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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 메리트의 무덤 |
قبر الخا والجدارة
Tomb of Kha and Me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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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제18왕조의 왕릉 건설 감독관이던 카(Kha)와 그 아내 메리트(Merit)의 무덤. TT8이라고도 한다.투탕카멘의 무덤이 파라오의 무덤의 상징이고, 유야와 투야의 무덤이 대귀족 무덤의 대표라면 이 카와 메리트의 무덤은 상류 중산층 무덤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생전에 쓰던 음식, 의복, 가구들이 대거 출토됐기 때문에 제18왕조 당시 평민 중산층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알게해준 무덤이기도 하다.
카와 메리트의 무덤은 봉인 직후 산사태로 인해 거대한 돌잔해와 토사에 깔리면서 기적적으로 도굴꾼들의 침입을 피할 수 있었다. 1905년 2월 이탈리아의 이집트학자 에르네스토 스키아파렐리가 완벽히 온전한 상태로 발견했으며, 석관과 미라는 물론 의자와 침대, 옷, 음식, 도구, 상자, 가재도구 따위가 쏟아져나왔다. 다만 발굴 당시 이집트는 아직 문화재 보호법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모든 부장품들은 발굴 직후 이탈리아로 운송됐고, 현재는 토리노의 이집트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2. 카와 메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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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채 자녀들로부터 공물을 받는 카와 메리트 부부 |
카는 아멘호테프 2세 재위기에 경력을 시작했으며, 친한 지인인 네페르헤페프 아래에서 왕릉 공사를 감독했다.[2] 카는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올려 투트모세 4세 시절에 '위대한 궁전의 장(ḥry m st Ꜥꜣ(t))'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아멘호테프 3세 때에 '위대한 궁전의 관장자(imy-r kꜣ(w)t m st Ꜥꜣ(t))', '중앙 행정부의 업무 책임자 (imy-r kꜣ(w)t pr-Ꜥꜣ)', '왕실 서기관(sš nswt)' 등의 칭호를 받는 등 승승장구하며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
제법 높은 곳에 올라간 인물답게 생전 여러 물건들을 하사받았다. 아멘호테프 2세로부터는 금박 큐빗 막대를 하사받았고 아멘호테프 3세로부터는 청동 그릇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파라오가 관리들에게 오랜 봉사에 대한 선물로 하사한 '영광의 금(nbw n ḥswt)'도 받은 고참 관리였다. 누구에게 영광의 금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의 미라가 착용한 보석 양식을 봤을 때 투트모세 4세나 아멘호테프 3세인 것으로 추정. 카는 이미 투트모세 4세 시절부터 자기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관의 제작 스타일과 무덤 장식 기법을 봤을 때 대강 아멘호테프 3세 재위 30년인 기원전 1360년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메리트(Merit)는 카의 아내였다. 그녀는 기혼 여성들이 으레 받던 칭호인 '집의 여주인(nbt pr)'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녀가 묻힌 관이 원래는 카를 위해 준비된 관이었던 것을 보면 아마 예측치 못하게 메리트가 먼저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와 메리트는 아메네모메트, 나크테프타네브라는 아들 2명과 메리트라는 딸 1명 이렇게 총 3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메네모메트는 아버지를 따라 데이르 엘 메디나에서 일하며 '왕실 묘지의 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나크테프타네브는 가족 제사를 담당했으며 메리트는 훗날 아문의 여사제가 되었다. 모든 자녀들은 요절한 어머니 메리트보다는 오래 살았으나 아메네모메트는 아마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3.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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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르 엘 메디나 |
스키아파렐리는 계곡 입구에서부터 발굴을 시작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250명 이상의 일꾼들이 여러 조로 나뉘어 4주 동안 계곡을 샅샅이 뒤졌지만, 기껏 발굴한 모든 무덤들은 이미 죄다 도굴당한 상태였다. 변색된 석회암 조각들이 뼈, 도자기, 천 쪼가리들과 섞여있는 것을 발굴한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1906년 2월, 계곡의 3분의 2를 꼼꼼히 뒤지고 난 이후에야 그들은 카와 메리트의 예배당에 북쪽으로 25m 떨어진 곳에서[3] 깨끗한 백색 석회암 돌덩어리들이 쌓여있는 장소를 발견했다.
