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5:24:49

인노첸시오 3세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ccb400, #ffe100 20%, #ffe100 80%, #ccb400)"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초대-제6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베드로 리노 아나클레토 클레멘스 1세 에바리스토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알렉산데르 1세 식스토 1세 텔레스포로 히지노 비오 1세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아니체토 소테르 엘레우테리오 빅토르 1세 제피리노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갈리스토 1세 우르바노 1세 폰시아노 안테로 파비아노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고르넬리오 루치오 1세 스테파노 1세 식스토 2세 디오니시오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펠릭스 1세 에우티키아노 카이오 마르첼리노 마르첼로 1세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제35대
에우세비오 멜키아데 실베스테르 1세 마르코 율리오 1세
제36대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베리오 다마소 1세 시리치오 아나스타시오 1세 인노첸시오 1세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제45대
조시모 보니파시오 1세 첼레스티노 1세 식스토 3세 레오 1세
제46대 제47대 제48대 제49대 제50대
힐라리오 심플리치오 펠릭스 3세 젤라시오 1세 아나스타시오 2세
제51대 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심마코 호르미스다 요한 1세 펠릭스 4세 보니파시오 2세
제56대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요한 2세 아가피토 1세 실베리오 비질리오 펠라지오 1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61-12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제65대
요한 3세 베네딕토 1세 펠라지오 2세 그레고리오 1세 사비니아노
제66대 제67대 제68대 제69대 제70대
보니파시오 3세 보니파시오 4세 아데오다토 1세 보니파시오 5세 호노리오 1세
제71대 제72대 제73대 제74대 제75대
세베리노 요한 4세 테오도로 1세 마르티노 1세 에우제니오 1세
제76대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비탈리아노 아데오다토 2세 도노 아가토 레오 2세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제85대
베네딕토 2세 요한 5세 코논 세르지오 1세 요한 6세
제86대 제87대 제88대 제89대 제90대
요한 7세 시신니오 콘스탄티노 그레고리오 2세 그레고리오 3세
제91대 제92대 제93대 제94대 제95대
자카리아 스테파노 2세 바오로 1세 스테파노 3세 하드리아노 1세
제96대 제97대 제98대 제99대 제100대
레오 3세 스테파노 4세 파스칼 1세 에우제니오 2세 발렌티노
제101대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제105대
그레고리오 4세 세르지오 2세 레오 4세 베네딕토 3세 니콜라오 1세
제106대 제107대 제108대 제109대 제110대
하드리아노 2세 요한 8세 마리노 1세 하드리아노 3세 스테파노 5세
제111대 제112대 제113대 제114대 제115대
포르모소 보니파시오 6세 스테파노 6세 로마노 테오도로 2세
제116대 제117대 제118대 제119대 제120대
요한 9세 베네딕토 4세 레오 5세 세르지오 3세 아나스타시오 3세
미즉위 선출자
교황 선출자 스테파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121-18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121대 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제125대
란도 요한 10세 레오 6세 스테파노 7세 요한 11세
