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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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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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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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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캅카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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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colcolor=#fff> 대이란국
ملک وسیع‌الفضای ایران
파일:사파비 제국 국기.svg 파일:페르시아 국장(1423~1907).svg
국기 국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favid_Empire_1501_1722_AD.png
찰디란 전투 직전의 강역
1501년 ~ 1736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티무르 제국 아프샤르 왕조
백양 왕조
수도 타브리즈 (1501~1555)
카즈빈 (1555~1598)
이스파한 (1598~1722, 1729~1736)[1]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인구 8,000,000명 (1650년)
국가 원수 샤한샤[2]
언어 페르시아어
아제르바이잔어
아르메니아어
종족 페르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쿠르드인,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르메니아인, 발루치인
종교 이슬람교 시아파 12이맘파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1301년 사파비야 창설,
1501년 건국
1722년 호타키 왕조 침공
1736년 나디르 샤 침공
1736년 멸망
통화 투만, 아바시[3]
면적 2,900,000km² (1630년)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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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틀:국기|]][[틀:국기|]]
[[아제르바이잔|]][[틀:국기|]][[틀:국기|]]
[[아르메니아|]][[틀:국기|]][[틀:국기|]]
[[조지아|]][[틀:국기|]][[틀:국기|]]
[[튀르키예|]][[틀:국기|]][[틀:국기|]]
[[이라크|]][[틀:국기|]][[틀:국기|]]
[[시리아|]][[틀:국기|]][[틀:국기|]]
[[아프가니스탄|]][[틀:국기|]][[틀:국기|]]
[[파키스탄|]][[틀:국기|]][[틀:국기|]]
[[우즈베키스탄|]][[틀:국기|]][[틀:국기|]]
[[타지키스탄|]][[틀:국기|]][[틀:국기|]]
[[쿠웨이트|]][[틀:국기|]][[틀:국기|]]
[[바레인|]][[틀:국기|]][[틀:국기|]]
1. 개요2. 역대 황제3. 상징4. 역사5. 정치6. 종교7. 군사8. 사회9. 경제10. 민족11. 의의
11.1. 시아파 왕조11.2. 결과: 시아파를 통한 민족적 대립11.3. 오스만 제국과의 경쟁구도
12. 기타

[clearfix]

1. 개요

근세 이란을 지배한 시아파 왕조. 현대 이란의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틀을 확립하며 이란 역사에 큰 영향을 남겼다. 쿠르드[4] 아제르바이잔인들에 의해 건국되었으나 페르시아의 정체성[5]을 강조했으며,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651년 아랍인들에게 멸망당한 이후 850년 만에 다시 부활한 이란인 주도의 통일 페르시아 제국이라 할 수 있다.

사파비 제국은 1501년 시아파 종교단체 사파비야의 지도자이던 이스마일 1세가 건국했다. 이스마일 1세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수백 년 동안 조각조각 나뉘어있던 페르시아 지방을 통일하고 거대한 제국을 이룩한다. 이스마일 1세는 옛 페르시아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원대한 야망이 있었지만 1514년 찰디란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대패하며 그 꿈을 접어야만 했다.[6] 이후 타흐마스프 1세가 찰디란 전투의 패배로 인한 혼란을 수습했고, 사파비 제국은 아바스 1세의 재위기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때 사파비 제국은 현대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바레인,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튀르키예 등에 걸쳐있는 대제국이었고, 강대한 국력을 바탕으로 찬란한 페르시아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몇 백년 만에 페르시아 지방을 재통일한 덕에 경제는 크게 발전했으며, 실크 로드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진행하여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고 동시에 최대의 경쟁국인 오스만 제국과 끝없이 대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파비 제국은 아바스 1세 사후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를 이은 황제들은 대부분이 무능하고 정무에 관심이 없는 인물들이었으며[7] 외적으로는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이 끊임없이 치고들어왔다. 결정적으로 사파비 제국의 혹독한 종교 정책에 반감을 품은 아프가니스탄 호타키 왕조가 반란을 일으켜 1722년 수도 이스파한을 함락당하며 치명타를 맞는다. 당시 샤였던 술탄 후사인은 호타키 왕조에게 항복했지만 그가 다시 정통성을 내세워 변심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호타키 왕조의 아흐마드 파샤에게 살해당했다. 그나마 타흐마스프 왕자가 도망쳐 타흐마스프 2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한 후, 전쟁 영웅 나디르 샤의 도움을 받아 이스파한과 제국 강역 대부분을 되찾는 데 성공하며 다시 제국이 부활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디르 샤를 질투한 타흐마스프 2세는 독단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일으켜 기껏 나디르 샤가 되찾은 영토들을 모조리 빼앗겼고, 이에 격분한 나디르 샤는 타흐마스프 2세를 폐위하고 어린 아바스 3세를 꼭두각시로 옹립했다. 결국 1736년 나디르 샤가 아바스 3세를 쫒아내고 직접 샤의 자리에 올라 아프샤르 왕조를 개창하며 사파비 제국의 역사도 끝난다.

최대 경쟁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에 비하면 국력이 약했다. 사파비 제국은 서쪽으로는 오스만 제국, 동쪽으로는 우즈벡 계열 투르크[8]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으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오스만에 열세에 놓여 있었고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도 고전하고 있었다. 지도상에 사파비의 영토로 표시된 아나톨리아 동부는 2년 정도 일시적으로 점유한 것에 불과하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사파비의 영토였던 시기보다 오스만이 점유했던 시기가 더 길었기 때문에 사파비보다는 오스만의 영토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뿐만 아니라 사파비의 첫 수도였던 타브리즈를 비롯한 북부 아제리 지역도 주기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했고, 서쪽 이란 고원을 오스만이 상당기간 점유하는 치욕을 맛보기도 했다. 우즈벡과 계속 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쪽 역시 마찬가지로 많은 부침을 겪었는데 아프가니스탄의 상당부분을 우즈벡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 시절을 제외한 평균적 영토는 역대 이란 왕조 중에서 넓은 편은 못된다.

다만 오스만 제국에게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밀리긴 했어도 오스만 제국 역시 결정적으로 사파비 왕조를 멸망시키거나 하지는 못한 채 긴 시간 동안 힘겨루기를 이어나가야 했고 이는 사파비 왕조가 멸망하고 세워진 아프샤르 왕조, 잔드 왕조, 카자르 왕조와의 대립으로 계속 이어진다.

2.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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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 3세 호세인 2세
일 칸국 칸 · 사파비 왕조 · 아프샤르 왕조 · 잔드 왕조
카자르 왕조 · 팔라비 왕조 · 이란 라흐바르 · 이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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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징

사파비 제국 국기
파일:사파비 제국 국기(1502-1524).svg 파일:사파비 제국 국기(1524-1576).svg 파일:사파비 제국 국기.svg
1501 ~ 1524 1524 ~ 1576 1576 ~ 1736
사파비 제국에는 역사적으로 총 3개의 국기가 있었다. 가장 왼쪽 국기는 이스마일 1세가 직접 디자인한 깃발로, 이슬람에서 천국을 상징하는 초록색에 황금빛 달을 그려넣었다. 그를 이은 타흐마스프 1세가 달을 태양으로 바꾸고 양을 깃발에 추가했고, 이 두 번째 국기는 1524년부터 1576년까지 쓰였다. 세 번째 국기는 이스마일 2세가 지정한 사파비 제국의 공식 깃발로 사파비 제국이 1736년 망할 때까지 이 깃발을 썼다. 가장 오랫동안 쓴 깃발이기 때문에 보통 사파비 제국의 깃발이라 검색하면 이 깃발이 나온다. 두 번째 국기와 차이점이라면 양 대신 황금빛 사자를 그려넣었다는 것.