여기다 싶었던 스키아파렐리가 이틀간 그 곳을 파고들어가자 거칠게 깎은 내리막 구멍이 있는 울퉁불퉁한 구멍이 드러났다. 계단 아래의 출입구는 돌을 쌓아만든 석회암 벽으로 봉인된 상태였다. 스키아파렐리는 봉인벽에 훼손 흔적이 없는걸 보아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현장감독이 문에 구멍을 뚫어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고, 발굴단의 감독관 벤베누토 사비나와 알레산드로 카사티가 밤새 눈을 부릅뜨고 무덤 입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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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 메리트의 예배당 | 무덤 내부 복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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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매장실 사진에 색을 입혀 재구성한 모습 |
웨이갈이 제일 먼저 매장실에 발을 디뎠고 스키아파렐리와 팀원들이 뒤를 따랐다. 매장실은 3,000년 전 장례사들이 장중히 정리하고 봉인한 그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리넨 수의로 덮인 카와 메리트의 검은 목관은 각각 뒤쪽과 오른쪽 벽에 놓여있었다. 왼쪽 벽에는 메리트의 침대가 있었는데, 이불, 담요, 머리받침 한 쌍도 함께 있어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침대 발치에는 화장품 상자가 있었으며 근처에는 큰 가발 상자가 있었다. 맞은편에는 화환을 두른 채 의자 위에 서있는 카의 조각상이 있었다. 나머지 공간은 리넨 의자, 빵, 플라타너스와 페르세아 가지, 도자기, 설화석고 항아리, 상자, 야자수 그물, 그래고 매장실 밖에 있던 것과 비슷한 등불 받침대 따위로 가득했다. 고고학자들은 3,0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무덤의 부장품들의 완벽한 보존도에 감탄했다. 웨이갈은 불과 몇 달 전에 봉인된 것 같다라는 감탄사를 남겼다.
당대 이집트의 치안 상황을 감안했을 때 언제 도둑이나 강도가 침입해 부장품을 훔쳐갈지 몰랐기에, 스키아파렐리는 불과 3일만에 모든 부장품들을 쓸어서 기록, 사진 촬영, 정리했다. 주요 부장품 18개의 원래 위치를 기록한 평면도를 그리고 내부 사진을 몇 장 찍은 것이 끝이었다. 부장품들은 잠시간 여왕의 계곡 QV55 무덤에 안치되었다가 카이로로, 최종적으로는 이탈리아로 싸그리 옮겨졌다. 스키아파렐리는 이후 죽기 1년 전, 발견으로부터 무려 20년이나 지난 1927년에 회고록을 출판해 카와 메리트의 무덤 발굴기에 관한 내용을 적어 남겼다.[5]
무덤은 4m 깊이의 갱도와 8.50m 깊이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첫 번째 봉인문이 나오는 구조다. 문을 깨면 총 길이 13.40m의 짧은 복도가 나오고, 이 복도 한가운데에 두 번째 봉인문이 세워져 있었다. 두 번째 봉인문이 복도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첫 번째 복도는 거칠게 깎였고 길고 낮은 형태라면 두 번째 복도는 매끄럽게 깎였으며 높고 짧은 모습이다. 특히 이 두 번째 복도에 매장실에 들어가지 못한 부장품들을 일부 보관했기에 복도가 아니라 '전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복도 끝에는 축과 직각으로 배치된 매장실이 있다. 방의 크기는 5.6m X 3.4m이며 높이 2.9m의 아치형 천장이 있다. 매장실의 벽은 매끄럽게 깎고 회반죽을 바른 뒤 노란색으로 칠해 마감했지만 그 외에 특별한 장식은 없었다.
4. 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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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 메리트의 미라 | 3D로 구성한 카의 미라 내부 |
장기를 제거하지 않은 점 때문에 대충대충 염하고 미라로 만든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왔으나, 내부를 CT로 찍어본 결과 대충은커녕 눈과 시신경을 포함한 장기들이 대단히 잘 보존되어 있는 등 매우 신경써서 만든 미라임이 밝혀졌다. 카의 방부 처리제는 동물성 지방, 식물성 기름, 식물 추출물, 검, 침엽수 수지를 섞어 만들었으며 메리트의 방부 처리제는 생선 기름, 식물성 추출물, 검, 수지, 밀랍을 섞어 만든 것으로 서로 재료가 다르다. 두 방부 처리제 모두 구하기 어려운 고급품으로 일부는 이집트 국외에서 수입해왔다. 미라를 건조할 때 쓰는 주요 건조제인 나트론도 가득 사용해서 메리트의 관에는 흰색 반점이 나타났을 정도.
