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24:09

시와(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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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오아시스 & 사막
서부 사막 와디 엘 나트룬




엘아리쉬
시와 카타라 저지대 파이윰 시나이 사막
대사해
(大沙海)
바하리야
검은 사막
동부
사막
하얀 사막
파라프라
다클라 카르가


파일:시와 이집트 5.jpg
구도심과 대추야자 농경지
파일:시와 이집트 신전.jpg
신탁의 장소 아몬 신전을 품고 있는 아구르미 언덕과 광활한 대추야자 밭

1. 개요2. 지리3. 명칭4. 산업5. 역사
5.1. 아몬의 신탁5.2. 중세5.3. 근현대
6. 문화
6.1. 과거의 동성애
7. 관광8. 이미지
8.1. 샬리 성채8.2. 아몬 신전 (언덕)8.3. 움 우바이다 신전
9. 여담

1. 개요

이집트 서북부 마트루 주의 도시. 인구는 3만 4천명이다.

2. 지리

메르사마트루에서 서남쪽으로 250km, 파이윰에서 서쪽으로 350km 떨어진 리비아 사막 (서부 사막)에 위치한다. 외부인으로서 방문할 때에는 카이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매일 운행되는 정기 버스편을 이용하며, 이동에는 9~10시간이 소요된다.

도시가 속한 시와 오아시스는 광활한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 혼자 뚝 떨어져있는데, 카타라 저지대가 큰 모래 바다 (대사해)와 만나는 곳에 입지한다. 그 해발고도는 -19m에 불과하기에 주변의 물이 고여 오아시스가 형성된 것이다.

시가지는 동서로 35km에 걸쳐 펼쳐진 4개의 호수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서쪽의 리비아 국경에서 불과 3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이집트 나머지 지역들과도 상당히 고립되어 있다보니 문화적으로 리비아에 더 가깝다. 가장 가까운 인구 1천 이상의 도시도 50km 떨어진 리비아의 자그붑[1]이다. 주민들 역시 이집트의 주류인 아랍인이 아닌 리비아 남부와 같은 계열의 베르베르인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시위 베르베르어를 구사하며, 이집트 아랍어 역시 대부분 능숙하긴 하지만 따로 '마쓰리'라 부르며 모국어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탓에 이집트 내에서도 독특한 문화로 유명하며, 사막의 고립성이 더해져 신비한 인상을 준다.

3. 명칭


고대 이집트 당시 지명은 '나무 들판'을 의미하는 '시트뮤'였다. 중세 이슬람 지리가들은 산타리야 (سنترية)로 저술하였다.

현재 지명인 '시와'의 유래에 대해서는 학자들 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샹폴리옹은 이집트어로 오아시스를 뜻하는 '오야스'가 와전된 '수흐'에서 유래한 것이라 설명하였다. 바세트는 옛 베르베르 부족명인 '수흐'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현대 학자들은 아문라의 상징인 를 의미하는 베르베르 단어 '아시완'에서 유래했다고 여긴다.

4. 산업

주민들은 관광업을 중심으로 대추야자& 올리브를 재배하는 농업과 염전업, 수공업에 종사한다. 과거에는 마그레브 오아시스 지역 유목민들이 카이로를 거쳐 메카 순례를 떠날 때에 그들을 안내하는 운송업도 맡았으나 20세기 들어 국경이 고착화되며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5. 역사

파일:시와 이집트 시가지.jpg
구도심 일대

1만년 전부터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시와 오아시스와 이집트 본토 간 교류의 첫 증거는 26왕조 시대인 기원전 7세기의 네크로폴리스 (무덤)가 가장 이를 정도로 늦은 편이다.

기원전 637년부터 서북쪽 키레네에 정착한 그리스인들 역시 비슷한 시기부터 왕래하였다. 헤로도토스는 시와에 대해 기록을 남기며 신탁의 암몬 신전 (제우스 암몬)과 함께 '태양의 분수'를 언급했는데, 작열하는 더위 속에서도 찬 물이 나왔다고 한다.

