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3:45:25

예루살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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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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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왕조 레텔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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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프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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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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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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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장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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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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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주 왕조 알레라미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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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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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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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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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5세
앙주 왕조 알레라미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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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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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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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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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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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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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뤼지냥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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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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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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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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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
Regnum Hierosolimitanum
파일:예루살렘 왕국 국기.svg 파일:예루살렘 왕국 국장.svg
국기 국장
수도
예루살렘 (1099년 - 1187년)
티레 (1187년 - 1191년)
아크레 (1191년 - 1229년)
예루살렘 (1229년 - 1244년)
아크레 (1244년 - 1291년)
국토
파일:Map_Crusader_states_1135-en.svg
레반트 지역 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9년 ~ 1291년[1]
위치 팔레스타인 전역 , 이스라엘 대부분
행정 구역
왕국 직할령[2] 예루살렘, 나블루스, 베들레헴, 예리코, 아크레, 헤브론, 나자렛, 람라, 브엘세바, 벧산, 시돈(after 1191)
공작령 갈릴래아 주, 야파 & 아스칼론 ,
울트레주르뎅 주
종속국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키프로스 왕국(after 1268)[3]
정치
정치 체제 봉건 군주제[4]
국가 원수 (Roi)
주요 국왕 고드프루아
보두앵 1세
멜리장드 & 풀크
보두앵 4세
프리드리히
행정
총대주교 & 6대신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Patriarcat latin de Jérusalem)
집정관(Connétables)
사령관(Maréchaux)
수상(Chanceliers)
재무관(Sénéchaux)
의전관(Chambellans)
집사(Bouteillers)
입법 나블루스 공의회(Concile de Naplouse)
사법 대의회 오트 쿠르(Haute Cour)
인문 환경
종교 국교 가톨릭(라틴 교회, 마론파)
동방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유대교, 사마리아교,
수니파, 시아파, 드루즈
인종 프랑스인 우트르메르(Outremer),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독일인, 사마리아인[5], 유대인, 아랍인 그 외 다수
표어 DEVS VVLT[6]
공용어 라틴어 (사실상 중세 프랑스어)[7]
공용 문자 로마자
통화 데니르, 디나르[8], 베잔트[9]
주요 사건
십자군 전쟁/연표
1099년 7월 15일 제1차 십자군 원정 예루살렘 해방 및 건국
1187년 11월 20일 예루살렘 함락
1192년 9월 2일 제3차 십자군 원정 람라 조약 체결
1291년 5월 28일 아크레 함락 및 망명
성립 이전 파티마 왕조
셀주크 제국
망명 이후 키프로스 왕국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언어별 명칭
라틴어 Regnum Hierosolimitanum
중세 프랑스어 Roiaume de Jherusalem
중세 그리스어 Βασίλειον τῶν Ἱεροσολύμων
프랑스어 Royaume de Jérusalem
영어 Kingdom of Jerusalem
아람어 ܡܠܟܘܬܐ ܐܘܪܫܠܡ
히브리어 הממלכה הלטינית של ירושלים
아랍어 مملكة بيت المقدس

1. 개요2. 역사
2.1. 배경2.2. 성립2.3. 건국과 수성2.4. 섭정(Baillis) 통치의 시대
2.4.1. 하틴 전투 예루살렘 상실2.4.2. 제3차 십자군2.4.3. 지속되는 혼란2.4.4. 리처드 살라흐 앗 딘 그리고 킹 메이커 발리앙2.4.5. 황제의 십자군 (Crusade of 1197)2.4.6. 베네치아 공화국 제4차 십자군2.4.7. 계속되는 모계 계승2.4.8. 교황령의 제5차 십자군 원정2.4.9. 프리드리히의 제6차 십자군 원정2.4.10. 영주들의 십자군(Crusade of 1239)2.4.11. 루이 9세의 제7차 십자군 원정2.4.12. 제8차 십자군 원정의 튀니지 원정2.4.13. 제9차 레반트 최후의 십자군2.4.14. 멸망2.4.15. 키프로스 왕국 (망명 정부)2.4.16. 간절히 원했던 프레스터 존의 전설
2.5. 왕국의 계보
3. 정부 및 사법
3.1. 솔로몬의 사원3.2. 다윗의 탑3.3. 나블루스 공의회3.4. 의회3.5. 행정구역3.6. 주요 관직3.7. 가문
4. 군사5. 외교6. 사회
6.1. 민족6.2. 문화6.3. 교육6.4. 의료6.5. 건축6.6. 예술
7. 경제8. 지리 및 기후
8.1. 지리8.2. 기후
9. 관련 문서10. 관련 틀


[10]

[clearfix]

1. 개요

나병왕 보두앵 4세 ( 킹덤 오브 헤븐)

1099년 제1차 십자군을 통해 서유럽의 십자군 기사들이 남부 레반트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을 쫓아내고 세운 그리스도교 왕국이다. 왕국은 1187년 수도이자 최대 거점이었던 예루살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살라흐 앗 딘에게 점령당한 후 아크레로 수도를 옮겼다. 1291년 레반트 지역에 남은 십자군 수도 아크레가 맘루크의 술탄 칼릴에 의해 함락되고 최후의 요새 펠라린이 함락될 때까지 192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 역사는 크게 2개의 시기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살라흐 앗 딘에 의해 거의 전복되었을 때인 1099년에서 1187년까지, 2번째 시기는 후속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의하여 아크레에서 1192년에 재건된 뒤 제6차 십자군 이후 예루살렘을 외교적으로 기독교 손 안으로 되찾고 다시 맘루크의 칼릴에게 아크레가 함락되는 1291년까지다. 이 2번째 왕국은 제2 예루살렘 왕국 또는 아크레 왕국으로도 불린다. 예루살렘 왕국에 정착한 십자군은 대다수는 프랑스 출신이었고 중세 기독교 문화와 중동의 문화가 융합되어 독특한 우트르메르(Outremer, 바다 넘어서 온) 문화를 형성했다.

2. 역사

[ruby(DEUS, ruby=God)] [ruby(VULT, ruby=Wills it)]
하느님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2.1.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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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1세기 말 로마 가톨릭 교황 신성 로마 제국과의 주교 서임권 분란 및 카노사의 굴욕 이후 황제의 보복, 교회 내부의 갈등 등 복잡한 현안들에 둘러싸여 사실 상 방랑 생활에 직면했다.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의 처지 역시 교황청과 다를 바 없이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11세기 초 황제 바실리오스 2세 치세의 힘입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는가 싶더니 그의 죽음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서막은 1071년 소아시아의 만지케르트에서 벌어진 셀주크 튀르크와의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소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며 시작되었다. 결국엔 황금만을 사이에 두고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과 대치하는 암울한 지경까지 몰리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세상의 중심 예루살렘은 이미 몇 세기 전 수니파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들어가 같은 이슬람인 시아파와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파일:Tiedosto:1581 Bunting clover leaf map.jpg
중세시대 예루살렘은 세상의 중심이었다.
제국의 국토가 구멍 난 풍선처럼 쪼그라들면서 덩달아 황권 역시 바닥을 쳤고, 제국 동부의 실세였던 땅 잃은 유력 가문들 사이의 남 탓 공방에 외부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치이던 제위는 굴러다니던 끝에 1081년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신임 황제가 됐으나 제국을 괴롭히고 있던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1세 황제는 제국의 존립을 위해서 종교적으로 철천지 원수였던 서유럽에 공식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교황 우르바노 2세 1095년 3월 이탈리아의 피아첸차에서 열린 성직자 회의에서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을 접견했다. 사절단에 들려 보낸 서한에서 알렉시오스 1세 황제는 “이방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에 도달하는 대부분 영토를 점령했 노라”고 한탄하면서 “이교도들에게 맞서서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사절단을 통해 동로마 제국 황제의 읍소를 경청한 교황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소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교황권 강화로 이용해먹기 위해 즉시 행동으로 나아갔다. 그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여러 지방을 직접 방문해 자신의 의향을 내비쳤다. 서유럽 수도원 운동의 중심지로서 한때 자신이 수도원장으로 있던 클뤼니 대수도원을 축성하는 극적인 장면까지 연출했다.

우르바노 2세는 치밀한 계획자였다.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친 후 마침내 1095년 11월 말에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노골적으로 이슈화했다. 그는 이탈리아 부르고뉴, 프랑스 등지에서 온 주교 및 기사가 참석한 이 자리에서 성지 탈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교황은 청중을 마주한 연단 위의 옥좌에서 일어나 연설을 시작했다. 동방의 그리스도교 형제들이 이교도 이슬람 세력에 의해 고통당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예루살렘마저 이교도들에게 훼손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론은 하루속히 무기를 들고 가서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고 성지를 탈환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청중으로부터 우르바노 2세조차 예상하지 못한 열띤 반응이 일어나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DEUS LO VULT)”[11]라는 거대한 함성이 클레르몽 성당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우르바노 2세는 그 시점에 하인 한 명에게 성당 천장에서 창문을 열게 하여 한줄기 빛이 찬란하게 쏟아져 내리는 극적인 장면도 연출하여, 회의는 이미 천국의 열쇠를 얻은 듯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날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천여 명의 군대를 예상했던 황제는 자신이 꿈에서도 상상 못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서유럽인들이 십자군을 비롯하여 병자 임산부 가릴 것 없이 10여만 명이 떼거지로 지중해 동부를 향해 꾸역꾸역 몰려갔다. 바야흐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2.2. 성립

2.2.1. 민중 십자군

앞섰던 민중 십자군은 몇 달을 유럽 대륙을 횡단하면서 이미 거지떼로 돌변해 있었다. 서유럽의 중세 암흑기에서 살다가 온 그들은 황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용 앞에 넋을 잃어 천국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황도에 들어가 보려고 아우성이었다. 덜컥 겁이 난 황제는 접대미소로 황도밖에서 숙식만 제공한 뒤 소아시아로 배편을 이용하여 던져버리고 이슬람 세력에게 와해되어버리게 만들었다. 당시 소아시아의 어린 술탄이었던 클르츠 아르슬란 1세는 이때의 장난 같은 승리로 십자군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어 후의 제1차 십자군이 소아시아를 휩쓸고 레반트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1099년 예루살렘 왕국 성립의 단초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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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제1차 십자군

파일:four_Leaders_of_the_first_Crusade.gif
1차 십자군의 4명의 리더 (알퐁스 드 네빌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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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건국과 수성

2.3.1. 예루살렘 공성전

3년, 교황의 성전 선포에 응답하여 집을 떠난 이후 길고 힘든 나날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근과 전염병, 탈영과 함께했던 기상천외한 십자군의 행군은 1099년 6월 7일에 이르러 예루살렘에 다다랐다.
파일:1099_Siege_of_Jerusalem.jpg
예루살렘 공성전
파티마 왕조 청야 전술을 시전하여 성밖에 있던 식량을 전량 성내로 들이고 주변의 모든 우물들을 허물거나 독을 풀고 나무를 베어 없앴다. 중동의 혹독한 여름 날씨를 견디며 십자군은 성벽 주변에 캠프를 세웠다. 1년 전 안티오키아 공성전과 마찬가지로 거대 도시 공략을 위해 십자군은 포위대를 둘로 나누었다. 레몽는 성벽의 남쪽 부분에 진영을 세웠고 고드프루아와 탕크레드는 북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예루살렘에 도달한 군사는 1,300명의 기사와 12,000명의 보병이었는데 도시를 위협할 수 있는 충분한 군세였다.

하지만 상대의 파티마의 에미르 '이프티하르 아드 드왈라' 역시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십자군의 도착이 임박한 것을 알고 있었으며, 앞서 설명 했듯이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된 뒤였다. 게다가 안티오키아와 같은 운명을 겪지 않도록 도시 내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군 도착 이전에 추방했으며 그들이 십자군의 식량을 축내게 만들었다. 청야 전술로 인하여 십자군은 보급을 위하여 상당한 거리(3~40km)를 이동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군의 포위가 미치지 못한 동, 서쪽으로 무슬림의 경기병을 기습적으로 출병시켜 길게 늘어진 보급로를 공격하게 했다. 이로써 십자군은 보급이 힘겨워졌고 또한 언제든지 이집트의 원군이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기에 최대한 빨리 행동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 목재가 없었기에 공성무기가 없는 공격은 본질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 사제가 꿈 속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해 가보니 정말 동굴 속에 목재가 있었다.

6월 13일 십자군은 목재를 이용해 사다리를 만들어 성벽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데우스 볼트를 목청껏 외쳤지만 수비병들은 손 쉽게 그들을 격퇴했다. 이후 십자군은 목재가 확보될 때 까지 다시 성벽을 공격하지 않다가, 자파 항에 도달한 제노바와 영국 선박에서 목재를 확충한 뒤 3주간 양질의 공성무기를 제작하는데 열중했다.

7월 13일 2번째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공격이 진행되어 양측은 수많은 인명을 잃었지만 예루살렘은 견디어 냈다. 그날 밤에 고드프루아는 북부 공성탑을 물러나게 하여 방비가 허술해 보이던 북쪽의 꽃의 문으로 옮겼다. 전투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에는 남쪽의 레몽의 공성탑이 파티마인들의 화계로 소실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나, 북쪽에서 고드프루아가 선전하여 벽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성공적으로 꽃의 문을 열었다.
파일:godfrey_enters_jerusalem.jpg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고드프루아 (귀스타브 도레 作)

십자군이 도시로 쏟아져 들어가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남쪽 부분 무슬림 수비군이 어쩔 수 없이 시가전에 가세하여 수비의 공백이 생기자 레몽의 병사들은 오롯이 자신들의 노력으로만 성문을 돌파했다고 착각하며 진입했지만 이미 눈 앞에 고드프루아의 병사들이 주요 관공서와 성묘교회 같은 목 좋은 곳은 죄다 차지하며 사냥을 하고 있었다. 수 시간 만에 도시의 수비라인은 십자군에 와해되었고 봇물 터지듯 밀려들어간 십자군은 성안에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을 보이는 대로 도륙해 나갔다.

당시의 무슬림 역사가 이븐 알 아시르는 이렇게 적었다.
성지의 주민들은 그들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 프랑크인들은 1주일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그들은 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 (중략) 많은 이들이 죽었다. 프랑크인들은 유대인들을 그들의 유대교 회당에 몰아 놓고 산 채로 태워 죽였다. 그들은 또한 성스러운 유적들과 아브라함의 무덤을 파괴하였다.

한 십자군 병사도 이렇게 기록했다.
예루살렘의 큰 광장이나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머리나 팔다리가 산처럼 쌓였고, 피가 온 시내에 발목 높이까지 차 흘러내렸다.

중세의 공성전에서 함락당한 도시를 약탈하고 유린하는 것은 보편화된 행위였다. 하지만 예루살렘 학살의 규모는 당대의 인습을 훨씬 뛰어넘었다고 보여진다[12]. 예루살렘의 당시 파티마 왕조 에미르였던 '이프티하르'는 다윗의 탑으로 도망갔는데, 근처 서쪽의 야파 문에서 입성한 레몽에게 탑과 귀중품을 내놓는 조건으로 항복하고 아스칼론으로 도주했다. 어쨌든 주변 모든 마을에서 십자군을 피해 살고자 들어갔던 예루살렘은 대다수의 무슬림에게 최후의 장소였던 것이다. 5주의 공성전 끝에 7월 15일 십자군은 성지를 완전히 점령했다. 우르바노 2세 1095년 11월 27일 십자군을 천명한 이래 1099년 7월 15일까지 3년 7개월 만이었다.

2.3.2. 성묘 수호자 [ruby((ADVOCATUS, ruby=수호자)] [ruby(SANCTI, ruby=성)] [ruby(SEPULCHRI), ruby=묘)]

파일:Godfrey_of_Bouillon,_holding_a_pollaxe._(Manta_Castle,_Cuneo,_Italy).jpg

이틀 뒤 7월 17일, 고드프루아가 점령한 성묘 교회에 지도자들이 모였다. 신께 감정에 복받친 감사 미사를 올린 뒤 분위기 탄 종군 성직자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4세기 만에 정식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누구를 앉힐 지부터 논의했다.[13] 교황의 대리인으로 종군한 아데마르 주교는 이미 안티오키아에서 사망했었다. 여담이지만 십자군의 주창자 우르바노 2세 역시 그해 7월 29일 예루살렘 해방 2주 뒤 사망하였었는데, 이 시대 정보전달의 속도는 그 해방 소식을 천국에 가서 들어야 할 정도로 느렸다. 교황청의 상태가 세데 바칸테(SEDE VACANTE), 교황 공위가 되었으니 언제 교황이 다시 선출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목소리 큰 성직자에게 눈길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상황이 말그대로 아사리판이 되어버린 것은 경건한 미사가 끝나고 고작 몇분 뒤였고, 아르눌 드 쇼크라는 노르망디 공작의 고해신부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지만, 툴루즈의 레몽 4세가 북부의 행태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격렬히 반대해 회의는 곧 파행되었다. 이 장면엔 뒷이야기가 하나 있다. 안티오키아에서 롱기누스의 창이 발견되자 허영가에 가깝던 레몽 4세가 절을 헤대며 동조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하기아 소피아 밀실에 보관되어 있던 성창[14]을 고위 성직자끼리 관람하고 왔던 아르눌이 가짜라고 회의적인 시각을 개진하며 레몽에게 면박을 줬는데 그 기억이 앙금으로 남아있어서 그랬을 터이다.

7월 22일, 성묘 교회에서 이번에는 새로운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을 선출하기 위한 2차 대책 회의가 열렸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뽑는 자리인 줄 알고 모인 성직자들은 십자가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렸지만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 툴루즈의 레몽 4세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이자 예루살렘 공성전의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은 모두 인정했다. 문제는 단순했다. 누가 왕이 되어야 하나? 모두가 눈치를 보는 가운데 레몽 4세는 상대보다 영향력이 크고 훨씬 부유했지만, 웬일인지 처음에는 왕이 되기를 거절했다. '가장 연장자인 나도 성스러운 도시의 왕이 된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러워진다'고 아마 신화나 옛 이야기에 언급되는 고귀한 장면처럼 그의 경건함과 겸손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입바른 시도를 했을 거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하면 다른 귀족들이 감동해서 알아서 자신을 너도나도 추대할 거라고 생각했을 듯한데 역사는 그런 잔재주를 용납하지 않았고, 분위기는 급 십자군 행군 내내 모나지 않고 화합형 인물이어서 인기있던 고드프루아에게 쏠렸다. 강력한 레몽이 왕이 되면 곤란해질 것을 염려한 귀족들은 예스맨 고드프루아를 왕좌에 앉히자고 나섰고, 레몽은 손쓸 틈도 없이 점잖 빼다가 망했다(...).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형식적인 한 번의 사양 뒤에 냉큼 받아들였다. 레몽은 안티오키아에서도 보에몽에게 밀렸는데 예루살렘에서도 밀린 것이다. 내가 젤 쌘데ㅠㅠ

빡 친 레몽은 곧바로 예리코로 떠나버렸고, 그가 주둔하던 다윗의 탑은 고드프루아 차지가 되었다. 동시에 그의 반대로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총대주교 선출도 급물살을 타게 되어서 아르눌 드 쇼크는 십자군 시대의 최초의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되었다. 아르눌은 대단히 열성적인 성직자였던지 예루살렘을 가톨릭만 인정하고, 레바논 산맥에서 숨어살다 십자군을 만나 400년만에 가톨릭에 합세하여 함께 종군했던 전우 마론파는 물론이고,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의 그리스도교는 인정하지 않음을 선포해버렸다. 건국될 때부터 사방에 적들이 포위하고 있는 예루살렘 왕국에 그나마 근거리의 잠재적 우군인 동로마 제국과의 불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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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십자가의 발견 (귀스타브 도레 作)
그 다음 집중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혔던 그 십자가를 모시는 일이었다. 전승으로 숨겨져 있던 나무조각을 찾아내어 끼워 맞춰서 성 십자가라고 명명하고 이슬람 사원의 온갖 귀금속과 보석을 뜯고 쓸어 모아 장식한 뒤, 이후 십자군 본대가 군사행동을 취할 때 마다 들쳐 업고 다닌다. 기독교의 전승에 따르면, 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가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나 예수가 부활하기 전 3일간 매장되었던 무덤과 예수가 형에 처한 십자가, 예수의 몸에 박혔던 못, 성정을 발견했다고 한다. 무덤 자리를 찾아 발굴해보니 함께 못박혔던 죄수들의 십자가 2개를 포함해 십자가 3개가 나왔고, 어느 십자가가 예수의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한 병자를 시켜 만져보도록 하여 병자의 병이 치유되는 것을 근거로 예수가 못박혔던 성십자가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그녀는 성십자가와 성묘를 발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가 바로 성묘 교회이다. 이러한 일이 겹치자 성직자들의 목소리가 또 커졌다. 성도 예루살렘을 세속 군주인 왕이 감히 통치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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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오브 헤븐에서 표현 된 성십자가

고드프루아는 그때까지 쓸데없는 논쟁은 하지 않고 십자군에 임해 왔었다. 거의 모든 언쟁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며 비난을 빗겨가며 제후들의 불평불만을 다 받아주던 행동이 결국 그에게 가시면류관까지 씌워주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수완을 성직자에게도 시전했다. 그는 왕(REX)이 아니라 성묘 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라고 자신을 가리켰다. 왕이 아니라 수호자를 자청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한 지역에서 감히 왕을 참칭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순간 성직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던 명분에 절묘하게 올라타 버린 듯한 고드프루아의 논리에 말문이 막혀버렸고 허무하게 일단락돼 버렸다. 하지만 이 칭호는 널리 알려진 거와 달리 고드프루아가 대외적으로 교황청에 보내는 서신이나 공식 문서같은 성격의 서류에서만 사용했다. 대신에 성묘수호자보다 더 모호한 용어인 프린켑스(Princeps)[15] 해석하자면 1인자를 사용하거나, 더더욱 애매한 인도자(DUX)라는 직책을 사용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역사에서도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기록했다. 여담으로 12세기 후반 고드프루아가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을 시절의 기욤 드 티레가 쓴 역사기록에, 앞서 말한 내용과 "그분이 가시면류관 쓰기를 거절했다."라며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하는 기록이 잔뜩 있는데 그 내용이 크게 선전되어 퍼진 결과라 고도 한다.

그들이 하루빨리 지도자를 세운 이유가 있었다. 이집트의 알 아프달(Al-Afdal)이 예루살렘을 재탈환하려고 시나이 반도에서 진군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알 아프달은 명목상 파티마 왕조 시아파 칼리파의 부하였지만 아직 어렸던 알 무스탈리(Al-Musta'li) 칼리파를 대신하여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려보면 그는 십자군이 레반트에 오기전에 셀주크 투르크와 성공적인 전쟁을 수행하여 1년전 남부 팔레스타인을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막 점령했었다. 수니파 셀주크 투르크와 종교적인 관념의 차이로 원수 관계였는데, 십자군을 셀주크 투르크와 서로 공통된 적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용병이라고 착각하고 그 프랑크인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양측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십자군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반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알 아프달은 십자군이 이교도를 구축하여 절단 내려고 오는 종교전쟁이라는 목적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티마 왕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측 간의 협력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쨌든 고드프루아와 다른 이들은 이집트와의 접전을 이미 예상했고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수뇌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수성하는 것은 안티오키아 공성전의 전례를 봤을 때 너무 리스크가 큰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전투에 앞서 공개적으로 이슬람교도들을 만나기로 결정했다. 그때 마침 파티마 왕조의 사절이 항복을 종용하면서 도착했다.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고 곧바로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문제가 터져 나왔다. 이때까지 성도 예루살렘을 해방하기 위해 십자군은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단결되어 기적같은 그 위업을 이루어 냈었다. 목표달성과 동시에 집단적 현자타임이 왔고 권력다툼에 반목이 싹 틔워져 의지를 재 점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드프루아에게 삐진 툴루즈의 레몽 4세와 노르망디의 로베르 2세가 예리코에서 군대 소집을 거부하고 자리 깔고 누워 버린 상태였다. 그들의 군대는 십자군 전체 병력의 3할을 담당했는데, 그들의 부대가 없다면 적을 분쇄하고 예루살렘을 지킬 가능성은 희박했다. 고드프루아에게는 정말이지 참담한 상황이었다. 양 파벌 간의 교착 상태는 며칠 동안 지속되었지만 훈훈한 마무리로 끝날 희망은 없어 보였다. 그러는 사이 파티마 왕조의 군대의 자세한 동태가 업데이트된다. 탕크레드 드 오트빌[16]이 팔레스타인 해안을 순찰할 때 이집트 정찰병을 생포하자 그들이 정보를 줄줄 불었기 때문이다. 내용인즉슨, '알 아프달이 예루살렘 남서쪽 60km 떨어진 아슈켈론 항구 도시에 군대를 집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고드프루아는 결정을 내려야 했고 8월 9일 첫 출정하는 성 십자가를 앞세우고 팔레스타인 해안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탕크레드, 플랑드르의 로베르의 군대와 함께 행군했고, 동시에 요르단 강으로 순례를 떠난 레몽 4세에게 합류하라고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고심을 하던 그들은 결국 개인적인 적개심을 누르고 고드프루아와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부지런히 행군하다 람라를 지나니 갑자기 끝없이 펼쳐진 수많은 양과 염소 떼가 길가에 버려져 있었는데, 사로잡힌 무슬림 정찰병이 이것이 파티마 왕조의 미끼라며 약탈을 하다가 통수를 맞게 되는 계략이라고 언급해줬다. 적의 책략을 파악한 고드프루아는 미끼를 물지 않았지만 주변에는 사라센 군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드프루아는 그 동물들을 길 잃은 양떼 즉, 길조라고 보고 몰고 가길 명령했다. 십자군 진영에 솜씨 좋은 고문기술자가 있는지, 정보 불기에 재미가 들렸는지 무슬림 정찰병들은 또 파티마 왕조에 대한 새로운 보고를 올렸다. 아슈켈론 본대는 2만 명 이상으로 십자군보다 많으리라는 내용이었다.

10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날 때에 십자군은 기병 5천 명에 보병 3만 명이었지만, 이제는 기사 1200명에 보병 9천 명만 남아 적 병력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 2년 동안 허구한 날 전투를 치르고 숱한 공성전과 요격전을 돌파하여 노련한 경험을 쌓아 가히 최정예 만렙의 크루세이더가 되어 있었다. 8월 11일 저녁 아슈켈론과 수 km떨어진 북쪽에 진지를 구축했고, 다음 날 새벽에 기습 공격하기로 동의했다. 알 아프달은 예루살렘에 십자군이 죽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자국 영토여서 그런지 아슈켈론 옹벽에서 나와 앞 마당에 진을 치고 변변찮은 위병도 없이 그의 충실한(...) 정찰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지축을 뒤흔드는 땅울림에 깨어났다. 곧이어 텐트에서 나와 지평선 너머 자욱한 먼지 구름을 보며 자신의 끔찍한 실수를 깨닫는다. 열세의 상황에서 고드프루아가 명령한 담대한 공격의 효과는 굉장했다! 전장 터 뒤편에 모인 수많은 동물들도 동시에 나아가기 시작해 더 많은 먼지가 날려, 사라센인들의 심리적 영향을 배가 시켰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인수 공통 돌격(실화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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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슈켈론 전투. 동물 떼가 눈에 띈다.

파티마 왕조는 방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세는 이미 시작부터 기울어진 뒤였다. 그들의 경기병 일부가 분전을 했지만 전투의 흐름은 바꿀 수 없었고 곧 주인 잃은 말들만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못 가 무슬림 진영은 분열되고 생존자들은 아슈켈론 도시 벽 안으로 후퇴했다. 십자군의 총체적 승리였다. 십자군은 사란센인들의 캠프에서 양들과 땅에 널린 노획물을 줍줍했고, 심지어 즉석 경매가 열려 알 아프달의 보검은 금화 6 베잔트에 낙찰되는 해프닝도 생겼다. 가문의 보검도 잃어버린 알 아프달은 무려 병사 1만 명을 잃었고 남은 자들의 사기는 0에 수렴했으며 곧바로 아슈켈론 항구에서 배를 잡아타고 도주했다. 총사령관이 사라지자 겁에 질린 아슈켈론 수비대는 이때까지의 적과는 개념이 다른 십자군의 용맹함을 목도했고 이에 항복의사를 전달했다. 레몽 4세는 저번에도 파티마 왕조의 예루살렘 영주를 뒤로 빼 준 경험이 있었기에 항복을 받자고 했지만, 명분상 이제 아슈켈론을 레몽 4세에게 줘야 할 판이었던 고드프루아는 레몽 4세가 득세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항복 협정에 개입하여 협상을 파기했다. 결론적으로 악수가 되 버려 아슈켈론은 파티마 왕조의 통치 하에 50년 동안이나 더 머물렀고, 십자군 국가에 대한 수많은 침공의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시아파 칼리파의 직접적인 위협에 대처하고 나서야 고드프루아는 성도 예루살렘 주변을 지배하고 예루살렘 왕국의 성립을 대외적으로 선포했다.

1099년 여름이 끝나고 인근의 모든 위협 요소가 처분되면서, 대다수의 십자군 참가자들은 천국행 보증수표를 가슴에 앉고 자신들의 고향으로 항해했다. 대략 기사단 300명과 보병 2,000여 명만 성지에 남아서 외곽을 강화하기로 결정했지만, 이슬람 세력에 둘러 쌓여 사면초가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예루살렘에 온 지휘관들 중에서 오직 탕크레드만 남았다. 그는 무력으로 인근 티베리아스를 점령했고, 예루살렘 왕국의 봉토로 그곳을 소유했다. 어쨌든 고드프루아는 주변 이슬람 세력의 소탕에 전념하는 중 교황청에서 파견 온 다임베르트 다 피사가 나타나자 상황이 복잡해졌다.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넘겨받은 다임베르트는 "성도 예루살렘을 교회로 봉납하라"고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고드프루아 로서는 썩 듣기 좋은 소식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저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은 십자군 국가의 성격을 좌우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자신이 예루살렘 대신 통치할 이집트 점령 이후로 유예를 구한다. 1099년 7월 때마침 돈냄새를 쫓아온 비탈레 1세 미키엘 베네치아 도제가 무려 200척이나 되는 대규모 상단함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멸치 떼처럼 들이닥치자 예루살렘 왕국의 병력은 순식간에 10배로 늘어났고, 고드프루아는 남서쪽으로 세력을 확대할 군대를 갖게 되었다. 고드프루아는 미키엘과 부유한 항구 도시 아크레를 점령하여 해상침공의 교두보로 삼아 이집트 점령을 구상하고 있었다.

고드프루아는 그러던 중 대관식도 못 치르고 1100년 7월 18일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증발하듯이 천국으로 가버렸다. 무슬림의 역사가 이븐 알 칼라니시는 아크레 공성 와중에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어 전사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의 연대기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대신 1100년 6월 카이사레아에서 병을 얻었고 훗날 밝혀지기를 카이사레아의 에미르가 독살을 했다고 언급하지만 그 소문의 출처는 전무하다. 기욤 드 티레 역시 앞선 상황에 대한 기록은 전혀 쓰지 않았고, 그가 독이 든 사과( 마르멜로)를 베어먹은 후 사망했다고 언급하고 있다.[17] 아무튼 정설은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에서 돌연히 사망했다는 것. 장례 미사 성묘교회에서 이루어졌고 그곳에 안장되었다. 오스만 제국시절 무덤은 파괴되었는데 시신에 대한 언급이 없고 부장품인 검 1자루만 무슬림 기록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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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년 성묘교회 훼손 이후 전시되었던 고드프루아의 검. 1854년 촬영

그는 특이하게도 결혼을 했다, 안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데 이는 중세 왕의 일대기를 대조해보면 매우 이례적인 형식이다. 마치 그 누군가처럼 신성화를 준비하는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의심이 될 정황이다. 12세기 말 예루살렘 왕국의 연대기 작가 인 기욤 드 티레에 따르면, 고드프루아가 극단적으로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보다 훤칠했고 늠름한 육체와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의 머리카락과 수염이라는 풍모에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있었다고 한다. 광대한 육체적 힘을 소유했었다 하며 길리기아에서 곰과 힘겨루기에서 이기고, 한 번은 전투 중 무슬림 장군의 낙타를 일격에 참수했다고도 한다. 이렇듯 그는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통치자였기 때문에, 국가 서사시마냥 이상화되었다. 십자군의 지도자이자 예루살렘의 왕, 그리고 예루살렘의 입법자로 묘사되었으며, 그는 아홉 위인으로 알려진 이상적인 기사인 3명의 이교도 헥토르, 알렉산드로스 3세, 율리우스 카이사르, 3명의 유대인 여호수아, 다윗, 유다 마카베오, 3명의 기독교인 아서 왕, 카롤루스 대제, 그리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에 포함되었다. 후대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백조의 기사로,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들이 선교용으로 이야기 투의 대목을 덧붙여 만든 일종의 성가인 샹송에 줄기차게 등장했고 최근에는 인디아나 존스에서 페트라에서 영생을 살며 성배를 지키는 십자군의 3명 형제의 기사(외스타슈, 고드프루아, 보두앵)중 선택받은 1명으로 나오고 성혈(The Holy Blood)과 성배(Holy Grail) 및 다빈치 코드(Da Vinci Code)에서는 고드프루아가 예수의 성스러운 혈통(Sang Real)인 메로빙거 왕조[18]의 후손이라는 가상 이론의 핵심 인물로도 나온다. 예루살렘 해방에 대한 십자군의 보고를 토대로 교황청에서 설립을 지시한 시온수도회의 초대 단장이기도 했다. 이 수도회는 1617년 예수회에 통합되었는데 이후 유럽에서 장미십자회라는 비밀결사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실제로 철학자 데카르트, 과학자 라이프니츠가 연관이 있었다. 참고로 독이 들었던 마르멜로는 장미과다. 응? 이렇듯 중세 교황청의 역사적 기록과 더불어 유럽의 음유시인에서부터 시작하여 현대 판타지와 픽션 작가들의 픽션에 아우르는 만년 떡밥이 되어버린 고드프루아였다.

고드프루아가 급서하자 하는 수 없이 베네치아 해군은 대신 하이파(Haifa, 야파와는 다른 도시이다.)를 점령한 다음 귀국했다. 예루살렘 1인자의 죽음은 다임베르트에게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고드프루아가 사망했을 때 그가 예루살렘에 없었고, 피땀 흘러 생사 고락을 함께하며 예루살렘을 해방시켰던 십자군 지도자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기득권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한편, 십자군 귀환자들은 고향에 도착해서 "전투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 에반게리온, ευαγγέλιο)을 전합시다."[19]를 실천했고 그들은 영웅으로 환대를 받았다. 구세주의 땅을 해방한 성전사들의 용맹함, 특히 고드프루아의 위업은 완벽한 가톨릭 기사의 상징이 되어 음유시인들의 18번곡이 되었고, 곧 유럽 전역에 예루살렘이 성공적으로 해방했다는 사실이 퍼져 나갔다. 당시 중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신성한 땅 이자 세상의 중심인 성도 해방의 영광을 늦게나마 느끼기 위해 새로운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끌리듯 몰려가기 시작했다. 십자군 국가의 건설은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을 로마 가톨릭이 정복하여 교황권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을 쌈 싸 먹을 정도의 전례 없는 대 찬사와 예수 재림에 버금갈 위용을 얻으며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귀환하였고, 비참한 삶을 살던 중세 암흑기 인생들은 천국으로 가는 문을 얻게 됨으로써 한 줄기 희망이 생겼다. 하나의 일화로 교황권이 얼마나 강력해졌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데, 풍차 돌리는 바람을 교회의 것이라고 선언하며 바람세를 내게 하기도 하였다.

