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5대 파라오
하트셉수트 Hatshepsu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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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하트셉수트 حتشبسوت | Hatshepsu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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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호 |
Ma'atkara Hatshepsut-khenmetamun 진실한 영혼이신 라, 아문과 결합한 하트셉수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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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1507년 | |
사망 | 기원전 1458년 (향년 50세)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479년 ~ 기원전 1458년 (약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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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투트모세 2세 | |
후임자 | 투트모세 3세 | |
부모 |
아버지 :
투트모세 1세 어머니 : 아흐모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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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투트모세 2세 | |
자녀 | 네페루레 | |
무덤 | 왕가의 계곡 KV20 | |
상형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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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제5대 파라오.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파라오이자 이집트 왕실의 공주였다. 많은 사람들이 하트셉수트를 최초의 여성 파라오라고 여기지만 고대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는 아니다. 그녀보다 이전 시대에 1~2명의 여성 파라오가 존재했고[1] 이중에서 확실하게 왕(파라오)의 지위에 오른 것은 소베크네페루 한명이므로, 여성으로서 파라오의 직위에 오른 것이 확실한 것으로는 두번째 여성 파라오다.[2]
2. 생애
기원전 1507년 투트모세 1세와 정비 아흐모세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친여동생 네프루비티(또는 네페르비티, 아크베트네페루)가 있었으나 그녀는 일찍 죽은 걸로 추정된다. 남매들(와즈모세, 아멘모세, 투트모세 2세) 중 한 명으로, 어머니가 달랐던 투트모세 2세와 결혼했는데, 이는 후궁 무트네페르트의 소생이었던 투트모세 2세의 왕위계승권을 위하여 치러진 정략결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남매간의 결혼은 고대 이집트 전반에 걸쳐 유행했다. 투트모세 2세와 하트셉수트 사이에는 딸 네페루레만 있고, 아들이 없어 투트모세 2세는 이세트라는 후궁을 맞아 아들이자 후계자인 투트모세 3세를 낳았다. 즉 투트모세 3세는 하트셉수트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투트모세 3세에게 하트셉수트는 계모이자 고모였다. 장모이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네페루레가 투트모세 3세와 결혼하여 첫 아들 아메넴하트(Amenemhat)를 낳았을 것으로 추정만 될 뿐, 둘이 확실하게 결혼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아메넴하트의 친어머니는 투트모세 3세의 첫 정비였던 사티아일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네페루레의 경우, 어머니 하트셉수트가 파라오로 활동하는 동안, 공식석상에서 공주 역할을 했으며 더 나아가 왕비 역할도 수행했다고 한다.투트모세 2세가 죽고, 후계자인 투트모세 3세가 너무 어려서 하트셉수트가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 시절에도 성문화된 법률로 안 보일 뿐이지, 수렴청정형의 섭정 풍습은 존재했다. 왕이 너무 어려 왕대비가 섭정을 하거나, 남편이었던 파라오가 갑자기 죽어 수년 동안 섭정 역할을 한 왕비의 기록은 신왕국 시대 이전에도 남아있었다. 하트셉수트 역시 처음에는 파라오가 아닌 섭정의 지위에서 통치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투트모세 2세 사후에 나온 관련 문헌들도 그녀를 섭정으로 설명하고, 투트모세 2세의 공식 후계자는 투트모세 3세라고 명시했다.
하트셉수트가 섭정을 시작했을때 투트모세 3세의 나이는 10살 미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완전히 파라오로 탈바꿈한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트셉수트의 외양이 수염을 단 파라오로 묘사되기 시작한 것은 최소 투트모세 3세 치세 7년 후부터이다. 이후 20여년동안 하트셉수트는 정치•군사적 실권을 쥐고 투트모세 3세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렸다. 공동 통치기에는 하트셉수트의 권력이 투트모세 3세의 권력보다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라오' 하트셉수트를 묘사한 석조 조각이나 벽화는 남자와 비슷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파라오가 되기 위해선 여성의 속성을 지워낼 필요가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파라오의 표식이 남성적인 아이템들이라 하트셉수트가 남성적으로 묘사가 되었는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다만 확실한건 즉위 이후의 하트셉수트는 단순히 남자 파라오의 장식을 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체나 자세도 남자에 가깝게 묘사된다는 점이다. 초기 묘사는 여성적인 자세나 생김새가 두드러지지만, 후기로 갈수록 자세는 빳빳해지고 가슴이 작아진다. 장제전[3]에 조각된 하트셉수트는 설명없이 보면 그냥 남자다. 양성적인 묘사와는 거리가 있다.