제126대 제127대 제128대 제129대 제130대
레오 7세 스테파노 8세 마리노 2세 아가피토 2세 요한 12세
제131대 제132대 제133대 제134대 제135대
베네딕토 5세 레오 8세 요한 13세 베네딕토 6세 베네딕토 7세
제136대 제137대 제138대 제139대 제140대
요한 14세 요한 15세 그레고리오 5세 실베스테르 2세 요한 17세
제141대 제142대 제143대 제144대 제145대
요한 18세 세르지오 4세 베네딕토 8세 요한 19세 베네딕토 9세
제146대 제147대 제148대 제149대 제150대
실베스테르 3세 베네딕토 9세 그레고리오 6세 클레멘스 2세 베네딕토 9세
제151대 제152대 제153대 제154대 제155대
다마소 2세 레오 9세 빅토르 2세 스테파노 9세 니콜라오 2세
제156대 제157대 제158대 제159대 제160대
알렉산데르 2세 그레고리오 7세 빅토르 3세 우르바노 2세 파스칼 2세
제161대 제162대 제163대 제164대 제165대
젤라시오 2세 갈리스토 2세 호노리오 2세 인노첸시오 2세 첼레스티노 2세
제166대 제167대 제168대 제169대 제170대
루치오 2세 에우제니오 3세 아나스타시오 4세 하드리아노 4세 알렉산데르 3세
제171대 제172대 제173대 제174대 제175대
루치오 3세 우르바노 3세 그레고리오 8세 클레멘스 3세 첼레스티노 3세
제176대 제177대 제178대 제179대 제180대
인노첸시오 3세 호노리오 3세 그레고리오 9세 첼레스티노 4세 인노첸시오 4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181-24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181대 제182대 제183대 제184대 제185대
알렉산데르 4세 우르바노 4세 클레멘스 4세 그레고리오 10세 인노첸시오 5세
제186대 제187대 제188대 제189대 제190대
하드리아노 5세 요한 21세 니콜라오 3세 마르티노 4세 호노리오 4세
제191대 제192대 제193대 제194대 제195대
니콜라오 4세 첼레스티노 5세 보니파시오 8세 베네딕토 11세 클레멘스 5세
제196대 제197대 제198대 제199대 제200대
요한 22세 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 인노첸시오 6세 우르바노 5세
제201대 제202대 제203대 제204대 제205대
그레고리오 11세 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 인노첸시오 7세 그레고리오 12세
제206대 제207대 제208대 제209대 제210대
마르티노 5세 에우제니오 4세 니콜라오 5세 갈리스토 3세 비오 2세
제211대 제212대 제213대 제214대 제215대
바오로 2세 식스토 4세 인노첸시오 8세 알렉산데르 6세 비오 3세
제216대 제217대 제218대 제219대 제220대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
제221대 제222대 제223대 제224대 제225대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 비오 4세 비오 5세
제226대 제227대 제228대 제229대 제230대
그레고리오 13세 식스토 5세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제231대 제232대 제233대 제234대 제235대
클레멘스 8세 레오 11세 바오로 5세 그레고리오 15세 우르바노 8세
제236대 제237대 제238대 제239대 제240대
인노첸시오 10세 알렉산데르 7세 클레멘스 9세 클레멘스 10세 인노첸시오 11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241대 이후]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241대 제242대 제243대 제244대 제245대
알렉산데르 8세 인노첸시오 12세 클레멘스 11세 인노첸시오 13세 베네딕토 13세
제246대 제247대 제248대 제249대 제250대
클레멘스 12세 베네딕토 14세 클레멘스 13세 클레멘스 14세 비오 6세
제251대 제252대 제253대 제254대 제255대
비오 7세 레오 12세 비오 8세 그레고리오 16세 비오 9세
제256대 제257대 제258대 제259대 제260대
레오 13세 비오 10세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비오 12세
제261대 제262대 제263대 제264대 제265대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제266대
프란치스코 }}}}}}}}}}}}

