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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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d164a,#FFC224> 정당 | 대통령 후보 | 순위 | |
<rowcolor=#0d164a,#FFC224> 부통령 후보 | 비고 | |||
공화당 | 로널드 레이건 | 1위 | ||
조지 H. W. 부시 | 당선1 | |||
민주당 | 월터 먼데일 | 2위 | ||
제럴딘 페라로 | 낙선 | |||
1 현직 미국 정·부통령 | ||||
|
}}}}}}}}}}}} |
<colbgcolor=#214388><colcolor=#fff> 주 UN 인권위원회 대사
제럴딘 페라로 Geraldine Ferra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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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제럴딘 앤 페라로 Geraldine Anne Ferraro |
출생 | 1935년 8월 26일 |
뉴욕 주 뉴버그 | |
사망 | 2011년 3월 26일 (향년 75세) |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배우자 | 존 자카로(1960년 결혼) |
자녀 | 슬하 3명 |
학력 |
메리마운트 맨해튼 대학교 (
영어 /
B.A.) 포덤 대학교 ( J.D.)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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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뉴욕 주 10구 하원의원(1979~1985) 주 UN 인권위원회 대사(1993~1996)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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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민주당 정치인이자 미국 주요정당 역사상 첫 여성 부통령 후보[1].2. 생애
제럴딘 페라로는 1935년 8월 26일 이탈리아계 이민 1세대인 식당을 운영하던 아버지 도미닉 페라로와 재봉사 어머니 안토니타 코리에리 페라로에게서 태어났다.그녀는 삼촌의 반대에도 메리마운트 맨해튼 대학교에 입학했고, 1956년에 영어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그는 미 해병대 장교로 이오나 대학을 졸업한 존 자카로와 약혼했고, 다음 해 결혼했다. 다만 성을 남편의 것으로 바꾸지 않고 유지했다.
3. 정치경력
페라로는 퀸즈의 아스토리아에 있는 공립학교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으나, 로스쿨 진학을 원해 로스쿨을 졸업하고 13년간 변호사로 활동했다. 변호사 활동 당시 지역(뉴욕) 민주당 인사들과 교류했는데 이때 정치적 멘토 중 하나인 마리오 쿠오모[2]와도 만나게 되었다. 1974년에는 퀸즈의 지방검사가 되었다.1978년 민주당의 현역 의원인 제임스 딜레이니가 불출마를 선언하자, 페라로는 뉴욕주 제9구의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당선되었다. 이후 6년 동안 2년 임기의 하원의원 3선을 지냈다. 그녀는 당내 경선에서 자신이 보수주의자이며 'heart-beat 리버럴'이 아니라고도 말한 적 있으며 정책방향도 중도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있다. 여성 이슈를 주도하기도 했다.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카터- 먼데일의 캠프에서 부위원장이었고, 1982년에는 민주당 대의원 선출 규칙을 새로 정한 '슈퍼 대의원' 제도 탄생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1984년 전당대회 플랫폼 위원회의 첫 여성 의장이 되었다.
4.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먼데일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다. 이때 다이앤 파인스타인도 첫 여성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먼데일은 페라로를 선택했다. 페라로의 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은 American Retoric이 뽑은 100대 연설에 56번째로 언급되기도 했다. 초반에 언론은 호의적인 편이었으나, [3] 남편 존 지카로의 탈세 논란 등이 터졌다. 또한 페라로는 임신중지는 여성의 선택임을 강조했고 저소득층 여성을 돕지 않는 레이건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해 보수 기독교계의 반발이 있기도 했다. 조지 H. W. 부시와의 부통령 토론회에서는 여성 유권자는 그녀가, 남성 유권자는 부시가 승리했다고 평가했다.5. 선거 이후
1986년, 그녀의 아들 존 자카로가 마약 소지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1992년 양원/주지사 선거에서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하나 당내 경선에서 패배했다.
1993년 12년 만의 민주당 정부가 출범하자 빌 클린턴 대통령은 페라로를 유엔 인권위원회의 미국 대표단으로 지명했다.
1998년 양원/주지사 선거에서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하나 또 당내 경선에서 패배했다. 참고로 이때 민주당 후보가 된 인물이 2021년 현재에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로 활동하는 척 슈머이다.
1999년에는 폭스뉴스의 정치평론가로 출연하기도 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중 힐러리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는데, 이때 오바마에 대해서 '그가 그 어떤 인종이든 여성이었다면 대선후보로 언급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발언이 인종주의적이라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선거의 두 번째 여성 부통령 후보였던 공화당의 세라 페일린과 비교되기도 했다.
6. 말년과 사망
2011년 3월 26일, 골수종의 합병증인 폐렴으로 인해 7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제럴딘은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의 미국인들에게 장벽을 허물어준 선구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며 '페라로가 한 일 덕분에 그의 두 딸이 더 성평등한 나라에서 자랄 것'이라고 말했다. 월터 먼데일은 그녀를 "뛰어난 여성이자 소중한 사람, 개방적인 사회를 위해 일했던 인물이라고 애도했고, 조지 H. W. 부시는 정치적 적수였음에도 '게리(제럴딘 페라로의 애칭)는 여성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존경할 만한 '친구'라고 말했다. 세라 페일린과 빌&힐러리 클린턴 부부 역시 추모를 나타냈다.
[1]
두 번째 여성 부통령 후보는 공화당의
세라 페일린이었으나
존 매케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였고, 세 번째 여성 부통령 후보였던
조 바이든의 러닝메이트 민주당의
카멀라 해리스가 첫 여성 부통령이 된다.
[2]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의 아버지 맞다.
[3]
하지만 당시 여론조사 결과 여성 유권자 중에서도 22%만이 이 결정을 지지했고, 18%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3대 1의 비율로 먼데일이 여성단체들 때문에 여성 부통령 후보를 지명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러모로 남성 부통령 후보에게는 전혀 형성되지 않을 여론이었다. 언론으로부터 '소련이 후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용하려고 할 것 같은지' 등을 질문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