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5:12:21

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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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비교: 유사 개념3. 역사
3.1. 한국사
4. 장점
4.1. 현지 안보 수요 충족4.2. 저렴한 비용4.3. 전문인력/정예병 육성4.4. 신뢰할 만한 무력의 확보
5. 단점
5.1. 특권계급화/군벌화5.2. 내전5.3. 약탈5.4. 비표준화와 분열
6. 창작물에서의 묘사7. 사례
7.1. 현실7.2. 가상
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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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병()은 국가가 소유한 군대가 아닌, 개인이나 단체가 자체적으로 모집하여 부리는 무장 집단이다.

2. 비교: 유사 개념

  • 친위대
    공화제에도 친위대는 존재할 수 있으나 역사적으로는 거의 사병이었다. 다만, "사병" 쪽이 단순히 소속을 나타낸다면, "친위대" 쪽은 그 목적이 강조된 어휘로서 주인의 경호나 보위에 좀 더 치중되어 있다.
  • 민병대
    많은 경우 국가의 소속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민병대라고 하여 반드시 국가 소속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민병대는 법으로 그 지위가 명시되거나 아예 국가적으로 조성하고 운영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옛 국민위병이나 주방위군, 민병대(대영제국) 같은 사례가 해당한다.
    무엇보다도 민병대는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목표 아래 자발적으로 모인 군대이므로,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소집한 사병과는 좀 거리가 있다.
  • 용병
    계약 형태로써 사병이 용병 범주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있으나 둘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사병"이 소속을 근거로 하는 개념이라면 "용병"은 소속보다는 금전을 목적으로 계약을 맺는 형식으로 정의되는 개념이다. 사병도 결국 개인이 투자해서 키운 병력이기는 하지만, 사병은 그 개인이 만들어낸 집단에 귀속되어 있으며 많은 경우 사병 각 일원들은 개인에게 상위자로서 복종한다. 반면, 용병과 고용주는 그저 계약 관계일 뿐 한 단체에 포함되어 있는 상하관계가 아니며, 고용주는 "개인"이어야만 할 필요가 없으므로 국가나 공적 단체가 될 수도 있다.[1] 정치깡패나 용역깡패, 어용단체원 같은 경우도 군인은 아니지만 사상적인 이유보다는 금전적 이유에서 가담하는 점에서 용병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경호원/ 보안업체
    정치인이나 대기업이 등장하는 한국 드라마 영화 같은 매체에서 자주 보이는 어디 정치인이나 대기업 회장님이나 2세가 수족처럼 부리는 선글라스 끼고 정장 입은 경호원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사병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들은 군인이 아니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사병은 아니다. 군대만큼 체계적이고 무장이 갖춰진 조직도 아니고 국제법 교전권은 없고, 그들도 스스로 자신을 군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 진영을 대변하는 비영리단체의 단체원도 마찬가지다.
  • 군벌
    정확하게는 사병을 부리는 주체에 해당한다. 강력한 사병을 보유하고 정치권력까지 얻으면 군벌이 된다.

3. 역사

국가에 소속된 군대는 역사적으로 다른 유형의 군대보다 오히려 더 늦게 생겼다. 초기 국가는 동등한 시민이나 부족민 간의 공공재산으로 취급되거나 귀족, 성직자와 같은 소수 집단이 사회 전반의 권력을 독점하였다. 따라서 군사력 역시 전자라면 민병대로서 공동부담하고 후자라면 이들 지배층이 사유하는 것이 당연했다. 애초에 사병을 지닌 자 중 제일 강한 자가 국가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래에서 보듯 전근대 국가는 행정력과 경제력의 부족으로 '개인이 아닌 국가에 소속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이에 해당하는 것은 전시에 급하게 모은 징집병들뿐이고 대다수 상비군은 사병에 가까웠다.[2]

특히 유럽의 경우 '군대는 국가만이 소유한다.'라는 개념은 근대에 와서야 생긴 것으로, 그 전의 군대는 실질적으로는 거의 다 사병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봉건제를 시행한 나라의 병력 충당 방식은 '영지를 하사받은 영주가 지정량을 채워서 오는 것'이었으니, 이 병력들은 영주가 용병을 고용하든 영민을 교육시켜서 병사로 삼든[3] 둘 중 하나이므로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영주의 군대'일 수밖에 없다.[4]

그러나 국가 내부에서 중앙정부의 말을 듣지 않는 군사집단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전이나 독립전쟁이 터질 위험성을 동반하므로 어느 나라든 중앙 집권 체제가 잡히면서 슬슬 사라졌다.