사파비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아바스 1세 이래로 사자와 태양은 페르시아를 상징하는 문장으로 완전히 자리잡았고, 후대의 카자르 왕조 팔라비 왕조 등도 모두 이 사자와 태양 무늬를 제 국기나 상징에 썼다. 태양은 고대 페르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성군 잠시드를 상징하고 사자는 시아파의 초대 이맘이자 시조나 다름없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뜻한다.[9] 특히 사파비 제국이 갑자기 사자와 태양 문장을 가져온 이유가 있는데, 바로 옆 나라인 오스만 제국 초승달을 제 상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이 초승달과 별을 제 상징으로 삼자 이에 뒤처질 수 없었던 사파비 제국이 사자와 태양을 새로 고안해 제 문양으로 삼은 것이다.

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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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치

사파비 제국은 이전까지 부족 사회로 조각조각 분열되어있던 페르시아를 통일하고 한층 더 세련된 중앙집권적 정치형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사파비 황실은 스스로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가문임을 강조했고 이는 무함마드의 혈통을 중시했던 시아파 세력들 간에 엄청난 정통성을 부여했다. 덕분에 사파비 황제들은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수준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파비 제국 권력의 정점에는 당연히 최고 종교지도자이자 정치지도자인 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이테마드 에 다울라트', 즉 대재상이 있었다. 의회는 없었다. 대재상은 황제가 법학자들 가운데 골라 한 명을 임명했고, 워낙 대재상의 권한이 강력해 샤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대재상의 인장이 찍혀있지 않으면 효력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대재상이 황제보다 권력이 셌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황제는 원할때마다 재상을 갈아치울 수 있었고 감시역을 두어 재상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보고받았다. 대재상 아래에는 재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모스토피 예 마말레크'가 3인자의 위치를 꿰차고 있었고 그 아래에 사법부 장관 '디반베기'가 있었다. 특히 이 사법부 장관 디반베기는 황궁 바로 옆에 사무실을 두고 매일 황제에게 업무를 보고할 만큼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 아래에 군 총사령관 '샤세반' 등이 있었다.

파일:Ali-qapu-rooz.jpg
사파비 제국의 황궁이었던 '알리 카푸(Ali Qapu)' 궁전.

궁정에서 가장 권한이 높았던 사람은 '나지르'라고 불리는 궁내부 장관으로 황제의 최측근이 맡았다. 주요 업무는 당연히 궁정의 신하들을 감시하고 이를 황제에게 보고하는 일. 황제의 눈과 귀나 다름없던 나지르는 궁정 내의 모든 사람들의 인사를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황제의 금고마저도 책임졌다. 실로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었던 셈이다. 나지르가 워낙 권한이 강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제국의 2인자 대재상마저도 궁정 내에서는 나지르의 협조를 받아야만 했다. 궁정 내에서 2번째로 권한이 강한 인물은 '이칙 아가시 바시'라고 불렸던 총비서관이었다. 항상 거대한 막대기를 들고 다녔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고 늘 황제 옆에 붙어다니며 사람들의 이름을 알려주거나 미리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다음으로 황실 보물 관리인 '미라코르 바시'와 사냥 관리인 '미르셰카르 바시' 등이 있었다. 특히 사냥을 사랑했던 페르시아인들답게 사냥 관리인의 지위가 높았는데 아바스 1세 시절에는 무려 전국에 3만 마리가 넘는 말들을 관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연회나 궁궐을 관리하는 관직이 따로 있는 등 궁정 내에 사람들은 넘쳐났다.

의사 천문학자들의 지위 역시 높았다. 특히 페르시아에서는 천문이 곧 알라의 뜻이라 여겨 이에 맞춰 대관식을 치르거나 예식을 올리는 등 천문학이 굉장히 중요한 학문이었기에 천문학자들이 황제 바로 곁에서 조언을 올리기도 하는 등 황실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가장 명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천문학자에게는 '무나짐 바시'라는 칭호를 하사해 아예 황궁에서 머무르게 했다. 그 외에도 기존 권력층 키질바시들의 후예들이 궁정 내에 한자리씩 꿰차고 앉아있었고,[10] 문학과 행정 업무에 능통한 페르시아인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환관이나 궁정 노예의 경우 캅카스 지방에서 들여온 백인들이 많았다.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체르케스인 등이 주를 이루었고 인도 북부나 이집트 지방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들도 꽤 많이 존재했다. 환관이라 할지라도 황제 바로 곁에 머무를 수 있다는 특권이 있었기에 권력은 상당했다. 궁정에서는 초창기에는 아제르바이잔어를 가장 많이 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페르시아의 색이 짙어지며 페르시아어가 주류를 이루었다.[11]

지방 정부의 경우, 사파비 제국은 모든 영토를 크게 황실 직할령과 제국령으로 나누었다. 황실 직할령은 황실에게 직접 파견한 관리들이 통치하는 땅이었고 제국령은 해당 지방의 최고 유력 가문들이 맡았다. 제국령을 맡아 다스리는 총독을 '칸'이라고 불렀다. 초창기에는 기존 유력 세력인 키질바시들이 칸을 맡았다. 문제는 당연히 제국보다 제 가문이 먼저인 키질바시들이 황제에게 충심을 다할 리가 없었고 지역에서 황제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칸들은 제 관할구에서 거둔 세금을 단 한 푼도 중앙정부에 올려 보내지도 않았다. 그나마 '바킬'이라 부르는 대사를 황제에게 보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업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보고하는 정도가 다였을 정도. 상황이 이러자 나중에가면 사파비 제국은 봉건제 국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구했던 샤들은 문제를 인식하고는 끊임없이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아바스 1세를 포함해 사피 등도 칸들에게 땅을 사들여 황실 직할령으로 편입하고자 했는데, 칸들이 속셈을 모를 리가 없어 땅을 팔려하지도 않았다. 더 큰 문제는 힘들게 사들인 이 땅을 살 돈을 모조리 직할령 내의 신민들에게 거두어들이면서 황실 직할령의 경제가 오히려 피폐해지는 역효과만 났다. 게다가 직할령에 기껏 임명해놓은 관리들은 기존 지방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해 농사나 행정을 망치는 등 무능한 짓거리만 해댔다. 뿐만 아니라 임명직 관리들은 책임감이 없어 관할 지방이 어떻게 되든지 봉급만 타먹으면 그만이어서 관할구에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면 제 수입도 줄어드는 지역 토후와 지방 유력자들과는 마음가짐 자체부터 달랐으니 제대로 된 효율이 나올 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황실 직할령의 사람들은 제국령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았고 직할령을 통한 황권 강화는 실패한다.

