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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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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 | 알렉산드르 3세 | 니콜라이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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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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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40년 8월 23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사망 | 1764년 7월 16일 (향년 23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현 실리셀부르크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레닌그라드주 키롭스키군 실리셀부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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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불명[1] | ||
재위기간 | 전러시아의 황제 | ||
1740년 10월 28일 ~ 1741년 12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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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가문 | 메클렌부르크브라운슈바이크로마노프 가문 | |
이름 |
이오안 안토노비치 로마노프 (Иоа́нн Анто́нович Рома́нов)[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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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안톤 울리히[3] | ||
어머니 | 러시아의 안나 레오폴도브나 여대공 | ||
형제자매 | 예카테리나, 옐리자베타, 표트르, 알렉세이 | ||
배우자 | 없음 | ||
자녀 | 없음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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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제.하지만 기억도 안 나는 어릴 적부터의 삶을 감옥에서만 보내다 세상을 뜬 비운의 인물이다.
2. 생애
유일한 벨프 가문 출신[4]의 황제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안톤 울리히 공과 안나 이바노브나의 조카이자 이반 5세의 손녀이자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딸인 안나 레오폴도브나의 아들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나 이바노브나의 제위 계승자로 결정되어 생후 2개월의 나이로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원래 쿠를란트-젬갈렌의 공작인 비론이 섭정이 되었으나 그는 독일계 가문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내각의 반발로 곧바로 모후가 되는 안나 레오폴도브나의 섭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 옐리자베타 황녀가 안나 이바노브나 주변을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 고문들의 정책을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반 6세는 결국 폐위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한 살이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그를 독일의 사가로 추방하려 했으나 대외적으로 전쟁 중인지라 취소했으며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근친들과도 격리되었다. 1756년 실리셀부르크 요새로 최종적으로 유폐되었는데, 이 요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라도가 호수 위 조그만 섬에 고립된 요새로써, 요새지기조차 그의 정체를 모를 정도로 철저하게 외부와의 접촉을 금했다. 평생을 음침한 감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정신 건강은 몹시 안 좋았지만 미치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을 돌봐주는 하인을 통해 들리는 이야기로 자신이 황제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1762년 표트르 3세가 즉위했는데, 거의 미친사람에 가까울 정도로 개념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 제위에 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 이반을 오히려 잘 대우해주면서 상황이 풀리나 싶었졌다. 하지만 그는 불과 6개월만에 폐위되었고, 그를 몰아내고 여황제가 된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의 정통성이 취약했던만큼 이반을 더욱 엄중히 감시했고, 만일 이반이 연루된듯한 음모가 발생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최우선적으로 이반부터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764년 실리셀부르크 요새에 근무하던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미로비치 소위가 이반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예카테리나 2세에 불만이 있었던 그는 이반을 황제에 복위시키려 반란을 일으켰고, 요새 사령관을 체포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예카테리나의 명령이 발동되어 간수들은 이반을 살해해버렸다. 향년 23세. 미로비치를 비롯한 반란군도 이후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3. 기타
러시아 역사상 이름이 이반이었던 마지막 군주이기도 하다. 그를 끝으로 러시아의 후대 황제들은 이반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는데, 아마 표트르 3세 및 그의 후임자들이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쿠데타 덕분에 황제가 될 수 있었으므로 만약 이반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반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반 6세에 대한 기록 말살 차원에서 피휘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1]
일반적으로 실리셀부르크 요새에 매장되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유해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사망한 지 250년이 넘은 만큼 유골도 남아있지 않을 확률이 높아서 실제 위치는 더더욱 찾기 힘들 것이다.
[2]
이오안(Иоа́нн)은 이반(Ива́н)의
교회 슬라브어식 표기이다.
[3]
프리드리히 대왕의 왕비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펠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의 아버지인 카를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프로이센 왕국군 원수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생모인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펠의 루이제와 형제다. 즉 이반 6세와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사촌인 셈. 참고로 이 사람이 러시아 여대공과 결혼한 이유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경우와 유사하다. 이모부인
카를 6세는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대하여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는데 이 과정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 자세한 것은
프리드리히 대왕 참고.
[4]
가문이
로마노프 왕조의 벨프 가문 쪽 분파인 '메클렌부르크브라운슈바이크로마노프 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