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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표트르 1세 | 예카테리나 1세 | 표트르 2세 | 안나 이바노브나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이반 6세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 표트르 3세 | 예카테리나 2세 | |
제9대 | 제10대 | 임시 | 제11대 | |
파벨 1세 | 알렉산드르 1세 |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 니콜라이 1세 |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알렉산드르 2세 | 알렉산드르 3세 | 니콜라이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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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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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29년 5월 2일 | ||
프로이센 왕국
포메른
슈테틴 (現 폴란드 자호드니오포모르스키에 슈체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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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96년 11월 17일 (향년 67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 |||
묘소 |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 ||
재위기간 | 전러시아의 여제 | ||
1762년 6월 28일 ~ 1796년 11월 17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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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가문 |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 | |
이름 |
독일어: 조피 프리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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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 Рома́нов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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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 ||
어머니 |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하나 엘리자베트 | ||
형제자매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 ||
배우자 | 표트르 3세 (1745년 결혼 / 1762년 사망) | ||
자녀 | 파벨 1세, 안나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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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예카테리나 대제(Екатерина Великая, 예카테리나 벨리카야)라고도 불리며 러시아의 마지막 여제(女帝)이기도 하다.[1] 차르 대신 차르의 여성형인 차리차, 차리나로 호칭하기도 한다. 또한 황제를 뜻하는 임페라토르의 러시아어 여성형인 임페라트리차(императрица)로 칭하기도 한다.측천무후와 자주 비교되기도 하는데,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측천무후와는 반대로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황제에 등극한 게 아니라 다른 쿠데타 주동자들에 의해 등극되었다는 점에서 정반대 케이스이다. 나중에는 조금이나마 전제권력을 회복하긴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 초창기에는 귀족들이 대놓고 허수아비 취급할 정도였다. 표트르 1세 사후 니콜라이 1세 이전까지 거의 모든 러시아 황제들이 귀족 쿠데타에 의해 옹립되고 폐위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2. 생애
2.1. 어린 시절
1729년 5월 2일에 프로이센군 소장인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와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하나 엘리자베트[2]의 장녀로 프로이센 왕국의 슈테틴에서 태어났다. 보면 알겠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독일계 공족으로 본래는 그냥 순수 독일인이었으며, 러시아로 시집가기 전의 본명도 안할트체르프스트의 조피 공녀(Princess Sophie of Anhalt-Zerbst)[3]였다. 세력이 미약한 귀족[4]의 딸이었지만 시골 생활에 진저리를 내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열과 본인의 총명함과 부지런함으로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2.2. 파탄난 결혼 생활
그러던 어느 날 과거 외삼촌 카를 아우구스트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와 약혼했던 인연 덕분에, 1744년 자신의 육촌[5]이자 러시아의 제위 계승권자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울리히(러시아식으론 표트르)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개명하여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라고 불리게 된다. 참고로 선대인 예카테리나 1세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표트르 1세의 정부에서 황후에 이어 여제의 자리까지 오를 만큼 남편에게 사랑받던 것에 비해, 조피는 평생동안 남편 표트르 3세와 부부사이도 안 좋았고 본명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감금된 표트르 1세의 누나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의 독일어 이름인 조피였다. 아마도 이를 의식하고 이름을 예카테리나로 개명한 듯 하다. 종교도 루터파 개신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다.