2.3.3. 확장 그리고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

  • 보두앵 1세
고드프루아가 후사없이 운명을 달리하자 제후들은 부재중이던 예루살렘 총대주교 다임베르트 다 피사(Dagoberto da Pisa)를 따돌리고 대의회를 소집하여 날치기로 성묘수호자의 동생이자 에데사 백국의 백작인 보두앵이 후계자로 추대되었다. 보두앵은 에데사 백국을 외육촌[20] 보두앵 드 레텔에게 넘겨주고 왕관을 계승하러 출발하였다. 그러나 출발을 앞두고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1세 드 오트빌 공작이 최근에 북쪽 변경 지대를 정비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다니슈멘드(Danishmend) 왕조에 사로잡혔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통치자가 없는 안티오키아는 무방비 상태였고, 보두앵은 즉시 안티오키아로 진군하여 그곳을 정비하고 확보한 후, 예루살렘으로 갔다. 뒤늦게 도착한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을 교황령으로 만들기를 원했으나, 보두앵을 위시한 영주들이 이에 반대하고, 110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결국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가 아닌 베들레헴의 강생 교회(Church of Nativity)에서 후계자의 기름 부음(Anointment) 의식과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합의했다. 다임베르트 총대주교는 마지못해 그에게 왕관을 씌웠고 보두앵 1세로 등극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공식적으로 예루살렘 왕국과 예루살렘 국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다임베르트는 대의회에서 해임돼 버렸고, 모리스 드 포르투가 임시로 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전역을 교회의 지배하에 두려는 다임베르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왕국은 보두앵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더욱 확장되었다. 성도 예루살렘이 461년 만에 해방됐다는 희소식이 우울했던 유럽 전역을 뒤흔들자 분위기는 열광의 도가니가 되고 있었다. 길거리 거지들조차 십자가에 맹세하고 싶어했고, 성당에는 사람이 넘쳐나고 천국 보증수표인 십자군에 동참하려는 기운이 전 도시를 휘감았다. 1101년을 시작으로 제1차 십자군 원정 도중에 포기하거나 도주했던 블루아 백작 에티엔과 프랑스 왕의 동생 위그는 자국 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예루살렘 왕국이 성립되자 본국에서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 이 둘은 성묘 교회에서 기도하겠다는 교황과의 서약을 지키지 못했기에 등 떠밀려 다시 출발했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일부는 정착하여 가톨릭 주민과 군대가 증가했다. 한편 이탈리아 상업 공화국과 다른 순례 모험가들, 특히 노르웨이 왕국의 3형제 공동 왕 중에 한 명인 시구르 1세가 이끈 노르웨이 십자군에 도움으로 아르수프, 카이사레아(각각 1101년), 아크레( 1104년), 베이루트( 1110년), 시돈( 1111년)과 같은 왕국 서쪽의 항구도시들을 점령, 레반트 지역의 해안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여 유럽으로 오가는 해로를 안정화했다. 이러한 대외적인 확장과 후술하는 이슬람에 대한 성공적인 방어는 북쪽의 다른 십자군 국가인,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그리고 1109년 레몽 1세의 염원이었던 트리폴리 함락을 도와 건립한 트리폴리 백국의 종주권을 명확히 행사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왕국은 파티마 왕조와의 수차례의 람라 전투[21]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는데 3번째 전투에서는 1105년 8월 27일 25,000명의 이집트 군과 2,500명의 십자군이 백병전으로 격돌하여 승리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로써 예루살렘 왕국의 남서쪽 경계가 정해지게 된다. 또한 1110년부터 왕국 북동쪽의 셀주크 투르크 무함마드는 6년 연속으로 십자군 국가 침공을 명령하여 1110년, 1112년 1114년에는 에데사 백국이 침략 받았고, 1111년 1115년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오론테스, 1113년 예루살렘 왕국의 갈릴레아 주(State)가 공격받았지만 모두 이슬람 세력에게 패배를 안겨줬고, 같은 년 6월 28일에는 셀주크 투르크의 다마스쿠스 모술 연합군을 산나브로 전투에서 성 십자가를 앞세워서 대파하였다. 때마침 십자군 본대의 부재로 남쪽이 허술해지자 파티마 왕조의 아스칼론에서 군대가 출격해 야파를 포위 공격했는데 역시나 실패하고 어그로만 끌고 털렸다. 이렇게 보두앵 1세는 무슬림 침략에 맞서 성공적으로 왕국을 방호했다.

1115년에는 왕국 남서쪽 요르단을 가로지르는 원정단을 이끌어 요르단 강 동쪽에 로서 울트레주르뎅(Oultrejordain) 공작령을 신설하고 몽레알(Montreal), 케락(Kerak)[22], 마다바(Madaba)를 백작령으로 편입시킨다. 1117년에는 페트라 홍해의 아카바 지역까지 진출하여 프랑크 인과 토착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다시 거주하도록 하여 시리아와 이집트사이를 길막하여 캐러밴 루트를 통제하며 통행세를 징수했고, 페트라에는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아르눌 드 쇼크의 권한으로 대주교를 부임케 했다.

1118년 보두앵 1세는 선왕 고드프루아의 유훈으로 게릴라식으로 침범하며 어그로를 끌던 이집트 정복을 결정했다. 당시 소집된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는 기사 1천 명과 보병 6천 명이었지만, 일당백 최정예 병력이라 그들의 유럽식 전략과 전투는 이슬람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원정을 기획하며 투르코폴레스(Turcopoles)라 불리는 현지 이슬람(...) 용병 5천 명을 추가로 고용하고 나일강의 파라마(Parama)까지 전투없이 진격하여 무혈 입성했다. 파죽지세로 파티마 왕조의 수도 카이로와 이교도의 손에 마지막으로 남은 라틴 총대주교 관구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십자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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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1세의 죽음 (귀스타브 도레 作)
그러나 보두앵 1세가 현지에서 생선을 섭취하고 심한 이질에 걸려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4월 2일 아리시에서 쓰러진 보두앵 1세는 죽음을 예견하고 울음바다가 된 기사들을 보며 후사를 정하고 자신을 형이 묻힌 성묘 교회에 안장을 부탁하고 숨을 거뒀다. 정복자 보두앵 1세의 이른 죽음은 탄력 받은 왕국의 대외 팽창 정책에 크나큰 손실이었다. 이렇듯 십자군 1세대들은 결속력과 부지런함으로 레반트 지역을 봉건 체제로 변모시켜 강력한 군주제를 수립하고 팔레스타인 해안을 정복하고 이슬람 이교도 국가들에 대항하는 탄탄한 국경을 획정해 나갔다.
  • 보두앵 2세
보두앵 1세는 유언으로 나이가 가장 많은 형제였던 외스타슈[23]에게 왕위를 주려 했으나 여의치 않으면 에데사 백국의 외육촌 보두앵 드 레텔에게 왕국을 맡긴다고 했었다. 즉시 외스타슈를 호출하러 유럽으로 특사가 파견되었다. 왕의 시신이 소금에 절여져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 도착하던 날, 보두앵 드 레텔이 때마침 예루살렘에서 부활절을 보내기 위해 도착하여 장례식에 참가했다. 곧 이어진 대 의회 오트 쿠르(Haute Cour)의 논의에서 당시 나이가 많고 유럽에 있었던 외스타슈는 에데사 장군의 조슬랭과 예루살렘 총대주교 아르눌의 주장으로 결국 배제되었고 차선책으로 알려진 에데사 백작 보두앵이 옹립된다. 과거 선왕 보두앵 1세가 2대 왕으로 지명 받자 에데사 백국을 넘겨받았던 보두앵 드 레텔에게 다시금 왕위가 계승되어 에데사 백국의 1, 2대 영주 모두 왕으로 영전하게 되었다. 1118년 4월 14일 부활절 주간에 맞춰 기름 부음(Anointing) 의식이 행해졌고 대관식을 치른 그는 보두앵 2세로 등극했다.[24] 그 후 왕국을 계승하려 풀리아까지 온 외스타슈는 소식을 듣고 미련없이 귀환한다.

보두앵 2세는 유능한 지휘관이자 통치자였다. 파티마 왕조에 대한 선왕의 마지막 출정은 시아파 이집트와 수니파 다마스쿠스 간의 화해를 야기했다. 상황을 인지한 보두앵 2세는 다마스쿠스의 토그테킨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여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것을 막았지만 중립을 대가로 울트레주르뎅(Oultrejordain) 를 요구하자 결렬되었다. 1118년 5월 말과 6월 초에 토크테킨은 갈릴레아 에 다가가며 침략을 시작했고 파티마 왕조의 알 아프달은 아스칼론 근처에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보두앵 2세는 곧바로 남부전선으로 이동했고, 서부 해안의 안티오키아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에게 동부 전선으로 증원군을 급파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두 전선이 대치하면서 무려 3개월 동안이나 소강상태에 빠져들고 가을이 다가오자 보급로가 길던 이슬람군은 전투 한번 없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에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1세 보두앵 2세는 다마스쿠스 영토로 진격, 토그테킨의 군대를 다라지역에서 섬멸하였다. 노련한 십자군 1세대다운 공적이었다. 이후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초기 원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다음 더 이상 십자군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1121년 알 아프달이 암살당했을 때도 새로운 공세는 없었다. 그러나 시리아와 북부 이라크 및 아나톨리아의 일부를 아우르는 지역에 있는 무슬림 영주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끊임없이 에데사 백국 및 안티오키아 공국을 침범했다. 그리고 이러한 무슬림 영주들이 대열에 새롭게 이름을 올리는 인물이 바로 일가지다. 1118년 안티오키아 공국이 알레포 초입의 아자즈(Azaz)를 점령하자 알레포는 십자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1119년 5월 일가지는 토크테킨, 샤이자르의 무르쉬드[25]와 동맹을 맺고 에데사 백국 및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들이닥쳤다.

당시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이던 살레르노의 루지에로는 예루살렘 왕국에게 원군을 요청했는데,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사신은 때마침 티베리아스에서 베두인과 울트레주르뎅 주에서 전투를 종결 짓고 온 보두앵 2세와 조우했다. 그는 바로 군대를 소집하고 성 십자가를 챙겨 안티오키아로 떠났다. 그 시각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 베르나르 드 발렌스는 아르타(Artah)가 방어에 유리하고 안티오키아에서 가까우며, 군대가 아르타에 주둔하고 있는 한, 일가지의 군대는 감히 안티오키아 공국을 향하여 진군하지 못할 것이라고 루지에로에게 조언하였다. 하지만 루지에로는 보두앵 2세를 기다리지 않고 아르타에서 병력 5천 미만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루지에로는 일가지가 아타리브(Atarib)를 공략하는 동안 사르마다(Sarmada)의 앞 마당에 진영을 쳤다. 역사의 그 날이었던 6월 28일, 로베르 드 뷰-퐁 휘하의 소규모 군세가 공성을 풀기 위해 출진했고, 투르크군은 거짓 퇴각을 개시했다. 이후의 사건은 예상대로 로베르의 군세는 이슬람군이 있는 곳으로 유인 당했고, 매복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적에게 격파 당해 로제르의 부대 쪽으로 내몰리듯 도망쳤고, 본대는 곧바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별안간 십자군의 얼굴에 모래폭풍이 불어와 시야를 가려 피아구별이 안될 정도로 진영이 흩어졌다. 곧 이슬람 연합군의 양익은 십자군을 포위하였고, 난전 중에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이자 총사령관이었던 로제르가 전사하였다. 나머지 십자군 병사들도 살해당하거나 500여 명이 사로잡혀 알레포로 끌려가 몰매를 맞았고 오직 2명의 기사만이 전투를 이탈해 이 비보를 보두앵 2세에게 전했다.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십자군의 패배는 이 전투로 하여금 라틴어피의 벌판을 뜻하는 아제르 상귀니스 (AGER SANGUINIS)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아제르 상귀니스라는 본래 성경에서 이스카리옷 유다 예수를 배반하고 받은 돈으로 산 땅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는 이 땅에서 자살했으며, 이곳을 아제르 상귀니스라고 지칭했다고 한다.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 이후 일가지는 얼마 안 있어 주연—알콜 중독--에 빠져 안티오키아로 진군하지 않았고, 이에 안티오키아 라틴 총대주교 베르나르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방어수단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안티오키아 공국의 주력군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아 몇몇 주요 도시[26]가 속절없이 무슬림에게 함락되었다. 보두앵 2세와 트리폴리 백국의 퐁스 백작의 지원군은 1달이 지나 7월 말이나 8월 초에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남은 지도자들은 보두앵 2세를 남부 이탈리아로 피신한 합법적인 10살짜리 보에몽 2세에 대한 섭정으로 인정했다. 보두앵 2세는 피의 벌판에서 죽은 귀족들에 대한 영지 소유권을 분배하였었는데, 주로 죽은 영주들의 과부들에게 그대로 하사해주었다.

한편, 타는 목마름으로 간만의 대승리를 만끽하며 신이 난 무슬림 연합은 8월 14일 보두앵 2세와 트리폴리의 퐁스 백작, 조슬랭 드 쿠르드네에게 하브(Hab) 전투에서 패퇴하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이틀 뒤 보두앵 2세는 안티오키아로 귀환했고, 거기서 개선식을 치렀다. 보두앵 2세는 곧이어 노련하게 무슬림 손에 떨어진 마을들을 차례차례 재탈환하며 상황을 수습하였다. 안티오키아 공국을 떠나기 전에 보두앵 2세는 에데사 백국을 조슬랭(에데사의 조슬랭 1세)에게 하사하고 북쪽의 경계를 위임했다. 보두앵 2세의 재 반격에도 불구하고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약화시켰고, 다음에 찾아올 10년 동안 계속된 무슬림의 공격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 인해 안티오키아 공국은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 하에 편입된다. 이후 십자군은 1125년에야 아자즈 전투에서 승리함에 따라 원래의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는다.

1120년 1월 16일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의 권한으로 나블루스 공의회가 소집되어 예루살렘 왕국 법을 제정했다. 또 이때 성스러운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그 드 파앵(Hugh de Payns)과 고드프루아 드 생-오메르(Godfrey de Saint-Omer)가 설립한 기사단이 공식 인정을 받았다. 보두앵 2세는 왕궁이 있는 성전산 바위의 돔에 기사단을 머무르게 했고, 그들은 곧 성전 기사단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보두앵 2세는 예루살렘의 북쪽 근교의 네비 삼윌(Nebi Samwil)을 시토 수도회에게 제공하는 것을 제안했다. 네비 삼윌은 성서 속 유대인 예언가인 사무엘의 무덤이 있는 성지였는데 당시 시토 수도회를 창설한 초대 아빠스였던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Bernard de Clairvaux)[27]는 프레몽트레회에게 양도하고 수도원을 짓게 했다.

나블루스 공의회 직후 보두앵 2세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고르몽 드 픽퀴니는 교황 갈리스토 2세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성지 수호를 위한 지원을 재촉하는 서신을 보냈다. 최근 십자군은 인력 누수가 심각했고 무엇보다 이집트의 알 아프달이 암살당해 파티마 왕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상인들에게 받아서, 역습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력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쟁준비를 한창 하고 있었는데 1120년 4월 다마스쿠스의 토르테킨과 그의 조카 벨렉 가지(Belek Ghazi)가 에데사와 안티오키아를 먼저 침략했다. 보두앵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이라는 책임감으로 다시 한번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려고 결심했으나, 왕국의 수뇌부였던 상당수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이집트의 전선과 셀주크 투르크의 전선을 동시에 다루는 것은 현 시점에선 무리입니다"라며 군사원정을 반대했으나 왕의 의지는 강건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고르몽 드 픽퀴니는 안티오키아를 향하는 왕국군에 동참하기를 끝내 거부했고 긴 협상 끝에 왕 혼자 성 십자가를 들고 올라가는 것을 허락했다. 보두앵 2세와 그의 왕국군은 6월 안티오키아 공국에 다다랐다. 11월까지 보두앵 2세와 분전하던 일가지는 때마침 북쪽에서 또 다른 침략군이 쳐들어와 싸울 형편이 안 되자 캅하르다(Capharda)와 다른 2개의 요새를 십자군 국가로부터 소유권을 확보하고 1년간 정전협정에 서로 동의하기로 서명했다. 1121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자 마자 토그테킨이 또다시 갈릴레아 로 쳐들어왔다. 참을성 있었던 보두앵 2세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7월에 다마스쿠스의 영역을 뚫고 들어가 토그테킨이 최근에 제라시에 건설한 요새를 파괴했다.

한편 북쪽 멀리, 흑해 오른편 정교회 조지아 왕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며 셀주크 제국과 거하게 후드려 패고 있었다. 조지아 왕국의 '건축왕 다비드 4세 바그라티오니'는 8월, 빈사상태의 일가지군과 셀주크 제국의 왕자 아르슬란의 연합군에 제압하려 남하하는 중이었다. 보두앵 2세는 일가지의 약체화를 놓치지 않았고, 안티오키아 공국의 오론테스 전역을 아우르는 대규모 원정을 단행했다. 일가지의 부재로 알레포는 허수아비처럼 무너져버렸고 자르다나 아타리브 그리고 작년 11월에 일가지에게 빼앗겼던 다른 요새들을 전부 재 점령하는 전과를 올린다. 1122년 6월 일가지가 자르다나를 기습 포위하자, 조슬랭 1세와 보두앵 2세가 1달 만에 격퇴했으나, 9월 13일 조슬랭 1세는 벨렉 가지의 매복공격에 생포당하고 만다. 졸지에 에데사 백국의 백작이 생사가 불명해진 것이다. 보두앵 2세는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다행히 일가지가 아타리브를 공격하던 중 1122년 11월 3일에 사망했다. 안티오키아에 머무르고 있던 보두앵 2세는 1123년 4월 2일 알레포의 새로운 통치자인 술레이만을 설득하여 아타리브를 되찾고, 비레지크(Birejik)를 에데사 백국에 편입시킨 뒤 마라시(Marash)의 수도자 고드프리(Geoffroy le Moine)를 에데사 백국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곧이어 보두앵 2세는 발렉 가지가 조슬랭 1세와 다른 기사들을 카르푸(Kharput)에 감금한 사실을 알고서 군사를 일으켜 진격했지만 가르가르(Gargar) 주변에서 행군을 멈췄다. 1123년 4월 18일 아침,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지만 평소 즐기던 매사냥을 연습하다가 발렉 가지가 현장을 급습하여 그와 가족들을 체포했다.[28] 보두앵 2세는 카르푸로 연행되어 조슬랭 1세와 감방동료가 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왕이 무슬림에게 구금되는 변을 당하자 왕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7월 알레포로 발랄 가지가 떠나 있는 동안, 15인의 조슬랭 1세의 아르메니아 부하들이 수도자로 변장을 하고 카르푸에 잠입하여 셀주크 경비병을 추방하고 그들을 해방하는 성과를 올린다. 조슬랭 1세는 안티오키아와 투르베셀로 원군을 요청하러 카르푸를 떠났지만 곧이어 발렉 가지가 도착하여 주변을 포위해버린다. 보두앵 2세와 아르메니아 군인들은 대항하기 위해 요새에서 버텨봤지만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일이었고 발락 가지는 항복하도록 강요했다. 발락 가지의 명령으로 아르메니아 군인들은 처형당했고, 보두앵 2세는 하란으로 이송된다.

보두앵 2세가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총대주교 고르몽 드 픽퀴니는 고위 성직자와 영주들을 대의회에 호출하여 섭정으로 당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시돈과 카이사레아의 영주 외스타슈 그레니에(Eustace Grenier)를 선출했다. 그는 즉시 카르푸로 병력을 진격하였지만 이미 보두앵 2세는 옮겨진 뒤였고 발락 가지의 방비는 더없이 견고하여 실패하고 만다. 1123년 4월 국왕의 부재를 틈타 파티마 왕조가 군사 1만 6천 명을 몰아 침략했지만, 외스타슈가 기사 7천 명을 이끌고 이벨린[29]에서 요격하여 동월 29일 무슬림 6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 당시 왕좌의 공백기에 프랑스 왕국 플랑드르에서 왕가의 유럽 친척인 샤를이 찾아왔었다. 당시 국왕의 부재가 길어지니 국왕을 폐위시키려는 귀족 파벌[30]이 있었는데, 보두앵 2세의 통치가 탐욕적이고 인색하며 신민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디스를 하면서 가시면류관을 샤를에게 보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처음 두 통치자와 그들의 맏형이었던 외스타슈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샤를은 유럽 본가의 대 군주였으므로 왕위 계승의 이상적인 후보였지만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6월 15일 외스타슈가 사망하자 기욤 드 뷔르(Guillaume de bures)가 후임으로 승계했다. 왕좌가 비어 있는 기간동안 섭정과 총대주교는 고위 공직자와 서로 긴밀하게 협치를 하며 왕국을 관리해 나갔다. 그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35대 도제 도미니코 미하일과 'Pactum Warmundi' 협정을 맺어 그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제공하고 파티마 왕조의 항구들을 대항하는 베네치아 해군력의 보조를 받았다. 1124년 7월 7일 그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레반트의 무슬림 항구도시 침공, 티레를 하루만에 점령한다.

발락 가지는 1124년 5월 6일 반란을 획책한 부하와 싸우다 사망했다. 혼란을 틈타 보두앵 2세는 일가지의 아들, 티무르타쉬에 의해 탈취되었다. 티무르타쉬는 샤이자르(Shaizar)의 군주에게 보두앵 2세와 모피아 드 멜리테네,[31] 조슬랭 1세의 석방에 대한 협상을 시작하도록 부탁했다. 그들의 동의에 따라, 보두앵 2세는 8만 디나르를 지불하고 아타리브, 자다나, 아자즈 및 다른 안티오키아 공국의 요새를 티무르타쉬에게 양도해야 했다. 또한 베두인 군벌들을 상대로 티무트타쉬를 도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보두앵 2세는 몸값의 4분의 1이 지불하고 12명의 인질(보두앵 2세의 막내 딸과 조슬랭 1세의 아들을 포함)이 체납금 지불을 보장하기 위해 티무트타쉬에게 넘겨지면서 보두앵 2세는 1124년 8월 29일에 드디어 석방되었다.

보두앵 2세가 약속을 이행하러 안티오키아에 도착하니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베르나르는 예루살렘 왕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Steward)에 불과하니 영토를 포기시킬 권한이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국왕이 티무르타쉬에게 협정 상의 여러 요새와 성채를 1124년 9월 6일에 양도하려는 것을 온몸으로 오체투지하며 금지시켰다. 결국 1124년 10월 6일 보두앵 2세는 그의 인질이 포로로 잡혀 있는 알레포에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곧이어 셀주크의 술탄과 왕자들이 알레포 주변으로 집결하기 시작하고 압박해 들어오자 1125년 1월 25일 십자군은 포위를 걷어낼 수밖에 없었다. 2년이나 대치한 끝에 결국 보두앵 2세는 4월 3일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그는 베네치아인들과 재협상하여 'Pactum Warmundi' 협정을 'Pactum Balduini' 협정으로 대체, 대부분의 기존 조건을 승인하고 대신 베네치아 공화국의 예루살렘에 대한 군사 원조에 합의했다. 홈스에서 토크테킨이 캅하르다를 점령하고 자다나를 포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보두앵 2세는 다시 북쪽으로 행군하기를 서둘렀다. 하지만 영주들은 빈번한 전쟁으로 불만을 표명한 것으로 보였는지 왕국에서 그를 따라온 기사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성 십자가를 앞세워 트리폴리의 폰스와 에데사의 조셀린 1세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군대가 합류했고, 특별히 킬리키아의 소(小)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대까지 합세한 연합군(기병 3100명)이 1125년 6월 11일에 십자군 소유의 아자즈 근방에서 셀주크를 연합군(15,000)과 대치했다. 무슬림 연합군은 일가지의 사망으로 모술의 새로운 에미르가 된 알 부르수키(Al-Bursuqi)가 이끌고 있었다.

보두앵 2세는 십자군 1세대답게 노련하기 그지없는 지휘를 펼쳤다. 일단 일 부르수키의 군대가 다가오자 놀란 듯 진영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좀 더 싸우기 유리한 지점으로 이끌기 위한 전략이었다. 마침내 알 부르수키가 아자즈를 포위하자 보두앵 2세는 기사를 이끌고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보두앵 2세는 퇴각했는데 물론 의도한 전략이었다. 이 전략에 말려든 무슬림 군대를 좀 더 유리한 지형으로 이끌어낸 보두앵 2세는 강력한 반격을 시도해 결국 훨씬 우세한 무슬림 군대를 처절하게 격파했다. 이 전투는 보두앵 2세의 치세 동안 가장 큰 승리였다. 1119년 안티오키아 공국의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 이후로의 군사적 허덕임에서 벗어나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수복했으며, 여기에 이 전투의 막대한 전리품을 바탕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 오기 전에 자신의 밀린 몸값을 갚아 인질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왕국이 팽창하던 시기의 영향력 있는 영주들의 경력은 보두엥 2세가 1125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대 역사학자인 기욤 드 티레에 따르면, 월터 드 브리세발레(Walter de Brisebarre)는 1125년 5월 2일 베이루트의 영주로서 'Pactum Balduini' 협정의 목격자이자 증인으로 배석했고, 파간 드 버틀러(Pagan de Butler)는 1126년 로만 드 르 퓌(Roman de Le Puy)와 그의 아들 랄프 드 르 퓌(Ralph de Le Puy)가 영토에서 파직당한 후, 울트레주르뎅 공작의 후임자로서 처음 언급되었다. 르 퓌 가문은 보두앵 2세가 인질로 되었을 당시 가장 강경하게 국왕의 폐위를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보두앵 2세는 예루살렘 귀족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1120년대 중반 다마스쿠스에 대한 본격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그는 앞서 언급된 영주들과 함께 1126년 1월 25일 요르단 전역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왕국의 거의 모든 군대를 총동원한 대규모 원정으로 토르테킨의 다마스쿠스를 경로로 잡고 진군했으나 점령 후 통치가 힘들다는 판단 하에 주변 정리만 하여 엄청난 노획물을 챙겨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리폴리 백국의 폰스를 지원하여 라파니아(Rafania)를 획득하여 하사하고 홈스를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알 부르수키는 1126년 7월에 아타리브를 포위했다. 보두앵 2세는 곧 북쪽으로 행진했고 에데사의 조슬랭 1세는 아르타에서 합류했다. 양측은 전면전을 서로 피하기를 원했으며 알 부르수키는 결국 퇴각했다.

1126년 10월 성년이 된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직접 통치를 요구했다. 그의 이탈리아에서의 도착은 보두앵 2세의 안티오키아 통치를 종식시켰지만 보에몽 2세는 보두앵 2세의 둘째 딸 알리스와 결혼했다. 왕은 아들이 없었기에 장녀 멜리장드 1127년에 왕국의 상속녀가 되었다.

백전노장의 보두앵 2세는 십자군 국가가 유럽에서의 추가 증원 없이는 현실적으로 다마스쿠스 정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대의회에서 귀족들과 상의한 후, 멜리장드에게 든든한 힘을 제공해줄 것으로 예상되는 프랑스 대 귀족을 초대하기 위하여 기욤 드 뷔르 기 드 브리세발레 1127년 가을에 프랑스에 파견했다. 성전 기사단장 위그 드 파앵과 그의 다섯 동료들이 사신들을 동행했다. 대사 일행은 프랑스 왕국 루이 6세(Louis VI)를 먼저 방문했는데, 그는 앙주의 백작 풀크 5세를 추천하며 결혼에 종용했다.[32] 풀크와 보두앵 2세 사신들 사이의 협상은 수 개월 지속되었다. 사신을 보낸 뒤 보두앵 2세는 소식을 기다리지 않고 다마스쿠스 영토에 대한 새로운 군사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왕 직속의 와디 무사(Wadi Musa) 요새는 그 후에 지어졌다.

보두앵 2세는 당시 끈임없이 전대 왕들과 다른 가문이라는 사실에 적통 문제로 시달렸기에 티레의 대주교 윌리엄 1세와 리다와 람라의 주교 로저를 교황청에 특파했다. 1129년 5월 29일에 편지에서 교황 호노리오 2세는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의 합법적인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교황이 보두앵 2세의 통치에 대한 모든 의구심을 없애고 예루살렘 왕국에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 편지를 썼다는 것이 정설이다. 반면에, 1128년 7월에 예루살렘 총대주교 고르몽의 뒤를 이으려 도착한 9대 총대주교 스테판 드 라 페르테는 태세를 전환하여 보두앵 2세에게 예루살렘을 총대주교령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앙주의 풀크 5세는 1129년 봄에 성지에 도착했다. 그는 멜리장드와 결혼하여 보두앵 2세로부터 부유한 도시 티레와 아크레를 봉토로 하사받았다. 또한 함께 떠났던 기사단장 위그는 성전 기사단 수도회 설립의 정식 인준을 트루아 공의회(Council of Troyes)에서 승인받은 후 새로운 십자군과 함께 왕국으로 귀환했다.

수니파 토르테킨의 후계자인 타즈 알 무루크 부리(Taj al-Muluk Buri)는 1129년 9월 다마스쿠스에서 니자리(Nizari)의 시아파 아싸신의 학살을 명령했다. 지역 지도자인 이스마일 알 아자미(Ismail al-Ajami)는 보두앵 2세에게 사신을 보냈고 왕국에 망명자를 수용한다는 대가로 요새 바니아스를 십자군에게 제안했다. 왕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바니아스는 예루살렘 왕국 내 시아파의 도피처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유럽에서 증원된 성전 기사단을 이용하여 다마스쿠스를 또다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가용 가능한 모든 군대를 모아 11월에 다마스쿠스의 남서쪽 약 10Km 떨어진 곳의 목조 다리까지 행진했다. 하지만 부리의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분견대가 다리를 막고 때마침 큰 폭풍으로 다마스쿠스 주변의 평원이 큰 습지대가 되어 버리자 보두앵 2세는 12월 초에 왕국으로 기수를 돌아 가야했다.

다니슈멘드 왕조의 가지 귀뮈슈티긴(Gazi Gümüshtigin)이 1130년 2월에 보에몽 2세를 매복 살해하자, 보두앵 2세는 서둘러 안티오키아 통치를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의 둘째 딸 알리스는 그녀와 보에몽의 어린 딸 콩스탕스(Constance)에 대한 섭정으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했으며 보두앵 2세의 안티오키아 입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대 이슬람 이맘 알 칼라니시(Al-Qalanisi)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모술의 아타베크[33] 이마드 앗딘 장기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대항하는 원조를 구하러 사절까지 보냈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귀족은 그녀의 계획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보두앵 2세가 안티오키아에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2개의 성문을 열었다. 그는 딸을 용서했으나 손녀 콩스탕스가 미성년인 동안 알리스가 안티오키아에 머무는 것을 금지시켰다. 공국의 귀족이 그와 콩스탕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에,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1세를 안티오키아 공국을 관리자로 임명했다.

기욤 드 티레에 따르면 보두앵 2세는 안티오키아에서 돌아온 후 중병을 앓았다. 그는 1131년 8월 자신의 승계를 준비할 때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성묘 교회 주변의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궁전으로 옮겨졌으며, 거기서 병자성사를 받은 후 멜리장드 풀크, 그들의 어린 아들 보두앵에게 유언으로 왕국을 넘겼다. 그는 곧 수도원에 서원하고 성묘 교회의 공주 성직자 참사회에 들어갔지만 8월 21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전통대로 성묘 교회에 안장됐다.

2.3.4. 전성기

  • 멜리장드 & 풀크
1131년 보두앵 2세가 사망한 후 예루살렘 왕국의 4대 국왕으로 즉위한 사람은 특이하게도 3명이었다. 여왕 멜리장드와 왕 풀크,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차기 국왕인 보두앵 3세였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멜리장드 풀크가 공동으로 왕좌에 앉았다. 보두앵 2세의 여러가지 노력으로 승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해 9월 14일 성묘교회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고 멜리장드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왕립 대의회 오트 쿠르(Haute Cour)에 의해 어려움없이 통치자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풀크는 공동왕에 오르자 마자 유럽의 보수적인 관습법을 들먹이며 왕권을 독차지하려고 했다.[34] 그는 자신이 데리고 온 앙주 출신 가신들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여 다른 유럽의 기사들의 지원을 받아 공개적으로 멜리장드에 대한 권위와 능력에 이의를 제기했다. 왕이 지속적으로 여왕의 왕관에 의문을 상기시키면서 그녀를 하나 둘 권력에서 배제시키며 예루살렘에 대한 통치권을 점차 잠식해 나가자 유럽에서 넘어온 귀족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는 다른 십자군 국가들을 예루살렘 왕국에 종속시키려 노력했다. 이를테면 고향이었던 프랑스 왕국처럼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화를 시도했던 셈인데, 이로 인해 본래 이곳에 정착했던 토종 우트르메르인 오트 쿠르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권력과 지위가 바람 앞에 촛불처럼 느껴지게 됐다. 풀크는 왕위에 오른 지 1여 년 만에 자신의 수완을 마음껏 발휘하며 예루살렘의 중심부를 쥐락펴락하는 수준이 된 것이다. 보두앵 2세의 능력 위주의 사위 간택이 도덕적 지배하의 예루살렘이 그를 상대하기 버거운 것은 기정 사실화였다.

겉보기에는 일개 프랑스의 영주인 듯한 풀크가 그렇게 수완 좋은 강력한 군주였던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는 유럽 왕실 및 영주들의 복잡한 혼인관계와 대립의 정점에 있었다.[35] 풀크 5세의 정확한 탄생 년도가 기록으로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아마도 1089년에서 1092년 사이 앙주 백작 풀크 4세(Fulk IV d'Anjou)와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Bertrade de Montfort)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추정 가능하다. 풀크(당시는 앙주의 풀크 5세)가 20세가 채 안 된 시점인 1109년 아버지인 풀크 4세의 사망으로 앙주 백작의 지위를 계승했고, 이후 풀크 5세는 에멩가르드 드 멘(Ermengarde de Maine)과 결혼하여 그녀의 영지까지 자신의 통제아래 두었다. 결혼을 통해 전쟁 없이 영토를 합병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투자가 어디있었겠냐만은,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결혼을 제테크로 삼던 풀크 5세와 그에게 제테크 교육을 받았던 유럽에 남아있던 후손들이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땅을 전쟁없이 쓸어 담자 결국에 10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될 정도로 나비효과 마냥 번져서 이후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대립조차 풀크의 영토 확장에 한몫을 하게 된다. 어쨌든 먼 훗날의 이야기고, 당시 풀크 5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를 도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와 맞서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의외의 꿀 혼맥이 그의 가시권에 들어왔고 그 옵션은 그를 막강한 대귀족의 반열로 인도했다. 즉 풀크 5세의 장남인 조프루아 5세(Geoffrey V de Anjou)와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Matilda de Normandy)를 1127년 혼인시킨 것이다.