참고로 가짜 수염과 같은 복장은 조각상이나 무덤 부장품에서 묘사되지만 남성 파라오 또한 실제 생전의 평상시에는 이런 길쭉한 수염 등의 복장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특수한 상황에서 의례용 가짜 수염을 붙이는 것은 남성 파라오도 마찬가지였고, 얼마나 자주 이런 복장을 했는지 여부도 불확실하다고 한다.
하트셉수트는 누비아, 레반트, 푼트[4] 등 주변국과의 무역에 힘써 많은 이득을 얻어내고 힉소스의 잔재를 씻어냈으며, 오리엔트 일대에 다시금 이집트의 위상을 높였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그녀를 내치에 힘쓴 군주로 평가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녀의 무역에 군사적인 원정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트셉수트의 치세는 이집트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길고 번영한 시대의 서막을 열었으며 그녀는 이집트의 가장 성공적인 치세를 이룬 파라오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 18왕조 번영의 토대를 이룩한 시기라고 해석되기도 하며, 그 증거로 제세르 제세루(장엄 중의 장엄)[5]이라고 불리는 하트셉수트의 거대한 장제전이 있다.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 옆에 세워진 하트셉수트의 거대한 장제전은 암벽을 깎아 아문 신의 성역을 조성하고, 아누비스 예배당과 하토르 성소를 비롯한 각종 제실, 그리고 자신의 탄생 설화와 푼트 원정 등을 부조로 남겨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하트셉수트가 이룬 성과를 기반으로 투트모세 3세는 제 18왕조 최대의 영토와 번영을 이룩하였다.
(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기원전 1458년 1월 16일 사망하였다. 신왕국 시대 파라오들이 그랬듯이 그녀 또한 왕가의 계곡에 묻혔으며, 장제전 암벽 바로 너머의 KV20이 그녀의 무덤이다.
1903년 하워드 카터는 KV60 무덤에서 신원 불명의 여성 미라 2구를 발굴한다. 그 중 한 구는 하트셉수트의 유모로 밝혀졌고, 나머지 한 구는 여전히 신원 미상이었다. 그러던 중 2007년 하트셉수트의 이름이 적혀있는 항아리에서 발견된 치아와 미라의 없어진 치아 부분이 정확히 일치함에 따라 그 미라가 하트셉수트임을 알게 되었다. 미라는 꽤 보존 상태가 좋은 채로 남아있어서 165cm의 키에 살짝 살집이 있는 체형의 여성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연구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50대에 즈음 암의 일종인 골종양이 전신으로 퍼졌기 때문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 관절염, 치주염을 비롯한 충치가 발견되었다.[6] 미라의 사진을 보고 싶으면 이 항목 참조.
3. 투트모세 3세와의 관계
룩소르 북쪽, 아비도스에 있는 세티 1세의 장제전에는 제 1왕조를 세운 나르메르에서부터 19왕조의 2-3대 파라오인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까지 76명의 역대 파라오들의 이름과 재위기간이 기록된 '아비도스 왕명표'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유일신 아텐 신앙을 중심으로 개혁을 했던 아케나톤과 그 후계자인 투탕카멘, 그리고 하트셉수트의 왕명이 누락되어 있다. 또 하트셉수트가 세운 기념물이 파괴되었고 이집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행위인 '이름의 삭제'가 행해져서 하트셉수트가 세상을 떠난 뒤 왕위를 회복한 투트모세 3세가 자신을 쩌리로 만든 하트셉수트에 대한 보복으로 기록말살형에 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한 때 정설처럼 받아들여졌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여러 매체에서 이 설을 진실처럼 얘기하고 있다.하지만 고대 이집트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이집트학의 깊이가 깊어지고 여러 기록물들이 추가로 계속 발견되면서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를 미워하여 기록을 말살했다는 설은 이집트 학계에는 거의 죽은 학설이 되었다.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두 사람의 불화설을 부정하고 있다.
