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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신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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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5년 ~ 기원전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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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신왕국
New Kingdom of Egypt
파일:external/www.ancient.eu/538.png
이집트 신왕국의 영토
기원전 1550년 ~ 기원전 1077년
위치 이집트
수도 테베[1]
아마르나[2]
테베
피람세스[3]
멤피스[4]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제정일치
국가 원수 파라오
주요 파라오 아흐모세 1세
하트셉수트
투트모세 3세
아케나텐
투탕카멘[5]
람세스 2세
언어 고대 이집트어
종교 고대 이집트 종교, 아톤 신앙[6]
주요 사건 기원전 1550년 이집트 재통일. 이집트 제18왕조 시작
기원전 1348년 아케나텐의 종교개혁
기원전 1332년 투탕카멘 즉위
기원전 1290년 이집트 제19왕조 시작
기원전 1279년 람세스 2세 즉위
기원전 1189년 이집트 제20왕조 시작
기원전 1155년 람세스 3세 사후 분열
기원전 1077년 신왕국 멸망
성립 이전 제2중간기
멸망 이후 제3중간기

[clearfix]

1. 개요

기원전 1550년부터 기원전 1077년까지 지속된 고대 이집트의 시대구분. 제18왕조부터 제20왕조까지가 신왕국에 해당한다.

이집트 신왕국은 이집트 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외적으로는 팔레스타인, 레반트, 시리아, 누비아 등을 장악하여 고대 이집트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이룩했으며 내적으로는 급격한 경제 발전과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지며 전무후무한 황금기를 누렸다. 또한 현대인들에게 친숙한 파라오들 상당수는 바로 이 신왕국 시절의 파라오다. 대표적으로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 유일신으로 종교를 개혁한 아케나텐, 현대적인 미모로 유명한 네페르티티,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 발굴되며 엄청난 유명세를 탄 소년왕 투탕카멘,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람세스 2세 등이 모두 이 신왕국 시절의 파라오들이다. 신왕국 시대는 무려 500여 년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현명한 성군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이집트의 국력과 부는 그 정점을 찍었고 아부심벨이나 카르나크 대신전 등 우리가 아는 유명한 고대 이집트의 신전이나 건축물들 대부분이 이때 지어졌다.

이집트 중왕국이 셈계 힉소스인들의 침입으로 망하자 제2중간기라 불리는 100여 년에 걸친 혼란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집트 원주민들이 세운 제17왕조의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인들을 쫒아내고 다시 통일 왕국을 이루며 제2중간기가 종결되고 신왕국 시대가 시작된다. 아흐모세 1세를 시조로 하는 제18왕조는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 정복왕 투트모세 3세, 그리고 내치를 정비한 아멘호테프 3세를 거치며 계속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아멘호테프 3세 이후 즉위한 아멘호테프 4세, 즉 아케나텐이 기존의 신앙을 부정하고 유일신 아텐 신앙을 내세우면서 갑작스런 사회 혼란이 일어났고, 아케나텐이 죽자마자 아텐 신앙은 소멸했지만 투탕카멘, 아이 등 짧게 재위한 파라오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이집트는 일시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군사령관 출신의 호렘헤브가 즉위하여 다시 이집트를 다잡으면서 혼란은 사라졌고, 호렘헤브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뜨자 당시 재상이었던 람세스 1세가 파라오가 되어 제19왕조를 개창했다.

제19왕조는 이집트 신왕국의 찬란한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조였다. 람세스 1세를 이은 세티 1세는 공격적인 정복 활동으로 막 성장하던 소아시아의 히타이트를 견제했고, 특히 그 뒤를 이은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명군 람세스 2세 카데시 전투를 포함해 4차에 걸친 시리아 원정을 통해 오리엔트의 패권을 놓고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였다. 람세스 2세 치세의 이집트는 당대 세계 최강대국이었으며, 아부심벨 대신전이나 라메세움 등 기록에 남을 만한 건물들이 이때 세워졌다. 다만 람세스 2세 사후 청동기 시대의 붕괴가 도래하면서[7] 신왕국은 서서히 쇠퇴했다. 결국 제19왕조 최후의 파라오 투스레트가 쫒겨나고 대귀족 세트나크테제20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제20왕조에 들어서서 이집트는 확연하게 그 세력이 약해졌다.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라 불리며 뛰어난 능력으로 이집트의 명줄을 붙잡았던 람세스 3세가 사망하자 연달아 약한 파라오들이 등장하면서 왕권이 무너졌다. 왕권이 무너짐과 반대로 아문을 모시는 신관들의 세력은 날로 강해졌고 신왕국 말기에 이르자 신관들은 파라오마저 무시할 정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결국 람세스 11세 사후 나라가 분열되었고 제20왕조가 끊기면서 500년에 걸친 신왕국도 멸망했다.

2. 역사

2.1. 제18왕조

한때 번영하던 이집트 중왕국은 힉소스인들의 침략으로 멸망했고, 힉소스인들이 나일 하류의 하이집트를 차지하고 제15왕조를 세우면서 제2중간기가 열렸다. 그러나 결국 이집트 원주민들이 세운 제17왕조의 후계자인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이집트 신왕국을 세우면서 제2중간기의 혼란을 잠재웠다.

신왕국의 첫 왕조인 제18왕조의 초대 파라오 아흐모세 1세는 약 25년 4개월 동안 재위하며 힉소스인들이 남기고간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흐모세 1세는 힉소스를 깨부순 다음 시시건건 남쪽에서 이집트를 괴롭히던 누비아인들마저 물리치며 국경을 안정시켰다. 외치가 안정되자 오랜 기간 동안 관심 밖에 있었던 예술과 문화에도 관심을 돌렸다. 하이집트 일대의 대신전들을 복구함과 동시에 제2중간기 이전에 삽을 떴으나 전쟁 때문에 중지된 사업들 역시 재개했다. 태양신 아문에게 바치는 신전, 지식의 신 프타에게 바치는 신전들을 지어 전통적인 신들의 권위를 높였고 테베를 수도로 삼아 전국을 평정하는 등 신왕국이 번영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놓는 업적을 남겼다. 기원전 1524년에 아흐모세 1세가 사망하자 아들 아멘호테프 1세가 새로운 파라오가 되었다.

