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01:23:50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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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있는 아르메니아인 디아스포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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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avash baking in Armenia.jpg
  • 라바시를 굽는 아르메니아인 주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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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문화3. 유대인과의 관계
3.1. 유대인과의 갈등3.2. 아르메니아계 유대인
4. 아르메니아계 디아스포라 민족 집단
4.1. 이란, 인도의 아르메니아인4.2. 동유럽의 아르메니아인
4.2.1. 러시아의 아르메니아인4.2.2. 우크라이나의 아르메니아인4.2.3. 조지아의 아르메니아인
4.3. 아랍어권의 아르메니아인4.4. 프랑스의 아르메니아인4.5. 미국의 아르메니아인4.6. 캐나다의 아르메니아인4.7. 영국의 아르메니아인4.8. 독일의 아르메니아인4.9.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인
4.9.1. 아르메니아계 무슬림
4.10.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4.11. 라틴아메리카의 아르메니아인
5. 유명 아르메니아 출신, 아르메니아계 인물6. 아르메니아계 가상 인물7. 관련 문서8. 외부 링크

1. 개요

아르메니아인은 캅카스 3국 아르메니아에 거주하며, 국외에서도 아르메니아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 중에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혹은 아르메니아 가톨릭에서 정체성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아르메니아어가 아르메니아인들의 모어 역할을 한다. 아르메니아어는 러시아, 키프로스, 이라크,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 주요 소수 민족 언어로 대접받고 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혹은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뭉치는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특성상 해외에 나가있는 아르메니아인들 적지 않은 수가 잘 구사하는 편이다.

유대인과 비슷하게도 본국 아르메니아는 소국이지만 바깥 전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민족인데, 러시아 미국에 백만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이 있으며 프랑스, 조지아, 레바논, 이란, 독일, 시리아, 튀르키예, 키프로스 등에도 아르메니아계들이 살고 있다. 특히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가 행해지던 당시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후 디아스포라가 확산되었다. 전세계적으로 700~1100만명 또는 그이상이 있으며 그 중 아르메니아에 300만 명이 거주한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이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추방됐지만, 아르메니아인이 주된 민족으로 거주하는 영역은 확장되었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이 전 인구 중 3분의 1, 백인 인구의 상당수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일 정도로 아르메니아계가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국내에는 150명이 거주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의 성씨에는 '얀(-յան; 영어로는 -yan)'이라는 접사가 붙어 미국 등 해외에서도 아르메니아계를 쉽게 구별해낼 수 있다.[1] 당장 아래의 아르메니아계 인물 목록만 봐도 다수의 성씨가 얀(안) 혹은 얀 앞에 자음이 붙어 자음+-yan(-ian)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다. Ian은 서아르메니아, yan은 동아르메니아다. 실제 아르메니아인 유명인사의 성씨를 예로 들어보면 아르메니아의 대통령 아르멘 사르키샨(Արմեն Սարգսյան)의 성씨에서 (սյան)이라는 마지막 음절의 구성은 자음과 얀(յան)이라는 접사가 붙어 있는 형태로 되어 있고 아르메니아의 총리 니콜 파시냔(Նիկոլ Փաշինյան)의 성에도 이라는 음절에 자음과 접사 얀이 붙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사르키스라는 어간에 얀이라는 접사가 붙어 사르키샨이 되고, 파신이라는 성씨 어간에 얀이 붙어서 파시냔이 된다. 그리고 니콜 파시냔에서 니콜이라는 이름은 니콜라의 아르메니아식 명칭이다.

다만 아르메니아계라도 조상 대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경우라면[2] 이슬람식 성씨를 쓰기도 하며, 이들 중 구소련 국가에 거주하는 이들은 구소련 무슬림 민족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권 이름을 슬라브식으로 변형시켜 만든 성씨(압둘라예프/압둘라예바, 후세이노프/후세이노바, 이스마일로프/이스마일로바 등)를 쓰기도 한다. 후술할 헴신인들이 이러한 케이스다.