여러 겹의 리넨 붕대로 싸인 카의 미라는 몸 중앙을 따라 세로로 내려오는 이중 겹 리넨 붕대로 고정되어 있으며, 어깨, 엉덩이, 무릎, 발목에 4개의 가로 띠를 둘러 교차고정시켰다.[6] 카의 미라에는 장례용 가면이 없다. 아마 아내 메리트를 위해 자기가 쓸 가면을 넘겨준 것으로 보이는데, 왜 나중에 따로 자기 가면을 제작하지 않았는지는 의문. 그의 미라는 약 168cm, 팔을 뻗은 채 등을 대고 누워있는 모습으로 손은 치골 위에 올려져 있는 자세다.
카는 50대나 60대 즈음에 사망했다. 상당히 건장한 체격으로 생전 추정 키는 약 171cm ~ 172cm 정도. 사망 당시에도 그 나이치고는 굉장히 건강한 상태였다. 다만 치아 상태는 썩 좋지 않았으니 이미 위턱의 모든 소구치와 어금니, 아래턱의 어금니 여러 개가 이미 빠져버린 상태였다. 무릎과 허리에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많은 동맥 혈관에서 석회화 현상이 진행되던 상태였다. 그의 담낭에는 무려 14개의 담석이 있었다. 특히 그의 오른쪽 팔꿈치에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는데, 아마 건축가인 카의 직업병인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2005년 CT 촬영에서 카의 첫 번째 척추 요추가 골절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살아생전 입은 상처는 아니고 미라화된 이후 부서진 것으로 추정된다. 놀랍게도 내부 장기를 전혀 제거하지 않은 채 그대로 미라화했으며, 붕대와 미라 사이에 약간 틈이 있는 걸 봐서는 미라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붕대를 감아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카의 미라에는 여러 장신구들이 달려 있다. 목에는 거대한 황금 구슬 목걸이가 달려있는데, 아마 파라오가 충성의 대가로 하사한 '영광의 금'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제18왕조 이래로 파라오가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내린 것으로 아이, 호렘헤브 등 다른 귀족들의 조각상에도 등장하는 귀한 목걸이다. 다만 격은 약간 낮아 다중 가닥이 아닌 딱 구슬 한 가닥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차이점. 뿐만 아니라 큰 황금 귀걸이 한 쌍을 착용 중인데[7] 이 역시 영광의 금들 중 하나였다. 미라의 손에는 무려 6개의 반지를 착용 중이다. 타원형 난집 3개,[8] 직사각형 난집 1개, 2개는 도자기나 돌 난집으로 장식했다.
그 외에도 여러 보석류들이 카의 미라 붕대속에 켜켜이 들어있는데, 이건 실생활에서 쓰던 게 아니라 모두 장례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보석들이다. 금사(金絲)나 금사슬이 달린 돌 스카라베, 도자기 티옛 부적, 그리고 미라의 팔에 채워놓은 팔찌 2개 따위가 있다. 특히 카의 이마에는 홍옥으로 만든 뱀머리 부적이 하나 붙어있다. 원래 이 부적의 용도는 망자가 내세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보통 목 위에다 올려놓는다. 그런데 이마에 뱀 모양의 부적을 올려놓은 것은 아마 파라오의 이마에 장식하는 태양 원반을 진 뱀 장식 '우라에우스'를 어설프게 따라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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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트의 미라 |
메리트의 미라는 약 147cm로, 생전에는 이보다 큰 160cm 정도로 추정된다. 팔을 뻗고 손을 음모 위로 교차한 채 등을 대고 누워있는 편안한 자세다. 워낙 일찍 요절한 메리트인지라 사망 당시 연령은 약 25~30세 정도의 대단히 젊은 나이로 추정. 그녀는 머리에 길고 주름진 가발을 쓰고 있는 상태인데 약간 오른쪽으로 가발이 돌아갔다.[9] 그녀의 치아는 남편보다는 나았지만 이미 몇몇 어금니와 소구치가 빠져버린 상태였고, 남은 것들도 상당수 충치가 있는 상태였다. 메리트의 미라는 남편의 미라보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서 사후에 시체가 손상을 입어 척추와 갈비뼈가 여러 개 부러져버린 상태였다. 그녀의 죽음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왜 그녀가 요절했는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카처럼 메리트의 미라 역시 금속 장신구를 착용한 상태였다. 그녀의 목에는 고운 금구슬을 꿰어만든 줄 3가닥으로 만든 목걸이가 둘러 있었다. 하지만 보존 상태는 썩 좋지 않아서, 이미 줄은 터진 지 오래라 구슬들은 흩어지고 미라 붕대 내부에 구석구석 굴러가버렸다. 그녀의 귀에는 귀걸이용 구멍이 2개나 뚫려있어 후프 금귀걸이를 착용 중이다. 왼손에는 무려 4개의 금반지가 끼워져 있는데, CT 촬영 결과 어깨 뒤에 또다른 반지를 찾아냈다.[10][11] 허리에는 소라 모양으로 만든 금속 구슬 허리띠가 채워져 있었으며 양 손목에는 금속 및 비금속 링 10개로 이루어진 화려한 팔찌 하나씩을 찬 상태다. 목걸이와 허리띠와 비슷한 디자인인 것으로 추정. 워낙 급작스럽게 요절한 터라 그녀의 미라에서 장례용 부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5. 부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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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의 목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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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의 목관 | 메리트의 목관 |
다양한 상자와 내부 물품들에는 카와 메리트의 이름과 함께 어떤 용도로 쓰는지 간단한 라벨과 잉크로 쓴 축복이 붙어있었다. 망자가 내세에서 먹을 수 있도록 다양한 종류의 빵, 고기, 야채, 과일, 와인 따위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며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고. 부장품의 질과 양을 따져봤을 때, 왕족이나 귀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웬만한 평민은 꿈도 못꿀 만한 양의 부장품이었다. 그야말로 상류 중산층의 전형. 이 무덤 덕분에 이집트 신왕국 시기 평민과 중산층의 삶에 대한 연구가 크게 진척됐다. 베일에 싸여있던 고대 이집트 평민들의 음식, 의복, 개인 소지품 관련 유물이 이 무덤에서 대거 출토됐기 때문.
