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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의 교황 | ||||
제224대 비오 4세 | → | 제225대 성 비오 5세 | → | 제226대 그레고리오 13세 |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 |
|
|
교황명 | <colbgcolor=#FFFFFF,#1F2023>비오 5세 (Pius V) |
본명 | 안토니오 기슬리에리 (Antonio Ghislieri) |
출생 | 1504년 1월 17일 |
밀라노 공국 보스코 | |
사망 | 1572년 5월 1일 (향년 68세) |
교황령 로마 | |
재위기간 | 1566년 1월 7일 ~ 1572년 5월 1일 (6년 115일) |
시복 | 1672년 5월 1일, 클레멘스 10세 |
시성 | 1712년 5월 22일, 클레멘스 11세 |
축일 | 4월 30일 |
문장 | |
서명 |
|
[clearfix]
1. 개요
제225대 교황. 본명은 안토니오 기슬리에리(Antonio Ghislieri).금욕주의자·개혁자로서 이단자들을 가차없이 박해했다. 비오 5세가 교황으로 재위한 기간은 가톨릭 교회사에서 냉혹했던 시기로 손꼽힌다. 비오 5세는 종교재판소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사상을 뿌리뽑는 데에 성공했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법령들을 실행에 옮겼다.
2. 교황이 되기까지의 배경
1504년 1월 17일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 교외 보스코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비오 5세는, 14세 때에 보게라에 있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1521년 5월 18일 수도서원을 하였다. 수도명이 미카엘이었던 비오 5세는 그 후 볼로냐에서 공부한 다음 1528년에 제노바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맨 먼저 받은 중요한 직위는 이단심문관이었는데, 당시 이단심문소는 이단들을 색출ㆍ심문ㆍ처벌하기 위한 가톨릭교회의 사법기관이었다.비오 5세는 피고인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하여, 그가 소속되어 있던 참사회뿐만 아니라 종교재판관 주교들도 비오 5세의 방법을 반대해 1550년 로마로 소환당했다. 로마의 대심문관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는 비오 5세의 진가를 인정하고 임무를 맡겨 롬바르디아로 파견했고, 1551년에는 로마 이단심문소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카라파가 교황 바오로 4세가 된 뒤 기슬리에리는 1556년 네피와 수트리 주교, 1557년 추기경, 마지막으로 1558년 이단심문소의 최고 자리인 대심문관에 임명되었다. 교황 비오 4세 때에도 이 직무를 계속 맡았으나, 비판적이고 완고한 태도로 비오 4세와 대립했다. 1566년 1월 교황 선거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교황직을 수락하면서 교황명을 전임자인 비오 4세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비오 5세로 정했다.
3. 교황으로서 행한 교회 운영
1566년 비오 4세가 죽은 뒤 그의 조카인 성 가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이 이끌던 엄격한 종교규율 주장자들에 의해 어려움없이 교황이 되었다. 비오 5세가 교황에 피선되자, 시민들은 전례대로 성대한 교황 즉위식이 곧 있으리라 기대하였으나 시일이 경과해도 아무 소식이 없더니, 즉위 미사는 중지되고 비오 5세의 경비는 모조리 빈민구제 및 경영 상황이 어려운 수도원 원조의 목적에 기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민들은 모두 놀라는 동시에 새 교황의 자선과 박애의 정신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비오 5세가 즉위할 당시 서방 국가들은 부패와 종교개혁, 새로 생긴 군소 국가 사이의 치열한 싸움,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침략 위협 등으로 온통 혼란의 도가니였다. 따라서 비오 5세는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는 한편 산산히 분열된 서구 세계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막중하고도 힘겨운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비오 5세는 이를 위해 금욕적인 생활태도를 계속 유지하면서 즉시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교황의 지위에 올라서도 조금도 수도자로서의 자세를 버리지 않은 채, 종래의 호화스럽던 교황의 의식주를 되도록 간단하고 검소하게 하였다. 철저하게 수도자의 절제된 생활 양식을 지켜나갔는데 비오 5세는 교황복 안에 수도복을 입고 지냈다고 한다. 이에 교황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마치 수도원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칙서들을 실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비오 5세는 다음과 같은 작업을 완성했다.
- 새 로마 교리서 완성(1566년): 『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본당 사제를 위한 로마 교리서)라는 제목의 이 책은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편찬되기 전까지의 표준 교리서였다.