파일:armenian-women-800x433.jpg
  • 아르메니아 전통 의상을 입은 아르메니아인

기본적으로 백인에 속하나 유럽, 중동인들과 구분되고 뭔가 인도인과도 흡사한 독특한 이목구비[3]가 부각되어 과거에는 아르메니아계를 아르메노이드(Armenoid)라는 독자적인 집단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물론 아르메니아인들 중 이런 특이한 이목구비를 한 사람들 비율이 많다 뿐이지 아르메니아인들이 다 특이하게 생겼다고 단정지으면 곤란하다. 상단에 나와 있는 아르차흐 공화국 학생들 사진에서 보이듯 다른 동유럽인들과 외모가 흡사한 경우도 적지 않다.

동로마 제국 황제 11명을 배출한 민족이기도 하다. # 마케도니아 왕조, 이라클리오스 왕조 문서 참조

2. 문화

세계 최초로 서기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전통 때문에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가 절대 다수이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이전에는 고유 종교인 아르메니아 신화가 있었고 한동안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던 적도 있었는데,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향권을 놓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다만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이나 사파비 제국 같은 이슬람 국가 치하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중세 초 아르메니아인들의 상당수가 동로마 제국에 군인이나 상인으로 이주하였다. 이들 동로마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동로마의 마케도니아 왕조의 기원이 되며 많은 아르메니아계 혈통의 황제들을 배출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아르메니아계 동로마 황제들은[4] 자신들의 조상의 고향이 되는 아르메니아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고, 이 덕분에 아르메니아 문화는 중동보다는 동유럽에 가깝게 발전해나가게 되었다.[5]

페르시아의 황실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을 후궁으로 선호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들 아르메니아 출신 후궁들은 페르시아의 샤한샤들이 아르메니아인 동포들에게 혜택을 주도록 적잖은 입김을 넣었다. 이들 아르메니아인 후궁들은 페르시아 하렘에 들어가서도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같은 아르메니아인 동포들을 보호하는 데 더 적극적으로 노력했을 수도 있다. 아르메니아인 중 일부는 중동의 상업망을 장악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인도 무굴 제국과 동남아 일대에도 진출하였다 한다. 근면하고 부유한 상인이 많았던 중동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무슬림 통치자들에게 선물 공세를 통해서 자신들의 입지를 지켜나갔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이나 사파비 제국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존해나갔다. 쇠퇴기 이전 오스만 제국은 제국 내 여러 민족들에 대해 실용주의적 관점을 견지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했는데, 여기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가 그리스 정교회 등 다른 정교회랑 다른 독자적인 교회로 인정받을 권리, 아르메니아인 사이의 민사 분쟁 등을 아르메니아인 성직자들이 직접 재판하고 해결할 권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발흥한 사파비 제국의 경우 조지아인 기독교인들의 경우 이란으로 끌려오는 족족 이슬람으로 개종되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세금을 잘 납부하고 유럽인들과 사파비 위정자들과의 교역에서 능력을 발휘한다는 이유로 계속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믿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중동 지역의 인문학적 연구 자체가 험악한 국제 정세와 맞물려 굉장히 힘들어서 그렇지, 사실 이런 광범위한 문명권 단위의 규모에서 상업, 문화적 교차로 역할을 했던 디아스포라 공동체로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역사는 유럽의 유대인과 위그노, 동아시아의 화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세에는 신흥 포르투갈 세력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결국 오스만, 오만, 사파비조 페르시아 같은 인근 이웃 무슬림 제국들의 힘을 빌어 17세기에 포르투갈의 영향력을 현격하게 약화시켰고,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 오스만 제국, 시아파 사파비조가 서로 치열하고 잔인한 각축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중동, 인도, 동유럽이 여전히 경제적으로 서로 깊은 관계를 맺으며,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가 유지되었던 건 무굴 제국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까지 퍼져있었던 아르메니아 상업 공동체의 영향이 컸다.

