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2-15 19:29:31

청나라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청나라 치하 몽골, 청나라 치하 타이완 섬
만주의 역사 / 근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명(明) 북원 여진족
후금
(여진족에서 만주족으로 개칭)
청(淸)
청(淸) 러시아
만주의 역사
{{{#!folding [ 고대 ] 연(燕) 고조선 동호 숙신 / 퉁구스
진(秦)
전한 흉노
후한 오환
선비
부여 읍루
조위 동연
서진
전연
전진
후연 고구려 두막루 물길
북연
북위 거란 실위
동위 말갈
북제
북주
수(隋)
}}}||
{{{#!folding [ 중세 ] 당(唐) 발해 백산
속말
흑수
거란 / 요(遼) 발해부흥운동 여진
거란부흥운동 및 여진족 분리운동 금(金)
몽골 제국
원(元)
}}}||
{{{#!folding [ 근현대 ] 관동주 중화민국 북양정부 러시아 제국
봉천군벌 러시아 공화국
적백내전기 일본군점령지
젤레나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
중화민국 국민정부 소련
만주국
중화민국 국민정부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둥베이)
러시아 연방
(극동 연방관구)
}}}||
}}}||

중국의 역사 中国历史
{{{#!folding 열기 · 닫기 기원전 1600년 ~ 기원전 206년 기원전 206년 ~ 907년 907년 ~ 1644년 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1616년 ~ 현재
1616
~
1912
후금(後金)
다이칭 구룬/대청(大淸)
, 태평천국(太平天國),
1912
~
1949
중화민국(中華民國)
중화제국(中華帝國)
중화소비에트공화국(中華蘇維埃共和國)
중화민국(中華民國)
왕징웨이 정권(汪精衛政權)
1949
~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 중화민국(中華民國)
}}}||
중국의 역사
중화민국/북양정부
만주의 역사
치하 여진족 중화민국/북양정부
몽골의 역사
북원
청나라 치하 몽골
중화민국/북양정부
준가르
다이칭 구룬 / 대청국
大淸國
파일:Qing Dynasty.png
파일:청나라 국기.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Seal_of_Qing_dynasty.svg.png
국기 국새
1618년 ~ 1912년[1] (294년)
또는 ~ 1924년[2] (306년)
국가 공금구(鞏金甌)
위치 만주, 중원, 몽골
위구르, 티베트, 대만[3]
수도 허투아라(赫圖阿拉)
1616년 – 1621년
랴오양(遼陽)
1621년 – 1625년
성경(盛京)
1625년 – 1644년
순천부(順天府)
1644년 – 1924년
면적 13,100,000 km2 (1790년)
11,500,000 km2 (1880년)
인구 301,000,000 명 (1790년)
395,918,000 명 (1898년)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 입헌군주제[4]
국가 원수 황제 천자 /한만주식 군호/ 대칸몽골식 군호
주요 황제 초대 천명제 (1616년 - 1626년)
2대 숭덕제 (1626년 - 1636년)
4대 강희제 (1661년 - 1722년)
5대 옹정제 (1722년 - 1735년)
6대 건륭제 (1735년 - 1796년)
12대 선통제 (1908년 - 1912년)
주요 사건 ' 건국 이후' 문단 참고.
언어 만주어, 중국어, 티베트어,
몽골어, 위구르어
민족 만주족, 한족. 몽골족
종교 불교, 유교, 도교
통화 냥(~ 1899년)
청 위안(1899년 ~ 1912년)
성립 이전 명나라
멸망 이후 중화민국
청나라 소조정
타이완 민주국
복드 칸국
티베트 왕국
홍콩
마카오
위치[5]
파일:청나라.png

1. 개요2. 역사
2.1. 건국 이전까지2.2. 건국 이후2.3. 멸망
3. 강역4. 문화5. 상징
5.1. 국기5.2. 국가(國歌)
6. 역대 황제
6.1. 국호가 후금이었던 시기6.2. 국호를 청으로 변경한 이후
7. 종합
7.1. 항렬7.2. 계보7.3. 추존 황제
8. 대외 관계
8.1. 원(元)8.2. 명(明)8.3. 조선8.4. 일본8.5. 그 외
9. 관련 문서
9.1. 기타9.2. 주요 사건 (시대순)9.3. 인물 (시대순)

1. 개요

만주에서 발원한 여진족 만주족으로 이름을 바꿔 세운 유라시아 육상 제국이자 중국의 마지막 통일 정복 왕조.[6] 중국의 통일 왕조 중 왕통의 중단 없이 가장 오래동안 존속한 왕조이자[7] 21세기 기준 최후의 퉁구스계 주권국가이기도 했다.[8] 그리고 한족의 투항으로 흥하고 한족의 투항으로 망한 나라다. 신해혁명 신규식, 김규홍, 유동열 등 몇몇 조선인들도 가담했음을 감안하면 조선을 굴복시켜 흥하고 조선인의 개입으로 망한 나라로도 볼 수 있다.

보통은 청나라라고 부르지만 정식 국호는 다이칭 구룬[9](만주어 독음)이며 한자로는 대청(大清: 한자 병음: Dà Qīng(다칭))이다. 당대 영문으로는 대청(Great Qing) 또는 대청제국(Empire of the Great Qing)으로 불렸고 현대 중국에서는 청조(淸朝: 한자병음: Qīng Cháo(칭 차오), 영어: Qing(Tsing) Dynasty))하고 불리고 있다. 순만주어로는, 암바 겅옌 구룬(Amba Genggiyen Gurun)이다.

국명이 추상명사[10]인 까닭은 '불'을 상징하는 명조(明朝)를 제압하겠다는 뜻에서 물 수() 변이 들어간 청()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1] 17세기 초인 1636년 4월 11일, 대금의 압카이 수러 한이 국호를 개칭하면서 역사에서 등장했고, 1644년, 중국 북경에 입관(入關)했으며, 이후 20세기 초인 1924년까지 30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리고 1917년 복벽 운동으로 1912년에 퇴위했던 선통제가 다시 즉위하기도 했다. 황성(皇姓)은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12] 한국식 독음으로는 '애신각라'로, 원어인 만주어를 음차한 것이다. 한자를 해석해 ' 신라를 사랑하고 새긴다'라는 뜻이라는 유사역사학의 주장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여진족 신라인설 문서 참조.

특이하게 비유럽권 국가들 중에서 동군연합[13]을 한 몇 안 되는 나라였다. 이는 유라시아 육상 제국인 대청 제국에서 중화는 일부에 불과했다는 명백한 증거인 셈이지만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중원으로 대거 이주하여 중원에서 살아갔으니 그 일부에 불과한 중화에 동화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만주족이 한족에 거의 동화된 채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비극을 잉태하게 되었다.

2. 역사

2.1. 건국 이전까지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족의 후예인 건주 여진의 추장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06년 2월 17일, 여진국(주션 구룬)의 수러 쿤둘언 이 되었고, 1618년, 수러 겅옌 한이 되어 4월 무렵, 국호를 주션국(Jušen Gurun: 여진국)에서 암바 아이신 구룬(Amba Aisin Gurun), 중국식 국호로 대금(大金)으로 개칭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후금(後金)이라 칭했고, 현재에도 대부분 완안 아골타가 건국한 여진 제국 금나라와 구분짓기 위해 후금이라 부른다. 그의 아들 압카이 수러 한은 1635년, 주션(Jušen: 여진)이란 족명을 금지하고, 만주로 고쳤으며, 1636년 4월 11일에, 관온인성황제(Gosin Onco Hūwaliawun Enduringge Han)가 되어 국호를 '대청(Daicing)'으로 개칭했다.

금 - 청 제국은 북방에서 명나라를 상대로 분명히 여러 차례 승리했지만,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킬 국력은 아니었다. 이는 "군사력 = 국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청나라는 기병 중심의 군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회전에서는 보병 중심의 (그것도 쇠퇴한) 명군을 압도한다. 하지만 반대로 공성전에서는 기병의 효력이 나오기 어려우며, 명나라와 달리 화기를 다수 보유한 것도 아니었기에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며, 결국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산해관을 자력으로 넘지 못한 것이다. 명나라는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중원의 통일 왕조로 오래 전부터 서양과의 접촉으로 인해 홍이포와 같은 신형 화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청나라는 신흥 국가로 명나라에 비해 이러한 국가의 역량이 모자랐다.

