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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헤디브국 الخديوية المصرية |
||
오스만 제국의 제후국 | ||
국기 | 국장 | |
1867 ~ 1914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이집트 속주 | 이집트 술탄국 | |
위치 | 이집트, 수단 | |
수도 | 카이로 | |
정치체제 | 입헌군주제, 자치령 | |
주요 헤디브 | 이스마일 파샤 | |
언어 | 표준 아랍어, 이집트 아랍어 | |
민족 | 이집트인 | |
종교 | 이슬람교 수니파 | |
통화 | 이집트 파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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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공식적인 첫 국가로 이집트 근대화의 포문을 연 나라다. 동시에 외세에 의존한 정책으로 이집트의 40년 대영제국 식민통치의 시작점이 되었다.2. 역사
메흐메드 알리 이후로 그의 가문은 왈리직을 세습하였으나 아들과 손자 모두 단명하여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다 메흐메드 알리의 장손인 이스마일이 왈리로 등극하였다. 왈리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으로 이집트를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공식적인 자치국이 되기 위해서 오스만의 압뒬아자즈를 찾아가 설득했고 결국 압뒬아자즈로부터 헤디브 칭호를 받아내었다.이 시기부터 서구 열강들도 이집트 속주가 아닌 이집트 헤디브국으로 부르며 명실상부한 이집트의 왕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헤디브직 역시 오스만 파디샤가 해임할 수 있었으나 이미 오스만은 명목상으로 상국일 뿐 양국의 국력은 거의 비등했기에 오스만 조정도 함부로 이집트에 간섭할 수 없었다.이집트는 당시 숙원 사업인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서둘렀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리비아, 에티오피아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메흐메드 알리 때부터 이집트는 이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오스만과 서구 열강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북아프리카와 레반트, 헤자즈를 장악하여 이전의 이집트 이슬람 왕조의 영광을 재연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레반트와 헤자즈를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는데는 실패하고 영향력 확대가 최대였다. 또한 에티오피아 침공 역시 실패한다.
한편 이집트는 외세에 의존한 근대화로 각종 이권이 침탈당했고 어렵사리 개통된 수에즈 운하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채무를 갚지 못해 홀라당 빼앗겼고 17개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해 행정에 난맥상이 펼쳐졌다. 주요 산업들 역시 열강들이 야금야금 장악하여 경제도 망가지게 된다. 이스마일 파샤는 이런 상황을 헌법 제정과 참정권 확대로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타개해보려 했으나 영국에 의해 개혁은 무산되고 영국은 이스마일 파샤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압뒬아자즈를 협박하여 이스마일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티우피크를 헤디브로 임명했다.
티우피크 파샤는 이스마일 파샤보다도 무능했고 이집트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수단에 주둔 중이던 아라비 파샤는 점차 외국인에 의해 지배당하는 이집트의 현실에 불만을 품으며 '이집트인을 위한 이집트'라는 구호를 외치며 무함마드 알리 왕조와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헤디브 왕당파 군대를 몰아내고 카이로를 점령한다. 결국 아라비 파샤를 몰아낼 힘이 없던 티우피크 파샤는 그를 국방대신으로 임명하고 그의 요구 조건을 수락한다. 정부와 의회 역시 아라비파 각료와 대의원들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아라비 반란군 일부가 알렉산드리아의 외국인에게 피해를 끼치자 사태가 진정되기를 관망하던 영국이 아라비 파샤가 장악한 이집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아라비 파샤의 반란군을 분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