주가 시작되었으며 일본에서의 민주주의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대외적으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만주를 정복했다. 1932년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국한 뒤 1933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아이신기오로 푸이(前 선통제 1908년 ~ 1912년 재위)를 강덕제( 1933년 ~ 1945년 재위)로 즉위시켰다. 만주사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1932년 리튼 조사단이 찾아오자 1933년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의 무타구치 렌야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금방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 대학살을 벌였다.
2.5.2.8. 제2차 세계 대전
2.5.2.8.1. 전쟁 직전 (1936년 ~ 1939년)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퍼진 파시즘은 이웃 나라인 스페인으로도 퍼져 스페인 내전( 1936년 ~ 1939년)으로 번졌다.[258] 좌익 인민전선은 소련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고, 파시즘 세력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았다. 결국 1939년 프랑코가 승리하며 프랑코 정권(스페인국)이 수립되었다.

방공 협정(Antikominternpakt)은 1936년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사이에서 먼저 맺어진 조약으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맺어졌다. 이듬해인 1937년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합류하면서 추축국 삼국이 완성되었다.[259]

1938년에는 나치 독일에 의해 오스트리아 병합이 이뤄졌고, 다음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을 노려 주데텐란트를 얻어냈는데, 이때 뮌헨 협정을 맺으면서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아예 멸망시켜 체코는 보호령으로, 슬로바키아는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다음 상대는 폴란드 제2공화국이었다. 폴란드는 소련과의 완충지대였으므로 소련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1939년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나치 독일은 모든 전쟁 준비를 마쳤다.
2.5.2.8.2. 유럽 전선
2.5.2.8.3. 태평양 전선
일본의 제국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1939년 미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이후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화민국(China), 네덜란드(Dutch)가 ABCD 포위를 이루었다. 일본은 미국과 협상하기 위해 미국을 공격하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2.5.2.8.4. 전후 구상
2.5.2.8.5. 전후 처리 (1945년 ~ 1951년)
나치 독일이 패망한 이후 연합군 점령하 독일( 1945년 ~ 1949년)에서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1945년 ~ 1946년)이 개최되었다.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4개국의 분할통치를 당했다.[260]

일본 제국이 패망한 이후 연합군 점령하 일본( 1945년 ~ 1952년)에서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 1946년 ~ 1948년)이 개최되었다. 일본은 미군이 점령해서 더글라스 맥아더가 통치했으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1952년 주권을 회복했다.[261]

대서양 헌장의 내용에 따라 국제 연합 1945년 10월 24일 수립되었다. 국제 연합은 유엔 총회 안전보장이사회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회는 모든 회원국이 참여 가능하며 총회의 결정은 구속력이 없는 권고적 성격이다. 반면 안전보장이사회는 5개 상임이사국( 미국, 소련[262], 중화민국[263] , 영국, 프랑스)과 10개 비상임이사국으로 이루어져 있고, 안보리 결의는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국제연맹과 달리 유엔군을 보유하고 있어 무력 개입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무력을 사용하려면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중 단 한 나라라도 거부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2.6. 현대 세계의 변화

  • 학습 요소 : 냉전 체제, 제3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탈냉전, 세계 질서의 재편, 세계화, 과학 기술의 발전, 현대 사회의 갈등과 분쟁
[12세사06-01] 냉전 체제의 배경과 특징을 알아보고, 냉전 종식 이후 세계 질서의 재편에 대해 조사한다.
[12세사06-02] 세계화와 과학·기술 혁명이 가져온 현대 사회의 변화를 파악하고, 지구촌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려는 태도를 기른다.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 단원이다. 현대사에 대해 다루는 6단원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료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다루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들이 계속 발생함에 따라 없던 내용이 추가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세계사 교육과정은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사실 6단원에 포함된 대부분의 내용은 처음에 없었다가 여러 번의 개정을 거치면서 생겨난 것이다.

20세기 중후반에 발생한 냉전, 그리고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탈냉전까지가 현재 교육과정의 범위이다. 신냉전은 현재진행형이고 논란이 많은 주제이므로 따로 다루지는 않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시진핑과 같은 현직 지도자들도 외교적 문제가 있어 다뤄지지 않는다.

2.6.1. 06-01 (냉전과 탈냉전)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전개된 미국 소련간의 냉전, 1991년 이후 소련이 해체되며 찾아온 탈냉전 시대에 대해 다루는 단원이다.
2.6.1.1. 냉전 체제의 형성
2.6.1.1.1. 진영의 형성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나서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국가는 미국 소련이 되었다. 이제 세계적인 초강대국이 된 미국과 소련 간의 대립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을 위시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위시로 한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면서 냉전이 시작되었다.[264]

자본주의 진영 미국의 루스벨트 다음 대통령인 해리 S. 트루먼( 1945년 ~ 1953년 집권)이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해,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그리스 왕국 튀르키예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시작되었다.[265] 유럽은 전쟁 이후 폐허가 되었는데, 이들의 재건을 돕기 위해 조지 C. 마셜의 주도로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마셜 플랜이 전개되었고, 이후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세력에 편입되었고 두 번 다시는 제국주의 식민제국 시절로 돌아가지 못했다. 1949년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가 결성되어 군사적인 동맹까지 맺었다.

공산주의 진영 소련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의 점령지인 동유럽을 점령하고,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을 공산화시키면서 등장했다. 1947년 정보 기구인 코민포름을 조직하고 1949년 경제 기구인 코메콘을 창설했다. 1955년에는 군사 동맹인 바르샤바 조약 기구가 결성되었다.[266]
2.6.1.1.2. 동양에서의 충돌
한편 중일전쟁이 종료되자 중국에서는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 간의 제2차 국공합작이 파기되고 국공내전( 1946년 ~ 1949년)이 발발했다. 공산당은 소련의 점령지인 만주에서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민당이 유리했으나 공산당이 민심을 획득하면서 베이징을 점령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중화민국은 1949년 12월 7일 패퇴하여 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겼는데 이를 국부천대라고 부른다. 이후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중화민국(대만)의 구도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267] 중국 대륙은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 1949년 ~ 1976년 집권)이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한국도 독립했으나, 38도 선을 기준으로 미군정 소련군정의 분할 통치를 받았다. 남쪽은 대한민국,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리 독립했고, 1950년 6월 25일 김일성( 1948년 ~ 1994년 집권)이 이오시프 스탈린의 허가로 전면 남침하여 한국 전쟁( 1950년 ~ 1953년)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유엔군이 활약했고, 멸망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을 인천 상륙 작전 등으로 구제해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했다.[268]

1964년에는 베트남 전쟁 미국이 개입했다.[269] 미국은 북베트남 베트콩과 교전을 이어나갔으나, 게릴라전 앞에서 무너졌고 결국 1973년 철수했다. 미국의 베트남전 패전은 전쟁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고 1970년대 데탕트라고 불리는 냉전 완화에도 기여했다. 한편 베트남은 1975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침입해 멸망시키면서 공산화되었다.
2.6.1.1.3. 서양에서의 충돌
서구에서의 충돌은 1948년부터 1949년 일어난 베를린 봉쇄에서 나타나게 된다. 독일은 상술했듯 4개국에 점령되었는데, 프랑스, 영국, 미국이 점령지를 통합하고 화폐 개혁을 소련과의 상의 없이 진행하자 소련의 스탈린이 반발해 소련 점령지 한가운데에 있던 서구 점령지인 서베를린을 봉쇄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수송기를 가지고 서베를린에 압도적인 물자 공급을 했다.[270] 베를린 봉쇄는 실패로 끝났고 미국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1949년 서독이 수립되고, 소련은 소련의 점령지에서 동독을 수립했다. 이후에도 계속 동독의 주민들이 자유진영의 서베를린으로 도주하자 1961년 베를린 장벽을 건설했다.

미국과 소련 간의 관계는 1950년대 내내 악화되었고, 1962년 소련의 미사일이 쿠바에 설치되면서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다. 그러나 미국의 존 F. 케네디( 1961년 ~ 1963년 집권) 대통령의 적절한 대처로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지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271]
2.6.1.2. 제3세계의 등장
전 세계가 이러한 자본주의 vs 사회주의의 대립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인도처럼 비동맹 노선을 만들어 서로 협력한 사례도 있었는데 이를 제3세계 국가라고 부른다.[272]

제3세계가 처음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54년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개최된 콜롬보 회의이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 중국 쪽 대표 저우언라이가 만나 평화 5원칙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1955년에는 반둥 회의가 개최되어 여러 나라들이 함께 평화, 중립, 반식민주의를 내용으로 한 평화 10원칙을 내세웠다. 1961년에는 제1차 비동맹 회의가 개최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요시프 브로즈 티토, 인도 자와할랄 네루,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273]가 모여 제3세계 국가의 협력을 강화했다.

제3세계의 협력은 냉전의 완화에 기여했다는 평을 듣는다.
2.6.1.3. 냉전 체제의 완화
항상 미국과 소련 간의 팽팽한 긴장 관계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완화되는 계기도 있었다.

우선 소련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전체주의적인 독재를 펼치며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니키타 흐루쇼프( 1953년 ~ 1964년 집권)가 정권을 잡아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고 서구권과의 평화를 시도했다. 1955년에는 서독과의 국교를 수립했고 1959년에는 미국도 방문했다. 물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잠시 냉각되기도 했다.[274]

미국[275] 리처드 닉슨( 1969년 ~ 1974년 집권)이 1969년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아시아 개입을 줄이겠다는 선언을 했다. 1972년에는 마오쩌둥의 중국을 방문했고, 소련과는 전략무기제한협정을 맺었다. 1973년 베트남에서 철수했다.[276] 지미 카터( 1977년 ~ 1981년 집권) 대통령 때인 1979년 마침내 미중수교가 이루어졌다.

한편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은 강성 스탈린주의자였던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위기감을 안겨주었고, 1956년부터 중국과 소련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60년대에는 중국-소련 국경분쟁으로 확대되어 전쟁 위기가 생겨났다. 이렇게 같은 공산권 내에서도 극이 여러 개가 생겨난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또한 독자적 세력을 구축했다.

자본주의 진영에서도 극이 여러 개가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1956년 프랑스의 제2차 중동전쟁 개입을 미국이 방해하자, 이후 대통령이 된 샤를 드골( 1958년 ~ 1968년 집권)은 미국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나토를 탈퇴해 독자 노선을 구축했다.[277] 패전국 출신인 서독 일본 1960년대에 경제적인 급성장을 이루어 경제 대국 순위 3, 4위가 되었다.
2.6.1.4. 냉전의 종식
2.6.1.4.1. 소련
소련에서는 1985년이 되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년 ~ 1991년 집권)가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치의 민주화, 시장경제 도입, 동유럽 불간섭 등의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 진영은 무너져내렸다. 1991년 보수 세력의 8월 쿠데타로 잠시 구금되었으나 보리스 옐친이 이를 진압하면서 소련 공산당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유명무실해진 소련은 1991년 12월 26일 완전히 소련 해체를 맞이했다. 소련 대신 독립국가연합이 나타났다.

해체된 소련은 14개 구성국[278]으로 나뉘었다. 이후 대통령이 된 보리스 옐친( 1991년 ~ 1999년 집권)은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러시아 자체가 몰락하여 정치는 불안정해졌다.[279]
2.6.1.4.2. 독일 및 동유럽
서독[280]에서는 빌리 브란트( 1969년 ~ 1974년 집권)가 동방정책을 펼치면서 1972년 동독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1973년 국제연합에 동시 가입했다.[281] 동독에서는 1980년대부터 민주화 요구가 강해졌고, 결국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결국 헬무트 콜( 1982년 ~ 1998년 집권) 총리 때인 1990년 독일 재통일로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었다.[282]

동유럽에서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민주화가 계속 진행되며 공산권의 붕괴를 알렸다.( 1989년 동유럽 혁명)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는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 노조( 솔리다르노시치)가 1989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민주화되고 오늘날의 폴란드가 되었다. 헝가리 인민 공화국[283]에서도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1989년에 끝나 오늘날의 헝가리가 되었다.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1989년 12월 25일 인민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284]에서는 1989년 시위에서 바츨라프 하벨이 이끄는 시민 광장이 벨벳 혁명을 일으켜 민주화를 이끌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탄생했으나,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에 벌어진 논쟁으로 인해 1992년 12월 31일 평화롭게 분리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1993년 1월 1일 '벨벳 이혼'이 이루어져 체코 슬로바키아가 독립 국가가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서는 19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하자 분열의 조짐이 생겼고,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시작으로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분리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벌어져 나토의 공습을 당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285]
2.6.1.4.3. 중국
오늘날의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건국했다.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하자 대대적인 토지개혁 및 산업 국유화가 일어났다.

1958년 마오쩌둥은 인민공사를 조직하면서 대약진 운동( 1958년 ~ 1961년)을 벌였다. 그러면서 미국과 영국의 경제력을 순식간에 능가하겠다고 외치며 인민들을 갈아넣었다. 하지만 그 실체는 아무런 화학적 지식도 없이 무작정 철들을 토법고로라는 용광로에 때려넣어 질 낮은 철 양산하기, 제사해 운동으로 동물들을 학살해 생태계를 붕괴시키고 자연재해를 불러일으킨 것 뿐이었다. 코미디나 다를 바 없어진 대약진운동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후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의 실용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정치적 위기에 몰린 마오쩌둥은 대학생들을 선동해 홍위병으로 만들었으며, 문화대혁명( 1966년 ~ 1976년)을 일으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숙청했다. 4인방의 주도로 벌어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많은 중국의 문화재와 전통이 파괴되었고, 예술가 및 지식인들에게 탄압이 가해졌다.[286]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끝났으며, 덩샤오핑( 1976년 ~ 1992년 집권)이 권력을 차지해 4인방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후 실용주의 정책으로 흑묘백묘론(쥐를 잘 잡는 것이 중요하지 고양이의 색은 의미가 없다)을 내세우며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했다. 이때 경제특구로 지정된 곳이 광둥성의 선전시이다.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대 분야 현대화를 추진했고 1979년 미국과 수교했다.

중국의 경제 발전 이후 사회 문제가 생겨나자 1989년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했으나, 덩샤오핑은 탱크를 이끌고 이들을 강력하게 진압했다.( 천안문 6.4 항쟁)[287] 이후 개혁개방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가 당 내에서 생기자 1992년 남순강화를 단행해 개혁개방을 정당화했고 그 누구도 이에 대해 트집을 잡을 수 없었다.

1997년에는 홍콩이, 1999년에는 마카오가 중국으로 반환되었고, 2008년에는 2008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288]
2.6.1.5. 탈냉전
1989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1981년 ~ 1989년 집권) 대통령의 정책으로 소련이 크게 약화되었고, 다음 대통령 조지 H. W. 부시( 1989년 ~ 1993년 집권) 때는 1989년 몰타 회담이 개최되면서 냉전이 종식되고 탈냉전 시대에 접어들었다.
2.6.1.5.1. 세계 분쟁
미국과 소련 간의 이념 대립은 끝났지만, 국지적인 갈등은 더 늘어났다.