그렇게 시골뜨기 소녀였던 조피는 시이모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를 만나러 처음 러시아 황궁에 당도한 순간 그 휘황찬란한 치장에 넋이 빠졌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조피를 한번 뜯어보고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조피와 표트르의 결혼이 정해졌다.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로서 러시아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는 신혼 무렵엔 같은 독일인이라는 점 때문에 나쁘지 않은 사이였지만, 예카테리나가 주변 사람들의 냉대와 옐리자베타 여제의 경계를 완화시키기 위해 점차 친러시아 노선을 걷자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게다가 남편은 장난감 병정이나 기차만 가지고 노는 머리 나쁜 인물이었던데다 심각한 성불구자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래서 장기간 부부 관계가 없었고 18년간 각자 정부를 두고 살았다. 처음에 예카테리나는 남편에게 맞춰주려고 하다가 결국 남편을 혐오해 9년 동안 피해다니면서 부부 관계도 같이 회피했다. 그러다 엘리자베타 여제가 "자식 안 낳을 거면 너도 나가!!" 등의 사인을 보내자 겨우 첫 아들 파벨을 낳은 후 자신도 마음껏 놀아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세 아이 모두 각기 다른 정부의 아이였다는 풍문도 돌았지만 아들인 파벨을 보면 성격이나 생김새나 남편과 붕어빵이다. 나머지 자식들 중 요절한 둘째는 생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설이 엇갈리고, 막내 아들은 명백하게 사생아여서 러시아 황족이 받는 대공이 아닌 일반 귀족으로 백작 작위만 주었다. 이 막내 아들이 시조가 되는 가문이 보브린스키 가문으로 그의 후손들은 소련과 미국 등지에서 학자나 교수로 일하며 혁명과 대숙청의 광풍 속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
2.3. 재위기간
2.3.1. 즉위
결혼해서 열심히 러시아어와 문화를 공부하고, 종교까지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며 열성적으로 왕족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아내와 달리 표트르 3세는 독일풍과 개신교만을 계속 고집했기에 러시아 내부에서도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1762년 엘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마자 대형 사고를 쳐버린다. 무시무시한 프리드리히 2세 빠돌이였던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을 다 몰아붙였는데도 7년전쟁에서 빠진 것. 이게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으로, 이 굉장한 뻘짓은 러시아 귀족들의 분노를 사고 예카테리나 역시 남편의 처사에 크게 반발한다.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표트르 3세는 체포되어 8일 후에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이에 대해선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 (혹은 방조)가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선황 옐리자베타 여제와 라주모프스키 사이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타라카노바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정통성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명에 의해 평생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그 후에 유럽 사교계를 떠돌던 한 고급 창녀가 자신이 타라카노바 황녀라고 사기를 치다가 역시 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을 받은 알렉세이 오를로프 백작에 의해 납치되어 러시아로 잡혀와 감옥에서 옥사한 일도 있었는데 19세기 화가 콘스탄틴 플라비츠키의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
2.3.2. 계몽전제군주
국민이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군주가 국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중략) 군주 정치의 진정한 목적은 백성들로부터 그들이 타고난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선에 이르도록 그들을 올바로 이끄는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주의 관련 서적들을 꽤 좋아했고, 몽테스키외, 볼테르와도 여러 번 서신을 교환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여기에 감명을 받아 계몽주의적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상황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제헌의회를 소집하고 법전을 제정하고자 했으나 2년 만에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만다. 각 계층의 반대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특히 지주들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제한될까 봐 더욱 심하게 반대하였다.
1764년에는 정부 중 한 명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시켰다. 이로서 예카테리나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6] 한편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을 숙적이라고 여겼고, 1768년부터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때의 오스만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국력은 여전히 강해서 러시아로서도 이기는게 쉽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계속되던 1773년, 예멜리얀 푸가초프라는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다. 푸가초프는 자신을 표트르 3세라 칭하며 엄청난 위세로 반란 범위를 넓혀나갔다. 이 난을 푸가초프의 난(1773년 ~ 1775년)이라 부른다. 하지만 진압군에 의해 이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후 예카테리나 2세는 농노의 의무는 늘리고 귀족들의 권리를 강화하며 농민들을 억압했다.[7]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군주를 자처했으며 실제로 그녀의 이상은 당시의 여느 서유럽 군주보다도 더 급진적이었으나, 근본적으로 지지계층이 지주 중심의 귀족이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현실은 시궁창. 물론 이것도 러시아 특유의 사회현실과 괴리된 급진적 이상을 강력히 추진한 예카테리나의 잘못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푸가초프의 난 이후 농노제를 개악하고 민중을 억압한 것 때문에 계몽사상가들에게 폭군으로 비난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러시아 백성에게 증오를 받았다.[8][9]
2.3.3. 업적
18세기 주요국들의 1인당 조세수입을 비교한 표. 예카테리나 2세 재위기 동안 러시아의 1인당 조세수입이 3배가 넘게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이렇게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치 면에서도 큰 성과를 올렸다. 오스만 제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여 러시아-튀르크 전쟁(1770년 ~ 1774년)에서 승리를 거두고, 뒤이어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해 오스만 제국이 가지고 있던 흑해의 제해권을 빼앗고 캅카스 지역을 할양받아 영토를 신장시켰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었던 크림 칸국은 멸망했다.