사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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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트의 데스마스크 메리트의 데스마스크는 리넨을 겹친 뒤 석고로 굳혀 만들었다. 상감처리한 눈은 설화석고와 흑요석으로 박아넣었고,[12] 눈썹은 푸른 돌로 박았다. 표면은 금박으로 덮었고[13] 가발에다가 푸른 물감을 발라 푸른 줄무늬를 넣었다. 목의 넓은 칼라는 홍옥, 푸른색 돌,[14] 터키석을 번갈아가며 넣어 만들었다. 이 가면은 원래 남편 카(Kha)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아내 메리트가 요절하면서 대신 씌워진 것이다. 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데스마스크를 쓰고 묻히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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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의 최외곽 목관 카의 최외곽 목관. 길이는 3m이고 검게 칠해진 서양측백나무로 제작됐다.[15] 발굴 당시에는 15m X 2m 짜리 리넨 천에 덮여있었으며 워낙 사이즈가 커서 무덤 내부에서 조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신전 형태의 몸체와 아치형 뚜껑을 가진 이집트 목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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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의 두 번째 목관 카의 두 번째 미라형 목관. 망자는 긴 가발과 칼라를 두른 채 가슴에 팔을 교차한 모습이다.[16] 검은 바탕에 금박으로 띠를 둘렀으며 가슴팍에는 네크베트, 머리에는 네프티스, 발치에는 이시스가 새겨졌다. 발굴 당시에는 사자의 서와 화환으로 온통 덮여있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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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의 세 번째 목관 카의 세 번째 미라형 목관. 두 번째 관과 거의 비슷하나 통째로 금박으로 덮여있다. 두 눈과 눈썹은 돌과 유리로 상감했고 청동사로 고정했다.[17] 일반 평민들이 쓸 법한 관은 아니고 왕실 작업장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걸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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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트의 최외곽 목관 남편 카의 목관과 거의 비슷한 디자인이나 약간 더 작은 2.28m이고 바닥 쪽에 썰매 장식이 없다. 마찬가지로 별 장식이 없는 서양측백나무로 제작한 뒤 검은 칠을 한 전형적인 이집트식 목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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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트의 두 번째 목관 위쪽은 통 금박으로, 아래는 검은 바탕에 금띠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2개의 세트를 합쳐서 만든 것이기 때문. 카의 관에 비해 품질도 낮고 얼굴 조각도 거칠며 신의 모습도 대강 표현되어 있으며 텍스트도 석고 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그냥 새겨놨다.[18] 내부에는 여신 누트의 모습이 그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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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박 큐빗 막대 아멘호테프 2세의 이름이 새겨진 큐빗 막대. 카가 왕실에게서 하사받은 것으로 감독관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상징하는 기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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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그릇 아멘호테프 3세의 왕명이 새겨진 청동 그릇. 카의 공로와 업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내려진 하사품으로, 왕실 작업장에서 제작된 고급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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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트 게임판 본디 카르나크 신전의 아문 신관 베네르메레트의 것이었다. 부모 네페르헤페프와 타이우네스를 위해 만든 세네트 게임판인데 어쩌다가 카의 무덤에 묻히게 되었는지는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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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트의
가발 고대 이집트인들은 남녀 모두 가발을 썼다. 옆의 가발은 무려 3,700년이나 된 메리트의 가발로, 젖었을 때 땋아서 고정하고 마르면 따로 땋지 않아도 자연스레 주름이 잡힌 효과를 준다. 현재까지 보존된 몇 안되는 고대 이집트의 가발로 그 가치가 높다. 착용 시 메리트의 머리 전체를 덮지 못했을 것이며, 아마 원래 있는 머리카락 위에 패션으로 추가하는 머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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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상자 무덤에서는 다양한 크기와 스타일의 상자 13개가 발견됐고, 개중 3개는 카와 메리트가 아들로부터 제물을 받는 모습을 그린 상자였다. 이 상자는 카와 메리트가 아들 중 하나인 '나크테프타네브'에게서 공물을 받는 모습을 묘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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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모양 그릇 연푸른 유약을 발라 구운 그릇. 