남아시아에서는 인도 파키스탄 간의 카슈미르 분쟁이 발생했다. 인도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무슬림이 많았던 카슈미르는 파키스탄에 귀속되어야 했으나, 지배층이 힌두교도였던 탓에 인도에 편입되어 문제가 생겼다. 이후 중국-인도 국경분쟁이 발생해 중국까지 개입하면서 카슈미르에서의 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개혁 정책이 이루어지다가 1970년대부터 소련의 개입으로 혼란스러워졌고, 1980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저항군인 무자헤딘이 등장했으며, 전쟁 종료 이후 무자헤딘은 여러 세력으로 흩어졌다. 이때 탈레반이 등장해 1996년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으나,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에 의해 쫓겨났다. 그러나 2021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다.

이라크는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정치적 혼란을 겪다가 혁명으로 공화국이 세워진 이란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 ~ 1988년)을 벌였다. 이때 사담 후세인이 독재를 벌였으며, 1990년에는 쿠웨이트를 침공해 강제 점령했다. 이에 서양의 분노를 산 이라크는 1991년 걸프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걸프 전쟁 이후 미군이 중동에 주둔하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심기를 자극했고,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무장 투쟁이 한창 중동 전역으로 수출되던 시기라 1990년대부터 이슬람 테러 단체들이 생겨났다. 이 중 알 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 2001년 9.11 테러를 일으켜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무너뜨렸다. 2003년 미국은 석유를 찾기 위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고 사담 후세인을 붙잡아 2006년에 처형했다. 그러나 전후 뒷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이라크 내전이 발발했고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의 등장으로 이어졌다.[289]

맥마흔 선언 밸푸어 선언으로 이중 조약이 맺어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도 분쟁이 벌어졌다. 1948년 영국이 물러가고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으나, 독립을 약속받았던 아랍인들이 반기를 들어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을 벌였다. 1964년에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가 세워져 이스라엘과 투쟁했다. 1994년에 가서야 평화 협상이 이루어져 요르단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 자치 정부가 들어섰으나, 국지전은 계속 일어났다.[290]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며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던 발칸반도에서도 또 문제가 발생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전쟁이 시작되었고, 1992년 독립을 선언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가장 강력한 대학살을 당했다. 1998년에는 코소보 전쟁이 벌어졌고, 유고 전쟁은 1999년 즈음이 되어서야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2003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변경했고, 2006년 몬테네그로가 분리되면서 세르비아가 되었으며, 2008년에는 세르비아에서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했다.

아프리카에서도 분쟁이 잦았다. 1950년대를 시작으로 1960년에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한번에 독립했으나, 이렇게 독립한 국가들은 대부분 독재 국가가 되었다. 벨기에 식민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르완다에서는 후투족 투치족 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원래 후투와 투치의 구분은 식민지 시대에 상당히 억지로 만들어진 것으로, 식민지 시절 투치족을 우대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그러다가 독립 이후 투치족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1994년 쥐베날 하뱌리마나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자 이를 명분으로 후투족이 선동당해 투치족을 학살했다. 투치족 또한 반격에 나서 후투족을 학살했다. 이렇게 발생한 르완다 내전 콩고 전쟁으로 번져 수단 공화국,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부룬디, 앙골라, 나미비아 등이 말려들어 아프리카의 세계 대전이 되었다.
2.6.1.5.2. 세계 경제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가 개최되어 기존의 금본위제를 무너뜨리고 미국 달러 기축 통화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회의의 결과에 따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국제통화기금(IMF)이 1945년에 설립되었다. 1947년에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이 체결되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으로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고, 1978년 이란 혁명으로 제2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사조가 나타났다.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의 정부 개입을 비판하고 자유 무역을 확대해야 된다고 보았다. 영국 마거릿 대처( 1979년 ~ 1990년 집권) 총리와 미국 로널드 레이건( 1981년 ~ 1989년) 대통령 때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한편 지역별로 경제 블록도 형성되었다. 제일 대표적인 것이 유럽 연합(EU)이다.
유럽연합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1967년 동남아의 ASEAN, 1989년 태평양의 APEC 등이 결성되었고, 북미에서는 NAFTA 1994년 결성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2002년 아프리카 연합(AU)이 탄생했다.

2.6.2. 06-02 (21세기의 세계)

세계사 과목의 마지막 소단원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거의 출제되지 않는다.

교통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21세기에는 세계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1947년 GATT의 체결과 1995년 세계무역기구의 출범으로 인해 자유 무역이 형성되었고, 1970년대 등장한 신자유주의가 세계화를 가속했다.

과학사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을 밝혀내며 원자력 기술이 등장했다. 이는 핵무기[291]의 등장으로 이어져 국제사회에서 상호확증파괴의 개념을 만들어냈고, 원자력 발전 문제와 관련해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등이 발생했다. 20세기에는 미국과 소련 간의 우주 경쟁[292], 유전 공학의 발전, 정보 통신의 발전[293]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생명 윤리에 관한 논쟁 및 개인정보 문제가 발생했다.

21세기 현재에도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민족 갈등의 대표 사례로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간의 중동전쟁, 유고슬라비아 전쟁, 르완다 내전, 체첸 문제 등이 있다. 종교 갈등으로는 카슈미르 문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활동 등이 있다. 영토 분쟁으로는 일본 러시아 간의 북방 4도 문제와, 일본- 중국- 대만 간의 센카쿠 열도 문제, 중국 동남아시아 간의 파라셀 군도 스프래틀리 군도 문제 등이 있다.

세계적인 수준의 문제로는 북반구 선진국과 남반구 개도국 간의 갈등인 남북문제와, 열대림 파괴, 오존층 파괴, 사막화, 생태계 붕괴, 지구 온난화 등의 환경 문제가 있다. 이에 따라 1997년 교토 의정서 2015년 파리협정 등이 있었다. 에너지, 여성 인권, 소수자 인권, 난민 등의 문제가 존재한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대확산됨에 따라 최근의 교과서에서는 신종 전염병의 출현 또한 언급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현행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세계사' 과목에 대한 서술이다.

3. 변화

  • 기존 2009 교과과정에 비해 내용이 대폭 축소되었다. 교과서 페이지수가 거의 2/3 수준으로 줄었다. 이렇게 분량이 줄어들게 된 것은 분량이 많아도 너무 많았던 2009 개정 세계사 교과서에 대한 반응이었다.
  • 2015 개정의 변경 부분을 보면 아프리카사, 동남아시아사, 아메리카사(미국사 제외), 오세아니아사 등의 전근대사가 사실상 다 빠졌다. 아프리카사와 동남아시아사는 근대 제국주의 시절 민족운동 부분만 간단하게 다루고 나머지 내용은 전부 날라갔다. 미국사를 제외하고, 아메리카사는 유럽사에서 신항로 개척 때 다뤄지는 내용을 제외하고 나머지 독립적으로 다뤄지는 부분은 전부 빠지게 되었다. 유럽사에서는 문화사, 사상사, 러시아사 등이 축소되었다. 2009 개정의 특징 중 하나인 문명간의 교류 강조도 다시 축소되었다. 중국사의 경우 교류사가 축소된 것을 제외하면 과거 교육과정과 큰 차이가 없지만, 전반적으로 서술이 간략화되었다. 동아시아사와 중복된다는 문제 제기 때문인지 최근 수능 세계사에서 출제 비중이 줄고 있다. 그밖에 서아시아사에서 박트리아사와 부와이 왕조 등의 서술이 제외되거나 축소되었다. 제외되지 않은 나머지 부분의 내용도 전반적으로 서술이 간략되었다. 좋게 말하면 외울게 적어져 학생들에게 더욱 어필할 수 있게 되었고, 나쁘게 말하면 반쪽짜리 유럽중심주의적 세계사가 되어버려 이를 '세계사'라 부르기에도 민망해진 상황.
  • 그렇지 않아도 양이 많았던 세계사의 분량이 2009 개정으로 대폭 늘어나자 원래도 비인기 과목이었던 세계사의 인기는 더욱더 바닥을 치게 되었다. 사회문화, 생활과 윤리 등을 가르치는 강사들은 대놓고 공부량이 세계사의 1/3밖에 안된다면서 사문이나 생윤을 잘 선택했다고 수업시간에 대놓고 얘기할 정도였다. 교사들 역시 대부분 사범대 시절 기존에 이 지역들의 역사를 심도 있게 배운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심도 있게 가르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역사학 학계에서도 고교 세계사 교과과정의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결국 교육 현장과 학계의 의견이 반영되어 2015 세계사 교과서 분량이 크게 줄어들게 된 것이다. 물론 2015개정 교과서를 두고 세계사 교육의 후퇴라고 반발하는 교수와 교사들도 있었지만 현재 고사 위기에 처한 고교 세계사 교육의 현실 앞에 이런 의견은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4. 교과서 출판사 목록

파일:Screenshot_20201208-120937~2.png
  •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는 다음과 같다.
    • 금성출판사(2017) - 김형종, 장문석, 서각수, 장두호, 김정희, 조예진
    • 미래엔(2017) - 최준채, 윤영호, 안정희, 남궁원, 조미영, 정선아
    • 비상교육(2017) - 이병인, 임승휘, 김태훈, 심원섭, 김민정, 황정미, 임태현, 이소영
    • 천재교육(2017) - 김덕수, 남종국, 조영헌, 신유아, 이은정, 방대광, 양택관, 정동연

5. 여담

5.1. 개편 논의

사실 7차 교육과정까지는 그럭저럭 나가는 과목이었으나 2009 개정 교육과정 이후로는 그야말로 찬밥 과목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지속적으로 교과의 개편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세계사 교과의 개편은 동아시아사의 개편과 맞물려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두 과목 모두 소수선택과목으로 전락된 상황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대비가 필요한 상황이며, 그런 의미에서 결국 킬러 교과서 하나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무래도 킬러 교과서는 학습 비중이 줄어들기 좋은 동아시아사가 될 것으로 보이며, 현행 동아시아사가 사실 동북아시아사에 가깝다는 점을 대체하여 동남아시아지역까지 포괄하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만들고, 과감하게 동아시아의 전근대사 부분은 과거 한국 근현대사와 국사가 따로 배치되었던 것 처럼 세계사가 맡도록 하는게 어떻냐는 입장이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사 교과 자체는 이미 축소할대로 축소되어 더이상 줄일 내용도 마땅치 않은지라 차라리 킬러 과목을 하나 만들어서 결국 같이 선택하게끔 하는게 더 나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윤리와 사상 세계지리가 각각 생활과 윤리, 한국지리의 존재로 인해 두 과목 모두 괜찮은 인기도를 유지하고 있다. 즉 세계사 자체를 줄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연스럽게 다른 역사 과목은 동아시아사의 킬러과목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을 보면 결국 동아시아사는 동아시아 역사 기행이라는 과목으로 진로 선택 과목화가 되어서 격하가 되었고, 세계사는 기존에 비해 내용이 약간 축소가 된 대신에 그동안 전문 교과 과목이어서 사실상 개설이 되지 않았고 교과서도 거의 없었던 현대 세계의 변화와 일반사회 계통의 경향이 강했던 세계 문제와 미래 사회를 융합하여 만든 역사로 탐구하는 현대 세계로 변화 시켜 현대사 내용을 융합 선택 과목으로 배우도록 개설이 되었다.

