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25왕조 초대 파라오
피이 𓊪𓋹𓇌 | Piy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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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피이(Piye)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714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744년 ~ 기원전 714년 (약 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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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카슈타 | |
후임자 | 셰비쿠 | |
부모 |
아버지 : 카슈타 어머니 : 페바트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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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타비리, 아바르, 켄사, 페크사테르 | |
자녀 | 타하르카 | |
무덤 | 엘-쿠루 17번 피라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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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시 왕국 나파타 시대 3대 왕이자 고대 이집트 제25대 왕조 초대 파라오. 누비아의 이집트 정복을 이끈 인물이다.
2. 행적
상이집트에 처음으로 세력을 투사해 딸인 아메니르디스 1세를 당대 아문 신의 대신녀이자 아문신의 아내였던 셰페누페트 1세에게 양녀로 들이도록 한 카슈타와 페바트마(Pebatjma) 왕비의 장남이다. 남동생으로 샤바카가 있었고, 누이로 켄사, 페크사테르, 아메니르디스가 있었다. 이 중 켄사와 페크사테르는 그와 결혼했고, 쿠시 왕국 초대 왕으로 알려진 알라라의 딸 타비리와도 결혼했다. 그는 세 아내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셰비쿠, 타하르카와 아메니르디스의 뒤를 이어 아문 신의 아내가 된 셰펜웨펫 2세와 샤바카의 아내 칼하타, 타하르카의 아내가 된 타베케나문, 나파라예, 다하히테나문, 셰비쿠와 결혼한 아티 등 여러 딸을 두었다.기원전 746년 피이가 집권했을 무렵, 이집트 제3중간기의 혼란상은 극에 달했다. 당시 하이집트를 다스리던 제22왕조나 중부와 상이집트 지역을 다스리던 분계 왕조인 제23왕조는 너나 할 것없이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여 도시국가 수준으로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고 나일강 삼각주 서부의 사이스를 근거지로 삼은 테프나크트, 레온토폴리스의 이우프트 2세, 헤라클레오폴리스의 페프트자우와위바스트, 헤르모폴리스의 님로트, 테베의 이니[1], 타니스와 부바스티스 인근을 겨우 차지한 오소르콘 4세 같은 여러 지방 지배자들이 난립했다.
선대 왕인 카슈타 치세부터 상이집트 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우던 쿠시 왕국은 피이 치세에 큰 손실없이 상이집트 지역을 쿠시 왕국의 영역으로 편입했다. 하지만 피이에게는 이집트 전역을 재통일하겠다는 야심이 있었고, 그의 관심이 하이집트로 향하자 피이의 재위 20년차에 테프나크트가 하이집트 지역의 지배자들과 연합을 맺고 피이에게 충성하는(또는 봉신이었던) 페프트자우와위바스트가 다스리는 도시인 헤라클레오폴리스를 포위했다.
이에 페프트자우와위바스트와 현지 쿠시 수비대는 구원을 요청했고, 피이는 신속하게 쿠시에서 동원 가능한 전 병력을 소집한 뒤 나일강을 따라 북상했다. 도중에 테베를 방문한 그는 아문을 기리는 오페트 축제에 참석하여 자신이 상이집트 지역을 장악했다는 걸 보여주었으며, 이집트 정복을 성전이라 여긴 피이는 병사들에게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정화를 받도록 명령했고 자신은 아문에게 희생제물을 바쳤다. 중부와 하이집트로 진격한 쿠시 군대는 헤라클레오폴리스, 멤피스 등 여러 도시를 함락시켰고 지역 지배자들의 항복과 충성 맹세를 받았다. 페프트자우와위바스트는 그를 주권자로 인정하고 금과 은, 청금석, 청동 등 막대한 선물을 바쳤으며, 피이는 헤라클레오폴리스의 토트 신전을 방문하여 황소와 거위를 희생제물로 바쳤다.
이후 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 출발한 그의 군대는 페르세켐케페라, 메르-아툼, 잇-타우이 등 여러 도시에 무혈 입성했다. 하지만 멤피스에서는 테프나크트의 정예병과 강력한 요새가 가로막았다. 이에 피이는 해군이 항구를 공격하는 동안 육군은 성벽을 공격하는 수륙양동전술을 동원했고, 쿠시군은 큰 손실을 감수하고 맹공을 벌인 끝에 멤피스를 함락했다.