사실 헨리 1세에게는 어린 아들도 있었지만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기에 마틸다가 부계로 따졌을 때 정복왕 윌리엄의 마지막 혈통인 셈이다. 조프루아는 당시 유럽에서 소문난 미남자에 검술 능력도 뛰어나 유럽 기사의 표지 모델이었고 전투에 나갈 때마다 금작화 가지를 투구에 꽂은 것 때문에 플랜태저넷(Plantagenet)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곧 그의 가문명이 된다. 이 결혼은 결국 앙주 가문이 프랑스 국왕에게 위협이 될 정도의 큰 이익이 되었다. 헨리 1세의 사후 마틸다가 왕관을 차지하려 하자 모계의 스테판 블루아가 대립하여 긴 내전이 발생하지만 여차여차하여 풀크의 손자이자 조프루아와 그녀의 아들 헨리 2세(Henry II of Plantagenet)가 영국 왕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헨리 2세 역시 조부와 부친의 결혼 제테크를 가훈으로 삼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여자였던 엘레노오르 드 아키텐 (Eleanor de Aquitaine)과 결혼하여 프랑스 남서부 전역을 예물로 가져오는 파문을 일으킨다. 잉글랜드 전역과 아일랜드, 그리고 프랑스의 반 토막을 그의 손자인 헨리 2세가 차지하게 된 것을 현대에 앙제빈 제국(Angevin Empire)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결혼란기의 선봉에는 풀크가 있었고 그가 행했던 여러 가지의 권모술수는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유럽에서는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다. 풀크가 결혼 제테크를 선호하고 그 폐해를 뼈저리게 잘 알던 루이 6세는 때마침 예루살렘 왕국 사절단이 사윗감 찾으러 도착하자 그 혼맥을 미끼로 소개시켜 줌으로써 프랑스의 재앙이었던 그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버리려 했고 그로 인해 풀크 5세가 레반트 지역으로 왔던 것이다.

풀크가 예루살렘 왕국을 종속국들을 포함하여 단독 통치하려고 나서며 자신들의 자치권을 축소시키자 십자군 국가인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은 이방인 왕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나섰다. 사실 십자군 2세대들 시각에서 보면 이건 완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밖으로 밀어내는 상황이었다. 본래 자신들의 부모 세대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것을 물려받아 지켜온 그들로서는 십자군 원정에 별 기여도 하지 않은 이방인이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 당연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1134년에는 결국 우려했던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반란의 핵심 인물인 십자군 2세대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앞서 언급했던 야파 백작 위그 2세였다. 그는 선왕의 딸이자 6촌 관계인 멜리장드 여왕에 대해서는 충성을 바쳤지만 풀크에 대해서는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풀크 국왕 반대파들이 백작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반발이 생각 외로 심하자 풀크는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한다. 반란이 터지자 멜리장드가 야파의 위그 2세 드 퓌제(Hugh II de Le Puiset)와 바람을 피운다는 괴 소문이 왕국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도를 넘어선 루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뻔했기에 결국 남편과 아내가 서로 소원해졌다. 왕가의 즉결적인 대화가 이루어 지지 않자 아랫 사람들이 스스로 일을 키우는 판이 펼쳐진 것이다. 야파의 위그 2세는 당시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였으며, 5촌 당숙인 보두앵 2세에게 헌신적으로 충성했었다. 이 충성도는 대를 이어 이제 멜리장드까지 이르렀다. 여왕의 6촌이자 어린 시절 친구가 불륜을 들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돌자 반란군에 적대적인 야파 백작의 사위인 가이사르 드 그레니어(Guautier de Grenier)는 반역죄로 그를 비난하며 그에 결투를 신청한다. 위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사법 결투를 위해 약속된 날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아무튼 이는 진위 여부와는 관계없이 자신을 제거할 목적이라는 사실을 안 위그 백작은 야파에서 인근의 아스칼론의 무슬림 군대와 동맹을 맺기에 이른다. 이집트인들의 영토였던 아스칼론으로 갔지만 그의 신하들은 이집트 동맹을 거부하고 그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여기서 아마도 멜리장드의 부탁을 받은 주교의 중재로 간신히 군사적 충돌은 모면할 수 있었다. 결국 중재안이 마련되었는데, 위그는 대의회에 출석하고 3년 동안 추방 선고를 받게 된다. 위그 백작에게 3년간 추방령을 내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3년 있다가 돌아오는 정도면 목숨을 걸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더 안전해 보였기 때문인지 위그 백작은 여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결국 위그 백작이 안심하고 배에 올라타다가 브르타뉴 기사에게 공격받아 중상을 입었다. 누구의 사주인지는 왕국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현장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시칠리아에 도착하자 곧 사망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인내하고 있던 멜리장드의 진노는 풀크와 그의 유럽 출신 기사들에게 오랫동안 머무르게 된다. 예루살렘 왕국은 개국 취지가 취지인 만큼 표면적으로는 엄격한 도덕적 왕국으로 신실한 기독교적 덕치가 중요했다. 그런 왕국이기 때문에 풀크의 노회한 계략이 발각되기 전까지는 그에게 광폭 행보를 가능하게 했지만 십계명을 하나 같이 어겨버린 듯한 추악한 사건의 명백한 주동자로 의심받자 풀크는 급속하게 왕국 내에서 정치 영향력을 상실하고 1136년 이후로는 멜리장드를 따르는 분파가 권력을 잡았다.

이후 내부적으로 고립된 풀크는 시선을 외부로 돌려 왕국 변경의 방위에 힘썼다. 1137년 모술의 아타베그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점차 세력을 키워 군세가 최 전성기에 차 올라 확장을 거듭하다 결국 십자군의 우호적인 다마스쿠스마저 위협했는데 1140년 이후부터 풀크는 다마스쿠스를 도와 장기의 군대에 맞섰다. 장기의 지하드 선포와 수차례의 대규모 진군이 있었으나 풀크는 살라흐 앗 딘 이전의 이슬람의 구심점인 장기와 호각지세를 이루며 오히려 장기를 한수 접게 만드는 전황을 이끌어 냈었다. 또한 예루살렘 남쪽 국경 주변 고지에 케락(Kerak) 성채를 구축했고, 파티마 왕조의 아스칼론과 접해 있는 헤브론의 방비와 더불어 이집트 공격에 대한 왕국의 교두보 역할을 할 성채가 없었기 때문에 일련의 요새화로 작은 마을을 둘러 쌀 것으로 대의회에서 의결할 것을 주문했다. 이 국경 도시를 점진적으로 둥글게 둘러싼 계획에는 이벨린(Ibelin), 동로마 시대 폐허가 된 성벽과 탑의 일부를 재사용하여 재구축한 요새 베스기벨린(Bethgibelin), 갓(Gath) 지역의 블랑쉬 가르드(Blanche Garde) 등이 포함되었고 십자군 요새가 건설되어 왕국의 방위를 튼튼하게 했다. 막장이었던 파티마 왕조는 감히 침범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장기 역시 풀크의 능력에 주춤거리는 상황이 되자 내부적으로 왕국은 문화가 융성해지고[36] 유럽에서 순례자가 모여들며 상업이 발달하는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1143년 풀크는 아내 멜리장드와 함께 아크레에서 사냥을 하던 중 낙마 사고를 당했는데 사흘을 의식없이 보내다가 결국 11월 3일 아크레에서 죽었다. 기욤 드 티레의 기록에 의하면 너무 심한 뇌진탕으로 코에서 뇌수가 흘러나왔다고 하며, 비록 멜리장드는 풀크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전통대로 풀크는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의 역대 국왕들의 묘역에 4번째로 안치되었다. 결국 그의 사후 예루살렘 왕국은 무슬림에 대항하는 노련한 군사 지휘관을 잃어버렸기에 장기는 십자군 국가에 대한 진군을 계속하여 1144년 에데사 백국이 무너졌고 이는 제2차 십자군의 발흥의 계기가 되었다. 기욤 드 티레는 풀크가 멜리장드에게 루머를 덮어씌우는 일에만 할애하며 왕국의 원주민에 대한 불신으로 앙주 출신의 새로 도착한 프랑크인들을 과도하게 선호한다고 지적했다. 멜리장드가 정말로 죄를 지었다면, 교회와 귀족들이 그녀를 옹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37]

2.3.5. 지하드(جهاد)

십자군의 난데없는 선방을 당한 이슬람 측은 십자군을 또 하나의 단순한 서방 야만족들의 침략 정도로 치부했으므로 평소 자손대대로 사이가 안 좋던 인근 지방의 에미르가 털리는 것을 박수 치며 좋아라 했고, 칼날이 자신으로 향하면 멀리서 이슬람풍의 풍악소리가 들리는 걸 들으면서 다굴 맞던 식이었다. 자신과 원한이 있는 에미르에게 십자군이 행군하면 잠자리를 제공하고 지원도 해주었던 그들이지만 십자군의 궁극적 목적이 비기독교 종교를 구축하러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런 착각을 하는 콩가루 민족에게는 연합 요격전 같은 방어는 요원한 일이었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나타난 이슬람 군웅이 있었으니 바로 이마드 앗 딘 장기다. 그는 본래 이라크 남부 바스라의 총독이었는데, 1127년 투르크 군대에서 용력을 떨친 후 이라크 북부의 모술의 에미르로 임명된다. 그는 찌끌찌끌한 술탄들의 땅 따먹기 놀이터인 시리아 전역을 셀주크 튀르크로 통합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지방 술탄들은 당황해 하면서도 서로 반목해버리는 역사의 반복을 시전하시고 1128년, 아르투크 왕조의 잔당으로부터 시리아의 거점 알레포까지 장기의 손아귀에 떨어져 십자군에 비견될 만한 세력을 형성했다. 시리아 동북부를 통합한 장기는 십여 년 동안 내실을 다지며 에데사 백국에게 지하드를 선포하며 호각지세로 맞섰다. 때마침 제1차 십자군의 주역이던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드 쿠르트네가 장기에게 빼앗겼던 도시에서 공성전을 하던 중 적이 설치한 지뢰를 밟아 중상을 입었다. 빈사에 가까운 상태에서도 전투를 지휘하여 탈환에는 성공하여 십자군 1세대다운 용맹을 보이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얼마 뒤 예수를 영접하게 된다.

2.3.6. 에데사 백국 함락

대혼란에 빠졌던 이슬람도 강력한 이마드 앗 딘 장기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어 세력을 가다듬고 반격을 하기 시작하자 십자군 국가들은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 1144년, 에데사 백국이 이슬람의 사자 장기에게 털린 것이다. 조슬랭 1세의 아들 조슬랭 2세 드 쿠르트네가 인근 지방의 에미르에게 출병한 틈을 노려 대규모의 군대로 에데사에 총공격을 감행하여 포위했다. 구원하려 귀환하는 조슬랭 2세의 군단을 차단하니 에데사는 총사령관이 없는 상태에서 장기의 공격을 감당하는 상황이 직면했다. 성내에는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만 있었는데 기도와 미사로 기적을 외치며 무려 4주간이나 공방전을 버텼다. 결국 1144년 그것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에데사 백국의 수도는 함락되어 에데사 대주교와 종파 주교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예수가 오시기 하루 전날 미리 하늘로 마중 나가는 기적을 당하게 된다. 그들의 육신은 참수되어 바그다드 칼리파에게 보내졌다. 에데사의 함락은 지하드의 승리이자 탈환이었다. 목숨을 부지한 그리스도교도은 모조리 노예로 팔려가는 봉변을 당한다.

2.3.7. 제2차 십자군

에데사 백국이 함락당하자 이에 깜짝 놀란 서유럽에서 제2차 십자군을 편성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하였으나 애꿎은 물자와 인력만 날려버린다. 그 와중에 이마드 앗 딘 장기는 암살당하고 그 아들인 누르 앗 딘(일명 누레딘)이 장기 왕조의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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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내전

  • 보두앵 3세
제2차 십자군의 실패는 예루살렘 왕국에 장기간에 걸쳐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서방은 대규모 원정을 보내는 것을 주저했고, 이후로 수십 년 동안, 순례를 하고자 하는 유럽의 소수 귀족들을 위한 보디가드 형태의 작은 소대만이 왕국을 들락거렸다. 왕국의 선천적 인력 부족을 해갈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그에 반해 이슬람의 지하드는 갈수록 거세어졌다. 보두앵 2세 풀크가 그랬던 것처럼 강력한 군주가 십자군 국가들을 통솔하지 못하자 결국 북쪽의 십자군 국가들은 독립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에서는 멜리장드 보두앵 3세 모자 사이의 대립으로 왕국의 단결력이 떨어져갔다. 보두앵 3세는 유럽에서 건너온 십자군 제2세대가 성지에서 낳은 제3세대에 속한다. 토종 우트르메르인 그가 13살 때 부왕 풀크가 사고로 죽었고 모후 멜리장드와 함께 공동으로 왕국을 다스렸는데 멜리장드는 귀족 중에서 조언자를 구하여 어린 아들을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시켰다. 그녀는 야파의 백작으로 임명한 그녀의 둘째 아들 아모리 나블루스의 영주 필립 드 밀리[38], 선대왕 풀크의 최측근인 이벨린의 영주이자 이벨린의 발리앙의 아버지인 바리장 디블랭, 그들 중에서도 특히 고모의 아들이자 예루살렘의 집정관[39] 므낫세 드 히어리제(Manassès de Hierges)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덕택에 아주 오랫동안 섭정으로 통치했다.[40]

1150년 보두앵 3세는 스스로 통치할 나이가 되자 정치에 관여하려 했는데 어머니 멜리장드를 따르는 귀족들의 반대를 받았다. 자신과 어머니 사이를 이간질하는 므낫세 드 히어리제를 격렬히 비난하고, 반대파였던 바리장 디블랭을 람라의 상속녀이자 과부였던 헬비스 드 람라와 혼인을 시켰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측근으로 돌아선 바리장 디블랭[41]으로 므낫세 드 히어리제를 견제했다.

1152년 초 어머니의 부제를 틈타 예루살렘 총대주교 풀크 당굴렘에게 성묘교회에서 자신에게 왕관을 씌우라고 요구했다. 여왕 편이던 총대주교가 거부하자 뛰쳐나가 항의 표시로 월계관을 쓰고 예루살렘 거리에서 가두행진을 펼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예루살렘 왕국에 영향력을 발휘할 목적이 있었던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이 분쟁을 조정해줌에 따라 왕국의 대의회 오트 쿠르(Haute Cour)에 왕국 분할을 회부하기로 서로 동의했다. 대의회는 보두앵 3세 아크레 티르 그리고 갈릴레아 지방인 상대적으로 빈약한 왕국의 북쪽을 통치하고 멜리장드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유대 사마리아 지방, 나블루스 그리고 예루살렘을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보두앵 3세는 그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단독 대관식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렸고 멜리장드는 눈딱감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보두앵 3세에게 성과도 있었는데 눈에 가시 같았던 므낫세 드 히어리제 대신에 그의 지지자인 험프리 드 토론으로 집정관을 재배치한 것이다. 보두앵 3세 멜리장드는 이 조치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다. 이 판결 뒤 무장해제 된 멜리장드와 빈털털이가 된 보두앵 3세의 실낱 같았던 신뢰의 끈은 결국 끊어져 버렸다.

마침내 보두앵 3세의 군대가 이러한 결정에 승복하지 못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내전이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은 심해져도 밥상머리에서 그릇 몇 개가 날아가서 깨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지엄한 왕실의 갈등은 그 여파가 왕국이 둘로 쪼개져 버리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 시민들에게 눈물겨운 코스프레를 열심히 한 덕분에 명분은 당연히 아들 보두앵 3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곧 그의 어머니의 영토를 침범, 므낫세 드 히어리제의 영토인 미라벨 성채로 진격해서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탑에서 그의 어머니를 포위했다. 멜리장드는 곧이어 항복하고 나블루스로 은퇴했다. 꿈에 그리던 단독 왕이 된 보두앵 3세는 여세를 몰아 1153년 왕국 창립 이래 예루살렘을 끊임없이 급습한 파티마 왕조 군대의 진출 거점인 남쪽의 요새 아스칼론을 공격했다. 요새는 함락되어 야파주에 편입되었으며, 그의 형제 아모리에게 야파 공작을 맡겼다. 1154년 어머니와 아들은 화해했고 보두앵 3세는 모후를 섭정과 수석 고문으로 임명했으며, 특히 교회 관리를 임명할 때 그녀의 영향력을 일부 유지시켰다.

후세의 사가들은 오트 쿠르(Haute Cour)의 분할 판결이 내전을 못 막을 뿐만 아니라 왕국의 자원을 분열시켰다고 말한다. 멜리장드가 자신의 아들에게 섭정을 거두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렇게 해야 할 외부 자극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왕국의 탁월한 섭정으로서 왕국 귀족과 시민들에게 보편적으로 인정받았으며, 그녀의 통치는 교회 지도자들과 다른 동시대 사람들에게 현명한 통치라고 특징지어졌었다. 보두앵 3세 1152년 이전에 통치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이 점에서는 그렇게 무시당하는데 책임을 져야했다. 교회는 유대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의 귀족과 마찬가지로 멜리장드를 분명히 지지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2.3.9. 동로마 제국 동맹과 이집트 원정

어쨌든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등의 종교 기사단이 맹위를 떨치고 이집트의 국가 막장 테크를 탄 파티마 왕조와 페르시아 쪽에서 콩가루가 된 셀주크 제국, 이슬람권이지만 예루살렘 왕국에 호의적이던 다마스쿠스 등 각종 이슬람권의 버프를 받아 그런대로 영토를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보두앵 3세가 아스칼론을 점령하니 십자군이 네게브를 아우르고 레반트 서부 해안을 완전히 장악하여 십자군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득에는 대가가 따랐다. 앞선 2차 십자군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는 뻘 짓으로 왕국과 전략적 동맹 관계였던 다마스쿠스의 힘이 약해지고, 왕국이 아스칼론을 점령하자 예루살렘 왕국과 파티마의 충돌로 힘의 균형이 기울어졌다. 힘의 공백이 생기자 그에 따라 아래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누르 앗 딘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두앵 3세는 내전과 파티마와의 전쟁으로 인한 군사력 소모로 다마스쿠스의 방어를 지원할 병력이 여의치 않았다. 제2차 십자군 원정 후 비록 십자군이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와 화해를 하였다지만, 그들은 더 이상 기독교 종자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종교를 위시한 누레딘의 설득에 마음이 동요한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아스칼론이 함락된지 몇 달 되지 않아 다마스쿠스 민중들은 대중에게 인기를 상실한 지도자를 축출하고 누르 앗 딘이 당도하자 성문을 올려주었다. 말 그대로 무혈입성, 누르 앗 딘은 명실상부한 시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렇듯 이슬람 도시였지만 예루살렘 왕국에 우호적이었던 다마스쿠스가 장기의 후계자 누르 앗 딘의 손에 떨어지면서 오히려 상황만 악화되었다[42]

아스칼론 점령의 대가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십자군이 실질적으로 이집트 시나이 반도 부근까지 영토를 넓히자 예루살렘의 시야에 나일 강 삼각주 유역인,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 펼쳐져 있게 된 것이다. 당시 레반트 지역은 척박하고 황량한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고대 로마 제국 시절부터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 시절까지 장장 일천 년 동안 그들의 곡식 창고였던 젖과 꿀이 흐르는 이집트 땅을 넘볼 수 있게 되자 그 땅을 차지하고 싶은 유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고 마치 그들의 입에서 빙의 당한 듯 마냥 DEUS LO VULT가 또 다시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신께서 원하시고(?) 선대 왕들의 염원이 눈 앞에 아른거리자 자국의 영토를 공고히 해야 할 시점에 무리를 하게 된다. 결국 훗날 유럽으로부터 많은 십자군을 끌어들여 처참한 결과를 동반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두앵 3세는 동로마 제국을 동맹자로 하여 우트르메르의 상황을 진정시켜보려 하였다. 비록 과거에 비해 영광이 바래 졌다지만 조지아 왕국의 전성기에 셀주크 제국이 주춤하자 동로마 군대는 어부지리로 아나톨리아 반도를 차근차근 재 점령하고 있었으며 이 시점에서 제국은 예루살렘과 시리아의 흔들리던 세력 균형을 바로잡는 데 효과적인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예루살렘이 이집트를 공격하려면 동로마 제국 해군 전단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제국과 왕국의 관계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가지고 긴장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시간을 돌려 보두앵 2세 시절 이탈리아에서 막 귀국한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2세가 이슬람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어린 딸 콩스탕스[43]가 성장하여 레몽 드 푸아티에와 결혼하여 잘 통치하는 와중에 또 안티오키아의 공작 레몽이 1149년 이슬람의 누르 앗 딘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한다. 그의 미망인 콩스탕스가 이번에는 본인의 희망대로 바락바락 우겨서 재혼한 상대는 잘생기고 용감무쌍한 모험가이자 나쁜 남자,놈팽이 르노 드 샤티용이었다. 그는 1156년 동로마 제국에 감히 공물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小아르메니아 왕국의 토로스와 합동으로 아나톨리아를 휘젓다가 키프로스로 건너가 무려 3주간 종횡무진하며 약탈을 일삼는다. 기독교의 영토라는 사실은 엿 바꿔 먹어버리고 섬 전역에서 공국의 십자군이 흑화하여 살인 관광, 파괴를 일삼았다. 마누일 1세은 물론 보두앵 3세마저도 이에 격노하여, 어렵게 보이던 동맹이 이렇게 결성되어버리는, 인류 역사상 다시없을 황당한 이유로 동맹 성립이 이루어진다.

황제는 이미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진격 중이었고, 보두앵 3세는 마누일 1세가 안티오키아 공국을 정벌하는 동안 관여하지 않았고, 그 대가로 황제는 누르 앗 딘에 대한 예루살렘 왕국의 지원을 약속했다. 보두앵 3세는 험프리 드 토론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어 마누일 1세의 조카딸 테오도라와 결혼하여 동맹에 방점을 찍었다. 안티오키아의 공작 르노는 약탈 당시에도 주변의 지지를 못 받고 독단적으로 설쳤기에 휘하의 기사들도 도와주지 않았다. 상황을 그때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제국의 진군에 대항하려 진지를 성심 성의껏 구축하고 관광 전우인 소 아르메니아의 토로스를 돌아봤더니 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홀로 동로마의 격노를 쓸쓸히 맞이하게 되었다. 르노는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힘없는 이들을 죽이는 재주는 뛰어났지만 강자에게는 한없이 순해지는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예루살렘 성 십자가의 기적 같은 도움 없이는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그제서야 르노는 황제의 진영으로 거친 베옷을 입고 구르듯 들어가 그의 발치에 오체투지하며 거의 울면서 자비를 구걸했다. 그냥 죽였으면 그들의 자손들이 대대로 편했을 텐데 정말 과분하게도 안티오키아 공국을 동로마 제국에 예속시키는 것을 전제로 제국의 봉신으로서 안티오키아를 통치하도록 허락해주고 만다.

1159년 4월 12일, 마누일 1세는 삼아 안티오키아 진입으로[44] 수 세기만에 동로마 황제가 다시금 입성하게 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조카 사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누르 앗 딘의 본거지인 알레포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이번 이야말로 알레포가 함락될 것 같았으나 그러지 못했다. 마누일 1세의 욕심은 안티오키아까지였던 듯하다. 본심은 알레포보다 십자군 국가들에게 평화를 되찾아주는 일에 힘썼다. 알레포를 포위했지만 곧 포위를 푸는 조건으로, 누르 앗 딘에게 현재의 국경대로 예루살렘 왕국과 휴전 협정을 하고 누르 앗 딘에게 동로마의 셀주크 제국에 대항한 아나톨리아 탈환에 지원을 한다는 것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주변 이슬람 세력들은 숙적 동로마의 군대와 충돌할 것을 두려워하여 침공을 멈췄고, 동로마 제국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종주권을 확고히 함으로써 쌍방 이득을 얻었다. 일부 십자군 기사들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모든 전선에서 휴전 협정이 성립되었다.

1160년 르노는 안티오키아 정치에서 배제당해 주변 이슬람 상인들을 약탈하는 것으로 소일하며 누르 앗 딘에게 개기다가 유프라테스 계곡 근처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와중에 누르 앗 딘에게 빡공을 맞고 예루살렘 왕국의 입장에서 끔찍하게도 산 채로 사로잡혔다. 그러나 공작이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몸값을 내주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그 후로 16년간이나 알레포에서 포로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남편인데 몸값조차 지불하지 않았던 걸 보면 콩스탕스도 그때 즈음엔 그의 패악질에 콩깍지가 싹 벗겨졌던 듯하다. 르노가 본토 프랑스의 샤티용에서 계승권에 밀려 2차 십자군에 흘러 들어와 영토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무식하지만 열심히ㄷㄷ 활동하다 이슬람에 포로로 잡혀 고초를 겪어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가득하다는 것은 일견 이해가 가지만 사실 이렇게 광역으로 설쳐댔는데도 안 죽고 여공작의 남편으로 신분이 수직 상승해 기 드 뤼지냥과 붙어먹은 것도 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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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로써 입성하는 로마 황제 마누일 1세와, 그 말을 끄는 르노 드 샤티용[45]
마누일 1세는 셀주크 제국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2세와 싸웠고 3년 후에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 나중에 황후 술츠바흐의 베르타가 죽자 마누일 1세는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에게 새로운 신부감 물색을 부탁했다. 마누일 1세와 보두앵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만나 소개팅 주선 겸 대 마상시합을 할 만큼 친해졌으나, 이때 르노 샤티용이 누르 앗 딘에게 포로로 잡혔고 안티오키아 공국의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을 때 공국의 섭정위를 보두앵 3세가 콩스탕스의 장남 보에몽 3세[46]에게 독단으로 맡기자, 예루살렘이 황제에게 권했던 국혼을 마누일이 씹고 콩스탕스의 딸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둘의 동맹은 흐지부지되었다.

1161년에 모후 멜리장드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기억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더이상 그녀가 맡았던 국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그녀의 자매들인 트리폴리 백작 부인 오디에르나와 베다니 수녀원장인 이오베타가 간호를 맡는다. 하지만 결국 그해 9월 11일 모후 멜리장드는 사망한다. 멜리장드는 예루살렘 올리브 산 근처의 성모 마리아(Church of Saint Mary)의 교회에 매장되었는데 바로 어머니 모르피아 옆이었다.[47] 멜리장드는 말년에 동로마 패퇴 이후 폐허로 남아있던 성자 사바스(Saint Sabbas)의 정교회 수도원을 복구하여 예루살렘 동쪽 외곽 올리브 산 근처의 성모 마리아 교회와 겟세마네 교회(Gethsemane Church), 그로토 아고니 (Grotto of the Agony)[48]를 관리하게 하였고 그 수도원을 유산으로 남겼다. 기욤 드 티레는 멜리장드의 30년 통치에 대해 "그녀는 매우 현명한 여성이었고 거의 모든 업무에 경험이 풍부했으며 그녀는 중요한 업무를 성별이라는 장애를 완전히 극복하여 담당했었다 (중략) 그리고 선왕들의 영광을 모방하려고 애썼던 멜리장드는 그 점에서 그녀의 전임자와 동일하다고 간주된 능력으로 왕국을 통치했다."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중세 시절 여성에겐 그들의 남자 형제, 아버지, 심지어 아들보다도 더 적은 권리와 권한만을 제한적으로 주려 애쓰던 사회와 문화로부터 최상의 존경과 찬사를 보낸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야 진정한 왕이 되었지만 보두앵 3세는 트리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질에 걸려 베이루트에서 1162년 2월 10일 모후 멜리장드를 뒤따라가듯 짧은 병상 생활 후에 동생 아모리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숨을 거뒀다. 성묘교회에 안치되어 관 뚜껑도 닫기 전에 이 시절 젊은 왕의 죽음에는 늘 그렇듯 독살의 의혹이 일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보두앵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시리아 정교회 의사가 준 약을 먹고 나자 곧바로 이질에 걸렸다고 한다. 보두앵 3세가 승하하였을 때 왕비 테오도라 콤니니는 아직 16세였고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대의회 오트 쿠르의 승인 아래 왕의 유언대로 동생 아모리가 뒤를 이었다.
  • 아모리 1세
아모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형과 비슷했으며, 동생이 훨씬 체격이 컸음을 제외하면 생김새도 닮았었다. 하지만 일부 귀족들은 아모리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다. 1157년 그는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2세의 딸인 아녜스 드 쿠르트네와 결혼했으나, 이들의 결혼은 두 사람이 너무 근친[49]이라는 이유로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아모리 드 네슬레의 비난을 받았다. 아모리는 결국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보두앵 시빌라(예루살렘 왕국)가 적자로 인정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이혼에 동의했고, 아녜스 드 쿠르트네는 바리장 디블랭과 헬비스 드 람라의 장남 위그 디블랭[50]과 재혼했다. 1162년 2월 18일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에서 아모리의 대관식을 열고 기름 부음 의식이 치러졌으며 아모리 1세로 등극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모리 1세는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접한 야파와 아스칼론의 공작이었으므로, 왕국의 장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속에 이집트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4번째 이집트 원정은 예정된 서막이었다. 이집트 원정은 사실 시기적으로 적합한 시점이긴 했다. 파티마 왕조가 와해되어 두 명의 와지르(Vizier)가 파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 파티마의 숙적인 누르 앗 딘이 이곳의 중요성을 내다보고 파견한 장수 시르쿠의 연합으로 한 쪽 파벌의 와지르 샤와르(Shawar)가 권좌에 앉았다. 그러나 종래에는 시르쿠와 샤와르의 관계과 악화되면서 또 다시 파국에 접어들자 샤와르는 아모리 1세에게 원조를 요청하게 된다. 1164년 예루살렘 왕은 파티마 왕조에서 벌어진 대혼란에 개입하여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하여 빌베이스(Bilbeis)에서 시르쿠를 포위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누르 앗 딘은 동네북 안티오키아 공국을 공격,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지휘관들을 사로잡았다. 할 수 없이 아모리 1세는 시르쿠가 이집트에서 물러나면 본인도 물러나겠다고 제안했다. 이로써 당분간은 세력 균형이 유지되었으나 파티마 왕조의 지속적인 불안정한 상태는 삼국에게 살얼음판 같은 눈치 싸움으로 양상이 변해가고 있었다. 1167년 때가 무르익자 누르 앗 딘은 기독교 손에 떨어질 듯한 이집트를 선점하기 위해 또 다시 시르쿠를 파견한다. 이때 시르쿠의 조카 살라흐 앗 딘이 함께 종군한다. 파티마의 샤와르는 이번에도 아모리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왕국은 위그 드 카이사레아를 카이로에 보내 원조 조건으로 40만 디나르를 지불하는데 동의하였으나, 위그는 대담하게도 칼리파가 직접 조약에 날인할 것을 요구했다. 조약이 체결되자 아모리 1세는 시르쿠가 점령중인 알렉산드리아에 진군하여 포위 공격으로 성의 항복을 받아냈다. 지금껏 고대의 총대주교 교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세력권 밖에 있던 성 마르코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로 개선식을 하듯 입성하여 저 유명한 파로스의 등대[51]에 십자가를 걸고 성수를 뿌리는 등 정화 작업을 했다. 기독교의 주요 5대 교구를 모두 이슬람의 손아귀에서 회복하고 이집트를 예루살렘 왕국의 휘하에 두는 기염을 발휘하기에 이르니 십자군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를 넘어 비옥한 삼각주를 공격해 공물을 받아내기도 했다. 추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누르 앗 딘의 공격에 대비해서 수도인 카이로에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그 대가로 연간 금화 십만 디나르를 받게 되었다. 이집트는 실질적인 의미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보호국이 된 것이다.

이렇듯 아모리 1세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 왕국을 정점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니 이집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좋지만 왕은 누르 앗 딘이나 시르쿠 마냥 이집트를 아예 예루살렘의 직할령으로 편입하려는 과욕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후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는 상황 반전을 위해 기욤 드 티레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사로 보내 파티마 왕조에 대한 협동 공격을 협의하게 했다. 그리고 다시금 마누일 1세의 조카 손녀인 마리아 콤니니와 재혼하고, 동로마와 결혼으로 든든한 우방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구호기사단이 강경하게 이집트가 무력하니 단숨에 점령할 수 있다고 단독 공격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샤와르는 못 믿을 종자며 그의 아들 카밀은 누르 앗 딘과 내통하고 있는 간교한 자라고 진언했다. 따지고 보면 십자군의 당시 힘은 그런 임무 달성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물이 올라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동로마의 도움을 받으면 오히려 그들이 전성기 역사를 내비치면서 이집트를 독차지할 가능성도 있었다. 성전 기사단은 오히려 반대였다. 다마스쿠스 때처럼 우방을 공격해서 도리어 적들이 어부지리를 얻는 형세가 되는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기점에서 아모리 1세는 과거 자신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명제를 선택해버리고 ㅍ의 합공 여부의 전갈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이집트 공격을 이끌었다. 성전 기사단은 이 공세에 불참을 통보했다.

이집트의 샤와르는 누르 앗 딘의 탐욕적인 손아귀에 질려 아모리 1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던 상태였는데 돌연 아모리 1세에게 따귀를 맞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자 줏대 없는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바로 달려갔다(...) 막대한 사례금과 이집트의 3할을 약속받은 누르 앗 딘은 또 다시 시르쿠를 파견했다. 1168년 11월, 십자군은 빌베이스를 장악하고 곧장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다. 그들이 나일강에 배를 띄워 강을 거슬러 천천히 올라가느라 지체하는 사이에 시르쿠의 군대가 카이로 근방까지 다다랐다. 이미 십자군은 누르 앗 딘이 다된 밥에 재를 뿌리자 의욕을 상실했다. 그 사실을 아는 시르쿠 역시 십자군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아모리 1세는 철수하는 대가로 샤와르에게 돈을 받아내려 했으나, 십자군의 공세가 무력화되었음을 알았기에 협상에 임하는 척 시간만 끌었다. 결국 십자군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이집트에서 쓰디 쓴 퇴각을 한다.

아모리 1세는 이집트를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본래의 전략으로 마누일 1세의 150척의 동로마 해군을 지원군 삼아 다미에타를 공격하기로 하여, 1169년 육, 해상 양쪽에서 진격했다. 그러나 그들의 승산을 저해하는 것은 누리 앗 딘도 아니고 시르쿠 아닌 그들 자신이었다. 십자군은 황제가 이집트를 장악하고 전리품을 독차지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그를 조금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측의 협력이 부족하니 이 계획은 곧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뇌부의 분란과 달리 병사들은 동로마의 도움을 알고 있었기에 기세가 등등하여 이집트에 대한 십자군의 육상 공격이 임박하지만 때마침 우기가 시작되자 시르쿠가 십자군을 격파하는 통에 다 날아갔다.(...) 비가 그칠 기미가 안보이고 전장이 늪으로 변하자 아모리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 동로마 제국 함대 역시 귀국했으나, 우기의 폭풍우를 떨쳐내지 못하고 다수의 선박을 잃었다.