===# 연표 #===
파일:World_History_Chronology.png


[1] 나무위키의 우루크 시대는 기원전 4000년부터로 보고 있다. 문명의 정확한 등장 시기를 말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큰 차이는 없다고 봐야 한다. [2] 교과서에서는 '바빌로니아 왕국'으로 언급되며, 수능특강에서는 아카드와 우르 제3왕조가 모두 없으며 바빌로니아만 나온다. 실제 수능에서는 함무라비만 알아도 되는 수준이다. [3] 더 정확히는 기원전 3150년 전후로 보고 있으나 고교 과정에서 그 정도까지 알 필요는 없으므로 3000으로 반올림한 듯하다. [4] 교육과정에서는 배우지 않으며 수능 제시문에서 가끔 언급되는 정도의 인물이다. [5] 고조는 정식으로 받은 묘호가 아니고 정식 묘호는 태조이지만, 사마천의 사기에서 유방의 일대기를 고조본기라고 칭한 것에서 관습적으로 부르는 명칭이다. 태조보다 고조로 더 유명하므로 교과서상에서도 고조라는 표현을 채택한 듯. [6] 사실 대중들에게 알려진 삼국지도 삼국시대보다는 후한 말에 더 가깝다. 황건적의 난, 반동탁 연합군 같은 유명 일화들도 후한 말에 해당한다. [7] 순치제의 경우 1644년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국을 거의 통일한 중요한 인물이지만 자주 언급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수능특강에서는 순치제의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8]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9] 세계사 과목 전체로 보면 탄지마트를 시행한 압뒬메지트 1세도 있으나 여기서부터는 근대사로 간주하고 5단원에서 나온다. [10] 교육과정 상에서는 이때 도시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었다고 서술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코스탄티니예라고 주로 불렸고, 이스탄불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이기는 했으나 공식 도시 명칭이 된 것은 아니다. [11] 1538년 일어난 프레베자 해전인데, 교육과정 상에서 연도와 전투명은 언급하지 않고 그냥 유럽 연합 함대를 오스만이 격퇴했다는 서술로 대체한다. 참고로 프레베자 해전의 장소는 악티움 해전의 장소와 동일하다. [12] 멸망 이후 호타키 왕조, 아프샤르 왕조 등으로 분열되었는데 이 과정은 교육과정에 없으며, 이후 아프샤르 왕조를 카자르 왕조가 무너뜨리면서 근대사로 넘어간다. 카자르 왕조는 5단원에서 다룬다. [13]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 사이드 왕조, 로디 왕조로 교육과정상에서는 이 5개의 이름은 나오지 않으나, 로디 왕조만이 파니파트 전투에서 무굴 제국에게 패배한 나라로 가끔 언급된다. [14] 2대 후마윤 때 잠시 수르 제국에게 밀려나지만 교육과정에서는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 [15] 학계에서는 바다 민족설, 기후변화설, 지진설, 가뭄설 등이 추가로 논의되고 있고 일반적으로는 이 모든 원인들이 한꺼번에 엮이면서 멸망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16] 그러나 솔론은 고대 아테네의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고 지나치게 가혹한 아테네의 법률을 정상적으로 만들어 제대로 된 형량을 결정하고 성문법 체계를 갖추게 한 인물이었다. 물러난 이후 10년 간 여행을 떠났으며, 돌아온 이후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산악파와 메가클레스의 해안파, 리쿠르고스의 평야파가 대립했다. [17] 이후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가 참주가 되었으나 폭정을 벌이는 바람에 기원전 510년에 쫓겨났다. 히피아스를 쫓아낸 다음 아테네의 지도자가 된 인물이 바로 클레이스테네스이다. [18] 교육과정 이상으로 추가 설명을 하자면 도시, 해안, 육지 세 지역에서 트리튀스라는 구역을 10개 설치하고, 도시에서 한 개, 해안에서 한 개, 육지에서 한 개의 트리튀스를 뽑아 하나의 행정부족으로 묶으면 행정부족은 총 10개가 된다. 하나의 행정부족에서 50명씩 의원을 뽑아서, 50x10=500명의 의원으로 구성하는 것이 500인회이다. 도편추방제의 경우 클레이스테네스가 실시했다는 확증은 없으나 첫 시행 시기가 클레이스테네스의 통치 기간과 맞물리므로 일반적으로는 클레이스테네스가 실시했던 것으로 간주한다. [19] 페리클레스는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로 대중들을 이끄는 능력이 탁월했다. 기원전 460년대 아테네를 다스리던 에피알테스가 살해당한 이후 수장이 되었다. 교육과정 상의 서술만 보면 알아챌 수 없으나, 페리클레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진행되던 시대였다. 이때 페리클레스의 정적이었던 보수파의 대표 인물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기록한 투키디데스였다. [20] 교육과정에서는 페르시아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첫 12년을 주로 다루지만, 기원전 479년 이후에도 역으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하는 전쟁이 기원전 449년까지 이어졌다. [21] 교육과정에서 생략된 내용을 추가 설명하자면, 아테네의 패전 이후 스파르타에 의해 민주정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테베가 아테네를 도와 민주정을 되찾았다. 패권을 스파르타가 잡았으므로, 세력균형은 스파르타 vs 페르시아의 구도가 되었고,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의 적 아테네를 도왔다. 기원전 395년부터 기원전 387년까지 일어난 코린토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와 반스파르타 동맹 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은 비겨서 끝났으나 스파르타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에는 테베가 패권을 잡지만, 기원전 350년대에 헬레니즘 제국의 등장을 알리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나타난다. [22]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168년에, 셀레우코스 제국은 기원전 64년에, 마지막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기원전 30년 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하면서 헬레니즘 시대는 로마 시대로 넘어간다. [23] 키티온의 제논이 창시하여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위대한 철학자를 배출했다. [24] 에피쿠로스가 창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25] 로물루스, 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안쿠스 마르키우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26] 기원전 494년 평민들이 일으킨 성산 사건에 따라 창설되었다. [27] 켈트족의 침입, 라틴 전쟁, 삼니움 전쟁을 거쳐 피로스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이탈리아를 통일한 세력이 되었으나 이 전쟁들은 교육과정에서 다루지 않는다. 피로스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동맹이 피로스 1세를 상대로 싸워 이긴 전쟁으로, 피로스의 승리라는 표현의 유래가 된 전쟁이었다. [28]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초법적인 수단을 사용했고, 이는 로마 법체계에 혼란을 불러와 시민들 또한 초법적인 수단인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게 되었다. [29] 앞서 설명한 원로원 최종권고로 인해 법체계가 교란되었고, 기원전 1세기에 벌어지는 동맹시 전쟁, 술라의 내전, 카이사르의 내전과 같은 로마의 내전과 삼두정치는 이런 맥락 속에서 생겨났다. 교육과정에서는 생략하여, 내용은 줄었음에도 학생들은 더 어렵게 억지로 암기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30] 크라수스가 기원전 53년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며 먼저 붕괴했고 폼페이우스도 기원전 48년 이집트에서 살해당하면서 승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되었다. [31] 역시나 교육과정에서는 생략된 내용이지만,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살과 카이사리온의 살해를 통해 종식되고 로마의 속주 아이깁투스로 편입되면서, 기나긴 고대 이집트 문명이 막을 내렸다. [32]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우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도 겸한 인물이었다. [33] 마지막 오현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아들 콤모두스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후부터 혼란이 시작되었고, 193년에는 다섯 황제의 해라고 불리는 대혼란을 맞이했다.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세베루스 왕조를 이루지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사후 바로 이 군인 황제 시대가 235년부터 284년까지 49년 간 전개되었다. 49년 간 18명의 황제가 바뀌었다. [34]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35] 교육과정 상 서술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서로마와 동로마의 분리를 엉성하게 설명하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마치 다른 나라로 갈라져나간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특히 '서로마의 멸망'이라는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표현 때문에 이러한 오해가 심화된다. 결정타로 동로마 제국을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계속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칭하면서 기존 로마 제국과의 연속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그리스계의 별개의 국가인양 서술하는 바람에, 395년 분열 이후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별개의 나라가 새로 생겨난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하나의 나라, 두 명의 황제의 두 개의 관할구역일 뿐이다. 동로마 제국은 엄연히 로마 제국이며, 로마 제국의 최종 멸망 연도는 서로마의 멸망인 476년이 아니라 동로마의 멸망인 1453년이다. '고대' 로마의 끝은 476년이라고 할 수 있어도 로마 제국 자체는 476년을 끝으로 잡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36] 서력기원이 예수의 출생을 원년으로 하여 생겨난 역법은 맞으나, 서력기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계산 오류가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현재 예수의 추정 생년은 3~4년 정도 앞당겨졌다. [37] 바울이 가장 적극적인 선교를 했으며, 베드로는 로마에 정착해 로마 교회 초대 수장이 되면서 현재는 로마 가톨릭의 초대 교황으로 인정받고, 사도 안드레아스는 비잔티움에서 주교를 임명한 것을 이유로 정교회에서 초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로 인정받는다. [38] 이후 아리우스파는 게르만족을 상대로 포교를 벌였다. 아타나시우스파에 들어갈 경우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는 셈이 되므로 게르만족은 아타나시우스파를 피해 아리우스파를 믿었다. 그러나 서로마가 멸망한 후 프랑크 왕국을 세운 클로비스 1세가 아타나시우스파를 받아들인 이후로 게르만족들도 아타나시우스파로 포교되었다. [39] 궁극적으로는 인도유럽어족이 발원한 러시아 지역. 이후 게르만어파가 분리되면서 서진한 것이다. [40] 최근 연구 성과에 따라 흉노가 붕괴한 이후 서흉노의 일파가 중앙아시아 민족들과 융합되어 훈족을 이루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교과서에서도 본격적으로 훈족 = 흉노라는 다수설을 채택하고 있다. [41] 앵글로색슨족 로만 브리튼에 침입해 앵글로색슨 7왕국을 세워 오늘날 영국의 모태가 되었다. 클로비스 1세 갈리아 북부에 프랑크 왕국을 세워 독일 프랑스의 비조가 되었다. 고트족은 이베리아반도 이탈리아반도에 각각 서고트 왕국 동고트 왕국을 세웠으나 각각 우마이야 왕조 동로마 제국에게 멸망당했다. 교과서에서는 주로 지도로 제시된다. [42] 교과서의 서술은 딱 여기까지이며 이후 동고트 왕국 테오도리크 대왕이 오도아케르 왕국을 처단하며 오도아케르 세력도 멸망했다. [43]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삼분할된 시점 기준이며, 이러한 삼분할은 별개의 국가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서로마와 동로마처럼 같은 나라를 여러 명이 상속받은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다른 왕의 지배를 받으면서 특색이 달라졌고, 자연스럽게 프랑스 왕국 독일 왕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실제로는 삼분할 이후에도 세 나라의 국명은 계속 프랑크였다. [44] 그 이전까지 수많은 게르만족이 로마에 복속되지 않기 위해 아리우스파를 믿었으나, 클로비스 1세가 로마화를 위해 아타나시우스파를 받아들인 것이다. [45] 이때 피핀 3세가 자카리아 교황에게 왕이면서도 능력이 없는 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하느냐 능력이 있는데 왕이 되지 못한 자가 다스려야 하느냐고 따진 일화는 유명하다. [46]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 라벤나 총독부를 멸망시키자, 754년 피핀 3세가 군대를 이끌고 라벤나 총독부 지역을 점령한 다음 교황령을 건국해 교황이 통치하도록 만든 것을 전형적인 교과서식 서술로 모호하게 설명한 것이다. [47] 프랑스어로는 샤를 1세 또는 가장 유명한 표현으로 샤를마뉴라고 부르며, 독일어로는 카를 1세, 이탈리아어로는 카를로 1세라고 한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의 공통 조상에 해당하는 국가를 다스렸으므로 당시 유럽의 공용어인 라틴어식으로 카롤루스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48] 교육과정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으나, 남쪽으로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서쪽으로는 후우마이야 왕조와 전쟁을 하여 피레네 산맥을 점령했다. 동쪽으로는 아바르 칸국을 크게 격파해서 헝가리 일대까지 장악했고 동로마 제국과도 싸웠다. 북쪽으로는 작센족과 전쟁을 벌여 많은 게르만족을 학살했다. 당시에는 프랑크인과 독일인이 같은 게르만족이라는 의식이 없었고 가톨릭을 믿던 프랑크인에게 독일 게르만족은 원시 신앙을 믿는 마귀의 자식들 그 자체였다. [49] 서프랑크 왕국 프랑스 왕국은 동일한 나라이고, 동프랑크 왕국 독일 왕국도 동일한 나라이다. 교육과정에서의 서술의 부실함 때문에, 일부 역덕들은 987년 위그 카페의 즉위와 함께 '서프랑크 왕국이 멸망하고 프랑스 왕국이 시작되었다'라고 오해하나, 서, 중, 동프랑크라는 표현은 북한, 남한처럼 국명이 '프랑크'인 세 개의 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서, 중, 동을 붙인 것이고, 프랑스는 프랑크의 프랑스어식 발음일 뿐이다. 즉 서프랑크 왕국=프랑스 왕국은 1792년까지 존속한 것이 맞다.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도 1806년까지 존속했다. 단지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기 이전을 서프랑크, 동프랑크라고 부르고, 단절된 이후부터를 프랑스, 독일이라고 부르는 것 뿐이다. [50] 러시아 벨라루스의 어원이 되는 나라로, 러시아를 비롯한 동슬라브족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격 되는 나라가 노르만족이 세웠다는 사실을 자존심 상해하며 극구 부정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키예프 공국의 지배층이 노르만족이고 피지배층이 슬라브족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51] 독일 민족주의 음악으로 유명한 리하르트 바그너 북유럽 신화 팬이었고, 반지의 제왕도 북유럽 신화의 모티브를 받았다. 엘프도 북유럽 신화 용어이며 마블 코믹스 토르, 오딘, 로키 등의 캐릭터들도 북유럽 신화의 신들이다. [52] 다만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는 원래부터 그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 세력이 군주에게 자신을 봉신으로 받아들여달라고 한 다음 군주로부터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에 더 가까웠다. [53] 기독교 교세가 강했던 이집트에서는 이슬람 세력의 알렉산드리아 정복 이후에도 기독교가 어느 정도 유지되었고, 이는 콥트 정교회로 이어지나 콥트는 현행 교육과정에서 가르치지 않고 있다. [54] 황제 = 교황이 아니다. 국내에서 황제 교황주의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고 교육과정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오해가 가중되고 있다. 가톨릭의 교황에 대응하는 존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로, 로마 황제와 별개였으나 로마 황제의 개입이 매우 많았다. [55] 세계사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교육과정에서는 마치 성상 파괴 하나 때문에 동서 대분열이 일어난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효과를 주고 있으나, 실제로는 단지 이단적인 행동에 불과하여 금방 소멸했으며, 성상 파괴 떡밥은 8세기에 일어나서 같은 세기에 끝나버렸다. 동서 교회 분열은 하나의 계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의 갈등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다. [56] 상호 파문 사건도 동서 교회 분열의 기준을 정할 정도로 엄청난 이벤트는 아니었으며, 이라클리오스 동로마 제국의 군대 언어를 그리스어로 바꾼 것이 별 의미 없었던 사건인 것처럼 이 또한 단순 해프닝에 불과했다. [57] 이 또한 뒷이야기가 있다.