역사상에 언급되는 귀족들의 사병들은 대부분 서양의 봉건제적 개념과 흡사한 형태를 띈다. 귀족들은 영지 또는 특정 토지에 대해 수조권을 가지고 있어, 그 해당 영역에 포함된 일정량의 재화와 함께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데,[5] 이것이 기본적으로 사병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수조권이 존재하지 않는 현대와 달리 과거에는 비교적 사병을 유지하기가 쉬웠다고 할 수 있고, 당연히 그런 사례도 역사상에서 굉장히 많다. 물론 이러한 수조권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도 자체적으로 사노비 등을 무장시켜 사병화하는 귀족들도 존재했지만 대부분 그 경우에는 그 병력의 숫자가 굉장히 제한적이고 정예군적 성격을 강하게 띈다.

21세기 현실에서 사병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면서 국가의 군대인 경우도 드물게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군이 이에 해당하는데, 영국군의 정식 명칭은 국왕 폐하의 군대(His Majesty's Armed Forces)[6]로 군주의 소유임을 나타내고 있지만 영국군이 영국이라는 국가의 군대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실이다.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당의 군대 중국 인민해방군, 조선인민군도 비슷하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치안이 안 좋은 곳 같은 경우 지역 토호 자경단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사병을 부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3.1. 한국사

한국사에서도 고려 시대때는 각 호족들이 사병들을 거느렸지만, 조선 시대에 사병이 혁파되었다. 사병 혁파 문제에 대한 반발에 세자 책봉 문제 등이 겹치며 벌어진 사건이 바로 무인정사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차 왕자의 난의 주인공이면서 반 사병 혁파 세력의 거두였던 태종 이방원이 세자 자리에 오르자 마자 한 짓이 사병 혁파였다. 이렇게 일이 돌아간 이유는 처음 사병을 혁파하려 했을 때는 이를 시행한 사람이 정도전이었고 워낙 어그로를 많이 끌었던 탓에 사병을 주로 가지고 있었던 왕자와 왕족들에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라는 이방원의 주장이 먹혔으나 정작 그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 직접 사병을 혁파하자 큰 소동 없이 중앙군으로 편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건국 초기에 사병 혁파를 통해 개인이 일정이상 무력을 가지는 것을 제한하는데 성공하고 그 무력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킴으로서, 왕권의 틀을 다지는데 성공했다.

다만 이후에도 권신들이 중앙군이나 지방군을 사병화하는 경우가 꽤 있었고 반란이나 반정 당시에 노복들이나 백성들이 사병으로 편입되는 경우가 있었고 암암리에 사병을 비밀스럽게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4. 장점

사병이 별로 안좋은 취급을 받으면서도 현대에도 제3세계의 일부 지역에 존재할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이유가 있다.