실제 카와 메리트가 쓰던 그릇으로 연꽃 꽃봉오리 모습이 그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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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서 카와 메리트가 내세로 건너갈 때 필요한 주문과 대처법을 적어놓은 책 사자의 서. 총 33장에 너비 34cm, 길이 1,380cm에 달하는 기다란 규모로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사자의 서 사본들 중 하나다.[19] 발견 당시에는 카의 관 위에 펼쳐져 있었다. 메리트의 사자의 서도 따로 있는데 이건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보관 중이다.[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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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침대 무덤에서는 카의 침대 1개와 메리트의 침대 1개가 발견됐다. 무덤에서 가장 큰 가구로, 특히 카의 침대는 워낙 커서 매장실 밖에 놔두었다. 메리트의 침대는 머리받침, 시트, 담요 따위와 함께 발견됐다. 옆의 사진은 카의 침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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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의 조각상 카의 모습을 묘사한 목재 조각상. 의자 위에 놓여있었다. 높이 43cm의 작은 조각상으로 킬트를 입은 채 앞으로 걸어가는 카를 조각했다. 멜릴롯 잎으로 만든 화환이 어깨에 걸렸고 발치에도 하나 더 있다. 검은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평범한 조각상으로 '카의 영혼이 아문에게 바치는 제물상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도록'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받침대에는 카의 영혼이 내세에서 빵, 맥주, 닭고기, 우유, 술, 리넨, 석고 등 여러 제물들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주문이 새겨졌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무덤에 이런 조각상을 넣는 경우가 흔했다.[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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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티 카는 딱 2개의 샤브티와 함께 묻혔다. 샤브티란 내세에서 망자가 해야할 일을 대신 해주는 하인으로, 귀족들은 수십 수백개의 샤브티와 묻혔지만 지위가 그보다 낮은 카는 고작 2개만 가져갈 수 있었다. 샤브티도 따로 관과 내세에서 쓸 농기구를 받았으며 카의 관 바로 앞뒤에 안치됐다.[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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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의자 카의 조각상이 올려져 있던 의자. 나무를 깎은 뒤 정교하게 칠해서 만든 썩 세련된 의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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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접이식 의자 무덤에서는 카와 메리트가 생전에 사용하던 총 13개의 다양한 의자들이 발견됐다. 개중 가장 특이한 것은 바로 이 접이식 의자다. 상아로 상감 세공된 오리머리 장식 접이식 의자로, 앉는 부분은 가죽으로 만들었다. 접이식이라 휴대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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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상자 메리트의 화장품을 담은 상자. 장례식을 위해 특별히 장식됐다. 나무 빗, 연고와 향유를 담은 설화석고 도자기 용기 등이 있었다. 특히 향유 항아리와 코흘 가루[23] 용기는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푸른 색유리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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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도구들 카는 생전 왕릉 공사 감독관이자 책임자, 건축가였다. 그랬기에 내세에도 그가 생전에 쓰던 도구들을 가지고 갔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도끼, 끌, 수평대, 저울 등 여러 건설 도구들이 무덤에서 함께 출토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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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상자 카의 수많은 목재 상자들 중 하나. 대부분의 상자들은 아무 장식 없는 거친 목재지만 위의 상자나 옆의 상자처럼 화려하게 장식이 된 것들도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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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석 팔찌 터키석으로 만든 팔찌. 무덤에서는 터키석 팔찌 한 쌍이 출토됐다. 크기를 봤을 때 아마 메리트가 차고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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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용 항아리 무덤에서는 여러 항아리들이 출토됐다. 와인, 맥주, 향유 등 액체를 담고 있던 항아리들로, 일부는 봉인이 깨졌지만 상당수는 봉인이 유지되어 내용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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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의 튜닉과 로인클로스 카의 튜닉과 로인클로스. 