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행한 학생들은 교황의 승리, 황제의 패배 쯤으로 알고 넘어가겠으나, 결국에는 하인리히 4세가 군대를 이끌고 교황의 세력을 격파해 이 사건은 황제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교황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58] 토마스 아퀴나스, 에라스뮈스, 이냐시오 데 로욜라, 장 칼뱅, 드니 디드로, 앙리 베르그송,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의 훌륭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59] 테마 제도를 통해 설치된 군관구는 상황에 따라 계속 변동되었다. [60] 다만 서슬라브는 키릴 문자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현재까지 개량된 로마자를 사용하고 있다. [61] 여기까지만 들으면 제국주의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제국주의는 근대 이후 민족주의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등장한 개념이기 때문에 십자군을 설명하면서 제국주의라는 표현이 나올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대외 팽창욕은 로마 제국, 당나라, 이슬람 제국 등 어느 사회에나 존재했다. [62] 이외에도 아테네 공국, 아카이아 공국, 테살로니카 왕국 등의 국가들이 세워졌으며, 동로마의 잔존국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나타났다. [63] 교육과정에는 없으나 13세기 몽골 제국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십자군과 함께 이슬람 세력을 협공했으며, 몽골에서 분리된 일 칸국이 아크레 함락 당시에 십자군을 도왔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64] Hanse는 상인들의 연합이라는 뜻인데, 항공사 루프트한자 또한 상업 항공 회사들의 연맹이라는 뜻이다. [65] 신바빌로니아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간 바빌론 유수에서 나온 표현이다. [66] 1409년에는 아비뇽과 로마를 모두 부정하고 피사에서 세 번째 교황이 등장하기도 했다. [67] 이후 헨리 3세가 즉위해 마그나 카르타를 없었던 것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13세기 중반부터 의회 시스템이 안착했으므로 의회민주주의의 시초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68] 랭커스터 가문의 상징은 붉은 장미였고, 요크 가문의 상징은 하얀 장미였는데, 훗날 19세기 소설가 월터 스콧이 1829년에 이 전쟁을 '하얀 장미' 가문과 '붉은 장미' 가문의 전쟁이라고 하여 장미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69] 이에 반발해 아스투리아스에서 펠라기우스( 펠라요)가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워 이슬람 세력에 저항한 것이 기독교 레콩키스타(재정복 운동)의 시초이다. [70] 1580년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와 연합되는 이베리아 연합이 세워졌으나 교육과정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71] 라틴어 Natalis(탄생)를 어원으로 하고 있으며 '다시'라는 뜻의 접두사 Re를 붙여서 파생된 단어다. [72] 정작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교황의 권위 추락과는 큰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아비뇽 유수가 마무리되며 교황의 권위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로마를 재건하면서 발생한 경향이 크다. 실제로 이 때문에 그림이나 조각상, 건축물을 보면 가톨릭적인 성향이 진하게 묻어나온다. [73] 그러나 그는 오히려 상류층들이 고상한 척 하며 사용하던 라틴어 위주의 문학을 극복하고, 일반 대중들의 천한 말 쯤으로 취급되던 이탈리아어를 사용해서 1342년에 칸초니에레를 발표했다. 또한 중세 흑사병으로 주변인들을 많이 잃었고, 이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긴 바 있다. [74] 훗날 그는 헨리 8세의 이혼을 반대하다가 처형당했다. [75] 이에 대해서 국내에서는 ' 고려에서 1377년에 먼저 직지심체요절이 발명되었으니까 최초는 아니다!'라며 구텐베르크의 업적을 폄하하려는 사조가 존재한다. 그러나 직지심체요절의 활자는 표의 문자 한자를 인쇄해야 했기에 수천 개의 활자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같은 종류의 활자를 대량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반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종류가 딱 로마자의 개수만큼만 필요했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그러므로 역사에 끼친 의의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훨씬 크다. [76] 헨리 8세의 이혼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럽은 살리카법 때문에 반드시 아들을 통한 왕위 계승만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가임 기간이 끝나가는 그녀를 폐위시켜 새로운 아내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교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외부의 간섭이 일어나자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수장령을 발표한 것이다. 수장령을 발표하자마자 영국의 교회가 가톨릭에서 즉각 분리된 것은 아니었으며, 단지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 교회를 감찰하고 재판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확인한 것 뿐이었다. 결국 이혼 문제에 대한 가톨릭의 간섭을 차단하고 남편에게 열심히 봉사했던 애꿎은 캐서린만 이혼당했다. [77] 헨리 8세 사후 에드워드 6세, 제인 그레이, 메리 1세 등이 즉위했으나 고등학교 세계사 수준에서는 이 과정을 이해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헨리 8세 다음에 엘리자베스 1세가 뒤를 이었다고 이해하고 넘어가도 충분하다. [78] 이 여파로 샤를 9세도 충격을 받아 사망했고 발루아 마지막 왕인 앙리 3세가 즉위했다. [79] 교과 세계사 기준으로 유럽사 버전 청나라로, 7명의 국왕 중 5명( 앙리 4세, 루이 14세,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80] 30년 전쟁의 원인에서 종교적 목적은 명분에 더 가깝고, 실제로는 복잡한 국제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신교 편에 섰다. 복합적으로 엮여서 벌어진 4개의 일련의 전쟁을 묶어서 30년 전쟁이라고 부르며, 고교 교육과정 수준에서는 이 4개를 이해할 능력까지 요구하지는 않는다. [81] 베스트팔렌 조약에 대해서는 사회과 교과목인 정치와 법 6단원에서도 다룬다. 여기서는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얻어냈다고 본다. [82] 동방에서 기독교를 믿는 나라가 이슬람 세력을 심판할 것이라는 전설이다. 몽골 제국이나 서요, 에티오피아 제국 등을 모티브로 했다는 설 등이 존재하지만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중국 쪽의 정복 왕조들과 이슬람 제국 간의 전쟁이 잦았고, 이에 관한 이야기가 구전을 반복하면서 왜곡되고 서로 섞여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83] 베링 해협을 통해 넘어간 원주민들이 먼저 발견했다느니, 바이킹들이 빈란드를 설치해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느니 말이 많지만, 빈란드는 잊혀졌으므로 유럽인의 기준에서 아메리카를 처음으로 발견해 그 파급력을 가지고 온 것은 콜롬버스가 실질적으로 최초임은 부정할 수 없다. [84] 마젤란 본인은 필리핀에서 전투 도중 살해당해 1519~1522 세계 일주는 끝마치지 못했다. 그러나 개인사적으로는 과거에 마젤란의 사지보다 동쪽에 왔다 간 적이 있으므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지구 한 바퀴를 돈 것은 사실. [85] 근현대 경제사의 큰 흐름인 중상주의-자유방임주의-케인스주의-신자유주의 흐름에서 첫 번째를 장식하는 중상주의의 근원이 되는 것이 상업혁명이기 때문이다. [86] 2012년 지구멸망설로 유명한, 2012년 12월 21일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낭설이 마야의 달력을 근거로 하나, 이는 마야의 달력 체계에 대한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달력이 끝나는 해가 2012년으로 달력이 끝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멸망설이었으나, 실제로 마야인들이 그렇게 융통성 없지는 않았으며 그저 다음 달력을 쓰면 그만이었다. [87] 토마스 홉스를 왕권신수설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홉스는 왕권을 중시하기는 했으나 신이 주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민들이 부여한 왕권을 절대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다. [88] 카를 5세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모두의 군주였으므로 제외된 듯 하다. 그리고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 곤살로 피사로가 주제를 모르고 대항하자 뜨거운 맛을 보여준 왕이기도 하다. [89] 교과상에서 생략된 흐름을 정리하자면, 1610년 앙리 4세가 암살당하자 루이 13세가 뒤이어 즉위했고, 리슐리외 추기경과 함께 프랑스의 기반을 다져 절대왕정으로 넘어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하자 즉위한 것이 아들 루이 14세이다. [90] 30년 전쟁 때 즉위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사망했다. 현대에 엘리자베스 2세가 그의 기록을 깰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목받았으나, 2022년 70년차로 사망하면서 아쉽게 기록은 갱신되지 않았다. [91] 다만 낭트 칙령 폐지 때문에 프랑스의 경제가 쇠락했다는 주장은 구 학설로 현대 사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반대로 신교 국가에서 탈출해온 가톨릭 상인들이 이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92] 마리아 테레지아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93] 교과상에서는 폴란드 분할에 대해서 절대왕정에 묻어가는 개념 정도로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세계사 내신시험이나 수능에서 만점을 맞으려면 절대로 교과식으로만 공부해서는 안 된다. 폴란드 분할은 3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1772년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1차, 1793년 러시아-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참여하지 않음) 때가 2차, 그리고 1795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폴란드를 완전히 지도에서 없애버린 것이 3차이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세 차례의 분할 모두에 참여했으며,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는 1차 때, 프란츠 2세가 3차 때 참여했다.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2세가 1차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2차와 3차에 참여했다. [94] 키예프 루스는 몽골 제국에게 멸망했다. 이후 타타르의 멍에라는 몽골 지배기를 겪다가 모스크바 대공국이 극복해냈고, 이 모스크바 대공국이 러시아의 전신이다. 1547년 이반 4세가 차르를 선포하며 루스 차르국이 되었고, 1598년부터 1613년까지는 혼란 시대에 접어들어 왕조가 류리크 왕조에서 로마노프 왕조로 교체되었다. 1613년 미하일 1세가 로마노프 왕조를 개창하고 뒤를 이은 차르들이 영토를 시베리아까지 넓혀 러시아의 판도를 만들었고, 1721년 표트르 1세가 서양화 정책을 펼쳐 러시아 제국으로 거듭났다. [95] 중간에 스킵된 37년을 부연설명하자면, 표트르 사후 예카테리나 1세가 즉위했으나 2년만에 사망했고, 1727년 표트르 2세가 즉위했다. 표트르 1세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왕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를 살해한 적이 있었는데, 표트르 2세는 그 알렉세이 왕자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표트르 1세가 벌인 정책들을 모두 취소했다. 1730년 즉위한 안나 이바노브나 1730년대의 10년 간 러시아를 지배했고, 1740년 이반 6세가 즉위했으나 1년만에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쿠데타로 쫓겨났다. 이후 21년 간 옐리자베타가 러시아를 통치하고 7년 전쟁에도 참전했다. 그녀의 사후 1762년 표트르 3세가 즉위했는데, 그는 거의 이겨가던 7년 전쟁을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팬심으로 걷어차버리는 패악질을 벌였고, 결국 아내인 예카테리나 2세가 그를 쫓아내고 스스로 러시아의 차르로 즉위하게 된 것이다. [96] 이후 파벨 1세가 즉위하나 1801년 암살당했고, 뒤를 이어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싸웠으나, 교과서에서는 나폴레옹의 행적만 언급할 뿐 알렉산드르 1세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시중의 문제집 선지 답지에서 그의 이름이 아주 가끔씩 나오는 경우가 있다. 알렉산드르 1세 이후 1825년 니콜라이 1세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고 30년간의 통치를 했으나 크림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질 때쯤 사망했고, 이 다음 즉위한 것이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끈 알렉산드르 2세이다. 교과과정에서는 이 알렉산드르 2세부터 4-4단원 국민국가 파트에서 러시아의 발전으로 나온다. [97] 교과서에서는 과학자로 다루고 있고 실제로 과학자로 간주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과학적인 연구보다는 철학에 더 가까운 직관으로서 지동설이라는 설명 방식을 도입한 것에 더 가깝다. 그래서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많이 들었고,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 등의 과학자들의 관측 자료를 통해서야 지동설이 인정받을 수 있었다. 티코 브라헤는 지동설의 근거가 미약하다고 생각해 지구를 중심에 두고 태양과 달이 지구를 돌고 있으며, 다른 행성들이 태양의 중심을 도는 지동설과 천동설의 중간 단계쯤 되는 과도기적 모델을 고안했다. [98] 피사의 사탑에서 실제로 떨어뜨려봤다는 식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실제 물리적으로 실험한 것은 아니었다. 추가로 갈릴레이 위성이라고 불리는 목성의 4대 위성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를 발견했으며 토성의 고리를 발견한 업적이 있다. [99] 문학 분야에서도 업적이 있는데 고전주의를 탈피하고 낭만주의 소설의 시대를 열었고, 자연주의 교육을 주장해 교육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100] 디드로 효과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한데, 그가 주장한 이론은 아니며 20세기 들어서 하버드대의 줄리엣 쇼어라는 경제학자가 디드로의 일화를 따 와 만든 이론이다. 디드로가 고급진 가운을 받았는데, 그것을 받자 눈이 높아져서 주위의 환경을 그 고급 가운에 맞추기 위해 과소비를 하게 되었다는 일화이다. [101] 이후 리처드 크롬웰이 취임해 1659년까지 통치하다가 무능해서 쫓겨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교과과정에서는 리처드 크롬웰이 등장하지 않는다. [102] 상비군을 만들고 세금을 왕이 독자적으로 걷으려는 행보를 보여 왕권을 강화하려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비판받기만 할 인물은 아니며 엘리자베스 1세의 다음 국왕으로 스튜어트 왕조의 개창자이며 킹 제임스 성경을 만들어 성경의 영어 번역본의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왕이 되기 이전에는 스코틀랜드의 왕이었으며, 나중에 잉글랜드 국왕까지 겸직하게 되면서 한 명이 두 나라를 다스리는 동군연합을 이루었다. 1607년 오늘날의 미국 동부 버지니아 주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설치한 제임스타운 식민지가 미국의 기원이 된다. [103] 중간에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 직에 있었으나 무능해서 쫓겨났다. [104] 교과상에서는 마치 가톨릭을 강요하는 전제 군주인 것처럼 설명하지만, 찰스 2세는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단지 영국에서 이루어지던 가톨릭 탄압을 막은 것에 불과하다. 과학기술을 지원했는데, 이 시기에 아이작 뉴턴이 활동했다. [105] 1828년 영국에서 자유주의가 확산되자 그때 가서야 폐지되었다. 이는 교육과정상에도 등장하는 내용이므로 알아두도록 하자. [106] 그 또한 교과서에서는 폭군처럼 묘사되나,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로 지나치게 정직하고 순진해 관대하고 유능했으나 정치가로서의 능력이 부족했던 인물이다. 친가톨릭이라는 표현 때문에 가톨릭 시대로 회귀하는 것처럼 비춰지나, 되려 당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가톨릭 강요의 일환에서 나온 낭트 칙령 폐지를 비판했고, 모든 종파에게 관용을 베풀려 했다. [107] 휘그당은 자유민주당이 되었고, 토리당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보수당이 되었다. [108] 조지 1세는 독일 출신으로 영어에 서투르고 영국에 대한 지식이 크게 많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서 의회가 자신 대신에 다스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즉위한 왕들의 이름이 조지 4세까지 계속 조지였기 때문에 조지 시대라고도 부른다. 조지 시대는 1714년부터 1830년까지로, 미국 독립 전쟁, 산업 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 중요한 이벤트들이 많았다. 윌리엄 4세가 재위한 1830년부터 1837년까지 포함하기도 하며, 윌리엄 4세 사후에는 대영제국 제국주의로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 1837년 ~ 1901년 재위)이 즉위하게 된다. [109] 미국사 최초의 시대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푸에블로 문화, 미시시피 문화, 이로쿼이 연맹 등을 만들었던 시기다. 1492년 콜럼버스가 도달한 후부터는 식민지 시대라고 부른다. [110] 사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훗날 미국 독립 전쟁을 이끄는 조지 워싱턴 같은 주요인사들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식민지에 대한 독립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적으로 상인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벌인 퍼포먼스였기 때문이다. 되려 이 사건 때문에 영국의 통치가 더 폭압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 [111] 일정량 이상의 세금을 직접 납부하는 성인 남성에게만 참정권 부여 [112] 1792년 8월 10일 봉기를 말한다. 교과서에서는 그냥 봉기를 일으켰다 수준으로 언급하고 넘어간다. [113] 우익 좌익 용어가 국민공회에서의 자리 배석에서 유래된 것이다. [114] 이를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라고 부르며 대영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과 맞서싸웠다. [115] 신성 로마 제국의 최후의 황제 프란츠 2세는 이미 1804년에 합스부르크의 영지를 모아 오스트리아 제국을 건국했다. 