1788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가 1721년 뉘스타드 조약, 1743년 오보 조약으로 상실한 카리알라의 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발트함대의 주력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위해 흑해로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선방했으나 1790년 7월 스벤스크순드[10] 해역에서 구스타브 3세가 친정한 스웨덴 해군에게 완패하여 베렐레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영토 상실은 없었고 혁명 프랑스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으나 뉘스타드 조약 이후 꼭두각시로 만들었던 스웨덴에 더 이상 내정간섭은 하지 못 하게 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위기를 느낀 예카테리나 2세는 더욱더 보수화 정책을 펼쳤다.[11] 이후 3차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1795년 마지막 폴란드 분할을 마쳤다. 이로써 1611년 지그문트 3세 바사의 모스크바 함락으로 러시아에 굴욕을 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멸망시켰다.
또한 크림 칸국으로부터 해방시킨 우크라이나 동부에 카자크 농부들을 정착시키고, 새로이 정복한 옛 크림 칸국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런 도시들은 내심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방하여 진정한 로마가 되고자 하는 일명 그리스 계획(Catherinian pseudo-Hellenization)의 일환으로 티라스폴, 오데사, 헤르손, 멜리토폴,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스타브로폴 같은 그리스식 이름을 붙였다. 또한 볼가 강 남부 유역과 카스피해 연안에 칼미크인들의 영토를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대규모의 독일계 이민을 이주시켜 밀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농업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렸다.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인신매매와 약탈을 일삼던 크림 타타르족이 토벌되면서 농업이 안정화되고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산 밀은 러시아의 주력 수출 품목이 되었다.
2.4. 사망
1796년 11월 17일에 67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여담으로 러시아 황제들 중 가장 오래 살았다.외아들 파벨 황태자와 사이가 정말 안 좋아서 파벨의 장남이자 자신의 장손자인 알렉산드르를 후계자로 키웠다고 한다. 조선 영조와 똑같다.. 또한 사망하기 전 손자 알렉산드르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했는데, 알렉산드르가 거절했다는 말이 있다.[12] 어쨌든 딴 데 있던 파벨이 어머니의 위중 소식을 듣고 전력질주로 달려와서 무사히 황제로 즉위했다.
사망하기 몇 달 전에 파벨의 장녀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13]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종교 문제로 거절받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3. 남성 편력과 개인사
남자를 많이 밝혀 애인을 많이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이미 나이가 60이 넘어서 죽음을 앞에 두던 순간까지도 수많은 내연남들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몇 년에 한 번씩 내연남을 갈아치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헤어진 내연남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영지, 관직 등을 하사하여 후히 대접하였다.이를 두고 정치적 계산이 숨어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귀족 명문가의 자제들이나 유능한 신하들과 교류를 하는 한편 적지 않은 보상을 통해 그들을 완전히 자신의 수족과 같은 심복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비단 젊고 잘생긴 귀족 청년들뿐만 아니라 실력있고 명망 높은 장군과 신하들도 내연남으로 두곤 했다.
내연남을 선발할 때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쳤는데, 우선 의사가 건강검진을 하고 합격한 후보자는 지적 능력과 황제를 즐겁게 해줄 만한 소양을 갖추었는지 검사를 받고 마지막으로 황제의 측근과 시험적인 합방을 거친 후에 충분하다고 판정되면 그때서야 황제의 침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막판엔 교양이고 지식이고 상관없이 잘생기고 젊은 미남이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들어갔다고 한다.
황제의 수많은 내연남 중에 유명한 이를 몇 명 꼽자면 세르게이 살티코프 공작, 포템킨 공작, 주보프, 알렉산드르 란스코이, 그레고리 오를로프 정도가 있다. 오를로프는 군인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긴 외모로 단숨에 황제를 사로잡았다. 결정적으로 오를로프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황제가 남편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황제의 정부였고 아들도 두었다. 폴란드의 마지막 왕이자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의 원수로 활약한 것으로 유명한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의 숙부였던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와도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14]
포템킨 공작은 황제보다 10살 연하로 평범한 외모였지만 커다란 그것과 빼어난 능력으로 12년간 황제의 내연남 노릇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총애가 점점 예전만 못하자 스스로 뚜쟁이를 자처하며 황제의 애인감을 물색하고 다녔다.