아멘호테프 1세의 20여 년에 걸친 재위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확실한 것은 아멘호테프 1세 시대에도 아흐모세 1세가 시작한 복구 사업은 계속되었다는 것. 아멘호테프 1세는 누비아, 레반트 일대에 대한 이집트의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한편 강력한 군대를 이끌며 군사적으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문학적으로도 상당한 발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사후세계를 위한 지침서에 해당하는 '사자(死者)의 서'가 이때 최종적으로 정리되어 완성되었고 이집트의 전통 의학서인 에베르스 파피루스가 등장하는 등 수많은 서책들이 발간됐다. 심지어는 세계 최초의 물시계가 이때 처음 등장하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8]

아멘호테프 1세는 카르나크에 위치한 대신전을 복구할 것을 명하며 양 옆에 높이가 20큐빗(약 10.5 m)에 달하는 거대한 탑문과 오벨리스크들을 세웠고, 전란 통에 파괴된 신전들을 복원하면서 제18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멘호테프 1세가 기원전 1504년에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투트모세 1세가 즉위했다. 투트모세 1세는 13년 정도 재위하며 누비아에서 일어난 반란들을 수 차례 진압했으며 카르나크 대신전을 대대적으로 개축,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대한 신전으로 만든 업적을 남겼다.[9]
파일:external/images.metmuseum.org/Hatshepsut2012.jpg
파일:TuthmosisIII-2.png
파일:Colossal_Amenhotep_III_British_Museum.jpg
하트셉수트 투트모세 3세 아멘호테프 3세
투트모세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투트모세 2세에 대해서는 약 13년 정도 재위한 것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나마 알려진 것이라면 왕이 교체될 때마다 이벤트처럼 일어나던 누비아인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는 것 정도가 있다. 투트모세 2세가 유명을 달리하자 그의 아내이자 투트모세 1세의 딸이었던[10] 하트셉수트가 여왕으로 즉위했다.[11]

하트셉수트는 처음에는 정통 후계자 투트모세 3세의 섭정 자격으로 왕권을 거머쥐었으나 나중에는 살아있는 유일한 투트모세 1세의 자손이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공동 파라오에 즉위하며 완벽히 왕위를 장악했다. 하트셉수트는 여성이라는 정치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21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하트셉수트는 제2중간기 시절 끊어졌던 교역로들을 복구하고 아프리카의 뿔 일대, 푼트와 교류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현대까지도 유명한 유적들 중 하나인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등을 포함해 수 백개가 넘는 건물들을 지어댔는데, 하트셉수트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유난히 아름다웠기에 후대의 파라오들이 일부러 건물에 새겨진 이름만 지우고 마치 자신이 지은 것처럼 조작하려 시도할 정도였다.[12]

섭정 및 공동 파라오로 활약하던 하트셉수트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 때문에 21년 동안 빛을 못보고 있던 투트모세 3세가 본격적인 통치를 펼치기 시작한다. 투트모세 3세는 '정복자'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활발한 정벌 활동을 나선 정복군주였다. 투트모세 3세는 54년에 걸친 재위 기간 동안 재위했는데, 한창 혈기왕성할 때에는 20년 동안 16번이나 전쟁을 치렀다고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전쟁을 많이 벌였는지 짐작 가능하다. 투트모세 3세는 팔레스타인 일대로 진출하여 1차 원정에서 메기도를 포함한 도시 성읍들을 정복했다. 특히 메기도를 함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메기도 공성전은 8개월 동안 이어졌다. 투트모세 3세는 일생 동안 정복전쟁을 총 17번 하였는데, 그중 최대 규모일 정도로 굉장히 잔혹한 싸움이었다고 한다.

5차, 6차, 7차 원정에서는 카데시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 일대를 쓸어버리고 수많은 왕국들을 복속시켰다. 시리아를 정복한 이후에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당대 최강국들 중 하나였던 미탄니를 쳤다. 먼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침략할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한 미탄니는 당연히 투트모세 3세에 대한 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고, 덕분에 투트모세 3세는 유유히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부유한 도시들을 약탈하며 막대한 전리품들을 쓸어담을 수 있었다.[13] 투트모세 3세는 이후에도 꾸준하게 소아시아, 레반트 일대를 약탈하며 소소하게 전쟁을 계속했고, 그러던 중 기원전 1425년에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투트모세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멘호테프 2세는 미탄니와 적대적인 공존을 추구했다. 아멘호테프 2세는 기원전 1427년부터 기원전 1401년까지 대략 26년 정도 이집트를 통치했다. 아멘호테프 2세는 아버지처럼 군대를 이끌고 곳곳을 누비고 다녔으며, 총 3차에 걸친 원정을 떠났다. 재위 3년차부터 정복 활동을 시작했는데 시리아의 오론토스 강 일대에서 미탄니 군대를 물리쳤고 카데시에서 시리아 장군 7명을 단신으로 처리하는 등 성공적으로 1차 원정을 마쳤다. 원정을 승리로 이끈 아멘호테프 2세는 전투 도중 죽인 시리아 장군 7명의 시체를 배의 앞머리에 매단 채로 그대로 나일 강을 따라 테베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당연히 이집트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파라오를 열렬히 환영했고, 이에 크게 만족한 아멘호테프 2세는 세를 몰아 누비아 일대까지 군사를 몰아 또다시 공적을 세웠다. 재위 7년 차에 시리아의 봉신 도시들이 미탄니의 사주를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2차 원정을 떠났다. 2차 원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다. 이집트 측의 기록에서는 승리했다고 적혀있지만 특기할만한 사항이 없는 걸로 보아 별다른 공적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 재위 9년 차에 벌어진 제3차 원정에서는 갈릴리 호수 이남까지 진출하여 10만 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잡아왔다.

아멘호테프 2세가 사망하자 아들 투트모세 4세가 새 파라오로 즉위했다. 투트모세 4세는 상대적으로 제18왕조의 파라오들에 비하여 알려진 바가 적지만,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모래에 파묻혀 있던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다시 복구했다는 것. 한 왕자가 밖에서 잠을 자던 중 왕자 바로 아래의 모래 속에 묻혀 있던 스핑크스가 자신을 꺼내준다면 왕위를 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왕자는 이를 받아들였고 그가 바로 투트모세 4세라는 이야기이다.[14] 투트모세 4세가 즉위 10년 만에 사망하자 아들 아멘호테프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아멘호테프 3세의 재위기에 이집트 신왕국은 유례없는 문화의 발전과 황금기를 구가한다.

아멘호테프 3세는 약 39년 정도 왕좌를 지키면서 워낙에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이집트에서는 '아멘호테프 대제' 혹은 '아멘호테프 대왕'이라고 칭송해 부르기도 할 정도의 위대한 명군이었다. 아멘호테흐 3세가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탓에 재위 초반부에는 섭정들이 국정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재위 10년째부터 100마리가 넘는 사자를 죽였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점차 혈기왕성한 청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15] 친정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명군의 통치를 시작했다.

아멘호테프 3세는 뛰어난 무력으로 칭송받았지만 의외로 딱히 정복 활동에 나서거나 전쟁을 대대적으로 벌이지는 않은, 비교적 평화를 추구했던 파라오였다. 대신 말카타에 당대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왕궁을 신축하거나 세드 축제[16]를 성대하게 여는 등 내치에 신경쓰며 이집트의 부를 막대한 수준으로 불려나갔다. 나일 강 유역의 수많은 장소들에 새로운 사원과 신전들이 신축됐으며, 왕실 작업장에서는 화려한 장신구와 보물들이 쏟아져나왔다. 아멘호테프 3세는 바빌론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지중해의 도시들과 교역하며 이집트 경제를 폭발적으로 성장시켰고 덕분에 신왕국 제18왕조는 그의 재위기 내내 평화기를 누렸다.