대규모의 자연 재해가 명나라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있던 상태에서 부패한 명 관료들을 최대한 끌어들여 최신 화기와 신식 훈련을 받은 정예 부대[14]를 포함해 상당한 숫자의 명군을 운좋게 얻고, 산해관을 넘으며 오삼계 및 그 휘하의 명군이 합류했고, 더구나 이자성 등이 개판을 만들어 성능이 개선된 신형 화기[15][16]가 명군에 보급되어 전력이 상승하기 전에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 북경 점령 과정을 보면 천운[17]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명나라의 경우엔 파업 황제(...) 등의 위기를 무지막지한 제도 개혁과 부유함으로 막아내던 사정이라(...)[18]

건국 시조에 대한 신화도 있다. 만주 시조 신화 참조.

2.2. 건국 이후

위에서도 말했듯, 운이 꽤 좋은 나라[19]였는데, 천명제 누르하치에 이어서 숭덕제, 산해관을 넘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순치제(順治帝),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 등 유능한 황제들이 몇 명씩이나 연달아, 그것도 엄청나게 오랫동안 통치를 하여[20] 동아시아는 물론 주변 아시아 세계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동방으로 계속적으로 침략해오던 러시아군과 강온 정책을 번갈아 구사하며 끝내 국경선을 확정했고, 서방과의 접촉도 점점 더 활발해졌다. 중국이 티베트 위구르, 내몽골, 만주와 현재 러시아로 넘어간 투바, 연해주를 확실하게 지배에 넣은 것도 이때였다.[21]
주요 사건
1618년 국호를 '대금'으로 개칭
1619년 사르후 전투 대승, 여진 통일
1621년 요양 천도
1625년 심양 천도
1626년 영원성 전투 패배
1629년 북경 광덕문 전투
1636년 대청 선포, 병자호란
1639년 이자성과 장헌충 재봉기
1640년 – 1642년 송산–금주 전투 승리
1644년 입관, 자금성 함락
1645년 양주 공방전, 남경 입성
1646년 이자성, 장헌충의 난 종결
1652년 - 1659년 이정국, 정성공 복명 운동
1654년, 1658년 1,2차 나선정벌
1659년 정성공의 남경 공격, 실패
1662년 남명 멸망
1663년 사천 무산 전투
1660년 – 1799년 문자의 옥
1673년 – 1681년 삼번의 난
1683년 대만 원정, 정씨 왕조 멸망
1684년 해금 철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711년 지정은제 시행
1716년 강희자전 완성
1724년 양렴은제 시행
1726년 개토귀류 시작
1727년 캬흐타 조약 체결
1732년 군기처 설치
1735년 명사 간행, 공포
1747년 원명원 건설
1755년 - 1758년 준가르 원정
1760년
공행 설치
1782년
사고전서 완성
1793년
메카트니 사절단, 건륭제 알현
1796년 – 1805년
백련교도의 난
1813년
천리교 의 난
1816년
아머스트 사절단, 쫓겨남
1838년 - 1839년
임칙서, 광저우에서 아편 단속
1840년 – 1842년
제1차 아편전쟁, 난징 조약
1844년
황포 조약(프), 망하 조약(미) 체결
1851년 – 1864년
태평천국 운동
1853년 - 1868년
염군의 반란
1856년 – 1860년
에로호 사건, 제2차 아편전쟁
1858년
아이훈 조약, 톈진 조약 체결
1860년
영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 베이징 조약 체결
1862년 - 1895년
양무운동 전개
1863년
상해 공공 조계 설정
1864년 - 1877년 야쿱 벡, 위구르 점령

1871년 러시아, 이리 계곡 점령
1874년 일본, 대만 출병
1881년 이리 조약 체결
1884년 영국, 티베트 침략
1884년 – 1885년 청불전쟁
1894년 – 1895년 청일전쟁
1897년 독일, 칭다오 점령 1899년 조차 (~ 1919년)
1898년 변법자강운동 전개, 무술 정변
1899년 – 1901년 의화단 운동
1900년 북경 점령
1901년 신축조약 체결, 신정 지시
1911년 무창 봉기, 신해혁명
1912년 멸망, 중화민국 건립
전성기의 청은 지금의 중국보다도 더욱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청말 민초 이래 캐발살내어 지금 중국이 다시금 확보하고 있는 내몽골, 티베트 위구르만이 아니라 연해주 즉 외만주와 외몽골 전체, 더불어 대만까지 전부 청의 영토였다. 중국 역사상 이보다 영토가 넓었던 경우는 몽골 제국 뿐인데 이쪽은 지도상의 크기는 넘사벽이지만 여러 칸국으로 갈라진 것도 있고, 통치가 비교적 느슨하기도 해서 몽골 제국 중 중국을 다스린 원나라로만 한정한다면 청나라가 더 크고 실효 지배력 또한 청나라가 우세했다. 이렇게 영토가 넓었던 만큼 단순한 한만국가이라기엔 보다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 그래서 지역 및 민족마다 청 군주의 이미지가 다양했는데 만주에선 금나라를 계승한 한으로, 북방의 몽골에선 원나라를 계승한 칸으로, 중원과 남방에선 명나라를 계승한 천자로, 티베트에선 불법을 수호하는 전륜성왕으로, 위구르에선 이슬람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 키메라의 국가"이라고도 한다. 아시아 동군연합의 끝판왕이다.

그러나 문명을 볼 때 학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제조 금지 등으로 비난을 받는 편이다. 청이 유럽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크게 보아 명나라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가경 4년에 명나라 화포를 개조하니 성능이 더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해전에서도 청나라만큼 어이없게 패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22] 당시 만주인들을 봐도 문명을 이끄는 데 아무래도 유목민의 기풍과 문화가 있어서 학문에 불리하게 작용한 면이 있다. [23] 사실 세계의 유목민 왕조들은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른 경우들이 매우 많다. 일단 정주 국가들의 경우 지배층들이 문명을 주도하며 여러 가지 것들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는데 [24], 유목민들은 정작 지배층인 유목민들이 직접 문물 발달에 기여하는 게 적은 편이었다. [25] 보통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여 교류를 확산시켜 기여를 했다거나 하는 간접적인 식이고 유목민들이 직접 과학 기술 혹은 수학과 관련된 서적을 쓰거나 하는 일들은 적었다. [26] 아무래도 지배층들이 문명에 직접 기여하는 것들이 적으면서 밑에 피지배층들을 착취해서 그 열매를 가져가니 피지배 민족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잠재력을 깎아먹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27]

다중 수도 체제가 있어서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 - 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묵던(지금의 선양),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숭배하는 문수 보살이 강림한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총 3개의 수도를 운용했다. 1762년 건륭제가 1년 중 자금성(紫禁城)에서 머문 시간은 1/3에 불과했다.

한편 대외 관계에 있어 주목할 만한 점으로, 청이 러시아 제국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에는 한자로 쓰인 문건이 전혀 없고, 오직 만주어와 러시아어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관련기사 청조(淸朝)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기록에 만주어를 원본으로 삼은 것에 대해 국내 학자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내용을 분석해 가설을 제시한 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이하 청 - 러 조약)은 청과 러시아가 서로 대등한 위치를 가지고 조약을 맺은 것인데, 많은 이들이 아편 전쟁 후의 '불평등 조약 체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평등 조약'인 것에 주목하지 청 - 러 조약이 왜 만주어로 기록되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청 - 러 조약의 기록을 만주어로 남겼냐 하면, 청 - 러 조약이 평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중국적 화이(華夷)개념에 따르면 '오랑캐'인 러시아와 맺은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야 한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이 상위, 러시아가 하위인 조약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준가르 몽골 문제의 해결에 쫓기던 청나라는 러시아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할 수 없었고 [28], 결국 청 - 러 조약은 평등 조약이 되었다. [29] 즉, 중국적 중화 세계 개념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조약이 돼 버린 것. 이 때문에 청 - 러 조약의 기록은 중국어, 즉 한문 기록이 전무하고 만주어로만 기록되었으며, 조약의 체결 자체에도 한족 관리는 참여하지 못했다. 청 - 러 조약이 만주어로 기록되어 전해진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 이는 청조가 청 - 러 조약에 대한 한문 기록에서는 '대등'이나 '평등'을 연상케하는 구절이나 어휘를 없애거나 모호하게 만든 것에서도 입증된다.[30]

일단 만주족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 나라이며, 초기에 들어왔을 땐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특히 강남 쪽에서는 사람이 나날이 잔뜩 죽어 나갔다. 지금의 양저우(揚州)나 쑤저우(蘇州) 등이 있는 지방에서는 수십만 단위로 대학살이 저질러졌다고 한다. 흠좀무. 특히 만주족이 강요한 변발 [31]은 19세기 말 조선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켜[32] 강남은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양저우 대학살은 양주십일 이라고 하여 김용 무협소설 녹정기에서도 나온다.

