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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이집트 헤디브
이스마일 파샤 إسماعيل باس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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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c35><colcolor=#fff,#fff> 이름 |
이스마일 파샤 إسماعيل باسا |
출생 | 1830년 12월 31일 |
오스만 제국 이집트 카이로 | |
사망 | 1895년 3월 2일 (향년 64세) |
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니예 | |
재위 기간 | 오스만 제국 이집트 총독 |
1863년 1월 19일 ~ 1867년 6월 7일 | |
이집트 속주 헤디브[1] | |
1867년 6월 8일 ~ 1879년 6월 26일 | |
후임자 | 무함마드 타피우크 파샤 |
부모 |
아버지 : 이브라힘 파샤 어머니 : 호시야르 카딘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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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 이집트의 총독.2. 생애
메흐메드 알리의 장남인 이브라힘 파샤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유년 시절에 파리에서 유럽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863년에 삼촌의 뒤를 이어 이집트 총독(사실상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왕)이 되었다. 교육 제도 개편, 우편제도 도입, 산업 시설 개설, 의회 설립 등 근대화 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1859년부터 건설을 시작한 수에즈 운하를 완공하였다.1870년대에는 이집트 너머의 에티오피아로 확장을 시도했으나 에티오피아 제국과의 두 차례 전투에서 모두 패배하여 좌절되었다. 에티오피아 제국과의 전투에서 많은 비용을 쏟아부은 이집트는 많은 외채를 지게 되었다. 결국 이스마일 파샤는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영국에 팔아넘겼다. 이때부터 영국의 이집트 내정 간섭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알-주바이르 파샤라고 하는 거물 사업가가 사병들을 부리며 지금의 수단 공화국 중서부 지역에서 자치령 이집트의 통제 하나 없이 난리를 치고 다니자[2] 사무엘 베이커라는 영국인 탐험가를 파견하여 견제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침공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사실상 실패로 끝나 이스마일 본인의 리더십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의구심이 깊어진다.
영국의 내정간섭으로 이집트인들의 불만은 심해져서 1879년에 아흐메드 우라비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스마일 퍄샤는 우라비의 요구대로 정부를 우라비의 수중에 넘겼다.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 대사관이 해체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당시 오스만 제국 술탄인 압뒬하미트 2세에게 이스마일 파샤를 총독 직위에서 해임시키라고 압박하여 이스마일 파샤는 압뒬하미트 2세에 의해 해임되었다. 우라비의 반란은 1882년 영국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집트는 결국 우라비의 반란을 계기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