모두 거친 리넨으로 만들어졌으며 튜닉 19벌, 로인클로스 59벌, 4개의 숄, 26개의 천조각이 출토됐다. 특히 이 천조각들 중 7개는 로인클로스에 묶어서 옷을 장식하는데 썼다고. 보존 상태가 지극히 양호해서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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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받침대 무덤에서는 파피루스 줄기 모양의 등잔 받침대 2개가 발견됐다. 이런 종류의 등잔 받침대는 이 무덤을 제외하면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발견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문화재로 꼽힌다. 하나는 매장실 밖, 하나는 매장실 안에서 발견됐는데, 매장실 안에 있는 받침대에만 청동 등잔이 얹혀있었으며 무덤을 봉인하는 순간에도 심지가 타고 있었던지 반쯤 기름이 남아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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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의 머리 받침대 나무로 만든 머리 받침대. 고대 이집트식 베개다. 여기에 그대로 머리를 댄 것은 아니고 천이나 쿠션을 댄 다음 그리고 머리를 얹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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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시툴라 시툴라란 위에 손잡이가 있고 정교하게 장식된 항아리를 의미하는 라틴어다. 이 시툴라들은 카가 선물로 받은 것으로, 투트모세 1세의 아내 무트노프렛과 아흐모세 1세의 딸 시타문의 장례사제 우셰르하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런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을 정도로 카의 지위가 꽤 높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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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무덤에서는 3개의 지팡이가 발견됐다. 맨 왼쪽 지팡이는 청동 손잡이에 나무 몸체로, 카와 함께 일했던 카엠와세트가 준 선물이다. 오른쪽의 2개는 나무 지팡이에 옷가지를 둘러 만든 지팡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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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받침대 수많은 화병과 도자기, 그리고 그 받침대들이 발견되었는데, 옆의 받침대는 개중 가장 화려한 청동제 받침대다. 11cm X 12.5cm 정도의 작은 크기로 당시로서는 꽤나 사치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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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무덤에는 망자가 내세에서 먹을 수많은 식료품들이 쌓여있었다. 여러 형태와 크기의 빵이 가장 많았고 포도주도 봉인된 채 보관된 상태였다. 고기 덩어리와 구운 새고기는 소금을 뿌려 항아리 안에 넣어놨고 소금에 절인 생선, 양념 채소, 마늘과 양파 묶음, 커민 씨앗 바구니 따위가 있었다. 과일도 있었는데 대추야자, 포도, 대추, 무화과, 야자 열매, 아몬드, 야생 베리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7종류의 신성한 장례용 향유도 13병씩이나 발견됐으며 요리할 때 필요한 가재도구들도 함께 출토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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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페르헤페프의 이름은 카의 무덤에 보기 좋은 자리에 아내와 함께 새겨져 있으며 무덤에 있는 각종 부장품에도 네페르헤페프의 이름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2]
무덤 안에 아멘호테프 2세의 선대왕인
투트모세 2세의 왕명이 발견된 것을 보아 투트모세 2세 시절부터 이미 공사판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었기도 하나, 그의 사망 나이와 재위표를 대조했을 때 투트모세 2세 시절에 그가 일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투트모세 2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이름이 여전히 곳곳에서 쓰이고 있었다는 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
[3]
원래는 예배당 앞뜰에 무덤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카와 메리트는 예배당과 약간 떨어진 절벽 바로 아래에 무덤을 만들어 도굴꾼들의 관심을 피했고, 게다가 무덤 봉인 직후 산사태가 발생해 무덤 입구가 거대한 토사로 뒤덮이면서 도굴꾼들로부터 완벽히 차단되는 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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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이 나무 문의 모습이 너무나 현대적이어서 스키아파렐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인에게 '저 문의 열쇠를 이리 내게'라고 말했고 하인은 또 진지하게 '열쇠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을 정도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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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나 지나서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는지 스키아파렐리는 상당히 많은 오류를 남겼다. 발견 날짜를 언급하지 않거나 메리트의 화장품 상자가 이미 봉인이 풀린 상태였다거나, 빈 평면도와 고작 사진 3장만을 첨부해
세네트 게임판, 널빤지 탁자 같은 일부 미기재 부장품들의 위치에 대해선 모호하게 감춰버렸다.