2.1.1. 아케나텐의 종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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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나텐의 석상[17] 태양신 아텐이 보살피는 왕실 가족[18]
오랜 황금기를 유지했던 아멘호테프 3세가 죽자[19] 아들 아멘호테프 4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아멘호테프 4세가 바로 유명한 아케나텐으로, 다신교 체제였던 이집트 신앙을 부정해버리고 태양신 아텐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신 종교를 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아멘호테프 3세 시절부터 공동 파라오로 미리 즉위하여 약 12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린 경험이 있던 아멘호테프 4세였기에 일반 시민들은 그가 평탄하게 이집트를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멘호테프 4세 역시 이같은 기대를 알고 있었던지 재위 약 5년 간은 아멘호테프 4세라는 이름을 유지하며 딱히 아텐 신앙[20]을 밀어붙이거나 기존의 세계관을 부정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위 약 4년 쯤에 아멘호테프 4세는 점차 아텐 신앙에 대한 자신의 공공연한 믿음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결국 즉위한 지 5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아케나텐', 즉 '아텐 신에게 사랑받는 자'라는 뜻의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 당연히 기존의 기득권층이었던 사제단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신들을 부정한 왕의 파격 행보에 경악했고 이때부터 이집트 신왕국은 격랑에 빠져들었다.[21]

자신의 이름마저 바꿈으로써 기존의 신들과 종교관을 갈아엎기로 작정한 아케나텐은 이후로도 아텐 신앙에 헌신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아케나텐은 개명과 동시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 신도시 '아마르나'[22]를 건설한다. 아케나텐은 테베 멤피스 사이에 위치하며 절벽들이 분지를 둘러싸고 있어 '수평선'을 뜻하던 상형문자와 비슷한 지형을 가진 장소를 골랐다.[23] 아케나텐은 아마르나를 완전한 계획도시로 설계했고 중앙에 왕궁과 정부 청사를 건설했으며 그 주변에 거주 지역을 지었다. 특히 아마르나를 건설하는 데에 벽돌을 구워 짓는 등 새로운 건축 공법을 들여왔기에 아마르나는 약 3년여 만에 빠르게 세워질 수 있었다.

아케나텐 시절의 국제 정세는 '아마르나 문서'에 잘 적혀 있다. 토판 약 300여 개로 이루어졌는데, 제2중간기에 침입한 힉소스인들을 쫒아낸 것부터 시작해서 아케나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굉장히 자세하게 기록해놨다. 아마르나 문서에 따르면 신왕국의 군사력은 정복군주 투트모세 3세 시기에 그 정점을 찍었고, 당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지배하던 강대국 미탄니와의 불안정한 공존을 하다가 결국 결혼 동맹으로 평화 조약을 맺으며 국경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아멘호테프 3세의 오랜 평화기가 흐르면서 이집트의 군사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뒤를 이은 아케나텐은 서아시아 일대에서 막 발흥하며 미탄니를 갉아먹기 시작한 히타이트 세력을 억누르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결국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잡아먹는 데에 성공하자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세력 구도는 크게 흔들리고야 만다. 아케나텐도 역시 히타이트의 급부상과 시리아 일대의 봉신국들의 이탈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아케나텐은 봉신국들이 히타이트로 넘어가는 것만은 막기 위해 친위대인 메자이를 파견하는 등 여러 대응책을 강구했으나,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였던 아케나텐이었기에 결국 히타이트가 이집트와 맞먹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2.1.2. 투탕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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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투탕카멘의 관[24]
아케나텐의 재위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아케나텐의 아내인 네페르티티[25]나 후임 파라오인 스멘크카레가 나이든 아케나텐과 함께 공동 통치를 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특히 스멘크카레가 아케나텐과 무슨 관계였는지에 대해서 확실하지가 않은데, 아케나텐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고 아니면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이자 아케나텐의 형제였다는 말도 있다. 스멘크카레는 아케나텐의 장녀와 결혼해 정통성을 다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케나텐이 기원전 1334년 즈음에 사망하고[26] 얼마 되지 않아 스멘크카레도 행적이 불분명, 아마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스멘크카레가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한 여성 파라오 네페르네페루아텐(Neferneferuaten)[27] 역시 2년여 만에 세상을 떴다고 본다.

이 네페르네페루아텐 이후 즉위한 인물이 바로 소년왕 투탕카멘이다.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파라오로 꼽히는 투탕카멘은 명성과는 달리 정작 그 당시에는 굉장히 존재감이 없었던 군주였다.[28] 8~9년 정도 재위한 투탕카멘의 시대에 이집트는 아텐 신앙을 버리고 다시 옛 다신교 신앙으로 회귀했으며 아마르나는 버려졌다. 이집트의 수도는 다시 테베로 돌아왔고 어린 파라오는 꼭두각시인 채[29] 기존 신관 계급들이 권력이 강해졌으며 모든 것은 아케나텐의 통치 이전으로 돌아갔다.[30]

투탕카멘은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신원 불명의 이유로 사망했다.[31] 투탕카멘이 죽자 당시 사실상의 실세이자 재상이었던 아이는 투탕카멘에게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들며 새로운 파라오가 되었다.[32] 이미 아케나텐 시대부터 아마르나에 개인 무덤을 짓는 것이 허가되는 등 왕 바로 밑의 힘을 휘두르던 아이는 어린 투탕카멘이 즉위하면서 거의 실질적인 파라오처럼 행세했고, 투탕카멘이 세상을 떠나자 바로 투탕카멘의 아내 안케세나멘과 결혼하며 파라오 자리를 꿰찼다.

다만 아이는 이미 파라오에 즉위한 시점에 엄청난 고령이었기에 4년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했다. 아이는 파라오로서 옛 종교를 복원하고 아케나텐의 흔적을 지우는 데에 총력을 쏟았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이는 죽기 직전 낙트민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였으나 군사령관이자 군권을 쥐고 있던 호렘헤브가 낙트민을 몰아내고 아이 다음의 파라오로 즉위했다. 호렘헤브는 아텐의 대사제들이 맡고 있던 국가의 권력을 빼앗아 다시 관료들에게 분배했고, 아문의 신전을 복구하는 동시에 군대를 개혁하는 등 14년 정도의 통치 기간 동안 나름 많은 일을 하며 이집트를 완전히 아케나텐 이전 시절로 되돌렸다.[33] 호렘헤브가 기원전 1292년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재상 파람세스가 람세스 1세로 즉위, 제19왕조를 개창하면서 260년 가까이 지속된 제18왕조도 끝난다.

2.2. 제19왕조

람세스 1세는 고귀한 귀족 출신이었던 것은 맞았지만 본디 왕실 혈통이 아니었기에 파라오에 오를 가능성이 없던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군 장교였으며 삼촌은 쿠시 총독의 딸과 결혼하는 등 파라오 즉위 이전에도 매우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는데, 군대 출신인 호렘헤브가 왕위에 오르며 군에 복무하던 자신의 측근들을 대거 궁정으로 끌어가면서 군직에 있던 람세스 1세도 바로 최고위 관직에 올랐다.