- 로마 성무일도서 개정(1568년): 『Breviarium Romanum』라는 제목의 이 책은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전례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긴 세월 동안 사용된 표준 성무일도서였다.
- 로마 미사 경본 발간(1570년): 이 로마 미사 경본 『Missale Romanum』에 의해 거행되는 미사 양식이 바로 가톨릭 교회의 첫 번째 통합 미사 양식인 트리엔트 미사이다. 이 전례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 바오로 6세에 의해 새로운 로마 미사 경본이 나오기 전까지 가톨릭 교회의 표준 미사 경본이었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집 발간. 그리고 그를 교회학자로 선언(1576년).
친족 등용 관행을 철저히 배격한 비오 5세는 조카 1명을 추기경에 임명했지만 실권은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가족은 로마로부터 멀리 내보냈다.
이 밖에도 병원을 세워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도 하고 구제사업을 시행하기도 했으며, 정기적으로 돈을 주어 가난한 로마의 수도원에 잔치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비오 5세는 조금이라도 악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처단하였다. 일요일에 노동하는 자는 주일을 모독하는 자로 단호히 배격하고, 신성 모독이나 동물 학대 등의 대죄에 대해서는 추상과 같이 엄벌을 가하였다. 이단심문소 규율을 강화했고, 오랫동안 연기된 해묵은 사건들을 끄집어내어 재판을 열었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신분을 참작해주기보다는 더욱 가혹한 벌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비오 5세는 당대 사람들에게 "그처럼 경건한 교황은 일찌기 본 일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한편 인간을 천사처럼 취급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완고하고 원칙주의자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정작 비오 5세 본인은 자신이 때로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자책했다고 한다(…).
4. 레판토 해전과 묵주 기도
비오 5세의 재임기간은 주로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이슬람교와 싸우는 일로 보냈는데, 1570년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에 있어서 비오 5세는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단합을 호소하여 스페인, 베네치아, 교황령의 가톨릭 연합 함대가 1571년 10월 7일 코린토스 만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대승하였다.
이 레판토 해전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교황청의 기록이 있다.
지중해에서 가톨릭 연합 함대와 오스만 함대 간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중이었다. 교황청에서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단조로운 회의가 진행 중이었는데, 비오 5세가 느닷없이 일어서서 창문을 열고 밖을 주시하더니, 뒤돌아서 기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보고는 이만해 둡시다. 지금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러 가야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함대가 승리했습니다!!" 1571년 10월 7일 오후 5시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10월 21일, 전령이 역사적인 해전의 첩보를 가지고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달려왔다. 그리스도인들의 연합 함대가 레판토에서 오스만의 함대를 격파한 것이었다. 공식 기록은 10월 7일 오후 5시 직전에 승리가 확실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다소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 기록은 당시 의사록에 정확히 기재되어 있다.
비오 5세는 이 승리를 묵주 기도의 덕분으로 돌렸으며, 이 승전을 기념하여 승리의 성모 축일을 10월 첫 주일에 지내게 하였다. 이날은 이후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변경되었고, 오늘날도 가톨릭에서는 10월을 묵주 기도 성월로 지내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2세는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무력에는 꼼짝도 하지 않지만, 다만 저 교황의 기도의 힘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하였다.
5. 사망과 시복 시성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한 이듬해 봄에 비오 5세는 병을 얻어 1572년 5월 1일 사망하였다. 로마 시민들은 비오 5세가 너무나 엄격한 인물이라는 소문 때문에 처음에는 비오 5세의 등극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비오 5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인을 잃었다고 진심으로 슬퍼하였다고 한다.1672년 5월 1일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고, 1712년 5월 22일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5월 5일이었다가 4월 30일로 변경되었다. 유해는 금동 마스크로 얼굴을 덮어 유리관에 넣은 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사진
6. 여담
초콜릿이 유럽에 들어온지 오래지 않은 16세기 한때 교황청은 초콜릿 금지령을 내린 적이 있는데, 초콜릿이 '지나친 매력과 흥분을 유발하는 자양제'라서였다. 하지만 비오 5세는 직접 초콜릿을 마신 뒤[1] "이렇게 맛없는 것이 습관이 될 리 없다(…)"며 초콜릿 금지령을 풀었다. 당시만 해도 초콜릿에 설탕을 넣어 먹는 방법은 퍼지지 않았으므로 원액 그대로의(…) 초콜릿을 맛본 모양.
[1]
당시엔 카카오를 물에 끓여서 음료수로 마셨다. 커피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