5.1. 아몬의 신탁

파일:오라클 이집트.jpg
언덕 위의 옛 아문 신전

시와의 동부 아구르미 언덕 일대에는 두 아문 신전이 있다. 둘은 각각 250m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 북쪽 언덕 위의 것이 그 유명한 오라클 신탁이 벌어진 신전이고 남쪽 평지의 것이 벽면만 남아있는 움 우바이다 신전이다. 두 신전이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테베 (룩소르) 아문 신전의 흑인 여신관이 추방당한 후 이곳에 당도하여 개업했다거나 노아의 아들 함 (햄) 혹은 사막에서 물을 찾은 것에 감사를 표하려던 디오니소스 신이 세웠다고도 한다. 확실한 것은 예언성 신탁 자체의 유래는 매우 깊고, 신전 자체는 기원전 550년경 26왕조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인 아흐모세 2세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이다. 비록 카르나크 신전과 같은 장엄함은 없지만 현지 신관들은 단순함과 검소함을 통해 신비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신탁에 크게 매료되었고, 아테네에서는 오로지 신탁을 들으려는 목적으로 함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신전의 아문은 그리스의 신 제우스로 치환되었고, 그리스 신화에 포함되었다. 신탁의 저주를 받아 바위에 묶인 채로 바다 뱀에게 먹히게 된 안드로메다, 메두사를 죽이러 가기 전에 신탁을 들으러 온 페르세우스, 부르시리스와 싸우러 가기 전에 신탁을 들으러 오는 헤라클레스 등이 예시이다. 기원전 522년 이집트를 정복한 아케메네스 제국 캄비세스 2세는 아피스의 소를 죽인 것에 이어 신탁의 아몬 신전까지 파괴하려 하였다. 다만 시와로 파견된 페르시아 군은 사막 행군 도중 길을 잃고 흩어져버렸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신전의 성스러운 돌을 불경한 손으로 만진 것에 대한 징벌로 일어난 거대한 모래 폭풍에 의한 것이었다고 여겼다. 진실이 무엇이든 페르시아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몬 신전은 존속할 수 있었고, 그로써 영험함이 더해졌다. 신전의 유명세가 증가함에 따라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시인 핀다르는 신전 제단 밑에 6세기간 숨겨진 신탁에 대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파일:이집트 신전 시와.jpg
언덕 아래 평지의 움 우바이다 (움 무아바드가 와전된 것으로 여겨짐) 신전의 잔존 부분

기원전 449년에는 이집트 침공을 위해 키프로스에 주둔하던 그리스 장군 키몬이 출정하기 전에 사절을 파견하여 신탁을 듣고자 하였다. 그의 사절단이 시와에 당도하자 '키몬은 나와 함께 있노라! 그러니 너희들은 그냥 돌아가라'라는 신탁이 내려졌고, 키프로스로 돌아간 사절단은 도중 키몬이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한다. 기원전 409년에는 키레네의 유명 운동선수 에우보타스가 신탁을 들으러 방문하였고, 비슷한 시기 스파르타의 장수 리산데르는 두 번이나 방문할 정도로 신탁의 명성은 자자하였다. 기원전 404년 이집트가 재차 독립하며 세워진 3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자 제2의 람세스 2세라 불릴만큼 건축에 열성이던 넥타네보 2세는 기원전 350년경, 기존 신전의 남쪽 평지에 새 신전 (움 우바이다 신전)을 세워 가파른 언덕을 오르지 않아도 참배할 수 있게 하였다. 두 신전은 신도를 통해 연결되어 하나의 신전군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기원전 340년에 이집트는 페르시아에 재정복 되었지만, 곧 다시 주인이 바뀌게 된다.

마침내 기원전 331년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3세는 북부 해안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후 신탁을 듣기 위해 시와로 향하였다. 사막을 건너는 새떼를 따라 신전에 당도한 그는 자신이 제우스 (아문)의 아들이며, 따라서 이집트와 다른 정복지의 적법한 군주인지 여부를 확인받고자 하였다. 이때 알렉산드로스 3세는 시와 신전의 사제한테 "내 아버지를 죽인 자들은 처벌을 받았는가?"라고 질문했는데, 이에 사제는 "당신의 아버지는 누구한테도 해를 입을 수 없는 영원한 불멸의 몸이니 감히 그런 식의 신성모독적인 불경한 말을 하면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곧 알렉산드로스 3세가 최고신 제우스의 아들임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당연히 원하는 대답을 얻은 알렉산드로스는 8명의 사제들과 시내를 행진하며 이를 알리고 기념하였다. 신전 방문 후부터 그는 주화에 자신의 모습과 함께 아문의 상징인 산양 뿔을 새기며 자신감과 세계 지배자로의 정당성을 드러내었고, 사후 시와에 묻어달라 했다고도 한다. 이어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에도 신탁의 위상은 여전하였다. 특히 아카이아[2]의 엘리스 주민들은 신탁을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여태껏 제시된 질문과 답변을 정리하여 신전 벽에 새기기도 하였다. 이어진 프톨레마이오스-로마 시대에는 평지의 신전에 석조 처마와 도리아식 기둥 등 그리스 양식이 가미되었다.