3. 유대인과의 관계

3.1. 유대인과의 갈등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에서 상권을 놓고 서로 신경전과 각축을 벌이던 사이였다. 특히 페르시아에서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신경전이 엄청났는데,[6] 결국 아르메니아인들이 사파비 왕조 통치자들에게 선물 공세를 하며 우위를 점하자, 아르메니아인들의 등쌀에 못이긴 유대인 상당수가 아르메니아인들의 손길에서 멀리 떨어진 부하라로 이주해야 했다.[7]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산악 유대인이 아르메니아인들 탓에 밀려나온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입지와 부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밀리는 편이었다. 수도 이스탄불의 경우 주민의 4분의 1 정도가 아르메니아인이었을 정도였다. 오스만 제국에서 유대인들이 상권을 장악한 지역은 대개 발칸 반도 영토(이른바 루멜리아)[8], 번국 바르바리 토후국, 크림 칸국 정도가 있었으며, 나머지 지역에서는 그리스인들이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치여서 그렇게 비중이 크기 않았다. 발칸반도에서는 유대인 신민 중에서 외국어를 여러가지 구사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 큰 어드밴티지로 작용했던 반면 오스만어권이나 아랍어권에서는 다국어 사용자도 굳이 많이는 필요없던 것에다가 이미 해당 지역은 정교회 신도들이나 아르메니아인들이 상권을 장악해서 유대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었다. 대신 유대인은 주로 통역 혹은 의료계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벌어지던 당시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사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자체가 변경 민족을 둘러싼 오스만, 러시아 두 제국의 국경 패권 분쟁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유대인하고 관계도 적었고,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벌어지던 시기에는 오스만 제국 영토가 상당부분 상실되는 와중에 오스만 유대인 거주지들이 이미 다른 나라 영토가 된 영향이 더 컸다.

근현대 러시아 제국 내에서도 반유대주의가 심해지면서 유대인들의 입지가 약해지는 것과 비례해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사회 각지로 진출하기 시작한 역사가 있다. 반유대주의 정책을 펴던 러시아 제국에서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서 유대인의 정착 및 상업 활동을 크게 제한했는데, 이 틈을 비집고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이 두 도시에 대규모로 정착하기도 했다.[9]

사실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 사이의 알력은 생존권 투쟁 외에도 종교적인 이유도 있는데, 아르메니아인들이 노아의 방주 노아가 아라라트 산에 정착한 아르메니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인들은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반격을 가하면서 키배를 벌이며 사이가 더 나빠졌다고 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프랑스,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도 근면한 상인으로 활약하면서 유대인들과 경쟁하기도 했으나 보통 가톨릭 지역에 정착한 아르메니아인들은 현지 가톨릭 신자들과 결혼하면서 동화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이쪽은 그렇게 유명하지 않다.

현대에 와서 아르메니아와 영토분쟁을 벌이는 아제르바이잔과 유대인들의 이스라엘이 사이가 좋아지면서 아르메니아는 더더욱 불만이 커졌다. 이스라엘 무인기를 도입하고 이스라엘군과 합동훈련을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견제하는 이란과 사이가 좋은 아르메니아이기에 게다가 이스라엘 쪽에선 이슬람권에서 유일한 명목상이나마 '동맹', '우방' 국가인 터키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되기 때문에 의외로 아르메니아 문제에 있어 미국과 더불어 상당히 냉담하게 나온 편이다. 물론 민간, 학술, NGO 활동이나 정치인 개개인 차원에선 유대인으로서 다른 민족이 겪은 고통을 무시하는건 죄악이라고 말하는 양심적이고 온정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이스라엘과 시오니스트 단체들의 주류 의견은 아르메니아 학살과 홀로코스트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후자가 훨씬 더 심각하고 독보적인 사건이었다는 관점이다. 노먼 핑켈슈타인의 주장마따나 소위 말하는 '산업화된 선진 강대국의 소수 민족 절멸 시도'로선 홀로코스트와 비교 가능한 다른 역사적 사건은 없다는 주장인 홀로코스트 독보론(singularity of the Holocaust)은 이스라엘의 자국 정체성 형성과 대외 선전에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중동의 두 디아스포라 상업 민족 대표격인 양 민족의 라이벌 관계는 심지어 신대륙의 이주터인 미국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됐다. 크게 보면 아예 전국 정치 레벨에서 강력한 친이스라엘 로비를 굴리는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민족이다. 당연히 분야가 겹치는 물류, 상업 등에서 종사하면서 커뮤니티 내 응집력과 단결력이 출중한 소수 민족 로비 집단을 만들었다. 게다가 부정적인 인식 상으로도 두 민족이나 수전노니, 돈밖에 모르는 생물이니 하면서 욕도 비슷한 인종차별 래퍼토리를 먹는 편이다.[10] 게다가 뉴욕, 뉴저지만큼 유대인의 입지가 압도적이지 않은 캘리포니아 같은 다른 지방에선 아르메니아계 자본이 더 영향력이 강한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LA는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의 숫자만 수십만명 단위일만큼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며, 광역시권 내 도시 중 하나인 글렌데일은 아르메니아인들이 7만명이나 살아서 '리틀 아르메니아'라 불릴 정도다.