6. 종교

사파비 제국 이란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야. 사파비 제국이 들어서기 이전까지만 해도 페르시아 지방에는 수니파가 강세였지만 사파비 제국 이후 페르시아는 시아파 국가로 변모했다. 현대 이란 아제르바이잔 시아파 국가가 되고 이라크 인구 상당수가 시아파인 이유 역시 바로 이 사파비 제국 때문이다. 또한 시아파 내부에서도 수많은 종파들 가운데 12이맘파 자이드파, 이스마일파 등 다른 종파들을 제치고 주류를 이루게 된 것도 사파비 제국의 국교가 12이맘파였던 덕이 크다.[12]

사실 사파비 제국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페르시아 지방은 오히려 확고한 수니파 국가였다. 심지어 오스만 제국이 자국 내에 적당한 수니파 율법학자들이 부족하자 저 먼 페르시아까지 학자들을 보내 수니파 교리들을 배워오게 할 정도였다. 대표적인 수니파 국가였던 아바스 왕조 시대까지만 해도 페르시아인들이 고위직들을 한 자리씩 꿰차고 앉아있었고 페르시아는 수니파 교리의 중심지라 할만한 지방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풍조는 엄격한 시아파 교리를 추구하던 사파비야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뒤집힌다. 사파비 제국의 초대 황제 이스마일 1세 파티마 왕조 이래 가장 불관용적인 군주라고 불릴 정도로 수니파에 억압적이었다. 그는 정통 칼리파 시대에서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제외한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을 대놓고 저주했고 오직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만이 유일하고 정통성 있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파비 제국은 수니파에 대한 탄압이 지나칠정도로 심했고 매우 악랄했다. 페르시아를 통일하며 사파비를 건국한 이스마일 1세부터 수니파를 악랄하게 탄압했는데 그는 기존 수니파 울라마[13]들에게 오직 3개의 선택지를 제시했다. 죽거나 추방당하거나 개종하거나. 상당수는 개종하는 걸 선택했지만 끝까지 신념을 고수하다 죽은 이들도 많았다. 기존 수니파 교단들은 재산들을 모조리 몰수당했고 반대로 해외에 있던 시아파 교단들은 이스마일 1세의 초청을 받아 하나둘씩 페르시아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만 이스마일 1세가 이렇게 가혹할 정도로 시아파를 밀어붙인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당시 사파비의 최대 경쟁국은 바로 서쪽의 오스만 제국이었는데, 이 오스만 제국이 전 수니파들의 보편 칼리파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이스마일 1세로서는 이 오스만 제국을 따라 내부에서 분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수니파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고, 종교적으로 사회를 안정시키고 내부의 잠재적인 적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전 국가의 시아파화를 실시했던 것이다.
예로부터 이슬람 사회는 다원주의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파비 왕조는 공식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공식 종교와 경쟁을 벌이는 모든 형태의 이슬람을 제거하는 엄청난 계획에 착수했다. 다른 이슬람 지역에서는 거의 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박해의 물결 속에서 십이 이맘파의 신앙만이 강요되었다. ... 또 메카 순례 대신 시아파 이맘의 성묘에 대한 참배를 장려했다.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저

이스마일 1세는 수니파 모스크들을 싸그리 허물어버렸다. 또한 시아파를 국교로 지정한 것은 당연하고 '사드르'라 부르는 관직을 도입해 국가적인 규모로 개종 사업을 책임지게 했다. 정통 칼리파였던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을 참칭자로 보고 저주하는 내용의 제례를 반드시 기도 시간마다 암송하게 시켰고, 우마르가 암살당한 것을 축하하는 축제까지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심지어 수니파 신도들의 무덤들을 모조리 파헤치기까지 했다. 이는 국외에서도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고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2세가 1501년에 공개적으로 이에 우려를 표시할 정도였다.[14] 이런 정책에 따르지 않는 완고한 수니파 신자나 법학자들은 모두 처형했다. 이스마일 1세의 시아파 개종 시도는 이란 지방에 그치지 않아서 이라크 바그다드 아제르바이잔에서도 착실하게 시아파 화를 진행했다. 그 뒤를 이은 아바스 1세 역시 개인적으로 수니파를 혐오했고 끊임없이 수니파들을 탄압했다. 후일 사파비 제국을 무너뜨린 나디르 샤가 다시 국교를 수니파로 재개종하려 시도했지만 너무 빨리 죽어버린 탓에 실패했다. 그러나 사파비의 수니파 탄압은 당시의 기준으로 봐도 도가 지나쳤고 수니파의 증오를 받게 되어 수니파들이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는 나중에 제국이 붕괴하는 데 큰 원인을 제공한다.[15]

7. 군사

사파비 제국군의 핵심은 1등 개국공신이자 사파비 제국의 무력 그자체나 다름없는 튀르크계 키질바시들이었다. 하지만 제국을 세울 때는 더할 나위없이 유용하던 이들이 정작 제국을 개창하고 나니 골칫거리로 변한다. 기존의 페르시아 권력층들이 밖에서 굴러들어온 키질바시들을 원만하게 대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키질바시들도 지방에서 제 세력을 계속 유지하면서 황실을 우습게 보고 중앙집권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황제와 중앙정부에 계속 대들면서 황제의 속을 썩였다. 특히 키질바시의 힘은 지나치게 강해서 이스마일 2세는 아예 이들에게 살해당했을 정도였고, 이스마일 1세 사후 임명된 5명의 총사령관들 중 3명이 단지 페르시아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키질바시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페르시아 출신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튀르크인인 자기들을 무시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키질바시들로 인한 불만이 날로 커지자 이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던 아바스 1세가 대규모 군사 개혁을 단행한다. 아바스 1세는 예전 황제들처럼 대놓고 키질바시들의 권한을 줄이는 게 아니라 교묘하게 제3의 세력을 키웠다. 그는 주로 캅카스 지방에서 끌고온 노예들을 개종시켜 황제 직속 군대를 창설했는데, 이 직속군은 크게 4개의 병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째가 12,000여 명 정도의 '샤셰반[16]'이라고 하는 키질바시 출신 군대였다. 전임 황제들에게도 쭉 충성을 유지해온 키질바시들로 이들은 제 부족을 버리고 황제 본인에게만 충성할 것을 맹세한 이들이었다. 즉 황실보다 제 가문과 부족이 훨씬 더 중요했던 일반적인 키질바시들과는 달랐다는 말. 두 번째가 '굴람'이다. 예니체리의 페르시아 버전으로 개종한 기독교도[17] 노예들로 이루어졌고, 아바스 1세는 이를 4만 명 수준까지 늘리면서 사실상 사파비 제국의 주력군으로 만들어 버릴 시도를 했다.[18] 세 번째가 찰디란 전투에서의 뼈아픈 패배를 교훈삼아 만든 12,000명 상당의 총병들이었고 마지막 네 번째가 12,000여 명 수준의 포병들이었다. 다만 이 포병의 경우 지나치게 서양 기술에 의존해 4개의 병종들 가운데 최약체로 꼽혔다.[19]

게다가 이렇게 기껏 군사개혁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파비 제국군의 최대 주력군은 역시나 키질바시였다. 왜냐면 수적으로는 굴람이 훨씬 우세했을지 몰라도 키질바시가 사파비 군사력의 절반 넘게를 차지하며 여전히 확고히 사파비 제국의 주력군으로 자리를 유지했고 키질바시들도 모를리가 없어 이를 눈치채고 기를 쓰며 방해했기 때문이다. 키질바시들은 주로 튀르크계 부족 출신의 기병 전사들로, 시간이 흐르며 페르시아계나 쿠르드계 부족들도 스며들었다. 다만 가장 세력이 컸던 부족들은 우스타줄루 부족, 샴루 부족, 룸루 부족, 아프샤르 부족[20], 카자르 부족[21] 등 모조리 튀르크계였다. 초창기에는 이스마일 1세를 신처럼 모시고 숭배했지만 점차 거리가 멀어졌고 결정적으로 찰디란 전투에서 이스마일 1세가 대패하면서 황제와의 거리가 확연히 멀어졌다. 참고로 이들은 황제에게서 봉급을 받는 게 아니라 제 소유의 봉토에서 알아서 세금을 거둬들이고 그 세금으로 생활했는데, 그 대가는 황제가 부를 때 즉시 군사를 끌고 달려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봉건제.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이 지나치게 많은 땅을 소유하며 지역의 군벌이 되자 위협을 느낀 역대 황제들이 땅을 사들여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키질바시들이 눈치채고 방해하면서 실패했다.

