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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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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술
아랍어: الموصل
국가
[[이라크|]][[틀:국기|]][[틀:국기|]]
니나와 주
면적 180km²
인구 1,739,800명( ISIL 점령전~점령기)
1,892,300명( ISIL 해방후)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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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الموصل
영어 Mo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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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어 مووسڵ (Mûsil)
튀르키예어, 이라크 튀르크멘어 Musul (موصل) }}}

파일:모술 모스크 성당.jpg
앗 사파 성당과 모스크
f#1f2023>
파일:external/www.iccdc.us/61582484ec6.jpg
티그리스강 서안의 바쉬 타피아 성채 (12세기 건립)

1. 개요2. 지리3. 역사
3.1. 중세3.2. 파괴와 중흥3.3. 오스만 제국3.4. 근현대3.5. 현대
3.5.1. 다에시의 강점3.5.2. 현황 (탈환 이후)
4. 튀르키예의 영유권 주장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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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라크 북부 니나와 주의 주도.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400km 떨어져 있고 인구는 180만명으로 이라크 제2의 도시이며 이라크 북부의 중심 도시이다. 바그다드와 마찬가지로 시가지는 티그리스강 양안을 끼고 조성되어 있다. 서안의 메디나 (구도심)에는 바쉬 타피아 성채와 앗 누리 모스크, 앗 사파 성당 등의 중세 건축물들이, 동안에는 주명의 유래이기도 한 니네베 유적이 신도심 한복판에 남아있다.[1] 직물의 일종인 모슬린이 도시 모술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 지역의 특산물이다.[2]

전쟁 전에는 아랍인, 아시리아인[3], 튀르크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야지디인, 샤바크인 등의 다양한 민족과 이슬람, 기독교, 만다야교 등의 신앙이 공존하던 국제적인 도시였다.[4] 아시리아 제국, 함단 왕조, 우카일 왕조, 장기 왕조 등의 수도로서 번영하였으며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다만 2014 ~ 2017년간 ISIS의 강점으로 알 누리 모스크와 베쉬타브 성채, 박물관의 아시리아 부조들 등 상당수의 유물, 유적들이 파괴되는 피해를 겪었고, 약 10만여명의 기독교도들이 2천년간 살아오던 도시를 떠나야 했다. 현재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다.

2. 지리

티그리스강이 도시를 지나며 해발고도는 223m이다. 북동부는 니네베 평원이 위치하고 남서부는 사막 지대이고 동쪽에는 자그로스 산맥이 있으며 기후는 스텝기후 지중해성 기후의 특성을 띈다.

큰 강과 넓은 평야가 있어 곡식이나 과일이 풍성하게 자라며, 석유도 많이 매장되어 있다. 또한 옛날부터 모술은 대리석 생산으로 유명했다.

3. 역사

파일:모술 이라크 1.png
모술 시가지. 강 동쪽의 성벽이 옛 니네베 유적

티그리스강의 서쪽에서 발달했으며, 강 동쪽에는 옛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5]가 있었던 곳이다. 아케메네스 제국기 티그리스 서안의 아시리아인 마을이 멥실라 (Μέψιλα)로 기록되었고, 이것이 현 지명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사산 제국기 니네베는 아소리스탄 주의 치소였고 점차 기독교가 전해졌다. 4세기까지 기존 다신교가 남아있었으나, 결국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주류를 이루었다.

3.1. 중세

639년경 우트바 이븐 파르카드 앗-술라미가 이끄는 이슬람 제국군이 니네베 및 멥실라를 점령했다. 기존의 니네베는 버려지고 있었기에 멥실라가 아랍어로 '이어줌'이란 뜻인 모술로 개칭되어 자지라 지역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부상했다. 이슬람 지배 하에서 아시리아 정체성은 약화되었다. 9세기 후반, 압바스 왕조의 쇠퇴를 틈타 이샤크 빈 쿤다즈와 그의 아들 무함마드가 모술에서 자립했으나 893년 칼리파 알 무타디드가 수복했다.

3.1.1. 함단 왕조

10세기 들어 모술은 압바스 칼리파 하의 총독에서 세습 왕정으로 전환한 함단 왕조의 수도가 되어 번영했다. 968년 모술을 방문한 이븐 하우칼은 주로 쿠르드 인이 거주하는 아름다운 도시라 기록하였다. 978년, 모술은 부와이 왕조의 아두드 앗 다울라에게 정복되었다. 다만 980년대 쿠르드계 마르완 왕조의 창건자 바드 빈 두스타크가 일대를 위협하자 부이 조는 현지인 사이에서 신망이 높은 함단 가문을 모술에 봉하여 대적하게 하였다.