하지만,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패배하여 아르차흐 쪽 영토 70% 가까이를 잃어야 했다. 이스라엘이 튀르키예와 같이 아제르바이잔에 막대한 무기를 수출한 점도 커서 이스라엘에게 아르메니아는 단교를 들먹이며 무기 수출 중단을 요구했다. 물론 이스라엘은 무시했고 전쟁에서 이긴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이스라엘 깃발을 아제르바이잔인들이 거리에서 들고 휘날리는 모습도 나오기까지 했다. 역사적으로 참 돌고 도는게 산악 유대인 출신으로 아제르바이잔과 러시아에서 재벌로 성공한 유대인들이 아제르바이잔과 이스라엘 우호에 많은 돈을 쓰며 이번 전쟁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거기에 2023년 아르차흐 분쟁으로 아르차흐를 모조리 다 잃고 말았다.

3.2. 아르메니아계 유대인

종교를 제외한 민족 정체성이 아르메니아계에 있는 유대인. 상술한 것처럼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이 역사적으로 라이벌 관계였던 것 때문에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 양 공동체에서 모두 배척당하기도 한다. 또한 오늘날 아르메니아 본국이 경제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기 때문에 이웃국가인 조지아, 아제르바이잔과 다르게 전통적인 유대인 공동체가 쇠퇴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가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유대인 수천여 명을 포로로 데려왔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다.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계 유대인 대다수는 아르메니아 본국이 아닌 해외에 더 많으며, 그나마 아르메니아 본국에 남아있는 아르메니아계 유대인들은 수도인 예레반을 포함하여 그나마 덜 빈곤한 곳에 거주한다.

러시아의 체스 선수였던 가리 카스파로프가 대표적인 아르메니아계 유대인 유명인사다. 아버지는 아슈케나즈 유대인, 어머니는 아르메니아인이라고 한다.

4. 아르메니아계 디아스포라 민족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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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란, 인도의 아르메니아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란-아르메니아 관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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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아르메니아계 이란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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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800px-Qajar_Armenian_Women.jpg
고대 말 아르메니아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하였다. 사산조 페르시아 서부의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은 페르시아 동부의 소그드인 상인들의 주요 교역 파트너로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중세 소그드인들이 장악했던 중앙아시아-북인도 무역로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무굴 제국 초창기부터 수도 아그라에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정착해있었다 하며, 1579년 무굴 제국의 주요 해상 무역항 수라트에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신도 묘비[11]가 발견된 것을 보아 근세에 이미 인도 해상 무역에도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산조 페르시아에서는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상당한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사산 왕조가 멸망한 이후 아랍인들이 들어오면서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큰 타격을 받고, 튀르크인들의 아르메니아 본토 침공의 여파로 페르시아 내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현지인들과 동화되면서 중세 시대에는 힘을 잃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 상인 공동체는 사파비 제국의 이란을 장악하면서 다시 페르시아 일대의 상업망을 장악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605년 오스만 제국이 당시 사파비 제국 영토[12]였던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자 사파비 제국은 초토화 전략으로 대응하면서 아라크스 강 북쪽 지역에 사는 아르메니아 농민들을 전부 카스피해 남쪽 길란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상당수가 사망하였지만 살아남은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고 이들은 비단 직조에 종사했다. 사파비 제국은 새 수도 이스파한을 정비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시켜서 새로운 수도 교외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며 황실에 사치품을 조달하는 일을 맡겼다.