파일:교황 문장.svg 가톨릭 교회의 교황
파일:176_innocenzo_III.png
제175대 첼레스티노 3세 제176대 인노첸시오 3세 제177대 호노리오 3세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제176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Innocentius III
파일:Pope_Innocent_III_(Monastery_of_Subiaco).jpg
교황명 <colbgcolor=#FFFFFF,#1F2023>인노첸시오 3세
출생 1161년
사망 1216년 7월 16일 (향년 54~55세)
재위 제176대 교황
1198년 1월 8일 ~ 1216년 7월 16일

1. 개요2. 교황에 즉위하기 전3. 교황에 즉위한 후4. 기타

[clearfix]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창공, 즉 보편적 교회 안에 두 개의 거대한 광채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 두 광채란 교황권과 왕권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직권입니다. 그러나 낮을 지배하는 태양이 밤을 관장하는 달보다 더 위대하고 달이 태양으로부터 그 빛을 얻듯이 교황이 왕보다 더 위대하고 왕권은 그 권위를 교황권으로부터 얻습니다

1. 개요

" 교황 태양, 황제"이라는 말까지 나온 중세 교회 최전성기의 교황으로, 그에 걸맞은 결단력과 지성,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

본명은 '로타리오 디 세니'(Lothario di Segni)이며, 36살의 젊은 나이에 교황에 선출되었다. 이는 전임자 첼레스티노 3세가 80대 중반의 고령에 선출되어 92살에 사망했기에 추기경들 사이에서 "젊은 교황을 뽑아 시국에 강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자."라는 견해가 일치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교황에 즉위하기 전

1161년 태어난 로타리오는 1190년 무렵 외삼촌 클레멘스 3세에 의해 부제급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1198년 1월 8일 첼레스티노 3세가 사망하자 그날 거행된 장례식 직후 바로 열린 콘클라베에서 선출되었다. 로타리오는 로마, 파리, 볼로냐 등 당대 최고의 명문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신학 법학에 조예가 깊었고, 달변가이기도 했다. 거기에 외모도 준수했다고 한다.

교황이 되기 전 1195년 무렵에 몇 편의 논고를 썼는데, <거룩한 제단의 신비에 대해서(De sacrosancti altaris mysterio)> 등이 있다.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논고에 그에 대한 많은 차용을 했다.

3. 교황에 즉위한 후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의 지위와 권한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처한 최초의 교황이며, 이는 그만큼 교황권이 무소불위의 절정기에 도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젤라시오 2세 교황에 대해 주교회의에서 주교들이 이 칭호를 사용해 언급한 적이 있으나, 공식적인 교황의 칭호로써 사용을 확립한 이는 인노첸시오 3세가 처음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교묘한 배후조종과 파문을 번갈아 써가며 독일 정치에 개입해 자기 뜻대로 프리드리히 2세 독일왕으로 선출시켰다. 프리드리히는 1212년 12월 9일 마인츠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3년 뒤 아헨에서 다시 대관식을 치러 독일왕으로 인정 받았다.[1][2]

독일 왕권 분쟁만이 아니라 인노첸시오 3세는 리처드 1세의 동생인 존 왕에게도 간섭하여, 캔터베리 대주교의 서임을 둘러싼 논쟁 끝에 존 왕을 파문하고 프랑스 왕과 연합하여 전쟁에 자신이 없던 존 왕을 위협했다. 결국 존 왕은 인노첸시오 3세의 위협에 굴복해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의 봉토로 바치고 이를 다시 수여받음으로써 스스로 교황의 봉신(封臣)이 되었으며, 봉신의 의무로 매년 1,000 파운드의 세금까지 납부하기로 약속해야 했다.[3][4]

군주들의 문제에 대한 개입 외에도, 인노첸시오 3세 시대에는 신앙적으로 중요한 일이 많았다. 남프랑스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새로운 신앙운동은 정통 교회를 거부[5]하여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결국 인노첸시오 3세는 1208년 교황 사절 피살 사건을 계기로 소위 '알비 십자군'을 결성해 남프랑스의 반(反)교황 세력인 카타리파를 처단하였다. 그러면서도 인노첸시오 3세는 교회 자정(自淨)의 필요성도 인식, 1210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인준하고 순회 설교의 권리도 인정하여 어느 정도 교회의 자정을 위한 노력도 실시하였다. 도미니코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이 때 허가되었다.

더하여, 가톨릭 교회에서 로마를 중심으로 전례 규정을 통일하는 관습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인노첸시오 3세의 강력한 후광 덕분에 13세기를 지나면서 로마에서 유효한 것은 거의 법적인 성질을 지닌다는 생각이 확산되었으며, 인노첸시오 3세가 교황에 오르기 전 부제급 추기경 시절에 작성한 논고들도 13세기의 모든 전례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6] [7]

한편 1215년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열어 교회 개혁과 신앙 및 윤리 문제, 새로운 독일왕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승인, 탈선해 버린 제4차 십자군을 대신한 새로운 십자군 운동의 계획 등을 논의하였다.[8] 라테라노 공의회는 중세 최대의 공의회로 1,200여 명의 주교, 수도원장, 사제들이 참석했다.