5.2. 중세

파일:시와 이집트 6.jpg
샬리 성채에서 내려다본 구도심과 신도심

다만 카토와의 논쟁을 시작으로 로마 제국기에 들어 신탁의 위상은 점차 하락하였고, 예수 탄생 이후 시와를 방문한 역사가 스트라보 역시 그곳의 신관이 예전만큼 강력하지 않다고 기록하였다. 특히 다른 이집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2세기 이후 기독교가 전래되며 신전은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세상과 격리된 시와에는 일찍부터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며 기독교가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동로마 제국을 거치며 시와 주민들은 열정적인 기독교도가 되었고, 708년 우마이야 왕조의 침공을 격퇴하였다. 이후 결국 이슬람 제국에 복속하긴 했지만 기독교 신앙은 유지되었다. 11세기 안달루스의 지리가 알 바크리가 기록했듯 당시까지 주민은 전부 베르베르 인이었다. 다만 파티마 왕조의 이주 정책으로 아랍계 베두인들이 유입되었고, 12세기의 알 이드리시는 주민 중 일부가 아랍인이라 기록하였다.[3] 그들의 영향 때문인지 시와는 12세기 말까지 이슬람화되었다.

다만 개종을 전후로 여러 혼란을 겪었는지 1203년 현지 문서에 의하면 시와의 주민은 7개 가문의 40인 (남성만 집계된듯)에 불과하였다. 15세기 맘루크 왕조의 역사가 알 마크리지는 시와를 방문하고, 현지 언어가 제나타 베르베르 인들의 것과 비슷하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로마시대 이후 처음으로 시와에 당도한 유럽인은 영국의 여행가 윌리엄 조지 브라운으로, 1792년에 아문 신전을 보기 위해 방문하였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시와를 주피터 암몬의 오아시스라 불렀다. 당시까지만 해도 두 신전은 온전히 남아있었는데, 평지의 우바이다 신전은 1811년의 지진과 1897년의 폭파로 파괴되었다. 1893년 봄에는 독일인 탐험가이자 사진가 헤르만 부르하르트가 시와를 방문해 옛 도시를 촬영하였고, 이는 베를린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5.3. 근현대

파일:이집트 시와 3.jpg
19세기의 시와를 그린 삽화

역사적으로 시와는 독자적으로 자급자족하며 사실상의 독립을 누렸다. 고대 이집트 시기에도 막바지에야 지배력이 미쳤고, 현지인 중에서 임명된 총독은 왕이라 불리고 신전 벽화에서 파라오와 동급으로 묘사될 정도였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도래 후에도 이러한 고립성에 기반한 독립성은 지속되었다. 그러다 1819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에 의해 일대는 근대 이집트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 무렵 시와의 주민은 민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베르베르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베르베르인이 거의 살지 않는 이집트보다는 상당수의 동포들이 거주하는 리비아와 더욱 동질감을 느꼈고, 카이로에서 파견되는 아랍 관리들에 대해 종종 봉기하였다.

그러다 1925년 리비아와의 국경이 확립된 후, 1928년 이집트 왕국의 군주 푸아드 1세가 시와를 방문해 주민들의 동성애를 질타하고 금지하는 등[4] 규율을 세우며 이집트의 직접 지배를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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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로 붕괴된 후 복구되지 않은 채로 남아 관광지가 된 샬리 성채

기존 도심이던 샬리 가디 성채는 1926년 3일에 걸친 폭우로 붕괴었고, 그후 모스크를 제외하면 복구되지 않았다. 주민들은 언덕 밑의 평지에 새 도시를 세워 현재에 이른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영국군의 장거리 사막군 (LRDG)이 배치되었고, 1941년 국경 너머 리비아의 자그붑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듬해 롬멜이 이끄는 독일 기갑사단의 반격에 세 차례나 시와를 잃었다. 일대를 점령한 독일 병사들은 공공 노출을 금하는 현지 전통을 무시하고 나체 상태로 신탁의 연못에서 수영하였다. 일시적으로 시와를 지배하게 된 이탈리아 당국은 이집트의 반영 인사들을 모아 작은 망명정부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대로 출범하기도 전에 영국군이 반격하여 수복하였다. 전쟁을 거치며 이탈리아, 독일 군의 공격으로 오아시스 일대의 많은 유적들이 피해를 입었다. 종전 후 이집트는 시와에 대한 직접 지배를 강화하였고 1980년대 해안 도로가 완성되며 차량을 통한 교류와 관광이 활성화되었다.