근세 사파비 제국은 시아파 종주국으로서 순니파 종주국 역할을 하던 오스만 제국과 냉랭한 사이를 유지했다. 오스만 제국은 자국 내 시아파를 사파비 제국으로 추방하고 사파비 제국 역시 자국 내 순니파들을 죽이거나 추방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믿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순니파 오스만 제국과 시아파 사파비 제국 사이에서 일종의 중립 역할을 하면서 양국 사이의 교역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622년에는 페르시아 만에 반다르압바스 항구가 세워지고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은 유럽인 기독교인 상인들과 무역을 하면서 부를 증대시켰다. 그러나 반다르압바스 항구를 통해 들어온 가톨릭 선교사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아르메니아 가톨릭,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시작하고 아르메니아인 기독교 사회의 분열과 친유럽 성향을 본 페르시아인 지배층들 사이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의심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사파비 제국 시대 번영하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이를 계기로 18세기 이후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사파비 제국 붕괴 이후 이란에 들어선 왕조들은 과거처럼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보호 및 신앙의 자유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으며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페르시아를 떠나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인도로 가서 동인도 회사 직원이 되어 더 큰 부를 쌓았지만[13] 대개는 차선책으로 오스만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 영토로 이주하는 방법을 택한다. 오스만 제국 말기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전에는 이미 이란에 소수의 아르메니아인들만이 남은 상황이었고, 러시아와 다르게 이란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에게 별 다른 도움을 제공하지 못했다.

18세기 이란과 러시아를 잇는 교역로가 번성하기 시작했고 상당수의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볼가 강 아스트라한 카잔을 거쳐 모스크바에 정착하며 후술할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 사회의 중추를 이루게 된다.

4.2. 동유럽의 아르메니아인

전통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대인 외에도 슬라브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키예프 루스 동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정교회로 개종하고 흑해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게 되면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 용병이나 상인들이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신에 해당하는 키예프 루스로도 이주하였다. 셀주크 제국의 공격으로 아르메니아 본토가 공격받자,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나톨리아 남부 킬리키아 외에도 크림 반도와 루테니아로 이주하였다. 약 2만여 명 정도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동유럽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키예프 공국의 중흥기를 이끈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대공의 주치의가 아르메니아인이었다고 한다. 13세기 갈리치아-볼히니아[14]의 대공 다닐로는 공국 내 무역과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 아르메니아인들을 초빙하였고, 이들은 동유럽, 중유럽의 아르메니아인 교역 네트워크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

4.2.1. 러시아의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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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우크라이나의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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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조지아의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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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아랍어권의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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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프랑스의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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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미국의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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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캐나다의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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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영국의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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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독일의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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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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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 아르메니아계 무슬림

아르메니아인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혹은 아르메니아 가톨릭을 민족 정체성으로 삼기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 몇 세대 지나지 않아 아르메니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편이다.
파일:Hemshin.jpg
헴신인 여성
그러나 예외도 있는데, 터키 동북부 리제도(Rize ili) 헴신군(Hemşin İlçesi)에 주로 거주하는 아르메니아계 터키인인 헴신인(Hemşinliler, Համշենցիներ / Hamshentsiner)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아르메니아어의 서부 방언인 홈셰치 방언(혹은 헴신어)를 사용하며 아르메니아인 정체성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터키에 거주하는 헴신인 인구는 15만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해외에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로 개종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원레 헴신구는 조지아인의 일파인 라즈인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나 중세 셀주크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면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 지역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은 헴신 일대를 1480년대 평정하였고, 수피들이 해당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을 대상으로 이슬람을 선교하였다.

아나톨리아 서부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 오스만 제국 법에 의해 프렝기(Frengi, 프랑스, 이탈리아인 등의 가톨릭 유럽인들을 싸잡아 부르는 표현)들과 교역하는 상인은 무조건 비무슬림이어야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 기독교인이 무역을 도맡아서 했던 이유로 기독교 신앙을 고수할 이유가 충분했지만, 자급자족 농업이 중심이었던 아나톨리아 동북부는 상황이 달랐다. 동부 지역에서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고수하는 아르메니아인들도 많았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인구도 적지 않았고, 헴신인들은 이렇게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르메니아인 중에서 아르메니아어를 보존한 경우다. 조지아계 수니파 무슬림인 라즈인과 비슷한 경우다.