함단 왕공 알 후세인과 이브라힘 형제가 도착한 직후 봉기가 일어나 부이 조의 총독이 축출되었고, 이렇게 복원된 함단 조는 주요 지지 세력이던 바누 우카일에게 지즈레와 누사이빈 등을 하사하였다. (989년) 이듬해 바드는 재차 모술로 남하했으나, 발라드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인 바누 우카일 군에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뒤이어 알 후세인과 이브라힘은 디야르바크르로 역공세에 나섰는데, 패배하고 전자는 사로잡혔다.[6] 이브라힘은 아들 알리와 함께 누사이빈으로 피신했는데 우카일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알 무사입에게 피살되었고, 후자는 모술을 장악하여 우카일 왕조를 세웠다.

3.1.2. 우카일 왕조

991년, 부와이 왕조의 장군 자파르 알 핫자즈가 우카일 군을 격파하였다. 이듬해 체결된 휴전에서 우카일 조는 부와이 조에 복속했고, 영토 대부분을 유지했으나 모술은 넘겨야 했다. 그후 자파르가 총독으로 부임했고, 996년 무함마드 이븐 알 무사얍이 사망하자 두 동생 알리와 알 무칼라드가 계승 분쟁을 벌였다. 알 무칼라드는 부와이 조에 협력하는 척하다 알리와 비밀리에 연대하여 함께 모술을 습격해 자파르를 축출하고 도시를 장악했다. 이후 부와이 조와 협상하여 모술 영유 및 쿠파 등지에서의 수조권을 대가로 매년 1만 디나르 금화의 연공을 약속했다. 한편 알 무칼리드와 알리는 통치권을 두고 다투다 전자가 모술을 비우면 후자가 대리하는 형태의 공동 통치에 합의하였다. 다만 1000년경 알리가 사망하자 알 무칼라드는 조카 하산을 축출하고 전권을 쥐었다. 티크리트, 안바르에 이어 바그다드 성밖의 앗 신디야까지 장악한 알 무칼라드는 1001년 1월에 드디어 바그다드 점령을 시도했으나 부와이 조와의 협상 도중 튀르크인 노예에게 암살당하였다.

알 무칼라드 사후 그를 계승한 장남 키르와쉬는 숙부 알 하산과 계승 분쟁을 벌이다가, 친족이 아닌 부족원 카라드 빈 라디드가 도전해오자 연대하여 모술에서의 공동 통치에 합의했다. 다만 쿠파는 그대로 키르와쉬에 배정되었고, 그는 혼란을 틈타 쿠파를 점거하고 있던 카파자 부족을 축출했다. 1002년 7월, 키르와쉬는 아사드 부족과 연대하여 마다인으로 진군했으나 쿠파에서 부와이 군대에 패배하였다. 이후 부와이 장군 알 하자즈 이븐 우스타드 후르무즈는 카파자 및 쿠르드 인들과 연대해 반격했고, 키르와쉬는 재차 패하여 모술로 물러났다. 아사드 부족의 알리 빈 마즈야드는 부와이 조와 타협하여 사나 앗 다울라 호칭과 함께 자지라 총독으로 봉해졌다. 그러던 1005년, 카파자 부족이 바스라에서 벌어진 아불 압바스 빈 와실의 반란에 가담하자 부와이 조는 재차 키르와쉬에게 쿠파 지배권을 넘기며 무타미드 앗 다울라 칭호를 내렸다. 이듬해에는 알 하산이 사망하자 모술을 완전 장악한 키르와쉬는 비록 쿠파 탈환에 실패했지만, 1008년 파티마 왕조에 복속한 카파자 부족장 아부 알리 빈 티말로부터 라흐바를 빼앗을 수 있었다.

1010년 8월, 키르와쉬는 모술 대사원의 금요 예배문 (쿠트바)을 기존의 압바스 칼리파 알 카디르가 아닌 파티마 칼리파 알 하킴의 명의로 진행시켜 독립을 선포했다. 이는 곧 안바르, 마다인에서도 적용되었다. 다만 부와이 조에서 토벌을 준비하자 카이로에서의 선물이 도착하기도 전에 압바스 칼리파 명의로 환원되었고, 본토로 여겨진 이라크에서도 쉬아가 퍼질뻔한 일에 놀란 알 카디르는 파티마 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바그다드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1012년 부와이 조의 아미르로 등극한 술탄 앗 다울라는 이라크 남부 습지의 호족들[7] 등 반대파를 진압하기 위해 키르와쉬의 누이 지브라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었다. 1018년, 부와이령 사마라에서 셰이크 가립 빈 마칸과 그의 친척 라피 이븐 알 후세인 간의 내분이 발생하자 아사드 부족의 두바이스 1세[8]와 부와이 조는 가립, 키르와쉬는 라피를 지지했다. 1020년, 아사드-부와이 군대는 키르와쉬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았다.