링크의 3) 항목을 읽으면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각지에서 어마어마한 인구가 학살당해서 명청 교체기 대학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중국 인구사와 청나라 시기 인구를 생각하면 5,000만이라는 수치는 매우 과장이 되어 있다. 근거도 빈약하며 주장하는 사람들도 신뢰성에 의심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리적으로 솔직히 만주족이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한 시대를 능가하는 학살 수준에 한족의 인구의 증감을 봐도 가능성이 별로 없다. 인구 조사 결과가 적은 것은 건륭제 시기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반란과 그로 인한 만주족 행정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 중국 역사서에선 전란에 휩싸이고 나라가 어지러운 난세가 펼쳐지면 기록되는 호구 수가 격감했다가 상황이 안정되면 상식을 뛰어넘는 속도로 인구가 회복되는데, 이건 그만큼 사람이 많이 죽고 태어났다기보다 호구 조사 시 실제 호구수에서 누락되는 인구 수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대학살이 벌어진 건 확실하다.

이 모든 저항을 짓밟은 이후 간신히 굴복한 한족에게 융화 정책을 펴 한족에 대한 차별을 계속해서 없애나가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하였으며, 그 뒤에도 저항이 있긴 했는데 훌륭한 황제들이 나와 당근과 채찍으로 차례차례 강온 양면술을 써가며 통치해나갔다. 다만 변발( 황비홍 머리(...))만은 철저히 지키게 했다. 이는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의 습관을 인정해줄 필요는 있지만 거기에 묻혀서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며 [33] 비록 언어나 문화 면에서는 동화를 면치 못했으나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종족은 청나라 말기에도 명확하게 구분되었을 정도로 잘 보존되었다.

청나라가 한족문화를 받아들이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통치에 필요하기 때문이지, 만한차별정책이 폐지된건 아니었다. 입관 후 하급 행정구역인 부나 현의 수장은 한족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인구 때문에 한족들에게 맡겼으나 상위 행정구역을 관할하는 총독[34]과 순무[35]는 대부분 만주족이나 몽골족이었으며, 어쩌다 임명되는 한족 총독과 순무도 한군팔기 소속이었다. 중앙정부의 경우는 아예 초창기에는 만주족, 몽골족, 한군기인[36]만이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만한병용제[37]가 시행된 뒤에는 내각대학사, 6부상서, 6부시랑, 군기대신 등의 직책에 같은 수의 만주족[38]과 한족을 따로 임명하였다. 물론 처음 한족대신을 임명했을 때 같은 직책이라 하더라도 만주족이 한족보다 품계가 더 높았다가 나중에 동급으로 조정되지만, 만한차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애초에 인구비율을 보면 만한병용제부터가 한족에 대한 차별이었다. 거기다 청나라 황제들은 한족들 앞에서는 만주족과 한족은 모두 짐의 자식이라고 립서비스를 하면서 만주족들만 있을 때는 한족들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또한 황후는 만주족이어야 했으며, 한족 후궁의 자식들은 황위계승에서 배제되었다.[39] 거기다 한족은 군대와 관련된 무관으로 임용될 수 없었다. 무관직책이 한족에게 개방된 때는 태평천국 운동 때에 가서였는데 당시 팔기군의 군사력이 엄청나게 퇴보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었으며, 이 때도 만주족 대신들의 반발이 심했다. 청조 말기 한족(漢族)들에 의해 사용된 '멸청흥한(滅淸興漢, 청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킴)'이니 '부청멸양(扶淸滅洋, 청을 돕고 서양인을 멸함)'이니 하는 구호에서도 한족과 청(만주족)은 청 말기까지 엄격히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2.3. 멸망

파일:attachment/partition_ching.jpg
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40] 르 프티 주르날, 1898년

청은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제조 금지 등으로 발전이 거의 없었다. 유럽 문명은 계속 발전을 하고 있는데 청은 유럽 문물을 수입하기 전에 보유한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명나라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41] 그리고 기이할 정도의 말타기와 활쏘기에 대한 집착 혹은 자체적인 화기 연구 금지[42] 등으로 내부 역량을 떨어뜨렸다.[43] 주요 무력 기반이었던 팔기군 역시 금나라의 맹안모극이 쇠퇴하던 테크트리[44]를 따라서 그대로 쇠퇴한 지 오래였다. 게다가 그 문제는 무려 전성기라는 강희제 때부터 시작된 현상이었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군사력이 쇠퇴했음이 드러남과 함께 서구 열강에게 쥐어터질 만큼 터지고, 빼앗길 만큼 뺏기고, 심지어, 무시하던 일본에게까지 처절하게 관광을 타는 굴욕을 당하는 등의 외세의 침략이 원인이었다. 결국 청나라는 거의 반쯤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무렵 지방에선 군벌들이 따로 세력을 키우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신사조가 널리 퍼져서 더 이상 과거처럼 통치를 할 수 없게 변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끝없는 굴욕으로 청 황실의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원래부터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으로 분리된 민족 구성이었기 때문에 한족 지식인들은 민족주의 사상에 따라서 '청나라' 자체마저도 일종의 '외래 민족 침략 세력'으로 보고 만주족의 청 왕조로부터 한족 민중의 독립을 추구한다는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이것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1911년에 신해혁명으로 산하의 지방 정부들이 독립을 선언하여 청 왕조는 지방 통제권을 잃고 전국이 한시에 공중 분해되면서 파멸을 선고받았다. 1912년 이를 진압하라고 보낸 총사령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총구를 돌려 청 왕조를 폐지시켜 버림으로써 1912년 멸망하고 말았다. 오삼계 2세?? 그렇게 청나라는 한족의 투항으로 흥했다가 한족의 투항으로 망했다.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는 청조 멸망 이후에도 중화민국 정부와 체결한 "청실 우대 조건"에 따라 자금성에 잔류하였는데( 청나라 소조정),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실 우대 조건>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 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2.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세금 사백만 냥을 사용하며, 이후 신 화폐가 주조되면 사백만 원이 중화민국에 의해 지급된다.
3.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자금성에 잠정적으로 계속 거주하며, 이후 이화원으로 옮기게 된다. 시위(侍衛)하는 사람 등은 계속 쓸 수 있다
4.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그 종묘와 능침에 대해 영구히 제사를 받들며, 중화민국은 적절히 호위하는 병사를 두어 그것을 신중히 보호한다.
5. 덕종( 광서제)의 능이 아직 완성이 안 되었으므로, 제도에 맞게 수리하며 옛 예법에 맞게 한다. 그 경비는 중화민국이 지출한다.
6. 궁중에서 고용하는 집사 인원은 계속 유지되나, 이후에는 환관은 더 고용할 수 없다.
7.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은 중화민국이 특별 보호한다.
8. 현재 보유한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에 편제되며, 그 수 및 녹봉은 예전과 같이 한다.