황제의 개인 호위병은 '쿠르치'라고 불렀다. 이들은 대부분이 키질바시들에게서 모집한 인원들이었지만 부족이 아니라 황제 본인에게 충성하며, 키질바시와는 달리 황실로부터 봉급을 지급받는다는 점에서 황제의 친위대인터라 키질바시와 구분된다. 쿠르치들의 총사령관은 '쿠르치 바시'라고 불렀다. 이스마일 1세 시기에는 쿠르치가 3천 명, 타흐마스프 1세 시기에는 5천 명이었다가 아바스 1세 시절에 키질바시들을 견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15,000여 명까지 크게 늘어난다. 황제 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쿠르치를 가질 수는 있었지만 그 수가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 외에도 앞서 언급했던 굴람이 4만 명 정도가 있었고, '툽치'라고 불리는 12,000여 명의 포병과 '토팡치'라고 불렀던 12,000여 명의 총병이 있었다. 능력과 봉급의 수준과 비례했던 사파비 제국에서 최약체나 다름없던 포병들의 대우는 열악했고, 포병들의 사령관인 톱치 바시의 대우도 나머지 병종 사령관들에 비해 열악했다.[22] 다만 그 질과 상관없이 아바스 1세 시절 사파비 군대가 이전의 허술한 기병 집단에서 본격적인 화기 보병 중심의 대군으로 변모했다는 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사파비 제국을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과 묶어 화약제국이라 부른다. 다만 이 화약 제국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논란이 많다. 일단 사파비 제국의 총포 사용량은 유럽, 오스만, 무굴에 비교하면 민망할 정도로 낮았고 질적으로나 물적으로나 안정적으로 운용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무굴 제국도 100여 년의 전성기가 끝나자마자 급속도로 붕괴하면서 제대로 된 화약 군대를 다루지 못했다. 그래서 질좋고 체계적인 화기를 갖춘 대군을 운용한 '제대로 된 화약 제국'은 오스만 제국 하나밖에 없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8.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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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셜리의 초상화[23] 사파비 제국 시대 여성들의 복식.
이란 지방이 대개 그렇듯이 사파비 제국의 영토도 대부분이 사막이나 쓸모없는 불모지였다. 넓은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어봤자 태반이 제대로 쓸 수도 없는 척박한 땅이었던 것. 그래서 당시 최대 경쟁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의 인구가 1600년에 2천만 명을 돌파하며 최전성기에 3천만에 달한 것에 반해 사파비 제국의 인구는 1650년에도 여전히 8백만~1천만 사이에 머무르고 있었다.[24]

사파비 페르시아는 능력주의를 상당히 추구하는 국가였다. 이는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페르시아도 신분제 사회인 만큼 부모에게 명예와 관직을 물려받을 수 있었고 귀족 역시 존재했지만 그 명예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제 능력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렇지 못할 시 명예와 관직을 유지하더라도 무능하다고 사회에서 천대받기 일쑤였다.[25] 반대로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최하층에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가능했다. 대표적으로 사파비 제국을 무너뜨린 나디르 샤부터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어릴 적 장작을 주워 파는 게 유일한 수입원일 정도였다.

17세기 사파비 제국을 여행했던 프랑스 여행가 장 샤르댕은 페르시아인들이 굉장히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이라고 썼다. 그에 의하면 페르시아인들은 기본적으로 움직이거나 운동하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으며 여행 역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여행은 새로운 경치를 보거나 경험을 하러가는 관광의 개념이 아니라 필요할 때만 어쩔 수 없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개념이었다.[26] 그나마 페르시아인들이 움직일 때는 말을 타고 무기를 다룰 때였다. 가장 좋아했던 건 궁술이고 두 번째가 검술이었다. 마지막이 튀르크계 민족답게 승마였다고 한다. 사파비 제국에서 인기가 많았던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레슬링인데, 마을마다 '파라반'이라고 해서 마을을 대표하는 레슬링 선수들을 한 명씩 데리고 있을 정도로 대중적이었다. 그 외에도 줄타기 곡예, 인형극, 검술 시범 등도 인기가 많았다.

외모 면에서 보자면 페르시아인들은 그 누구보다 외양을 꾸미는 데 열심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치품을 좋아했고 남자들은 심지어 여자들보다도 많은 반지들을 주렁주렁 끼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단검이나[27] 망토 등에 큼직한 보석을 매달아놓는 등 사치로 따지자면 그 어떠한 나라들보다도 앞서나가는 국가였다. 여성의 복식은 동시대 중국이나 유럽에 비해서 훨씬 탁 트이고 하늘하늘한 모습이었지만 이는 집에서만 입을 수 있었고 밖에 나갈 때는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커다란 망토로 덮고 나가야만 했다. 남자들의 최고 패션 아이템은 바로 터번이었다. 이틀 이상 같은 터번을 쓰는 법이 없었고 색색이 물들인 터번에 깃털, 보석, 금사슬 등 온갖 장식을 다 넣어서 꾸미고 다녔다. 의외로 여자들은 머리 모양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냥 머리를 길게 땋아 끝에 보석이나 진주 따위를 매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또한 여자 노예나 여시종들은 노예의 상징으로 왼쪽 콧구멍을 고리로 뚫어야만 했다. 물론 이는 천하다는 상징이었기 때문에 귀족 여성들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9.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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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이스파한 그랜드 바자르[28]
역사적으로 보자면 서쪽의 오스만 제국에게 국력에서 열세이며 털리는 일들의 반복이었지만 의외로 경제는 상당히 풍요로운 편이었다. 왜냐면 서쪽에는 오스만 제국 유럽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바로 동쪽에는 인도라는 초대형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양측 모두에게서 중계 무역이 가능했기 때문이다.[29] 특히 현대에까지 유명한 페르시아 카펫이 유럽에서 인기가 많아 페르시아는 이를 수출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으며 그 외에도 실크, , 진주, 염소 털(캐시미어), 아몬드, 향신료 등을 주로 팔아 이익을 남겼다. 주 수입품목은 유럽의 양모, 그리고 인도 구자라트 지방의 , 금속, 커피, 설탕 등이었다. 경제 진흥에 관심이 많았던 아바스 1세 시대에는 오랫동안 끊어졌던 실크로드를 다시 부활시키며 동서방 간의 무역을 재개했고 덕분에 페르시아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16세기 말 페르시아를 여행한 프랑스 여행가 장 샤르댕에 의하면 동시대 유럽보다도 훨씬 삶의 질이 높았다고.