- 투트모세 3세는 정당한 후계자였고 하트셉수트는 정당한 대행자였다. 투트모세 2세의 외아들인 투트모세 3세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 권리라 여기에 대해 다른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듯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 3세의 가장 정당한 대행자라서 역시 여기에 대해 반발이 나오기 어렵다. 정치적으로 정당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할 경우 대개 심한 반발이 나오지 않는다.
- 투트모세 3세로서도 하트셉수트가 왕권을 대행한 것은 조선의 정희왕후 윤씨가 성종의 수렴청정을 했던 것처럼 일선에 나서기 이전 보호자로서 그 기반을 마련해 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투트모세 2세가 사망했을 당시 투트모세 3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반드시 정치를 대신할 자가 필요했는데 이걸 하트셉수트가 맡아 하는 것이 투트모세 3세 자신에게도 가장 유리할 뿐만 아니라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럼 정비인 하트셉수트를 놔두고 후궁인 생모가 대신할까? 아니면 단종이나 건문제 꼴 나라고 숙부가 대신할까?
- 투트모세 3세가 어느 정도 자라자 하트셉수트가 이렇다 할 방해공작 같은 거 없이 자신의 공통 통치자로서 자리를 마련해 준다. 투트모세 2세 사후 한동안 하트셉수트의 이름만 나오던 기념비나 기념벽화에 투트모세 3세가 10대 중반이 될 즈음부터 두 사람의 이름이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공동 통치가 실제로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
- 공동 통치 22년째에 하트셉수트가 죽었는데, 만약 하트셉수트와의 사이가 나빴다면 당연히 훼손되었어야 할 그녀의 장제전과 무덤이 멀쩡히 남아있다. 하트셉수트의 무덤이 훼손된 것은 도굴꾼들에 의한 것으로 의도적 훼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를 그렇게 증오했다면 당연히 그녀를 도와 정사를 봤던 여러 중신들에 대한 숙청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트셉수트 시대의 중신이 그녀 사후 그대로 투트모세 3세의 정사를 보좌하고 있는 기록만이 존재할 뿐이다.
- 하트셉수트의 이름이 지워지는 시기는 그녀 사후 20년이 지난 시점으로, 투트모세 3세가 아득바득 분노의 칼을 갈았다면 20년 동안이나 기다릴 이유가 없다.
- 투트모세 3세의 두 번째 정비로 그의 후계자인 아멘호테프 2세를 낳은 여인은 '라의 사랑을 받는 하트셉수트[7]'이다. 만약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를 쌍심지를 켜고 증오하고 있었다면 자기 배우자의 이름에 하트셉수트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걸 좋게 생각했을 리 만무하다.[8]
- 투트모세 3세의 장제전이 하트셉수트의 장제전과 너무 가깝게 붙어있다. 만약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를 찬탈자로 여겼다면, 장제전을 때려부수진 못할 망정 자신의 장제전과는 최대한 떨어뜨려 두었을 터인데 두 장제전은 서로 이웃하고 있다.
(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옆에 붙어있는 잔해들 중 앞부분은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이고, 뒤쪽이 투트모세 3세의 장제전이다.)
마지막으로 하트셉수트의 기념물 중 파괴되지 않고 멀쩡하게 남아있는 기념물이 너무 많아서, 하트셉수트를 겨냥한 파괴 행위가 진짜 있었는지도 의문스럽다. 여기에 건축사업을 시행할 능력이 없었던 후대의 파라오들이 전대 파라오들의 기념물들에 새겨진 이름을 파내고 자신의 이름을 새겼음을 상정한다면[9], 투트모세 3세가 악의적으로 용의주도하게 하트셉수트의 흔적을 삭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워서 이름을 지운 게 아니라, 건물을 다시 짓기 버거우니 그냥 이름만 지우고 재활용했다는 얘기.[10]
왕명표 문제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역사가인 마네토가 편찬한 왕명표에 그녀의 이름이 남아있으므로, 아비도스 왕명표에서는 공동 통치를 펼쳤기 때문에 투트모세 3세의 이름만을 기입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훗날 하트셉수트 장제전과 멘투호테프 2세 장제전 사이에 건립된 투트모세 3세의 장제전은 지반이 침하되어 공중분해되었고, 카르나크 신전에 바로 이웃하여 있던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의 오벨리스크 중 투트모세의 것만 뜯겨져 나가 터키 이스탄불의 히포드로메에 장식되어 있다. 범인은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대제.