4.1. 현지 안보 수요 충족

현대의 1세계 국가들처럼 중앙정부가 확립한 치안이 지방의 구석진 곳까지 제대로 작동한 사례는 잘 해봐야 백년 미만이며 그나마 이런 경우라도 국토가 넓은 미국의 격오지 같은 곳은 아직도 치안이 미비해서 주민들이 총기 등으로 자체 무장하고 경찰의 출동까지 버텨야 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에도 이럴 지경이니 과거에는 도적이라도 쳐들어오면 정부군이 출동할 때까지 해당 마을이 알아서 잘 방어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주민들이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은 극히 어렵고 결국 마을 내에서 큰 기침소리 내며 힘쓰는 토호들이 대장이 되며 지휘권을 확립하고 재정적인 뒷받침을 하면서 마을의 인원을 조직화해서 자경단을 구성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군대가 곧 사병이 되는 것이다. 만일 정부군이 출동할 때까지 버티는 것도 힘든데 정부군이 올지 안올지 알 수도 없다면 사병이 사실상 전적으로 해당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주민을 보호하게 된다. 현대에도 국가 체제가 허약한 제3세계에 사병이 많은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전근대에는 공적 군사 직무를 맡은 경우라도 불가피하게 사병을 육성해야 할 수 있었다. 예컨대 변경백이나 절도사, 군관구 사령관 등은 외적의 침입이 잦은 변경을 확실하게 방어하고 가끔씩 예방전쟁의 일환으로 공세도 취함으로써 적군이 변경지역을 돌파하고 국가의 핵심지역이 위기를 맞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국가에서 지급한 병력만으로는 도저히 방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서 원활한 업무수행을 위해 현지에서 사비를 들여서 스스로 육성한 병력을 추가하거나 아예 현지 주변의 야만족을 고용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서 사병을 대규모로 육성하는 경우가 잦았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병력은 사병으로 분류되었다.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오늘날 미국에서 총기규제가 좌절되는 요인도 이와 비슷하다. 공권력은 한참 머니 스스로 총기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미국은 세계의 초강대국이라 외적이 공격해올 일은 없으니 '스스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로까지 발전되진 않지만, 군사적 압박이 심한 곳에서는 충분히 자체 무장을 할 만한 요인이 된다.

4.2. 저렴한 비용

전근대 시절에는 교통, 통신, 수송, 보급, 교육 등의 여러 분야에서 기술력이 모자란 탓에 행정비용이 많이 소모되었으며, 같은 이유로 공직자에 대한 감시가 쉽지 않아서 어떤 방식의 제도를 만들든 간에 단계를 하나 통과할 때마다 각종 이유로 포장된 뇌물이 추가되는 관계로 인해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그 까닭에 중앙정부가 정예화된 대규모의 정부군을 오랜 기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각종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국가에 평화시대가 길어지거나 존속기간이 늘어나면 결국 궁궐을 지키는 소수의 친위대급 정예병을 제외하고는 서류상에나 존재하는 병력이 되기 십상이었다.[7]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지역에서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을 하면서 역시 지역에 기반을 둔 토호로부터 받는 약간의 지원만으로 스스로 무장하고 정예화된 사병은 중앙군에 비하여 비용이 매우 저렴하면서도 유지기간이 매우 길고 대를 이어가면서 병역을 수행하므로 유사시에 약간의 추가지원만으로 충분하게 정예병 역할이 가능하다. 그리고 아무리 사병의 질이 좋지 않아도 적어도 강제징병으로 막 끌려온 농민으로 급조하거나 순환 근무식으로 일정 기간만 복무하는 시민 혹은 양민 출신의 정규군보다는 수준이 좋아진다.

그래서 사병을 없애려고 혈안이 된 중앙정부도 이런 점을 고려해서 스스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소규모 자영농을 육성하려고 하고 부병제 테마 제도 등의 방법으로 이런 병력을 정규군 자산으로 유지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정상적으로 운용될 때에도 전문성과 동원 방식의 한계로 방어는 잘하여도 공세나 원정, 전문화에는 불리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제도는 병력을 공급하는 자영농이 경제적으로나 인력으로나 버틸 수 있어야 성립하는 까닭에 결국 균전제처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체제가 무너지거나 동로마처럼 감당 안 되는 수준의 국방 압력을 받거든 자영농이 파산하면서 그대로 붕괴되는 일이 잦았다.

결국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지방군 대신 중앙 야전군을 강화하거나 자영농 대신 지방 토호를 기용하여 해당 변경지역을 담당하는 별도의 직책을 만들거나 아예 해당 지역을 분봉해서 영주를 만들어놓고 평상시나 사소한 위기 시의 방어를 전담하게 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후자의 경우 당연히 사병으로서 성격이 짙어졌다.

4.3. 전문인력/정예병 육성

주로 중앙정부 소속의 장군들이 거느리는 사병들에게 적용되는 특징으로, 장군들이 전쟁에서 활약하기 위해 부대를 장악하고 장군의 지시가 제대로 휘하 부대에게 전달되며 유사시에도 혼란에 빠지지 않고 장군의 뜻을 짐작해서 스스로 활동하여 전황의 악화를 막기 위해 장군들이 개인 사병을 육성하고 유지해야 할 필요가 높았다.