이 원정의 실패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십자군 귀족들은 대외적으로 동로마를 비난했으나, 실상은 왕의 늑장과 전술을 탓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아모리 1세는 그래도 이집트를 정복한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연합 공격을 하고 싶은 마음에 그는 다미에타에서 생긴 악감정에도 불구하고 마누일 1세와 우호적인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 동로마 제국의 정적 노르만인들과 협상을 개시했는데 여기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174년 그 놈의 누르 앗 딘이 죽자 아모리 1세는 즉각 시리아의 바니아스를 공략했다. 이집트 전선에 적들의 군대가 모이는 것을 막기위한 성동격서였다. 그리고 당시 전성기를 이룩했지만 점점 위상이 하락하던 시칠리아 왕국의 굴리엘모 2세가 아모리 1세의 협조 요청에 대함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하여 국가의 위상에 반전을 꾀했다. 아모리 1세는 그곳에서 노르만군과 합류해서 포위 공격을 도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예루살렘 왕들의 고질병인 이질에 걸리고 말았다. 왕은 고열에 시달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시칠리아 왕은 단독으로 공격을 준비했으나 급습을 받는 바람에 배로 도망쳐 돌아갔고 바로 본국으로 돌아간다.

예루살렘에서는 의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해 7월 11일 아모리 1세가 병사한다. 결국 이집트 원정도 실패하여 시르쿠의 조카인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의 패권을 쥐게 되어 훗날 아이유브 왕조가 들어서게 되고, 당시 이집트 원정을 주도하던 아모리 1세가 사망하면서 살라흐 앗 딘에게 관광당할 처지에 놓였다. 아모리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콤니니는 이사벨을 낳고 모후 멜리장드 사후 왕국령이었던 나블루스를 유산으로 받았다. 첫 번째 부인 아녜스가 낳은 아들 보두앵 사망 플래그를 가지고 아모리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하였다.

2.3.10. 살라흐 앗 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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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오브 헤븐(2005년작) - 살라흐 앗 딘 역: 가산 마수드[52]
십자군의 손길에서 벗어나자 이집트의 샤와르는 결국 시르쿠에게 정해진 수순처럼 통수를 당하고야 만다. 시르쿠는 그의 오랜 숙적을 살해하고 스스로 이집트 와지르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도 그렇게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두 달 후, 이번에는 시르쿠가 죽고 이집트 원정 대부분을 숙부와 함께 했던, 훗날 기독교도들에게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는 그의 조카, 알 말리크 알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53]가 그 뒤를 이었다. 시리아의 외인부대 지휘관이었던 살라흐 앗 딘은 이름뿐인 시아파 칼리파 알 아디드가 죽자, 1171년 9월 이집트에 대한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곧바로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한편, 그의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살라흐 앗 딘의 명목상 주인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마찰을 피했다. 따라서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기 전까지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아있기를 희망하였다.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고 곧이어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수니파인 살라흐 앗 딘은 당연히 종교적 앙숙인 시아파의 체제를 없애버리고 싶었고 곧바로 이집트에 시아파 교단을 철폐시키고 수니파 교단을 회복하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영토를 확장하고 파티마 왕조 잔존 지지세력을 소탕하였으며 홍해를 건너 시아파 왕국 예멘까지 정벌하여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수니파 신도들은 그에게 '신의 친구'(Waliullah)라는 호칭을 붙였다. 그렇게 이슬람 세계에서 파티마조 칼리파제의 종식과 함께 살라흐 앗 딘의 위상이 확고하게 드러났다. 살라흐 앗 딘은 압바스조 수니파 칼리파의 명목상의 통치 하에 놓이는 이집트, 북아프리카, 예멘을 통치하게 되었다. 압바스조 칼리파는 그때까지 공식적으로 장기 왕조에게 시리아와 이집트 통치를 일임하였지만, 살라흐 앗 딘이 실효 지배하는 이집트와 정복한 다른 지역에 대한 위상을 인정하였다.

살라흐 앗 딘은 시리아 지역 무슬림들의 문제의 심각성과 그 지역을 차지하려는 십자군의 야욕을 보고는 분열된 이슬람 지역의 단합이 펼요함을 자각하고 이를 위해 시리아 지역으로의 진출을 결의하였다. 누르 앗딘 사후 그의 직위는 아직 소년이었던 살리흐 이스마엘 알 말리크에게 계승되었지만 이 소년 역시 1181년 사망하였다. 장기 왕조의 공백 이후 살라흐 앗 딘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행군하여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로 누르 앗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였고 자연스럽게 대리 통치자인 삼스 알 딘은 그곳을 양도하였다. 이어 홈스와 하마로 향해 이 두 곳 역시 접수하였다. 그러나 알레포와 모술의 상황은 달랐다. 살라흐 앗 딘이 알레포 지배층에게 그곳의 양도를 요구하자 그들은 거세게 반발했으며, 심지어 시아파 암살단인 핫샤쉬에게 의뢰해 그들의 종교 수장 시아파 칼리파를 멸하고 온 살라흐 앗 딘을 죽이리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알레포 지배층은 살라흐 앗 딘의 입성을 막기 위해 이교도인 트리폴리의 백작 레몽 3세에게 거금을 주고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레몽 3세는 자신과 반 살라흐 앗 딘 무슬림 지배층과의 동맹의 중요성, 이슬람 진영이 카이로와 다마스커스, 홈스, 하마에 이어 알레포와 모술 마저 통합시킬 경우 십자군이 포위되어 직면하게 될 위험을 직시하고는, 반 살라흐 앗 딘 연합인 알레포와 모술 술탄들의 요구에 따라 그들을 지원해 주었다. 알레포의 지배층은 십자군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일시적으로 살라흐 앗 딘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살라흐 앗 딘은 절묘한 군략으로 다시 공격을 감행해 알레포 군대를 패퇴시키고 종국에는 그곳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그의 목표인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의 통일이 성취되었다. 통합 후 이슬람 진영은 전래 없이 강해졌고 살라흐 앗 딘의 아이유브 제국의 강역은 북아프리카, 수단, 예멘, 이집트, 시리아, 그리고 북쪽의 모술, 알레포로부터 남쪽의 알 누바를 아우르는 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2.3.11. 나병왕 보두앵 4세(Baudouin le Lepreux)

  • 보두앵 4세
보두앵은 어린 시절을 야파와 아스칼론을 거쳐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아버지와 궁전에서 보냈지만 그의 어머니,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 부인 아녜스 드 쿠르트네는 아모리 1세가 즉위하자 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모종의 술수로 시돈의 영주가 되면서 이혼을 강요당하여 강제로 헤어졌다. 이후 계모이며 왕비인 마리아 콤니니 손에 자랐다. 보두앵은 9살이 되자 역사가이자 고위 사제이며 큰아버지 보두앵 3세의 친우인 기욤 드 티레가 가정 교사로 발탁되어 왕국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때 또래 아이들과 얼굴을 꼬집는 게임중세 놀이 수준에서 백전백승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 행실을 보이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기욤 드 티레가 심각한 질병의 징조로 인식했지만, 나병으로 결론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사춘기 시절 점점 이상한 징조를 보이자 보두앵을 의사에게 데려갔다. 의사가 진찰한 결과, 보두앵은 심각한 피부병인 나병에 걸렸으며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부왕 아모리 1세에게 이를 보고했다. 모든 수를 써서 치료를 했지만 중세 의학 수준에서는 나병은 불치병[54]이라 병세는 십대 후반에 급속도로 확산되어 몸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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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55]의 나병 증상을 의심하는 기욤 드 티레

보두앵의 아버지 아모리 1세 1174년 7월 11일에 급서했고 그 해 7월 15일 보두앵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으며 보두앵 4세로 등극했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매파와 비둘기파로 파벌이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와중에, 최대의 적인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를 기반으로 장기 사후 시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왕국을 포위하는 양상을 띄며 위협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너무 어렸던 왕을 대신하여 초기에 두 명의 섭정에 의해 지배되었다. 급작스러운 유고에 밀 드 플랑시(Miles de Plancy)가 비공식적으로 맡았고, 몇 달 뒤에 그가 사망하자 대의회에서 왕의 5촌 당숙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발탁되어 정식으로 왕의 앞에 위시했고 왕국을 대소사를 관장하기 위해 본거지를 트리폴리에서 예루살렘 북쪽 근교의 티베리아스로 옮겼다. 문둥병자로서 보두앵 4세는 오랫동안 통치하거나 결혼하여 상속자를 낳을 가망성은 희박했고, 자연스럽게 보두앵 4세의 상속인이자 왕세매로써, 누이인 시빌라와 그들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가 영향력을 가지는 위치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시빌라는 베타니아의 수녀원에서 그녀의 대고모 할머니 이오베타(Ioveta) 수녀원장 슬하에서 자랐고, 이사벨라는 나블루스에서 그녀의 친어머니 여왕 마리아 콤니니 슬하에 있었다. 이렇듯 왕의 미래가 불투명하자 이래저래 왕국 사정은 막장이 되어 섭정들과 파벌들이 난립하여 여러 십자군 제후들이 2명의 자매에 대한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투게 되는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며, 왕이 병세와 비례하여 더욱 치열해졌다. 비둘기파의 좌장이었던 섭정 레몽 3세는 1175년에 왕국의 집정관(Connétables) 험프리 드 토론(Humphrey II de Toron)의 도움을 받아 살라흐 앗 딘과 일단 평화 조약부터 맺었다. 냉정하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의 누이 시빌라를 프랑스 왕국 루이 7세 신성 로마 제국 프리드리히 1세의 사촌인 권력과 부를 지닌 북부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델 알레라미치(Guglielmo VII del Aleramici)와 정략 결혼을 시켰다. 굴리엘모는 자신의 혼인을 위해 1176년 10월 초에 레반트에 도착하여 바로 결혼했으며, 야파와 아스칼론의 공작이 되었다. 레몽 3세는 그가 시빌라와 더불어 보두앵 4세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왕국을 통치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문둥이 왕이 다스리는 예루살렘의 왕국은 앞서 말한 대로 음모와 계략이 난무했다. 섭정인 티베리아스의 레몽 3세를 필두로 하는 파에는 티레의 대주교이자 역사가 기욤이 속해 있었으므로 레반트 프랑크인들에 대해 쓴 그의 역사서는 다분히 그들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기욤이 묘사하길 골 빈 모험가들과 어중이떠중이들, 그리고 권력에 눈이 멀었던 왕족 등 각양각색의 종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왕과 시빌라의 친어머니 아녜스 드 쿠르트네(Anes de Courtenay)였다. 역사서에서는 그 파벌이 복마전과 다를 바 없고 나라를 좀먹는 군상들의 집합체라며 신랄하게 비난하며 적고 있다.[56] 아녜스는 항상 아들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 파벌에는 안티오키아의 전 지배자 르노 드 샤티용도 있었는데 1176년 르노는 알레포의 감금 생활에서 해방되었다. 그가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황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의붓 아버지였기 때문에 마누일이 그의 몸값을 지불하였다. 동로마 황제의 보석금으로 17년이라는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풀려난 것이었다. 무슬림에 대한 깊고도 칠흑 같은 복수심을 가지고... 또 왕의 숙부요, 명목상 에데사의 백작이자 아크레의 영주 조슬랭 드 쿠르트네도 있었는데 조슬랭은 왕에게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었지만 죽어가는 왕에게 왕위를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믿을 수 있는 보조자로 평가받았다. 이들이 보두앵 4세를 빈틈없이 꽉 쥐고 있었으므로, 1176년 여름 보두앵 4세가 15세로 성인이 되니 2년만에 섭정의 명분이 끝나버렸고 순식간에 이들이 권력을 휘어잡았다.

소년 왕은 이제 성인이 되었다. 보두앵 4세는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에 걸쳐 있는 살라흐 앗 딘의 세력 기반을 반 토막 내기 위한 공격을 스스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시리아의 장기 왕조가 아이유브 왕조에 의하여 몰락하면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 시리아의 통치자로 예루살렘 왕국을 쌈싸 먹는 형국이 벌어져 넘사벽의 적수로 부상하리라고 예상했기에 살라흐 앗 딘의 평화 협정을 유지하는 것은 왕 본인의 관 짜놓고 기다리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는 매파였던 아녜스파의 도움에 힘입어 레몽 3세가 살라흐 앗 딘과 맺은 평화 조약을 파기하여 다마스쿠스 지역의 안두자르(Andujar), 베카 계곡의 주변을 급습하였다. 강력한 견제 공격을 통해 보두앵 4세는 살라흐 앗 딘의 장기 왕조로 향한 알레포 공격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한편 전성기 동로마 제국의 고토 회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군세를 일으켜 이슬람 세계에 위협 요소가 되고 있던 마누일 1세 1176년 미리오케팔론에서 이슬람 세력에게 오지게 털린다. 이를 만회할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이슬람의 구심점인 살라흐 앗 딘의 예봉을 꺾은 다음 보두앵 4세가 접선을 해왔다. 그는 마누일 1세에게 이집트 정벌을 위한 동로마 제국의 합동 공격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제국 황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계부로 표면상으로는 황제의 장인이었던 르노 드 샤티용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황제는 예루살렘 동방 총대주교의 부활과 안티오키아 공국의 영향력을 발휘할 목적으로 자신의 조카 딸이자 마리아 황태후의 자매인 테오도라 콤니니와 안티오키아의 공국의 공작 보에몽 3세의 중매 결혼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줄 거 다 주고 제국의 약속을 이끌어 내어 일단은 성공적인 외교전을 펼치고 돌아온 르노는 때마침 아내 콩스탕스와 사별하여 부유한 미망인 스테파니 드 밀리(Stéphanie de Mily)[57]와의 결혼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그렇게 재혼을 하면서 울트레주르뎅 공작 부군과 헤브론의 백작 부군이 되었다. 이 결혼으로 그는 선왕 풀크가 사해 근처에 증축한 케락 성채를 손에 넣었다.

보두앵 4세는 르노와 야파와 아스칼론 공작인 매제 굴리엘모에게 왕국 남쪽의 방위와 이집트 정벌을 위한 협력을 보장받았다. 그런데 굴리엘모가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그해 6월에 아스칼론에서 허망하게 죽어버렸다. 그 사이 시빌라는 아들을 임신했고 8월에 태어난 아이는 보두앵이라고 명명되었다. 첫 번째 섭정 레몽 3세의 왕국 미래에 대한 백년대계이자 건실한 설계였던 동로마를 대신하여 유럽에서 받을 지원의 인적 관계가 그렇게 흐지부지 되었다.

비슷한 시점인 8월 2일에는 보두앵 4세의 유럽 사촌 필리프 드 플랑드르(Philip I de Flanders)가 이집트 정벌에 대한 십자군 지원을 선언하며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함대 150척과 함께 아크레에 아주 은밀한 계획을 가지고(...) 도착했다. 필리프가 도착하자 왕은 굴리엘모를 잃은 상실감에 그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며 풀크의 외손자이자 십자군 초대 왕들의 가문과 같으니 대의회에서 섭정의 지위로서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필리프는 자신이 단지 순례자로서 왔다며 아양을 떨며 거절했다. 그러자 왕은 르노 드 샤티용을 그의 접대사로서 임명하고 왕국의 생활을 지원케 했다. 기욤 드 티레는 이 상황에 대하여 기록하길, 저 가증스러운 필리프가 섭정의 지위보다 오히려 국왕의 누이들인 시빌라와 이사벨라와의 결혼으로 왕국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이 있었다며, 그 이후로는 그의 음험한 계략을 의회에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녔다고 비난 어조로 쓰고 있다. 레몽 3세의 파벌이었던 그는 시빌라의 재혼이 너무 성급하고 빨리 결정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전 섭정이었던 레몽 3세 역시 시빌라의 새 남편으로 자신이 지지하고 있던 이벨린 가문이 간택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벨린 가문의 신랑감은 발리앙 디블랭의 형 보두앵 디블랭이었다. [58] 보두앵 디블랭이 공공연한 필리프의 요구를 사람들 앞에서 무례하다고 항의하며 모욕을 주고 예루살렘 대의회도 동의하자 마음이 상한 필리프는 예루살렘을 떠나 그 대신에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종군하여 하림(Harim) 공성전에 참여했지만 실패했고 프랑스로 귀환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제국과 왕국의 해묵은 알력 때문에 전대와 마찬가지로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고 두 동맹은 수륙 양면 작전을 포기한다. 그 후 예루살렘은 계속해서 동로마 동맹군의 협조를 받지 못한다. 이렇게 되자 주도권은 다시 살라흐 앗 딘에게 넘어가버렸다. 그 당시는 아무도 몰랐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망조는 사실상 이 시점부터 시작이다.

그 무렵 프랑스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으니 망조의 첫번째 징조인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이다. 그는 물론 아녜스파에 속했다. 기는 형제 아모리와 주군인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대리인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푸아투(Poitou)의 영지에서 추방당했었다. 기는 명예도 재산도 몽땅 잃어버렸으나 잘생긴 얼굴과 호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된 시빌라가 그에게 반해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이후 왕국의 장래에 큰 변화가 다가오게 된다. 1177년 11월 왕의 나이가 16살인 시점에 살라흐 앗 딘은 동로마의 선단이 철수하자 수비군이 적은 예루살렘 왕국의 서남부에 위치한 아스칼론 요새를 노려 이집트 방면에서 2만 6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급습하려 하였다. 적의 군세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출발하여 북상하자 보두앵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가까운 케락의 르노 드 샤티용을 호출하는 동시에 직접 누이 시빌라가 있는 아스칼론을 도우려 토론의 험프리 2세, 발리앙 이벨린과 약 580명의 성전 기사단을 이끌고 살라흐 앗 딘보다 먼저 요새에 도착하였으나 곧 살라흐 앗 딘의 군대에 포위당할 위기에 처해졌다. 이때 보두앵은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 예수가 못박혀 매달렸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구원의 기도를 하였다. 어린 소년 티를 못 벗은 문둥병 왕이 성십자가를 향한 이질적이고도 성스러운 기도 모습이 펼쳐지자 그것을 본 험프리, 발리앙, 르노를 비롯한 모든 기사가 고무되어 끝까지 항전할 것을 맹세했다. 성십자가의 버프를 받아 무슬림 대군 앞에서 분기탱천 된 보두앵 4세의 군대는 전투를 개시했는데, 2만 6천명의 살라흐 앗 딘 군에 겨우 400명에 불과한 기사들을 이끌고 한 덩이가 되어 돌격을 했다. 비록 숫자가 턱없이 적다고 해도 그 당시 중무장한 기사들이 뭉쳐 일시에 돌격하는 파괴력은 말 그대로 무시무시했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장을 한 살라흐 앗 딘 군은 어린 왕과 그의 기사들에게 순식간에 돌파 당했다. 살라흐 앗 딘의 쿠르드족 친위대들까지 와해되고 자신의 전투 막사까지 이벨린의 발리앙(!)을 비롯한 십자군 기마병들이 들이닥쳐 스스로 칼까지 뽑을 정도로 자신의 안위까지 위험할 지경에 이르자 살라흐 앗 딘은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 전투는 훗날 몽기사르의 전투로 역사에 기록된다. 왕은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개선하였다. 이처럼 나병이 자신의 몸을 덮쳐 죽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왕국을 방호했다. 같은 해, 보두앵은 자신의 의붓 어머니인 왕태후 마리아 콤니니를 살라흐 앗 딘을 죽일 뻔한 성과를 올린 이벨린의 발리앙과의 혼인을 승낙하였다. 이는 이벨린 가문이 왕국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마리아가 지지함에 따라 이벨린 가문의 보두앵 디블랭과 시빌라, 이사벨라 공주와의 혼담도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아쉽게도 시빌라는 기만 쳐다보고 있었음을 제후들은 몰랐겠지만(...)

살라흐 앗 딘과의 전황은 승리와 패배가 번갈아 이어졌다. 왕국은 무슬림의 공세에 맞서 요충지들을 방어해 내지만 지속적인 손실을 입었다. 이집트 함대는 동로마 함대의 견제가 없어지자 아크레 항까지 침투하기도 했다. 한편 왕국의 북쪽에서 무슬림 경기병들이 안티오키아 공국령인 바니아스(Banias) 지역으로 가축 약탈을 목적과 지역 황폐화를 목적으로 같은 동족인 아랍인들의 농경지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농민과 시민이 피폐해지자 빈궁이 가속화되었고 왕국에게 세금과 지대를 지불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상황이 그치지 않으면 살라흐 앗 딘의 파괴 정책에 의해 십자군 왕국은 약체화는 덤으로 따라오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왕국군은 갈릴레아 호수 근처의 티베리아스로 이동했다. 거기에서 그는 북서쪽 제파트 요새로 진군했다. 이 방면으로 이동을 계속하며 군세를 불리며 테에로스의 토론 성에 도착하여 역전 노장 험프리 드 토론(Humphrey II de Toron)이 파티에 조인했다. 국왕은 성전 기사단의 8대 단장 오도 드 생타망(Odo de St Amand)이 이끄는 성전 기사단과 레몽 3세의 트리폴리 백국 군대와 함께 북진했다. 해안 동쪽에서 십자군은 멀리 있는 무슬림의 진영을 목도했다. 왕과 그의 귀족들은 즉시 서쪽 평지로 내려가며 공격했다. 십자군 군대가 언덕 아래로 이동했기 때문에 기마 부대의 충격 전술은 배가되었고 즉시 무슬림 보병을 끔살시켰다. 몇 시간 지나자 사란센군의 약탈 본대가 귀환하러 오자 조우하고 쉽게 그것을 격파했다. 그렇게 대승으로 전투가 끝난 건지 착각했던 왕국군은 방심하기 시작했다. 살라흐 앗 딘의 첩보원들은 십자군들이 반격하러 시리아를 노리고 공세를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살라흐 앗 딘은 휘하 장군인 조카 파루크 샤(Farrukh-Shah)에게 몰래 천 명의 기동대를 병력을 주어 다마스쿠스 인근 국경선을 강화하고 적의 공격을 사전에 대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던 십자군은 그들 나름대로 여기에는 상대의 병력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을 예상하지 않았는지 레몽 3세와 오도는 마루쥬 아윤이라는 리타니 강 사이의 넓은 땅으로 향했다. 십자군은 그날 일찍 진군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했고 무슬림 군대는 골란 고원의 동쪽에서 접근하여 무방비 상태인 그들에게 습격 준비를 했다. 1179년 4월 10일 보두앵 4세는 살라흐 앗 딘의 조카가 이끄는 별동대가 갑툭튀하여 이 전투에서 보두앵 4세는 너무 앞쪽으로 나와 적에게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곧 적의 병력에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왕은 문무를 겸비한 기사이기도 했지만, 아직 어려서인지 단기적인 전투에 임해서는 앞뒤 안 보고 혼자 돌격한 적이 많아서 항상 주변의 호위 기사들이 왕을 지키기 위해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에게 둘러싸여 거의 죽을 뻔했는데 이 때 왕을 구한 것은 바로 선왕 보두앵 3세와 아모리 1세 시절부터 왕국의 충신이었던 토론의 영주 험프리 2세였다. 왕의 호위 기사이자 왕국의 존경받는 공직자 험프리 드 토론이 칼을 다 맞아가며 간신히 혈로를 뚫고 전장을 이탈했다. 십자군 생존자의 대부분은 전장에서 남서쪽의 보포르 성으로 퇴각하여 적의 추격을 따돌렸다. 험프리는 보두앵 4세를 구했지만 그 자신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결국 곧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62세였다.

사실 이 전투의 가장 큰 손실은 바로 험프리 2세 같은 중요한 인물을 잃은 것이었다. 험프리 2세는 기사도에 충실한 보기 드문 십자군 기사 겸 영주로 과거 어렸었던 선왕 보두앵 3세가 자신을 왕국의 집정관으로 임명하여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도록 보좌했었다. 이후 보두앵 3세의 가장 믿을 만한 신하가 된 그는 보두앵 3세가 죽고 난 이후에는 과거 반대 진영에서 대립하기도 했던 아모리 1세를 도와 4차례에 거친 이집트 원정을 도왔던 노장이었다. 그 이집트 원정에서 살라흐 앗 딘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졌던 험프리 2세는 살라흐 앗 딘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1175년의 휴전 협정을 맺기도 했던 것이다. 아모리 1세가 사망한 이후에는 다시 어린 보두앵 4세를 보좌했을 뿐 아니라 몽기사르 전투 등 주요 전투에도 참전했던 경험 많고 현명한 충신이었다. 그런데 1179년 이처럼 뜻하지 않게 보두앵 4세가 위험에 빠지자 자신을 희생해서 국왕과 국왕이 없으면 다시 왕국이 혼란에 빠질 뻔한 예루살렘 왕국을 살린 것이다.

당시 아랍의 역사가인 이븐 알 아티르가 토론의 험프리 2세에 대해서 "어떤 말로도 그를 묘사할 수가 없다. 그의 이름은 용맹과 전술의 대명사였다. 그는 진정 신께서 무슬림을 벌 주기 위해 퍼트린 역병이었다" 라고 칭찬인지 비난인지모를 모호한 찬사를 했던 만큼 험프리 2세의 부재는 예루살렘 왕국에 너무 뼈아픈 손실이었다. 이제 선왕 시절부터 믿을 만한 왕국의 충신들은 레몽 3세 정도만이 남아있지만 그는 자신의 영지를 지켜야 했고 섭정 자리에서도 물러났으므로 예루살렘에 일에 일일이 간섭하기 힘들었다.

왕실이 복잡다단해지는 시점에서 보두앵 4세는 순교자가 된 기사들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벼르다가 6월 10일 사라센 군세가 시돈으로 들이닥치자 곧바로 티베리아스의 레몽 3세와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을 통솔하여 살라흐 앗 딘이 기다리는 시리아로 깊숙이 진격했는데, 전투 중 낙마하고 만다. 당시에 이미 지병인 나병이 심해진 탓에 스스로 일어날 수조차 없었으나 병사들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보두앵 4세와 레몽 3세를 제외한 예루살렘 왕국과 기사단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살라흐 앗 딘의 포로가 된다. 이들 대부분은 1180년 예루살렘 왕국과 아이유브 제국의 휴전 협정과 동시에 석방되었지만 성전 기사단장 오도 드 생타망은 두 번 내리 포로가 되자 다마스쿠스의 감옥에서 남을 것을 고집하여 그 곳에서 숨을 거둔다. 살라흐 앗 딘은 이렇게 한차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무슬림 세계에서 입지를 더더욱 굳히게 된다. 그는 여세를 몰아 장기 왕조 사람들을 반역죄로 고발했지만 알레포와 모술 주민들의 지지 덕분에 명맥을 유지한다.

이 외부 상황과는 다르게 예루살렘 내부에서는 전대의 맹목적으로 충성을 받치던 기사들이 죽어 나가자 반대 급부로 살판 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국왕의 친 모후인 아녜스였다. 아녜스는 자신을 왕비에서 내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왕국을 자신의 손으로 주무르려고 했다. 점점 나병으로 인해 고통이 심해가는 보두앵 4세는 잦은 전투로 인해 측근들이 전사하게 되자, 상대적으로 견제하는 세력이 없어져 단독으로 외척들에게 권력이 누수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을 만난 활어 마냥 활개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무슬림에 대하여 깊은 증오심을 가진 르노 드 샤티용이었다. 그는 대 무슬림 강경파인 성전 기사단과 손을 잡고 부유한 무슬림 캐러밴을 약탈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여기에 르노는 아녜스의 파벌에 동조하고 있었으니 왕국의 사정은 나날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험프리도 전사하고, 레몽 3세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예루살렘의 왕궁은 이들 차지였다.

설상가상으로 시빌라가 보두앵 4세에게 기와의 결혼을 반 협박으로 허락 받기에 이른다. 무슬림과의 전쟁으로 내부적인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었던 레몽 3세와 발리앙 디블랭 그리고 신랑감에 근접했던 보두앵 디블랭은 멘붕에 빠졌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기는 왕의 매제이자 왕위 계승자의 후견인으로서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일약 떠오르게 되었다. 그는 또한 왕실 가족의 체면치레를 위하여 야파의 백작이 되었고 시빌라가 죽은 첫번째 남편 굴리엘모의 상속자로 야파와 아스칼론의 공작이었으므로 기는 남편으로써 공작 부군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그러자 르노 드 샤티용은 법적으로 지역을 통치하는 공작이 아닌 같은 공작 부군이라는 들러리 직책에 동질감을 느꼈는지 급부상한 기와 함께 다니며 일을 크게 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왕국 남부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이집트와 시리아의 도로를 통제하기가 용이했다. 살라흐 앗 딘에게는 아주 중요한 노정인 이집트를 경유하여 다마스쿠스에서 메카로 가는 길목을 막기에 이른다. 그렇게 되자 기어이 협정을 무시하고 약탈을 일삼고 호적적이고 광신적인 행태로 황당하고도 경솔한 국지전이 빈번히 일어났다. 1181년 르노와 그 일당들은 휴전 협정을 폐기를 선언 하지도 않고 대대적으로 메디나에 인접한 타이마의 오아시스를 향하여 독단적으로 진군한다. 하지만 한번의 견제 공격으로 후퇴하게 된 그는 도중에 부유한 대상들의 거점을 약탈, 금괴 20만 개를 빼앗는다. 보두앵 4세는 이 사실을 알고 즉시 반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살라흐 앗 딘은 갈릴레아와 사마리아 지역을 습격하여 파괴 공작을 명령하는 한편, 본대는 울트레주르뎅 부근에 체류하게 했다. 또한 하마를 점령하고 다마스쿠스를 위협하여 병합한 것을 근거로 장기 왕조가 십자군 이교도들과 공모했다고 비난하며 그 명분으로 치열한 공격 끝에 알레포를 점령한다. 마침내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강역은 예멘과 튀니지의 동쪽 국경에까지 이르렀고 가히 아이유브 제국의 탄생이었다. 1183년에는 문둥병으로 인해 왕의 시력이 떨어지자 대의회에서 섭정을 세우는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왕의 매제인 기가 섭정으로 지명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살라흐 앗 딘은 알레포와 모술 지역의 장기 왕조의 잔당을 공략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은 아이유브 왕조의 공격 선상에서 벗어났고 6년 간의 평화가 도래한다. 르노의 통제 불능 국지전의 행태는 간간히 일어났지만 살라흐 앗 딘은 보두앵 4세와 화해를 계속했기에 갈수록 기고만장해지는 르노였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이 후 보두앵 4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존속을 위해 무슬림을 최대한 포용하고 살라흐 앗 딘과 아슬아슬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우발 사태가 벌어지면 말 안장 위에 몸을 묶어서라도 전장에 나서 지속적으로 살라흐 앗 딘과 분쟁을 치르면서도 적들과 우군들에게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믿을 수 없이 대단히 개혁적인 성향도 있어서 허례허식을 없애거나 이유 없는 탄압과 폭정은 일절 하지 않았고 예루살렘 왕국 내부의 아랍인들에게도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나 상황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제후들의 다툼과 계속되는 군사 원정으로 인해 나병이 점점 악화되었다. 이런 혼란기 속에서 살라흐 앗 딘은 누르 앗 딘의 영토를 완전히 평정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점차 압박했다.

1185년이 되자 보두앵 4세의 힘겨운 투쟁도 거의 막바지에 가까워졌다. 이미 망막까지 병균이 침투해 장님이 되어버린 국왕의 유언이 궁정 회의에서 발표되었다. 내용인즉 첫째, 시빌라의 장남 보두앵 드 알레라미치가 다음 가시 면류관의 주인이다. 둘째, 절대로 기 드 뤼지냥은 섭정이 될 수 없다. 셋째, 그 영예는 트리폴리 백국의 레몽 3세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레몽 3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 의지할 곳 없는 소년은 늘 건강이 허약하여 골골거렸는데 만일 죽기라도 한다면 분명히 의심이 후견인에게 쏠릴 테니 레몽은 이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신 명목상 에데사 백국의 백작인 조슬랭 드 쿠르트네, 조슬랭 3세에게 그 자리가 돌아갔다. 그 공개 유언은 아주 시기 적절했다. 그 사이 예루살렘에서 저 용감한 왕 보두앵 4세가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영원한 안식을 위해 하늘로 불려갔기 때문이다. 보두앵 4세의 통치는 그것이 그의 개인적인 탓은 아니지만서도, 과정은 찬란했지만 결과적으로 레반트 기독교 국가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그는 왕국의 대의를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았지만 그의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왕국 내에서 자신들의 이익만 앞세우려 하던 강력한 파벌들을 통제할 힘을 갖추지 못했다. 왕국은 과거 멜리장드 보두앵 3세의 모자 갈등으로 인한 내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토록 분열된 적도 없었다. 지금까지야 우트르메르에는 경쟁을 일삼는 파벌들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던 강력하고 부계로 내려오는 정통성 있는 통치자가 늘 있었지만 이제는 그 정치력이 사라졌다. 이에 반해, 수니파 무슬림들은 통찰력과 인내력과 지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원을 갖춘 한 사람을 중심으로 지하드의 깃발 아래 통합되고 있었다.

2.4. 섭정(Baillis) 통치의 시대

  • 보두앵 5세
보두앵 4세의 유언이 받아들여져, 조카인 보두앵이 왕위에 올라 기름 부음을 하니 그가 바로 보두앵 5세다. 작금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레몽 3세가 거절했던 섭정의 지위를 다시 받아들였는데 놀랍게도 별다른 반대가 없이 취임했다. 왕국은 살라흐 앗 딘의 오라에 짓눌리는 와중에 가뭄이 온 나라를 강타해 작황조차 매우 좋지 않았다. 길거리 촌부조차 휴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가뭄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살라흐 앗 딘 역시 마찬가지고, 공격적인 확장으로 인한 아이유브 제국 내의 여러 반란 징후가 포착되자 휴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편, 우트르메르인들에게 진짜 위험은 동로마 제국의 계속되는 쇠퇴에서도 터져나왔다.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는 조카 알렉시오스 2세를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자였는데 막장 정치로 외세의 침략을 받자 반란이 터져 결국 시내로 끌려나간 폭군은 오른손이 잘리고 눈이 뽑히게 되었으며 온갖 모욕을 당하다 끔살당했다. 콤니노스의 중흥 100년을 1년만에 말아먹은 인물로 그의 조카 이사키오스 2세가 즉위하여 앙겔로스 황가를 창설하나 준비되지 않은 인물이 동로마 제국을 접수하니 주변국에게 밀리고 밀려 결국엔 동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인 테마 제도가 박살이 나버렸다. 장부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20만에 가까웠던 동로마 제국은 자신의 군대의 크기조차 제대로 파악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 사태는 후에 4차 십자군의 병크 짓을 막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이렇듯 소아시아의 기독교의 영향력은 풍선 터지듯이 없어져 버렸다. 반대 급부로 무슬림이 득세하니 그 여파는 예루살렘까지 미쳤다.