사파비 제국의 경제는 크게 목축업 농업에 의존했다. 이는 2개의 계급으로 나뉘어졌던 당시 페르시아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페르시아는 크게 군사를 담당하는 튀르크계 엘리트층과 행정을 담당하는 페르시아계 엘리트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단순히 업무 뿐만 아니라 생활 양식, 그리고 사고 방식에서부터 완전히 달라 제대로 섞이지도 못했다. 주요 민족이 2개로 나뉘어 있었으니 경제도 자연스레 2개의 산업으로 나뉘게 된 것. 목축업은 유목 민족 출신이 많은 튀르크계가 전담했고 반대로 농업은 기존부터 정주 민족 생활을 하며 풍족한 삶을 영위해온 페르시아인들이 맡았다. 특히 페르시아의 농업 기술은 뛰어난 편이었고 넓은 땅도 있었기에 페르시아에 여행 온 유럽인들이 놀랄 정도로[30] 농업이 성공적이었다. 다만 척박한 국토와 제한된 농경지, 몽골 제국의 침략 이래 고질적인 인구 부족과 정부의 농업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유럽만큼 집약적인 농업이 가능하지는 못했다. 즉 땅덩어리 자체의 규모와 토질 덕에 풍요롭긴 했지만 동시대 유럽처럼 높은 생산률을 뽑아내진 못했던 것이다.

사파비 페르시아의 독특한 농업 관습들 중 하나가 바로 소작인과 지주 사이의 관계였다. 보통 소작인들이 노예처럼 일해서 피땀 흘려 농작물을 지어놓으면 지주들이 귀신같이 수확철에 들이닥쳐 대부분을 빼앗아가는 대부분의 타 지방들과 달리 페르시아에는 소작인과 지주 사이의 관계가 매우 평등한 편이었다. 당시 페르시아인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는 요건이 크게 땅, 물, 쟁기용 동물, 종자와 노동 이렇게 총 5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요소들에 각각 20%씩 비중을 매겨 지주가 소작인에게 제공한 만큼만 가져갈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지주가 저 5가지 요소들 중에 땅과 물 만을 제공해줬다면 지주는 소작물의 40%만 가져갈 수 있었다. 반대로 소작인이 쟁기용 동물과 종자, 노동을 댔다면 소작인은 수확량의 60%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소작인들의 생산량의 8~90% 넘게 강제로 빼앗아갔던 동시대 일본이나 유럽 등지에 비하면 훨씬 선진적인 배분 방식이었다. 덕분에 페르시아 농부들의 삶은 타 지역의 농부들과 비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웠다.

실크로드는 사파비 제국에게 금덩어리를 넝쿨째로 안겨주는 돈줄이었다. 유럽 튀르키예, 인도, 심지어는 저 멀리 중국까지 잇는 거대한 교역로를 틀어쥐고 무지막지한 부를 얻어낼 수 있었다. 특히 17세기 전반에 걸쳐서 강력한 황제들의 통치 하에 실크 로드와 교역소들에 착실한 관리가 이루어지며 상인들의 통행이 더욱 활성화됐다. 이 당시 페르시아 지방의 교역로는 무굴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의 교역로에 비해서도 훨씬 질이 좋고 관리도 잘되어 있었다. 상인들은 이 황실이 후원하는 교역소에서 무료로 잠을 잘 수도 있었다고 한다. 1487년 포르투갈 희망봉을 돌아가는 새로운 무역 루트를 뚫고[31] 페르시아 만, 아덴 만, 말라카 해협을 장악하자 사파비 제국은 포르투갈인들을 몰아내려 시도했다. 하지만 홀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했고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몰아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사파비 제국은 영국에게 각종 무역 특권을 부여했고, 영국의 대 페르시아 영향력은 이전보다 훌쩍 커지게 된다.[32]

10. 민족

사파비 제국의 황실과 귀족 계층들은 대부분이 튀르크와 쿠르드 및 페르시아계 출신이었다. 튀르크인들은 군사적 업무를 도맡아 처리했고 페르시아인들은 행정적인 업무나 정부 사무를 맡아 제국을 이끌어 나갔던 것. 각자의 업무는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었고 이같은 경향은 사파비 제국 뿐만 아니라 12세기 아바스 왕조 시대부터 시작해 심지어 20세기 카자르 왕조 시대까지 쭉 이어져내려오는 전통이었다. 왕실 자체는 튀르크계인 경우가 절대다수였지만 페르시아인들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았다. 제국 내에서는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투르크',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타지크'라고 불렀다. 각자 '칼의 사람'과 '펜의 사람'을 뜻했으며 튀르크인들은 무력을, 페르시아인들은 행정력을 장악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실질적인 업무를 도맡아하는 페르시아인들의 권력이 나날이 강해지고 나중에는 오히려 칼을 쥔 튀르크인들을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자 타흐마스프 1세는 튀르크인의 자식들을 페르시아인들의 아래에서 수학시키며 이들의 융화를 추진하기도 했다.

튀르크인과 페르시아인들 외에도 굉장히 중요한 민족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캅카스인이었다. 사파비 제국의 개국공신이나 다름없는 튀르크계 기병집단인 키질바시들은 시간이 갈수록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고 중앙집권화를 가로막는 존재가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타흐마스프 1세가 신하들과 기존의 키질바시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지방에서 7만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등을 포함한 수많은 캅카스인 노예들을 데려와 개종시킨 뒤 중임을 맡겼는데, 이들이 점차 힘이 커지면서 제국의 확고한 엘리트층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처음에는 강제로 끌려왔지만 캅카스인들의 세력이 불어나자 점차 자발적으로 부와 영예를 찾아 페르시아 지방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특히 캅카스인들은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기존의 키질바시들도 손쉽게 능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치열하게 치고받으면서 키질바시들의 권위를 깎아내리라는 황제의 깊은 뜻이었다. 이들은 법과 재판을 통해서 점차 세력을 불려나갔고, 나중에는 튀르크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제3의 축으로 등장한다.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아바스 1세는 이 캅카스인들을 유용하게 써먹었다. 아바스 1세는 캅카스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몇 만명에 육박하는 캅카스인들을 강제로 끌고오다시피 했는데, 이들을 개종시켜 자신의 개인 사병을 창설했던 것이다. 이들을 '굴람'이라고 부르고 오스만 제국 예니체리의 페르시아 버전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미 이스마일 2세 시절에 3만 명에 달하는 굴람들을 운용하고 있었고 아바스 1세 시절에는 이보다도 많은 4만에 달하는 굴람들을 데리고 다녔다. 아바스 1세의 재위기에만 대강 13만 명에서 20만 명에 달하는 조지아인, 1만 명의 체르케스인, 30만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페르시아 지방으로 유입되어 들어왔다. 몇 십만에 달하는 캅카스인들이 쏟아져들어왔으니 당연히 이들 중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도 넘쳐났다. 황실의 하렘에도 캅카스인 출신의 환관과 후궁들이 범람했고 1598년에는 조지아 출신의 알라버르디 칸이 제국에서 최고로 부유한 파르스 지방의 총독까지 오르기까지 했다.

11. 의의

11.1. 시아파 왕조

원래 페르시아인들 대부분은 수니파였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 이후로 이란은 시아파 국가가 되었다. 즉 현재의 이란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한 데에 사파비 왕조는 상당한 역할을 한 것.