과거에는 사관학교는커녕 과학적이고 체계화한 교육·훈련제도도 찾아보기 어려웠고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해도 현대와 같은 수준으로 장병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불완전하게 정비된 제도로써 운영되었으므로 그 군사적인 능력은 부족한 사례가 매우 많았다.[8]

특히나 장군에게 유사시에 주어지는 병력의 수준이라는 것이 갑자기 징발해서 어제까지 농사짓다가 오늘 무기를 처음 들어보는 초짜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매우 많았으며 이들을 긴급훈련할 시간이 없다시피하고 비용도 별로 없는 경우가 많았다.[9]

이런 상황에서 장군들은 평소에 심복이나 종자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묘사 혹은 위장된 사병을 육성하여 스스로 참모진과 초급장교, 부사관, 숙련병을 육성해놓아야 했다. 그래야 이들을 군대의 주축으로 삼아서 저런 오합지졸 병력을 가지고도 일단 전투가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에서 고대 로마 공화국 당시 장군들의 사재로 추가모집된 군단병 및 보조병이나 중세 봉건제에서의 기사, 종사(Thegn), 후스카를 등 전사귀족, 동아시아에서 후한 말 삼국시대 호표기 청주병 부곡(部曲), 후기 명나라군의 가정(家丁), 여말선초 권문세족 가별초 등이 유명한 사례이다.

4.4. 신뢰할 만한 무력의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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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국왕이나 황제, 고위급 왕족이나 황족이 자체적으로 확보하는 사병들에게 적용되는 항목이다. 이런 분류에 속하는 고위급 인사들에게는 보통 국가가 국가예산으로 정규군을 호위 목적인 경호대로 편성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병을 별도로 양성하는 사유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긴급시, 유사시, 위급시에도 무조건 호위대상겸 상관인 자신만을 믿고 따르며 명령을 수행하는 무장조직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최고 지도층은 항상 암살, 폐위, 정변등의 위협을 받는데 이런 상황에서 국가에서 지급한 경호대 같은 것은 국가의 실권을 잡은 세력의 명령에 따라서 유사시에 무기의 방향을 돌려서 호위하던 대상을 척살하는 사태가 유독 잦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근대시절까지 국왕같은 최고위급 인사가 직접 최전선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전황이 악화해서 긴급후퇴를 하거나 포위망을 돌파하고 혈로를 개척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 때 국가가 지급해준 경호대 같은 것은 그 자리에서 제멋대로 호위대상을 버리고 각자도생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고 호위대상을 끝까지 호위하며 안전한 외부로 탈출시킬 별도의 병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국왕이 국가 예산과는 별도로 사용할 수 있는 국왕 일가의 개인적인 자금인 내탕금을 두둑하게 지불해서 별도의 정예 사병을 육성할 필요가 매우 높아진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육성하거나 고용한 병력은 국왕 입장에서도 매우 유능한 무력수단이 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랑인 친위대다.

5. 단점

중앙정부가 확립되면 사병을 반드시 없애버리려고 장기간의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가 존재한다.

보통 이런 문제들로 인해 전근대 시절에는 태조가 국가를 창업한 후 2대나 3대 군주인 태종때에 대규모 숙청과 토벌을 통해 사병 세력을 뿌리뽑고 중앙집권을 확립한 후 그 다음 군주인 세종부터 국가의 전성기를 맞는 게 일반적이었다. 만일 이걸 실패하면 말제같은 칭호를 받는 군주가 나오면서 국가가 빨리 패망한다.

5.1. 특권계급화/군벌화

군주나 높으신 분들을 제대로 호위하고 전쟁에서도 정예 병력으로 활동하라고 만들어놓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특권계급이나 군벌의 똘마니로 전락하여서는 실력은 별로 없으면서 심심하면 정변이나 일으켜서 군주를 자기 멋대로 갈아치우고 국정에 혼란을 주는 사례가 무지하게 많다.

특권계급화는 특히 독특한 출신성분을 지녔으면서 현지에 기반을 두었다면 높은 확률로 발생하는 현상인데, 친위대처럼 중앙군 성격을 띠면 신분화하고 지방군 성격을 띠면 군벌이나 분리주의 세력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예니체리, 팔기군, 스트렐치같은 경우이며 고대 로마의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가 이런 분야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한다.