한동안 십자군 국가들은 이러한 사건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미치게 될 영향력을 감지하지 못했다. 왕국이 진짜 망테크를 타려고 했는지 이전의 보두앵 4세는 문둥병이라는 디버프를 가지고 있었기에 일찍 죽어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는데 그 뒤를 이은 어린 왕 보두앵 5세가 1186년 8월 아크레에서 1년 만에 죽었다. 늘 허약했으므로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선왕 보두앵 4세의 유언의 내용이 모호했다. 만일 어린 왕이 죽을 경우, 누가 후계자가 될지에 대해 서유럽의 네 지도자(교황,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영국)가 중재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섭정으로서 직무를 맡아보도록 명시되어 있었고 후계자 후보로는 여동생 시빌라 공주와 이복 여동생 이사벨 공주가 유력했다.

보두앵 5세가 죽을 당시 조슬랭 3세와 함께 레몽 3세가 옆에서 임종을 지켰다. 왕이 서거하자 조슬랭은 레몽에게 본거지인 티베리아스로 돌아가 그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왕국의 귀족들을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레몽이 보기에도 조슬랭이 맞는 말만 하는 것 같아 그 계획에 동의했다. 그러나 레몽이 별다른 의심없이 티베리아스로 가자 조슬랭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어린 왕의 유해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서는 성묘 교회에 재빨리 유해를 안장했다. 그런 다음 티레와 베이루트를 점령하고는 조카 시빌라를 여왕으로 선포해버렸다.
레몽은 귀족들을 티베리아스로 소집하는 와중에 그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에 응하여 온 성주들이 티베리아스에 모여 있는 동안 시빌라의 인장이 찍힌 즉위식 초청장을 받았다. 그 파벌은 이미 강력한 동맹자들을 얻은 후였다. 매파인 아녜스 드 쿠르트네를 좌장으로 시작하여, 기욤 드 티레의 라이벌인 예루살렘 총대주교 헤라클레스 도베르뉴(Héraclès d'Auvergne)와 몇 년 전에 레몽에게 모욕을 당한 제라르 드 리포르(Gérard de Ridefort)가 이끄는 성전 기사단 역시 지원을 약속했고, 시빌라의 남편 기와 깽판치고 다니던 르노 드 샤티용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리라는 낌새를 알아채고는 즉시 그들의 편에 섰다. 하지만 구호 기사단의 단장 로저 드 물랭(Roger de Moulins)은 시빌라를 여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보두앵 4세 앞에서 레몽을 지지하기로 맹세했던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성을 다하여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러한 양심의 가책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자신들의 얼굴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로저를 개무시로 일관하며 즉위식 준비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당시 왕국의 가장 고귀한 기장들인 레갈리아, 즉 성십자가 롱기누스의 창 왕관 보주 성유병 등은 성십자가를 제외하고는 잠겨진 상자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상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개의 열쇠 구멍이 있었는데. 하나는 총대주교가 갖고 있었고, 나머지 두 개는 두 기사단의 단장이 하나씩 갖고 있었다. 그런데 구호 기사단장 로저는 혐오감으르 드러내며 자신의 열쇠를 다비드 탑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밖으로 자연스럽게 나가 그 열쇠를 기어이 찾아 결국엔 상자를 열었다. 시빌라의 남편인 기 드 뤼지냥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어진 즉위식에서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가 기에게는 왕관을 씌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시빌라가 몸소 남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들이 성묘 교회를 떠나자 성전 기사단장인 제라르는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를 수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자신이 예전에 받은 모욕을 앙갚음 했노라고 외쳐댔다. 그러나 그의 말은 역사에 남아 좀 스러운 개인적 야망이 왕국에서 여전히 중요한 동기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냈을 뿐이다. 이토록 막장극이 펼쳐지는 혼란기를 거쳐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의 왕을 계승하였다.
  • 시빌라 & 기
시빌라의 즉위에 반대했던 성주들은 이제 다음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들은 이사벨 공주의 남편인 옹프루아 드 토롱(Onfroy IV de Toron)을 왕국의 통치자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에는 유감스럽게도 옹프루아는 편안히 살기를 바라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진지에서 몰래 빠져나와 기에게 가서 새로 즉위한 그 부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 인해 레몽이 갖고 있던 모든 카드를 써버렸고, 심지어 그의 강력한 지지자들조차 이제 남은 선택은 판을 엎어 버리는 내전을 치르거나 현 상황을 마지못해 받아들여 개평이나 받아야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에 대부분의 귀족들은 왕국 외부의 살라흐 앗 딘이라는 조건이 고려되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새 왕에게 경의를 표했고 소수의 귀족들은 다른 십자군 국가로 망명해버렸다.

2.4.1. 하틴 전투 예루살렘 상실

이 시기 십자군의 중요 군사 거점인 케락 영주인 르노 드 샤티용이 이슬람 상단을 습격하여 살라흐 앗 딘을 도발하였기에 중동에 전황이 드리워졌었다. 르노의 케락 성채는 선대 왕 풀크 국왕이 다마스쿠스와 이집트, 히자즈를 잇는 통로를 견제하기 위해 절묘한 지역에 쌓은 요충지였기에 이 곳은 무슬림군에게는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더욱이 1183년 리노는 홍해에 함대를 진수시켜 무슬림 순례자들이 셋다로 가는 통과 지점인 아프리카 해안의 아이답 항구를 위협했고, 무슬림 순례자 선박을 격침시켰으며 메카와 메디나를 위협하였다. 르노의 무슬림 지역에 대한 위협은 결국 살라흐 앗 딘의 누이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졌고 살라흐 앗 딘이 십자군 전쟁 수행 시기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대병력을 거느리고 본격적인 예루살렘 왕국 정복에 나섰다.

1187년 살라흐 앗 딘은 만 천의 군대를 이끌고 울트레주르뎅 지역으로 나갔고, 이에 맞서 십자군은 만 명의 군사를 집결시켰으며 양쪽 군대는 하틴의 뿔이라는 지역에서 일전을 벌였다. 이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은 대패했고, 사티용의 르노는 살라흐 앗 딘에게 처형당하고 기와 주요 기사들은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하는 신세가 된다. 하틴에서의 무슬림군의 승리는 이슬람사에 기록되는 중요한 사건으로, 이어 살라흐 앗 딘이 계획한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성공적인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십자군은 정예군을 잃게 되어 향후 살라흐 앗 딘의 지하드에 대적할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벨린의 발리앙 등 소수남은 기사들이 예루살렘 방어를 위해 분전하였으나, 압도적인 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벨린의 발리앙은 '자신의 백성들을 살려서 보내주지 않으면 양측의 성지를 죄다 때려부수고 도시 내의 무슬림을 싸그리 죽이고 우리도 죽겠다' - '그렇다면 당신들을 전원 보내주겠다' - '내가 몸값을 마련하지 못할 모든 기독교인들을 대표해 인질이 되겠다' - '그럼 내가 그들의 몸값을 전부 내주겠다'는 협상을 거쳐 예루살렘을 살라흐 앗 딘에게 넘겨주게 되었다[59].

2.4.2. 제3차 십자군

파일:richard_and_saladin_at_arsuf.jpg
제3차 십자군의 아르수프 전투에서의 리처드 1세 (귀스타브 도레 作)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 세력은 팔레스타인 해안 쪽으로 밀려났으며, 사실상 티레가 유일한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일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한편 예루살렘의 상실 소식을 들은 유럽에서 3차 십자군을 편성하여 지원에 나섰으나 예루살렘 탈환은 실패하였고, 대신 팔레스타인 지역 해안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3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탈환한 아크레를 수도로 삼아서 왕국을 존속시킬 수 있었으며 예루살렘 탈환을 노렸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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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지속되는 혼란

예루살렘 왕국의 의회는 왕국의 수도를 임시로 티레로 천도했다. 1188년 6월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뤼지냥과 십자군 귀족들은 살라흐 앗 딘에 다시는 대항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는데 석방되자마자 맹세를 준수할 의무를 면제받았다. 하지만 기 드 뤼지냥에 대한 왕국 기사들의 분노는 상당해서 왕임에도 불구하고 티레의 성주 코라도 델 몬페라토(Corrado del Monferrato)는 기가 입성하여 성의 통제권을 넘기는 것을 거부했다. 어쩔수 없이 그는 맨땅에서 노숙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다 3차 십자군이 선포되었음을 듣고 그들을 마중나가서 배알도 없이 자신을 유럽에서 추방시켰던 악연으로 일면식이 있던 리처드 1세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유럽에서 도착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국왕과 티레의 영주의 다툼에 크게 놀랐고 상황을 모르던 그들은 모두 기 드 뤼지냥의 편을 들어주었다. 피사에서 온 십자군들이 기 드 뤼지냥을 따를 것을 맹세하자 기 드 뤼지냥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군대를 이끌고 재빨리 프랑스 국왕 필립이 공성 중이던 아크레에 참가한다. 아크레의 수비군은 십자군의 몇 배에 달했고 공격은 무의미해 보였지만 리처드가 무슬림 해군 지원군 수천명을 수장시키며 해로로 들이닥치자 몇개월간 지체되던 공성전이 한방에 끝난다. 이는 전략적으로는 엉망이었지만 기에게는 정치적으론 대성공이었는데 기 드 뤼지냥의 아크레 공격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기 드 뤼지냥은 부하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이교도에 맞서는 위대한 십자군의 기사의 이미지를 얻었고 이에 감동받은 십자군들이 앞을 다투어 기에게 합류하면서 코라도는 병신이 되었고 기는 대단한 위신을 얻었다. 결국 코라도도 1189년 9월 기의 공격에 합류했고 1190년에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 10월 7일 독일 십자군의 잔여 세력까지 기에게 합류하면서 기의 보잘것없는 군대는 대군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190년 7월 15일 시빌라와 기와 시빌라의 친딸 두 명이 함께 사망하자 모든 상황이 급변했다. 기 드 뤼지냥의 왕권은 시빌라 여왕과의 결혼에 의해서 계약된 부군이라는 자리였기에 합법적으로 왕관은 시빌라의 배다른 동생 이사벨에게로 돌아 가야 했다. 게다가 3차 십자군 내에서도 리처드 1세를 견제하려고 리처드의 편으로 분류된 기를 프랑스 국왕과 독일 십자군들은 점점 기를 멀리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왕국 고위층의 판단과 십자군들의 의향에 따라 왕관의 운명을 정해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문제는 이사벨의 남편인 옹프루아 드 토롱(Onfroy de Toron)이 기 드 뤼지냥보다 더 못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회의를 하면서도 사라센인들의 함성이 들리는 절체절명의 왕국 상황을 시정할 수있는 왕이 필요했고, 그 대안으론 코라도 델 몬페라토(Corrado del Monferrato)가 급부상했다. 그러나 왕실 밖에서 왕을 선택하면 또다른 분쟁과 내전이 생길 수밖에 없기에 의회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사벨에게 옹프루아와의 결혼식을 취소하고 코라도 델 몬페라토와 결혼하시자는 제안을 그녀에게 했다. 그러나 아직 십대였던 이사벨은 남편 옹프루아를 사랑했던지 아버지뻘 연상인 코라도에 식겁했던지 이러한 정치적 고려에 따르기를 거절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 마리아 콤네네[60]까지 나서서 이사벨에게 정치적인 결혼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고 결국 교황청의 대법관이자 피사 대주교인 우발도(Ubaldo)는 이사벨과 옹프루아 부부의 결혼 생활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여 결혼 당시에 이사벨이 고작 11세 밖에 되지 않았으며, 법적 나이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들의 결혼을 무효화 할 것을 선포했다. 옹프루아는 이 결정에 항의하려고 시도하지만, 왕국의 사주를 받은 프랑스 기사인 기 드 상리스(Guy de Senlis)가 재빨리 결투 도전을 걸어왔다. 사실 재판 과정에서 판단하기 힘들 때 중간 합의점으로써 하던 것이 바로 이 중세의 결투이다.
이 시대 결투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뭐 복잡한 재판이야 어찌됐건 그리스도께서 알아서 도와주실 테니, 진 놈은 신이 저버린 악한 놈이고 이긴 놈이 신께서 손을 들어주신 선한 놈." 이다. 이 결투 재판은 아예 법으로 정해져 있으며 진 사람은 이긴 사람에게 몸값을 지불해 풀려날 수는 있지만 돈이 궁하지 않는 이상 후환이 찝찝하기도 하고 혹은 복수를 위해 진 놈을 죽여버리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왕권은커녕 목숨이 날라갈 지경에 이르자 옹프루아는 그를 만나기를 거부하고 시발 안해 같은 처지의 기 드 뤼지냥과 합류해 버린다. 1190년 11월 24일 이사벨은 주변의 뜻대로 코라도 델 몬페라토와 결혼했다. 이 결혼식에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영국 국왕 리처드 1세가 하객으로 참가했다.

콘라도와 기 사이의 왕위 경쟁은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의 대리전 같은 양상이었다. 1192년 4월, 필리프 2세가 성지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버렸다. 유럽에 돌아가서 허튼 짓, 영국에 빈집털이하지 않겠노라라는 맹세까지 리처드 1세와 하고 떠났다. 그러자 필리프 2세를 견제하려고 기를 지지한 리처드 1세는 그가 돌아가자 감정이 아닌 이성이 몸을 지배했는지 얼마 가지 않아 콘라드를 왕으로 인정했다. 이렇게 기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대신 리처드 1세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아 그가 성지로 오다가 함락시킨 키프로스를 받아 키프로스 왕국을 건국한다.
  • 이사벨 1세 & 콘라드 1세
1192년 4월 무려 2년 가까이 예루살렘의 왕관이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마침내 시빌라의 이복 동생 이사벨 1세가 뒤를 이었다. 티레에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이사벨은 이사벨 1세로 등극하고 새 남편 코라도도 콘라드 1세도 왕위에 올랐다. 당시 이사벨의 의붓 아버지였던 발리앙 디블랭은 코라도와 이사벨의 결혼을 적극 지지했는데 코라도의 전투 실력이 매우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하틴 전투 이후로 기의 병크 짓을 목도한 이유로 그는 겉보기만 번지르르한 인물보다 전투에 유능한 이가 살라흐 앗 딘의 군대에 둘러싸인 십자국 국가의 수호를 맡아야 한다는 것을 통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도 잠시, 1192년 4월 28일 콘라드 1세는 티레의 거리에서 두 명의 아사신에게 허무하게 암살당한다. 그가 왕위에 오른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여기서 발리앙이 또 다시 움직인다. 순식간에 미망인이 된 이사벨을 이번에는 제 3차 십자군에 리처드 1세와 종군했던 상파뉴의 백작 앙리 드 블루아와 결혼시키기로 한 것이다. 콘라드 1세와 왕위 경쟁에서 패배하여 키프로스로 갔던 기의 귀환을 막기 위해 발빠르게 또다른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발리앙이 26세의 이 기사한테 주목한 이유는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에 전투 감각이 탁월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리처드 1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왕 필립과도 인척 관계였기 때문이다. 포위당한 십자군 국가에 유럽 두 강국과 혈연으로 연결된 인물을 왕으로 맞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었다.

당시 앙리는 아크레에 있었는데, 아스칼론에 있는 백부 리처드 1세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는 리처드 1세와 함께 생사고락을 보내며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게 됐던 것이다. 그러자 리처드 1세는 기뻐하며 자신이 정복한 모든 땅을 양도하겠다며 흔쾌히 승낙한다. 이자벨 1세도 늙은 코라도보다야 그의 아들뻘인 세련된 26세의 앙리와의 결혼이 그래도 나았던지 전과는 달리 곧바로 승낙했다. 그들의 결혼식 겸 앙리의 대관식은 콘라드 1세가 살해된 지 불과 일주일 뒤에 거행되었다. 앙리는 직위에 걸맞은 의무를 충실히 따라, 예루살렘 국왕의 이름으로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병사들을 모두 소집하여 살라흐 앗 딘과의 전투에 임하겠다고 리처드 1세에게 맹세했다.

2.4.4. 리처드 살라흐 앗 딘 그리고 킹 메이커 발리앙

  • 이사벨 1세 & 앙리 1세
이 일련의 일의 배후에는 발리앙 디블랭이 있었다는 것은 리처드 1세도 알고 있었다. 발리앙과 리처드 사이는 이후로 급속히 가까워져, 살라흐 앗 딘과 친분이 있고 아랍어에도 능통하며 현지 사정에 밝은 발리앙을 이슬람과의 회담에 통역으로 삼았다. 게다가 이 통역은 리처드의 신뢰만 받은 게 아니라 적인 살라흐 앗 딘 역시 발리앙의 역량을 인정하고 존중했다.

이렇게 여러 면에서 복잡한 일들이 정리되자 1192년 봄, 다시 예루살렘으로 진군한다. 그런데 본국 영국에서 비보가 전해진다. 리처드가 성지로 향하기 전 재상으로 임명한 윌리엄 드 롱챔프의 친필 편지를 지참한 헬퍼드의 수도원장이 찾아온 것이다. 편지 내용에는 성지를 떠난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의 막내 동생 존을 전면에 내세워 프랑스 왕의 군대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을 넘어 영국까지 침공하고 있으며, 이미 리처드와 존을 각자 지지하는 두 세력으로 본국의 국론이 분열되었고, 리처드 파와 자신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며 당신의 귀국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리처드는 코앞의 예루살렘에서 차마 돌아가지 못하고 몇 달 더 전투에 임했으나 진퇴를 반복할 뿐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온 이슬람 군대가 리처드를 막기 위해서 끝없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리처드와 살라흐 앗 딘은 쉽게 깰수 있는 휴전이 아닌 양쪽 모두에게 구속력을 가지는 강화를 맺기로 한다. 이슬람의 성직자 이맘들은 사정이 급한 건 본국 안방이 침략당하는 서방 세계의 리처드지 이슬람이 아니라며 격렬히 반대했지만, 살라흐 앗 딘은 오히려 젊은 35세의 리처드와 54세의 자신 살라흐 앗 딘의 나이를 언급하며 시간이 꼭 나의 편이 아니라고 누가 본인 이후로 이렇게 이슬람을 통합할 수 있겠느냐고 역설하며 반발을 잠재웠다. 살라흐 앗 딘은 리처드의 처지를 동정이라도 하듯 곧바로 교섭을 시작했다. 8월 4일 살라흐 앗 딘의 동생 알 아딜이 야퍄를 직접 방문했다. 리처드도 이미 모든 적대 행위를 금지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알 아딜은 12세인 자신의 큰아들(훗날의 알 카밀)을 데리고 왔다. 리처드는 이 아랍 소년의 예의 바르고 활발한 호기심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교섭 중간에 소년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했다. 아버지 알 아딜의 앞에서 리처드는 자신의 검을 꺼내어 어깨를 치며 알 카밀을 기사로 봉했다.

회담의 결과는 간략히 말해 1조항 '예루살렘은 이슬람에 속한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성지 순례를 보장한다.'였다. 이맘들은 반대했지만 살라흐 앗 딘의 실용주의로 보자면 종교적인 관용이 아닌 경제적인 고려도 포함됐다고 할 수 있다. 성지 순례는 일종의 거대한 관광 산업이었다. 2조항은 '무사했던 트리폴리 백국과 안티오키아 공국과 3차 십자군에게 점령된 티루스에서 야파까지 팔레스티나 지방의 바다 쪽은 대부분 십자군 국가의 땅으로 한다.'였는데 육지 안쪽을 가득 메운 기사단들의 성채도 순례자의 보호를 위해 유지하는 것까지 인정했다. 구호기사단과 성전 기사단은 이후로도 성지에 머물며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곧이어 다른 잡다한 3조항까지 모두 합의를 끝낸 리처드 1세는 1192년 10월 9일 아크레 항구를 출발하여 유럽 본국으로 돌아갔다.
살라흐 앗 딘은 리처드 1세가 탈환한 해안가 지역을 기독교도의 영토로 인정하였고, 그 중에서 아크레 외곽의 케이몽(Caymont)과 그 인근 지역을 발리앙의 영지로 인정해주었다. 앙리 1세의 고문 역할을 맡아서 왕국에 큰 도움이 되었던 발리앙은 3차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 된 그해 1193년에 사망하였다.
다마스쿠스로 돌아간 살라흐 앗 딘도 체력이 나날이 쇠해졌다. 자신이 이렇게 될지 알고 있었는지 1193년 3월 4일 아침, 이슬람에 절대적으로 위협을 끼치던 리처드가 겨우 성지를 떠난 지 5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다.
3차 십자군 원정의 가장 큰 전공자이자 피해자인 사자심왕은 영국으로 귀환하다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독일에서 포로가 되어 우여곡절 끝에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자신에게 반기를 든 동생을 어쩔 수 없이 용서하고 다른 반란 세력을 제압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어이 없게도 1199년 리모주 자작령에서 작은 반란을 진압하다 목을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게 된다. 즉사는 하지 않았고 결국 반란을 진압하여 자신을 저격한 어린 소년을 찾아내고 도리어 용감하다고 칭찬하며 치켜세우는 사자심왕다운 대범함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 리처드는 밤중에 사망하게 되고, 분노한 부하 기사들이 그 어린 소년을 끌고 나와 고기 다지듯 난도질하여 죽여버린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사자가 개미에게 물려 죽은 사건으로 묘사했다. 이렇게 중요 인물들이 역사에서 퇴장하고 이후로 26년간 살라흐 앗 딘의 조카 알 아딜이 죽기까지 큰 평화는 유지된다.

이사벨은 젊은 프랑스 기사 앙리와의 결혼 시점에서 죽은 전남편 코라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일단 재혼인 결혼식이 전 남편의 사망일로부터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기에 일부에서는 비난이 터져 나왔지만, 전시 상황에서 통치력이 전무한 어린 여왕이 왕국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남편을 얻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또한 프랑스 서부와 영국을 걸쳐서 앙주 제국을 세운 앙주 가문과 분가되어 나온 플랜태저넷 가문의 지지를 받는 이사벨과, 프랑스 왕국의 카페 왕조의 지지를 받는 카페 가문의 방계 가문 블루아 가문의 앙리의 결혼은 서유럽의 두 거대 파벌의 적대 관계의 종식에도 도움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벨은 암살당한 전남편 코라도의 딸이자 나중에 예루살렘의 여왕이 되는 마리아를 낳았다. 앙리와 이사벨 사이에서는 마리(요절)와 알릭스, 필리파 세 딸이 태어났다.

2.4.5. 황제의 십자군 (Crusade of 1197)

1197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는 살라흐 앗 딘의 사후 아이유브 제국의 상속 투쟁에 틈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고 성지 원정을 결정했다. 1197년 십자군 또는 황제의 십자군이라는 이 십자군은 1197년 8월에 첫 원정대가 아크레에 상륙했다. 그런데 지휘 계통이 없는 이 기사들은 시내에서 멋대로 약탈을 일삼았다. 이처럼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갈릴레아로 보내지지만 간신히 참사는 면했다. 9월 10일, 앙리는 이들의 구원군 파견을 명령하지만, 곧바로 아크레에 있는 자신의 궁전 창문에서 추락해 사망한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대부분은 창문 또는 발코니에서 그가 추락했다고 전해진다. 스칼렛이라는 이름의 꼬마 하인도 앙리의 소매를 잡고 같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는 강건했던 왕과 비교하면 체구가 너무 가벼웠기에 돕지 못하고 같이 떨어진 것인지 이런 식으로 암살을 사주 받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른 이야기로는 앙리가 군사 퍼레이드를 창문에서 보고 있다가, 피사 공화국의 일행들이 방으로 들어왔고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바꾸면서 발을 헛디뎌 균형을 잃어 버렸다고도 한다. 정확하게 무슨 상황이든 앙리는 살해되었다는 게 현재의 정설이다. 왕과 같이 추락하여 대퇴골을 골절한 하인은 외부에 왕의 변고를 알렸는데, 하인도 그 후 부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앙리가 아크레의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하면서 다음 여왕 부군 후보자로 이번 원정의 목표이자 갈릴레아 공작이었지만 지금은 영토를 잃어 가난한 라울 드 생-오메르가 언급됐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성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결정을 못 내리는 와중, 반격에 돌입한 이집트의 술탄 알 아딜에게 오히려 야파를 포위당하여 함락되어 버렸다.

이사벨의 네번째 결혼이 확실히 결정되지 못하자 9월 20일 아크레에 도착한 마인츠의 대주교 콘라트 폰 비텔스바흐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는 여왕의 남편으로 키프로스의 국왕 애므리 드 뤼지냥를 제안한다. 애므리는 첫번째 아내인 에쉬바 디블랭과 사별했었기 때문에, 여왕인 예루살렘의 미망인 이사벨과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총대주교 아이마로 모나코 델 코르비치는 이 결혼이 교회법에 부합하지 않다고 언급하여, 티레의 대주교 요스시우스의 중재를 받아 애므리와의 협상을 시작했고 구색이 갖춰지자 총대주교의 반대는 철회되었다. 1198년 티레에서 애므리와 이사벨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애므리는 기 드 뤼지냥의 동생으로 1194년 형 기의 죽음으로 키프로스의 왕위를 이었으며 이 결혼으로 인해 예루살렘 국왕을 겸하게 되었다.
  • 이사벨 1세 & 애므리
네번째 남편을 맞이한 이사벨은 예루살렘 여왕이기는 했지만 중세의 분위기 속에서 군림은 하되 직접적인 통치 전면에 서는 건 남편의 몫이었다. 키프로스 군대는 애므리의 통치 중에 예루살렘 왕국을 위해 싸웠지만, 전시가 아니면 애므리는 두 나라를 죽을 때까지 따로 관리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왕국과 키프로스 왕국의 진정한 통합에는 그들 사이에 태어날 남자아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키프로스의 차기 군주 후보에는 아모리와 첫째 부인 에쉬바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 앙리가 있었다. 예루살렘의 왕국의 적장녀로는 이사벨과 두번째 남편 콘라드 사이의 마리아가 이미 크고 있었고, 그 뒤로 이사벨이 세번째 남편 앙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또 셋. 이러면 애므리와의 사이에서도 딸이 태어나봤자 계승 순위를 우겨 볼 어떤 여지가 없게 되는데, 애므리와의 사이에서도 최소 세 아이를 낳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이은 남자아이는 요절했던 모양인지 두 왕국의 통합은 1세기가 지난 후에야 이루어 진다.
애므리는 그의 예루살렘 왕국 대관식 이전에도 아이유브 제국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고 있었고, 브라반트의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명령 하에 있던 독일 십자군과 연합했다. 그들은 10월 21일 알 아딜을 베이루트에서 철수시켜 점령했고, 기브레(Gibelet) 성을 탈환하여 왕국과 트리폴리 백국의 육로 연결을 복원했다. 그들은 심지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며 토론을 포위하지만, 독일 십자군이 총사령관 하인리히 6세 황제가 사망했다는 부고를 듣고 신성 로마 제국에 복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2월 2일에 포위를 해제했다.

1198년 3월 4일 애므리는 티레에서 4명의 독일 기사에게 공격을 당했다. 다행히 왕의 가신과 종자들이 그를 구원하고 4명의 기사를 생포했다. 심문 끝에 애므리는 주선자로 지목된 전 갈릴레아 공작 라울을 비난하고 재판없이 추방을 선고했다. 라울은 애므리가 불법적으로 자신을 추방하려 한다고 오트 쿠르에 항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울은 자발적으로 왕국을 떠나 트리폴리로 이동하여 정착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트리폴리 백국의 종주권을 상실한 것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므리는 아크레에서 안티오키아까지의 해안에 대한 소유를 확보하고, 1198년 7월 1일 알 아딜과 휴전 협정을 체결한다. 3차 십자군과의 연장선 상에서 5년 8개월에 달한 십자군 원정은 승리로 마무리 했다. 이후 애므리는 1202년 초에 4차 십자군에서 떨어져 나온 300명의 프랑스 십자군 참가 희망자들과 도착한 르노 2세 드 당피에르(Reynald II de Dampierre)가 무슬림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라고 요구했을 때도 이슬람과의 평화를 유지했다. 결국 이들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위해 예루살렘 왕국을 떠났다. 그즈음 이집트의 한 에미르가 시돈 근처에 요새를 장악하고 예루살렘 영토에 대해 약탈을 단행을 했는데, 알 아딜이 에미르를 멈추게 했지만 아모리의 함대는 20척의 이집트 함선을 나포하며 알 아딜의 영역에 침입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알 아딜의 아들, 알 무아잠(Al-Mu'azzam Isa)은 아크레 지역을 약탈했다. 애므리의 함대는 곧바로 1204년 5월 이집트의 나일 삼각주(Nile Delta)에 있는 작은 마을을 손에 넣는다. 결국 애므리와 알 아딜의 사절단은 1204년 9월 6년 동안 새로운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알 아딜은 야파와 람라를 애므리에게 양도하고 기독교 순례자가 예루살렘과 나사렛의 방문을 그대로 허용하기로 했다.

2.4.6. 베네치아 공화국 제4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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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계속되는 모계 계승

애므리는 과량의 흰색 숭어를 먹은 후, 중세 왕들의 고질병인 심각한 이질에 걸렸다. 그는 1205년 4월 1일에 4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병마와 싸우다 굴복하고 사망했다. 그의 전처가 낳은 여섯 살짜리 아들은 키프로스 왕국을 성공적으로 상속받고 예루살렘과 키프로스 두 왕국의 결합은 실패로 돌아갔다. 또다시 과부가 된 이사벨라는 1205년 4월 5일 역시 4일이라는 짧은 단독 통치를 하다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풀크 이래 이어져 내려오던 앙주 가문의 부계 혈통은 단절되었고 코라도의 딸 마리아가 예루살렘 여왕이 되었다.
  • 마리아 & 장 1세
이사벨 1세의 죽음으로 마리아는 13세에 예루살렘의 여왕이 되었다. 그녀의 의붓 동생 위그는 아모리 2세의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자식으로 마리아의 등극과 거의 동시에 키프로스의 왕이 되었고 마리아의 이복 여동생 알리스 드 샹파뉴와 결혼했다.
어린 마리아는 베이루트의 영주 장 디블랭(John d'Ibelin)의 섭정을 받게 된다. 그는 발리안 디블랭과 동로마 제국의 마리아 콤네네 사이의 아들로써, 아모리 1세와 마리아 콤네네 사이의 딸인 이사벨 1세의 이부(異父) 동생이었다.즉 어린 여왕 마리아의 외숙부인 그의 동로마 제국 혈통은 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 그는 아모리 2세를 암살하려는 시도로 고소당한 후 왕국에서 추방당했던 갈릴레아 공작 라울과 왕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여 라울의 처형을 모면하게 하는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는 섭정으로서 현명하게 왕국의 거주자들에게 만족을 주며 잘 통치했다. 1187년에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수복 활동을 금지하여 아이유브 제국의 알 아딜과의 평화 정책을 기반으로 평화로운 왕국을 유지했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은 과거의 위용을 잃고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현실이 그들을 구했다. 쇠약한 왕국이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못했으므로 오히려 무슬림들이 평화 협정을 맺으며 내버려두었다. 이슬람교는 이제 기독교의 갸날픈 목을 조르면 또 다시 유럽에서 대규모 십자군이 일어나는 어그로를 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대신에 다르게 생각하면 기독교 국가라는 존재가 레반트 지역에 성지순례라는 경제적으로 좋은 기회를 지속적으로 주었으므로, 알 아딜은 이를 기꺼이 이용했다.

섭정 정치는 마리아가 17살 때인 1209년에 만료되었으므로 의회는 마리아를 결혼시켜 앞날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믿었다. 영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회의에서 구혼 사절단을 유럽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결혼 적령기에 있던 많은 귀족들은 더 이상 그 청혼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는지 무려 2년이나 진척이 없었다. 끝끝내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후보자로 추천한 게 필리프의 추종자 중 한 명인 장 드 브리엔(John de Brienne)이었다. 이렇게 찾아낸 후보는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장은 권력도 금전도 가지지 않은 처지였고 무엇보다 나이가 환갑인 60세였다. 이사벨 때의 콘라드 꼴을 보고서도 배우지 못한 모양 그래서인지 필립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장의 재산 부족과 나이를 극복하고 왕으로써 자신의 주권적 의무인 법원과 군대를 통솔할 수 있도록 그에게 40,000리브의 금전적 원조를 결정했다. 장은 9월 13일 아크레에 도착하여 결혼은 다음날 거행되었으며, 그 후 부부는 1210년 10월 3일에 티레의 대성당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마리아 여왕과 왕 장 1세로 즉위했다.

장은 장 디블랭의 평화 정책을 계승하여 왕국이 회복되도록 적절히 이끌었다. 군사 기사단과 특히나 합이 잘 맞았는데, 그들은 장의 노련한 처세술과 지혜에 깊은 감명을 받고 존중하게 되었다. 장은 무슬림과의 평화 정책을 대외적으로 추구하면서도 성지에 또다른 십자군을 요구하는 편지를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보냈다. 그러전 중 1212년, 마리아는 딸 욜랑드(Yolande)를 낳았으나 곧 출산 후 발열로 사망해 버린다.
  • 이사벨 2세 & 장 1세

마리아의 외동딸 욜랑드는 아직 핏덩이의 갓난 아기였지만 의회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이사벨 2세로 선포되었다. 장은 딸이 이사벨 2세로 등극하자 이사벨 2세의 공동 왕 지위까지 섭정하여 왕국의 사실상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자 배 아픈 전 섭정 장 디블랭이 그를 끌어 내리려고 시도했다. 곧바로 법적 분쟁이 터졌고 장 1세는 교황청으로 시돈의 주교 라울 드 메렝쿠르(Raoul de Mérencourt)를 파견하여 교황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213년 초, 장 1세를 예루살렘 왕국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결정하고, 의식과 관련 문서를 동봉하고 사신으로 온 티레의 주교 라울을 때마침 공석이 된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임명하며 필요할 경우 교회의 권위로 장을 지지할 것임을 선포했다. 대부분의 예루살렘 성주들은 장 1세가 그의 딸을 대신하여 왕국을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면서 장 1세에게 충성하는 편이었다. 입지가 심각하게 좁아진 장 디블랭은 성지를 떠나 키프로스 왕국으로 망명했다.