람세스 1세는 호렘헤브의 재위 동안 세트의 대신관직을 맡으며 아텐 신앙을 밀어내고 다시 이집트의 전통적인 종교관을 부활시키는 데에 앞장섰다. 선대 파라오 호렘헤브는 아케나텐 시절의 혼란을 회복하고 강력한 왕권과 군사력을 이미 만들어 놓았기에 덜컥 왕위에 오른 람세스 1세는 예상 외로 평화로운 통치를 할 수 있었다. 람세스 1세의 즉위명은 '멘페티레', 즉 '의 힘이 세운 자'였으며 출생명은 '라에 의해 태어났다'라는 의미의 '람세스'였다.[34]

람세스 1세는 왕위에 오른 후 약 16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워낙 재위 기간이 짧았기에 그에 관련된 대규모 문화유적도 없다. 람세스 1세가 죽자 아들 세티 1세가 새로운 파라오로 등극했다. 당시 세티 1세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업은 서아시아 지역에서 한창 힘을 키우고 있던 히타이트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아케나텐 이후 이집트에서는 워낙 아텐 신앙을 폐지하고 옛 종교로 회귀하는 일이 더 급했기에 국경 밖의 히타이트를 신경 쓸 틈이 없었고, 때문에 히타이트는 세티 1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이미 이집트와 맞먹을 만한 대단한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세티 1세는 과감하게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했고, 재위 10년 째 되는 해부터 여러 차례 히타이트와 전투를 치렀다.

세티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며 아케나텐 이후 이집트가 잃어버렸던 영토 상당수를 되찾았다. 세티 1세가 남긴 최고의 외교적 유산은 시리아 지방의 고대 도시 카데시를 함락시킨 것. 이는 호렘헤브나 람세스 1세도 해내지 못한 위업이었다.[35] 카르나크 신전이나 타 신전들에 새겨진 비문을 보면 세티 1세는 몸을 가리지 않고 친히 전장에서 칼을 휘둘렀다고 하며 히타이트 뿐만 아니라 누비아, 리비아의 유목민들[36]과도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군사적으로 이집트의 옛 강역을 회복한 세티 1세는 동시대 이집트인들에게 크나큰 존경을 받았고 현대의 고고학자들 역시 세티 1세가 후계자 람세스 2세가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주었다고 평가한다. 여러 모로 조선 태종과 비슷한 파라오였던 셈이다.

2.2.1. 람세스 2세

기원전 1279년 경에 왕위에 오른 람세스 2세는 이집트에서도 제일가는 위대한 파라오로 유명하다. 이미 세티 1세 시절부터 후계자로 점찍어져 아버지와 함께 수많은 원정들을 함께한 람세스 2세는 왕위에 오르기 이전부터 이미 그 군사적 재능과 탁월한 리더십으로 탄탄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의 즉위명은 '우세르 마아트 라', 즉 '라의 정의는 강하다'라는 뜻이었고, 호루스 이름은 '라의 사랑을 받는 강한 황소'라는 의미의 '카 나크트 메리 라'였다. 람세스 2세는 즉위 2년 만에 나일 강의 지중해 쪽 항구들을 약탈하던 바다 민족들로 구성된 해적들을 물리치는 업적을 남겼다.[37]

또한 세티 1세 시절부터 시작된 히타이트에 대한 본격적인 견제 작업에도 열을 올렸다. 람세스 2세는 재위 기간 동안 무려 4차에 걸친 시리아 원정을 실시하기까지 했다. 재위 4년 차에 시작된 시리아로 향한 1차 원정에서 람세스 2세는 레바논 베이루트 일대까지 진출, 히타이트의 봉신국이었던 아무루를 복속시켰다.

한번 시리아를 경험해 본 람세스 2세는 제대로 된 대원정을 계획했다. 시리아와 가까운 나일 강 삼각주에 '피람세스'라는 새로운 도시를 지어 시리아 원정 도중 보급품을 공급하고 군수물자를 담당할 새로운 수도로 삼아 그 곳에 주로 머물렀다. 아버지 세티 1세가 카데시를 함락하고 그 곳에 입성하던 순간을 잊지 못하던 람세스 2세는 스스로가 다시 그 영광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람세스 2세는 이후 시리아 원정에 관심이 쏠려 일주일에 천여 대가 넘는 전차들을 생산하게 명령했으며, 방패, 창, 검 등 군수물자를 제작할 공장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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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시 전투
어느 정도 전쟁 준비를 끝마치자 드디어 람세스 2세는 당시 히타이트 무와탈리 2세가 지배하고 있던 레반트 일대로 진군했다. 그러나 기원전 1274년,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가 카데시에서 물러났다는 허위 첩보를 듣고 카데시 지방으로 성급하게 진입했지만, 오히려 요새 뒤에 숨어있던 히타이트 전차병들에게 기습을 당하며 2개 사단이 전멸하고 람세스 2세 본인의 목숨마저도 위험에 처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처하고야 말았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군을 물리치고 나름 성공적으로 철수했으며,[38] 이 기록에 남을 만한 대전투를 카데시 전투라고 부른다.

카데시 전투에서 기습으로 지나치게 많은 병사들을 잃어버린 람세스 2세는 군대를 다시 이집트로 물렸다. 결국 이로 인해서 시리아 일대는 다시 히타이트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에게 쫓겨가는 모양새가 되자 이에 고무된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은 이집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며 시나이 반도 전체가 적의 손에 떨어질 상황에 처하자 람세스 2세는 집권 7년 만에 다시 시리아로 3차 원정을 떠났다.