패배한 라피는 가립에 귀순하고는 티크리트를 장악했고, 키르와쉬는 탈출했지만 재차 부와이 군에 패하였다. 다만 1021년 신임 부와이 아미르 무샤리프 앗 다울라와 협상하여 화해하였다. 그러나 1025년 무샤리프 앗 다울라가 사망한 후 부와이 조와 아사드 부족의 지원을 받은 카파자 부족이 1027년 북상, 쿠파 인근에서 우카일 군을 격파하고 안바르를 장악했다. 이후 누사이빈 총독인 동생 바드란, 카라드 빈 라디드의 아들이자 신디야 태수인 아부 만수르 카밀, 티크리트의 라피 등이 동맹하여 키르와쉬에 맞섰으나 협상을 통해 진정되었다. 한편 동맹이던 카파자 부족과 아사드 부족 간에 안바르를 두고 분쟁이 일었다. 결국 전자는 부와이 조, 후자는 우카일 조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어부지리로 키르와쉬는 안바르를 수복할 수 있었고, 대신 쿠파를 포기했다. 동시에 벌어진 부와이 조의 내전에서 키르와쉬는 아부 칼리자르를 도와 1029년 바그다드로 진격하기도 했으나 결국 승자인 잘랄 앗 다울라의 편에 섰다.[9]

1040년 키르와쉬는 티크리트 수복을 시도했으나, 라피의 후손들은 잘랄 앗 다울라를 매수해 신디야와 안자르를 공격하게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10] 1044년 4월, 오우즈 튀르크 부족들이 처음으로 이라크를 침공하자 키르와쉬는 두바이스 1세와 함께 베두인 연합군을 라스 알 아일에서 격파하여 아제르바이잔으로 몰아냈다. 1048년에는 동생 아부 카밀 바라카가 도전해오자, 키르와쉬는 바드란의 아들 쿠라이쉬와 연합해 맞섰으나 이듬해 6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부하들이 이탈하는 바람에 패하고 사로잡혔다. 바라카는 키르위쉬를 사로잡아 모술에 개선했고, 키르와쉬는 명목상 아미르로 남았으나 실권은 바라카에 있었다. 결국 1050년 키르와쉬는 감금되었고, 1052년 바라카가 사망하자 계승한 아들 쿠라이쉬는 키르와쉬를 암살했다.

모술의 상인 출신인 바누 자히르는 11-12세기 후기 압바스 왕조 및 셀주크 제국 하에서 재상이나 지방 총독 등 여러 요직에서 활약한 귀족 가문으로 유명했다.

3.1.3. 장기 왕조


케르부가, 제케르미슈, 자왈리 사카와, 마우두드, 아크순쿠르 알 부르수키로 이어지는 셀주크 제국 아타베그들은 대부분 십자군에 대한 무슬림측 사령관으로 활약했으나 칼리파와 싸우기 바빴던 술탄의 저조한 관심과 각자도생이 우선이었던 시리아 무슬림 제후들의 이합집산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27년 장기 왕조

1165년 모술을 방문한 유대 여행가 투델라의 벤자민은 7천의 유대인이 살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1182년, 살라흐 앗 딘은 모술을 포위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1183년 알레포를 정복한 그는 1185년 말, 재차 모술로 진군했으나 에미르 마수드 휘하 군민의 강력한 저항에 병 겹쳐 하란으로 철수했다. 이듬해 3월, 압바스 칼리파의 중재 하에 모술의 장기 왕조는 명목상 주군이 된 아이유브 왕조에게 필요시 군대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세기 이상 이어지던 장기 왕조는 1234년 용병대장 바드르 앗 딘 룰루가 찬탈하여 멸망했다.