이렇게 세워진 오스트리아 제국은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이중제국으로 거듭나 1918년까지 존속했다. [116] 중간에 1807년 발발한 이베리아 반도 전쟁 등이 있었으나 교육과정에서는 프랑스가 스페인으로 쳐들어가는 화살표 그림만 보여주고 퉁친다. [117] 이후 다시는 탈출하지 못하고 1821년에 섬에서 사망했다. [118] 불과 18세기까지만 해도 자기가 '어느 나라의 국민이다'라는 의식은 매우 약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 당시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파리 사람들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고, 자기가 영국 출신이더라도 스페인에 가서 항해사가 될 수 있는 것이었고, 영국ㆍ프랑스ㆍ스페인ㆍ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와 같은 국가들은 왕들 입장에서는 '선대 왕에게서 상속받고 나도 누군가에게 상속해줄 땅'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카를 5세처럼 스페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모두를 동시에 지배하는 권력자가 나타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이 오스트리아의 왕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으니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라는 마인드는 없었다는 것이다. 단지 두 나라의 군주를 겸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19] 이후 마치니는 청년 이탈리아당을 창당해 이탈리아 통일을 추구하게 된다. [120] 이후 일련의 내란으로 1833년 그리스 왕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에게 점령당하는 우여곡절을 겪고 그리스 내전으로 냉전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으며 1967년 쿠데타가 일어나 그리스 군사정권이 들어섰다가 1973년 왕정이 폐지되고 1974년에 민주화되어 그리스 공화국이 되었다. [121] 라틴아메리카 하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권만 생각하기 쉽지만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로망스어군의 일부로 라틴어의 후계이므로 프랑스어권도 라틴아메리카에 속한다. [122] 시몬 볼리바르는 그란 콜롬비아라는 라틴아메리카 버전 미국의 첫 지도자가 되었으나 미국과 달리 지주층의 입김이 셌던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통일 국가가 들어설 수 없었고 결국 전부 갈기갈기 찢어져서 오늘날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브라질은 특이하게 포르투갈이 나폴레옹 전쟁 때 정부를 브라질로 이전하고 브라질과 대등한 관계로 이중 제국을 이루었다. 이후 왕실이 포르투갈로 돌아가려고 하자 왕실 구성원 중 한 명인 페드루 1세가 그냥 독립을 선포해버려 1822년부터 브라질 제국이 되었다. 브라질 제국은 1889년 공화국으로 전환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23]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4년 임기의 대통령을 2번 도맡아서 했고, 이후 대통령을 2번까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암묵의 룰이 되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깼고, 루스벨트 사후 법제화되어 4년 연임제가 되었다. 1797년 워싱턴이 물러나자 미국의 정치는 연방파와 반연방파로 나뉘어 흘러갔다. 2대 대통령 존 애덤스( 1797년 ~ 1801년)는 연방파인 연방당 출신이었고, 3대 토머스 제퍼슨, 4대 제임스 매디슨, 5대 제임스 먼로, 6대 존 퀸시 애덤스는 반연방파인 민주공화당 출신이었다. 민주공화당은 민주당 공화당으로 나뉘어, 오늘날까지 미국의 양대 정당으로 양당제를 유지하고 있다. [124]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하고 나서 파벨 1세가 즉위했으나 1801년 사망했고, 알렉산드르 1세 1801년부터 1825년까지 재위하며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했다. 신성 동맹을 제안해 빈 체제를 주도하다가 1825년 사망했다. 후술할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알렉산드르 1세 사후 왕위와 관련해서 벌어진 반란이다. 니콜라이 1세가 뒤를 이어 즉위하자 그의 형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를 옹립해 입헌군주제를 실행하기 위해 벌어졌다. 데카브리스트의 '데카브리'는 12월이라는 뜻의 러시아어이다. [125] 나폴레옹 전쟁 기간이던 1811년 조지 3세가 정신병에 걸리자 조지 4세가 섭정을 맡은 시대를 섭정(Regency) 시대라고 부른다. [126] 명예혁명 과정에서 등장한 법률로 1673년 제정되어 성공회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공직 진출을 방해했다. [127] 운동 자체는 실패로 끝났으나 결국 1867년 2차 개정으로 도시 노동자 남성에게 투표권을 보장했고, 1884년 3차 개정으로 농촌과 광산의 노동자 남성도 포함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여성 인권이 향상되자 1918년 4차 개정으로 21세 이상 남성과 30세 이상 여성에게 투표권이 보장되었고, 1928년 5차 개정으로 21세 이상의 모든 국민이 동등하게 투표권을 보장받았다. 1969년 6차 개정으로 연령이 내려가 18세 이상의 모든 국민이 투표권을 보장받는다. [128] 현재도 존재하는 보수당은 토리당을 전신으로 하여 1834년에 창당되었고, 자유당은 휘그당을 전신으로 하여 1859년 창당되었다. 이후 1988년 자유민주당이 되었다. 다만 현재 영국의 양당 구조는 보수당과 노동당의 대립 구도이다. [129] 나폴레옹 전쟁, 산업혁명, 도시화 등의 요인으로 식량 수요가 늘어났다가 전쟁의 종료로 가격이 폭락하자 식량을 팔아먹던 지주층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이었다. 1839년 맨체스터를 시작으로 반곡물법 운동이 일어나 1846년에 폐지되었다. [130] 교과서에서는 이 정도로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그는 무려 교황령을 멸망시키고 로마 공화국(1849년)을 세운 다음 잠시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프랑스 공화국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에도 공화주의를 주장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이탈리아 공화당으로 이어졌고 결국 1947년 국민투표로 이탈리아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131] 가리발디의 업적이 너무 대단했던 탓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통일 삼걸에도 끼지 못하고 과소평가당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또한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통일 이탈리아의 기반을 마련한 유능한 인물이었다. [132] 이후 교황은 주권 없이 바티칸에서만 종교 활동을 하도록 보장받았는데 이 시기를 바빌론 유수 아비뇽 유수에 빗대어 바티칸 유수라고 부른다. 1929년 파시스트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해 교황령은 로마의 극히 일부분인 바티칸 시국으로 다시 독립해 주권을 회복했다. [133] 나중에 이 아이디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베네룩스 국가들끼리 관세동맹을 체결하면서 부활했고, 이것이 조금씩 성장하면서 유럽 연합으로까지 커졌다. [134] 오늘날의 독일 국기 분데스플라게가 만들어졌고 실패 이후 대거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인들이 독일계 미국인을 형성했다. [135] 철혈 정책에 대해서도 오해를 가진 사람들이 매우 많다. 프랑크푸르트 의회 실패를 목격한 그가 군사력을 중시했던 것은 사실이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전쟁광의 이미지와는 정 반대였다. 비스마르크의 정책 방향성은 전적으로 독일의 국익을 위한 것으로, 19세기 후반 독일의 주도로 프랑스를 왕따시키는 국제 질서를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를 정도로 외교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단지 외교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았을 때나 전쟁이라는 방법을 사용했을 뿐이다. 되려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방법에 반발해서 비스마르크를 몰아낸 빌헬름 2세가 더욱 전쟁을 벌이고 다니며 세계를 들쑤셨고, 결국 빌헬름 2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책임을 물어 쫓겨났다. [136] 오스트리아에서는 얼마 후 대타협이 이루어져 헝가리와 대등한 관계로 이중 제국이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수립되었다. [137] 교과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시대구분이지만, 미국 독립 전쟁이 벌어진 시대를 혁명 시대( 1765년 ~ 1783년)라고 불리고, 독립한 식민지들이 연방으로 합쳐지기 이전을 연합 기간( 1781년 ~ 1789년)이라고 부른다. 미국 수립 이후에는 연방주의와 공화주의가 대립했는데, 연방주의가 우세했던 1788년부터 1801년까지를 연방 시대라고 부르며,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이 주도하여 공화주의와 제퍼슨 민주주의가 우세해진 시기 즉 1801년부터 1817년까지를 제퍼슨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루이지애나 구입이 이루어져 미국이 서쪽으로 넓어졌으며 1812년에는 영국과 미영전쟁을 벌였다. 제임스 먼로 재임기에 연방주의가 소멸하고 정치적 분쟁이 일어나지 않아 1817년부터 1825년까지를 호감 시대라고 한다. 앤드루 잭슨 잭슨 민주주의라는 포퓰리즘으로 대표되는 서부 확장 시기를 잭슨 시대라고 부르며 1825년부터 1849년까지이다. 이 다음부터 벌어지는 남부와 북부 간의 대립이 바로 내전 시대( 1849년 ~ 1865년)이다. [138] 대통령은 제퍼슨 데이비스. 참여한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미시시피 주, 앨라배마 주, 조지아 주, 루이지애나 주, 텍사스 주, 버지니아 주, 아칸소 주, 노스캐롤라이나 주, 테네시 주였다. [139] 독일의 1848년 3월 혁명 이후 넘어온 사람들, 1849년 아일랜드 대기근의 여파로 들어온 사람들, 영국에서 넘어온 사람들,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민자로 유입되었다. [140]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대영제국의 식민지 정책과 충돌할 운명이었고, 실제로 19세기 내내 영국과 러시아는 대립하며 그레이트 게임 체제를 유지했으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삼국협상 과정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을 맺으면서 그레이트 게임은 끝났다. [141] 알렉산드르 3세 시기에 러시아는 급격한 산업화가 이루어졌으며, 그의 사후 즉위한 차르가 러시아 제국 최후의 차르 니콜라이 2세( 1894년 ~ 1917년 재위)였다. [142] WEF 회장 클라우스 슈밥은 제4차 산업혁명(책)에서 산업 혁명의 역사를 4차례로 분석했다. 영국의 증기 기관을 시작으로 등장한 18세기 산업 혁명을 제1차 산업혁명으로 보고, 미국의 기술적 성장과 대량 생산 체제 확립을 제2차 산업 혁명으로, 1960년대부터 짧게는 2000년대까지, 길게는 지금 이 순간까지 컴퓨터, 인터넷, 네트워크 등이 주도한 정보화 혁명을 제3차 산업 혁명으로, 그리고 2010년대 이후의 인공지능 혁명을 제4차 산업 혁명이라고 불렀다. [143] 고대에도 알렉산드리아의 헤론과 같은 인물들이 높은 수준의 기계장치를 만든 적은 있었으나 사회적인 환경이 마련되지 않아 잊혀졌다. [144] 증기기관을 발명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으나, 증기기관은 1663년 에드워드 서머셋이 개발했으며 여러 번 개량되었으나, 제임스 와트가 개량한 버전이 효율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145] 그래서 법적으로는 전화기의 발명자로 되어 있고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서술하지만, 실제로는 안토니오 무치가 더 먼저 개발했다는 것이 밝혀져 최근에는 전화기를 단독 발명한 것으로는 거론되지 않고 있다. [146]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반동 전제군주정을 펼친 알렉산드르 3세 재위기간에 세르게이 비테의 주도로 엄청난 성장률을 이루었다. [147] 메이지 시대( 1868년 ~ 1912년)에 산업화가 이루어져 청일전쟁 러일전쟁 시기에 공업 강국이 되었다. [148] 산업 시대의 암울한 사회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준 범죄 사건이 1888년 발생한 잭 더 리퍼 사건이다. [149] 석유왕으로 유명한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노동조합을 억누른 것으로 유명하며, 노동자들에게 권익을 최대한 양보하며 정리해고도 거의 하지 않고 임금 인상도 많이 했던 허쉬의 창업자 밀턴 허시도 노동조합만큼은 인정하지 않았다. [150] 훗날 카를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하면서 초기 사회주의를 비난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151] 수학자 조제프 푸리에와는 관련없으며, 장 자크 루소의 뜻을 이어 아동에 대한 엄격한 교육을 비판하고,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도 이 사람이 만들었다. [152] 협동조합을 창시한 인물로 협동촌인 '뉴 라나크'를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 [153] 세계사를 물질적인 것의 흐름으로 바라보는 관점으로, 바로 위에도 언급된 고대 노예제-중세 농노제-근대 노동자 순서가 고안된 이론이다. [154] 일본에서는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X선을 아예 렌토겐(レントゲン)이라고 부른다. [155] 발명가인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그는 사업가에 훨씬 가깝지 위인전에 나오는 과학자 이미지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는 것이다. [156] 변역 과정에서 의미가 왜곡되어서 실증주의 역사학의 대표로 오해받는 인물이다. 정확히는 독일 역사주의에 해당하며 자연과학의 실증주의와는 그 결이 다르다. [157]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에 비해 식량이 단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하여 인구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 이론이다. 프리츠 하버가 비료를 개량해서 식량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깨졌다. [158] 1789년 프랑스 혁명에 관한 그림을 그렸다고 오해받는 인물이다. 그가 그린 자유의 여신 그림은 1830년 일어난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159] 사실 제국주의를 통한 식민지 경영의 이익은 엄청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영제국 몽골 제국을 능가하는 수준의 세계 최대 강역을 이룩하면서 소위 국뽕에 차오른 사람들이 제국주의라는 헛된 꿈에 빠져서 식민지를 유지하려고 했다. 결국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1940년대~ 1960년대에는 이름난 식민제국들은 이미 미국 소련에 비하면 약한 나라로 전락해버렸고 결국 이윤도 되지 않는 식민지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 제국 스페인 제국 등은 1970년대까지도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유지하며 버텼지만 결국에는 모두 뱉어냈다. [160] 정글북의 저자로 유명한 러디어드 키플링 백인의 의무라는 시를 써서 우월한 백인이 미개한 유색인종을 계몽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161] 1947년 인도 공화국이 독립하고 나서도 포르투갈은 끝까지 고아 식민지를 반환하지 않고 뻐기다가,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의 일환으로 1961년에 인도가 쳐들어와 강제로 빼앗았다. [162] 명나라에게서 빌린 것이 시초로, 청나라 때인 1849년 포르투갈의 영토로 아예 편입되었고,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포르투갈의 마카오에 대한 이권은 유지되었다. 1970년대 포르투갈이 민주화되자 중국과 일국양제 실시를 합의해서 1999년 반환했다. 현재 마카오는 특별행정구로 2049년까지 일국양제를 적용받을 예정이다. [163] 발견은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탐험 때 이루어져 1565년부터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가톨릭을 전파했다. 이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전하여 미국에게 빼앗겼다. [164] 제2차 세계 대전 일본 제국에게 잠시 빼앗김,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으로 독립 [165] 이후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해 구룡반도까지 획득했다. 1898년에는 더 내륙인 신계를 99년 조차하기로 했다. 신계는 1997년 반환 예정이었고 구룡반도와 홍콩은 영국에게 영구 귀속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일본 제국에게 빼앗기기도 했으며, 1984년 영중공동선언을 통해 구룡반도와 홍콩까지 모두 1997년 반환하기로 했고, 1997년 7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면서 현재는 홍콩특별행정구가 되었다. 홍콩은 일국양제가 적용되어 2047년까지 시행 예정이다. [166] 1824년에 식민지화되었으나 처음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 인도 제국의 일부였다. 1937년에 가서야 별개의 식민지인 영국령 버마로 분리되었다. 1948년 버마 연방으로 독립해 오늘날 미얀마가 되었다. [167] 이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일본 제국에게 넘어갔다. 일본의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이 세워지기도 했고 일본이 패망하자 독립운동가 호찌민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을 건국해 독립했다. 북베트남과 프랑스 간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이어졌고 1954년 프랑스의 패배로 끝이 나면서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했다. [168] 형태가 여러 번 바뀌어 필리핀 군도 미군사령부 군정청, 필리핀 군도 도민정청, 필리핀 자치령을 거치며 독립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일본 제국에게 점령된 적도 있다. [169] 1953년 피델 카스트로 쿠바 혁명을 일으켜 1959년 친미 정권이 무너졌고 공산화되어 제2세계에 넘어갔다. 얼마 후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는 문제와 관련해 일어난 것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이다. 