러시아 제국에서 오스만 제국의 캅카스 영토를 병탄하는 과정에서 무슬림 헴신인들이 러시아 제국 영토 아르메니아 주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20세기 소련에서는 이들을 터키계 불온분자로 간주하여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으로 유배보냈다 한다. 이렇게 강제이주당한 헴신인 후손들은 고르바초프 시절 아르메니아 본토로 다시 이주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소련 정부에서는 이들이 아르메니아로 돌아가면 사도교회 신도들과 충돌할 것을 우려하여 대신 크라스노다르 일대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터키에서는 터키 민족주의자들이 이들이 아르메니아계 조상을 두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사실은 튀르크계 후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호응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4.10.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

과거 카프카스 전역에 걸쳐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은 서로 섞여서 살았기 때문에 현재의 아르메니아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이 살았고, 현재의 아제르바이잔에도 아르메니아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지만 20세기 초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서로 분리되어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인을,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인 대부분을 서로 추방시켰으며 아제르바이잔에는 수백명 단위의 아르메니아인들만이 살고 있다. 대부분 바쿠와 인근의 숨가이으트(Sumqayıt)를 주변으로 거주하고 있다.

2020년 전쟁 당시 이들은 입다물고 어디도 편들지 않았다. 덕분에 이들은 전쟁 와중에 어떤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사실, 특이한 것도 아닌데 시리아라든지 여러 이슬람 나라에 유대인이 소수 대대로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시리아 전쟁 당시 중립을 지키고 살았던 경우가 있다. 엘리 코헨 항목에도 나오듯이 스파이인 코헨을 처형할때, 시리아에서 대대로 살던 유대인 랍비가 죽기전에 종교적 예배를 하던 것도 이래서 가능했다. 시리아가 이스라엘에게 여러 번 전쟁에 참패했음에도 이들 극소수 유대인들을 보복 폭행이나 살인을 당하지 않았다. 뭐, 이들 다수가 시골에나 살고, 전쟁 와중에 스파이짓하는 거 아닌 우려로 감시받긴 했듯이 이들도 그런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4.10.1. 우디인



고대 아제르바이잔 일대는 알바니아라고 불렸다.[15] 중세 알바니아인 후손 중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고 기독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와 같은 갈래의 사도교회 일파 알바니아 사도교회)를 고수한 민족을 우디인이라고 부른다. 믿는 종파와 교리는 아르메니아인들과 같지만 사용하는 언어나 거주 지역이 다른 이유로 다른 민족으로 분류된다. 이들의 전통 복식은 아르차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우디인들은 자신들이 아르메니아인들과 다른 독자적인 민족이라고 생각하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성직자들이 알바니아 사도교회를 관할하는 것을 거부하는 편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우디어는 아르메니아어보다는 레즈긴어에 더 가깝다. 오늘날에는 아제르바이잔에 약 4,000여 명, 러시아에도 약 4,000여 명 정도의 우디인 인구가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러시아의 우디인 인구는 아제르바이잔 접경 지역보다는 로스토프에 더 많다고 한다. 이 외에도 우크라이나에 약 500여 명,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도 각각 2백여 명 정도의 우디인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현재 우디인들은 약 1만여 명 안팎의 소수 민족에 불과하지만, 중세 초 아르메니아 사료에서 자주 언급되던 민족이었다. 중세 우디인들은 캅카스 알바니아를 구성하는 주요 부족 중의 하나였으며 아르메니아를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서기 5세기 무렵에는 아르메니아인 수도사 메스로프 마슈토츠가 알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 문자를 바탕으로 캅카스 알바니아 문자를 고안하였고 성경의 일부가 우디어로 번역되었다.

우디인들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근세를 거치며 많은 우디인들이 아제르바이잔인들과 통혼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아제르바이잔인으로 동화하면서 규모가 계속 감소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일대를 장악한 사파비 왕조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성직자들이 알바니아 사도교회를 관할하도록 맡겼던 적도 있었다. 이는 당시 이미 잔존한 우디인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거나 혹은 아제르바이잔인이 중심이 된 사파비 왕조 측에서 이들을 달갑지 않게 보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인/조지아인들과 다르게 주로 벼농사를 지으며 쌀밥( 필라프)을 주식으로 한다.