<청 황족 대우 조건>
1. 청나라 왕공 작위는 예전과 같이 유지된다.
2. 청 황족은 중화민국 국가의 공권과 사권에 대해서는 보통 국민과 같다.
3. 청 황족의 사유 재산 일체는 보호된다.
4. 청 황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
( 각족 대우 조건은 생략)

이 조건으로 푸이는 자금성 안에서는 청 황제로서 행세할 수 있었고, 자금성 내에서는 계속 선통 연호가(음력과 함께) 쓰였다. 이후 청나라 황족들과 복벽파들이 복벽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는 1914년 11월 23일 복병 정치 징치령을 발표해 복벽파들을 탄압했다. 그리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단행함으로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어버렸다(...). 이후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으며 전국 각지가 군벌들이 할거하는 개판으로 떨어진 와중에 복벽파 장쉰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훈복벽을 단행함으로 1917년 7월 10여일 동안 청이 부활하기도 했으나 돤치루이가 이를 진압하면서 복벽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북양 군벌 정부에 실질적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북양 군벌 정부는 청실 우대 조건을 지키는 데 별 관심이 없었고, 군주제를 혐오하던 군벌 펑위샹 2차 직봉전쟁 와중에 1924년 11월 5일 핍궁사건을 일으키면서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1924년 11월 5일에 청실 우대 조건이 수정되면서 사실상 청 황제 존호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부의는 천진에 도착한 이후부터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31년 11월에 장제스는 푸이가 톈진에 남는다면 청실 우대 조건을 회복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도이하라 겐지가 획책한 천진 사변을 비롯한 수차례의 암살 협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푸이는 거절한다. 게다가 북벌군이 1928년 북평을 점령한 다음에 장쭝창의 부하인 손전영이 국민혁명군에 투항하면서 벌인 동릉 도굴 사건이 처벌당하긴커녕 오히려 방조되었고 서태후의 능묘에서 나온 야명주 쑹메이링의 신발을 장식하는데 쓰였단 소문에 푸이는 남경 정부에 완전히 학을 뗐다.

결국 그 달 10일에 푸이는 만주로 가게 되고, 이듬해(1932년)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 만주국의 황제가 되기에 이른다. 일본은 만주국이 청의 후신이라고 선전했지만, 현실은 일제의 괴뢰국이었다.

3. 강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0px-Empire_of_the_Great_Qing_%28orthographic_projection%29.svg.png
[45]

일반적으로 알려진 청의 강역.[46] 그러나 이 강역은 청의 최대 영토는 아니다. 러시아에게는 연해주, 이리 지역(일리강 유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영국에게 홍콩을 상실한 1896년의 지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일본 제국에게 타이완 섬도 할양하였다. 현재의 중화 인민 공화국 + 몽골(외몽골)+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을 포함하는 영역으로 현재 중국의 강역보다 훨씬 더 넓었으며 이것은 중국을 지배한 역대 국가들 중 두번째로 넓고 유럽대륙(혹은 유럽 아대륙)으로 분류되는 곳보다 더 넓은 면적이다.[47]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Qing_Dynasty_1911.jpg

이 지도는 청나라의 최대 강역과 근대적 조약을 통해 확정한 영토를 표시한 영역을 표시한 지도이다. 원본이 올라와있는 사이트로 들어가면 더 큰 것을 볼 수 있다. 단 사할린[48][49]과 북해도, 쿠릴, 우다[50] 강 주변 등은 신빙성이 낮다. [51] 물론 하바로프스크 등 북만주는 네르친스크 조약의 결과 중국이 차지한 것이 맞는 엄연한 청의 영토였다. 연해주의 경우는 원래부터 함경도와 함께 만주족의 발상지라서 후금 시절부터 청나라가 차지해 왔고 봉금 정책으로 인해 외만주라 부르며 한족의 출입을 통제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4px-Map_of_Qing_dynasty_18c.svg.png

사할린이 청의 영토에서 제외된 지도이다.

4. 문화

이 시대의 문학 작품 중에는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명하다. 중국 본토에서는 삼국지보다 더 유명하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연구자가 많은 소설이라고 한다.

오늘날 베이징에 남아 있는 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물 중 많은 것들이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화원이 대표적이다.

청 황가의 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의 한국식 한자 발음이 애신각라이고, 스스로 조상을 신라로 꼽았기 때문에 신라 왕조와 연관지어 만주족도 원래는 신라인과 같은 뿌리가 아니냐는 물음도 있으나, 애신각라는 만주어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를 빌려서 가차한 것일 뿐이어서 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여기에는 만주족의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썩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식의 성씨 본관을 떠올리면 쉽다.[52] 만약 고대 로마에 관심이 있었다면 로마인의 이름을 생각하면 상당히 정확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즉 로마인 이름에서 세 번째 이름과 두 번째 이름의 관계와 같다.[53]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54] 아이신은 만주어로 금(金, 쇠가 아니다.)라는 뜻인데, 만주족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金)인 것을 생각하자.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 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의 경우에는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참고로 '신라' 또한 우리말인 '사로' 혹은 '서라벌' 등의 음차로, 되도록 뜻이 좋은 한자를 쓰려다 보니 부르게 된 것이다. 신라 = 사로 = 서라벌은 모두 같은 말을 다른 한자로 썼을 뿐인데, 실제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족 우월주의자들은 청나라를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55] 청나라 전통 복장이나 헤어 스타일을 경멸하고 명나라까지의 전통이 진짜 중국이다라고 생각하며, 제국주의 시대 중국이 근대화에 진입하지 못하고 열강들의 능욕을 당한 것도 만주족의 통치 때문이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현재 중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명이 아닌 청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이민족의 왕조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청 후기의 황제들( 도광제부터)을 보면, 초기 황제들과 달리 궁중 생활만 해서 그런지 대체로 얄팍한 체형에 심지어 대부분 단명했다. 또한 청의 12명의 황제 중 5명[56]이 10살이 되기 전에 황제로 즉위했다.

5. 상징

5.1. 국기

파일:청나라 국기.png

파일:청나라 국기2.png

청나라의 국기.

국기의 이름은 황룡기(黃龍旗)이며 1889년부터 신해혁명( 1912년) 때까지 사용되었다.

황룡기의 바탕색인 노란색은 중국 황제의 상징 색이며, 용은 청나라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이는 곧 '짐이 곧 국가다"라는 인식을 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원래 황룡기는 사각이 아니라 삼각이었다. 양무운동 당시 청나라의 정식 국기가 필요했는데, 권력자인 서태후의 결정으로 1862년 10월 17일 청나라의 국기가 삼각의 황룡기로 결정 되었다가 1889년 사각의 황룡기로 바뀐 것이다.

5.2. 국가(國歌)

국가는 공금구(鞏金甌)로, 견고하게 빛나는 상배라는 뜻이다. 1911년에 제정되었으나 청나라가 1년 후에 망해버렸다(...)

반주 + 가사 버전


반주 버전
가사 독음 의미
鞏金甌(공금구) Gǒng jīn'ōu 궁 진어우 국토를 금잔[57]처럼 단단히 하고
承天幬(승천주) Chéng tiānchóu 청 톈처우 하늘의 덮임을 받아들이라[58]
民物欣鳧藻(민물흔부조) Mínwù xīn fúzǎo 민우 신 푸짜오 만물 백성들은 물 속에서 장난치는 오리들처럼 기뻐하라.
喜同胞(희동포) Xǐ tóngbāo 시 퉁바오 동포를 기쁘게 마주하며,
淸時幸遭(청시행조) Qīng shí xìngzāo 칭 스 싱짜오 태평성대에 행복하니,
眞熈皞(진희호) Zhēn xī hào 전 시 하오 모두가 화목하리.
帝國蒼穹保(제국창궁보) Dìguó cāngqióng bǎo 디궈 창충 바오 제국은 하늘의 보우[59]를 입는다.
天高高(천고고) Tiān gāogāo 톈 가오가오 하늘을 날로 높아가고,
海滔滔(해도도) Hǎi tāotāo 하이 타오타오 바다는 끝없이 세차게 흐른다.

6. 역대 황제

  • 추존 황제는 제외된다.
  • 시호는 각주로 병기하되 만주식과 중국식의 순서로 한다.
  • 한호는 만주식 군주 칭호, 칸호는 몽골식 군주 칭호이며 연호는 00제로 알려진 중국식을 먼저 쓰고 만주식을 뒤에 쓴다. 세조 때부터는 한호가 연호 + 한(ex: 순치제는 이지슌 다산 한, 강희제는 얼허 타이핀 한)의 형태로 나타나므로 생략한다.
  • 국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는 생략한다.