4. 여담
엘렉트라 콤플렉스 의혹이 있다. 그녀의 무덤인 KV20은 본래 그녀의 아버지 투트모세 1세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던 것인데, 하트셉수트가 후일 그 무덤을 증축하고 자신의 장제전을 그 앞에 건축함으로써 아버지와 합장되기를 원했다는 것. KV20에서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1세의 관이 함께 발견되면서 그녀의 파더콤 의혹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다만, KV 20무덤의 하트셉수트의 석관 자체에 아예 하트셉수트가 안장된 흔적이 없어서 최종적으로는 마음을 바꾼듯 하다. 이후 투트모세 3세가 KV38로 투트모세 1세를 이장하였다.데이르 엘 바하리에 있는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은 투트모세 2세 재위기나 하트셉수트의 섭정 시기에 왕실 관리로 들어온 세넨무트(Senenmut)[11]가 건설을 총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하급 평민 출신으로 라모세와 하트노페르(Ramose and Hatmofer)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남자 형제가 3명 여자 형제가 2명 있다고 하는데 기록으로 남은 이름은 남자 형제인 민호텝뿐이다. 센무트가 신의 아내의 집사(하트셉수트)와 왕의 딸의 집사(네페루레)로 임명된 뒤 직접 감독하여 지은 부모의 무덤이 1930년대에 멀쩡한 상태로 발굴되어 보존되었기에 왕가 출신이 아닌 이집트인 중에서는 정보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센무트는 평생 독신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그의 무덤에 있던 장례 석비에는 부모와 함께 센무트가 혼자 묘사되어 있고 그를 위한 사자의 서에도 아내없이 홀로 등장하며 결정적으로 그의 장례 실행을 한 자가 아들이 아닌 형제였기 때문이다. 센무트는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외에도 카르나크 신전에 있는 하트셉수트의 붉은 예배당 옆에 있었던 걸로 추정되는 쌍둥이 오벨리스크를 짓는 것도 지휘했는데 아쉽게도 현존하진 않는다. 몇몇 학자들은 하트셉수트와 연인 관계였다고도 보는데, 그녀의 장제전에 센무트의 이름과 그림을 새기도록 허락해주었고 장제전을 건설하던 인부들의 휴게실에 남성과 양성인 사람이 성관계를 하는 낙서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센무트의 무덤은 두 군데로, 매장실이 없고 예배당만 있는 TT71과 예배당이 없고 지하실만 있는,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근처에 있는 TT353으로 이 둘을 합쳐야 완전한 무덤이 된다. TT353에는 천장에 상세한 성도가 그려져 있어서 천문학자였던 걸로도 추정되지만, 현재 일반인에게는 비공개이다.
모세와 관련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주로 출애굽 전기설, 즉 '투트모세 3세의 아들인 아멘호테프 2세가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일 것이다'라는 의견 쪽에서 많이 나오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기 모세를 발견한 이집트의 공주가 바로 하트셉수트라는 것이다.[12] 그러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
이집트 10파운드 지폐 뒷면의 도안이다.
5. 대중매체에서
- 사토나카 마치코의 순정만화 '바다의 오로라' 이집트 부분에 이집트 여왕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투트모세 3세와 사이가 상당히 별로인 것으로 나온다. 국내에는 80년대 초반에 '에덴이여 영원히'라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나온 적이 있다
- 나가오카 요시코의 순정만화 '나일 강변의 이야기' 2권에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가 나온다. 하트셉수트는 굉장히 현명하고 사려 깊은 여인으로 나오지만 투트모세 3세는 자기 생모를 하트셉수트가 죽였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하트셉수트 사후 투트모세 3세의 오해를 알아차린 신하들이 이 오해를 풀어준다. 국내에는 뜬금없이 람세스 3부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람세스 1, 2부는 바로 왕가의 문장 해적판.