사파비 왕조는 기본적으로 시아파 국가였다. 사실 이란 북부의 타바리스탄 지역은 이슬람의 중심지로부터 상당히 멀었고 지형도 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슬람의 통치에 대해 자유로웠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의 도래 이후로 지금도 그렇지만 소수파였던 시아파가 많이 활동하였으며 이후 이란에는 몇 차례 시아파 왕조가 세워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부와이 왕조도 시아파 왕조였다. 하지만 사파비 이전의 시아파 국가들은 오래 가지 못했으며, 사파비처럼 잔혹하게 시아파를 강요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란 전 지역이 시아파가 되지는 않았다. 주로 타바리스탄 같은 일부 지역이나 지배층 등 일부만 시아파였던 경우가 많다.[33] 게다가 이런 시아파 왕조가 무너지고 다시 수니파 왕조가 들어서는 등으로 시아파가 이란에 뿌리깊게 자리잡지는 못했다.

반면 사파비는 잔혹하고 혹독한 강제 개종을 실시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그 결과 이란 전체를 시아파로 개종시켰다. 역설적으로 이런 종교적 강압책으로 인해 많은 페르시아의 수니파 학자, 지식인, 예술가 등이 다른 나라로 도망치면서 부하라, 무굴 제국 델리 같은 지역의 페르시아 문화적 영향력이 부쩍 커지기도 했다.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지만 이런 종교적 열망에 기반한 강제 통합을 통해 사산조 이후 페르시아에 전례 없는 안정적이고 강력한 통일 왕조를 만들어내면서도 동시에 대외적으로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력도 같이 커졌다. 파키스탄, 북 인도, 아프가니스탄 같은 지역에도 파르시어권 커뮤니티, 이란 문화의 영향이 짙은것도 이 시절 이룩한 지역 패권 덕분이고, 현대까지도 이란이 국가 자체의 객관적인 국력, 경제력에 비해 강력한 대외 영향력을 발휘하는것도 크게 보면 사파비 왕조 시절 시아파 급진주의+이란 문화적 영향권의 확대란 역사적 유산에 기반해 있다.

11.2. 결과: 시아파를 통한 민족적 대립

실제로 현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란이나 시아파를 칭할 때 사파비라는 용어를 아직도 사용하는 편이다. 사파비 이전에도 시아파 왕조로 파티마 왕조등이 존재했으나 시아파는 1~5% 남짓한 극소수였고 그 당시엔 다 같은 무슬림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종파간 대립이 격화되어 사파비 왕조는 수니파와 노골적으로 대립하며 성립되었고, 이는 10% 가량에 달하는 시아파의 급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그 시아파 절반이 이란이다.

그 결과 사파비 왕조의 등장은 언제나 소수파로 존재할 줄 알았던 시아파가 수니파의 위협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강성해질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수니파 세계에 큰 충격과 공포를 선사해주었다.

물론 사피비 왕조 등장 이전의 주요 시아파 왕조였던 파티마 왕조 같은 경우,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에서도 가장 중요한 영토 중 하나이던 이집트를 장악하고 칼리파를 자처하며 이슬람권의 중심부인 중근동에서도 두드러지는 영향력을 떨친 바 있기는 하다. 하지만 파티마 왕조 같은 경우 지배층이 스스로를 시아파로 정체화했을 뿐, 피지배층들의 대다수는 수니파... 라기보다도 그냥 '무슬림' 으로 자신들을 정체화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수니파/시아파 갈등이란 기본적으로 지배층-귀족층들의 명분 갈등이었고, 대부분의 피지배층들에게는 그냥 "저번 칼리프님도 무슬림이고 이번 칼리프님도 무슬림이지. 근데 예배시간에 설교하는 내용중에 좀 다른게 있긴 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정도의 문제였다는 것.

하지만 사파비 왕조의 경우 안 그래도 이전부터 '아랍인'과 분명히 구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페르시아인'을 규합하여 '시아파'라는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시아-수니 갈등을 단순히 일부 지배층, 신학자들간의 신학적, 명분적 대립에서 '민족 집단간의 갈등'에 가까운 형태로 전환시킨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전까지의 수니-시아 갈등을 같은 나라 내에서 정당간의 갈등(보통 수니파가 집권하지만 가끔은 시아파가 집권)에 비유한다면, 사파비 왕조의 경우 이란(페르시아) 지역과 그 주민들을 시아파로 정체화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의 다른 중심부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1.3. 오스만 제국과의 경쟁구도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서쪽의 대제국과 힘에는 부치지만 나름 호적수로 활약하면서 흡사 예전의 로마 VS 사산조 페르시아를 방불하게 하는 형세를 유지했다.

사실 사파비는 인구에서 오스만에게 열세였다. 오스만의 전성기 인구는 3000만인데 사파비는 1000만은 커녕, 500만도 안되는 464만에 불과했다. 특히 건국 초기에는 인구가 320만에 불과했다.[34] 본래 고대 문명의 요람 중 하나인 이란 지방이었지만, 몽골의 침략과 호라즘의 멸망을 거치며 250만의 인구를 보유했던 현대 이란 지방이 피난과 기근 등으로 인구가 일시적으로 25만이 되어 버릴 정도로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35]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로마에게 8배나 열세였기 때문에[36] 사파비보다 사정은 더 좋지 못했다. 특히 로마군의 공격에 수도가 2번이나 파괴되었을 정도.[37] 물론 '게르만족에게 서쪽 지역이 함락된 이후의 로마'로 비교 대상을 바꾸면 사파비와 달리 사산조는 호각 이상의 전적을 유지했다. 애초에 건국 과정도 오스만은 오스만 베이의 건국 이후 4차 십자군이 남긴 옛 동로마 세계의 거대한 공백을 차지하며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제국으로 등극까지 순탄하게 일사천리로 정복과 팽창을 거듭했지만,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기원 자체도 사파비야 종교 집단이였고, 오랜 기간 일한국, 티무르 제국, 백양 왕조 같은 더 강력한 이웃 유목 정복 제국에게 의존하고 치이면서 아제르바이잔 산구석에서 겨우 겨우 세력을 키우면서 건국을 했더니 또 바로 서로는 오스만, 동으론 우즈벡이란 강력한 이웃 열강 상대로 생존 투쟁을 벌여야 했다. 지정학적 여건이나 세력 기반이란 측면에서 여러모로 사파비조 페르시아가 원래 더 불리했던 셈이다.

물론 예전의 대제국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하곤 아예 비교가 불가능하고[38] 사산 왕조와 비교하면 서쪽 전선은 영 딸리지만, 동쪽 전선은 의외로 유목 세력에 대해서 상당한 우위를 자랑했다.

오스만 쪽 전선을 보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상실하긴 했지만, 이 부분은 군사적 역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지중해-페르시아의 역량은 로마 제국- 파르티아, 동로마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사파비 페르시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력에서 열세다보니 이란권이 힘에 부쳤던 데다가 사파비 왕조는 창건자 이스마일 1세 사후 내전에 휩싸여 있었는데, 내전이 가까스로 수습되자마자 적국이 국경을 쳐들어온 꼴이었기 때문.