3.1.4. 명품의 도시

10세기 들어 철과 철제 도구 및 용기들을 생산하던 모술은 13세기 들어 은으로 마감된 고급 동제 용기의 생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본래 12세기, 은 부족에 직면한 호라산의 장인들에게서 시작한 기법은 12세기 중반 헤라트에서 발전한 후 모술로 유입되었다. 특히 1220년대 호라산 난민들을 수용하며 모술의 금속업은 급성장하였다. 모술의 은도금 유기는 그 화려한 장식 덕에 중세 이슬람 시기 동제 용기 중 가장 미학적이다고 평가되며, 당대에도 고가 명품으로 취급되었다.

12세기에는 특권층의 전유물이다 13세기 들어 상대적으로 대량 생산이 시작된 후에도 여전히 귀했고, 카샨의 도자기처럼 독보적인 특산물로 명성이 높았다. 모술의 금속장이들은 이슬람권에서 유일하게 사제 관계와 계약 관계를 기록으로 남긴 공동체였다. 제자들은 소형의 용기를 제작하여 스승의 평가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모술의 은 도금 동제 용기들은 아미르 룰루가 다른 군주들과의 외교에 있어 의전 혹은 선물로 자주 활용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3.2. 파괴와 중흥

13세기 중반 룰루의 치세 하에 번영을 누리던 모술은 몽골의 침공과 함께 위기에 봉착했다. 1258년, 몽골 제국군이 다가오자 룰루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직접 마라게로 가서 훌라구 칸에게 복속하였다. 그후 몽골의 시리아 침공에 있어 향도 역할을 하던 룰루는 1259년 사망하였고, 룰루의 아들은 이듬해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패배하자 맘루크 왕조와 연대하여 몽골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1262년 훌라구는 모술을 포위, 9개월 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한 후 파괴하였다.

모술의 번영을 견인하던 금속업 역시 1250년대부터 장인들이 대거 다마스쿠스릏 거쳐 카이로로 이주하며 쇠퇴했다. 대신에 후세인 빈 무함마드를 필두로 3대째 이어진 모술 장인 가문[11] 맘루크 왕조 하의 시리아와 이집트를 새로운 금속업의 중심지로 부상시켰다. 14세기 초에는 라술 왕조 하의 예멘, 일 칸국 하의 파르스 및 서부 이란에도 모술의 은도금 유기 기법이 전수되었다.[12] 다만 모술의 금속업 역시 축소된 형태로 유지되었다. 14세기 일 칸국과 잘라이르 왕조 시기 모술은 점차 도시 규모를 회북했고, 바그다드와 달리 티무르의 파괴를 피하여 과거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3.3. 오스만 제국

모술은 15세기 백양 왕조를 거쳐 1508년 이스마일 1세가 점령하여 사파비 왕조령이 되었다. 1538년 쉴레이만 1세 오스만 제국군이 점령하였고, 바그다드 및 바스라와 함께 이라크의 3대 거점이 되었다. 오스만 시기 모술은 7개의 성문과 거대한 성탑을 지닌 요새도시이자 명성 높은 마리스탄 (병원), 실내 시장 (카이사리야)를 갖추고 직물을 특산물로 하는 무역 도시로 발전하였다.

1622년, 이라크를 재정복한 아바스 1세는 카셈 술탄 아프샤르를 총독으로 봉했다. 1638년, 바그다드를 수복한 무라트 4세는 기존에 리와 (군)의 치소이던 모술을 독자적인 윌라야 (도)의 치소로 전환시켰다. 17-19세기 동안 모술은 평화와 높은 자치를 누리며 기존 아랍 색채를 유지했다. 한편 18세기 들어 바그다드의 맘루크 정권과 알레포의 아젬 가문처럼 모술에서는 잘릴리 가문이 호족으로 득세했고, 유럽과 인도 및 이란을 잇는 교역 도시로써 번영하며  13세기 바드르 앗딘 룰루 시기의 영광을 회복했다.

상업의 발달로 알 우마리, 타신 알 무프티 가문 등은 유럽의 젠트리와 같은 중상층 형성하며, 기존 부족들의 기득권을 대체했다. 그들은 주로 토지 임대, 제조업 대한 세금 등의 개인 사업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던 19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은 중앙 집권화에 나섰고, 1834년 현지인들의 총독 선출권을 박탈하여 잘릴리 가문의 총독위 독점을 막았다. 이후 바이락타르 메흐메트 파샤를 시작으로 (세력화를 막기 위해) 4년 전후의 짧은 임기의 비모술 출신의 총독들이 부임했고, 세율이나 행정 조직 등이 다른 제국 도시들과 통일되었다.