바랑인 친위대의 경우에는 매우 특이한 사례로서, 위 조직들과는 달리 현지에 세력기반을 두지 않은 까닭에, 장기간 활동하면서도 국정에 간섭하려고 하지 않았고 정변이 일어나더라도 호위대상이 암살당하기 전까지는 끝까지 싸우는 충성심을 보인 조직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정변으로 바뀌는 것에 성공하면 그 순간 바랑인 친위대는 항복의사를 밝힌 후 새로운 황제에게 충성을 하는 관습이 존재하며 이를 신임 황제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그대로 고용하며 처벌은 하지 않고 오히려 충성심이 훌륭하다고 판단하는 관습도 존재했다. 신임 황제 입장에서도 전임 황제가 그랬듯이 자신이 죽기 직전인 최후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편을 들면서 싸우는 무장세력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군벌화는 주로 중앙정부에 소속된 장군들이 거느린 사병들에게서 나타난다. 장군들이 자신들의 사병을 이용해서 군대를 통솔하고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이게 반복되다보니 병력들이 충성의 대상을 중앙정부가 아닌 자신들이 소속된 부대를 통솔하는 장군에게 돌린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사례는 특히 로마 공화정 시기의 내전에서 빈번하였다. 로마 군단인 레기온을 통솔하는 유명한 정치가겸 군인이 휘하 병력들을 재정적으로도 뒷받침하면서 로마군이 사유화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술라의 내전 카이사르의 내전이다. 정치가들이 군벌이 되어 수도인 로마를 공격하며 자기들 멋대로 삼두정치를 시행하는 등 대혼란이 지속되다가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로마 내전에서 승리한 후 로마 제국를 창립하고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군제 개혁을 해서 문제를 해결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로마군 병력이 자신들의 사령관을 추대하는 식으로 네 황제의 해, 다섯 황제의 해, 군인 황제 시대같은 혼란이 로마의 중앙정부가 혼란에 빠질 때마다 발생하였고 심지어 한참 뒤인 동로마 제국에서도 테마 제도에서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발생한 군사귀족들의 반란 때문에 큰 테마를 잘게 나누어서 운영하느라고 애먹었다.[10]

지방이나 변경에 배치된 장군들의 경우도 매한가지라서 변경백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독립해버리거나 절도사가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키는 안사의 난 및 그 이후의 절도사 군웅할거 시대같은 것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는 중앙정부를 뒤집는 일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해당 지역을 점거하고 사실상 그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는 위력을 발휘하며 제멋대로 지방을 통치하기 때문에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세력이 약화되고 지방을 다시 토벌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답없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심한 경우 군벌 시대의 중국처럼 그 틈을 노려 외세까지 개입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국가를 막론하고 장교가 1~2년 단위로 임지를 옮기는 순환근무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장교가 한 부대에 오래 있으면 필연적으로 휘하 병력들이 국가가 아닌 해당 장교에게 충성하는 사태, 즉 사병화가 일어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11]

5.2. 내전

국가 내부에 사병이 난립하면 그게 바로 군웅할거나 마찬가지며 수틀리면 중앙정부를 엎어버리려고 쿠데타 시도를 하거나 자기네들끼리 영지를 늘리려고 내분이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이런 시도들은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거나 외적의 침입이 있는 등 중앙정부가 곤란할 때 주로 발생하므로 국정을 운영하기 매우 힘들게 된다.

이런 상황속에서 국정을 계속 수행하려면 국왕 자신이 문무겸비를 한 만능인에 가까워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은 군사적 재능이 좋지만 내정능력이 꽝이라던지, 반대로 내정능력은 좋으나 군사적 재능이 안좋다던지 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종종 암군이나 폭군같이 답없는 사람까지 튀어나오므로 중앙정부에 소속된 신하들의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커버가 불가능하다.