황제의 남성 편력 때문에 사후에 황제가 말과 하다가 깔려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고 하는데, 신빙성은 별로 없다.
3.1. 아들 파벨 1세와의 관계
파벨 외의 사생아들은 곧장 친부나 딴 데 맡겨버렸지만 남편 표트르도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남성들과 연애를 즐기면서 아이들까지 낳았는데 막상 공식적 아들인 파벨과는 평생 소원한 관계였다. 일단 남편 표트르 3세와는 사이가 극악이었고 파벨은 태어나자마자 옐리자베타 여제가 데려다 키워서 예카테리나는 어머니로서 사랑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파벨은 생김새와 성격 모두 아버지인 표트르 3세를 닮았다. 그래도 정이 없는 건 아니라 파벨이 결혼할 때는 미모를 고려하여 아들과 함께 직접 신부를 간택했고, 많은 자금을 하사하여 저택과 취미 생활에 돈을 펑펑 쓰게도 해주는 등, 나름대로 겉으로나마 아들과의 관계회복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자신을 쏙 빼닮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며느리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며 남편 파벨의 편만 들자 모자관계와 고부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달았다.이처럼 어머니와 사이가 나빴던 파벨은 차기 황제가 될 장남인데도 궁정에서 따돌림과 공공연한 무시를 당했고, 예카테리나가 장손 알렉산드르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던 생각도 이런 연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15]
아들 파벨을 싫어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거론된다. 파벨은 자식을 안 낳으면 쫓겨날 판이니 원치 않아도 낳아야 했던 아이였고 낳자마자 옐리자베타에게 빼앗겨 정을 줄 틈도 없었고 여제에게 감히 아들의 안부도 물을 수 없었다. 한 마디 삐끗했다가 자신이 옐리자베타 를 믿지 못한다는 오해를 살까봐 알아서 기는 처신이었다고. 파벨이 자라는 동안 예카테리나에겐 일단 궁정에 자리 굳히기가 더 중요한 때였다.
또한 그녀로서는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지만 그렇게 혐오하던 남편의 자식, 거기다 그를 닮은 아들이라 더 싫었을 수도 있다. 아들에게서 보이는 남편의 싫은 모습 때문에 정을 못 붙이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고 파벨 역시 친부의 죽음에 의혹을 품고 있었다. 결국 결혼한 파벨과 불화가 깊어지자 아들 부부에게 영지를 따로 줘서 분가시켜 버리고 웬만하면 오지 못하게 하고 옐리자베타가 파벨을 대신 후계자로 키우려 한 것처럼 손자들도 빼앗아 자신이 키웠다.
심지어 파벨의 사생아 설이 퍼진 건 바로 예카테리나 자신이 아들에게 "니 애비는 표트르가 아니고 내가 같이 잔 첫 남자라서 넌 황제 핏줄도 뭣도 아님!!" 같은 출생의 비밀로 통수를 친 것이 시작이다. 파벨이 러시아 황위 계승에서 여계 후손의 즉위를 막아버린 건[16] 이런 어머니에 대한 증오감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정작 파벨의 외모를 보면 아버지 표트르를 빼닮은 탓에 쌍으로 못 생겨서, 이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아들 약 오르라고 날린 빅엿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3.2. 가계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표트르 3세 (Пётр III) |
||||
1남 |
파벨 1세 (Павел I Петрович) |
1754년 10월 1일 | 1801년 3월 23일 |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 루이제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슬하 4남 6녀[17] |
||||
1녀 |
안나 페트로브나 (Анна Петровна) |
1757년 12월 9일 | 1759년 3월 8일 | |
그리고리 그리고리예비치 올로프 (사생아) (Григо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Орлов) |
||||
1남 |
알렉세이 그리고리예비치 보빈스키 (Алек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Бобринский) |
1762년 4월 11일 | 1813년 6월 20일 | 안나 도로테아 폰 운게슈테른부르크 |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포템킨 (사생아) (Григо́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отёмкин-Таври́ческий) |
||||
1녀 |
옐리자베타 그리고리예브나 템키나 (Елизаве́та Григо́рьевна Тёмкина) |
1775년 7월 24일 | 1854년 6월 6일 |
이반 칼라게오르기 슬하 4남 6녀 |
4. 여담
일본에서 표류하여 러시아까지 방문했던 다이코쿠야 고다유(大黑屋光太夫)가 가져 온 그녀의 초상화를 히다야(飛騨屋)가 모사한 바 있다. 원본으로 생각되는 초상화와 비교해 보자.