6. 문화

특유의 고립성으로 인해 시와 주민들의 문화, 즉 시와 문화는 독특하기로 유명하다.

특산품으로는 은 제품과 독특한 문양의 옷이 있다.

종교적으로는 엄격하여 라마단 기간에는 모든 상점이 쉬고 주민들은 한달 내내 집에만 머물기도 한다.

이슬람권의 명절인 이둘 피트르와 이둘 아드하 외에 독자적인 이둘 솔흐 (시야하 축제)가 있다. 이는 옛 시절 시와의 후원자였던 성자 시디 술레이만를 기리는 행사로, 마을의 성인 남성들은 가발 엘 다크루르에 모여 함께 식사하고 신께 감사드리는 노래를 부르며 상호 간의 앙금을 푼다. 청소년들은 정오 예배 시에 모여 연회를 즐기고, 마을에 남은 여인들 역시 춤을 추고 노래한다. 진행 비용은 모스크에 모은 공동 기금으로 부담하며, 4일째에 자발 엘 다크루르에서 시디 솔레이만 광장으로 행진하는 것으로 다툼 없고 사랑과 존경이 가득한 해의 시작을 알리며 마무리한다.

그외에 젊은 층을 중심으로 아슈라도 기념된다.

시와 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주민끼리 결혼하지만, 간혹 인근 베두인들과도 통혼한다. 시와의 남성이 베두인 신부와 결혼하려면 일반 신부보다 더 많은 지참금을 내야한다고 한다. 또한 베두인들과의 관계에 있어 시와 인들은 전통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는다. 이는 특정 시와인과 베두인이 의형제에 가까운 펜팔 친구가 되기로 서약하는 것이다. 해당 베두인은 시와에 방문할 때마다 친구 집에서 지낼 수 있으며, 베두인들의 곡물과 동물 제품을 시와의 대추야자나 올리브유와 교환한다. 그외에 인류학자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보수적인 이슬람 전통과 공존했던) 시와의 동성애 전통이다. 1900년 시와를 방문한 독일인 이집트 학자는 남성 간의 동성애가 만연하며, 결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남녀의 결혼에 1파운드 정도가 들었는데, 소년과 결혼할 때에는 무려 15파운드가 들었다고 한다. 또한 아내는 4명까지 둘 수 있지만 남성 동반자는 1명으로 제한되었다고 한다.

6.1. 과거의 동성애

1937년의 연구들에 의하면 시와에 사는 거의 모든 12-18세의 남자들은 동성애를 행하며, 주민들은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여성에 대한 사랑 이야기처럼 공개적으로 얘기하였다. 유력자들은 서로의 아들들을 '빌려'주기도 하였고, 애정 다툼은 여성보다는 소년을 두고 벌어졌다고 한다. 소년들은 무희가 되어 남성들을 유혹하였고, 족장들은 '소년 하렘'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한 현지인은 시와의 여성들은 관심을 못받고, 남성들은 여자가 아닌 소년을 위해 서로 죽일 수 있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미혼 청년들이 시내가 아닌 성밖에서 자야 하는 관습이 있다고도 한다.

다만 1928년 푸아드 1세의 방문 이후 이집트의 도덕관에 따라 동성혼은 금지되었다. 그후에도 서류 대신 구두로 비밀리에 동성혼을 유지하기도 했으나 1945년 후 이집트의 행정력이 미치며 70년대 들어 거의 사라졌다. 동성애도 근래 들어 자취를 감추었고, 이집트 당국과 현지 유력자들은 이러한 과거를 숨기기에 바쁘다.

7. 관광

고대에도 신비한 분위기는 같았는지 이른바 '암몬의 신탁'으로 유명하다. 이집트 문명 말엽에 지어진 아문 신전이 그 특유의 입지로 델포이와 같은 예언적인 신탁의 장소가 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시 이집트 정복 후 방문하여 신탁을 받아 지중해권 전역에서 유명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시와 오아시스의 옛 이름은 아문 라의 오아시스였다. 현재도 일부 잔존하는 아문 신전 (일명 오라클 템플)은 시와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시내 북부 게벨 엘 마우타 (죽은 자의 산)은 헬레니즘 ~ 로마 시기 현지인들이 매장된 공동묘지[5]로, 벽화가 잘 보존된 시아문 무덤이 유명하다. 그외에 바위산이 수면에 비치는 시와 호수와 20세기 초엽 장마로 인해 파괴된 후 버려진 옛 도시 역시 볼만하다.