비슷한 시기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무역에 있어 모술의 중요성은 크게 하락했다. 한편, 근대 시기까지도 다수의 기독교도 공동체가 있던 모술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1750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파견한 도미니코회 수사들과 1873년 당도한 수녀들은 근대식 학교, 진료소, 인쇄소, 고아원, 자수를 가르치는 공방 등을 세웠다. 도미니코회 수녀들의 회당은 2010년대까지 기능했다. 수녀들 중에는 120명의 아시리아-아랍인 수녀도 있었다.

3.4. 근현대

그러다가 1차 대전 이후 통일 아랍국가로서 이라크 영국의 보호 하에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튀르키예 공화국[13]과 국경을 정할때, 모술을 포함한 북부 이라크 지역[14]의 다수 민족이 튀르크멘 및 노가이 타타르 튀르크계 부족들과 쿠르드인임을 들어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 튀르키예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인받았으나, 영국 측에서는 이 지역에서 채굴되기 시작한 석유에 욕심을 들이고 있었고, 튀르키예측에서도 튀르크 민족국가를 형성하는데에 이 지역이 혼란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이유[15]로 미적지근하게 나서면서 결국 1923년 로잔 조약 당시 튀르키예 측에서 영유권을 포기했다.

로잔 조약당시 튀르키예 공화국 측이 영유권을 포기한 지역이 이 외에도 이집트 키프로스가 있는데, 이집트와 키프로스는 둘 다 당시에는 사실상 독립상태이고 명목상 종주국만 오스만 제국이었던 상황이었던 것에 반해 1918년 10월 무드로스 평화 조약 당시까지 오스만 제국 하에 있었기 때문에 예외적인 사례이다. 그 때문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부 들어서 모술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튀르키예인들이 늘고 있다. 당연히 이라크인들은 기겁하며 튀르크 놈들이 다시 쳐들어오면 수니, 시아, 쿠르드 이럴 거 없이 모두 손잡고 튀르크 놈들부터 격퇴하겠다는 만응을 보인다.

3.5. 현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omen_in_Mosul_Spring_Festival_-_1977.jpg
이랬던 시절 있었다. 사담 후세인도 아직 집권하기 전인 하산 알 바크르 대통령 시절 사진이다.

1920년대 키르쿠크 등에서 석유가 발견된 후, 모술에는 이라크 북부의 석유를 튀르키예 및 시리아로 보내는 송유관과 타르를 정제하는 키우아라 공장이 들어섰다. 1967년에는 모술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70년대 이라크 군부를 모술 출신들이 주도할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모술은 일부 폭격을 맞았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다만 1991년 쿠르드 봉기 후 비행 금지구역으로 설정되었고, 미국과 영국 공군의 감시 하에 놓였다. 사담 후세인 시기의 아랍화 정책에도 모술은 여전히 아랍, 아시리아, 쿠르드, 아르메니아, 튀르크멘, 야지디, 체르케스인 및 소수의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도시로 남았다.

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우다이 후세인 등 후세인 정권 잔당이 모술에서 치열히 저항했고, 대한민국 국군 자이툰 부대가 비전투병으로 파병간 지역이기도 하다. 전후 혼란이 이어지자 2008년 미군의 지원 하에 이라크 군이 민병대 거점을 포격하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종교와 민족을 망라한 지식인 계층이 도시를 떠났고, 같은해 1만이 넘는 아시리아인 기독교도들이 박해와 위협을 피해 시리아 및 튀르키예 등 외국이나 교회 혹은 수도원에 몸을 패했다.

3.5.1. 다에시의 강점


문타다 중령과 모술탈환의 다큐멘터리.

이라크 군이 내분으로 불과 6일만에 패퇴하며 2014년 6월 10일에 IS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그들이 지배하는 지역 가운데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IS는 제일 먼저 모술의 감옥에 갇혀있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범들을 전면 석방하고 지하디스트로 포섭했으며, 차량 퍼레이드를 벌인 직후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 형상의 동상들과 조각들을 파괴하고, 기독교 교회를 때려부수고 이슬람 센터로 개조하는가 하면, 샤리아를 전면 시행하여 공포 정치를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성들은 부르카를 강제로 착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여자들과 비무슬림 여인들은 대놓고 성노예로 만들어버렸으며, 공개 투석형과 도둑질에 대한 손목 절단형을 대놓고 시행하고, 모술의 동성애자를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죽이기도 했다.