사산조와 비교해보면 전적이나 영역이 묘하게 동쪽으로 치우친 상황. 그러나 밀리긴 했어도 밀리는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군 또한 크게 고전해야만 했을 정도로 여전히 지중해 제국의 무시 못할 강적의 위치는 유지했다. 사산조와 직접 비교하기엔 8백년이라는 엄청나게 큰 시간적 차이가 있고, 지정학적 구도만 비슷하지 내부적 여건 같은 건 완전히 달랐기에 부적절하다. 왜냐면 사파비는 오스만 제국에 비해 여러 악조건에서 시작했다. 애초에 기반이 된 페르시아 내륙 자체가 오스만 제국의 풍요로운 루멜리아,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해안지방 같은 지중해의 곡창지대에 비해 생산력도 낮고 사막도 넒으며, 적어도 핵심 영토인 루멜리아-아나톨리아 해안-시리아-이집트는 확실하게 원활한 교통, 무역망이 개발 되었던 오스만과는 대조적으로 페르시아의 핵심 영토들은 자그로스 산맥, 알보르즈 산맥, 카라쿰 사막 같은 거대한 자연장벽으로 뚝뚝 떨어져 있었다. 이런 지정학적 조건은 오스만 제국에게 침공당했을때 주된 대응인 청야전술을 용이하게 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국가 발전의 관점에선 영 불리한 입지였다. 거의 천년전 마지막 페르시아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내세운 사산조도 사실 이런 여건 때문에 인구와 세수의 핵심은 사실 현대 이란보다 이라크의 메소포파미아 일대에 있는 크테시폰 같은 지역이었고, 이런 그나마 인접한 대규모 영농과 인구 부양이 가능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안정적으로 영유하기 힘들었던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물리적 체급 자체에서 오스만에 비해 많이 딸렸다. 이런 악조건에서 그나마 어느정도는 호각지세를 유지하며, 국체를 보존하고 후대 이란의 정체성에 큰 구심점을 마련할 만큼 독자적인 문화와 정치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나아가 현대까지 이어지는 수니-시아파의 지정학적 대립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사파비 왕조가 페르시아 문명과 이슬람권 전체에서 남긴 역사적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또한 오스만 제국 초창기의 술탄들이 튀르크계 개국공신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쪽에는 튀르크 계통의 키질바시[39]에 의해 제국의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면이 강했으며 인도에 대해서는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분할하여 지배하는 등 꽤나 강세를 보였다.

다만 이들이 제국 후기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이 개국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데브시르메 제도를 도입하고 황실 친위대인 예니체리 군단을 창설했듯이, 2대 황제인 타흐마스프 1세 때부터 키질바시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친위대를 창설하고 카프카스계 맘루크를 등용하기 시작하였으며, 5대 샤인 아바스 1세 때에 결정적으로 세력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키질바시와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규모로 강제 이주와 회유책을 번갈아가며 이란 내부로 이주시킨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들은 튀르크계 키질바시 귀족, 페르시아계 관료 사이 제3세력을 형성하며 16세기 초중반의 길고 험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도 아바스 대제 시절쯤 와선 안정적인 중앙 집권을 마련할 기반이 되었다. 카프카스인 납치와 강제 이주로 사파비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인구 부족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문화, 사회적으로도 이 시절 사파비조의 청야전술의 일환으로 대규모 강제 이주가 이루어지며 조지아, 아르메니아 같은 카프카스 소왕국들 본토는 작살난 반면 타브리즈, 이스파한 같은 이란 내륙지방의 도시에 번영하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커뮤니티가 생기기도 했다.[40] 사실 이렇게 급진적인 종교적 열망에 기반한 투르코만( 오우즈) 전사 부족집단의 힘을 입으면서 성장하고 나서 이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기독교계 피정복민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건 오스만이나 사파비조나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41] 그리고 적어도 오스만은 몰라도 중앙아시아의 우즈벡에겐 전반적으로 대단한 강세였다. 헤라트, 칸다하르 같은 중요한 호라산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훗날 아프가니스탄에 이란의 영향이 짙게 남은 것도 사파비 시절 확장의 영향이 크다.

은근슬쩍 '이란 종족주의'와 '아케메네스 왕조', '사산 왕조'를 동경했어도, 아바스 왕조 칼리프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러한 심정을 표출하지 못했던, 혹은 아예 몽골계에게 지배당했던 사산조 이후 이전 페르시아의 지배자들과는 달리, 그러한 열망을 현실화하며 등장한 이슬람 이후 최초이자 마침내 부활한 페르시아 통일 제국이었던 것이다.

12. 기타

사파비 제국기 활동한 미술가 레자 압바시의 그림. '사파비 르네상스'의 대표작이다.

많은 사파비 왕조에 관한 자료영상에서 아제리인, 튀르키예인, 페르시아인, 쿠르드족[42]이 "사파비 왕조는 우리 민족의 국가다!"라며 진창으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는 건국자 이스마일 1세의 혈통 때문에 일어나는 분쟁이다. 이스마일 1세의 외할머니는 그리스계 공주였어서 그리스인의 피도 있고 아버지쪽에선 쿠르드족과 투르크족 피도 있다. 더욱이나 샤 이스마일 1세 본인은 투르크어를 구사하였는데, 왕조 창단 이전 사파비 집안의 주요 근거지는 아제르바이잔이었다.

사파비 제국의 원형이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의 분파, 수피즘의 하나인 사파비 교단(Safaviyya)에서 시작된, 종교적으로 똘똘 뭉쳐진 국가다. 그에 비해 민족적으로는 쿠르드인, 아제리인, 그리스인, 조지아인 등등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있다.