2.4.8. 교황령의 제5차 십자군 원정

당대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온 중세 교회 최전성기의 교황 중 한 명이었다. 그는 36살의 젊은 나이에 교황에 선출되었다. 이는 전임자 첼레스티노 3세가 80대 중반의 고령으로 즉위해 92살에 사망했던 점 때문에, 추기경들 사이에서 "젊은 교황을 뽑아 시국에 강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견해가 일치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유럽에 도와달라고 요청한 장 1세의 호소에 교황은 자신의 특사인 로베르 드 쿠르콩(Robert de Courcon)에게 프랑스를 돌아다니며 모병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로베르의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자들은 도둑, 나병 환자, 노인, 창녀, 여인 들로 이루어진 잡다한 무리였다.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잡것들이 준동한다며 항의 편지를 받자 인노첸시오는 로베르를 제지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은 십자군 모병에 활기를 불어넣고 싶어했고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열어 교회 개혁과 신앙 및 윤리 문제,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승인, 탈선해 버린 제4차 십자군을 대신한 새로운 십자군 운동의 계획 등을 논의하였다. 라테라노 공의회는 중세 최대의 공의회로 1,200여 명의 주교, 수도원장, 사제들이 참석했다. 이 공의회에서 십자군의 목적은 이집트, 특히 알렉산드리아로 정해졌고 서유럽의 많은 주요 인사들이 그 원정에 참가하겠다고 약속할 것을 촉구했다. 당시 교황청은 최대 절정기에 올라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 원조가 준비되자 귀족들의 열의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한다. 계획적이고 철저한 조직가였던 인노첸시오는 과거 살라흐 앗 딘이 그랬던 것처럼 신앙의 힘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달했다. 참석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유럽 곳곳의 성당에는 교황의 포고 사본이 나붙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지극히 이성적이며 현실가였다. 그 당시 유럽 왕국 간의 반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억지로 독일인과 프랑스인들이 함께 손잡고 공동 원정에 나가도록 착수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없었다. 대신 아이유브 제국의 알 아딜에게 대군이 가고 있는 중이니 순순히 살라흐 앗 딘이 강탈한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를 넘기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편지를 쓸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교황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었으니 1216년 5월, 페루자에서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사제들이 교황의 쾌유를 위하여 돌아가며 올리던 중보기도도 아무런 소용없이 7월 16일에 교황이 사망하고 만다. 냉혹하고 기략이 절륜하며 젊음이 넘치듯 정열적인 그는 확실히 십자군의 구심점이었고, 그의 죽음으로써 생겨난 공백을 메울 만큼 동등한 매력을 지닌 지도자를 찾기란 어려웠다.

십자군은 계속해서 움직여야 했기에 콘클라베는 곧바로 소집되어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모이는 십자군의 퀄리티는 실망스럽게 그지 없었는데, 스칸니나비아에서 온 딱할 정도로 얼마 안 되는 군사들과 아일랜드에서 온 소규모 병력이 레반트로 향했다. 그중에서 그나마 쓸만했던 주요 인물은 헝가리 왕국의 언드라시 2세였다. 언드라시 2세는 십자군을 이끄는데 괜찮은 인물이긴 했지만 한 가지 찝찝한 옵션이 붙어있는 왕이었는데, 자신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던 자다르가 4차 십자군에게 털렸던 경험이 있던지라 십자군을 좋아할 수가 없는 인물인데 지원을 했다는 것이었다. 역시나 그의 배후에는 다른 동기가 있었는데 자신의 왕비인 욜란다가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성립된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 1세와 친척 관계였고[61] 때마침 자식이 없던 앙리 1세가 죽으면 계승권을 요구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 키프로스 왕국의 국왕 앙리 등이 이끄는 군대도 있었는데, 이들은 개별적으로는 규모가 작았지만 함께 협력한다면 유용한 공헌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알 아딜은 이들이 동방에 도착하자 상륙이 마무리 되지 않았을 때 선제 공격을 할 요령으로 경기병을 보냈지만, 십자군이 생각보다 대규모인 것을 알고는 재빨리 후퇴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해묵은 문제로 인해 곤경을 겪었다. 각 파견단은 자신들의 지휘관의 명령에만 복종했으므로 겨우 조그만 도시 몇 개를 점령했을 뿐이었다. 강력한 통솔력이 그들을 이끌지 못하자 십자군은 곧바로 힘을 잃고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는 조그마한 도시 몇 개를 점령하고 혈통이 심각하게 의심스러운 몇 개의 해골을 자신의 수집품에 더하더니 십자군 종군이라는 위업 타이틀만 따고선 귀환해버렸다. 게다가 키프로스의 앙리는 세상을 떠나버리기까지 했다. 왕이 죽거나 떠나게 되자 그들을 따르던 기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원정은 시작부터 점차 시들해졌다.

다행히도 이것은 이집트를 목표로 하는 원정대의 선봉에 불과했다. 1218년 4월, 상당히 큰 프랑스 왕국의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항해하려고 대기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대규모 프리지아(네덜란드) 함대가 우트르메르에 도착했다. 장 1세는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에 동의했는데, 이집트 함략은 곧바로 예루살렘 왕국의 옛 영토 수복의 전주곡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 아딜은 이집트가 누려왔던 평온함이 오랜 기간 계속되었기에 무사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어 그 위협을 빨리 인식하지 못했다. 헝가리의 유골 수집가가 그토록 많은 군세를 이끌고도 거의 아무런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정이 마무리되었다고 판단했다. 프랑크 군대가 오고 있다는 척후병에 대해 그가 보인 반응은 기껏해야 심드렁한 정도였다.

십자군 본대는 32,000명의 병력이었고, 1218년 5월 24일 프리지아 함대에 승선하여 아틀레를 출항했다. 그리고 도중에 식량을 비축하기 위하여 아틀릿(Atlit)에 들렀다. 아틀릿 성채는 당시에 서유럽 기사들이 보기에도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바다로 돌출한 갑 위에 지어져 그 성은 필요한 경우 물로 범람시킬 수 있는 도랑에 의해 본토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광대한 지역이 성벽으로 둘려쳐져 있었으므로 군량을 비축할 수 있었고, 신선한 식수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성의 외벽은 두께가 무려 6미터였으며 높이는 당대에 가장 유명했던 크락크 데 슈발리에 성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15미터나 되었다. 이 성은 당시 십자군 국가의 건축술의 바로미터가 되는 건물이다. 각설하고, 척후선으로 소규모 배들이 이집트 다미에타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십자군 척후선이 무역선으로 볼 정도로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배에 승선하고 있던 십자군 기사들은 나머지 군대가 도착하기를 헛되이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해안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나일 강의 서쪽 제방에 상륙한 지 얼마 안 되어, 아틀릿에서 도착한, 장 1세와 트리폴리의 보에몽 4세,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 성전 기사단과 구호기사단,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다 헝가리로 이주해서 이번에 참가한 튜튼 기사단의 단장들을 태운 해군 전단이 수평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미에타는 상류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반 세기 전에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와 동로마 제국의 마누일 1세가 그곳을 공격했던 1169년의 역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를 함락시키려면 육지와 해안에서의 협공이 필수적이었다. 도시로 이르는 강은 동쪽 제방에서 서쪽 제방에 가깝게 위치한 탑에 걸려 있는 커다란 쇠줄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이 탑이 첫 공세의 대상이 되었다. 1218년 8월 24일 더 높은 탑을 세우고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항복을 받아냈다. 탑이 함락 되자 십자군은 불운하게도 힘겹게 해낸 작은 승리로 인해 십자군의 예봉이 꺽이기 시작했다. 다미에타의 함락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프리지아인들은 수송선으로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여 귀환을 결정했고,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던 본대가 합류할 때까지 무엇인가 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이 이들 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한 아이유브 제국의 군대가 이미 시리아에서 진군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종군하던 알 아딜이 다미에타 성 앞 요격전에서 아이유브 군대의 패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알 아딜은 형인 살라흐 앗 딘처럼 영웅다운 면모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성공한 사람이었으며 유능한 지도자였다. 사자심왕 리처드와 성공적으로 교섭을 이루어내자, 형으로부터 그 재능을 경계 받아, 형 살라흐 앗 딘이 생존하는 중에는 크게 중용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형의 사후, 형의 자식들에 의한 권력 투쟁이 발생하자 알 아딜은 여기에 교묘히 개입하여 형의 장남인 알 아프달을 추방시키고 1202년 술탄으로써 즉위했다. 그렇게 살라흐 앗 딘의 직계 자손들을 계승 구도에서 억지로 축출하니 정통성이 흔들렸는데 자신의 외교력과 정치력으로 불만을 잠재우고 있었다. 과거 유년 시절 리처드 1세에게 기사 서임을 받았던, 이집트를 다스리던 그의 아들 알 아밀이 그의 자리를 바로 물려받았지만, 무슬림의 통합이 지속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유럽으로부터의 증원군이 마침내 오는 중이라는 확인과 함께 알 아딜의 사망 소식은 십자군 전사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새로운 증원군은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꼬장꼬장하고 허풍이 심한 추기경에 의해 지휘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예루살렘의 구원자인듯 행동하면서 여왕과 사별하여 법률적 지위가 취약한 장 1세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 1세는 레반트의 정세를 잘 알고 있는 노련하고 유능한 지휘자였다.

1218년 10월 십자군은 무슬림의 반격보다 심각한 재앙에 시달렸다. 알 아딜의 죽음으로 다마스쿠스에서 오는 군대의 도착이 지연되고 있었지만, 조금만 증원군이 늦었어도 지중해 바다에 모조리 수장되었을 정도로 굉장한 폭풍이 불며 바다에서부터 해일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 해일이 저지대 위를 덮쳐 십자군 진지가 물에 잠기고 기사의 필수품인 말들이 빠져 죽었다. 범람한 바닷물과 썩어가는 물고기들의 악취로 결국 중세 시절 가장 무서운 재앙인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병자들의 피부는 검게 변해갔고 그 위세가 사그러질 무렵에는 2할의 병사가 목숨으르 잃고 난 후였다. 결국엔 이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본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펠라기우스는 분위기 반전을 노리고 다미에타 외곽 공격을 명령했지만 폭우로 인해 실패하고 사기는 점점 떨어져갔다. 그런데 무슬림들이 다미에타를 버렸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루머는 사실이었고 알 아밀은 자신의 승계 작업에 몰두하여 모든 군사들을 수도로 소집 명령을 내렸었다. 이로 인해 다미에타는 사실상 완전히 포위되었지만 하지만 반세기에 걸쳐서 부가 쌓인 다미에타는 식량이 충분했고 지리한 공성전만 계속되었다.

알 아밀은 자신의 계승이 험난해지자 외부의 공격을 외교로 풀려고 했다. 예루살렘을 프랑크인들에게 넘겨주자는 의견이 대두되자 주민들로서는 깜짝 놀랄 일인 성벽을 철거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힘든건 십자군도 마찬가지었다.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하여 떠나기로 마음먹고 지휘가 점차 공백이 되자 군대가 마음대로 판단하고 공방전에 돌입하여 진퇴를 결정하는 혼란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 참패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장 1세와 군사 기사단의 규율 덕분이었다. 양측은 1219년 8월 29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4주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때 한 사람이 진영에 찾아왔는데, 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Giovanni di Pietro di Bernardone), 훗날 이시시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였다.

그는 당시에도 이미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는데, 무일푼으로 밀항을 하는 등 3번인가 재시도한 끝에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도달했는데 수사 일루미나토 한 명과 함께 순교할 각오를 하고 이집트의 술탄을 개종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무작정 왔었다. 순교를 하느님을 향한 제일의 덕이라 여기던 프란치스코는 수사와 더불어 사라센 진영으로 넘어갔으며 각종 폭력과 모욕을 당하며 체포되어 알 아밀 앞으로 끌려가 며칠 동안 그의 막사에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의 만남은 당시 십자군의 기록물들과 프란치스코의 초기 전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후대에 프란치스코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들에서는 그가 술탄 앞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밝혔고, 술탄은 그 용기가 가상해 일단 그의 말을 경청했고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기꺼이 순교하여 기독교가 이슬람보다 거룩한 신앙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불 속에 들어가는 불의 심판을 행했다고 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가 주저함이 없이 불 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으며, 조금도 화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13세기 말엽 조토에 의해 아시시에 있는 대성당에 프레스코화로 묘사되어 있다. 몇몇 후기 문헌들에 의하면, 술탄은 프란치스코에게 성지에 있는 거룩한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은 물론 그곳에서 무슬림들에게 설교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온갖 부유함에 둘러싸여 있던 그들로서는 상당히 중요해 보이는 인물인 것 같은데 허름한 넝마를 걸치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알 아밀은 술탄 자리를 승계받아서 십자군과 적대를 했을 뿐 사실은 가톨릭에 상당히 공감을 하는 인물이었다고 여겨진다. 불의 심판 기적이 성공해서인지는 몰라도 알 아밀은 프란치스코의 태도에 대한 존경심인지 자비인지 값나가는 선물들을 챙겨줬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선물에서 신앙의 정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물렸고 술탄은 그렇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십자군의 야영지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와 그와 동행한 수사는 1220년 후반에 아크레에 있는 십자군 주둔지를 떠나 이탈리아행 배에 승선하였다.

그러한 해프닝이 있은 후 한 십자군의 포로가 석방되어 십자군과 휴전을 제의하기 위해 보내졌고 그들도 휴전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알 카밀이 아주 특이한 제의를 해오자 혼란스러워했다. 이집트를 떠나면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나사렛을 양도하겠다는 것이다. 언뜻보면 좋은 제안이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를 들며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펠리시우스는 이슬람과 교섭하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이라 여겼고, 기사단은 성벽이 허물어져 있는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벙어할 수가 없고, 우트레주르뎅의 완충지대가 없이는 그 3곳을 방어하기 불가능했기에 반대했다. 십자군 참가자들은 전리품으로 다미에타의 막대한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원인에서는 완전히 제각각이었지만 모든 각도에서 나온 최후의 결론은 동일했다. 협상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결렬되었다.

11월 4일 소규모 십자군이 도시의 외곽을 순찰하다 성벽에 병사들이 아무도 없음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들은 다미에타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몰랐다. 다음날 공성전을 준비하여 진격했는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성으로 난입해 들어갔을 때 방어군 거의 전원이 병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량은 넘쳤지만 질병에 굴복한 것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자신이 다미에타를 통치하려고 했지만 결국 장 1세가 독일의 프리드리히 황제가 도착할 때까지 임시로 통치하기로 정해졌다. 이 다툼 뒤에 휴식의 기간이 이어졌다. 장 1세는 소 아르메니아의 왕위와 관련된 논쟁에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려고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했다. 장 1세는 아르메니아의 공주와의 재혼을 통해 계승권을 물려받았었다. 그런데 그가 돌아온 직후 아르메니아의 공주가 모호한 상황에서 죽었다. 공주가 의붓딸 이사벨 2세를 학대하여 장이 심하게 때렸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공주가 죽자 며칠 뒤 공주의 어린 아들이 그 뒤를 잇게 되고, 장 1세는 아르메니아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가 없어졌지만 이집트 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년 내내 십자군은 다미에타에 머물러 있었고 각 세력의 알력이 자자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유럽으로 귀환했다. 펠라기우스는 교황이 직접 황제의 관을 씌워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를 기다렸지만 출발할 거라는 말만 있을뿐 다음 소식이 없었다. 결국 펠라기우스 혼자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지만 군대는 장 1세가 돌아오지 않는 한 공세를 취하기를 꺼렸다. 그래도 1년동안 증원군은 꾸준히 모였고 연대기 작가들은 630여 척의 배와 5만 명의 병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들의 판에 박힌 과장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느 참으로 굉장한 대군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장이 1220년 8월에 도착하자 펠라기우스는 빨리 공격하자고 재촉했다. 장이 도착한 시기는 나일 강이 범람하는 시기였다. 장은 범람을 알기에 카이로를 24킬로미터 남겨둔 지점에서 그만 멈출 것을 권고했다. 펠라기우스는 계속 공격을 고집했고, 그 와중 무슬림 군대가 뒤를 차단했다. 그렇게 나일 강은 범람했고 이집트 함대는 강을 따라 십자군을 포위했다. 그러자 곧바로 펠라기우스의 자신감은 공포로 바뀌었고 바이에른 공작은 후퇴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자 일반 병사들은 비축품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참을수 없어 하여 그 와중에 막대한 양의 포도주를 다마셔버렸다. 기사단은 보급품을 무슬림에게 빼앗기느니 불을 태워버렸고 이런 행동은 적들에게 퇴각이 진행 중이라는 확실한 메시지였다. 곧바로 수문을 열어 십자군 진영을 쓸어버렸고 혼란통에 단 몇 척의 배만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배에는 모든 의약 보급품이 실려 있었으므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탈출이란 있을 수 없었고 항복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수많은 십자군 포로들을 보며 굴욕감을 느끼며 화평을 제의했다. 알 카밀은 다미에타 양도와 8년 동안의 휴전을 주장했다. 대신, 자신이 갖고 있던 성십자가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조건을 이행할 시기가 도래했을 때, 그것은 사라지고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무슬림들에게는 매우 하찮은 것이었으므로 제대로 간수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이보다 더 적절하며 상징적이고 성스러운 유물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결국 제 5차 십자군은 실패로 돌아갔다. 성공에 다가선 적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불화 때문에 또다시 아무것도 건진게 없었다. 십자군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솔력이 필요로 했지만 펠라기우스는 그러한 인물이 아니었다. 서유럽에서 온 자들이 우트르메르인들의 지역에 관한 지식에 귀기울였으면 나일 강의 범람이 임박한 시점에 카이로로 진격하는 무모한 짓은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레반트에 거대한 패러다임이 닥치기 시작했다. 바로 무관심이었다. 서유럽의 많은 지도자들이 그토록 많은 노력과 자원을 쏟아 붇고도 얻는 것이 거의 없는데 이러한 원정에 매달려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제 따져 묻고 있었다.

2.4.9. 프리드리히의 제6차 십자군 원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 국왕이기도 했으며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가 유명을 달리했고 오랫동안 시칠리아는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기에 주변의 환경은 유럽과 달리 이슬람의 색채가 강했다. 자연스럽게 프레드리히는 무슬림에 깊게 공감을 하게 되었고, 주변의 가신들은 그런 어린 주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결국 1197년 센시오 살벨리(Cencio Savelli)라는 유럽의 문화를 잘 간직한 신부가 프리드리히의 가정 교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9년 뒤 호노리오 3세(Honorius III)로 교황이 된다. 새 교황은 과거 자신의 학생이었던 프리드리히가 자신의 말을 잘 이행할 거라고 믿고 여러가지 절차를 순탄하게 진행하여 1220년 이 제자에게 로마의 황제를 선언하며 자신이 대관식을 집행했다. 1225년 6월 20일에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이 다음에 있을 십자군을 위하여 산 게르마노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예루살렘의 위태로운 상황을 신성 로마 제국의 힘으로 타파하기 위함이었다. 주요 협약은 황제가 2년 동안 천 명의 기사와 2천 명의 다른 기사들을 성지로 보내거나[62], 10만 데니어를 기부하거나, 파문을 당하거나였다. 체결 후 곧바로 원활한 교황의 청사진을 실현하기 위해 이사벨 2세와 황제의 결혼을 종용했다. 이 엄청난 제안에 장 1세는 열렬히 동의하며 딸의 결혼식을 축하했지만, 1225년 11월 9일 프리드리히 2세는 장인 장 1세를 왕국 정부에서 쫓아냈다.
  • 프리드리히 & 이사벨 2세

프리드리히 2세는 그렇게 조각난 예루살렘 왕국에 프리드리히라는 왕명으로 국왕이 되었기에, 뒤따르듯이 당연히 옛 영토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1227년이 왔고 때마침 스승이자 교황이던 호노리오 3세가 자신의 꿈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곧이어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9세는 곧바로 황제에게 십자군의 참전을 닥달한다. 하지만 당시 막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는 자신을 쥐고 흔들던 스승이 죽자, 신성 로마 제국의 내부 문제에 힘을 쓰게 된다. 변명을 일삼으며 십자군 종군을 미루고 미루더니 결국 산 게르마노 조약을 어기게 되었고 곧바로 파문을 당하고 만다.
중세 시절 종교는 대단한 권력이었다. 황제의 권력조차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기에 농노라고 할지라도 파문의 대상자를 살해해도 죄를 면할 정도로, 파문은 사회적 지위의 말살과 직결되었고 파문을 당한 황제의 권위 역시 바닥을 치게 된다. 6차 십자군은 결국 파문을 당한 황제의 고해와 참회에 따른 보속 행위로 이루어졌다.

1228년 6월 황제는 레반트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지로 직진하는 대신 먼저 키프로스 섬으로 항해했다. 키프로스 섬은 사자왕 리차드가 제 3차 십자군 당시 아크레로 가는 길에 점령 한 이후 여러가지 정치적 이유에 의하여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황제의 키프로스 입장은 왕국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각인하려는 명확한 의도를 가진 통치 행위였다. 그 당시 키프로스 왕국은 예루살렘 왕국의 장 1세에게 축출되었던 장 디블랭이 베이루트의 백작 지위를 유지하며 키프로스로 망명하여 수완을 발휘하여 왕국을 삼키고 있었고 뤼지냥 왕조의 귀족들과 대립을 하는 상황이었다. 아직은 왕국의 법적 권위가 더 높았던 원주민 기사들은 황제의 방문에 우호적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베이루트의 장에게 그의 정치적 지위는 불법이며 황제의 권위에 굴복할 것을 요구했다. 장은 제국의 황좌에 키프로스와 예루살렘 왕국은 헌법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그의 주장에 베이루트의 주권을 가진 본인이 징벌적 형벌을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당시 성지에서 강력한 가문이었던 이벨린 가문을 소외시켜 황제에게 대항함으로써 훗날 십자군에게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파일:Federico_alkamil-1-1.jpg
알 카밀(우)와 협상하는 프리드리히 2세 (좌)

프리드리히는 우트르메르 본토에 상륙하여 알 카밀과 협상을 시도하였고, 협상이 결렬되자 자파로 남하하였다. 알 카밀은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여 아이유브 왕조 내의 내전을 정리하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교황의 시칠리아 왕국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다시 협상을 시작해 합의에 도달하였고, 1229년 2월 18일 예루살렘[63]과 베들레헴, 나사렛, 갈릴리 서부 (토론) 일대와 해안까지 이어지는 회랑, 그리고 분쟁 대상이던 시돈 외곽 영토를 할양받고 10년 휴전에 합의하는 야파 조약을 체결했다. 3월 17일에는 프리드리히가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다음날 대관식을 거행했다. 프리드리히는 토착 귀족들의 반발 속에서 시돈의 발리앙과 독일 귀족 베르너 폰 에기스하임을 섭정으로 지명하고 남이탈리아로 돌아갔다.

2.4.10. 영주들의 십자군(Crusade of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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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 루이 9세의 제7차 십자군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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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 제8차 십자군 원정의 튀니지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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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3. 제9차 레반트 최후의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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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4. 멸망

이렇게 아이유브 왕조,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맘루크 왕조에게 샌드백처럼 얻어터지는 신세였으며, 결국 세력권이 대폭 축소되어 수도 아크레 주변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거기다 프리드리히 2세의 손자 콘라딘이 자손 없이 처형되는 바람에 아모리 1세부터 모계로 이어진 혈통은 단절되었고 키프로스 왕 위그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계속되는 십자군의 실패와 유럽 각국의 전쟁으로 인하여 레반트는 결국 유럽에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존재가 되어 십자군의 발현이 멈췄다. 십자군의 수혈이 중지되자 예루살렘 왕국은 결국 1291년 위그의 아들 앙리 2세 때 아크레가 맘루크 왕조 이집트에게 함락당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4.15. 키프로스 왕국 (망명 정부)

상당수 망명객들이 키프로스 섬으로 이주했고 프리드리히 2세의 혈통이 단절된 후 키프로스 국왕들이 예루살렘의 왕위를 이었으므로 키프로스 왕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예루살렘 왕을 자칭하였다. 키프로스계 명목상 예루살렘 국왕들은 여왕 샤를로트 1세가 삼촌 자크 1세에게 찬탈당한 뒤 두 명으로 늘어났고, 이 중 샤를로트 1세의 명목상 계승권은 훗날 이탈리아 왕국을 성립시키는 사보이아 가문으로 넘어간다. 다음으로 자크 1세의 후손들은 키프로스가 베네치아에 합병되며 마지막 국왕인 카테리나 코르나로가 모든 권리를 공화국에 빼앗기면서 예루살렘 국왕 칭호를 포기했다.

이외의 왕위 요구자도 있는데, 아말릭 1세와 이사벨라 1세의 외손녀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64]에게서 내려오는 계승권도 있다. 이는 카페 왕조의 분가인 앙주 가문이 그녀에게서 계승권을 구입하여 예루살렘 국왕을 자칭했다. 이 계승권(?)은 앙주 가문이 다스렸던 나폴리 왕국에 귀속되었는데, 훗날 나폴리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나폴리를 정복한 아라곤과 나폴리를 잃은 발루아-앙주 가문으로 나뉘어 명목상 국왕이 둘로 늘어난다. 아라곤쪽의 계승권은 훗날 스페인에 귀속되며, 발루아-앙주 가문의 계승권은 로렌 가문으로 분리되어 이어진다. 로렌 쪽의 계승권은 이후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으로 넘어갔다. 현대에 들어 예루살렘 왕국의 명목상 국왕은 사보이아 가문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Vittorio Emanuele di Savoia, 1937~)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Karl von Habsburg-Lothringen, 1961~), 그리고 스페인의 펠리페 6세가 있다.[65]

2.4.16. 간절히 원했던 프레스터 존의 전설

이슬람 지하드의 반격으로 이슬람의 물결이 일렁이자 위기에 빠진 유럽 사람들은 프레스터 존의 전설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내용인즉, 동방의 인도에서 사도 토마스의 전교 활동이 기적적으로 결실을 맺어 사도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제 왕이 무려 인도를 통일하였고 그의 선조는 세 명의 동방박사 중 한 명으로서 그야말로 성서의 후손이며, 관대한 군주로서 신실함을 갖춘 사람이고, 그 부유한 왕국은 청춘의 샘 같은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며 에덴 동산에 맞닿아 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도의 친구인 그러한 왕국이 동쪽 방향에서 진군하여 무슬림의 후방을 일격에 쓸어버릴 것이라는 전설이었다. 인도라는 구체적 지명이 언급된 것은 성경의 토마스 사도 행전에 기록된 아대륙 여행기가 아마도 첫 번째 씨앗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 시절 유럽에서는 양면에서 이슬람과의 대결이 준동했었는데 레반트 지역의 십자군 운동과 이베리아 반도 지역의 레콩키스타 운동이었다. 대항해시대의 시작이 인도의 향신료를 구하기 위하여 세상의 남쪽으로 가서 아프리카를 넘어 인디언을 찾자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의 대항해시대의 시발점이 된 주된 이유 중 하나로, 향신료는 사실 겸사겸사이고 인도의 요한 왕을 찾아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에 대한 구원을 요청하려는 사절단의 성격이 더 컸다.

전설의 시작은 1145년 한 책에서 시작되었다. 책 제목은 두 도시의 역사(Chronica de duabus civitatibus)였는데, 작가 오토 폰 프라이징(Otto von Freising)이 쓰기를, 프레스터 존은 동쪽의 사제 왕으로서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신봉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토가 1144년에 비테르보(Viterbo)에서 시리아 출신의 한 주교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 후 유럽에는 프레스터 존에 관한 갖가지 전설과 위서가 나돌면서 수수께끼와 광신이 증폭되었다.

그 시절 떠돌던 내용을 검토해보면 극히 일부만이 사실에 부합하고 대부분은 환상적인 억측이나 타인의 기사를 표절한 것이었다. 위서들은 비록 사실성은 없지만 흥미 위주로 문학적인 윤색을 가했기 때문에 호사가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얻었고, 대부분 유럽에서 최다 발행 부수를 기록하였으며 한때는 쿠텐베르크의 인쇄소에는 성경책이 뒤로 빠지는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내용을 보면 제국은 사제 왕 프레스터 존이 통치하는 동방의 유일한 기독교 국가로서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달려서 4개월이나 걸리는 광대한 영토를 영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몇 번이나 재판에 재판을 거듭하며 발행되었고 시간이 흘러 8차 십자군이 끝 날 무렵에는 심지어 요한 왕의 후대 왕들의 연대기까지 제멋대로 덧붙여져 현재의 왕은 요한 왕의 손자 다윗 왕이고 서쪽으로 진격해 페르시아의 하마단 지역까지 진격해 왔다고까지 적혀졌다. 번번히 야무지게 말아먹은 유럽 십자군의 상황에 비교하면 동방의 기독교 국왕의 연전연승의 승전보는 정말 한 줄기 빛과도 같았을 것이다. 물론 프레스터 존의 전설 항목을 보면 알다시피, 이 소문이 마냥 뜬소문만은 아니었고, 나름의 근거가 있기는 있었다. 다만 현재 21세기처럼 빠른 시간에 정확한 정보를 다량으로 획득 가능한 시대에도 온갖 유언비어가 판치는데, 인터넷이나 인공위성이 있지도 않았던 당시라면 소문이 퍼지는 과정에서 윤색이 더해지고 더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결국 이 소문이 절정에 달할 때쯤 실제로 유럽 기독교인들의 바람대로 머나먼 동방에서 왕 하나 군대를 이끌고 오기는 왔다. 문제는 그 왕이 이슬람 제국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력도 썰어버렸다는 것이지만.

2.5. 왕국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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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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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왕조 레텔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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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프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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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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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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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장드
앙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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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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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3세
앙주 왕조 알레라미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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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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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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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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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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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5세
알레라미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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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5세
앙주 왕조 알레라미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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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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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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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뤼지냥 왕조 블루아 왕조 뤼지냥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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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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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 2세
알레라미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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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드 1세
알레라미치 왕조 브리엔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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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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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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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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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드 3세
브리엔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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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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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뤼지냥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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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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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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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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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프루아 ~ 보두앵 1세
  • 바세로렌의 고드프루아 3세 (997년경 ~ 1069)

보두앵 2세 ~ 앙리 2세(말대) 왕국을 연 고드프루아 드 부용 보두앵 1세 플랑드르 가문의 분가인 불로뉴 백작 가문 출신이다. 보두앵 1세가 자식 없이 죽자 외가 친척인 레텔 가문 보두앵 2세가 계승했고,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장녀인 멜리장드와 사위인 앙주 가문의 풀크가 공동으로 계승했다. 이후 보두앵 4세 시절까지 앙주 가문이 부계로 계승했고, 적법한 후계자는 유아+모계 계승이 거듭되는 불안정한 상황 아래에서 몬페라토의 알레라미치 가문, 프랑스의 블루아 가문과 뤼지냥 가문, 브리엔 가문 등이 결혼으로 왕위를 스쳐갔다. 13세기 초반 프리드리히 2세가 부계로 브리엔, 모계로 앙주[66]와 알레라미치 혈통인 이사벨 2세와 혼인한 이후 콘라딘의 사망으로 프리드리히 2세의 직계가 단절될 때까지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왕통을 이었다. 콘라딘의 사후에는 왕국이 영토를 상실할 때까지 키프로스의 뤼지냥 왕가가 왕위를 겸직했다.

여담으로 이 12세기 플랑드르-레텔-앙주 왕가의 남자군주들은 모두 10 ~ 18년간 재위하는 신기한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보두앵 1세는 18년, 보두앵 2세는 13년, 풀크는 12년, 보두앵 3세는 다시 18년, 아모리 1세도 다시 12년, 보두앵 4세는 10년간 재위하였다. 일반적인 군주가 15년 정도 재위한다 하지만 이렇게 6명이나 연이어 너무 길게 혹은 너무 짧게 재위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3. 정부 및 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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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 원정이 끝난 직후, 수십명의 십자군 내 영주급 기사들은 말그대로 부동산 대박이 터졌다. 정복된 땅은 고드프루아 휘하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에게 신분과 공적에 따라 배분되었는데, 종군했던 기사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유럽 본토에서는 계승권에서 멀어져 송곳 꽂을 땅 한 평 못 물려받는 암울한 인생이 예정돼 있던 귀족 방계 기사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은 고생을 바가지로 하긴 했지만 종래에는 줄 한 번 잘 선 덕을 보아 예루살렘 왕국 내의 수많은 초대 영주들이 되었다. 이러한 영지 분배는 왕국의 정복 사업이 있을 때마다 계속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도시가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영주의 수와 봉토의 크기는 12세기와 13세기에 걸쳐 거대해졌고 왕은 이러한 영주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왕국을 통치했다. 왕과 왕실은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에 상주하며 왕국의 구심점을 잡았지만, 초기에는 이슬람 주민에 대한 거주 금지 정책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규모는 작았고 인구는 부족했다. 예루살렘에서 왕족은 성전산에서 살았는데 남쪽의 알 아크사 모스크를 궁전으로 삼고 거주했다. 성전산에 성전기사단이 성립된 뒤에는 같은 공간에서 지냈고 또한 다윗의 탑을 중심으로 한 궁전 단지도 있었고, 아크레에 별도의 행궁이 있었다.

3.1. 솔로몬의 사원

파일:1280px-Jerusalem-2013-Temple_Mount-Al-Aqsa_Mosque_(NE_exposure).jpg
예루살렘 왕국의 정궁. 당시에는 템플룸 솔로모니스(TEMPIUM SOLOMONIS)라고 명명했으며, 지금의 알 아크사 모스크다.[67] 본래 고대 유다 왕국의 솔로몬의 사원은 성전산의 중심인 바위의 돔에 위치했지만, 로마가 파괴한 후 복원이 되지 못하다가 이슬람의 정복 이후로 무함마드의 승천 성지가 되어 복원이 요원해졌다. 십자군 성립 당시 1099년은 이미 제 2성전 솔로몬의 사원은 훼철되어 바위의 돔이 들어서 있었던 상황이었으므로, 705년 6대 칼리파 왈리드 1세가 성전의 뜰 자리에 세운 알 아크사 모스크를 솔로몬의 사원이라고 임시로 정하고 불렀다.
파일:Interior_of_the_Al-Aksa_mosque,_Jerusalem._Chromolithograph_Wellcome_V0050126.jpg
모스크의 19세기 중반 스케치

3.2. 다윗의 탑

파일:tower-david-jerusalem.jpg
다윗의 탑
예루살렘 왕국 정부의 공무장소 역할을 했다. 1차 십자군 당시 고드프루아가 툴루즈의 레몽 백작에게 반납 받은 이후 이곳에서 역대 왕들은 행정 업무를 6대신들과 함께 의논했었다. 이름은 다윗의 탑이지만 다윗과 별다른 연고가 없고, 역사 대대로 잘못 알려진 사실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최근 남쪽에서 헤롯 대왕의 왕궁 터가 발견되어 성서의 내용과 대조해보면 예수가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즉 본시오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은 곳이라는 고고학적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3.3. 나블루스 공의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왕국의 첫 번째 법은 고드프루아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확립되었다지만, 정설은 1120년 1월 16일에 성직자와 십자군 영주들이 개최한 나블루스 공의회(Nablus Council)에서 제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68] 당시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고르몽 드 픽퀴니 보두앵 2세가 나블루스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25개 교회법 조항을 설정했는데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사안과 도덕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공의회는 그렇게 왕국의 첫번째 성문법을 확정했고 또한 위그 드 파앵이 예루살렘에 성전 기사단의 설립을 재가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공의회 기록에는 보두앵 2세 곁에서 십 여년간 개인 사제로 있었던 푸셰 드 샤르트르가 반드시 빠질 수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았는데, 푸셰의 라틴인 주민들의 범죄와 죄악을 묘사하여 기록한 것이 공의회 계율의 왕국의 기독교적 이상향과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기욤 드 티레가 6년이 지난 뒤, 이 절차적 모순에 대한 대략적인 해명을 기록했는데, 유토피아는 고사하고 실상은 왕국 어느 지방에 서든 그러한 죄악이 만연했고 초기 십자군들의 행태가 그렇게 영웅적이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기록이었다. 그도 역시 후대에 적나라하게 알리는 걸 원하지 않았는지 라틴인들이 어겼던 25개의 규범을 단 하나도 대입해서 기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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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ncordat of Nablus (번역본)

기욤 드 티레가 살았던 시절에는 25개의 조항이 잘 알려져 있었지만 후대의 이슬람 술탄들의 재정복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지고 시돈의 한 성당에 남아있던 사본 하나만 전해져 오늘날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이 사본은 1330년까지 아비뇽의 교황청 도서관에 보관되었고, 현재는 로마 교황청 바티칸 시국의 지하 도서관에 보관되어져 있고 일련 번호는 MS Vat. Lat. 1345.니 실물을 보려면 방문해서 요구하면 된다.