모술의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지만,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IS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내야 했었다.[16] 문제는 전쟁통에 그런 돈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사실상 200만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IS에 인질로 잡혀있는 신세나 다름없는 것. 거기다 이라크 정부군은 모술을 탈환하기에는 너무나 무능하고, 쿠르드족은 자기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봐서 모술 탈환에 소극적이라[17] IS 점령 이후 1년이 넘은 상황인데 장기적으로 탈환 전망에도 답이 없다.

부수고 죽이고... IS 모술 정복 1년

2016년에 들어 이라크 정부군을 필두로 한 반 IS 세력의 공세에 IS가 밀리고, 이제는 IS 측에서 주요 거점이었던 모술의 함락까지 걱정하며 수비전을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군의 모술 탈환의 가능성이 계속 점쳐지고 있고, IS 지도부는 계속해서 떨어지는 지하드 전사들의 사기 저하와 공습으로 인한 자금 손실에 고민하고 있으며, 심지어 13살 여자 아이들까지 위안부으로 무장시켜 모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칼 같이 집행되었던 복장 규제나 잔혹한 샤리아 형벌도 최근엔 자금이 궁해져서 직접 형벌 대신 벌금 거두기로 대신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심지어 보석금을 많이 내면 샤리아를 위반해 감옥에 들어가도 쉽게 나올 수 있다고 한다.

2016년 5월 30일, 이라크 쿠르드족 세력인 페쉬메르가 측에서 5,500명의 군대를 동원해 소수 민족들이 주로 살고 있는 동부 모술의 9개 마을을 IS로부터 탈환했다. 이들은 IS 지하디스트 140명을 사살하고 차량폭탄 14개도 파괴했다.

현재 갈수록 패색이 짙어가는 모술에서 IS가 최후의 발악으로 잔혹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이번엔 성노예가 되기를 거부한 비무슬림 여성 19명을 불태워 죽이는 짓을 저질렀다.

6월 19일, 이라크군이 팔루자를 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이제 이라크 내 IS의 거점은 이곳 하나만 남았다.

7월, 전황은 IS에게 계속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7월 9일 이라크 정부군은 모술 부근 공군 기지를 탈환했으며, 7월 13일에는 모술 부근 마을 하나를 더 탈환했다. 앞선 7월 11일에는 미국이 모술 탈환 작전을 대비해 미군 560명을 추가 파병했다.

8월 4일 미 국방부가 모술의 IS 세력이 약화되고 있으며, IS는 전투 실패시 처형하는 극강수를 두고 있다고 한다. 적어도 2016년 하반기에 모술 탈환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10월 17일, IS로부터 모술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드디어 시작되었다고 한다. 모술 주민들은 음식을 사재기하고 있으며, IS는 긴급히 지하 땅굴을 파고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주민들을 처형하며, 부상한 대원들은 시리아 라카로 피신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라크 정부군 약 6만, 페시메르가 4만, 준군사조직 1만의 병력이라고 한다. 약 5천으로 추측되는 IS 전사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 보이지만, 도시 곳곳에 지뢰와 폭발물을 설치함으로 인하여 수주에서 수월에 달하는 전투가 될 것이라는 예상.

# 미 지상군이 투입이 확인되었다. 대규모 육군병력은 아니고 수백명 정도가 작전 지원을 위해 투입되었다. 정밀폭격 유도를 위한 Joint Terminal Attack Controller 병력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2016년 11월, 2년 4개월만에 이라크군이 입성하였으며, IS와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다. # IS는 이라크군이 탈환한 모술 지역을 포격하고 있다. #

2017년 1월 18일, 이라크군이 모술 동부( 티그리스강 동부)를 완전 탈환했다. # 그리고 2월말. 모술 동부를 이라크군이 탈환하며 타격을 입은 IS 수괴 알 바그다디 이라크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이라크내 잔존 병력들에게 자결하거나 도주해서 게릴라전을 하라고 지시했다. IS이 거둔 점령지 가운데 가장 큰 도시이자 본거지나 다를 거 없던 모술을 도로 빼앗겼다는 점은 크나큰 타격일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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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E MOSUL GREAT AGAIN!"

IS는 2017년 6월 21일 자기들이 칼리프 선언을 했던 모술의 명물 알-누리 모스크를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쯤 되면 이슬람을 위해 싸운다는 것도 그냥 핑계고 그저 폭탄 터뜨리고 사람 죽이는 것이 즐거웠을 뿐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이미 해방되었던 모술 서부 일부 지역 및 티그리스 강가 일대의 병원 지역을 IS이 갑자기 장악하는 일이 벌여져, 주민들이 대피하는 등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다행히 6월 30일 현재 지지부진하던 구시가지의 장악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일단, IS가 모술에서 축출이 되면 이라크의 모든 주요 근거지를 상실하고 시리아로 쫒겨나게 되며 하위자 등의 땅이나 시리아 국경 일부를 점유중인 잔당들을 제외하면 이라크 내전이 사실상 종료를 맞게 된다.