6.1. 국호가 후금이었던 시기

대수 묘호 연호 시호 한호 칸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01 태조(太祖) 천명(天命, 1616년 ~ 1626년)[60] [61] [62] - 누르하치(努爾合赤) 1616년 2월 17일 1626년 9월 30일 10년 225일 복릉(福陵)
02 태종(太宗) 천총(天總, 1627년 ~ 1636년 3월)[63] [64] [65] [66] 홍타이지(皇太極) 1626년 10월 20일 1636년 5월 15일 9년 208일 소릉(昭陵)

6.2. 국호를 청으로 변경한 이후

대수 묘호 연호 시호 칸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02 태종
(太宗)
숭덕(崇德, 1636년 4월 ~ 1643년)[67] [68] [69] 홍타이지(皇太極) 1636년 5월 15일 1643년 9월 21일 7년 129일 소릉(昭陵)
섭정 성종
(成宗)
- [70] [71] - 도르곤(多爾袞) 1643년 1650년 14년 -
03 세조
(世祖)
순치(順治, 1644년 ~ 1661년)[72] [73] [74] 푸린(福臨) 1643년 10월 8일 1661년 2월 5일 17년 120일 효릉(孝陵)
04 성조
(聖祖)
강희(康熙, 1662년 ~ 1722년)[75] [76] [77] 셴예(玄燁) 1661년 2월 5일 1722년 12월 20일 61년 318일 경릉(景陵)
05 세종
(世宗)
옹정(雍正, 1723년 ~ 1735년)[78] [79] [80] 인전(胤禛) 1722년 12월 27일 1735년 10월 8일 12년 285일 태릉(泰陵)
06 고종
(高宗)
건륭(乾隆, 1735년 ~ 1795년)[81] [82] [83] 훙리(弘曆) 1735년 10월 8일 1796년 2월 9일 60년 124일 유릉(裕陵)
07 인종
(仁宗)
가경(嘉慶, 1796년 ~ 1820년)[84] [85] [86] 용얀(顒琰)[87] 1795년 2월 9일 1820년 9월 2일 24년 206일 창릉(昌陵)
08 선종
(宣宗)
도광(道光, 1821년 ~ 1850년)[88] [89] [90] 민닝(旻寧)[91] 1820년 10월 3일 1850년 2월 25일 29년 145일 모릉(慕陵)
09 문종
(文宗)
함풍(咸豊, 1851년 ~ 1861년 7월)[92] [93] [94] 이주(奕詝) 1850년 3월 9일 1861년 8월 22일 11년 166일 정릉(定陵)
10 목종
(穆宗)
동치(同治, 1862년 ~ 1874년)[95] [96] [97] 자이슌(載淳) 1861년 11월 11일 1875년 1월 12일 13년 62일 혜릉(惠陵)
11 덕종
(德宗)
광서(光緖, 1875년 ~ 1908년)[98] [99] [100] 자이티얀(載湉) 1875년 2월 25일 1908년
11월 14일
33년 263일 숭릉(崇陵)
12 공종
(恭宗)
선통(宣統, 1908년 ~ 1912년), (1917년)[101] -[102] [103] 푸이(溥儀) [104] 1908년 12월 2일 1912년 2월 12일 3년 72일 없음 [105]

7. 종합

대수 묘호 연호 시호 칸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 시조
(始祖)
- - - 부쿠리용숀
(布庫哩雍順)
? ? ? -
- 조조
(肇祖)
- [106] - 먼터무
(孟特穆)
1405년 1433년 38년 -
- - - [107] - 충샨
(充善)
1433년 1467년 70년 -
- - - [108] - 톨로
(妥羅)
1467년 1481년 28년 -
- - - [109] - 시버오치피양구
(錫寶齊篇古)
1481년 1522년 43년 -
- 흥조
(興祖)
- [110] - 푸만(福滿) 1522년 1542년 24년 흥경릉
(興景陵)
- 경조
(景祖)
- [111] - 기오창가
(覺昌安)
1542년 1571년 33년 -
- 현조
(顯祖)
- [112] - 탁시
(塔克世)
1571년 1583년 14년 흥릉(興陵)
- - - - - 누르하치
(努爾合赤)
1583년 1616년 33년 -
01 태조
(太祖)
천명
(天命, 1616년 ~ 1626년)[113]
[114] [115] 누르하치
(努爾合赤)
1616년 2월 17일 1626년 9월 30일 10년 225일 복릉(福陵)
- - 천총
(天總, 1627년 ~ 1636년 3월)[116]
- - 홍타이지
(皇太極)
1626년 10월 20일 1643년 9월
21일
9년 208일 -
02 태종
(太宗)
숭덕
(崇德, 1636년 4월 ~ 1643년)[117]
[118] [119] 홍타이지
(皇太極)
1626년 9월 30일 1636년 5월 15일 7년 129일 소릉(昭陵)
섭정 성종
(成宗)
- [120] - 도르곤(多爾袞) 1643년 1650년 14년 -
03 세조
(世祖)
순치
(順治, 1644년 ~ 1661년)[121]
[122] [123] 푸린(福臨) 1643년 10월 8일 1661년 2월 5일 17년 120일 효릉(孝陵)
04 성조
(聖祖)
강희
(康熙, 1662년 ~ 1722년)[124]
[125] [126] 셴예(玄燁) 1661년 2월 5일 1722년 12월 20일 61년 318일 경릉(景陵)
05 세종
(世宗)
옹정
(雍正, 1723년 ~ 1735년)[127]
[128] [129] 인전(胤禛) 1722년 12월 27일 1735년 10월 8일 12년 285일 태릉(泰陵)
06 고종
(高宗)
건륭
(乾隆, 1735년 ~ 1795년)[130]
[131] [132] 훙리(弘曆) 1735년 10월 8일 1796년 2월 9일 60년 124일 유릉(裕陵)
07 인종
(仁宗)
가경
(嘉慶, 1796년 ~ 1820년)[133]
[134] [135] 용얀(顒琰)[136] 1795년 2월 9일 1820년 9월 2일 24년 206일 창릉(昌陵)
08 선종
(宣宗)
도광
(道光, 1821년 ~ 1850년)[137]
[138] [139] 민닝(旻寧)[140] 1820년 10월 3일 1850년 2월 25일 29년 145일 모릉(慕陵)
09 문종
(文宗)
함풍
(咸豊, 1851년 ~ 1861년 7월)[141]
[142] [143] 이주(奕詝) 1850년 3월 9일 1861년 8월 22일 11년 166일 정릉(定陵)
10 목종
(穆宗)
동치
(同治, 1862년 ~ 1874년)[144]
[145] [146] 자이슌(載淳) 1861년 11월 11일 1875년 1월 12일 13년 62일 혜릉(惠陵)
11 덕종
(德宗)
광서
(光緖, 1875년 ~ 1908년) [147]
[148] [149] 자이티얀
(載湉)
1875년 2월 25일 1908년 11월 14일 33년 263일 숭릉(崇陵)
12 공종
(恭宗)
선통
(宣統, 1908년 ~ 1912년),
(1917년) [150]
-[151] [152] 푸이(溥儀) [153] 1908년 12월 2일 1912년 2월 12일 3년 72일 없음 [154]

7.1. 항렬

강희제 시대에 아들 대의 항렬자가 윤(胤: 또는 允)으로 정해졌고, 그것은 옹정제의 휘 윤진(胤禛)에서 나타난다. 손자 항렬은 홍(弘: 건륭제), 증손자 항렬은 영(永) 또는 옹(顒: 가경제)로 정해졌다. 건륭제 대에 와서 손자대 항렬로 면(綿) 또는 민(旻: 도광제)이, 증손자대 항렬로 혁(奕: 함풍제), 고손자대 항렬로 재(載: 동치제, 광서제)가 정해지고, 도광제 대에 추가로 부(溥: 선통제), 육(毓), 항(恒), 계(啟)가, 함풍제 대에 그에 덧붙여 도(燾), 개(闓), 증(增), 기(祺)가 추가되었다. 1938년에 애신각라 씨 족보를 수속(修續)함과 동시에 부의는 경지개서(敬志開瑞),석영원성(錫英源盛),정조무상(正兆懋祥)의 12글자를 더 추가했다.

청나라 종법상 1개 항렬에 1명의 황제가 원칙이어서 청나라 말기에 동치제 다음으로 항렬이 부(傅)인 사람이 황위에 올라야 했지만, 동치제와 항렬이 같은 광서제가 서태후에 의해 동치제 다음 황제로 옹립되면서 이 원칙이 깨지게 된다.