계율은 공의회가 왜 소집되었는가부터 시작된다. 내용인 즉 지난 4년간 전염병이 퍼지고 메뚜기 떼와 쥐들이 창궐하고, 거의 모든 십자군 주들이 악마와 같은 무슬림의 반복적인 공격으로부터 고통받아, 결국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안티오키아 공국의 수뇌부와 남자 전투원들이 한 번에 끔살당하여 공국의 지도부가 와해되는 지경으로 전락하자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면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기분이 영 좋지 않으셔서 그러니 예루살렘이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라틴인 시민들의 죄악을 바로잡고 고쳐 나가야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는 성경 말씀( 창세기 1장 31절)이 실현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 보두앵 2세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에게 십일조를 헌납, 즉 예루살렘, 나블루스, 아크레 내의 왕의 사유지 봉헌을 약속한다.

2. 보두앵 2세는 이전에 미루어 왔던 십일조에 대한 고해성사를 하고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고르몽 드 픽퀴니는 그 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하여 준다.

3. 왕의 죄악을 사하여 줬으므로 교회가 십자군 왕국들의 권리를 확고히 하고, 주교 서임권 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선포한다.

4. 유부녀와 간통이 의심되는 남자에 대한 처벌로, 첫째로 방문을 금지, 둘째로 계속 방문하면 교회 광장에서 그 유명한 뜨거운 철의 시련인 시련 재판을 행하여 무죄를 증명해야 하고(...),

5. 셋째로 그가 간통죄였음이 판명되면 거세와 동시에 추방한다. 여성일 경우 남편이 동정심에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코를 훼손하는 형벌이고, 만약 남편이 훼손을 거부하면 둘다 추방한다고 규정한다.

6. 성직자가 유사한 상황에 처할 시, 첫째는 같고 둘째는 교회 치안 판사에게 경고. 셋째는 성직자 파문과 거세 추방 크리.

7. 포주를 금하고 아내를 타락시켜 매춘부로 전락시키지 못하게 하고, 처벌은 역시나 거세 추방.

8. 성인 소돔미[69] 화형.

9. 만약 한쪽이 어린이나 노약자인 피해자라면 범한 자는 스테이크. 피해자는 자의에 반하였지만 죄악을 범한 것으로 추정되니 회개해야 한다.

10. 피해자였지만 어떤 이유일지라도 혹시 숨기고 있을 지도 모르니 나중에라도 소돔미로 판명할 수 있다.

11. 같은 이유로 또 다시 피해자가 되어버리고 자의에 반했다고 또 추정되면 회개는 가능하지만 이번에는 왕국에서 추방한다.

12. 이교도와 성관계를 하면 남성은 거세, 여자는 코 훼손.

13. 남성이 자신의 여성 이교도 노예를 범하면 노예는 압수하고 남자는 거세.

14. 남성이 다른 사람의 노예를 강간하면 간통죄의 형벌을 받는다.

15. 반대로 여성이 이교도와 기꺼이 성관계를 하면 소돔미로 취급하고 여성이 강간당했다면 해명할 책임이 없고 남자는 거세.

16. 이교도가 기독교인처럼 옷 입는 것을 금지.

17. 2번째 아내를 취하면[70] 사순절 첫째 주일까지 참회해야 하고, 숨기다 발각되면 재산은 몰수되고 추방당한다.

18. 남성 또는 여성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 버리면 *중혼죄,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면 처벌은 면한다.

19. 2번째 아내와 살다 이혼을 원하면, 그가 이미 결혼했음을 증명하거나, 철의 시련을 통과하거나, 증인을 데려와 그를 위해 맹세하게 한다.

20. 성직자가 어떤 이유로도 무기를 소지할 수 없으며, 기사처럼 행동할 수도 없다[71]

21. 수도자나 수도참사회원이 배교자가 되면 회심해야 하고 이를 거부하면 추방이다.

22. 단순한 거짓과 비난을 금지한다.

23. 한 닢 이상의 베잔트[72] 이상의 가치가 있는 재산을 절도한 혐의로 유죄를 받으면 팔이나 다리, 눈 중 하나를 절단하거나 적출한다. 만약 1 베잔트 이하의 가치라면 얼굴에 낙인을 찍고, 공개적으로 채찍질 당한다. 도난당한 물건은 반환해야 하지만 도둑이 다 써버려 소유하지 않으면 도둑 자신이 피해자의 노예가 된다. 도둑이 다시 훔치다 또 잡히면 다른 손, 발 또는 눈을 제거하거나 처형한다.

24. 그가 미성년자라면 감옥에 유치되어, 왕실 재판소로 보내지지만 더 이상의 처벌은 없다.

25. 귀족일 경우 왕실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지만 위의 내용이 적용되지 않는다.

나블루스 공의회의 규범은 12세기에 효력을 발휘했으나 왕국이 쇠락해져 가는 13세기에는 점점 사용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순회 재판(Jerusalem de Assises)'이라고 알려진 가장 광범위한 법률 논문 및 판결 모음집이 있는데 이 책은 당시 군주 정치체제의 여러 가지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3.4. 의회

귀족들은 본인의 시골 영지가 아닌 예루살렘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 비해 왕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시골에는 대부분 이슬람 파벌들이 거주했다. 국왕은 그에 비해 아크레, 나블루스, 티레 또는 그 밖의 곳을 순행하며 의회도 수시로 개최했고 '예루살렘의 순회 재판(Jerusalem de Assises)'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의회에는 귀족과 주교 신분들로 이루어졌던 입법과 사법의 의결권이 있었던 대의회 '오트 쿠(Haute Cour)'가 있었다. 왕은 명목상이었지만 대의회의 합법적인 장으로 인정받았다. 오트 쿠(Haute Cour)는 새로운 왕의 선출과 섭정의 필요성을 확정하는 의무, 동전을 주조하고 세금을 수집하여 왕에게 돈을 할당해 국가 예산을 확정하는 의무 및 군대 소집에 대한 선포 권한을 가졌다. 또한 왕국의 고위층을 대상으로 살인, 반역, 노예의 거래 같은 봉건 분쟁이나 형사 사건 심리를 담당한 유일한 사법 기관이었다. 처벌에는 영지 몰수와 추방, 극단적인 경우 처형이 있었다.
파일:Godefroy de Bouillon tenant les premières assises du royaume de Jérusalem, janvier 1100.jpg
예루살렘 왕국의 첫번째 중죄 재판을 열고 있는 고드프로이 드 부이용 (피에르 쥘 졸리베 作)

일반인과 비 라틴인을 위한 다른 소규모의 법원도 있었다. 시민 법정, 쿠 데 부르주아(Cour des Bourgeois)는 폭행과 절도 등 경미한 범죄를 다루는 비 귀족 라틴에 대한 재판을 집행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법적 권리를 가졌던 비 라틴인 사이의 분쟁에 대한 규칙을 제공했다. 시장에서의 상업적 분쟁의 경우인 상인 법정, 쿠 드 라 풍(Cour de la Fond) 와 해군 법정, 쿠 드 라 메(Cour de la Mer)와 같은 특별 법원이 해안 도시에 존재했다. 예루살렘 왕국 성립 이후 원 거주민인 무슬림 및 정교회 법원은 지역 차원에서 본인들의 법적 권한을 행사했다. 시리아인 법정인 쿠 드 쉬리앙(Cour de Syriens)은 시라아인들의 비 형사 사건을 재판했지만, 라틴인 vs 시리아인(비 라틴인)과의 형사 문제의 경우 쿠 데 부르주아(Cour des Bourgeois)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비 라틴인들은 상대적으로 불평등한 조건에서 판결을 받았고 유죄가 성립되면 종종 형벌이냐 개종이냐를 선택했어야 했다. 또한, 범죄의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상급 법원인 대의회, 오트 쿠(Haute Cour)에서 판단했다.

이탈리아의 공동체는 제1차 십자군 전쟁 이후 수 년 동안 군대와 해군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해서 왕국 초창기부터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이 자치에는 자신의 사법권을 관리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었지만 관할권에 속한 사례의 종류는 시기별로 매우 다양했다.

3.5. 행정구역

중세의 기독교도들은 상당 부분 성경 구절을 명분으로 삼아 행동했다.
가나안족의 경계는 시돈에서 그라르 쪽으로 가자까지 이르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츠보임 쪽으로는 레사에 이르렀다.
창세기 10장 19절

이 구절에 의하면, 가나안 지방 즉 아스칼론 주의 북쪽 경계는 시돈이며, 남쪽 경계는 그라르(Gerar)까지였다. 민수기 34장에 가나안의 경계가 서쪽 경계를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남쪽은 친 광야에서부터 에돔 땅을 따라간다. 그러므로 너희의 남쪽 경계는 '소금 바다' 동쪽 끝에서 시작된다. 너희의 이 경계는 '아크라삠 오르막' 남쪽을 돌아 친 광야를 지나서, 그 끝이 카데스 바르네아 남쪽에 이른다. 거기에서 하차르 아따르로 나가 아츠몬을 지난다. 그 경계는 다시 아츠몬에서 '이집트 마른 내' 쪽으로 돌아, 그 끝이 바다에 이른다. 서쪽 경계는 큰 바다와 그 해변이다. 이것이 너희의 서쪽 경계다. 너희의 북쪽 경계는 이러하다. 큰 바다에서 호르산까지 선을 그어라. 또 호르산에서 하맛 어귀까지 선을 긋고, 이 경계선의 끝이 츠닷에 이르게 하여라. 그런 다음, 경계선은 지프론으로 나와 그 끝이 하차르 에난에 이른다. 이것이 너희의 북쪽 경계다. 동쪽 경계선은 먼저 하차르 에난에서 스팜까지 그어라. 이 경계선은 아인 동쪽의 리블라까지 내려온 다음, 다시 더 내려가서 킨네렛 호수 동쪽 비탈에 다다른다. 거기에서 경계선은 다시 요르단으로 내려가, 그 끝이 '소금 바다'에 이른다. 이것이 사방 경계가 정해진 너희 땅이 될 것이다.
민수기 34장 3-12절
파일:land of israel.png
구약성경의 지역명

따라서 예루살렘 왕국의 아스칼론 주 경계는 에돔 곁에 접근한 시온(Zion) 광야[73] 북쪽에서부터, 하맛(Hamath) 어귀까지였다.[74] 그러나 왕국의 실제 경계는 북편 해안의 트리폴리 백국이 자리잡아 그 영토는 트리폴리 백국으로 편입되었고, 동편으로 사해 끝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지온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Kadesh-barnea) 남방에 이르고, 서편은 여기서 하살아달(Hazeraddar)[75]과 아스몬(Azmon) 그리고 작은 개울인 애굽 시내(Brook of Egypt) 즉, 시나이 반도 동쪽을 경계로 지중해까지 이른다. 따라서 예루살렘왕국의 북방 경계는 하맛 어귀에 있는 르홉(Rehob)과 스닷(Zedad)까지인 오늘날의 레바논 남부 지역의 트리폴리 백국 아래까지였으며, 남쪽으로는 네게브 북부 지역까지였다.
파일:355px-1889_The_Kingdom_of_Jerusalem,_shewing_the_Fiefs,_about_1187_A.D..jpg
1187년 당시의 예루살렘 왕국.

다만 성경의 인용은 주로 지명 명명과 외부 국경에 대한 관점에 차용된 것으로 보이며, 내부의 영토 구획은 봉건제에 따라 여러 개의 영지로 나눈 뒤 공작령이나 백작령 같은 상위 영지로 포괄한 것으로 보인다.
  • 시돈(Sidon) 백작령
    • 슈프(Schuf) 영지
  • 티레(Tyre) 백작령
    • 아델론(Adelon) 영지
    • 사렙다(Sarepta) 영지
    • 스칸델리온(Scandelion) 영지
  • 토론(Toron)[77] 백작령
  • 몽포트(Montfort) 백작령
  • 갈릴리(Galilee) 공작령
    • 티베리아스(Tiberias) 백작령
      • 나자렛(Nazareth) 영지
      • 막달라(Magdala) 영지
      • 아풀라(Afula) 영지
    • 베이루트(Beirut) 백작령
      • 바트룬(Botrun) 영지
      • 바니아스(Banias) 영지
      • 주니에(Jounieh) 영지
      • 타이론(Cave de Tyron) 동굴
    • 제파트(Safed)[78] 백작령
      • 벨부아(Belvoir) 영지
      • 샤틀렛(Chastellet) 영지
        • 야곱의 여울(Jacob's Ford) 다리
  • 하이파(Haifa) 영지
    • 아틀리트(Atlit fortress) 성채
  • 케이몽(Caymont) 영지
  • 아르수프(Arsuf) 영지
    • 아폴로니아(Apollonia fortress) 성채
  • 야파와 아스칼론(Jaffa and Ascalon) 공작령
    • 야파(Jaffa) 백작령
      • 미라벨(Mirabel) 영지
      • 이벨린(Ibelin) 영지
      • 몽기사르(Montgisard) 영지
      • 람라(Ramla) 영지
      • 로드(Lod) 영지
      • 성 조지(St. George’s Monastery) 수도원
    • 아스칼론(Ascalon) 백작령
      • 아조트(Azot)[79] 영지
      • 가자(Gaza)[80] 영지
      • 블랑쉐가르드(Blanchegarde) 영지
    • 다롬(Darum) 백작령
  • 울트레주르뎅(Oultrejourdain) 공작령Adratum

3.6. 주요 관직

본질적으로 왕국의 행정부는 제1차 십자군의 고향인 11세기 프랑스에 있었던 전형적인 관직들을 그대로 벤치마킹했다. 하지만 유럽과 달리 이교도들에게 포위당하여 자주 전시 상황에 놓이다보니 그 당시의 관행이 화석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유럽에서는 이 행정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반면 예루살렘에서는 태생적으로 군사 시스템은 발전하지만 다른 부분은 보수화가 가속화되어 행정적인 권한이 축소되거나 다른 역할을 하거나 전혀 발전하지 않는 행태를 보였다.
성묘 교회 주임사제[83]. 신성 왕국과 봉건 왕국의 중간쯤에 위치한 예루살렘 왕국의 정신적 지주. 수 백 년 만에 정식으로 복구된 동부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 기록에 남아 있는 초대 예루살렘 주교는 의인 야고보이며 638년 지위가 공석이 되었다.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이 성도 예루살렘을 해방되고 2주 뒤 8월 1일 명맥이 끊긴 지 장장 461년만에,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 라틴 기독교로는 처음으로 아르눌 드 쇼크가 초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왕의 대관식을 교황을 대신하여 집전하였고 왕의 머리에 성유를 들이붓는 역할을 했었다.
십자군 국가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 거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관직이었다. 군대 지휘는 물론 용병에게 임금 지불을 지시하거나 군사에 관한 법률 집행까지 맡았다. 따라서 군대 제1 지휘관이었으며, 왕국 내 치안 권한을 행사하며 거의 모든 기사들을 지휘했다. 또한 왕국의 경계와 국경도 결정하고 왕의 대관식에서는 왕의 말의 고삐를 잡는 역할을 했었다.
현대의 사령관이 가지는 존재감과는 달랐던 관직이다. 쉽게 말해 집정관이 다 하지 못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관직. 용병을 이끌고 기사들의 말을 담당하고 전투 후 전리품을 배포하는 일을 했다. 이래 보여도 군부의 2인자였다.
수상은 증서와 헌장을 작성하고 왕국의 외교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구성원은 소수의 비서와 서기관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당대 유럽 본토에서는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화살 빗발치는 왕국에서는 애초부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관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왕국의 수상들은 대개 주교나 대주교가 된 성직자가 겸임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듯 국왕의 대변인인 수상의 상대적 박탈감은 프랑스나 영국같은 국가들이 중앙 집권화 되는 것과 비교하여 예루살렘 왕권의 상대적 분권화를 상징한다.
  • 재무관(Sénéchaux)
중요 업무로는 대관식을 준비하고, 왕의 부재시에는 대의회 오트 쿠르를 감독하고 왕궁을 관리하며 왕국의 재정과 세입을 관리했다. 왕의 대관식에서는 왕권을 상징하는 왕홀(王笏)을 드는 역할을 했었다.
  • 의전관(Chambellans)
지엄한 왕실을 관리하고 그들의 행차를 보좌했다. 그리고 왕에 대한 기사들의 맹세같은 명예스러운 의전과 예법을 담당했다. 성서 관습법으로 임금으로 금전인 아닌 봉토를 받았다.
  • 집사(Bouteillers)
왕실의 요리사. 왕국이 고대로부터 포도가 넘치는 지역이라 왕립 포도원을 관리하며 최상급 포도주를 조달했다. 당대의 후덥지근한 나라를 통치하던 국왕들의 사망 요인으로 식중독과 이질이 만연했기에 생각보다 중요한 관직이었다.
  • 지명 섭정(Baillis)
왕의 부재, 예를 들어 보두앵 2세처럼 적들에게 포로로 잡히는 변고가 있을 시, 보두앵 4세처럼 병으로 인한 요양 시, 왕국을 대신 통치하는 직책이다. 이처럼 왕국 전반기에는 비 상설 직책이었으나 13세기 이후 독일의 왕들이 예루살렘 왕국을 상속받아 왕직을 겸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왕이 왕국에 영구히 거주하지 않은 외국인 군주가 즉위하면 왕국에서 가장 높은 직책이었다.
  • 자작과 성주 (Vicomtes, châtelains)
이 두 직책은 한사람이 겸임하거나 두사람이 직책을 나눠 가지거나 간간히 하나 또는 둘다 직책이 없어지기도 하는 비 상설 지위였다. 그들은 다윗의 탑 사무동에서 근무했으나 특정한 임무 대부분은 알려지지 않았고 특별히 중요 하지도 않았다. 밝혀진 자작의 의무 중 하나는 범죄자를 체포하고 시민 의회 쿠르 데 부르주아(Cour des Bourgeois)에서 재판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3.7.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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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군사

4.1. 기사단

4.1.1. 성전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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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구호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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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튜튼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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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기사단 중 가장 늦게 설립되었으며, 예루살렘 함락 이후 13세기 중반에 기사단의 주력은 프로이센으로 넘어가 북방 십자군 및 동방식민운동에서 주역을 맡게 된다.

5. 외교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성공에 따라 레반트 지역에는 여러 십자군 국가들이 성립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을 꼽을 수 있다. 예루살렘 왕국은 이들 국가의 종주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십자군 국가들은 예루살렘 왕국과 국왕에게 봉사하고 성지를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만 원래 이해 관계에 따라 제후들의 연합이 갈라지고 각각 십자군 국가를 창립했던 까닭에 상황에 따라 협력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실상은 서로 디스질하고 현피도 뜨는 막장 관계였다(...). 게다가 현지 제후들은 이슬람과 협력이 없으면 세력 유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새로 들어온 십자군 원정대나 유럽 본토의 교황 및 교회의 관계자들은 이슬람에 호전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국가 정책을 펼치는데 골머리를 썩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예루살렘 왕국의 정책도 어떨 때는 이슬람과의 화합을 도모하다가 갑자기 이슬람과 전쟁을 선언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제2차 십자군 원정인데, 안티오키아 공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던 알레포나 장기에게 갓 함락된 에데사를 탈환하여 십자군 국가의 방위 공백을 해결해야 했지만, 레반트의 상황에 대해 전혀 알못이던 십자군들은 엉뚱하게 예루살렘의 동맹인 다마스쿠스에 쳐들어갔고 그나마도 실패했다(...). 뭐, 2차 십자군 원정 종료 이후 동맹 관계 자체는 회복되었지만 예루살렘-다마스쿠스 간의 돈독한 우호 관계가 훼손되면서 결국 예루살렘의 중요한 방벽이던 다마스쿠스는 누레딘에게 허망하게 함락되어 예루살렘을 더욱 궁지로 몰게 된다.

5.1. 교황령

교황령과 예루살렘 왕국과의 관계는 사실 십자군 성립 전에 이미 종속이라는 정해진 수순이 있었다. 먼저 고대 시대에는 453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를 대신하여 일반적인 대사(Ambassador)보다는 상위급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전권을 다루는 대표자(Apocrisiarii)로 유사이래 존재해왔다. 하지만 중세 시대는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의 주체를 놓고 캐삭빵을 벌였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1077년 카노사의 굴욕 이후로, 교황 권력이 황제 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 왕국이 성립되는 1099년에 로마 주교좌는 전세계의 가톨릭을 믿는 모든 신자들의 주권적 실체가 인정되었다. 당대에 이미 일시적 또는 영구적인 임무를 위해 교황의 대사들을 왕국에 보내는 일이 빈번했고 왕과 영주들은 그들의 난입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니가 황제보다 잘났어?

이러한 배경과 같은 선상에서 1차 십자군의 중심에는 언제나 교황 대사 아데마르 주교가 있었다. 그는 성직에 몸 담기 전 명망있는 기사 가문인 발렌티누스(Valentinois) 백작가 장남으로 가족 형제들이 모두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말그대로 진짜 기사였다. 그러다 어떠한 이유로 성직의 길로 진로를 변경하여, 최근에는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갔다온 경험도 있었고[85] 실제로 아데마르 주교는 원정 내내 기사들과 함께 돌격하며 선봉에서 철퇴를 휘두르며 진두지휘를 했다. 아데마르가 여느 주교처럼 백면서생이었으면 그토록 살벌한 난이도의 캠페인에서 강력한 통솔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건 자명한 바, 십자군의 주창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그를 지목한 것은 예루살렘 왕국을 교황이 임명하는 라틴 총대주교 산하의 기독교 왕국을 위한 묘수이자 책략이었다. 하지만 그 소중한 아데마르가 안티오키아에서 병사할 것이라고는 교황도 예상하지 못했고, 그 구심점은 이후로 툴레즈의 레몽 4세 보에몽 1세, 그리고 고드프루아의 삼파전 양상을 띄었고, 종국에는 교황마저 십자군 원정의 성공 소식을 듣지 못하고 사망하니, 고드프루아의 성묘수호자라는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직책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신정제가 아닌 봉건제로 성립되어 버린다.

이후 교황령은 무수히 많은 계략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수권을 가져오려고 노력했지만, 하필이면 임무를 부여받은 추기경이나 대주교들이 현장의 상황판단은 차치하고서라도, 부패와 성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좌라는 권력욕으로 가득한 자들만 줄줄이 도착했다. 결국 십자군들의 반발심이 작용, 피로써 맺어진 전우들의 단합으로 라틴 총대주교의 부재 때에만 날치기로 왕들을 선출했고, 로마는 멀고, 애초에 예루살렘 성벽 밖에는 이교도들의 득시글거리던 암울한 상황이라 문서상의 권위를 내세울 수 없는 성직자들은 손쓸 도리가 없었다. 이후 다임베르트 다 피사 제2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는 예루살렘의 국왕이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등극한다는 교황령 입장에서는 궁색하기 짝이 없는 단서[86]를 가까스로 견지하고 통치권을 국왕에게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틴 총대주교는 부패 혐의로 탄핵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일단락된다. 이후 교황령은 예루살렘 왕국의 존립을 위한 서폿의 역할만 하게 되었으며, 교황령 2진을 꿈꿨던 성직자들은 입맛만 다시며 예루살렘에서 당도하는 사신들의 요구들을 말그대로 츤데레스럽게 들어주며, 이후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사절단이 올 때마다 언제 왕국을 넘길 거냐가 고정인사 치레가 되어버린다.

5.2. 동로마 제국

예루살렘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십자군이 첫 출발을 하는 상황에서 명목상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게 충성 맹세를 했기에 그들은 엄밀히 말하면 황제의 봉신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1세기 초의 상황에는 동로마 제국도, 십자군도 서로에게 간섭을 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동로마는 단지 유명무실한 작위를 십자군 공국들에게 내려주거나, 1071년의 참사 이후에도 제국에게 충성하고 있었던 몇몇 정교회 요새나 촌락들을 그들에게 양도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실제적으로 십자군이 동로마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은 동방 제국이 다시 강성해져 황혼기를 맞았던 12세기 중엽부터였다. 1130년대부터 요안니스 2세는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라타키아, 에데사 등의 우르트메르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다. 이 때 다시금 지중해 강자 타이틀을 되찾은 제국의 군대를 막을 수 있었던 세력은 기껏해야 십자군의 숙적 장기 왕조 뿐이었으므로, 당시의 십자군 군왕인 풀크는 50여년 전에 선조들이 알렉시오스 1세와 맺은 조약을 인정하고 제국이 안티오키아 일대를 지배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1140년대부터 1180년까지 수십년간 제국의 황제들이 안티오키아의 군대와 주교 서임권을 마구 휘두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십자군이 굴복하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노르만계 귀족들이 동로마령 킬리키아와 키프로스를 공격해 점령하기도 했다. 이들의 관계는 동로마가 동부 아나톨리아 해안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 13세기 이후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들의 관계는 더 오래 지속되었다. 제국은 십자군에게 곡물, 무기 등의 필수품 뿐만 아니라, 비단, 유리, 세공품 등의 가공 사치품 등을 수출했고, 십자군은 제국에게 후추, 상황, 육구두와 몰약 등의 동방에서 가져와야 하는 고가의 향신료를 수출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향신료 무역에 있어서 유력한 시장이 아니었다. 폰투스와 트레비존드를 거쳐 동로마 제국으로 향하는 실크로드의 향신료 양은 우리의 예상 밖으로 적었다. 12세기 ~ 13세기 향신료 물동량을 적은 기록을 보면, 동로마 전역에서 베네치아, 제노바로 가는 후추와 생강의 총량이 4백여 파운드에 불과한데 비해 [87] 십자군의 영역이었던 베이루트에서 베네치아, 제노바로 향한 향신료의 양은 연간 2천 파운드가 넘는 해도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트리폴리 백국의 시장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귀족들에게 향신료를 제공하고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제국이 향신료 무역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십자군 공국들이 붕괴된 13세기 말엽부터였다. 이때 당시, 내림세였던 제국의 경제가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의 상업 공화정에게 유린당하면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테살로니키 등이 국제 무역항으로 떠올랐던 이유는 바로 서방 세력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대항구 역할을 베이루트, 시돈, 트리폴리 등에게서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3세기까지 지지부진했던 로마인들의 향료 무역은 14세기가 되면서, 그리스인들의 국외 진출에 따라 수배 증가했다.

5.3. 종속국

예루살렘 왕국은 직할령으로 갈릴레아 공작령, 아크레, 아스칼론, 나블루스 등 여러 곳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딸린 남작들도 많았다. 하지만 세워진 기원이 다른 세 개의 십자군 군주국이 더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 등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 왕의 가신이었기는 하나, 半독립적 세력을 영위하며 각 지역에서 할거했다.

5.3.1. 안티오키아 공국

단순히 예루살렘 왕국의 종속국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곳인게, 이곳은 로마인들의 땅 아르메니아인들의 토후들과도 가까워 앞서 말한 세력들에게 지배당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안티오키아 공국을 속령으로 한 곳은, 안티오키아 시의 원 주인이기도 했던 동로마 제국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 보에몽 1세를 대파하면서 안티오키아를 동로마의 속령으로 하는 '데볼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안티오키아의 후임 공작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무시되었지만 공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훗날 세력을 회복해 중흥기를 맞은 동방 로마의 요안니스 2세가 우르트메르 원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안티오키아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 멜리장드, 풀크, 보두앵 3세 등의 십자군 영주들이 이를 용인하면서[88] 안티오키아에는 정교회 총대주교가 들어서고 동로마의 관리가 파견될 만큼 제국의 영향력이 강했지만, 나중에 서유럽 혐오자로 잘 알려진 안드로니코스 1세가 동방 제국을 열정적으로 말아먹으면서 다시금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본토 예루살렘이 살라흐 앗 딘에 의해 유린되는 동안 우르트메르에서 가장 큰 영지를 가진 공작령이 된 것도 덤.

두번째로 안티오키아를 지배한 국가는 바로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이다.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후 우르트메르의 십자군들은 동방 제국의 실력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제국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공작 보에몽 3세는 제국에서 독립을 천명하는 일환으로 마누일 황제의 조카 딸 테오도라 [89]를 소박 놓고 아르메니아 여인 시빌라를 들였다. 이를 통해서 그의 아들대부터 안티오키아 공작위의 핏줄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의 헤툼 왕조는 안티오키아의 주권을 놓고 보에몽 3세를 납치하거나 내전을 치르며 안티오키아를 무력 점령하는 등 공국을 반분해 통치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마누일 대제 당시 정교회와 교회 통합을 천명하던 아르메니아가 가톨릭에 호의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오히려 십자군 공국인 안티오키아와 그의 지지세력인 성전 기사단을 파문하고 나서며 안티오키아를 압박했고, 결국 이어지는 3차, 5차 ~ 6차 십자군 [90]에서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고 쪼그라들었다. 오히려 안티오키아 북부를 실효 지배하는 아르메니아의 헤툼, 뤼지냥 왕조의 왕과 제후들은 독일 황제가 이끄는 십자군에 초청받았을 정도...

5.3.2. 에데사 백국

에데사 백국은 1150년경에 멸망했지만 그 작위와 후손들은 아름아름 남아 예루살렘 정계에 영향을 미쳤다. 티베리아스의 레몽과 함께 기 드 뤼지냥의 세력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이후 실패. 마지막 후손은 아크레 공성전에서 언급되고 사라지고 만다.

5.3.3. 트리폴리 백국

트리폴리 백국은 성립 당시부터 예루살렘 왕국의 자치주였다. 백국의 사실상의 설립자인 1차 십자군 당시 가장 강력하고 권위가 높았지만 에데사, 안티오크와 예루살렘까지 다 놓치며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던 툴루즈의 레몽 4세. 그는 왕국이 성립되고 여리고를 시작으로 성경에 나오는 지역을 순례를 다니다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방랑하며 황제에게 신세 한탄까지 하는 지경이었다. 그는 아직 트리폴리의 어떤 부분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였지만서도 주변 성채를 점령한 기반으로 결국에는 조바심을 내며 자신이 트리폴리 백작임을 선포했다. 1105년, 그가 이끄는 마지막 처절한 돌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때맞추어 도착해 온 파티마 왕조의 지원 함대를 막을 해군전력이 없었던 십자군은, 결국 항구를 점령해내지 못하고 도시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노바 공국에 해상전력을 읍소하는 서신을 보낸 후 기다리던 차에 무슬림의 반격으로 1104년 9월 몬스 페레그리누스 성채의 한쪽에 화재가 났고, 레몽 자신은 옥상을 건너 탈출했지만 심하게 화상을 입었고 마지막 몇 달을 고통 속에 보냈다. 이미 고령이었던 레몽 4세는 트리폴리를 가질 모든 준비를 마친 그였으나, 결국 자신의 생애에서는 새 백국의 탄생을 지켜볼 수 없었다. 그는 트리폴리가 함락되기 직전인 1105년 2월 28일 부상으로 사망했다. 트리폴리 시를 가질 모든 준비를 마친 그였으나, 결국 자신의 생애에서는 새 백국의 탄생을 지켜볼 수 없었다.
이렇게 레몽 1세 트리폴리 점령 되기 직전에 병사했기에 그의 후계자들은 백국의 주장하는 당위성이 감소했었다. 설상가상으로 성립되지도 않은 백국의 후계자가 될려고 2명의 자식들이 파벌이 되어 다투는 상황이었다. 이후 제노바 공국의 지원으로 전쟁은 계속되어 트리폴리를 함락했고,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1세는 백국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지만, 직접적인 트리폴리 통치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후 트리폴리 백국은 예루살렘 왕국에게 기사의 충성 맹세와 더불어 경의를 바쳤고, 그 대가로 왕국은 백작령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원을 제공했다.

트리폴리 백작령의 영토는 당연하게도 무슬림과의 전투에서 승리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기본적으로 과거 동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을 고려되었고, 이웃 십자군 국가들의 요구에 의해 조정되었다. 전성기 영토의 해안선은 북쪽의 병원기사단이 있던 마라클레아에서 남쪽의 베이루트 해안선을 지배했고 내륙에서는 크라크 데 슈발리에(Krak Des Chevaliers) 요새까지 나아가 홈스 갭 지역의(Homs Gap) 비옥한 농업 지대인 라 보퀘(La Bocquée)[91]를 경작해서 십자군 국가의 곡창지대를 담당했다. 예루살렘 왕국이나 안티오크 공국처럼 급이 낮은 백작령은 하위로 영주령으로 나뉘어져있었고, 그 영지들은 대부분은 해안지역 항구와 동일했다. 백국의 통치자들은 트리폴리 항구와 그 주변 지역이 직할령이었고, 장기 왕조를 공격할 교두보로 동쪽의 최전선 지역에 위치한 몽페랑[92]성을 쌓고 지배했다. 백국 성립 당시에 트리폴리 주변에서 탈취한 땅의 약 1/4은 군사 지원에 대한 대가로 제노바 공화국에 주어졌다. 따라서 제노바의 제독 굴리에모 엠브리아코(Guglielmo Embriaco)는 비블로스를 양도받았다.

백국은 내륙으로 비록 방어에 취약한 해안 평야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너머의 안티리바누스 산맥과 골란 고원 주변은 트리폴리의 자연스러운 방어선이었기에 방어하기 위해 여러 성과 요새를 축성했다. 무슬림 군대가 국경을 따라 트리폴리 백작을 공격했는데, 대부분 동쪽에서의 침략이었다. 1137년에 재위 중이던 레몽 2세는 몽페랑의 지배권을 잃었고 하시샤신 군대가 북쪽의 노사이리 산맥 에 형성되면서 무슬림의 세력은 강화되었다. 그러다가 에데사 백국이 모술의 장기 왕조에게 털리면서 그 여파가 엄습해오자 1144년에 레몽 2세는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기사단에게 부하이아 평야를 따라 펼쳐진 광대한 국경 땅의 방어를 위임했다. 여기에는 크라크 데 슈발리에, 아나즈, 텔 칼라흐, 칼라트 엘 펠리스, 마르다베크의 성이 포함되었다. 1150년대에는 해안에 위치한 타르투스 에 기사단이 주둔하면서 방어가 더욱 강화되었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 예루살렘 왕국의 백국들은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의 지도를 따라야 했다. 그러나 폰스 백작은 안티오크와 동맹을 맺고 안티오크의 라틴 총대주교를 인정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이 불충을 교황청에 고자질했고, 이것에 반대하는 교황 칙령이 있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안티오크의 공국과 동로마 제국의 입김이 왕국보다 더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이렇듯 백국은 태생적으로 주변의 다른 나라들로 인하여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수 없었기에 타 국가의 권위에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많았다.