쿠바는 현재도 전 세계에 5개뿐인 사회주의 국가이다. [170] 식민제국이기는 하나 독일의 통일이 늦어 1880년대에 가서야 식민지 개척이 이루어졌고 그마저도 30년만에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다 잃어버렸다. [171] 그리스 독립 전쟁, 크림 전쟁, 1877년 제12차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172] 18세기 사파비 제국이 멸망하자 아프샤르 왕조, 잔드 왕조 등으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이란을 통일한 왕조로, 이란의 근대 시대에 존재했고 무능한 행보로 인해 1925년 쿠데타로 멸망했다. 이후 이란에는 팔라비 왕조가 들어섰다. [173] 세로 방향으로 지른다는 뜻이다. [174] 이집트는 알다시피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805년 메흐메드 알리가 자치권을 보장받으며 반독립했고 1841년부터는 오스만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수에즈 문제로 인해 1880년대부터 영국령이 되었으며 1922년 법적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영국의 간섭을 받다가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의 쿠데타로 1953년 왕정이 폐지되고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 정부가 국유화하면서 완전히 독립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175] 19세기까지 남아프리카는 네덜란드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다. 그러나 보어 전쟁에서 네덜란드계를 몰아내고 영국령으로 편입되었다. 1948년부터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했으며 1961년 탈식민주의가 유행하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독립했으나 아파르트헤이트를 1991년까지 유지해 큰 비판을 받은 바 있다. [176] 독일 제국의 패전 이후에는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독일령 동아프리카 등을 접수해 각각 영국령 나미비아, 탕가니카 지역이 되었다. 나미비아는 남아프리카 연방에 편입되었다가 1990년에 독립했으며 탕가니카는 1961년 독립해 1964년 잔지바르와 통합되어 탄자니아가 되었다. [177] 가로 방향으로 지른다는 뜻이다. 횡()은 가로라는 뜻으로 횡단을 순우리말로 직역한 것이 '가로지르다'이다. 횡령도 뜻풀이하면 '가로채다'로 가로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178] 다른 프랑스 식민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등)와 큰 차이가 있는데 바로 프랑스의 본토처럼 여겨져서 프랑스 국내와 같은 행정 방식을 적용받았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행정구역 단위인 데파르트망, 아롱디스망, 캉통, 코뮌 등이 프랑스령 알제리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다른 식민지들이 독립해나갈 때도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만큼은 반드시 사수하려고 했으나, 알제리 독립 전쟁 결과 1962년 샤를 드골 대통령이 독립을 인정했다. [179] 마다가스카르 땅에 있던 메리나 왕국을 멸망시켜서 세운 식민지이다. 1958년 자치 공화국이 되어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식민지는 폐지되었으며 1960년 완전히 독립했다. [180] 독일 제국의 패전 이후에는 독일령 서아프리카 독일령 카메룬을 그대로 접수해서 각각 프랑스령 토고, 프랑스령 카메룬이 되기도 했다. [181] 루안다-우룬디(지금의 르완다 부룬디), 벨기에령 톈진, 탕헤르 국제지구에도 식민지가 있었으며 잠시 코마치나 섬을 지배한 적도 있지만 고등학교 교육과정 수준에서 굳이 알 필요는 없다. [182] 1885년부터 1908년까지 콩고 독립국이라는 이름으로 레오폴트 2세의 사유지가 되었고, 고무를 채취하면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서 손목을 잘랐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이 때문에 역덕계에서는 '손목국'이라 불리며 19세기판 나치 포지션으로 이미 악명이 높은 상태다. [183] 파시스트 이탈리아 침공으로 1935년부터 1941년까지 잠시 정복당했으나, 엄연히 국제 연맹 소속 국가이던 에티오피아를 불법적으로 점령했으므로 인정받지 못한다. [184] 중국은 18세기까지만 해도 오스만 제국과 함께 세계 최강국이었고, 불과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동방의 '잠자는 사자'로 여겨지며 감히 전쟁을 벌일 상대가 아니라고 여겨졌으나, 건륭제 시대부터 쌓여오던 부패 등 사회적 문제 때문에 청나라는 껍데기만 화려하고 속은 썩어있는 국가였다. 그 실체가 1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드러났을 뿐이다. [185] 이에 따라 영국령 홍콩이 1842년부터 1997년까지 대영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60년 베이징 조약 때 구룡반도까지 영역이 넓어지고, 1898년에는 더 내륙인 신계를 99년 조차했다. [186] 상대국에 있는 자국민은 자국의 영사가 재판할 수 있는 권리 [187] 상대국이 자국과의 조약에서 보장한 이권보다 더 이익이 되는 내용을 타국과의 조약에서 명시했을 경우, 그 이권을 자국에도 자동 적용시키는 것이다. A국이 B국에게 매년 500만 달러를 납부한다는 조약을 맺고 최혜국 대우를 적용했다고 가정하자. A국이 C국에게 매년 600만 달러를 납부한다는 조약을 맺게 되면 B국과의 조약보다 더 이익이기에 B국에게도 600만 달러 납부가 자동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188] 1843년 영국과 체결된 후먼 조약을 의미한다. 1844년 7월 미국과 왕샤 조약을 체결했고, 10월에는 루이 필리프의 프랑스와 황푸 조약을 체결했다. [189] 소유주는 영국인이었으나 승조원들은 전부 청나라 국민이었다. [190] 너무 말이 안 되는 억지였기에 하원에서 부결되어 끝나는 줄 알았으나 헨리 존 템플 총리가 하원을 해산하는 등의 조치로 통과시켰다. [191] 1858년 아이훈 조약을 통해 아무르 강 이북은 먼저 영토로 넘겼으며 연해주는 공동관리 대상이 되었으나 2년만에 베이징 조약을 맺으며 연해주도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192] 처음에는 서양도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인 줄 알고 내버려두었으나, 태평천국의 사이비 신앙이 밝혀지자 서양의 분노를 사서 청나라 한족 군대와 서양 군대가 연합하여 태평천국을 진압했다. 홍수전은 도주하다가 자살한 것으로 전해지며, 마지막 천왕으로 아들 홍천귀복이 즉위했으나 4개월만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193] 조선의 동도서기가 이 중체서용을 가져온 것이다. [194] 양무운동의 시작 시점인 1861년은 총리아문이 설치된 시점부터로 보며, 1860년대 1870년대에 군사력을 크게 길러 야쿱 벡의 반란을 진압하는 성과를 보였다. 1880년대에는 공장 건설로 공업이 발전했고 전신도 설치되었다. 1884년 북양함대가 건조되었고 한때는 세계 최강 수준이라는 말도 있었다. 물론 같은 해 벌어진 청프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양무운동에 대한 회의가 생겨났고 1895년 청일전쟁 패배로 끝났지만 말이다. [195] 중국의 언론인으로 본 문서 맨 처음의 문명 발생 파트에서 세계 4대 문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인물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196] 교과서에서 '민족 운동' 정도로 미화된 것과 달리 의화단은 나치 뺨치는 만행으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준의 폭동이었다. 이들은 스스로가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삼국지, 수호전의 등장인물들을 신으로 숭배했다. 200명 가까이 되는 서양 선교사들과 일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45000명의 중국 기독교도들이 학살당했다. 서양 여성과 기독교도 중국 여성을 발견하는 즉시 집단으로 강간해서 살해하고 매장했다. 여성은 강간하여 가슴을 짓누르고 고문하여 죽였고, 남성은 붙잡아서 음경을 절단하거나, 불에 굽거나, 끓는 물에 삶거나 산 채로 매장하거나 하는 패악질이 벌어졌다. [197] 다만 당시의 황제 광서제는 어차피 실권이 없었기에 입헌군주제를 하나 마나 광서제의 입장에서 다를 바는 없었다. [198] 세계 역사가 민족-민권-민생 순서대로 이어진다고 봤고, 유럽 역사에 대입했을 때 로마 제국의 붕괴와 함께 민족에 기반한 국가가 탄생했고, 시민 혁명을 통해 민권이 퍼졌으며, 이후 근대의 유럽에서는 민생을 중시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중국에도 이 이론을 적용할 경우 청나라를 타도해 한족의 국가를 세우고(민족), 전제군주제를 뿌리뽑아 공화정을 수립하고(민권), 이후에 민생을 잡는 순서가 만들어진다. [199] 1906년생으로 본명은 아이신기오로 푸이. 덩샤오핑보다 어리다. 1908년 광서제가 독살당하며 즉위했고 신해혁명 이후에도 청나라 소조정 1924년까지 유지되어 활동했다. 1932년 일본 제국이 만주국을 수립하자 '강덕제'라는 명칭으로 즉위했으나 1945년 8월 만주국이 멸망하면서 체포되었고, 이후 정원에서 일하며 문화대혁명에 휘말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1967년 사망했다. [200] 잭슨 시대 1840년대의 미국은 이제 막 서부를 얻어 처음으로 태평양에 도달했고, 태평양을 넘어서 서양 열강처럼 행사하기 위해 처음 도달했던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일본이었다. [201]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처음 맺어질 때는 크게 불평등한 요소는 많지 않았으나, 일본에서 존황양이 세력들이 서양을 방해하자 협정 관세 원칙에 따라 막부에 책임을 물리기 위해 관세를 미국에 유리하게 조정하면서 불평등 요소가 커졌다. [202] 지금의 일본 규슈 가고시마현. 영국 사쓰에이 전쟁을 벌여 패배해 양이를 포기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에 성공해 일본 제국 해군의 기원이 되었다. [203] 지금의 일본 주고쿠 야마구치현. 요시다 쇼인, 이토 히로부미 등을 배출했으며 일본 제국 육군의 기원이 되었다. [204]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1867년에 메이지 천황에게 정권을 반납한 사건을 대정봉환이라고 부른다.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1868년 일본 제국이 수립되었으며, 이에 반발한 구막부세력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신정부군과 보신전쟁을 이어가났다. 신정부군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았으며, 구막부군은 마지막에는 에조 공화국이라는 일본 역사상 유일한 공화국을 세우며 저항했지만 1869년에 신정부군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했다. [205] 메이지 덴노가 메이지 연호를 발표한 1868년 10월 23일부터 그가 사망하는 1912년 7월 29일까지를 말한다. [206] 일본 법률에서 도쿄를 수도라고 명시한 바가 없기에 도쿄가 수도가 아니라는 극소수의 주장도 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수많은 정부기관들이 소재하고 사회적으로나 법 관례적으로나 도쿄를 수도로 간주하고 법률과 행정의 절차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국가원수인 천황이 도쿄에 기거하므로 도쿄는 일본의 수도가 맞다는 것이 대다수의 관점이다. [207] 다만 서양의 작위 후쿠자와 유키치가 번역해 동양의 오등작에 대입해 고위층의 작위를 만들었다. 이는 일본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야 없어졌고, 천황제가 아직 존재하므로 신분제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식적인 신분은 아니지만 암묵적인 차별을 받는 부라쿠민 문제도 남아 있다. [208] 가장 유명한 사례가 일본 서브컬쳐에서 굉장히 자주 다루는 폐도령이다. [209] 제국의회는 양원제로 귀족원 중의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890년 총선거로 처음 개원했으며, 귀족원은 상원의 역할로 일본 제국이 소멸하며 참의원이 되었고 중의원은 하원의 기능을 수행하며 현재도 존재한다. [210] 일본제국 헌법이 천황에게 강력한 권력을 부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메이지 덴노 다이쇼 덴노는 이 권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웬만하면 내각과 의회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편이었다. 오히려 허수아비로 알려진 쇼와 덴노 초기에 권력을 더 많이 사용했다. [211] 한국(조선)을 정벌하자는 것이다. 유신삼걸 중 한 명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했다. 일본 제국이 수립된 이후 조선과 국교를 수립하려고 했으나, 흥선대원군 치하의 조선은 청나라만을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일본의 국서에서 스스로를 황제, 황조, 황상 등으로 칭하자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정한론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정한론보다 더 시급한 국내 개혁을 해야 했고, 결국 정한론파들은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사퇴한 후, 정한론파와 내전이 벌어져 세이난 전쟁으로 번졌다. 정한론파는 일본 정부에 의해 진압당했으나, 1875년 조선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면서 그 아이디어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212] 대중적으로 알려진 대만 침공은 1895년 청일전쟁 과정에서의 대만 침공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1874년 대만 출병도 있었다. 미야코 섬 조난 사건을 명분으로 벌어졌다. [213] 류큐는 1609년 사츠마의 침공 이래로 사츠마 번의 속국이었으나 폐번치현 이후 1872년에 제1차 류큐 처분으로 인해 류큐 번으로 전환되었다. 이 때문에 류큐는 일본의 유일한 번이 되었다가 이후 현으로 전환되었다.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로서 1972년까지 지배받다가 일본에 반환되었다. [214] 이에 따라 주나라 시절부터 이어져내려오던 중국의 외교 체제인 조공책봉관계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15] 이에 따라 대만청치시기가 종료되고 대만일치시기로 들어섰다. 대만인들은 일본의 지배를 거부하고 타이완 민주국을 건국했으나 금방 일본군에게 진압당했고 50년 간의 일제강점기가 찾아왔다. [216] 영국과 러시아는 세계의 양대 패권국으로서 19세기판 냉전인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1901년 영일동맹의 체결로 영국은 일본을 러시아 견제를 위해 활용했다. 러시아는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의 내부 문제도 있었으며 발트 함대가 일본으로 가기 위해 희망봉을 돌아서까지 가면서 많은 손해를 입은 탓에 일본군에게 금방 격파당했다. 영국이 지원하는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그레이트 게임은 종료되었고, 더 큰 상대인 독일 제국과 맞서기 위해 1907년 영러협상이 이루어져 삼국 협상 체제에 돌입했다. 이는 삼국 동맹과 충돌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다. [217] 1897년 조선의 고종이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하며 세워진 국가. 광무개혁 등을 진행했으나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10년 일본에 병탄됨 [218] 이외에도 남부의 마이소르 왕국, 아프가니스탄에 세워진 두라니 제국이 인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219] 인도는 1750년대부터 1840년대까지의 100년 간 사실상 도시국가 수준이 된 무굴 제국을 제외하고 마라타 제국, 시크 왕국, 마이소르 왕국,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 이렇게 4개 국가가 지배했다. 먼저 인도 남부에 있는 마이소르 왕국이 먼저 멸망했는데 영국과의 마이소르 전쟁에서 패하면서 1799년 영국에 편입되었다. 마라타 제국은 1775년부터 1818년까지 영국과 영국-마라타 전쟁을 벌였고 1818년에 멸망했다. 시크 왕국은 원래 종교집단이었으나 고빈드 싱 이후로 군사 조직으로 성장했다. 결국 1799년 란지트 싱의 주도 아래 왕국으로 거듭났으나, 잇따른 영국-시크 전쟁의 결과 1849년 멸망했다. 마이소르, 마라타, 시크를 모두 제압한 영국은 일부 외국의 식민지를 제외한 인도 대부분을 통일했다. [220] 영국의 조사 결과 소 기름은 확인되었고, 돼지 기름은 확인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사실일지는 의문이며, 사실 여부와 별개로 소문이 퍼져 인도인들의 국민감정을 자극했다. [221]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 현재도 인도의 주된 정당으로 남아 있어 자와할랄 네루 등의 총리를 배출했다. 인도 인민당과 대립하고 있다. [222] 실제로 이 벵골 분할령 자체는 실패했으나 1947년 인도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지역을 파키스탄에 귀속시켰고, 이때 서벵골은 인도에 귀속되어 현재 웨스트벵골 주가 되었고, 동벵골은 파키스탄에 귀속되었다가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을 통해 1971년 방글라데시라는 독립국으로 분리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벵골 분할은 한참 지나서 실현된 셈. [223] 이후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등의 과오도 있었다. 독립 이후 일본 협력 혐의와 관련해 징역을 살다가 복권되었고 1964년 사망했다. [224] 현행 교육과정에서는 잘려나갔으나 이전 교육과정에 존재했던 아유타야 왕국의 다음에 등장한 왕조이다. 태국은 원래 크메르 제국과 같은 캄보디아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수코타이 왕국 때 독립한 이래로 아유타야 왕국 때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아유타야 왕국은 꼰바웅 왕조가 다스리는 버마(미얀마)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버마는 얼마 뒤 물러갔고 태국에서는 분열기가 진행되다가 보로마라차 4세(딱신 대왕)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를 톤부리 왕조라 부른다. 그러나 딱신은 살해당했고, 그의 동료였던 라마 1세가 개창한 것이 짜끄리 왕조이다. 현재도 태국의 국왕을 배출하고 있는 왕조로 라마 10세가 아직까지 통치하고 있다. [225] 1889년에 비밀 결사로 시작해 20세기 초에는 오스만 제국의 정권을 장악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해산되었다. 영어로 Young Turks라고 부르는데 대한민국 가수 영턱스클럽의 어원이 되었다. [226] 특히 사우드 가문이 적극적으로 와하브를 도왔는데, 사우드 가문은 훗날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하게 된다. [227]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받았고,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빠지자 이란 북부에서 오스만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벌였다. 