7.2. 계보

추존 황제
현조 탁시
1.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2.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3. 아이신기오로
풀린
4. 아이신기오로
셴예
5. 아이신기오로
인전
6. 아이신기오로
훙리
7. 아이신기오로
용얀
8. 아이신기오로
민닝
9. 아이신기오로
이주
혁현 혁종
10. 아이신기오로
자이슌
11. 아이신기오로
자이티얀
재풍 재의
12. 아이신기오로
푸이
아이신기오로
푸쥔

7.3.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이름 재위 기간[155] 능호 비고
- 충의신무관성대제
(忠義神武關聖大帝)
충의신무령우인용위현개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開聖大帝)
관우(關羽) - 관릉(關陵) 함풍제 추존,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시조(始祖) - 부쿠리용숀
(布庫哩雍順)
- - 태조 추숭, 만주족 시조
조조(肇祖) 원황제(原皇帝) 먼터무(孟特穆) 1405년 ~ 1433년 - 태조 추숭, 태조의 6대조
- 순황제(順皇帝) 충샨(充善) 1433년 ~ 1467년 - 태조 추숭, 태조의 5대조
- 흥황제(興皇帝) 톨로(妥羅) 1467년 ~ 1481년 - 태조 추숭, 태조의 4대조
- 정황제(正皇帝) 시버오치피양구
(錫寶齊篇古)
1481년 ~ 1522년 -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흥조(興祖) 직황제(直皇帝) 푸만(福滿) 1522년 ~ 1542년 -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경조(景祖) 익황제(翼皇帝) 기오창가(覺昌安) 1542년 ~ 1571년 -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현조(顯祖) 선황제(先皇帝) 탁시(塔克世) 1571년 ~ 1583년 흥릉(興陵) 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성종(成宗) 무덕수원광업정공안
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安
民立政誠敬義皇帝)
예충친왕
(睿忠親王)
도르곤(多爾袞) - - 세조 추숭, 태조의 14자
추후 삭탈

8. 대외 관계

8.1. 원(元)

원은 명나라에게 대도를 뺏기고 북쪽 몽골지역으로 물러가서 북원을 세웠다. 그 후로 명나라와 중국 지역을 빼앗기 위해 많은 전쟁을 벌였는데, 후금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가 되었을때 꽤나 우호적인 관계를 보였다.

청나라와 관계를 가진 건 북원이지만, 북원도 원의 일부이니 원이라 표칭.

8.2. 명(明)

명과는 후금 건국 당시부터 줄곧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명의 국력이 쇠하고 정정불안이 가속화하자 먼저 조선을 침공해 후방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명을 압박, 결국 이자성의 난을 계기로 명이 멸망하자 남진하여 명의 영토를 접수하였다. 이후 남명 정권이 토벌되면서 명과의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청 말기의 쑨원 같은 혁명가들이나 반청 복명 인사들은 청나라와 '중국(명)'의 관계를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마라타 연합이 무굴제국에 독립을 선포하듯이?

8.3. 조선

군신 관계 하나만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역사 관계로 보자면 좀 다르다.

처음에 이성계가 고려 변경에 살아서 고려인들이 이성계를 여진족 취급한 적도 있지만 정작 청의 추존 황제인 조조원황제 코론두란터무르와 같이 이성계의 부하였다. 세종대왕이 원래 여진족의 땅이었던 함길도 개척한 적도 있고 수시로 예방전쟁[156]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때는 수러 바투루가 조선에 대한 원한이 없다며 원군 파병을 제안했지만 선조는 건주의 제안을 거절했다.

광해군 때는 조선이 등거리 외교 노선을 지켜 상대적으로 적대감이 줄어들었으나 뒤이어 인조반정이 발생해 인조가 즉위하고, 숭명, 배청(排淸) 노선을 주장하는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여 조선에 공격적인 성향으로 돌아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이 일어난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오수창 교수 등에게 지적되었듯이 청 태종의 칭제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 측에서는 겉으로는 배금을 하는 듯하였으나 웬만한 청의 요구는 상당수 들어주었다.

결국 만주 지역의 대기근으로 인한 그나마 시도하려했던 농업 지역에 대한 대타격과, 50만 - 100만에서 최소 200만 - 250만까지 늘어난 청나라의 인구, 명과의 무역 중단으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써의 경제적 상황 속에서 여러 몽골 부족들을 굴복시키고, 요동 지역의 한족 등을 흡수하며 신장된 국력과 강경으로 실리를 찾으려던 관온인성황제는 결정적으로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에 대한 문제 때문에 결국 1627년, 1차로 정묘호란, 1636년, 인조의 선전교서, 칭제건원 행사에서 조선 춘신사와 회답사의 횡포로 2차적으로 병자호란을 일으켜 마침내 조선을 굴복시켰다. 그 결과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 봉림대군(효종)이 청으로 끌려가기도 했으며, 진원부원군, 서평부원군 한명욱, 정백창, 여이징, 정선흥 등 많은 사대부가와 백성들의 여인들이 끌려가기도 했으며 피로인들을 심심하면 철퇴로 치고 살육하기도 했다.[157][158]

사실 이때 청의 태도가 많이 무례하였는데 1636년 4월 11일, 압카이 수러 한이 제위에 오르고 대청을 선포하였을 때 축문과 표문에 일방적으로 조선을 정복 혹은 복종시키고 몽골을 통일했다는 내용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나덕헌[159], 이확 등의 사신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기도 했었다. 이런 청의 행패에 대하여 대사성 이식은 우리나라를 이국 운운하며 노예처럼 여기고 있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심지어 용골대, 범문정 등이 1차 심옥, 2차 심옥 등을 일으키거나 정명수가 영의정 이하 조선 고위 신료 11명을 참살 후 별연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니 초창기에는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청 초기에는 원나라가 100년 안에 망한 사례를 들며 오랑캐들은 100년 안에 하늘이 망하게 한다[160]는 내용이 있는 동몽선습[161]을 근거로 들어 많은 사람들이 청이 망할 날을 바라기도 했다.

이후 초기에는 과도한 수준의 공물을 요구하였지만 이것은 양국 관계가 호전되면서 많이 감소했다고 한다.

후에 즉위한 효종이 한때 청을 치겠다는 ' 북벌론(北伐論)'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효종이 40대의 짧은 나이로 승하했으며, 북벌의 실체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도리어 나선정벌에 보탬이 되기나 했지. 이후엔 명대와 같이 적대감이 희석되고 관계가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기회를 틈타 북벌 의논할 때도 있었다. 강희제가 만력제를 기리는 만동묘를 두고도 "조선은 우리가 망해도 또 제사를 지내줄 것 아니냐?"라고 쿨하게 대처한 것도 한 일례.

개화기에 들어서는 메이지 유신 뒤 세력 확장을 꾀하는 일본과 서구 열강을 배척하기 위해 조선과 접촉하는 일이 많아졌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사실상 과거의 조공국을 넘어선 속국, 식민지 취급을 하려고 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청군이 민씨 정권의 요청에 따라 김옥균 등 개화파와 일본군을 우정국에서 몰아내기도 하였고 그해 청불전쟁이 터지면서 청나라 군대 일부가 전쟁터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여 군대가 파병되었고, 이를 근거를 일본 역시 자국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에 참패한 청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1897년 고종 대한제국을 수립하며 기존의 조청 관계는 끝났다. 이후 1899년 한 - 청 통상 조약[162]을 체결함으로써 대등한 관계로 전환했고 의화단 사건이나 간도 문제 때문에 말이 많았으나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1904년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조선의 식민 지배를 약속받자 마침내 공식적으로 조선을 포기. 뒤이어 1910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경술국치, 일제강점기)가 되었고, 청 역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쇠퇴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1912년에 멸망하였다.

8.4. 일본

일본과는 막부 시절 및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특별히 눈에 띄는 관계가 없었으나[163], 메이지 유신 뒤 일본이 아시아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며 위협 세력으로 떠올랐다.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에 들어섰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양국이 군대를 파병함에 따라 갈등이 폭발, 청일전쟁이 발발해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다. 패전 결과 청은 일본에 타이완을 내주어야 했다.

반면에 극우 단체 흑룡회에서 손문의 흥중회, 중국 혁명 동맹회 등 혁명 단체를 대륙 침략 목적으로 신해혁명을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등, 결국엔 청이 멸망하여서 티베트, 위구르, 몽골 등 소수 민족들이 분리 독립을 시도하였다. 결국엔 외몽골은 독립을 성공했지만 내몽골, 위구르,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사실 외몽골도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한 케이스이며 몽골 인민 공화국은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었다.