3차 원정에서 람세스 2세는 2차 원정보다 훨씬 나은 성과를 올렸다. 그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나머지 하나는 아들에게 맡기고 수많은 적병들을 격퇴했다. 람세스 2세 본인은 예루살렘 예리코를 공격했고, 나머지 군대는 에돔과 모압을 점령했다. 이집트군은 모압에서 군대를 다시 합친 다음 다마스쿠스와 쿠미디 등을 쳐 떨어뜨리며 이집트의 옛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했다. 승승장구하던 람세스 2세는 이후에도 4차 원정에서 더욱 북부로 밀고 올라가며 히타이트 세력을 공격했다. 그는 카데시를 지나쳐 튜닙 일대까지 진군했는데 이는 정복왕 투트모세 3세 이래 120년 동안 그 어떠한 파라오도 정복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비록 히타이트 본진과 지나치게 가까웠던 탓에 4차 원정을 통해 얻어낸 영토 상당 부분이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히타이트의 영향권 내부로 들어가기는 했으나, 람세스 2세는 원정을 통해서 여전히 이집트 신왕국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여타 군주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4차 원정 이후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의 불안정한 소강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히타이트의 쫓겨난 왕인 무르실리 3세가 하투실리 3세를 상대로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이 불안한 평화를 단숨에 뒤집을 만한 상황이 발생한다. 오갈 곳이 없던 무르실리 3세는 삼촌인 하투실리 3세를 피해 적국인 이집트로 도망쳤다. 당연히 하투실리 3세는 이집트에게 무르실리 3세의 히타이트 송환을 요구했다. 람세스 2세는 처음에는 무르실리 3세의 행방을 모른다며 발뺌했다. 때문에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다시 전쟁이 터지는가 싶었으나 결국 기원전 1258년에 람세스 2세가 하투실리 3세를 인정, 양국 간의 영구적인 평화조약을 맺기로 합의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참고로 이 평화조약은 현재 기록이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평화조약이다. 람세스 2세와 하투실리 3세는 이집트 상형문자, 그리고 히타이트의 쐐기문자로 쓰여진 점토판 하나씩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친교를 맺었고, 이를 통해 이집트 북부의 국경은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 평화조약 덕분에 이집트는 람세스 2세가 죽을 때까지 시리아 지방을 평화로이 통치할 수 있었으며 이 조약은 심지어 후대까지 전해져 내려갔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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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심벨 대신전 라메세움
람세스 2세는 군사 원정 뿐만 아니라 수많은 건축물들을 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그는 심지어 자신이 짓지 않은 건물들에까지 옛 파라오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는 등 건축물을 도둑질(....)할 정도로 건설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는 나일 강 유역을 따라 이집트와 누비아 일대에 수많은 신전과 궁전들을 지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부심벨 대신전과 새로운 수도 '피람세스', 그리고 자신의 장례신전인 ' 라메세움'이었다.

특히 라메세움은 아부심벨에 비해면 덜 유명하지만 람세스 2세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신경을 쏟았던 건설 프로젝트였다. 자신을 이집트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여겼던 람세스 2세는 당연히 제 장례신전이 자신의 위업에 걸맞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전에 축조된 적이 없는 거대한 신전을 짓고자 했다. 현재는 그 위용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람세스 2세가 죽을 즈음 라메세움은 심지어 테베의 카르나크 대신전에 맞먹을 만큼 웅장한 건축물이었다고. 그 외에도 람세스 2세는 카르나크, 룩소르 등 수많은 신전들에 자신의 조각상을 새겨넣었고, 자신을 묘사한 압도적인 크기의 거상들을 곳곳에 세워 자신의 위엄을 과시했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이자 이집트 신왕국의 최전성기를 다스린 람세스 2세는 무려 91세라는 굉장히 오랜 나이까지 장수했다. 그는 여러 차례 세드 축제를 개최하며 이집트의 풍요를 있는 그대로 과시했고 이집트인들은 람세스 2세의 통치 하에서 오랜 번영을 누렸다. 67년 간 재위한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13년에 사망했고,[40] 람세스 2세 사후 신왕국은 천천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41] 람세스 2세가 91세까지 대단히 장수했기에 그의 뒤를 이은 메르넵타는 이미 즉위한 시점에 나이가 70세에 달했다. 그러나 메르넵타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를 상대로 공세를 펼쳐 그들을 몰아냈고, 수도를 피람세스에서 다시 멤피스로 옮기는 등 10년 간 나름의 행보를 보였다.[42]

메르넵타가 죽자 아멘메세스,[43], 세티 2세가 동시에 즉위했다. 학자들은 세티 2세와 아멘메세스가 메르넵타 사후 왕위를 놓고 내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멘메세스는 상이집트를, 세티 2세는 하이집트 일대를 차지하고 서로 전쟁을 벌였는데, 결국 세티 2세가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통일 이집트의 왕좌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세티 2세는 내전 종식 이후 얼마 되지도 못해 세상을 떠버렸고 그의 뒤를 이은 십타 역시 6년 만에 사망하자 여성이었던 투스레트가 파라오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미 세티 2세 시절부터 왕권의 약화로 신음하던 제19왕조는 람세스 2세 시절만큼의 통제력이 없었다. 결국 대귀족 세트나크테가 반란을 일으켜 투스레트를 몰아내고[44] 제20왕조를 열면서 신왕국 최전성기에 해당하는 제19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3. 제20왕조

2.3.1. 람세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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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3세의 벽화 바다 민족과의 해전
제19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투스레트를 쫒아내고 세트나크테가 새로운 파라오로 즉위했지만 오래 살지는 못했다. 엘레판틴 비석에 의하면 세트나크테는 대략 2년 11개월 정도 재위했는데, 세트나크테는 상대적으로 매우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카르나크 대신전을 복구하고 각지에 할거하던 반란군들을 진압하는 등 왕조 교체기로 혼란스러운 이집트를 어느 정도 안정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덕분에 세트나크테가 세상을 떠나자 '이집트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라고 불리는 람세스 3세가 등장하며 신왕국은 마지막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람세스 3세는 대략 32년 정도로 꽤나 긴 시간 동안 왕위를 지켰다. 그는 이집트 전역에 막강한 통제력을 행사했던 마지막 파라오였으며, 여러 군사 활동을 펼치며 많은 군공을 세웠으나 점차 무너져가는 이집트를 완전히 이전으로 되돌려놓지는 못했던 군주였다. 당시 지중해 세계와 서남아시아, 에게 해 지방에서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가 진행되던 중이었다. 미케네 문명, 시리아의 히타이트 제국 등 한때 지역을 주름잡던 위대한 문명권들이 정체불명의 집단인 바다 민족의 침략으로 연쇄적으로 무너지며 세력 구도가 붕괴되고 있던 시점이었는데, 개중 가장 강력했던 이집트 역시 이 시대의 흐름을 피해가지 못했던 것.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불러온 것은 아직도 정확한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강력한 무력 집단인 바다 민족이었다. 이들은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휘어잡고 해적 함대를 꾸려 각국의 연안을 약탈하고 수많은 도시들을 불태우며 문명 시대를 암흑으로 돌려놓았는데, 당대 가장 풍요로운 경제력을 자랑하던 이집트는 이들에게 대단히 탐스러운 먹잇감이었다. 바다 민족은 나일 강과 지중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이집트의 항구 도시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람세스 3세는 이들을 해전에서 꺾고 이들의 야욕을 분쇄해버렸고, 일부 포로로 잡은 자들은 따로 척박한 지방을 경작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람세스 3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쇠퇴의 흐름은 막을 수가 없었다. 일단 바다 민족들의 끊임없는 침입에 대응하느라 막대한 군비가 소요되며 경제력이 크게 부실해졌고, 자연재해가 겹치며 민심은 흉흉해졌으며 왕에 대한 불신은 강해졌다. 가장 대표적으로 람세스 3세 재위 29년 차에 장례신전을 짓는 건설노동자들에게 지급할 예정인 임금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사상 최초의 파업이 일어났는데, 이는 당시 이집트 사회가 꽤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45] 게다가 지중해 쪽에서 대화산이 폭발, 화산재가 분출하여 햇빛을 가려 몇 십년 가까이 농작에 치명타를 입혔다. 곡물 가격은 수직상승했고 이집트의 생산력은 반대로 추락했다.