8. 이미지

파일:이집트 시와 2.jpg
현대 시가지

파일:클레오파트라 탕 이집트.jpg
유서 깊은 노천탕인 클레오파트라 욕탕

파일:이집트 시와 1.jpg
시와 호수

파일:시와 이집트 수로.jpg
관광지로 개발된 수로 일대

파일:시와 오아시스 이집트 1.jpg
암반에서 내려다 본 대추야자 밭

파일:시와 이집트 궁전.jpg
옛 경찰서이던 파와드 1세 궁전 (카스르 하수나)

8.1. 샬리 성채

파일:시와 이집트 성채.jpg
파일:이집트 시와 1998.jpg
파일:시와 이집트 뷰.jpg
샬리 성채는 자연 암반 위에 지어졌고, 진흙 벽돌에 소금을 섞은 케르쉬프와 대추야자 목재를 활용하였다. 한세기 이전 폭풍으로 파괴된 후 복구되지 않았으며, 그 폐허의 모습 덕에 관광지가 되었다. 관광객들은 북쪽에서부터 나선형으로 나 있는 서남쪽의 도로를 통해 접근할 수 있으며, 밤에는 조명도 비추어진다.

8.2. 아몬 신전 (언덕)

파일:시와 이집트 신전 2.jpg
아몬 신전 (오라클 템플)
파일:시와 이집트 7.jpg
파일:시와 이집트 성.jpg
신전 옆에 세워진 모스크
아구르미 언덕 서북쪽에는 신관들이 신탁을 내리던 옛 아문 신전이 있다. 쇠락한 신전 옆에는 높은 미나렛이 있는 모스크가 세워졌다. 모스크 앞의 벽감들로 장식된 우물은 한때 저장 공간으로 이어지던 통로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성소 입구의 좌측에는 리비아계로 보이는 시와 총독이 묘사되어 있는데, 맞은편에 묘사된 이집트의 파라오와 같은 모습이다. 이는 시와의 총독들이 그 고립성으로 인해 왕이라 불렸다는 헤로도토스의 서술과 일맥상통한다. 신전 일대는 20세기까지 진흙 집들로 가득했는데, 1970년 아흐메드 파크리의 조사단에 의해 정리되었다. 신전 유구 일대에는 주민들이 거주했으나 1926년 폭우 이후 구도심과 마찬가지로 버려졌다. 다만 최근까지 몇몇 가족이 신전을 집 삼아 살아가기도 하였다.

8.3. 움 우바이다 신전

파일:이집트 신전 시와 2.jpg
남쪽의 우바이다 신전은 19세기 초만 해도 거의 온전히 남아있었지만, 1811년의 지진으로 한 면의 벽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1897년 시와의 한 마무르 (관리) 경찰서의 계단과 자신의 집 건설을 위한 석재 조달을 위해 유적에 화약을 터뜨리며 현재와 같이 단편만 남게 되었다. 이로써 시간과 자연이 2천년간 이루지 못한 일을 무지한 인간이 단 몇 분만에 해내었다.

9. 여담



[1] 세누스 부족의 거점으로, 이드리스 1세의 고향이다. 본래 이집트에 속했으나 1925년 국경 조약으로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양도되어 한때 지아라붑으로 불렸다 [2]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부 [3] 파티마 조가 지리 왕조를 응징하기 위해 보낸 바누 술라임과 바누 힐랄의 경우 상당히 전투적이었는데, 시와 주민들이 그들에게 패하고 개종했을 가능성도 있다 [4] 의외의 사실이지만 사실 이슬람교 문화권에서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금기가 생겨난 때는 19세기 서구의 엄격한 청교도적 반동성애 문화의 영향을 받고 나서부터이며, 그 이전에는 동성애 혐오 정서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 스페인을 지배했던 이슬람교 왕국들에서는 무슬림 시인들과 기독교도 소년들 사이의 동성애가 공공연하게 벌어졌을 정도였다. [5] 단순히 매장에서 그친 무덤이 아니라, 벽화로 장식된 석실 1~2개로 구성된 무덤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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