이런 것이 심화된 것이 류리크 왕조 시절의 키예프 루스다. 국가를 구성하는 각 공국의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경쟁자들에게 쫓겨난 대공은 다시 본거지로 돌아가서 세력을 키워 키예프 대공으로 복위하기도 했는데, 뱌체슬라프 1세 때부터 쫓겨났다가 복위함이 관례처럼 되풀이되었다. 심지어 류리크 2세는 무려 5번이나 즉위했다. 국가에 내전이 빈번하니 중앙정부의 꼴이 개판으로 전락해버렸고 종종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같은 사람이 수습하기도 했지만 개인 플레이로 해결한 것이라 결국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결국 키예프 루스는 사실상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었으며 몽골 제국이 침입하자 급하게 각 공국이 연합군을 편성하였으나 칼가강 전투에서 괴멸당했고 그 후에 공국들이 하나씩 몽골 제국에게 각개격파당해서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리게 된다.

5.3. 약탈

약탈 자체는 딱히 사병이 아니어도 흔하게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12] 사병 자체가 권력을 위한 무력인 까닭에 약탈을 조장하는 면이 있다.

특히 고용주가 사병의 존재에 권력을 의지하면서도 그 재력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사병을 육성한 경우에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사병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병들에게 사사로이 약탈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용하거나 아예 고용주부터가 병력 유지를 약탈로 해결하려는 마인드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 그 순간 사병은 말 그대로 허가받은 도적집단이나 마찬가지가 되며 주변에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제3세계의 사병들이 약탈을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특이한 기록으로 무신정권의 집권자 중 하나인 경대승의 도방(都房)에서 일어난 사례가 존재한다. 중앙정부를 집권하는 사람이 호위목적으로 백수십 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을 사병으로 육성하였고 해당 조직의 기강도 좋은 편이며 경대승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은 편이었으나, 어이없게도 이들은 막상 월급을 제대로 못 받는 처지였기에 약탈을 벌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경대승이 그 시대 한정으로 약간 이상주의적인 면모가 있어서 아버지인 경진이 착취한 토지를 반환하며 경씨 가문이 지녔던 토지까지 함께 반환해 버려서 결과적으로 경대승은 가난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의 집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산을 따져보면 집 한 채, 쌀 몇 섬, 몇 필의 말 먹이뿐이라서 100여명이라는 인원을 먹여 살릴 경제적 능력이 전무했기에 장사들은 제때 월급을 받지 못하였고, 군적이 아니기 때문에 군인전도 받지 못하여 생존을 위해 점차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했고 경대승이 어쩔 수 없이 묵인했다고 한다.

5.4. 비표준화와 분열

현대에 들어와서 사병의 군사적 효능이 바닥으로 떨어진 중요한 이유다. 이제는 사병이 군사적 효용성 측면에서 가치가 거의 없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총력전의 개념 하에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식 소총같은 통일된 장비를 지급받아야 현대전에 적합한 기초적인 전투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에 들어와서야 주특기훈련등 각자 맡은 임무에 따른 훈련과 교육과 실전경험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전근대 시절처럼 각 부대간에 공통으로 통용되는 것이 거의 없는 사태가 발생하면 소규모 집단이 각자 알아서 싸울 뿐인 사태가 터지므로 통합된 지휘가 불가능하고 서로 자신들의 영역만 지키려고 하니까 전투지경선이 돌파되는 등의 악영향이 터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신규병력이 해당 부대에 쉽게 적응하고 곧 해당 부대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데 각 부대간의 풍습이 사병급으로 매우 다르면 이것도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전근대 시절처럼 사병 조직을 묶어서 현대전을 수행하려고 하면 잡음만 엄청나게 많아질 뿐 전투성과는 없다시피하고 패전을 반복하게 된다. 제3세계의 군벌이나 사병 조직들이 현지 주민을 약탈하는 것이나 잘하지 전투능력은 크게 떨어지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6. 창작물에서의 묘사

보통 매체에서 나오는 사병들은 악의 세력으로 등장하는 경우(예: 루갈의 조직, 샤돌루, 네스츠, 칸타리스, 와일드 독(조직의 이름)등)가 대부분이지만, 미스릴, 펜릴이나 하이데른 용병단과 같이 정의의 편인 사병 조직도 존재한다.