아직 우디인 촌락들은 아제르바이잔 산기슭 시골들을 중심으로 일부 남아있다. 계속된 인구 감소로 오늘날 우디어는 소멸위기언어가 되었다. 우디인들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러시아어나 아제르바이잔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고,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우디인들은 독자적인 알바니아 사도교회를 유지하는 것을 사실상 포기한 상황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바니아 사도교회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소수종파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4.11. 라틴아메리카의 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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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명 아르메니아 출신, 아르메니아계 인물

6. 아르메니아계 가상 인물

※ 해당국 작품은 제외.
배우 및 성우가 아르메니아인인 경우 ☆표시.

7. 관련 문서

8. 외부 링크



[1] 그래서 아제르바이잔에 여행간 모 외국인 관광객이 아르메니아 혈통은 섞이지도 않았음에도 아르메니아계로 오해받고 입국을 불허당한 적도 있었다. 알다시피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와 불구대천지 원수지간이라 아르메니아 국적자는 100% 확률로 입국 자체를 금지시키고, 아르메니아계 외국인도 높은 확률로 입국을 금지시키고 입국을 허용한다해도 다른 외국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까다롭게 군다. [2] 상술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당시 무슬림 아르메니아인들도 대거 학살당했다. [3] 예로 들자면 아르메니아인 여성 패션 모델 아르미네 하루튜냔 같은 경우도 있다. 한국 사람들의 미적 기준과는 별로 부합하지 않는 외모이기도 하다. [4] 바실리오스 2세 항목 참조. 그 외에도 헤라클리우스( 이라클리오스) 왕조가 아르메니아계이며, 동로마 중후기의 귀족이름 중 바르다스(Bardas/Vardas), 바르다네스(Bardanes/Vardanes)는 그리스-로마식 전통 이름이나 기독교식 이름이 아니라 아르메니아 유래의 이름이다. [5] 물론 훗날 오스만 제국이나 이란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동유럽 본토에 비하면 어느 정도 서아시아의 영향이 있는 편이며 마찬가지로 동유럽 또한 불가리아나 보스니아, 세르비아 같은 발칸반도 지역 국가들의 경우 오스만 제국의 지배의 영향으로 전통의상 등에서만 봐도 튀르키예 문화의 영향이 어느정도 존재한다. [6] 자세한 내용은 페르시아계 유대인 항목 참조 [7] 애초에 페르시아 지역이 아르메니아 본토랑 너무 가까웠다. [8] 인구 과반수가 유대인이던 테살로니키 외에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지역에서 현지인들과의 의사소통 문제로 오스만어와 현지어가 가능한 유대인들이 세금 징수 등 업무를 보조하였다. [9] 또한 유대인 입장에서는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 보장된 권리마저 폐지하고 포그롬을 조장하는 압제자였지만, 아르메니아인들 입장에서 러시아 제국은 자신들을 카자르 왕조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준 존재이기도 했다. [10] 힘없는 민족이나 집단이 돈에 집착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다. 특히나 로비가 합법인 미국에서는 이렇게 로비로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는 소수민족들이 몇몇 있다. [11] 즉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커뮤니티가 세워졌다는 뜻이다. [12] 사파비 제국의 근거지는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일대였다. [13] 대표적인 인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인도로 이주하여 1788년 마드라스에 인도 최초의 합자 은행인 카르나틱 은행을 설립한 에드워드 라파엘을 들 수 있다. 에드워드의 아들 알렉산더 라파엘은 영어를 배운 후 영국으로 이주하여 세인트올번의 하원 의원이 되었다. [14]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이 파괴된 이후 우크라이나 서부에 건설된 왕국으로 러시아와 독립된 우크라이나 역사의 기원에 해당하는 국체로 간주된다. [15] 보통 남유럽의 알바니아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캅카스 알바니아라고 부르는 편이다. [16] 다만 중간에 니키포로스 2세, 로마노스 3세, 콘스탄티노스 9세 황족이 아닌데 황족과의 혼인을 통해 제위를 차지한 일부 황제들은 아르메니아계가 아니다. [17] 이란의 하페즈와 똑같은 위상의 국민 시인이다. [18] 대표적으로 미국 기업들로부터 라이센스를 받아서 생산을 시작한 러시아 북한의 국민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에스키모 파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