해방된 모술 화보 - 2017.5.29.

물론 시아파 민병대가 수니파를 문제의 원인으로 보고 보복행위를 하려 들 가능성도 있는 등 여전히 시아-수니간의 종파분쟁소지가 있을 수 있으나, 이라크 정부가 2016년 이후로 통제력을 되찾으면서 진정될 기미가 보이고 이라크 쿠르디스탄이 문제가 될 소지는 있으나 애초에 이라크의 쿠르드인은 후세인 축출 이후로 미국에 의해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받았고 정부에 협력 중이었으므로 전후 IS를 2년 동안 탱킹 한 공로로 자치권이 확대되는 사실상의 분리 독립선에서 정리될 가능성이 크다. [18]

드디어 이라크 정부군이 모술 탈환 작전 1년만에 모술을 IS로부터 사실상 탈환해내는데 성공했다.

이라크군의 이라크내 IS 최대거점 모술 완전 탈환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IS가 모술에서의 패배가 짙어지자 자폭테러와 도주로 이라크군에게 저항하고 있다.

작전 개시 9개월 만에 이라크군의 모술 완전 탈환이 마침내 임박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모술 완전 탈환으로 이라크와 IS와의 전쟁이 완전 끝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이라크 북, 중부의 탈아파르와 하위자, 이라크-시리아 국경 지역의 IS의 점령지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모술 탈환 후 이라크 내전의 전세는 탈 아파르와 하위자, 이라크-시리아 국경 지역의 IS 세력들에 대한 이라크군의 토벌 공세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7월 9일, 모술 탈환이 공식 선언되었다. 작전 개시 9개월 만에 값진 승리를 이루어낸 것이다. 하이델 알 아바디 이라크 총리가 직접 모술에 방문하여 승리를 선언했다. 다만 IS가 도망치거나 섬멸되면서 남긴 부비트랩이나 탈환 과정에서의 전투로 인해 도시가 폐허가 되어 인프라 재건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3.5.2. 현황 (탈환 이후)

모술 탈환 이후 현재 이라크 정부군의 통제 아래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고 있다. 잔존 부비트랩들이 속속들이 제거되고 모술 내 교회가 다시 예배를 시작하고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다시 마음껏 노래를 부르는 등 예전의 모습을 점차 되찾고 있다.

# 이라크 내전 당시 IS와 맞섰던 이라크 정부 소속의 니네베 경찰특공대 대원들의 분투를 다룬 2020년작 영화 ' 모술'이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하였는데 숨겨진 명작이라는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입소문을 타고 있다.

4. 튀르키예의 영유권 주장

파일:external/i0.wp.com/Misaki%20Milli.jpg [19][20]

원래 이 모술 지역은 물론 이라크 전역이 1차 세계대전 직후까지만 해도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 이 지역을 점령한 영국의 개입으로 현대 이라크를 구성하는 오스만 제국의 3개 주인 모술, 바으다트, 바스라를 합쳐서 이라크가 이루어졌다.

영국 튀르키예 독립전쟁당시 튀르키예 대국민회의(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를 이끌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사이에 체결된 로잔 조약에서 양측은 바으다트(= 바그다드)와 바스라의 독립은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이라크를 아랍국가로 독립시킴에 대해 합의했다.

하지만 현 이라크 북부의 모술 주에 대해서는 아랍 민족이 아닌 쿠르드인 튀르크계 투르크멘[21] 및 노가이 타타르인임을 들어 튀르키예에 속함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이 지역에서 지속되고 있던 튀르크멘과 쿠르드 그리고 아랍인 간의 갈등을 들어 튀르크 민족국가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리라 판단, 결국 튀르키예 측이 영유권을 포기하는 쪽으로 매듭지어졌다.

하지만 같은 시기 튀르키예가 영유권을 포기한 이집트, 키프로스는 애초에 다수 민족이 각각 이집트인 그리스인으로 튀르크 민족국가라 할 수 없었고, 이미 사실상 독립상태로 떨어져나가고 명목상 주인만 오스만 제국이었던 판이라 딱히 이의를 제기할 껀덕지도 없었지만 모술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튀르크멘을 들어 영유권을 주장할 거리가 있다.