전쟁이 끝나자 공산세력이 유입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고, 레자 샤 팔라비가 쿠데타를 일으켜 카자르 왕조를 끝장내고 페르시아 제국의 최후의 왕조 팔라비 왕조를 개창했다. [228] 교과서에서는 무함마드 알리라는 표현을 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함마드 알리라고 하면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를 떠올리는 데다가 그는 아랍인도 아니고 오랫동안 튀르크인과 부대끼며 살아온 인도유럽어족의 알바니아인이었기 때문에 하술할 때는 튀르키예어식 표현인 메흐메드 알리라고 표현하도록 한다. [229] 이는 아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당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으로 운영된 이집트 제26왕조의 사례와 비슷하다. [230] 메흐메드 알리의 왕조는 계속 유지되어 1953년 왕정 폐지까지 이어졌고, 영국 치하 이집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1919년 이집트 혁명으로 인해 1922년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한다. 그러나 30년 간 실질적인 영국의 간섭을 받았고,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의 쿠데타와 1953년 왕정 폐지로 인해 이집트 공화국이 세워지고 1956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영국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영국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이스라엘과 함께 제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으나 미국 소련의 방해로 실패했고 이집트는 영국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제2차 중동전쟁에서의 이집트의 승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에 밀려 패권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보여준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231] 줄루의 군주제는 멸망 이후에도 유지되어 현재도 비주권군주제로 왕을 뽑고 있다. [232] 나치 독일 멸망 이후 독일은 이것이 '독일 제국'이 벌인 일이므로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버티다가 2016년이 되어서야 독일 정부에서 이를 공식으로 인정하고 사죄했다. [233] 개창자 빌헬름 1세 1888년 3월 9일 사망하고 아들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했으나 3달만에 사망하고 6월 15일 프리드리히의 아들이자 빌헬름 1세의 손자인 빌헬름 2세가 뒤를 이은 것이다. [234] 3B 정책이라는 용어는 한국과 일본에서만 사용되는 용어이다. 일본인들 특유의 3대 OO과 같은 숫자 3에 대한 집착 때문에 억지로 끼워맞춘 경향이 강하다. 베를린, 이스탄불, 바그다드를 잇는다고 3B라고 부르는데, 이때 이스탄불의 수천년 전 과거 고대 그리스 시절 이름인 비잔티움을 갖다 쓰면서 이니셜이 모두 B이므로 3B라고 부른다. 독일이 이 세 도시를 이으려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정도로 거창한 정책은 아니었다. 하술할 3C 정책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나마 3C 정책은 도시의 옛 이름을 따올 정도로 억지로 지어지지는 않았다. [235] 원래 러시아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이루어진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삼제동맹의 일원일 정도로 친독 국가였다. 그러나 베를린 회의 때 오스트리아와 갈등이 있었고, 빌헬름 2세가 굳이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세계 정책을 펼치며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바람에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은 깨졌으며, 비스마르크가 한평생을 바쳐 막으려고 했던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동맹, 러불동맹 1892년에 체결되고 만다. [236] 영국 프랑스 백년전쟁 이래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 나폴레옹 전쟁, 파쇼다 사건 등 항상 싸워온 수백 년의 원수였고 현재도 양국 간의 감정은 나쁜 상태다. 더군다나 1892년 영국의 또 다른 원수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독일 제국이 세계 정책을 펼치며 군사력과 경제력이 미친 듯이 성장하자 오히려 러시아, 프랑스와 함께 공동의 적 독일을 막을 필요성이 생겼다. 이에 따라 두 나라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다만 원수는 원수였던지라 동맹 관계는 맺지 않았다. [237] 영국과 러시아 역시 전 세계 각지에서 식민지 정책이 충돌하면서 사이가 나빴고, 19세기판 냉전이라 불리는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졌다. 그러나 1905년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레이트 게임이 영국의 승리로 마무리된 것으로 간주되며, 영국과 러시아의 완충지대에 있던 카자르 왕조 이란 제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영국과 러시아 모두에게 손해가 될 것을 우려한 양국은 이란을 나눠 가지기로 타협하면서 1907년 영러협상이 이루어졌다. 영프협상처럼 공식적인 동맹 조약은 없었으나, 군사 협력은 하기로 했다. [238] 슬라브족은 오래 전부터 서슬라브, 남슬라브, 동슬라브로 나뉘어 살면서 다른 문화로 갈라져나갔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 러시아 제국의 국익만을 위해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로 슬라브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선동을 했다. [239] 범슬라브주의와의 차이점은, 범슬라브는 모든 슬라브를 하나로 엮었으나 범게르만은 같은 게르만인 영국, 베네룩스, 북유럽을 배제하고 독일어권에 속한 독일과 오스트리아만을 일컫는다. [240] 한국의 일제강점기와 대입해서 보는 사람들 중에서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압제에 맞서서 독립운동가가 제국의 왕자를 저격한 의거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많으나 실상은 이와 전혀 다르다. 오히려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엄청난 진보주의자로 '오스트리아 민족'의 국가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오스트리아를 여러 민족이 대등하게 다스리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으로 개편하려는 다문화주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남슬라브는 전부 세르비아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보스니아의 남슬라브가 오스트리아에 합류해서 대등한 관계를 가져서는 절대 안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타겟이 되었다. [241]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동맹을 배신하고 1915년 협상국에 합류했다. [242] 이때 물게 된 배상금은 도스 안 영 안으로 경감되었다. 나치 독일 때 배상 중단을 선언했으나 나치의 패전 이후 배상 의무는 사실상 사라졌다. 서독과 통일 독일 시절에 계속 갚아나갔고, 2010년 10월 3일 완납했다. [243] 오스만 제국은 여러 민족을 포용해야 할 필요성을 가진 보편제국이었으나, 튀르키예로 전환되면서 튀르크 민족을 중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수민족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그리스인과 관련해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이 일어났다. 가장 큰 민족 문제는 쿠르드족 문제로 21세기인 현재에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244] 이 과정에서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라는 인물이 혁명 사상을 가지고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가 체포당해 사형당했다. 이 때문에 그의 동생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는 러시아 제국을 멸망시키는 혁명을 일으켜야 된다는 발상을 하게 된다. 그가 바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국부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245] 러시아의 황제를 일컫는 말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카이사르'를 러시아어로 읽은 것이다. 이반 4세 때 처음으로 스스로를 차르라고 자처했다. [246] 러시아력은 율리우스력을 말한다. 명칭 논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려면 양력의 역법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1단원에서 등장한 바 있지만 우리가 쓰는 양력은 고대 이집트가 개발한 양력이 시초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양력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개량해서 만든 것이 율리우스력이었다. 율리우스력은 기독교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서 1582년까지 유지되다가, 중대한 오차가 발견되자 그레고리오 교황의 지시로 그레고리력이라는 개정판을 만들었다. 그레고리력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표준 달력이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이때부터 그레고리력을 사용했고, 영국에서의 도입이 조금 늦었으며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는 1917년까지도 끝까지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율리우스력을 사용했다. 혁명의 날짜가 율리우스력(러시아력)으로는 2월 23일이었으므로 러시아력 2월 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고, 그레고리력으로는 3월 8일이므로 3월 혁명이라고 칭한다. 하술할 10월/11월 혁명의 명칭 논란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247] 체코의 종교개혁을 이끈 얀 후스와는 관련없다. 베이징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는데, 같은 대학에서 사서로 근무하던 마오쩌둥이 강의를 엿듣자 꼽을 줘서 쫓아낸 일화가 유명하다. [248] 문어와 구어가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의 문어는 아예 별개의 언어인 한문으로, 입말인 백화문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문은 한나라 때나 쓰던 상고한어 때 정립된 문법을 글로 옮긴 채 계속 이어져온 것이고, 백화문은 수당시대 중고한어 명청시대 근고한어를 거치면서 입말의 변화와 함께 계속 변화했다. 이 운동 이후로 한문은 일상에서 퇴출되었고, 근고한어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북경어 백화문이 채택되어 표준 중국어 문어체가 되었다. [249] 한국 교육과정 특성상 어떻게든 한국에 유리한 서술을 하기 위해 일부 교과서에서는 한국사 교과와 동아시아사 교과의 영향을 받아서 꼭 3.1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을 넣고 싶어한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3.1 운동에 의한 자극이 큰 원인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물론 5.4 운동의 발생 원인 중에 3.1 운동으로 인한 자극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많은 요인 중 우연히 엮여들어간 작은 하나의 자극 요소였을 뿐 엄청나게 비중이 높지는 않았다. 정작 중국 대만에서는 5.4 운동이 3.1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한다. [250] 사변 이후 상하이가 일본군에 점령당했다. 이 과정에서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훙커우 공원 의거이다. [251] 전한, 수나라, 당나라 등의 수도였던 장안이 바로 시안시이다. 장쉐량은 시안 사건 이후 체포되어 가택연금당했다. 그는 1936년부터 1993년까지 57년 간 가택연금을 당했고, 중일전쟁을 겪고 국부천대로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도주할 때도 따라갔으며, 장제스가 사망하고 장징궈, 리덩후이가 집권할 때까지 집에서 명나라 역사를 연구했다. 1990년 명예를 회복했고 1993년에 풀려난 이후 하와이로 이주했다. 2001년 10월 14일에 사망했는데, 그가 1898년생이므로 무려 103세를 산 장수노인인 셈이다. [252]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7년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가 많이 사는 파키스탄 자치령과 힌두교도가 많이 사는 인도 자치령으로 분리되어 독립했고, 간디는 인도의 분열을 반대했다가 1948년에 암살당했다. 반면 자와할랄 네루는 탁월한 정치력으로 독립 인도의 첫 총리가 되었다. 오늘날 인도가 가지고 있는 공대생 이미지도 네루가 과학기술을 중시하면서 인도 공과대학교를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961년 비동맹 회의에 참여해 제3세계의 대표 지도자가 되었으며, 1964년 죽는 날까지 인도의 성장을 이끌다가 사망했고, 아직도 네루의 가문은 인도의 최고 정치 명문가이다.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와 외손자 라지브 간디가 총리를 했기 때문이다. [253]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 이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지배했고, 베트남 전쟁 승리 이후 통일된 베트남의 사실상 유일한 정당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일당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다. [254]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을 거쳐 독립한 이후 수카르노는 대통령이 되었으나 1967년 실각했고, 쿠데타를 일으킨 수하르토가 집권해 1997년까지 다스렸다. 수카르노에 대한 격하 운동이 벌어졌으나 수카르노의 위상이 너무 높아서 이는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수하르토가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에 있어서 수카르노가 내세웠던 판차실라를 그대로 가져다 써야 했다. 지금은 수하르토 정권이 끝났으나 여전히 그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255] 무스타파 케말은 1938년까지 튀르키예를 다스리다가 사망했다. 이후 튀르키예의 정치는 대중들의 지탱을 받는 이슬람주의 vs 케말의 후계자들과 군부를 위시한 세속주의 간의 대립으로 이루어졌다. 이슬람주의가 만연해지려 할 때마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세속주의를 다시 세우는 방식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집권한 이후에는 이슬람주의가 돌아왔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세속주의에서도 민족주의 부분은 가져다가 써먹고 있다. [256] 한국의 대중들에게는 단순히 2500년 전에 망한 국가를 뒷북치면서 만들 필요가 있었냐는 인식이 만연하다. 그러면서 고조선 고구려를 부활시켜야 되냐는 등의 잘못된 비유를 대고는 한다. 그러나 고조선-고구려 고토 회복과 유대인 국가 문제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민족은 이후 남쪽으로 내려가 한민족이 되었고 한민족의 독립 국가를 유지했으나, 유대인은 멸망한 이후 민족 정체성만 매우 강화되고 독립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단순히 나라 잃은 민족 A 정도로 취급하기에는 유대인의 민족 정체성은 너무 강해서 수천 년이 지나도 끈질기게 유지되었다. 근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드레퓌스 사건이나 포그롬과 같은 반유대주의 혐오가 만연해지자 유럽의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고, 이에 따라 '차라리 유대인들끼리 나라를 만들어 살게 해주자'라는 입장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지역은 팔레스타인만 거론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령 우간다 계획처럼 생판 처음 보는 지역에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의 최초 거주지로서 명분이 있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게 더 말이 되었기에 팔레스타인이 선택된 것이다. 어디에 유대인 국가를 세워도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말이 되는 곳이 팔레스타인이었을 뿐, 이것을 고조선의 고토 회복을 운운해가면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257] 이후 레자 샤는 1941년까지 이란 제국을 다스렸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와 거래하며 영국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자 1941년 8월 대영제국 소련 페르시아 침공으로 점령당하고 쫓겨났다. 이후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1941년 ~ 1979년 재위)를 허수아비로 앉히고 지배받다가 세계대전이 끝나며 독립했다. 이후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집권했으나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의 지원으로 모사데크는 쫓겨났고,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허수아비에서 벗어나 일본의 발전상을 모델로 하여 백색혁명이라는 개혁 정책을 펼쳤다.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도 그의 치세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노동 계급과 상인 계급,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반발을 사 1978년 이란에서 이란 혁명이 벌어졌다. 1979년 1월 16일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망명했고, 이란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전환되어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라흐바르로 떠받드는 신정 국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석유 수출에 문제가 생긴 것이 제2차 오일쇼크이다. 호메이니의 후계자 알리 하메네이가 뒤를 이었다. [258] 스페인은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래로 보르본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고, 중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정복을 당하기도 했으나 다시 보르본 왕조가 복귀해 지배했다. 