고다유의 귀국 후 당시 난학(네덜란드학) 연구자인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편찬한 '북사문략(北槎聞略)'에서는 링크와 같이 묘사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
- 캐서린 제타 존스의 더 그레이트( 1996년): 독일에서 180분자리 TV 영화를 제작 상영하였다. 이 작품은 2002년에 한국의 MBC에서도 일요 심야극장에서 방송되었다. 영화 제목에도 나오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캐서린 제타 존스가 맡았다.
5.2. 드라마
- 예카테리나 대제(2019): HBO에서 사극 미니시리즈 4부작 '예카테리나 대제'를 방영한다. 노년의 예카테리나 집권 시기를 배경으로 하며 헬렌 미렌이 예카테리나 2세를 연기했다. 예고편 영상
- 더 그레이트(드라마)(2020): 엘 패닝 주연으로 청년기의 예카테리나를 그리는 드라마 더 그레이트가 훌루에서 공개됐다. 장르는 코미디 사극. 남편 표트르 3세 역은 눅스, 비스트 역으로 잘 알려진 니콜라스 홀트가 맡았다.
5.3. 게임
- 도미네이션즈: 유니버시티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 문명 시리즈: 문명 2 이후 문명 5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문명의 군주로 개근했다. 실제 초상을 가져다 쓴 문명 2를 제외하면 매 작품마다 이미지가 상이하게 다른 것이 특징으로, 문명 3에서는 나이 든 할머니로, 문명 4에는 군복을 입고 남장을 한 모습으로, 문명 5에서는 젊고 예쁜 모습으로 나왔다. 문명 6에서는 표트르 대제가 대신 나오는 바람에 아직까지 등장하지 못했으나, 문명 4에서처럼 문명 하나당 지도자가 둘 이상이므로 앞으로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 능력치가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6,6,5인 군주로 나온다. 참고로 이 게임의 능력치 상한은 6이다.[18]
- 대항해시대 온라인: 러시아 에피소드 퀘스트에 등장하는 조피라는 독일 출신 황태자비 후보가 이 사람이다. 여기서는 본인을 쫓아내려는 러시아 귀족들의 음모에 휘말려서 고생하는 역할로 등장. 에피소드 퀘스트를 깨면 대부호 전직증을 주는데 이 대부호란 직업 전직증없이 전직하는데만 2억 두캇이 드는 직업이다. 역시 독일의 왕족이자 러시아 황태자비... 여기에선 흑발 히메컷의 소녀 모습으로 등장한다.
- 마제스티아 예카테리나 2세(마제스티아) 문서 참고.
- 타임 프린세스: 그녀의 일생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 '예카테리나 여제' 스토리가 출시될 예정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본래 출시 예정일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겹쳐지게 된 불상사로 인해 결국 스토리 출시가 지연된 상황이다.
- Epic Rap Battles of History 시즌 5 6화에 등장해 다른 등장인물들을 죽여나가던 이반 뇌제에게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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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33,#2d2f34><colcolor=#000,#ffcc33>통치 국가 | <colbgcolor=#fff,#1f2023> 러시아 제국 ( 핀란드 대공국 · 캅카스) | |
생애 | 생애 | ||
재위 시기 | 폴란드 분할 · 러시아-튀르크 전쟁(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 | ||
정책 | 보수주의 · 제국주의 · 계몽주의 | ||
가족 관계 | 배우자 표트르 3세 · 장남 파벨 1세 | ||
대중매체 | 더 그레이트 · 예카테리나 · 캐서린 제타 존스의 더 그레이트 · 문명 시리즈 | ||
기타 | 로마노프 왕조 · 러시아 제국 · 볼테르 · 몽테스키외 · 예멜리안 푸가초프 · 에르미타주 박물관 · 그리고리 포템킨 |
[1]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아들
파벨 1세가 즉위 후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했다.