아타튀르크 이후 튀르키예는 모술의 영유권에 대해 침묵했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부에 들어 다시 이 지역을 튀르키예 영토로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5. 관련 문서



[1] 어떻게 보면 모술을 서울에 비유한다면 니네베는 한성백제 유적과 비슷한 상황. 강을 두고 현재의 도시와 유적이 마주하는 점, 신도심에 유적이 있는 점, 유적의 역사가 수천년이나 된다는 점,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가 근현대에 발굴이 진행된 점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2] 모직물 중에 캐시미어가 카슈미르 지역에서 유래된 것과 유사하다 [3] 모술은 아시리아인들에게 특히 중요한 지역인데 자신들의 조상이 세운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ISIL이 모술을 침공하기 전에는 아시리아인이 모술 인구의 약 40%를 차지했었다. [4] 중동에 흔한 유대인들은 1950년대에 이라크 대부분 지역에서 추방되었다. [5] 구약성경에 나오는 니느웨가 바로 이 니네베이다. [6] 이후 그는 파티마 조의 개입으로 석방되어 이집트에 정착한다. 그의 손자 나시르 앗 다울라는 재상을 지내다가 반란을 일으키고 숙청된다 [7] 수십년째 바그다드 조정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한다 [8] 알리 빈 마즈야드의 손자이자 후계자 [9] 1036년, 전 부와이 조의 재상 이븐 마쿨라가 망명해오자 키르위쉬는 그를 수용했다가 3년 후 교살시켰다. 이듬해에는 잘랄 앗 다울라를 도와 튀르크 장군 바르스토간의 반란을 진압했다 [10] 이후 키르와쉬는 티크리트 상실을 인정함 [11] 아들들 알리, 아흐마드 및 후자의 아들 후세인 등 [12] 이는 리스파한 등지에 현존한다 [13] 정확하게 말하면 공화국 수립 이전의 일로 '튀르키예 대국민회의'(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라고 불리었다. [14] 구 오스만 제국 당시 모술 주이다. [15] 당시 튀르키예는 튀르크 민족국가를 추구하고 있었는데 모술에는 튀르크인 뿐 아니라 쿠르드인과 아랍인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910년대 디야르바크르와 하캬리 등지에서 학살당한 아시리아 기독교도들이 이라크 북부에 다수 살고 있었다 [16] 3일 통행증이 있긴 하지만, 가족과 재산을 볼모로 두고 3일 내로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을 처형하고 재산을 압수하는 무시무시한 제도였다 [17] 그런데 이걸 욕할 수만은 없는 게, 이라크처럼 부족주의/종파주의가 극심한 나라에서 쿠르드 군사조직이 수니파 최대 도시인 모술을 점령하려고 시도했다가는 전투 과정에서의 피해는 둘째치고, 점령에 성공한다고 해도 극심한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아파들은 이라크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가능성이 있지만, 순니 아랍보다 더 소수인 쿠르드가 모술을 차지했다가는 순니, 시아 양쪽의 반발과 경계심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도 있다. [18] 다만 이라크 쿠르디스탄은 신자르 일대를 텃밭으로 삼고 시리아의 로자바 정부와 밀접한 PUK와 현 자치주 통령의 소속 세력이자 터키와 밀접한 PDK로 이라크 쿠르드 자치주의 정치지형, 군 전투서열까지 양분되어있어서 상황에 따라 쿠르드 자치주간 내분이 벌어질 수도 있으며 덤으로 자국의 고토라며 호시탐탐 모술을 노리던 터키가 개입할 수 있다. [19] 위 지도는 에르도안이 실제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인용하는 1920년 오스만 제국 의회가 선언한 1차 대전 전후 터키의 영역이다. 참고로 저 지도에서 북서부 트라키아(그리스 동부, 불가리아 남동부), 키프로스, 모술 모두 현재낀지 튀르크계 소수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땅이다. # [20] 실제로는 1차대전 패전 이후 열강들에게 땅을 뜯길대로 뜯겨서 아나톨리아 북쪽에 쳐박힌 형국이었다. 현재의 튀르키예 영토는 그리스-튀르키예 전쟁 전후 당시 확정된 것이다. [21] 이라크 중북부에 위치한 케르쿠크와 모술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오우즈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유목민족을 투르크멘이라 한다. 나라 이름 투르크메니스탄의 기원도 이 투르크멘. 오우즈 계통 언어를 써서 현대 튀르키예어와 말이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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