1912년 청이 멸망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 대륙을 향한 세력 확대에 나선다. 그러나 청의 경우는 나라가 아니라 왕조만 망한 것이어서 바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어 일본의 팽창을 견제 했고 이후 만주사변으로 이어서 푸이를 끌어들여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건국케 한다.

이미 만주사변 이전 청일전쟁 이후 불법적으로 일본 경찰들을 만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왔다. #

8.5. 그 외

외몽골의 경우 1635년 몽골의 에제이 칸이 청 태종에게 칸의 칭호를 선양하면서 청나라에 복속, 청의 외몽골 지방이 된다. 그러나 청이 멸망한 뒤 외몽골은 독립을 추진. 복드 칸국으로 독립하고 1921년 다시 몽골 인민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물론 자력은 아니고 적백 내전 당시 소련군의 도움으로 독립했고 이후 소련의 속국이 된다. 반면 일찍이 원의 옥새를 바치며 만주족에게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은 계속 청과 호흡을 같이 하다 티베트와 함께 서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중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병력을 징집할 수 있게 된 한족들에게 일방적으로 병합을 당해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진다. 병자호란 때 한성을 약탈한 자들이 바로 이 내몽골 팔기군이다. 조선 왕조 실록에도 몽고병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 같은 사례들을 분석해보면 인구가 많은 국가들에 민족주의가 퍼질 경우 주변을 침공하거나 하는 걸로 봐서는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예지할 수 있는 일이었다.[164]

몽골족과의 관계에선 만몽 연합 정권을 내세웠고 실제로도 내몽골의 보르지긴(보르지기트) 일족은 황실의 외척으로서 황족의 권리를 누렸다. 그리고 청의 통치 영역이 아닌 외몽골의 할하 유목민은 회유책을 썼고, 청의 통치에 저항하던 오이라트인은 무력으로 응징해 버렸다. 그 외에 17세기에 러시아 남부로 이주했던 오이라트의 분파인 칼미크인의 일부는 러시아와의 불화로 인해 옛 준가르의 땅으로 돌아와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65]

본디 중원과 별 관련이 없던 동투르키스탄 티베트가 중국에 속하게 된 것 또한 청대의 일. 동투르키스탄의 경우 오이라트의 잔당인 준가르가 청의 지배를 피해 서쪽의 동투르키스탄으로 도망쳐 차가타이 칸국을 멸망시키고 칸국을 세워 청나라의 복속 시도에 계속 저항했다. 하지만 국력 차로 인해 준가르 칸국은 1757년 건륭제 때 멸망하였고 준가르는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 학살을 당한다. 청은 점령한 동투르키스탄에 새로 정복한 곳이란 뜻에서 '신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티베트의 경우 1717년 준가르 칸국이 티베트를 점령하자 1720년 강희제가 친청파 티베트군과 함께 원정군을 파견하여 준가르를 몰아낸 후 티베트를 복속시켰다. 청 말기 청이 쇠락하고 이 지역에서 반란이 계속 일어났음에도 청은 계속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결국 동투르키스탄과 티베트 모두 외몽골처럼 신해혁명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청에게서 독립하여 사실상 독립국처럼 행동했으나 1950년 중국을 평정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침공하여 중국의 지배 하에 든다. 그 후는 잘 아시다시피.

러시아는 중앙 아시아 일대를 두고 견제를 주고 받는 사이였다가 청말 연해주 등의 영토를 거하게 삥뜯겼으며 영국, 프랑스 등은 교역을 하러 왔으나 청은 교역에 별 관심도 없었고 교역이 확대되는 것도 원하지 않은 반면 영국에서는 은이 자꾸 청으로 흘러들어가 경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교역 문제로 점점 고조되어 가던 양측의 갈등은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동시대 남아시아 최대 제국이였던 무굴 제국과는 별 분쟁없이 무역만 하고 지냈다. 왜냐하면 이 두 국가 사이에 지구상에 가장 높은 산맥이 있어서(...).

9. 관련 문서

9.1. 기타

9.2. 주요 사건 (시대순)

9.3. 인물 (시대순)