- 퇴마록 세계편 '세크메트의 분노' 편에서, 하트셉수트 장제전의 하토르 성소 지하에서 세크메트의 성소가 발견되었다는 식으로 잠깐 언급되고 넘어간다. 데이르 엘 바하리의 하토르 성소도 바로 옆 멘투호테프 2세 장제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 2000년 프랑스감독 미셸 오슬로의 그림자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무화과와 소년 에피소드에 이집트의 여왕으로 등장한다.[13] 꽤나 고압적이고, 즉흥적이며 무자비한 군주로 묘사된다. 어느날, 소년이 가져온 한겨울에 무화과를 맛보고는 포상으로 금화 열 닢을 내린다. 이튿날 소년이 또 무화과를 가져오자 이번엔 금잔과 은주전자를, 삼일째엔 황소 서른마리를 하사한다.[14] 이 때 삼일째의 소년은 (보물을 부러워한 시종관의 계획대로) 얼굴을 가린 채로 왔었는데, 소년이 돌아가고 나서 그 이유를 시종관에게 묻자, "글쎄, 여왕님 입 냄새 나서 그렇대여 잉잉" 이라는 대답(모함)을 듣고 분노해 소년을 죽이기로 한다. 넷째날 소년에게 가져온 무화과를 맛본 후에는 "편지를 가져온 자를 참수하라"라는 내용의 명령서를 밀봉해 소년에게 주고, '재무관'에게 가져가면 "큰 상"을 줄 것이라고 일러주고 돌려보낸다. 그런데, 이 말만 듣고 혹한 시종관은 소년을 구슬려 편지를 얻어내고는, 재무관에게 편지를 줘서 죽는다. 이걸 모르고 있던 하트셉수트는 다음날 멀쩡히 또 무화과를 바치러 온 소년을 보고 놀라지만, 소년과 재무관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는 이번엔 포상으로 소년을 새로운 시종관으로 책봉한 다음, 무화과를 먹고 그 맛을 극찬하며 에피소드의 막을 내린다.
- 문명 시리즈에서는 문명 4에서 이집트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하는 것이 최초 등장이며 이후 문명 온라인에서도 등장했다. 자세한 것은 하트셉수트(문명 온라인) 문서 참고. 이후 문명 7에서 다시 정규 문명 시리즈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 한빛소프트에서 제작한 모바일 게임 세계정복 for Kakao 에서도 영웅 유닛으로 나온다. 참고로 동 게임에서는 클레오파트라도 영웅 유닛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 게임 자체가 그저 옛 사람 이름 빌린 양산형 카카오 게임이라 여캐들 대부분 헐벗고 나온다.
01권 | 02권 | 03권 |
2015년 09월 14일 2018년 10월 19일 |
2016년 07월 15일 2019년 01월 03일 |
2017년 05월 15일 2019년 05월 03일 |
04권 | 05권 | 06권 |
2018년 02월 15일 2019년 10월 02일 |
2018년 07월 14일 2020년 10월 01일 |
2019년 04월 15일 2022년 01월 27일 |
07권 | 08권 | 09권 |
2019년 11월 15일 미정 |
2020년 10월 15일 미정 |
2021년 09월 15일 미정 |
10권 | 11권 | 12권 |
미정 미정 |
미정 미정 |
미정 미정 |
- 일본 만화 '푸른 호루스의 눈동자 -남장 여왕의 이야기-(碧いホルスの瞳 -男装の女王の物語-)'가 이 하트셉수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작가는 이누도 치에(犬童千絵), 연재지는 하루타(KADOKAWA). 역사적 사실과 많이 다른 설정이 다수 등장한다.
- 하트셉수트를 억압 받는 인물로 그리며 역사왜곡에 가까운 작품이다. 여성이라 통치자가 될 수 없다든가, 여자라고 투트모세 2세에게 무시당하는 등. 실제 고대 이집트에선 여성의 권리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고, 여자 섭정이나 통치자 또한 적잖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실소가 나오는 설정이다.
- 하트셉수트의 남동생인 투트모세 2세가 이복 오빠로 등장한다.
- 심지어 그 투트모세 2세를 하트셉수트가 독살하고 만화에서는 두 남매는 근친결혼은 했지만 극도로 사이가 나쁘게 그렸다.
- 투트모세 2세가 죽은 후 약 10여 년을 더 살고 죽은 하트셉수트의 생모는 하트셉수트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어버렸다.
- 투트모세 1세와 투트모세 3세를 애꾸로 만들었다. 심지어 투트모세 3세는 어린 나이에 애꾸가 되었다.
-
하트셉수트와 센무트와의 연인설을 기정사실화하여 아예 두 사람의
정사 장면(!)까지 집어넣었다.