[2]
요하나 엘리자베트의 오빠인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나중에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예카테리나 2세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와
칼 13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외사촌 동생들이다.
[3]
풀네임은 조피 프리데리케 아우구스테(Sophie Friederike Auguste)다.
[4]
다만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세력이 미약했다는 이야기지 외교 예법상
안할트를 통치한 아스카니아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의 엄연한 통치가문으로 타국에서 왕족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일례로 먼 친척이자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부인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는 1703년
회흐슈테트 전투에서 27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휘관 겸 장군을 맡았다.
[5]
어머니 요하나 엘리자베트와 표트르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가 친사촌으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Christian Albrecht von Schleswig-Holstein-Gottorf) (1641년 ~ 1698년)를 같은 증조부로 두고 있었다.
[6]
다만 즉위 후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예카테리나에게 반발했고, 결국 재침공해야 했다.
[7]
이 때문에 가루가 되도록 까였으며
말과 함께
수간을 하다가 줄이 끊어져 깔려 죽었다는
설이 돌았다. 사실 당대의
음란물 산업에서 절대 군주와 그 가족들은 거의 예외 없는 희생양이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근친상간설이 돌았다.
[8]
오죽하면 소련 시절에 그녀의 이름을 딴 "차리친"은 반동 전제군주의 이름을 쓰는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소련 공산당에 의하여 "스탈린그라드" 라고 이름이 바뀌었으며, 스탈린이 죽은 뒤에는 오늘날의
볼고그라드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다.
[9]
스탈린의 선임인
레닌 또한 예카테리나 2세를 백성을 억압한 악랄한 반동 전제군주라고 격렬히 매도했다.
[10]
현재의
핀란드
코트카 앞바다.
[11]
이는 예카테리나 2세가 신료들이나 귀족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의 내용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편지 중에 한 구절에는 "농민들이 지식을 쌓고 자유를 얻는다면, 그것이 바로 곧
러시아 황실의 종말이 될 것이다."라고 쓰기도 하였다.
[12]
결국 그는 아버지 파벨이 사망한 후 즉위했다.
[13]
결국에는 결혼이 무산되어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과 결혼했으나 출산 중 사망함으로서 불과 17살에 요절했다. 그러나 스웨덴(개신교)으로 시집가든 오스트리아(가톨릭)로 시집가든 개종은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예카테리나 본인 역시 독일(개신교)에서 태어나 러시아로 시집와 정교회로 개종한 것이므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14]
아직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되기 전 그의 정치 스승이던 찰스 윌리엄스 경[19]의 소개로 아직은 대공비의 신분이었던 예카테리나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이후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 국왕에 당선된 뒤 이미
남편을 제거하고 황제가 된 예카테리나에게 청혼했으나 예카테리나는 거절한다.
[15]
당시 러시아는 황제가 후계자를 직접 선정하는 지명제였기 때문에 장남을 건너뛰고 바로 장손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 가능했다. 어쨌든 차기 제위 계승자를 지명하던 탓에 러시아에서는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서유럽에선 러시아를 후진국 취급하며 대놓고 비웃었다. 심지어 예카테리나와 서신까지 주고받으며 교류하던
볼테르조차 러시아 황태자 자리는 지명이 아니라 점령하는 것이 아니냐며 대놓고 조롱했다. 이후 러시아의 황태자 지명제는 파벨이 즉위한 뒤
살리카 법을 도입하면서 폐지된다.
[16]
이 파벨의 여계 계승 제한은 고손자며느리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아들에 집착하여 아들의 혈우병을 치료하기 위해 라스푸틴을 가까이하고, 러시아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는 나비효과를 제공했다. 명군이지만 아들에겐 0점짜리 어머니였던 예카테리나 2세와 파벨 1세의 관계는 마치 명석하고 총명하지만 빌헬름 2세 한정 자식교육은 엉망이었던 빅토리아 황태후와 빌헬름 2세와의 관계와 비슷하다 볼 수 있다.
[17]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비 헬레나 파블로브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비 마리아 파블로브나,
뷔르템베르크의 왕비 카타리나 파블로브나,
네덜란드의 왕비 아나 파블로브나,
니콜라이 1세등
[18]
6,5,5인
세종대왕보다 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