사이버펑크 장르에서는 주로 국가의 힘이 약하고 초거대기업이 활개를 치다보니 기업 산하의 사병이 자주 등장한다. 사이버펑크 2077의 밀리테크, 아라사카 사병 부대가 대표적이며, 표방하는 장르가 사이버펑크는 아니지만 더 대중적인 예로는 아바타 시리즈의 22세기판 콩키스타도르, RDA 보안작전부가 있다. 군대나 다름없지만 국가군이 아니라는 독특한 속성 때문인지 군산복합체와도 많이 연결된다. 이런 경우 군산복합체의 야욕을 위해 일하는, 세간엔 그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도 않은 비밀 사병 집단으로 발전한다. 대체로 회사 소속이니 '사(社)병'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탄생 배경은 여러가지로, 정식 군대에서 갈라져 나온 이들이거나 태생이 용병인 이들, 심지어는 종교집단의 무장 광신도들일 수도 있다. '국가가 소유한 정식 군대가 아니기만 하면' 된다. 다만 조건에는 부합하지만 보통 단순히 계약 기간을 기준으로 활동하는, 다시 말해 조직 자체가 '전쟁 장사'를 위해서 특정 개인/단체와 계약하는 "용병단" PMC은 특정 개인/단체의 사병으로 잘 칭하지 않는다. 용병이 사병으로 나온다면 사병 조직을 만들고 조직원 충당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

7. 사례

7.1. 현실

  • 한국
    • 고구려 23대 안원왕시기에 왕위 계승문제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면서 귀족들간의 무리를 이끌고 내전급 규모의 전쟁이 벌어졌던 사례에서도 귀족들의 사병의 존재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 신라 진골 귀족들간의 왕위쟁탈전에 사병이 적극 활용되었다. 신당서에 따르면 신라 하대의 재상가는 하인이나 노비들이 무려 3,000명이나 있었는데, 하인이나 노비의 수와 비슷한 수의 무기까지 갖추고 있었고 유사시 사병으로 동원될 인적 기반이었음을 말해준다.
    • 고려 시대 때에는 귀족들과 무장들이 사병을 양성하였는데 도방(都房)이라는 존재가 경대승을 통하여 등장하여 사병들이 고려 정계에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아예 도방이 정규군화되기 시작하여 여몽항쟁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화된 고려의 정규군을 대체하였다. 최종적으로 삼별초가 궁극적인 고려시대 최종적인 사병의 위상과 입지의 절정을 보여주게 된다.
    • 조선시대 초까지도 고위 귀족이나 호족이 보유하였고 이성계 본인조차도 작은 나라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막대한 사병조직인 가별초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조선 초에 의 왕자의 난 때 자신의 사병의 힘으로 권력을 지킨 이방원이 자신이 집권한 후에 국왕과 세자의 시위(侍衛)를 제외한 사병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못박아 버렸다.[13]
  • 북한
    • 조선인민군: 명목상 조선로동당의 군대이나 사실상 김씨 왕조의 사병이 되었다. 김정은 시대에 국방위원회를 해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를 신설하여 모든 업무를 이관함으로서 그 구조가 크게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국방위원회가 실질적으로는 이미 북한의 최고 기관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조선로동당의 하위 부서 중 하나일 뿐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명목상으로도 공개적으로 조선로동당보다 더 위에 위치하도록 바꾸려는 의도 때문이다. 때문에 그동안은 '사실상 김씨 일가의 사병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아니었던' 구조에서 이제는 대놓고 김씨 일가의 사병으로 거듭난 것이다.