이 외에 인노첸시오 3세 때의 유명한 사건은 제4차 십자군의 탈선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주도한 제4차 십자군은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한 뒤 라틴 제국을 세우는 것(1204)으로 마무리되었다. 인노첸시오 3세 자신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에 크게 반대하였고 몇 번이고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허약한 동로마 제국의 내실을 이미 파악한 십자군은 칼길을 돌릴 생각이 없었다.

그리스 교회를 무력으로 짓밟아 굴복시킨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라틴인의 교회가 세워졌기에 그리스인들의 증오심은 대단했으나, 인노첸시오 3세는 어쨌든 동서방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졌다고 자평했다. 교황 스스로 말하길 "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좀 더 빨리 라틴인의 손에 들어 왔다면 성지(聖地)가 짓밟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9] 다만 당시 교황이 전해들은 사실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로마에 굴복했다는 소식 정도였고, 엔리코 단돌로가 사망하고 나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전해들은 이후에는 '파멸의 한 사례에 불과하며 지옥의 과업'이라는 평가로 수정했다.

라테라노 공의회를 끝낸 뒤 교황은 1216년 7월 16일, 새로운 십자군 원정에 대한 조율을 위해 머물던 페루자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4. 기타

결투 재판을 금했다.

현 벨기에 출신의 성녀 루트가르다에 의하면 사망 직후 연옥에서 고통받는 것을 봤다고 한다. 지옥에 갈 뻔한 세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4차 십자군 때문인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대체역사물에선 베네치아와 같이 좋은 대우를 못 받는 편이다. 단, 상술했듯 4차 십자군의 탈선을 교황 탓으로 돌리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1] 황제 대관식은 인노센시오 사망 후인 1220년 11월 22일에 그의 후임 호노리오 3세로부터 정식으로 받게 된다. [2] 어릴 때부터 후견인 자격으로 프리드리히를 '보호'하고 마침내 황제로까지 만들어 주었으니, 인노첸시오 3세는 이제 신성 로마 제국의 거대한 판도도 교황의 발아래 있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그가 사망한 뒤의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되어 교황과 황제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3] 이런 상황에 분노한 잉글랜드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의 결과가 바로 1215년 마그나 카르타의 체결이다. 한편 이렇게 당한 선례가 있어 이후의 잉글랜드 왕들은 교황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게 된다. [4] 사실 존 왕이 암군인건 둘째 치고 캔터베리 대주교의 서임권은 존 왕이 아니어도 당시의 영국왕들이라면 반발 할 문제였는데 전통적으로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의 새 왕의 대관식에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는 관습이 있기에 이 서임권을 요구한것은 '교황권이 영국 왕위 계승에 개입'한다는 소리였다. [5] 카타리파 영지주의를 주장하여 육신은 사악한 것이며 세상을 빛과 어둠의 이원론적 구조로 보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보다 마니교에 가까웠다. 비슷한 주장을 한 정교회의 이단 교파가 9세기의 바오로파 및 카타리파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보고밀파 였다. [6] 이 책은 주로 색과 상징에 관해서 논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논고 <거룩한 제단의 신비에 대해서>나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다면 미셀 파스투로, 주나미 역, <서양중세상징사>의 169페이지를 참고하면 좋다. [7] 13세기에 이루어진 전례 통일화 규범은 아비뇽 유수 시대에 후퇴하게 되는데,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전례에 대해 논의하고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이 나온다(1570). 정확히 로마의 규범이 각 지역에서 받아들여진 것은 이 책이 나온 이후이고, 13세기의 전례 통일화는 그러한 규범이나 규칙이 생긴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받아들여지던 경향성의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8] 새로운 십자군 원정 계획은 1217년 결실을 보아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 국왕인 장 드 브리엔의 지휘하에 1218년 시작되었지만 이집트 공략에 실패하여 좌절되었다. [9] 호르스트 푸어만,『교황의 역사 :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161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