[6]
2000년대의 복원 작업에서는 곰팡이 번식으로 약해진 리넨 붕대를 보호하기 위해 미세 나일론 그물을 둘러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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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금귀걸이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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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에서 보석알을 물어서 고정하는 부분을 '벤젤', 한국어로는 난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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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오른손잡이 방부사가 붕대를 감쌀 때 붕대의 왼쪽을 당겨 조이는 바람에 가발이 약간 오른쪽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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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오른손에 끼우려고 했다가 까먹었거나, 미라의 손가락이 헐거워져 뒤쪽으로 굴러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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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보존 작업 중 데스마스크 뒤에 붙어있던 2번째 반지도 있었다. 야자수 아래 방주 위에 서있는, 소로 변신한
하토르 여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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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발견 당시 눈 중 하나가 사라진 상태였다. 아마 가면이 원래 메리트를 위해 제작된 게 아니라 너무 사이즈가 커서 관에 넣자마자 가면이 폭 내려앉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지금 보이는 것은 후일 이탈리아에서 1967년, 2002년, 2004년에 여러 차례 복원 작업을 거친 것.
[13]
현재는 붉은색으로 변색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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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금석을 넣고 싶었겠지만 청금석이 너무 비싼 탓에 돌에 푸른 안료를 칠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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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물감은 피스타치아 수지와 기타 식물 추출물을 배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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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방해석에
흑요석을 박아 만들었고, 머리 꼭대기에는
밀랍이 소량 발라져 있다. 왜 밀랍을 발라놨는지는 의문. 아마 사제에게 축복을 받은 밀랍일 것이다.
[17]
발굴 당시에는 안쪽 관을 바깥쪽 관 안으로 내리는 데 사용된 붉은 아마 밧줄이 관의 발목과 목 주위에서 그대로 발견됐다. 관은 바깥 관 안에 채워진 나트론 층 위에 놓였고 꽃 화환이 가슴 위에 얹혀졌다.
[18]
아마 메리트가 워낙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아직 카가 더 비싼 관을 지불할 만큼 높은 관직에 올라가지 못했던 상태였을 것이다. 원래는 카의 것으로 준비했으나 일찍 떠난 아내를 위해 양보한 모양. 그래서 메리트의 몸에 비해 관이 다소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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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에 만들어진 사자의 서 사본 중에는 귀족 마이헤르프리와 유야의 서 등이 있다. 유야의 서와 같이 필기체 상형문자로 쓰여있지만, 차이점이라면 귀족인 유야는 개인 맞춤형으로 외모와 나이까지 맞춰서 그렸다면 아무래도 카의 책은 등장인물이나 주문들도 더 보편적인 보급형으로 그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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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메리트의 이름이 더 많이 언급되기 때문에 메리트의 것이라고 추정한다. 여자에게 따로 사자의 서 사본을 만들어 준 것은 상당히 독특한 사례다. 아마 사용되지 않고 남아있던 것을 그냥 하나 더 여분으로 넣어준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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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귀족들은 금과 은으로 이런 조각상들을 만들어넣었고, 때문에 도굴꾼들이 무덤을 털 때 1순위 먹잇감이 되어 현재는 살아남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남아있는 것은 별볼일 없는 돌이나 나무로 깎은 조각상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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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트는 따로 샤브티를 가져가지 못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배우자 간 불평등이 흔한 일이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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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들이 눈 주위에 바르던 시꺼먼 가루. 이 것을 코흘(kohl)이라고 한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악귀를 막아준다고 믿었고 실제로 이집트의 뜨거운 태양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효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