람세스 3세가 남긴 건축물들에 새겨진 기록들을 보면 람세스 3세는 이집트가 쇠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위대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의 예를 본받아 거대한 건축물들을 건립하고 대대적인 행사와 축제를 치르며 신에게 기도했지만,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건물 축조 따위는 이집트의 경제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점차 이집트의 사원과 신전들, 그리고 도시들을 감싸는 거대한 성벽과 요새들이 연달아 지어졌다. 평화로워 적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람세스 2세 시대와 그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로, 람세스 3세의 시대에 이미 이집트는 그 몰락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와중에 람세스 3세는 살해 시도로 인한 치명타를 입고 사망했다. 당시 왕비였던 티예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람세스 3세를 죽여버릴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람세스 3세는 목 부위에 매우 깊은 상처를 입었고 결국 이 상처로 인해 사망했다.[46] 그나마 뛰어난 군사 지휘 능력과 내치 능력으로 신왕국의 명줄을 붙들고 있던 람세스 3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집트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2.3.2. 쇠락과 멸망

기원전 1155년에 즉위한 람세스 4세 람세스 3세의 둘째 아들로 첫째 아들이었던 아멘헤르케세프가 15세의 나이로 단명했기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아멘헤르케세프가 죽자 람세스 4세는 곧바로 적법한 왕위 계승자이자 후임 파라오로 지목됐고, 아버지와 함께 국정 대다수를 함께 처리하는 등 일찍부터 국무 전반에 관여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람세스 4세에게 닥친 시련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후계 문제로 왕비가 주도한 반란에 치명상을 입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람세스 4세가 반란을 일으킨 왕비를 처형하고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이미 파라오의 암살 시도로 왕권이 크게 흔들린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람세스 4세는 즉위하자마자 왕권 과시의 목적으로 람세스 2세 시절에 비견될 정도의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8400여 명에 이르는 거대한 수송대를 꾸려 나일의 채석장에서 돌을 캐오도록 명령했으며[47] 채석해온 돌들로 카르나크 콘수 신전을 확장하고 장례 신전을 짓는 등 6년 반 밖에 안되는 짧은 치세 동안 꽤나 많은 건축물들을 건립했다. 람세스 4세는 기원전 1149년에 세상을 떴다.[48]

기원전 1149년에 즉위한 람세스 5세 시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왕권이 계속 약화되고 반대로 아문의 대사제들의 권력이 강해졌다. 아문의 신관들은 신의 권위를 앞세워 국가 재정을 장악했고, 신전 소유의 땅을 크게 불려나가면서 국가의 토지 상당수를 자기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신전 소속의 토지는 세금도 내지 않았기에 왕국의 재무 상황은 날로 나빠졌다. 당연히 신관들끼리만 해먹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으니 수많은 부패 스캔들이 터져 기록에 남을 정도였고 외적으로는 리비아의 유목민들이 침략해 국경 지대 깊숙이까지 약탈하고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수도 멤피스와 함께 이집트의 양대 도시들 중 하나였던 테베에까지 유목민들의 위협을 받았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당시 이집트 군대가 약화되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람세스 5세는 집권 4년 만에 천연두로 사망했고,[49] 그의 뒤를 이어 람세스 6세가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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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6세의 무덤[50]
람세스 6세의 8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재위 기간 동안 이집트는 끝없이 쇠락의 길을 걸었다. 람세스 6세는 본래 람세스 3세의 아들로, 람세스 3세가 죽은 이후에는 이미 적법한 왕세자인 람세스 4세의 존재 때문에 왕위를 차지하지 못했으나 이후 람세스 5세가 사망하자 드디어 왕위를 얻을 수 있었다. 람세스 6세는 즉위하자마자 테베를 방문, 자신의 딸을 아문의 대사제로 임명하고 민심을 추슬렀다.

당시 남쪽 누비아인들이 끊임없이 상이집트 일대를 침략했기에 민심이 극도로 흉흉했고 심지어는 반란의 징조까지 보였기에 더 이상 파라오마저도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람세스 6세 시대에 이르자 정부는 심지어 파라오의 무덤을 건설하는 인부들에게 지급할 월급이 밀리는 사건이 또 발생했고, 이렇게 되자 왕가의 계곡에서는 무덤을 관리하는 사제와 관료들, 인부들이 서로 짜고 무덤을 털어 부장품을 빼돌리는 도굴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했다.

이러한 난맥에서 람세스 6세는 즉위 초반부에 리비아의 유목민들과 누비아인들을 상대로 한 짧은 원정을 벌여 국경을 일시적으로는 안정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람세스 3세 시절부터 빠르게 상승한 곡물 가격, 그리고 관료들의 이탈과 아문의 대사제들의 지나친 권력 때문에 이집트를 도로 원래대로 만들기는 역시 무리였다. 람세스 4세 시기에 테베의 아문 대신관으로 임명된 람세스낙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정감사권과 징수권을 바탕으로 권력을 불려나갔고 람세스 6세 시기에는 중부와 상이집트 지역의 총독으로 인정받고 유력 귀족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더욱 굳혔다. 이렇게 되자 람세스낙트는 파라오와 맞먹는 수준의 권위와 권력을 누렸으며 자신의 장제전을 짓기 위해 제17, 제18왕조 파라오의 무덤을 해체해 재활용했지만 아무 제재도 받지 않았다. 심지어는 왕가의 계곡에서 무덤 건설에 투입되는 인부들의 월급이 밀리는 사건이 또 터지자 돈이 없는 국가를 대신해 아문 신전의 이름으로 대신 지불했다.

국외적으로도 이집트는 영토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가나안 지역의 마지막 영토를 잃어버렸고, 레반트 일대의 소국들과 관계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람세스 2세나 람세스 3세 시절만큼 그들을 상대로 패권을 휘두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위치하던 이집트의 요새들은 하나하나씩 함락되었고 그나마 함락되지 않은 것들도 막대한 군비 지출과 경제 악화로 인해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집트의 국경은 홍해 지중해 사이를 잇는 시나이 반도까지 후퇴했다.

한편 남쪽의 누비아에서도 끊임없이 불온한 움직임이 보였다. 그러나 워낙 람세스 2세 시절부터 지속된 누비아의 이집트화와 제2의 수도라고도 할 수 있을 테베가 누비아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탓에 누비아는 의외로 생각만큼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51] 람세스 6세는 약 8년 2개월 정도 재위하다가 세상을 떴고, 이후 람세스 7세가 즉위한다. 람세스 7세는 기원전 1136년부터 기원전 1129년까지 약 8년 정도 왕좌를 지켰으나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람세스 7세의 뒤를 이은 람세스 8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정말 없다. 람세스 3세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제20왕조에서 손꼽힐 정도로 현대인에게 알려진 것이 없는 비운의 군주. 기원전 1119년에 파라오가 된 람세스 9세는 약 19년 동안 재위하며 제20왕조에서 람세스 3세, 람세스 11세 다음으로 오래 재위한 왕이었다. 람세스 9세의 업적에 대해서는 딱히 특기할 만한 바도 없고 실제로 별다른 행보도 펼치지 않았지만 그의 재위기에 왕권이 무너지고 사회는 붕괴하면서 상당히 많은 왕릉 도굴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지금까지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문서들에 적혀있는 도굴범들에 대한 재판 기록만 해도 벌써 16~17건에 달하는데, 재판 기록이 소실된 것과 부정부패로 관리들에게 걸리지 않았던 것들까지 합치면 도굴 사례가 더욱 많았을 것이다.