트리폴리 백국은 왕국보다 2년 전에 트리폴리가 함락되어 망했지만 잔존세력은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 이후로도 비블루스와 네페 등의 성들은 길버트 남작의 지휘 하에 10년을 더 항전했다. 그러나 이들의 항전도 명예롭게 항복하고 연공을 내는 조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가장 약한 십자군 국가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끝까지 항전한 십자국 세력이었다.

5.4. 소 아르메니아 왕국

킬리키아의 소 아르메니아 왕국은 십자군 국가들 중 가장 근접한 안티오키아 공국과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여러 차례 동맹과 침략을 반복했으며, 따라서 십자군 세력과 다소 마찰이 있기도 했다.

5.5. 파티마 왕조


5.6. 셀주크 제국


5.7. 아이유브 왕조


6. 사회

6.1. 민족

레반트 지역의 토착민들은 베두인, 시리아인, 이집트인, 투르코만 등이 함께 무슬림이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급작스럽고도 과격한 방법으로 나타난 십자군 제후국들은 향후 어떻게 절대 다수의 이교도 피지배 계급 사회를 억누르고 유지해 나갈 것인가가 주요 이슈였다. 셀주크 튀르크 파티마 왕조, 동로마 제국의 경쟁 관계 속에 기적처럼 비집고 들어온 낯선 이방인들은 이슬람세력들의 견제를 받을 것이 자명해 보였다. 20세기 전반까지의 연구는 대부분 예루살렘 왕국과 3개의 종속국은 나름대로 잘 통합된 사회였다고 주장했지만, 후반에 이르자 이를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적 입장이라고 비판하면서 지배층인 십자군과 피지배층인 토착민 사이의 철저한 분리와 괴리감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는 십자군 성채를 중심으로 한 도시와 토착 농촌의 지리적 분리 와도 대개 일치한다고 보았다. 물론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상하 관계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일대의 여러 정교회 종파, 유대인, 무슬림이 지역에 따라 다양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종교적으로 결집된 마을도, 상업적으로 번창하여 여러 종교와 공존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었다. 따라서 제1차 십자군의 단순하기 그지없는 기독교와 불신자 이교도의 이분법은 이후 이 지역의 통치에 전혀 적용될 수 없었다.

6.2. 문화

유럽 대륙에서 지속적이고도 다양한 예루살렘 왕국으로의 라틴 기독교인 유입에도 불구하고 무슬림과 유대인, 십자군 이전의 토착 기독교인 같은 여러 피지배층의 인구는 압도적일수밖에 없었다. 지배층은 정기적으로 술탄들과 투쟁을 벌였지만 그렇다고 피지배 민족들이 타국과 배타적인 방식으로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12세기 예루살렘 왕국의 역사가이자 성직자인 기욤 드 티레는 기독교 지배층이 동향의 의사들보다는 이슬람이나 유대인 의사들을 더 신뢰하고 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십자군은 서유럽 봉건 사회의 틀을 이식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현실적으로 피지배층 각자 자신들의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 통치 제도들을 유지해 나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세대가 거듭될수록 레반트 지역에서 태어난 2세대 십자군들은 오히려 토착 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양상을 띄게 된다. 기독교 예루살렘 십자군은 중세 유럽의 표준 언어인 라틴어를 제외하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같은 모국어로 의사 소통을 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아랍어조차도 정착민이 사용했다. 예루살렘이 기독교로 해방되고 서유럽의 문화를 비롯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업 문화, 동로마 제국 정교회의 문화가 봇물 터지듯 유입되자 중동 무슬림 문화와 뒤섞여 우트르메르(Outremer)라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됐다. 본래 ' 우트르메르'는 '해외의', '바다 건너의'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단어로, 제1차 십자군의 결과로 설립된 예루살렘 왕국과 3개의 종속국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이후에 동방의 십자군 국가뿐만 아니라 성지 그 자체를 의미로 변하기도 했다.

6.3. 교육

예루살렘은 당연하게도 왕국 교육의 중심지였다. 성묘 교회에는 라틴어 어학소가 있었고,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의 자제들이 함께 공부하며 예루살렘 왕국의 중요한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기욤 드 티레와 보두앵 3세는 어릴 적부터 동창생으로 같이 생활했다. 이곳은 중세 대학의 고등교육 중심지 중 한 곳이었지만, 십자군 치하의 예루살렘이라는 상황이 잦은 전란으로 전쟁이라는 화두가 신학 철학보다 중요했기에 괄목할 정도의 학문 발전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법률가와 서기 사무원같은 고급 인력들이 풍부했으며, 왕족과 귀족 지배자들은 뛰어난 문해력을 자랑했고, 법률과 역사, 다양한 학문적 주제를 연구하는 것이 그들이 즐기는 취미였다. 성묘 교회에 왕립 필경소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극도로 화려하게 치장된 국가의 헌장같은 공문서와 주요 문서를 생산했다.

6.4. 의료

수많은 순례자들이 지속적으로 예루살렘을 순례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환자들도 많이 발생했다. 구호기사단 역시 이름대로 병들고 약해진 순례자들을 보살폈고, 병원은 종교적 자선을 위해 건립되어 의사와 약제사, 수녀들이 종사했지만 모든 진료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무상으로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봉사 행위였다. 하지만 일손 부족으로 일반인들의 혜택은 진료보다는 수용 시설 같았고, 중세 시대 의료는 귀족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나마도 방혈법이 자주 애용되었고[93] 또한, 고위층의 여성들은 흑사병 같은 피부발진을 일으키는 전염병을 방지하려는 믿음으로 헤나같은 재료로 피부가 드러나는 부분에 아름답게 점을 찍는 화장술이 유행하기도 했다.

6.5.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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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 교회 돔. 아래는 성묘 교회의 핵심인 예수의 무덤 상부를 보호하는 대리석 구조물 에디큘레(Edic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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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 교회의 평면도 (1807년)
예루살렘 왕국의 가장 위대한 건축적 노력은 서유럽 고딕 양식으로 크게 리모델링한 성묘 교회이다. 이 확장된 건축물은 예루살렘과 근교 여기저기에 수 세기동안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훼손된 성소들을 통합하여, 1149년 완공되었다. 우트르메르의 십자군이 중동 레반트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건설은 역시 성채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케락(Kerak)과 울트레주르뎅의 몽레알, 야파의 이벨린, 하틴의 뿔 부근의 이중 성벽으로 유명한 벨부아(Belvoir)같은 성채는 난공불락이자 뛰어난 건축물이었다. 크락 데 슈발리에는 그 중 백미 중의 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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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부터 크락 데 슈발리에, 이벨린[94]

6.6. 예술

십자군 예술은 서유럽, 동로마, 이슬람의 혼합체인 우트르메르(Outremer) 스타일이었다. 주요 도시에는 목욕탕과 실내 배관이 설치되었고, 진보된 위생 도구가 구비되고 그 실내는 동로마풍 모자이크 회화로 장식되었다. 가장 중요한 예술품은 금과 값비싼 파란색 보석 안료인 코발트로 채색해서 빛나는 일루미네이티 메뉴스트립(Illuminated manuscript) 스타일의 멜리장드 시편 양장본과, 나자렛의 기둥머리(Nazareth Capitals)을 들 수 있다. 모자이크 회화는 왕국에서 대중적인 형태의 예술이었지만, 이들 중 많은 부분이 13세기 맘루크에 의해 파괴되어지고 석고로 덧발라져 사라졌다. 가장 내구성이 강한 요새만이 이교도들의 천년 통치 아래에서도 유사시의 전략적 요충지로 살아남았다.
파일:Nazareth_Capitals.jpg
나사렛의 주두(기둥 머리)중 팔각형의 모양으로 사도 베드로, 야고보, 마태오 토마스의 생애 장면을 표현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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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장드의 시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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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장드의 시편 내용

7. 경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은 상당히 척박한 지역에 건설된 국가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보급을 서유럽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따라서 자급자족이 시급했는데 예루살렘 왕국의 시골에서는 , 보리, 류, 올리브, 포도, 대추야자가 재배되어 소비되었고, 유럽과 중동의 중계 무역을 기반으로 상업 공화국들과 결합되어 상업적인 경제 발전이 크게 중요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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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성묘 교회 문양의 데니어(Denier). 가운데는 동로마 제국의 베잔트(Bezant). 오른쪽은 십자가 문양의 디나르(dinars).
예루살렘은 유럽과 아시아 무역의 십자로였고, 유럽에서 십자군의 갑옷과 북유럽의 모직물 제품을, 중동에서 고급품들을 중계 무역했다. 특히 고가였고 술탄정도의 계급이나 걸칠 수 있었던 호화로운 다마스쿠스산 옷감이 유럽 전역의 성채로 빨려 들어갔다. 그 유명한 페르시아 양탄자는 유럽에서 대저택의 어둠침침한 벽에서 테파스트리가 되어 벽 전체를 도배하는 돈지랄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향신료는 예루살렘 정복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믿었을 정도로 식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돈이라면 알라도 밀친다는 아랍 상인들은 이 거대한 시장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며 꿀을 빨았다. 십자군 예루살렘과의 무역을 통해 유럽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또다른 품목들로는 오렌지와 설탕이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사 공화국, 후대의 한자 동맹 또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95] 여담으로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이 예루살렘 왕국과의 'Pactum Warmundi'라는 상업 조약으로 쌍방이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보장받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이탈리아 상인들은 꾸준한 수익을 얻기 위해서 다양한 분야에 분산 투자를 감행했다. 따라서 자본이 늘려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콜레간차'라는 자금 연대를 이용하여 투자를 강화해 나갔다. 이 연대에 교역업이나 운송업에 관련 없는 자들 - 이를테면, 의지할 사람 없는 과부나 매춘부 - 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돈 있으면 다 참가가 가능해서 현대 주식 제도의 근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예루살렘은 특히 비단, 면화 향신료 무역에 주로 관여했고 그로 인하여 걷히는 세금으로 왕국을 유지했다. 주변 도시들에게 공물 지불을 통해 돈을 걷었는데, 처음에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해안 도시에서 공물을 거뒀고 나중에는 십자군이 직접적으로 정복할 수 없었던 다마스쿠스와 이집트와 같은 다른 인접 국가에서 거두기도 했다. 시리아에서 이집트나 아라비아로 가는 무슬림 캐러밴에 대한 통행세도 빼먹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이러한 경제력으로 인력 부족이라는 갈증을 용병을 고용하는 비용으로 지불함으로써 부분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용병은 유럽의 십자군이나 유명한 투르코폴레스(Turcopoles)라 불리는 현지 투르크계 용병을 포함한 무슬림 병사도 있었다.

도로망이 특별히 개발되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을 지나는 고대 무역 경로를 활용한 중계 무역이 번성해 왕국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었다. 그들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왕국의 남동부를 통과하는 중요한 경로를 개방하여 무역 통로로 활용했고 이 길은 이슬람 순례자들의 메카 순례 경로로도 사용되었다.

8. 지리 및 기후

성경은 ‘ 가나안 땅’이라 하고 지리학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팔레스티나(곧 ‘필리스티아인들의 땅’)라 일컫는 이스라엘의 땅은 지리적으로 ‘비옥한 초승달’이라 불리는 넓은 지대의 한 작은 지역을 가리킨다. 실제로 활 모양을 한 이 지대의 중심부에는, 옛날에는 거의 지나갈 수 없었던 지역, 곧 아라비아 반도 북쪽에 있는 시리아 사막의 고원이 자리잡고 있다. ...... 초승달 지대의 경계 안쪽은 사막과 이어지는 반사막 지역으로 이루어진 반면, 바깥쪽에는 이란 고원, 아르메니아, 타우루스 산맥과 같은 산악 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 초승달 지대에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는 가장 비좁은 지역인데, 지중해와 사막 사이에 낀 폭이 채 백 킬로미터가 안 되는 통로로서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계곡을 이어 준다.

초승달 지대는 일찍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여러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나일 강의 계곡과 삼각주, 그리고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하류에 집중되었다. 이 두 지역 사이에는 왕래 또한 빈번했는데, 그 기본 도로는 유프라테스 강을 따르다가 팔미라와 다마스쿠스를 거쳐 시리아를 지나고, 므기또와 야포를 거쳐 팔레스티나를 통과한 다음, 가자와 라피아를 거쳐 이집트에 다다랐다. 이와는 달리 사막 가장자리에 있는 다마스쿠스에서 요르단 동쪽 길을 잡으면 아라비아와 에일라트에 이르고, 여기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이집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운송을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노선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직접 페니키아의 항구(비블로스, 시돈, 티로)로 가서 바다를 건너 이집트로 향하는 길이었다. 상인들과 군인들이 이러한 대로를 통하여 왕래하였으며, 여러 사상들 또한 전파되어 나갔다.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 성경》 #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명대사인 "Nothing, Everyting" 때문에 물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는(Nothing) 곳이 종교적인 이유로 과분한 위상(Everything)을 얻은 것이라 지레짐작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애초에 살라딘이 한 말은 당연히 그런 뜻이 아닌 데다가, 예루살렘 부근은 전통적으로 명분과 경제적 측면에서 정말 중요한 땅이다.[96]

근동의 인문지리를 보면, 일찍부터 문명이 발달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를 양 끝쪽으로 하여서 도시들이 메갈로폴리스처럼 이어져있다. 이 모양이 마치 초승달 같다고 하여 '비옥한 초승달'이라 불리는데, 이 초승달의 서남쪽 좁은 통로가 바로 가나안이고, 실질적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잇는 '유일하고도 좁은' 통로가 가나안이며, 가나안을 통과하지 않고 초승달 안쪽을 통과하겠다는 것은 곧 사막을 통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라크 지역의 흥망성쇠 등 역사적 변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근동의 야간 위성사진에서는 이러한 초승달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난다.

요약하자면 예루살렘의 인문지리는 교통과 물류의 요충지라 할 수 있고[97] 경제적 의미에서라도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소리를 듣기 충분했다. 더 나아가, 예루살렘 왕국은 티레를 포함해서 레반트 지역의 해안가를 차지했기에 더더욱 경제적 가치는 올라간다. 문제는 이러한 물류 요충지이기에 (종교적 이유를 논외로 하더라도) 근동의 허리를 뚫고 들어온 외부 세력인 예루살렘 왕국은 그만큼 외교 난이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살기 좋은 지역은 좁게 한정되어 있었고, 이 좁은 지역을 벗어나면 성경에서 '광야'라고 표현된 척박한 자연환경이 나왔다. 강이라고는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요르단 강만 있었고 대부분 와디라고 부르는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마른 계곡이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지형은 갈릴레아와 골란까지는 산악이었고 브엘세바 헤브론 남쪽인 네게브 사막과 요르단 강 동쪽 울트레주르뎅은 사막이었고, 트리폴리 백국은 해안 지역이라 예루살렘 지역과 비슷했다. 안티오키아 공국과 에데사 백국은 예루살렘 왕국 보다야 비옥했지만, 대체로 방목을 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기에 왕국의 기마병이 사용하는 말을 쉽게 기를 수 있었다. 기후는 큰 차이는 없었지만 풍경은 현재와 약간 다른데, 개발이 되지 않은 땅에 숲이 우거져 많은 야생 동물이 활보하는 환경이었다.

8.1. 지리

예루살렘 왕국은 현 이스라엘과 비슷한 영토였고, 이 가운데 약 60%가 네게브(Negeb) 지역이다. 네게브는 이스라엘 남부, 헤브론 아랫 지방으로, 거의 전 지역이 사막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예루살렘 왕국 대다수 지역이 메마르고 황량한 땅이었으나 수도 예루살렘은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대(the Fertile Crescent Zone)라고 불리는 지대에 속해, 서쪽에 요르단 강이 흐르고 곳곳에 샘이 있어 비교적 비옥한 축에 속했다.

자연 지형으로 보면 트리폴리 백국의 아셀 해안은 카르멜 산 남쪽 도르(Dor) 해안에서 북쪽 페니키아의 시돈까지 이르는 해안 지방으로 땅이 기름지고 소산이 풍부했다. 에스드라엘론 평야(Plain of Esdraelon)는 카르멜 산 기슭의 욕느암(Jokneam)에서 동남쪽 엔간님(Engannim)에 이르는 32 km를 밑변으로 하고, 엔간님에서 북쪽으로 28km 떨어진 아풀라(Afula)를 정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대평야다. 이 곳은 예루살렘의 북쪽이자 갈릴레아 주 남쪽으로 가장 비옥하며, 최대의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샤론 평야(Plain of Sharon)는 북부의 갈멜 산맥 부근의 하이파에서부터 욥바(Joppa)[98]에 이르는 해안 평야로, 면적이 약 1,024㎢나 되는 좋은 목축지대다. 쉐펠라 구릉지대는 필리스티아 평야와 유다 고지 사이의 구릉지대로, 남북 길이 45km, 동서 너비 평균 16km로, 이 지대에는 크고 작은 계곡 45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아얄론(Ajalon) 계곡, 소렉(Sorek) 계곡, 엘라(Elah) 계곡이다. 이 곳에는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 등이 고대부터 재배되었으며, 양과 염소가 가축으로 많이 사육되었다.

8.2. 기후

예루살렘 왕국 시절 기후와 현대의 기후는 역사 기록을 대조해보면 차이가 거의 없기에 현재의 정보로 자세히 유추해 볼 수 있다.

왕국의 서해안은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고온 건조하고 겨울은 온화하며 비가 많이 내린다. 강수량은 북부가 비교적 많은 편이나 남부 지역은 대체로 없다고 해도 맞다. 북부 지역( 갈릴래아)의 연평균 강수량은 800mm 이상, 중부 지역(사마리아)은 600mm - 700mm, 남부 지역(유다)은 300mm - 600mm, 네게브 지역은 200mm 이하다. 현재 이스라엘의 연 강수량을 보면 농경이 불가능한 300mm 이하의 지역이 전체의 약 58%이며, 그 중 25%는 100mm 미만이지만, 이는 대부분 시온 광야인 네게브 지역에 해당한다. 그런데, 네게브라고 해서 농경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고대에는 네게브 일부 지역에서 포도가 재배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기후의 특성 상 이슬이 많기 때문에 여름 건조기에도 아침, 저녁으로 수분을 공급해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다.

갈릴래아 고원은 비교적 강우량이 많은 지역으로 상부 갈릴레아는 샘이 많고 삼림이 울창하였으며, 갈릴래아 호수가 있는 하부 갈릴래아는 토지가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여 상대적으로 농업이 발달하였다. 사마리아는 해발 900m의 고지대로, 밀과 올리브, 포도 등의 재배가 성하였으며, 목축지가 광대한 면적을 차지했다. 특히 중앙부 스켐(Shechem) 분수령 이남의 에브라임 산지는 좋은 농경지대다. 유다 고지는 포도 지배의 최적지(특히 헤브론)로, 에스골 골짜기가 바로 이 지역에 있다. 그러나 유다 산지와 사해와의 사이에 펼쳐 있는 유다 광야는 매우 건조하여, 나무가 자라지 못했다. 따라서 왕국이 물이 풍부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밀과 보리 등의 곡물과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등의 과실수의 소산지였다. 모세가 정탐꾼을 보냈던 에스골 골짜기(Valley of Eshcol)에는 포도와 석류 그리고 무화과가 제배가 가능하였었는데 에스골은 포도송이의 골짜기란 뜻으로 헤브론의 북서쪽 약 5㎞ 지점에 위치한 비옥한 골짜기다. 골짜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할은 단순한 개울이나 겨울 우기(11~3월경)에만 흐르는 와디(wadi)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그곳은 과일 농사에 적합한 곳으로 농작에 필요한 수분 공급이 충분한 곳임을 알 수 있다. 포도가 지명으로 불리게 될 정도로 이곳은 무게가 4kg ~ 5kg이나 나가는 포도송이가 날 정도로 농사가 잘되던 곳이었으며, 석류와 무화과나무가 풍성할 정도로 각종 농산물에 적합한 곳이었다. 지금도 이곳은 가나안에서 가장 좋은 품질의 포도를 생산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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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색이 예루살렘 왕국 직할령이고 노랑색은 에데사 백국, 파란색은 안티오키아 공국, 빨간색은 트리폴리 백국, 주황색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공국이다. [2] 예루살렘 공작령( 유다 주, 사마리아 주) [3] 콘라딘 처형 이후 [4] 남성 우선 장자 상속제 [5] 이등시민 대우를 받기는 했으나, 유대인처럼 마구 학살당하지는 않았다. [6] 라틴어로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뜻. 고전 라틴어는 U와 V를 구분하지 않고 전부 V로 쓴다. [7] 라틴어가 공용어였지만 대부분 미사나 공문서에서만 사용되었고, 주류 프랑크인이 쓰는 통상적인 언어는 중세 프랑스어이며, 그 외에도 수많은 순례자가 모여들어서 유럽 전역의 언어와 다양한 토착 언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성묘교회에서는 라틴어 학습소 외에 아랍어와 중세 그리스어도 가르쳤다. [8] 이슬람 제국 통화 [9] 동로마 제국 통화 [10] 템플릿사진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Kingdom_of_Jerusalem, https://en.wikipedia.org/wiki/Kingdom_of_Jerusalem, https://en.wikipedia.org/wiki/Kingdom_of_Jerusalem [11] 단, 이 문장은 라틴어 문법상 비문인데, LO라는 단어가 고전 라틴어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 로망스어 대명사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며, 고전 라틴어 문법에 맞게 고치자면 Deus id vult가 된다. [12] 출처: Montefiore, Simon Sebag. Jerusalem : the Biography. p.222. [13] 성직자들은 예루살렘을 교황청의 영향에 두기 위하여 애초에 국왕을 뽑는 고려조차 하지 않고 총대주교 산하의 신성왕국을 생각하고 있었다. [14] 어떤 게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위치가 확인되는 성창은 최소 3개 이상이다. [15]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칭호는 초대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스스로를 칭하는 데 썼던 단어다. [16] 훗날 갈릴레아 공작의 지위를 얻고,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이 된다. [17] 참고로 마르멜로의 재배시기는 사과의 재배시기와 거의 비슷하거나 앞섰다고 보고 있으며, 그리스 시절부터 먹어왔다고 한다. 고대 유럽 문헌에서 사과(Apple)라고 써진 것은 사실 마르멜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특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황금사과도 사실 이 마르멜로를 가리키는 게 아니냐는 말이 있을 정도. 독이 든 사과라는 클리셰가 역사에 최초로 언급되는 부분이다. [18] 프랑스 국왕의 백합문양이 사실은 예수를 뜻하는 물고기의 형상이라고 하더라 [19] 천주교 미사(MASS) 마침 예식(Ritus Conclusionis) 중 파견부분 [20] 외할머니의 큰오빠의 손자. 외재종형제(外再從兄弟) [21] 1101년, 1102년, 1105년 3번의 침략전쟁을 람라에서 요격하여 물리침. [22] 케락의 성채는 후대의 풀크가 건설한다. [23] 고드프루아보다 형이고 보두앵 1세가 막내였다. 3형제가 모두 십자군에 종군했지만 큰형은 유럽의 영지를 관리하러 귀국했다. [24] 부활절 보내려 왔다가 왕으로 등극한 것인데, 역사가들은 모종의 술수로 선왕들의 큰형에게서 왕위를 찬탈했다고 기록한다. [25] 살라흐 앗 딘의 장군 우사마의 아버지 [26] 아타리브, 제르다나, 사르민, 마아라트 알누만, 카프르 타브 [27] 당대 최고의 가톨릭 유명인물. 제자가 교황 에우제니오 3세가 되고 열성적인 활동과 엄격한 수도생활로 위세가 대단했다. 2차 십자군에게 설교했으며, 정통 교리에 철저하고 격렬한 성격은 풍부한 성서 지식과 함께 그를 신비 신학자로 발전하게 했다. [28] 보두엥 2세는 사실 에데사 백국 시절에도 포로로 잡혔던 경험이 있었다. [29] 이 시점에서는 성채는 아직 건설되지 않아 작은 촌락에 불과했다. [30] 섭정직의 외스타슈 그레니에와 로만 르 르 퓌(Roman de Le Puy)가 그 파벌의 우두머리였다. [31] 예루살렘 왕국의 여왕, 즉 보두앵 2세의 아내 [32] 루이 6세는 당시 왕좌를 넘볼 정도로 권력이 비대해진 풀크와 정치적 라이벌이었는데 이참에 동방으로 보낼 심상으로 풀크를 추천했다. [33] 군대를 운용하는 에미르를 호칭하는 직책 [34] 당시 유럽 귀족들에게 '이교도에게 포위되어 있는 데다가 전쟁이 한참인데 여자가 왕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냐?' 정도로 치부됐다. [35] 간단히 말자면 결혼을 통한 확장을 한 것이다 [36] 이 시절에 만들어진 십자군 시대의 각종 보물과 성채가 아직까지 현존하는 것이 많다. [37] 기욤이 멜리장드의 아들 보두앵 3세의 동창생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하는 기록이지만 남은 기록이 많지 않다 [38] 훗날 울트레주르뎅의 공작이자 7대 성전 기사단장이 된다 [39] 집정관은 예루살렘 왕국 6대신 중 한 명으로 현대의 대원수 + 경찰청장급이다. 군부 1인자이자 왕의 대관식 때 상징적으로 왕의 말고삐를 잡을 정도의 최측근이었다. 치안관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40] 보두앵 3세는 30대 초반에 돌연 병사했는데 결론적으론 죽기 1년 전에 멜리장드가 죽어 섭정기간을 제외하면 단독 재위기간은 1년이다. 가히 중세판 찰스 왕세자라 할 만하다. [41] Balian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이탈리아 태생으로 여겨지며 본래 야파의 백작 수하의 하급 기사였는데 백작이 반란을 일으키자 결정적일 때 뒤에서 통수를 쳐서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운다. 풀크에게 보답으로 야파 백작령 내의 이벨린 성채를 하사받고 남작 지위를 받는다. 이번에도 주군을 갈아탐으로써 지위가 매번 수직 상승하는데 수완이 좋아 양측 모두에게 존중을 받는다. 왕좌의 게임 브론 타입. [42] 이건 전적으로 2차 십자군의 자업자득인데, 이때 일로 단단히 감정 상한 다마스쿠스 주민들은 다마스쿠스는 중립 도시라고 하며 예루살렘 왕국에 아무런 보복을 가하지 않은 성주에게 단단히 빡쳐서 성주를 죽이고 그대로 누르 앗 딘에게 항복했다. '한스 에버하드 메이어'라는 현대 역사가는 2차 십자군의 다마스쿠스 공격을 두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머저리 같은 결정(incredibly stupid decision to attack Damascus'이라고 일축했다. [43] 보두앵 2세의 딸 알리스의 딸이라 보두앵 3세와는 사촌지간 [44] 르노 드 샤티용은 마누일 1세의 말 고삐 잡이로 말도 못 타고 걸어서 들어가는 개굴욕을 당한다. [45] 르노의 상태가 상당히 미화 되어있다. 사실은 베옷을 입고 산발에 맨발이었다. [46] 1149년 콩스탕스의 첫 번째 남편 레몽 드 푸아티에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47] 선왕 보두앵 2세의 아내이자 예루살렘의 여왕 모르피아는 성묘 교회에 안치되었던 남편과 떨어져 성모 마리아의 무덤에 매장되었는데 그것이 이후 여성 왕족들은 성모 마리아의 교회에 안식하게 되는 선례의 시작이었다. [48] 그리스도가 겟세마네 동산의 암굴에서 고뇌하는 기도를 밤새 행했다는 성지 [49] 7촌 사이. 아녜스가 손위 뻘이다. [50] 발리앙 디블랭의 큰형 [51] 지진으로 많이 파괴되었지만 이 시절에는 건재했었다. [52] 살라흐 앗 딘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최근 대중문화에서 보여주는 살라흐 앗 딘 이미지는 킹덤 오브 헤븐에서 가산 마수드가 연기한 살라흐 앗 딘이 기본 토대라고 해도 될 정도다. 이전에는 전쟁기의 강력한 무인 같은 모습을 많이 보여줬지만 킹덤 오브 헤븐 이후로는 호리호리하고 카리스마 있는 문인 적인 모습이 더 부각된다. [53] 유수프가 본명이고 아이유브는 가문명, 다른건 술탄이 되었을 때 붙은 찬사명이다. 예로 살라흐 앗 딘은 정의(살라흐)와 신념(딘)이라는 뜻이고 유수프는 요셉 아이유브는 욥의 이슬람식 읽기이다. 아브라함 종교의 공통분모. [54] 현대는 극심한 병세가 아니라면 리팜핀(리팜피신) 600mg을 1회만 복용하고 여러가지 항생제를 삼키면 완치가 되어 버린다. [55] 아이들 몸과 얼굴에 멍이 잔뜩 들어있고 보두앵이 상대편 아이의 볼을 잡고 심판인 듯한 아이가 손을 들고 있다. [56] 역사 기록자 기욤 드 티레가 라틴 예루살렘 총대주교에 당선 직전 야지를 놓은 게 왕의 모후 아녜스라는 걸 감안하고 보자. [57] 울트레주르뎅 공작 필립 드 밀리(Philippe de Milly)의 딸. 보두앵 4세의 첫번째 섭정 밀 드 플랑시의 부인이었다. 그전에는 험프리 드 토롱의 아내. 르노 드 샤티용이 3번째 남편 [58] 킹덤 오브 헤븐 영화에서는 레몽 3세가 발리앙을 시빌라 남편감으로 밀지만 사실은 형 보두앵이었다. [59]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후반부 예루살렘 공방전 바로 이 때를 배경으로 한다. [60] 이벨린의 발리앙과 재혼한 상태이기도 했다. [61] 정확히는 앙리 황제의 누나이자 앙리 황제 사후 라틴 제국의 섭정직에 오르는 욜란다의 딸이었다. [62] 당시 기사는 각 한 명에 그에 따른 종자, 부대 병사와 보급 부대를 생각하면 수 만의 군대이다. 이름 있는 장교 급만 총 3천 명을 동원하라는 건 대군을 일으키라는 뜻 [63] 다만 성전산 일대는 계속 무슬림 소유로 남았으며반환지 내 거주하는 무슬림들의 자치 및 예루살렘의 통행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64] 마누일 2세의 황후와는 동명이인으로 다른 사람이다. [65] 그 외에도 십자군원정에 참여했던 프랑스 귀족들의 방계자손들이 권리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라 아무도 왕위 요구를 하고 있지는 않다. [66] 앙주 왕가의 마지막 군주인 이사벨 1세의 손녀이다. [67] 시기별로 각 장소의 명칭이 천차만별이므로 여기서 구별을 하자면 알아크사 또는 마바드 알 쿠드스는 성전산(Temple Mount) 전체를 뜻하며, 알 아크사 모스크는 솔로몬의 사원,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만 뜻한다. 바위의 돔은 템플럼 도미니(TEMPIUM DOMINI), 신의 사원이라고 구별했다. [68] 회의는 1월 16일 1월 23일에 문서 작성 [69] 타락의 도시 소돔 고모라의 그 소돔인데, 수간과 출산이 아닌 쾌락적 성행위, 남색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70] 십자군이 레반트 지역에 눌러앉으면서 유럽에 있는 가족들을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71] 십자군 국가에게는 주요한 관심사였다. 성직자는 일반적으로 유럽의 세속적인 전쟁에는 가담할 수 없었는데, 십자군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고, 1년 전,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대가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전멸하는 불상사가 터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티오키아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손까지 빌려야 할 상황이었다. 여기서 정방 당위로 성직자가 무기를 드는 것은 용인한다.가 부칙으로 언급되었는데 이 특이 사항으로 무슬림에게 포위당한 예루살렘 왕국의 성직자들도 무기를 들고 전쟁에 나설수 있는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72] 동로마 제국의 금화 단위 [73] 시온 광야는 사해와 홍해 아카바(Aqaba) 항구 사이의 광활한 광야지대로서 오늘날의 네게브 지역이다. [74] 하맛 어귀는 하맛 입구라는 뜻으로, 가나안 땅에서 고대 하맛 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말한다. 하맛 왕국은 십자군 시대 당시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오론테스 지역이다. [75] 가데스 바네아 부근에 위치 [76] St. Abraham [77] Tebnine [78] Maron [79] Ashdod [80] Gadres [81] Shobak [82] Ahamant [83] 중세 서방 교회에서는 교구장 주교가 주교좌성당의 주임사제를 겸하였다. 지금도 성공회에 남아있는 전통이다. [84] 치안관이라고 번역되지만 그러면 군대 대원수 + 고등 군사 재판관 + 경찰청장을 겸하는 중책이 어감상 와 닿지 않는다. [85] 당시 십자군의 당위성에는 성지로 가는 길목이 차단되고 순례자들을 잔혹하게 죽인다는 명분이 가장 크게 작용되었는데 혹세무민의 조작 된 명분이었다. 애초에 그 먼 길의 경비를 감당할 일반인들은 있을 수가 없긴 하니 대부분 그 끔직하고도 참혹한 주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86]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베들레헴 등극 단서 조건도 보두앵 1세 시절의 1회성으로 끝남. [87] 심지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노바로 향하는 후추의 양은 연간 0파운드에 가까울 정도. [88] 물론 그러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요안니스가 이끌고 온 로마인들의 군대는 장기 왕조에 대해 저지력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깝댈수가 없는 상황... 실제로 장기는 요안니스와 마누일이 군대를 끌고 오면 항상 저자세로 나왔다. [89] 보두앵 3세와 결혼한 테오도라와는 다른 인물이다. [90] 4차 십자군은 재앙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었으므로 논외 [91] 한 움큼 [92] 오늘날의 시리아 바린 [93] 방혈법은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 고대 로마의 의학자 갈레노스에 의해 도입된 치료법이다. 갈레노스의 이론은 중세 내내 의학계를 지배했고 이븐 시나를 비롯한 이슬람 의사들도 그 영향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피 뽑는 건 이슬람 의사들도 똑같았다(...) [94] 탑이 하나만 남은 모습인데, 원래 있던 성의 일부만 남은 것이다. [95] 애초에 상인 공화국들이 상선을 십자군에게 임대(당연히 공짜가 아니다...) 해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 [96] 해당 오해에 더 걸맞은 곳은 메카라는 의견도 있다. 레반트 지역은 고대에도 꿀땅이었고 지금도 꿀땅이지만, 아라비아는 석유 대박이 뜨기전에는 근동 역사의 변방에 불과했다. 메카의 물질적 가치가 없는 건 아니지만, 무함마드 이전의 역대 근동 제국들, 곧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헬레니즘 제국, 로마 제국, 파르티아, 사산 페르시아는 메카를 차지하지 않았으며, 근동 제국들이 탐내던 이집트-레반트-시리아-메소포타미아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초승달에는 메카가 들어있지 않았다. [97] 간혹 가나안을 이집트랑 비교하며 척박하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집트는 지구에서 가장 축복받은 농토 중 하나다. 비교대상이 잘못된 셈. [98] '아름다운'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야파(Jaffa)의 고대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