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11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1세 Ptolemy XI Alexander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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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프톨레마이오스 11세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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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사망 | 기원전 80년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80년 | ||
전임자 | 베레니케 3세 | |
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12세 | |
부모 |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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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베레니케 3세 | |
종교 | 이집트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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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11대 파라오.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붙잡혀 몇년간 인질 생활을 하다가 로마 공화국으로 탈출하였고, 기원전 80년 로마의 집권자 술라에 의해 이집트에서 단독 파라오로 집권하고 있던 베레니케 3세와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베레니케 3세를 살해했다가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살해당했다.2. 생애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아들로 전해지지만, 언제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다. 다수의 현대 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가 그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파라오 자리를 놓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무렵,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함께 이집트의 파라오를 맡았으며 실질적인 집권자였던 클레오파트라 3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102년, 그녀는 자신의 손자들과 국고 일부를 코스 섬의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으로 보냈다. 이렇게 보내진 이들 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1세도 있었다.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6세가 코스 섬에 상륙했을 때, 그는 모종의 이유로 그곳에 남아 있었다. 미트리다테스는 클레오파트라 3세가 보내뒀던 왕실의 보물, 조각상, 보석, 그리고 수많은 금화를 모조리 폰토스로 보내면서, 프톨레마이오스 11세도 같이 데려갔다. 그 후 몇 년간 폰토스에 인질로 잡혀 있던 그는 기회를 틈타 미트리다테스와 격전을 치르고 있던 술라에게 망명했고, 그와 함께 로마로 가서 기원전 80년까지 그곳에서 쭉 지냈다. 그러던 기원전 81년,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사망하고 베레니케 3세가 단독 파라오가 되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녀는 나라를 나름 잘 다스렸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술라는 지난날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로마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리면서 자신이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이집트를 로마 공화국에 맡기겠다고 한 유언장을 빌미삼아 프톨레마이오스 11세를 공동 파라오로 세우라고 요구했다. 베레니케는 요구를 받아들여 프톨레마이오스 11세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19일 후 베레니케 3세를 살해했다. 그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속셈이었던 것 같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궁궐에 난입했고, 그는 곧 체포된 뒤 체육관으로 끌려가서 처참하게 죽었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사생아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시민들의 추대로 파라오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