테베의 왕릉들이 연달아 털렸고, 심지어 후대의 파라오들이 재정 부족으로 옛 파라오들의 무덤을 깨고 그 속의 보물들을 훔쳐가 사욕을 채웠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였다고 한다.[52] 람세스 9세 역시 상황이 심각함을 인지했고, 그 역시 죽어서 무덤은 도굴당하기 싫었던지 총독을 시켜 남아있는 왕릉들이라도 잘 간수하라고 명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람세스 9세는 기원전 1111년에 사망했고, 이후 람세스 10세가 새 파라오가 되었다.

람세스 10세는 즉위 3년 만에 사망했다. 워낙 재위 기간이 짧았기에 남긴 업적도 없고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 중 기록할 만한 것도 없다. 기원전 1107년에 람세스 10세가 죽자 제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람세스 11세가 왕위에 올랐다. 람세스 11세는 무려 30년 정도 재위했는데, 꽤나 길었던 람세스 11세의 통치는 안타깝게도 내내 아문 신관들의 득세와 왕권의 약화, 그리고 신왕국의 쇠퇴로 점철되었다. 어지러운 시대였기에 람세스 11세에 관해 알려진 것 역시 딱히 없다. 이쯤되자 자칭 신의 아들이라는 파라오는 이름만 거창한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실권은 모두 아문의 신관들, 그리고 쿠시의 총독 등 신하들이 갈라먹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문 대사제 피앙크는 왕의 허락을 받아내어 재위 28년에 누비아로 원정을 떠났고, 재위 29년 즈음에 다시 본거지이자 카르나크 신전이 있는 테베로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람세스 11세는 원인 불명의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워낙에 왕권이 약했기에 그는 그가 원하던 테베의 무덤에도 묻히지 못했고, 저멀리 떨어진 멤피스에 묻혔다.[53] 람세스 11세가 죽자 파라오를 매장하고 장례의식을 치른 자가 새로운 파라오라는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람세스 11세의 장례를 집전한 스멘데스가 왕위에 올라 제21왕조를 열면서 500년에 걸친 이집트 신왕국이 종결을 고했다.