그러나 1931년 지방선거에서 공화파가 대승하면서 알폰소 13세가 망명하고, 얼떨결에 공화정이 되면서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제2공화국의 주도 세력은 인민 전선으로 좌익 세력이 뭉친 집단이었다. 보다 못한 극우 파시즘 세력의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이 벌어졌다. 스페인 내전 종료 이후 파시즘 정권은 세계 대전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1975년까지 유지되었고, 75년에 프랑코가 사망하자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259] 교육과정에서는 다뤄지지 않으나 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도 추축국에 가담했고, 불가리아 왕국은 강압에 의해 들어갔으며, 핀란드는 일반적인 의미의 추축국은 아니었으나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어 일시적으로 추축국과 협력한 적이 있다. [260] 나치 독일의 동쪽 지역은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귀속되었고, 월경지인 쾨니히스베르크는 폴란드와 소련이 나누어 가졌다. 소련이 가져간 부분은 칼리닌그라드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아직도 러시아의 영토로 남아있다. 독일이 합병했던 오스트리아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가 되어 1955년까지 군정을 받았다. 오스트리아에도 소련군이 주둔했으나 별다른 분리 없이 통일된 상태로 독립했고,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261] 쇼와 덴노에 대한 별다른 처분은 없었다. 쇼와를 건드릴 경우 일본의 민심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쇼와 덴노가 다스리는 시대인 쇼와 시대 1989년까지 이어졌으며, 1950년대 한국 전쟁 특수로 경제 성장을 이뤄 1960년대에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으며, 1980년대에는 미국을 위협했으나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 제품의 경쟁력이 떨어지자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를 맞이했고, 거품은 1990년대 초 붕괴해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했다. 쇼와 천황 사후에는 헤이세이 시대( 1989년 ~ 2019년), 레이와 시대( 2019년 ~ )로 이어진다. [262]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러시아가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계승했다. [263] 국부천대 이후에도 상임이사국 지위를 유지하다 1971년 그 지위를 중화인민공화국에 넘겨주게 되었다. [264] 미국과 자본주의 세력을 제1세계, 소련과 사회주의 세력을 제2세계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교육과정에서 해당 표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다. 정작 제3세계라는 표현은 계속 사용하고 있어, 학생들은 도대체 저 숫자 3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혼란을 겪을 때가 많다. [265] 그리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나치 독일에게 정복된 이후 독립운동 세력이 나타났다. 사회주의 세력인 그리스 공산당이 이끌던 ΕΑΜ과 공화주의자들이 이끌던 ΕΔΕΣ가 가장 대표적이었는데, 처음에는 협력했으나 나치가 물러나자 이들은 대립 관계가 되었고 결국 그리스 내전으로 번졌다. 해리 S. 트루먼 미국이 왕당파를 지원해 공산주의 세력은 모두 진압당했고 그리스는 자본주의 제1세계 진영에 남게 되었다. [266]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지도자가 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동유럽에다가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소련의 진영에는 포함되지 않고 제3세계에 합류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점령지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발생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들이 세웠 때문이다. [267] 대만은 이후 1975년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일당독재가 이루어졌고, 장제스 사후 아들 장징궈가 정권을 넘겨받았고, 1980~90년대 리덩후이 총통 때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268] 이후 대한민국은 1950년대 이승만 독재, 1960년대 장면 내각의 등장과 박정희 등장, 1970년대 박정희의 독재 1980년대 전두환 독재를 거쳐 1987년에 민주화되어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한은 이후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김일성이 반대파를 대거 숙청하고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구도를 완성했고,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 1994년 ~ 2011년 집권)이 정권을 잡았다. 2011년 김정일 사후에는 김정은이 집권했다. [269]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나 1945년 일본에게 점령되어 잠시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국이 들어섰다. 일본이 패전하자 북베트남에서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어 호찌민의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지만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전해 195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했다. 17도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공산 베트남이, 남쪽에는 베트남국이 독립했다. 이들과의 전쟁이 베트남 전쟁이었으며, 남베트남이 무능하게 대응하자 결국 미국이 끼어든 것이다. [270]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도쿄 대공습으로 활약했던 커티스 르메이도 참여했다. 처음에는 필수품만 공수되었으나 '게일 핼버슨'이라는 조종사가 처음으로 기호식품인 껌을 주었고, 이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기호품 공수가 이루어졌다. 서양의 행보를 견제하기 위해 봉쇄를 벌였던 소련이었으나 오히려 서양의 압도적 물량공세만 전 세계에 자랑하며 소련만 뻘쭘해지게 되었다. [271] 미국에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953년 ~ 1961년 집권) 대통령이 재임하던 1959년 쿠바가 피델 카스트로 쿠바 혁명으로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뒤 공산화되면서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섰다. 이에 따라 1962년 소련의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가 바로 이 쿠바 미사일 위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272] 현재 언론에서의 용어 오용으로 인해 제3세계가 후진국과 동의어처럼 변해버렸으나, 원래 제3세계는 경제 용어가 아닌 국제정치 용어로서 비동맹 국가들을 일컫는 말이다. [273] 오늘날의 이집트 공화국을 수립한 인물이다. 이집트는 1922년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한 바 있으나 영국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무능한 파루크 1세를 쫓아내 1953년 이집트 공화국을 세웠다. 이후 1956년 영국이 관리하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의 분노를 사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했으나 미국과 소련이 영국을 방해하며 이집트의 승리로 끝났다. 1970년까지 집권했다. 이후 안와르 사다트 1981년까지 나세르의 정책을 계승해 다스렸으나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호스니 무바라크가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이어지는 독재를 시작했다. [274] 쿠바 미사일 위기의 실패로 인해 1964년 소련의 고위직들에 의해 실각당했다. 다음 소련 서기장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64년 ~ 1982년 집권)가 되었다. 그의 치세에 소련은 안정화되었으나 내부 부패가 심각해졌다. 무엇보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킨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이후 유리 안드로포프( 1982년 ~ 1984년 집권), 콘스탄틴 체르넨코( 1984년 ~ 1985년 집권)가 소련을 다스렸으나 짧은 기간 존재감 없이 사라졌고, 마지막 서기장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나타나게 된다. [275]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암살당했고, 린든 B. 존슨( 1963년 ~ 1969년 집권)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다. 존슨 대통령 이후에 당선된 것이 리처드 닉슨이다. [276] 그러나 교육과정에서는 닉슨의 최후는 언급하지 않는다. 민주당사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는 것이 밝혀져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고, 결국 1974년 불명예 사임했다. 다음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 1974년 ~ 1977년 집권)가 닉슨을 사면했고,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지미 카터가 당선되었다. [277] 프랑스는 1944년 파리 수복으로 독립한 이후 1946년 프랑스 제4공화국이 생겨났으나, 정치적 혼란과 알제리 독립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고 결국 1958년 헌법을 개정해 프랑스 제5공화국이 성립, 전쟁 영웅인 샤를 드골이 첫 대통령이 되었다. 드골은 68혁명으로 물러났고, 이후 조르주 퐁피두( 1969년 ~ 1974년 집권)가 대통령이 되었다. [278] 동슬라브에서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발트에서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가, 캅카스에서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 중앙아시아에서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탄생했다. [279]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등을 맞이했으며 체첸과의 전쟁도 심각한 문제였다. 결국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그 유명한 블라디미르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러시아 제국주의를 부활시켜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일으켰으며 2010년대에는 시리아 내전에도 개입했다. [280] 독립 직후에는 콘라트 아데나워( 1949년 ~ 1963년 집권)가 독일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1963년 ~ 1966년 집권),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1966년 ~ 1969년 집권) 등이 다스렸다. [281] 이후 빌리 브란트는 성추문 및 귄터 기욤 사건에 휘말려 사임했다. 헬무트 슈미트( 1974년 ~ 1982년 집권)가 뒤를 이어 독일을 다스렸다. [282] 이후 통일 독일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게르하르트 슈뢰더( 1998년 ~ 2005년 집권) 때 하르츠 개혁 2002년부터 시행하면서 독일이 부흥하게 되었다. 앙겔라 메르켈( 2005년 ~ 2021년 집권) 때 독일은 유럽연합의 주도국가로 안착하게 되었다. [283]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잠시 민주화될 뻔했으나 소련의 침입으로 너지 임레가 처형당하면서 진압되었다. [284] 헝가리처럼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는 민주화 요구가 있었으나 소련군에게 진압당하고 알렉산데르 둡체크 서기장도 숙청당했으나, 1989년 시위 때 복귀했다. [285] 1991년 마케도니아는 평화롭게 분리되었지만, 같은 해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먼저 발생했고, 1992년에는 가장 주된 싸움인 보스니아 전쟁이 발생했다. 이때 1995년 스레브레니차 학살 등의 참극이 벌어졌다. 1998년에는 세르비아 내에서 알바니아계 코소보와의 싸움인 코소보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1999년 또는 2001년 즈음에 끝났다. 이후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은 2003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바꾸면서 사라졌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또한 몬테네그로 2006년에 분리되면서 해체되었다. 세르비아의 붕괴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는데, 2008년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러시아 등 주요 상임이사국이 승인하지 않으면서 아직은 미승인국으로 남아있다. 한편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의 지명인 마케도니아를 사용하면서 정작 민족은 그리스와 관련없는 남슬라브라는 점이 지적되어 왔는데, 2019년에 가서야 국명을 북마케도니아로 바꾸면서 이름 분쟁이 끝났다. [286]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매우 많은 수의 문화를 잃어버렸다. 공자, 항우, 곽거병, 포청천, 장거정, 원숭환, 좌종당, 이홍장, 캉유웨이의 묘가 파묘되었고 제갈량, 소동파, 주원장 등의 석비가 박살났다. 자금성도 파괴되었고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및 마니교 유적도 파괴되었다. 가톨릭, 개신교, 티베트 불교, 이슬람 등의 신자에게 가해진 폭력은 말할 것도 없으며, 경극 장칭의 주도 아래 탄압당했고, 소림사 무술 중 상당수가 잊혀졌다. 만한전석의 대접 방식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문화대혁명을 버텨낸 문화는 중국인의 소울 게임인 마작뿐이었다. [287] 이때 탱크들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맨 몸으로 막아낸 탱크맨의 일화가 유명하다. 占占占占人이라고 간접 표현하기도 한다. [288] 1984년 영중공동선언에 따라 홍콩의 전체 지역 반환이 약속된 것이다. 92년 이후 덩샤오핑을 계승해서 장쩌민( 1992년 ~ 2002년 집권), 후진타오( 2002년 ~ 2012년 집권) 등이 중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시진핑이 등장해 중국몽 공동부유를 내세우고 미국 위주의 패권에 도전하면서 미중 무역 전쟁, 신냉전으로 번지게 되었다. [289] 미국에서는 조지 H. W. 부시( 1989년 ~ 1993년 집권)가 대통령일 때 걸프 전쟁이 일어났다. 이후 빌 클린턴( 1993년 ~ 2001년 집권)이 대통령이 되어 미국의 최전성기를 자랑했으며, 아버지 부시의 아들인 조지 H. 부시( 2001년 ~ 2009년 집권) 때 9.11 테러가 발생해 미국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남겼다. 부시 행정부는 중동에서의 잘못된 정책으로 분쟁을 야기하여 비판을 받는다. 버락 오바마( 2009년 ~ 2017년 집권) 시기에는 시리아 내전 이라크 내전 등에 개입했으며, 도널드 트럼프( 2017년 ~ 2021년 집권)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중동의 군대를 철수시키려는 시도를 보였다. 다만 2020년 이란과의 갈등을 빚어 비판을 받았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중동에서 물러나려는 기조는 유지했다. [290] 이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인해 2012년 유엔 총회에서 옵저버 국가가 되었고 2013년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온건파인 파타와 급진파인 하마스로 나뉘어 있으며, 이 중 가자 지구에서 지지를 받는 테러단체 하마스가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일으켰다. [291] 원자폭탄, 수소폭탄 등을 일컫는다. 1940년대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맨해튼 프로젝트로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45년 7월 트리니티 실험으로 첫 사용되었다. 실전 투입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가 최초이자 마지막이다. 이후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고, 비공식적으로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이 보유하고 있다. [292] 1957년 소련이 최초의 우주선 스푸트니크의 발사에 성공하면서 미국 사회에 스푸트니크 쇼크를 가져다주었다. 소련은 1961년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을 우주에 보냈다. 미국도 이에 맞서 1958년 익스플로러를 쏘아올렸고, 1969년에는 세계 최초로 아폴로 11호 착륙에 성공해 소련에게 유리하던 우주경쟁 판도를 한순간에 뒤집었다. 1970년대에는 보이저 시리즈가 태양계 바깥으로 쏘아보내졌다. 한동안 우주 경쟁은 중단되었다가 2020년대에 들어서며 아르테미스 계획 등 달에 재진출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293] 정보화 혁명 또는 제3차 산업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1940년대 제2차 세계 대전을 수행하면서 최초의 컴퓨터가 만들어졌다. 이 당시의 컴퓨터는 진공관으로 이루어진 매우 거대한 1세대 컴퓨터였다. 이후 트랜지스터, 집적회로 등이 나타나 컴퓨터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고밀도 집적회로가 나타난 4세대부터는 컴퓨터의 세대 구분을 하지 않는다. 운영 체제는 원래 명령어에 의존했으나 1984년 Apple사가 오늘날의 그래픽 환경인 GUI를 적용해 Mac OS를 출시했고,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Windows 95로 대중화되었다. Windows 시리즈는 1985년 첫 등장하여 2001년 Windows XP, 2009년 Windows 7, 2015년 Windows 10 등을 거치며 발전했다. 인터넷 1969년 미국의 아파넷의 출현으로 첫 등장했다. 1982년 대한민국에서 2번째로, 1983년 일본에서 3번째로 개발했으며, 우리가 쓰는 월드 와이드 웹 1989년에 탄생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96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96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