마치 몽골을 근거지로 해 중국어 계열을 사용하지만 몽골인 중국인 한국인을 모아 새 종교분파를 만들고 한국에 세웠다는 것과 비슷하다. 현대에 와서 거의 중동판 한일관계에 필적하는 오스만 제국의 튀르키예와 사파비 왕조의 이란간의 악감정 때문에 여기저기서 피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 1722년에서 1729년까지는 호타키 왕조가 장악. [2] 그냥 (왕)로 줄여서 부르기도 하나 전체 칭호는 샤한샤( 왕중왕)로, 황제급의 칭호이다. [3] 사파비 왕조에서 발행한 금화 [4] 사파비야 문서에 나오듯, 이스마일 1세의 12번째 할아버지인 피로즈 샤는 본래 신자르 출신 쿠르드 인이다 [5] 아제르바이잔인은 튀르크화되었지만 이란계 민족인 쿠르드계 혈통이 있었으며, 본질은 이란인이었기에 페르시아 정체성 주장이 가능했다. 다만 현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사파비 왕조가 힘을 크게 썼으니까 자랑스러운 아제르바이잔 왕조로 칭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실제로 아제르바이잔에는 사파비 제국의 시조인 이스마일 1세의 이름을 딴 훈장이 있다. 다만 이스마일 1세의 가문이 튀르크계였다는 설이 있지만 일단 사파비 가문의 정체성은 페르시아였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6] 자신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화신이라 믿었던 이스마일 1세는 찰디란 전투 직전까지 거의 패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찰디란 전투에서 셀림 1세에게 최악의 패배를 당하자 모든 삶의 의욕을 잃고 칩거하다 그대로 사망했다. 그렇지만 국정에서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었고 이것은 사파비 왕조 입장에선 천만다행이었다. [7] 그나마 17세기 중반에 제위에 오른 아바스 2세가 명군이었던 덕에 제국이 18세기 초까지 버틸 기반은 되주었다. [8]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벡 계열 튀르크 족이 주요 국민 구성을 이루는 현대의 특정 국가명이다. 당연히 그 당시엔 우즈베키스탄이란 국가나 민족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9]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신의 사자'라고 불렸다. [10] 키질바시들이 갈수록 세력을 잃어가면서 대부분은 군사 업무에 조언을 하거나 상징적으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11] 환관들의 영향으로 조지아어 아르메니아어도 많이 썼다고 한다. [12] 사파비 제국의 국교가 처음부터 12 이맘파였던 것은 아니었다. 사파비 제국은 사파비야라는 시아파 수피 교단에서 출발했으나, 이스마일 1세 타흐마스프 1세는 자신을 구세주로 여기고 숭배한 사파비야 열성 신도들을 숙청/토사구팽하고 대신 아랍인 율법학자들을 초빙하여 12 이맘파를 국교로 삼았다. [13] Ullama. 이슬람 율법학자를 의미한다 [14] 물론 이스마일 1세는 무시했다. [15] 아프가니스탄에서 발흥한 호타키 왕조가 사파비 제국을 침공하자, 제국 내 숨어있는 수니파들과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이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하였고, 덕분에 호타키 왕조는 사파비 제국 군대를 상대로 한동안 연전연승을 거듭할 수 있었다. 호타키 왕조의 연승 행진은 수니파였던 나디르 샤가 등장하고나서야 비로소 끝을 맺었다. [16] '왕의 친구들'이라는 뜻인데 공교롭게도 먼 옛날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를 멸망시킨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끈 친위대 헤타이로이 역시 '왕의 친구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17] 여기서 기독교는 유럽의 기독교가 아닌 중동의 오리엔트 정교회이다. [18] 기독교도 노예병이라는 표현에서 뭔가 익숙하다 느낄텐데 그 느낌이 맞다. 이들의 정체는 바로 맘루크이기 때문. 정확히는 맘루크의 페르시아어 호칭이 굴람인것으로 흔히들 맘루크하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떠올리겠지만 맘루크는 일종의 병과를 나타내는 용어로 정치체가 아니다. [19] 그래도 훗날 이 포병대는 나디르 샤의 군사개혁으로 더 강해지면서 페르시아군의 주력을 담당하게 된다. 허나 이는 사파비 제국 시대가 아니니 서술하지 않는다. [20] 후일 아프샤르 왕조를 개창한다. [21] 후일 카자르 왕조를 개창한다. [22] 톱치 바시의 1년 연봉은 2천 토만이었는데 이는 무려 1만 토만에 달했던 총병 사령관 '토팡치 바시'의 연봉에 비하면 턱없이 낮았다. 그러다보니 페르시아에서는 포병이 기피되는 직종이었다. [23] Sir Robert Shirley(1581~1628). 영국인 탐험가이자 대사로, 총 3번에 걸쳐 페르시아에 장기 체류했고 아바스 1세의 조언자로 일하기도 했다. 특히 포병에 관심이 많던 아바스 1세의 요청으로 페르시아 포병을 영국식으로 발전시켰다. 1622년에 그려진 초상화로 일부러 페르시아 전통 복장을 입은 모습을 그렸다. 사실 그는 대사로 페르시아에 거주할때 페르시아 복장을 입고 다니며 귀국할때도 이 옷을 입고 온 터라 유럽에서는 그의 페르시아 복장을 신기하게 보았다. [24] 한마디로 망하는 순간까지 1천만 이하였다는 소리다. [25] 사실 이는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귀족들은 중요한 직책을 맡기에 그만큼 직책에 걸맞은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능력이 부족해서 가문의 배경으로 관직과 명예를 유지하면 당연히 무능하다는것이 드러나는터라 사회적으로 천대받게 되며 이는 귀족 가문의 평판을 깎아버려 정계에서 소외되게 만든다. 그래서 귀족들은 보통은 본인 역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한편 자식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썼으며 이는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나서 사실상 귀족의 역할을 물려받은 현대 상류층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26] 페르시아인들이 운동을 하거나 움직이기 싫어한다는 건 서양 세계에서도 옛날부터 꽤 유명했다. [27] 왜 단검이 장식품에 들어가냐면 전근대에는 치안이 나빠서 범죄가 흔하게 발생한 터라 호신용으로 단검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신분이 높고 부유할수록 단검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자신의 부와 신분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28] 사파비 제국 시대 전역에서 가장 거대한 바자르였다. [29] 사파비를 탐험한 프랑스의 보석상이자 여행가인 장 샤르딘의 말에 의하면 페르시아의 농부들이 유럽의 가장 비옥한 땅에 사는 국가들의 농부들보다 삶의 수준이 높았다고 한다. [30] 이스파한의 연회에 참석했던 프랑스 여행자인 장 샤르딘은 연회에서는 자신이 듣도보도못한 50여 개가 넘는 과일들을 보고 놀랐다고 적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든 과일들이 온갖 군데에 널려 있었다는 것이다. [31] 이 희망봉 루트로 인도로 직행하는 무역길이 열리자 기존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32] 17세기 말 사파비 제국은 영국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에게도 특권을 부여했다. 말기에 이르자 네덜란드는 각종 페르시아 상선들의 호위를 맡으며 사실상 페르시아 만의 해양 운송 전체를 장악했고, 이는 결국 사파비 제국이 해상 무역 주도권을 잃어버리는 단초가 되어버린다. [33] 대표적인 예로 알라비 왕조나 바반드 왕조 등이 시아파를 믿었는데 이들은 모두 타바리스탄이 주요 거점이었다. 심지어 부와이 왕조도 가문의 본산이 타바리스탄이다. [34] 이는 같은 시기 영토가 10분의 1도 안되던 조선의 절반도 안되는 것이다. [35] 학계에서는 몽골이 침략하기 전의 호라즘 제국이 지배하던 이란의 전체 인구를 500만, 몽골에게 학살당한 순 사망자만 170만명으로 추산한다. 본래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동부 지방과 우즈베키스탄의 이란 문화, 특히 이란계 언어는 몽골 제국이 투르크계 유목민을 놔두고 이란계 도시민들을 학살하면서 파미르 고원의 일부를 빼고는 완전히 사멸한다. 기원후 6세기의 사산조 페르시아도 인구가 800만이었다! 특히 이란이 과거의 성세에 가까운 인구를 회복한 것은 20세기에나 가능했다. [36] 로마 제국은 인구가 5천만에서 6천만에 달했다. [37] 이는 사산조의 전대 왕조인 파르티아도 마찬가지였는데 인구가 사산조처럼 1천만 이하였고 로마에게 수도가 3번이나 파괴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38] 실제로 사산 왕조와 사파비 왕조가 추구했던 것이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영토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케메네스는 인구부터가 넘사벽으로 심지어 최대 3000만이라는 약간 황당한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중동에서 인구부양력 높은 지역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아나톨리아가 사천왕이라 할 만한데, 아케메네스는 이 모든 지역을 완전히 다 차지한 나라였으나 사산조는 메소포타미아만 차지했고 사파비는 하나도 점유하지 못했다. [39]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던 튀르크 부족들의 통칭. 'Qizilbash'라는 말을 직역하면 '붉은 머리'라는 뜻인데, 이는 그들이 즐겨 쓰던 붉은 모자에서 유래했다. 사파비 왕조 창건 이전까지는 소수파였던 시아파를 믿는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창건자 이스마일을 군주이자 교조로 받들었다. [40] 다만 조지아인의 경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신도들과 다르게 거의 무조건 시아파로 개종이 강요되었으며, 체르케스와 다게스탄 일대의 순니파 무슬림들도 강제로 시아파로 개종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41] 하지만 후반기에는 아프간족에 의해 제국이 멸망하고 일시 점령당하기도 했다. 역관광? 그러나 이후 다시 나디르 샤가 본진으로 쳐들어가 철저하게 복수해서 설욕한다. [42] 튀르키예인과 쿠르드족 중에서는 특히 시아파 신자들이 더더욱 사파비 제국을 자신들의 역사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