7.2. 가상

8. 같이보기


[1] 예컨대 시에라리온에서는 정부 측에 고용된 민간군사기업이 반란군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2] 그런 의미에서 의외로 예비군이 상비군 현역보다 그 역사가 오래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동아시아 병농일치제에서 모든 농민은 유사시에 징집될 수 있는 예비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프로이센이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근대적 예비군과는 달리, 이들은 현역으로 몇 년간 있으면서 복무하진 않았으므로 전투력은 오늘날의 예비군보다도 훨씬 낮았다. [3] 다만, 이 경우 농노들이 영주에게 복종하는 가장 큰 이유였던 자신의 생명 보장을 영주에게 일정 부분 빼앗기는 것이라 효과도 떨어졌고, 군사의 질도 절대 용병에 미치지 못했다. 제도적인 징병은 몹시 어려웠고, 영민을 용병에 맞먹는 우수한 병사로 육성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용병을 고용하는 것의 3배에 달했다. 예컨대 프랑크 왕국의 경우 본래 자유민 보병대를 소집하였으나 대외원정 시 어려움이나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이교도 약탈자들에 대응하기 어려웠기에 전업 기병대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보다는 후대까지 비교적 이러한 징집병 제도가 잘 작동하였던 앵글로색슨 시대 잉글랜드 왕국의 퓌르드(fyrd)도 농사 문제로 교대로 소집되는 탓에 장기간 원정 시 교대시기를 제때 못 맞추어 후속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복귀하는 바람에 공백기가 생기고는 하였다. 그래서 이들도 이러한 부분은 종사(Thegn)나 후스카를 등 전문군인들이 보완하였다. [4] 다만, 봉건제도 하에서는 영지 하나가 작은 나라에 준하고, 영지 자체가 국가 체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건 아니었으므로 영주의 군대는 완전한 사병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전근대 유럽에서 공무는 유력자에게 위탁되는 개념이었으므로 사적인 면과 공적인 면도 혼재하였다. [5] 통일신라 시대의 녹읍, 식읍 역시 토지 소유주에게 수조권 및 노동력 징발권한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6] 군주가 여성인 경우는 여왕 폐하의 군대(Her Majesty's Armed Forces)가 된다. [7] 대표적 사례로 명나라군을 꼽을 수 있다. 명나라는 초기에 부병제의 일종인 "위소제"(衛所制)를 실시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토지부족에 따른 재정악화 문제로 약화되면서 토목의 변과 같은 참패를 겪게 되었고, 이를 장수들의 사병인 "가정"(家丁)으로 보완하다가 임진왜란 동안 이들마저 소모되자 직후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8] 각 인사 제도의 장단점에 관해서는 과거 제도 문서의 비교 부분과 거기에 연결된 매관제, 엽관제 등 관련 문서들을 참고할 것. [9] 둔전이 어느 정도 군사적 효용성을 지녔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겸사겸사 경비소요도 줄이는 효과는 덤이고, 어차피 정규군도 오합지졸이니 같이 농사라도 지어본 사람들이 그나마의 조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0] 다만, 고대 로마 및 동로마 제정에 대한 공화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최근의 시각에서는 이를 일종의 공화주의적 정치 참여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반란이 국가적 의제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특정 계급이나 집단, 지역 등의 지지에 힘입는 양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농촌의 정치화, 군대의 민주성: 비잔티움 이해에 대한 균열 [11] 사병화를 막는 대신 전문성이나 조직력 발휘가 약해지는 점은 부사관들이 한 부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장교를 보좌하는 것으로 보완한다. 부사관은 일반적으로 지휘자일 뿐 지휘관으로 임명되지 않으므로 사병화 위험성이 약하다. 다만, 오늘날에는 유착 비리 해소나 공정성을 위하여 부사관들도 부임 기간이 길지언정 순환 자체는 되도록 시키는 방향으로 바뀌는 추세다. [12] 사병과 민병대, 용병, 국군 등 정규군을 막론하고 나타난 현상으로, 나폴레옹 전쟁 등 근대까지야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조차 알음알음 일어났다. 당장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라. 제2차 세계 대전기 미군 정예 공수부대인데도 현지에서 귀중품을 약탈하는 묘사가 나온다. [13] 1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에 대한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불만에 정도전을 위시로 사병을 폐지하려는 것에 대한 일부 세력가들의 불만이 더해져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왕권 강화를 위해 사병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정작 자신이 직접 사병을 없애 이에 대한 불만들이 또 터져나오자 왕권 강화 목표도 겸해 숙청을 시작한다. [14] 1편에서는 흑복이었으나, 키와미에서는 무나카타 세이시로의 호위대처럼 푸른 전투복으로 변경. 그리고 추가로 정장, 전술팀 할 것 없이 군대식 계급체계(ex) "부사관(サージェント)" "대령(カーネル)") 를 사용한다. [15] 오직 래시온에게만 충성하는 사병 조직 [16] 엔딩 C를 선택했을 경우 주인공들이 '큰 거 한 방' 미션에서 수행한 금덩어리들을 모조리 차지하기 위해서 FBI와 메리웨더가 서로 맞짱을 뜨고 주인공들이 서로 힘을 합쳐 이들을 물리쳐내는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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