헤르모폴리스를 다스리던 님로트는 원래 피이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던 지도자였으나 테프나크트에게 회유되어 배신했는데, 피이는 그가 항복할 때까지 5개월 동안 헤르모폴리스를 포위했고 님로트는 결국 항복했다. 님로트는 큰 처벌을 받진 않았지만 자신이 소유한 말 중에서 가장 좋은 말과 귀금속으로 제작한 시스트럼을 배상품으로 피이에게 바쳤고, 다른 지도자들이 충성맹세를 할 때 중개자 역할을 맡았다. [2]
여러 도시 지배자들이 줄줄이 피이에게 항복하자 불리해진 테프나크트는 삼각주 북서쪽의 한 섬으로 도주했다가, 더 이상 저항해 봐야 소용 없다는 걸 깨닫고 피이에게 선물을 보내면서 패배를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편지를 보냈다. 다만 피이를 직접 알현하는 것만은 끝까지 거부했다. 피이는 이 정도면 이집트 평정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도시국가의 지도자들을 지방관으로 그대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한 뒤, 수도 나파타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도중에 멤피스의 프타 신전에서 막대한 제물을 바쳤고, 현지 사제들은 오랜만에 제물을 받은 것에 크게 기뻐하며 그를 파라오로 인정했다. 그 후 나파타에 도착한 그는 나파타 인근 제벨 바르칼의 아문 신전에 화강암으로 제작된 승전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1872년 고고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에 의해 발견되었고, 1876년 에마뉘엘 드 루제에 의해 번역되었다. 그의 원정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이 기념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대 조상을 능가하는 업적을 세운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왕이자 살아있는 신이며, 자궁에서 나온 아툼의 현신이다. 아버지가 자신보다 위대한 사람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어머니도 배 속의 아이가 지배자이자 좋은 신으로써
라가 두 팔을 뻗어 안을 정도로 사랑하는 아들 피이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느니라.
피이의 승전 기념비 서문
피이의 승전 기념비 서문
그러나 피이는 두 번 다시 나일강 삼각주에 나타나지 않았고, 테프나크트는 한동안 쿠시 왕국에 복종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가 삼각주 지역이 정치적 공백 상태에 빠지자 재차 정복 전쟁을 단행해 삼각주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재차 확립했다. 그는 자신을 '셉세레 테프나크트 1세'로 칭하고 사이스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이 때문에 쿠시 왕국의 세력은 페프트자우와위바스트가 다스리는 헤라클레오폴리스까지만 미쳤다. 훗날 피이의 아들 셰비쿠가 하이집트로 진군해 테프나크트의 후계자인 바켄레네프를 격파하고 사이스를 공략한 뒤에야 쿠시 왕국의 이집트 정복이 완수되었다.
제벨 바르칼의 아문 신전에는 그의 통치 30주년을 기념하는 헤브 세드 축제가 개최되었음을 암시하는 부조가 보존되어 있다. 또한 2006년 초 데이르 엘 바흐리의 하트셉수트 여왕의 기념 사원 인근에서 발견된 파디아모네트 총독의 무덤에는 피이의 치세 27년에 세워진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로 볼 때 피이는 최소 30년간 통치를 이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무덤은 엘 쿠루에 있는 쿠시 왕국 왕실 묘지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인 엘 쿠루-17 피라미드다.
[1]
제23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루다멘의 뒤를 이었으나, 제23왕조 출생도 아니었고 세력도 테베를 다스리는 수준이어서 도시국가의 지도자로 본다.
[2]
피이가 자신의 이집트 정복 업적을 기록하여 남긴 제벨 바르칼의 승전비를 보면 피이가
말을 무척 아꼈다는 에피소드가 실려있다. 5개월 동안 포위당하여 버티는 데 한계에 부딫힌 님로트는 피이에게 항복했는데, 도시에 입성한 피이는 님로트의 궁전을 방 하나씩 꼼꼼히 살펴보다가 마구간을 보게 되었는데, 말과 망아지가 굶주렸고 관리 상태도 좋지 못하자 님로트에게 '네가 행한 그 어떤 범죄보다도 이 말들이 굶주렸다는 게 더 고통스럽구나!'고 호되게 질책했다고 한다. 또한 나파타 시기 쿠시 왕실 묘지였던 엘-쿠루에서 최초로 생전에 자신이 기르던 말들을 함께 매장한 왕도 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