[1] 파라오 아케나텐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제17왕조,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이 사용하던 수도. [2] 아케나텐이 종교 개혁과 동시에 천도해 세운 계획도시이자 새로운 수도. 기존 기득권층의 반발이 심해 아케나텐 사후 바로 버려졌다. [3]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세운 새로운 수도. [4] 람세스 2세 이후의 제19왕조와 제20왕조의 파라오들이 사용하던 수도. [5] 실제로 투탕카멘은 이집트 역사에서 이렇다 할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일찍 요절해버려서 이집트 역사상에서도 거의 듣보잡 취급의 파라오였다. 하지만 훗날 무덤 발굴로 인하여 현대에 와서야 유명해진 케이스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6] 아케나텐 시절 한정. [7] 정체불명의 해적 집단인 바다 민족들이 지중해의 미케네 문명, 서아시아의 히타이트 등 위대한 제국들을 연달아 벼랑 끝으로 내몰은 대사건이다. 이로 인해 문명 세계가 무너지고 일시적으로 암흑기가 도래했다. [8] 당시 이집트의 시간구분은 정확하지 않았다. 보통 밤의 길이를 12분의 1로 나누어 시간을 쟀는데, 때문에 밤낮의 길이가 달라짐에 따라 시간을 구분하는 기준도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그래서 물시계를 쓸 때에 밤의 길이에 맞추어 물의 양을 조절했다고 한다. [9] 투트모세 1세는 처음으로 왕가의 계곡에 안장된 파라오이기도 했다. [10] 고대 이집트 왕가에서는 왕실의 신성을 보존한다는 이유로 근친혼이 유행했다. [11] 보통 하트셉수트를 이집트의 첫 여왕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이집트의 첫 확인된 여왕은 중왕국 시절 제12왕조의 소베크네페루였다. [12] 하트셉수트는 가짜 수염 등을 포함해 남성 파라오와 완전히 똑같은 차림을 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기에 가능했던 일. 그녀는 자신을 벽화에 남성으로 새기게 하거나 '마아트카레'라고 파라오식 이름을 따로 짓는 등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많은 수단을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13] 이 당시 이집트 인들은 나일 강만 보고 살았기에, 나일 강과 반대로 흐르는 메소포타미아 강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투트모세의 칭호 중에는 '역류를 건넌 자' 라는 호칭이 있다. [14] 고고학자들은 이 설화를 통해 투트모세 4세가 원래부터 정통성이 있던 왕위계승자가 아니라 얼떨결에 파라오에 올랐다는 가설에 힘을 싣고 있다. [15] 물론 과장된 숫자일 것이다. 아니면 철제 우리나 사육장 등 철저하게 관리된 환경에서 사자 100마리를 '샤냥'했을 가능성도 있다. [16] 파라오의 통치를 축복하고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제. 이집트 고왕국 시대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가 깊은 행사였다. [17] 아케나텐의 재위기를 따로 '아마르나 시대'라고 부른다. 아마르나 시대의 조각상들은 이전 시기의 것들보다 굉장히 특색이 강한데, 이 석상만 보아도 인체의 모습이 대단히 길쭉길쭉하며 허리가 마치 여성의 것처럼 잘록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사람의 몸을 굉장히 여성스럽고 자연스러운 구도로 표현하면서 후대의 예술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8] 왼쪽의 인물은 아케나텐, 오른쪽의 인물은 아내 네페르티티. 아케나텐이 안고 있는 아이가 바로 투탕카멘이다. [19] 그의 시신은 왕가의 계곡의 WV22 무덤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미라는 카이로의 이집트 문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0] 태양신 아텐이 유일한 신이라고 주장하고 나머지 신들은 모두 가짜라고 여겼던 아멘호테프 4세, 즉 아케나텐의 신앙. 세계 최초의 일신교였다. [21] 아케나텐이 종교 개혁이라는 벌집을 건드린 이유는 왕권 강화의 목적도 있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신관 계급의 힘이 굉장히 강력했는데, 아케나텐은 이를 통째로 부정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유일신 종교를 주창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꾀했던 것이다. [22] Amarna. 뜻은 '아텐의 수평선'. [23] 고고학자들은 왜 아케나텐이 굳이 멀쩡한 테베나 멤피스 등 전통적인 이집트의 대도시들을 버리고 아예 새로운 도시를 지어 천도했는지에 대해서 밝혀내지 못했다. 학계의 주된 입장은 아케나텐의 급진적인 유일신 사상이 필연적으로 테베와 멤피스의 대신전을 중심으로 하던 기존의 사제 계급과 격렬한 마찰을 빚었고, 이를 보다못한 아케나텐이 그냥 새로운 수도를 지어 사제들과 멀리 떨어지는 것을 바랐던 것으로 보고 있다. [24] 투탕카멘의 미라를 안치한 관은 겹겹이 삼중으로 되어 있었다. 사진 뒤쪽에 있는 황금빛 커다란 관이 가장 바깥 관이고, 앞쪽에 있는 것은 두 번째 관이다. [25] 이름의 뜻은 '미녀가 왔다'로, 외모가 출중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현대적인 기준에서 봐도 굉장히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26] 아케나텐은 아마르나 인근의 왕실 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아텐 신앙이 아케나텐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며 수도가 다시 테베로 옮겨갔고, 투탕카멘이 아케나텐의 묘를 다시 왕가의 계곡의 KV55 무덤에 이장했다. KV55 무덤은 1907년 발굴되었다. [27] 네페르티티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 혹은 아케나텐의 딸 메리타텐이라는 설이 공존한다. [28] 투탕카멘의 무덤이 몇천 년에 걸쳐 도굴되지 않았던 이유는 투탕카멘이 워낙에 존재감이 없었던 덕분이기도 했다. 다른 위대한 파라오들은 거대한 무덤을 파 도굴꾼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던 것에 반면, 투탕카멘은 재위기간도 짧고 무덤의 규모도 작아 도굴꾼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것. 어떻게 보면 당시에 너무도 존재감이 없었기에 오히려 후대에 가장 유명해진 얄궂은 케이스. [29] 참고로 투탕카멘의 즉위 당시 이름은 '투탕카텐'이었다. 그러나 신관들이 아텐 신앙을 버릴 것을 요구하며 이름을 '투탕카멘'으로 개명했다. [30] 신관들은 자신들을 무시하고 아텐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신앙을 신봉했던 아케나텐을 혐오했다. 결국 제18왕조 이후 아케나텐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고, 아케나텐을 묘사한 부조나 석상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아케나텐과 아마르나 시대의 석상은 굉장히 희귀한 편. [31] 막 성년이 되어 친정하기 직전의 오묘한 타이밍에 죽었기에 학자들은 암살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쳤었다. 그러나 연구 결과 투탕카멘의 미라에서 다리 골절의 흔적이 발견되고 말라리아의 병원균이 발견되면서 현 시점에선 암살설은 설득력을 잃었고 다리 골절로 인한 합병증과 말라리아가 겹쳐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이 학계의 지지를 얻고 있다. [32] 아이는 아멘호테프 3세의 핏줄이 흐르는 왕족이었다. [33] 호렘헤브는 즉위 직후부터 전임자들의 흔적 지우기에 몰두했다. 특히 바로 전대 파라오였던 아이에 대한 훼손이 대단히 심각했는데, 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대부분이 부서졌고 무덤은 파헤쳐졌다고 전해진다. [34] 이집트어로는 정확히 '라 메스 시스'인데, 이 이름이 그리스를 거쳐 들어오며 그리스식인 '람세스'로 불리게 된 것. [35] 세티 1세가 카데시를 정복할 무렵 그의 곁에는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람세스 2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람세스 2세는 이 곳에 아버지를 기리는 승전비를 세웠으나, 카데시가 워낙 히타이트의 본거지와 가까웠기에 이집트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카데시를 히타이트에 내줄 수 밖에 없었다. [36] 리비아 지방의 유목민들은 점차 이집트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37] 람세스 2세는 포로로 잡아들인 해적들 중 능력좋은 자들을 골라 자신의 친위대로 삼았다. 심지어 카데시 전투에서도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38] 이 부분에서는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기록이 엇갈린다. 히타이트에서는 자신들이 대승을 거두고 람세스 2세는 도망쳤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이집트 측에서는 갑자기 람세스 2세가 신이 되어 무쌍을 찍고 히타이트 병사들 대부분을 전멸시키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나온다. [39] 최초로 양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맺은 평화조약이라는 역사적 의의 덕분에 현재 이 조약을 새긴 점토판의 복사본이 국제연합 본부에 전시되어 있다. [40] 그의 미라를 부검해 본 결과 람세스 2세는 죽을 즈음에 굉장한 충치 관절염, 그 외 수많은 지병들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41] 그의 무덤은 왕가의 계곡에 지어졌고, 현재는 KV7 무덤으로 불린다. [42] 참고로 메르넵타의 시대에 만들어진 석비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내용은 '이스라엘은 완전히 쓸려나갔다.... 그들의 후손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정도 의미였다. [43] 3~4년 밖에 파라오직을 유지하지 못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44] 투스레트는 집권 2년 만에 쫒겨났다. [45] 이 파업은 뜻을 이룸을 했으며 노동자들은 밀린 임금을 정상적으로 받았다. [46] 고고학자들은 목에 찔린 상처 외에도 람세스 3세 미라의 왼쪽 엄지 발가락이 도끼 등 흉기로 인해 잘려나간 것을 확인했다. 절단된 부위가 뼈 재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죽기 직전에 만들어진 상처로, 아마 목 부위의 치명상과 동일한 시기에 입었다고 추정한다. [47] 8400명에 이르는 원정대원 도중 900여 명이 넘는 수가 고된 일에 지쳐 사망했다고 한다. 사망률은 약 10.7%였으나 기록에 남지 않은 사망자들까지 합치면 이보다 더 높을 가능성이 크다. [48] 왕가의 계곡의 KV2 무덤에 안장되었고, 그의 미라는 현재 이집트 문명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49] 람세스 5세는 역사상 알려진 가장 오래된 천연두 사망자다. [50] 고고학계에서는 KV9 무덤이라고 부른다. 물론 약탈당해 현재는 부서진 관과 일부 부장품의 파편들만이 남아있다. [51] 참고로 람세스 6세는 즉위 이후 람세스 5세를 위해 예정되어 있었던 무덤을 자신의 것으로 빼앗아 더 확장하고 제 시신을 안장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투탕카멘의 무덤 입구가 흙에 묻혀 가려지면서 람세스 6세 사후 일어날 대대적인 왕릉 약탈을 피할 수 있었다. [52] 다만 이같이 파라오가 전대 파라오의 무덤을 대놓고 도굴하는 사례는 신왕국 시대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파라오 자신도 죽어 무덤에 묻힐 텐데, 함부로 남의 무덤을 도굴하기에는 명분도 실효성도 떨어졌기 때문. 그러나 신왕국이 망하고 본격적인 혼란기인 제3중간기 시대부터는 파라오고 뭐고 신나게 무덤들이 털렸다. [53] 람세스 11세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20왕조를 끝장내고 들어선 제21왕조의 파라오들은 그의 무덤을 파내고 선대 파라오들의 부장품들을 공급할 보물 창고로 활용했으며, 고대 이집트 시대가 끝난 이후에는 콥트 교회의 은자들이 거하는 장소로 쓰이면서 파라오는 수 천년 간 안식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