오오!![15] - 무엇보다 파라오는 살아 생전에 양위하지 않는데 만화에서는 투트모세 1세가 멀쩡히 생존한 상태에서 아들인 투트모세 2세에게 양위한다. 당연히 실제 역사에서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이다. 파라오는 이집트를 다스리기 위해 유일하게 인간의 몸으로 현신한 신이기 때문에 새로운 파라오는 이전 파라오가 반드시 죽은 후에야 등극할 수 있었다. 따라서 파라오가 죽기 전에 양위한다는 개념은 당시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 이성계나 이방원, 현 일본의 아키히토 같은 상왕은 나올 수가 없었다. 섭정, 대리청정의 형태로 공동통치를 하는 경우는 있어도 양위라는 개념은 파라오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6]
- 미스터 피바디와 셔먼쇼에도 등장 최초의 동물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근데 멋만 부리는 성격 탓에 동물들이 고통받는다. 예로 악어의 이를 금으로 바꾼다든가, 북극곰의 지형을 따뜻하게 한다든가, 새에게 초밥을 먹인다든가.
-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도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맵 로딩 사이에 나오는 팁에서도 간략히 소개되고, 특히 두 번째 DLC 파라오의 저주에서는 상단 장제전을 그대로 구현한 하트셉수트 신전이 메인퀘스트 도중 들러야 하는 장소로 나온다.
- 2019년 영화 하트셉수트에서도 주인공으로 나왔다. 다만 주인공 하트셉수트를 포함한 고대 이집트인 인물들 전원을 흑인 배우가 맡아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어찌 보면 퀸 클레오파트라의 선배격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1]
니토크리스와
소베크네페루인데
니토크리스는 실존 여부가 불확실하다.
[2]
다만
소베크네페루의 시기(중왕국 제12 왕조)에는 왕을 칭하는 용어로 파라오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후대에 도입된 파라오라는 용어를 칭할 수 있었던 첫번째 여성은 하트셉수트였다.
[3]
葬祭殿 Mortuary.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영혼을 제사지내던 숭배전이다.
[4]
지금의 아프리카 북동부 인근에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왕국.
[5]
훗날
콥트 정교회의 수도원이 되는데, 이 때문에 북쪽 수도원이라는 뜻의
데이르 엘 바하리라는 지명이 붙게 된다.
[6]
사실 충치는 당시 이집트 사람들의 고질병이기도 했다. 사막지대에서 주식인 빵 만드는 반죽에 모래가 들어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7]
Merytre-Hatshepsut. 메리트레-하트셉수트.
[8]
실제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 중 하나가 이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름을 중요하게 여겼다.
[9]
이런 짓은
람세스 2세가 특히 유명한데,
아부심벨 대신전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과 기념물을 남기는 데 만족하지 않고 선대 파라오들의 유산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겨넣었다. 온몸에 람세스 2세의 이름이 도배된
아메넴헤트 3세의 스핑크스가 대표적이다.
[10]
이를 뒷받침하는 예로
왕가의 계곡등 옛 이집트 무덤들을 발굴한 기록들을 보면, 한 집안의
미라를 대대로 넣어두는 가족묘는 흔했으며, 아예 새로 부장품과 관을 새로 만들 여력이 없었던 제3중간기 시절의 파라오들은 전대 파라오의 무덤이나 부장품을 자신의 것으로 재활용한 사례가 꽤 있는데,
메르넵타의 관을 자신의 것으로 재활용하는
프수센네스 1세가 대표적. 그리고
어른의 사정으로 옛 관리의 석관을 자신의 석관으로 쓴 파라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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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무트(Senmut)로도 표기된다.
[12]
출애굽은 모세가 80대였을 때의 일인데, 전기설에 의거한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 치세로부터 80년을 역산하여 모세가 아기였을 때를 추정해 보면 투트모세 1세의 치하가 된다. 그 투트모세 1세는 하트셉수트의 아버지인 바, 결국
이스라엘인들의 장자를 학살한 파라오는 투트모세 1세이며 그의 딸 하트셉수트가 학살을 피해 강가에 떠내려보내진 아기 모세를 발견해 길렀다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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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여자 파라오는 아니지만, 여왕은 있어" 라는 언급이 있다. 위에서도 나오듯이, 하트셉수트는 여자 파라오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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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탐욕스러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소년은 욕심이 없었기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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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24화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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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에 외척 견제를 위해 조기에 양위하고 상황이 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 독자들에게 익숙한 방향으로 각색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