[1] 신해 혁명으로 청나라 황실이 통치권을 잃은 시기. [2] 청나라 황실에 대한 우대가 완전히 끝나고 청나라 소조정이 없어진 시기. [3] 위구르나 티베트 등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원에 속하지 않는 별개의 영토다. 전통적으로 내려온 중원의 영역은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무슨 무슨 자치구", 또는 "무슨 무슨 자치주" 전부를 빼고 거기에 만주와 대만도 빼고 티베트의 영역인 칭하이 성과 쓰촨 성 서부, 그 밖에 윈난 성과 하이난 섬 정도를 빼면 넓은 의미의 중원이 된다. 좁은 의미는 황하 강 유역. 즉, 허난 성 등이라고 할 수 있다. [4] 1908년 청나라의 헌법인 흠정 헌법 대강이 발행되었으나 군주의 권력을 보장하는 내용이 많아 그냥 발행 이후에도 전제 군주제를 시행한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흠정 헌법 대강은 대한제국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와는 달리 대놓고 군주의 전제 왕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5] 회색선이 청나라의 최대영토, 빨간선은 현대 중국의 영토.다만 사할린이 청의 영토가 아닌 지도들 또한 존재하므로 사할린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6] 진시황제 이래 2000여 년간 (진시황제가 전국시대를 끝내고 진나라로 통일하면서 처음으로 황제라고 칭한 기원전 221년 이후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합해서 2133년. 이 기간 동안 국가 원수는 대부분 황제였다.) 이어진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 국가였다. [7] 통일 왕조 중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는 한나라이고 그 다음이 송나라이다. 다만 이 두 왕조는 중간에 왕조가 바뀌거나 황제가 잡혀가서 왕통이 한번 끊겼다. [8] 명목상 청나라의 후신을 칭한 만주국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었다. [9] 구룬은 국(國)이란 뜻의 만주어 독음이다. [10] 원나라 이전까지 대부분의 중국계 국가들은 춘추시대 당시의 각 국명에서 유래한 전통적 지명에서 나라 이름을 따왔다. [11] 다른 설로는 청나라의 만주어 원음인 다이칭(Daicing)이 몽골어로 전사(戰士)를 의미하며, 원래 국명이 '전사의 나라'를 뜻한다는 것이다. [12] 만주어 발음이며, 현대의 표준 중국어로는 '아이신줴루어'로 발음된다. [13] 중국의 황제+ 유목세계의 대칸 + 티베트의 차크라바르틴. [14] 서광계와 손원화 등은 화기를 발사할 때 필요한 거리 측량과 각도 정위에 관한 학문을 서구에서 배우고 있었고 총규, 총척 및 구도의의 사용 및 탄약 장전 기술을 개선한 훈련을 받았다. [15] 대표적인 것이 철심동체 주조법과 니형 주조법, 실랍법을 이용해 무게와 비용을 줄이고 내구도가 향상되어 더 많이 쏠 수 있게 된 정료 대장군으로 철심동체 주조법의 원리는 남북 전쟁 때 미군보다도 200년 빨랐다. [16] 하지만 명군과 후금군의 전투를 생각해보면 상당수가 총병일 명군을 상대로 하는 후금군은 최대 사정거리에서 깔짝깔짝 거리다가 기회 생기면 기동력을 이용해서 측면 공격하거나 여차하면 돌격 후 근접전을 벌였을 테니, 내구력을 늘린 신형 화기라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명군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려면 후장식 소총처럼 연사력이 크게 증가하거나 아니면 대기병 전투에 유리한 대형 총검 같은 것들이 발명되었어야 했다. [17] 실제로 '하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같은 말들이 많이 있고 당시 상황도 그래서 로또로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때를 기다리며 참고 또 참은 것도 능력은 능력이다. http://www.ziksir.com/ziksir/view/3001 [18] 환경 변화와 각종 재해로 쌀값이 7배나 오르는 현상이 무려 7년이나 계속되었고 우수하지 못한 지도자로 인하여 실업자와 반란이 속출하게 되었다. 수치적으로도 국력이 순식간에 반토막 나고 추락하는 걸 보면 아찔할 정도다. 식량난이 너무 심해서 나무 껍질을 벗겨 먹다가 심지어 썩은 송장을 먹었던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19]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인 불운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대륙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인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만주족이 영향력을 잃어 동화되었기 때문. 그러나 근대까지는 만주족의 정체성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결국 청이 멸망하면서 자신들만의 민족 국가를 못 세운 것이 큰 원인이다. [20] 건륭제는 중국의 많은 황제들 중 가장 장수(89세)했고, 가장 오래 황제 자리에 있었던(현직 60년 + 태상황 4년) 사람이다. 현직 황제로서 가장 오래 앉아있던 이는 강희제(61년)였다. [21] 내몽골은 연합 왕국의 측면도 있다. 황후들은 원칙적으로 순치제 때까지 내몽골의 몽골 부족에서 선발되었다. 또 황제가 몽골의 대칸을 겸했다.일종의 몽골족 포섭구. 티베트 달라이 라마는 황제의 스승으로 모셔졌기 때문에 티베트는 단순한 번국이라기엔 굉장히 격이 높았다. 외몽골, 티베트, 신강은 준가르를 멸망 시켜서 차지했다. [22]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iaoluo_Bay.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는 전근대 시절이었고, 독립하려고 온 힘을 유럽에 쏟던 30년 전쟁 와중이었다는 점에서 청이 만난 영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영국은 근대 국가였었고, 온 힘을 쏟는 데도 없었던 국가였다. 시대를 뛰어넘는 적이 아닌 네덜란드와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이나 다름없던 영국과의 비교는 무리가 있다. 단, 명나라가 몇몇 문명권과 다르게 유럽 세력과의 해전에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르네상스가 진행되면서 다른 문명들을 압도적인 속도로 능가하기 시작하고 있던 유럽 문물을 따라가고 있어서 그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청나라 지배층들이 비판을 받을 수는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의 기하학 원본 전 6권을 간행되어 중국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던 게 명나라 때의 일이고 군사학, 농업, 천문학 등에서의 서적이나 훈련 방법 등에서 유럽 문물이 의외로 이미 인정을 받고 있었다. (망조가 들어서 어이없게 날아가기는 했지만 명나라는 유럽식 훈련으로 수학과 과학이 동원된 사격술 등을 익힌 군대가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정예병으로 육성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청나라 때는 문자의 옥 때나 황제들이 자기들이 말을 타고 중국을 정복했다고 한족 지배층들이 하던 것들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던 면이 있어서 중국 학계가 상대적으로 망해가고 있었다. 후에도 만주족 지배층들은 서구화 능력도 그렇고 의지도 별로 없었으며 청나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했던 것들도 물론 있었지만 퇴보했던 것들도 있었다. [23] 환빠의 영향이 강할 때 나온 서적의 영향인지 희한하게도 만주족 황제나 지배층에 대해서 사서에도 쓰여진 단점을 지적하지 않고 장점만 거론되는 경향이 있는데, 만주족 황제나 지배층들도 딱히 초인적 존재는 아니라 명백히 단점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인구 증감 같은 양적인 것들을 단순하게 비교할 때도 시간 정도는 고려를 해야 한다. [24] 과거에는 지배층들이 보통 지금의 지식인 계층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문명 발달에도 생각보다 영향력이 엄청났고 수학처럼 문명을 발달시키는 것에 기여한 학자들을 찾아보면 지배층 출신들이 많다. 심지어 가난한(?) 것처럼 묘사되는 그리스 학자들도 자세히 알아보면 노예가 있었기 때문에 본인은 딱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불로소득 계층이 많았다. [25] 물론 공부를 하기 시작한 유목민들도 있었고 그러다 정주민이 되기도 했다. [26] 단, 그런 것들을 이용하는 건 생각보다 잘한 유목민들도 많았다. [27] 러시아처럼 자기들을 정복한 유목민들을 보고 고혈을 빨아먹는 거대한 기생충이니 어쩌고 하며 평가가 매우 부정적인 곳들도 있다. [28] 이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당시 러시아 차르이던 표트르 1세와 이복 누나 소피야 간의 대립으로 내부가 시끄러웠기 때문에 군사적으론 유리했으나 청에게 이전에 획득한 영토를 내주는 등 불리한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29] 이는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가 한족 왕조였다 해도( 이자성의 순나라가 제대로 성공하여 약 300년 가까이 이어진다든가, 삼번의 난이 성공한다든가, 아예 명나라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여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19세기까지 이어지는 등) 마찬가지였을 듯 싶다. 후대의 청나라에 비해 군사력이 한참 취약했기 때문에 단순한 비교는 곤란하지만 당장 한족 왕조인 북송 요나라, 서하와의 군사적 충돌 문제 탓에 다른 한족 왕조들에 비해(심지어 만주족의 청나라보다도)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중화 사상을 추구하지 못했으며(상국으로는 인정받긴 했다만) 명목상 북송의 제후국이었던 고려 또한 여요전쟁을 겪은 후부터는 명목상 북송과 요나라에 이중으로 사대하게 되었다. 만약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가 한족 왕조였다면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을 끝내고 평화 협정을 맺을 때 대외적으로는 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대내적으로는 중화 사상에 입각한 불평등 조약이라고 일종의 언론 플레이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30]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구범진, 민음사) 4장 청 제국과 러시아 편 참조. [31] 흔히 중국 무협 영화에 나오는 뒷머리만 남기고 앞머리만 미는 그런 변발이 아니다. 뒤통수에 동전 크기 만한 부분만 제외하고 모조리 밀어버리는 변발이다. 일명 금전서미. [32] 변발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이민족계 왕조들이 한족 주민들에게 변발을 강요한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으나 만주족이 강요한 금전서미는 한족들에게는 컬쳐 쇼크 그 자체였다. [33] 신민들이 송나라의 의복과 제도를 사용하는 것을 막지 못했던 금나라가 말기에 접어들면서 남송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체성을 상실했던 것을 보도록 하자. [34] 2개 이상의 성을 관할하는 직책으로 명나라 때는 비상설직이었으나 명 말기부터 상설화되었다. [35] 1개 성을 관할하는 직책으로 총독과 마찬가지로 명 초기에 비상설직으로 설치되어 말기부터 상설화되었다. [36] 한족 출신으로 팔기제도에 편입된 사람들 [37] 같은 수의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을 임명하는 제도 [38] 몽골족, 한군기인 포함 [39] 대표적으로 건륭제가 있다. 이 경우는 옹정제의 살아있는 아들들 중 건륭제가 유일한 만주족 후궁 소생이었다. [40] 왼쪽부터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 독일 제국 빌헬름 2세,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 프랑스 마리안느, 일본 제국 사무라이, 그 뒤엔 청의 이홍장을 묘사하였다. 당시 청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주요 열강들의 이권 경쟁을 풍자하고 있는데, 독일이 중국이라고 쓰인 파이에 칼을 꽂고 영국을 견제하고 있고 영국 역시 마찬가지로 독일을 견제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과 영국이 싸우는 그 틈에 목을 내밀고 큰 파이 조각이 어디 없는지 유심히 들여다 보고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역시 한 몫을 차지하기 위해 심각한 표정으로 파이를 들여다 보고있다. 뒤에선 이홍장이 열강들에게 중국이 유린당하는 걸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미국은 청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이권 침탈 경쟁에 이 그림에 묘사된 나라들에 비해서는 뒤늦게 합류했기 때문에 묘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41] 다만 만주족 입장에서 한족이 자력으로 주무기인 화기를 발전시키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았다는 관점도 있다. 결국 정복자로서 군림하는 이민족 왕조의 한계가 만주족과 더불어 한족 문명권의 군사적 역량까지 크게 떨어뜨린 셈이다. [42] 그런데 적어도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아주 어이없는 일로 보이진 않을 수도 있었다. 청조 황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강역이 이전 왕조인 명나라 시절보다 훨씬 넓어졌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고, 이렇게 이룬 대외적 확장 과정에서 팔기군을 비롯한 궁기병들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궁기병이 아직도 군사력의 척도나 다름없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는 절대로 옳은 판단은 아니었는데, 따지고 보면 청조의 확장 과정에서 복속 당한 위구르, 준가르, 차하르 등의 세력들 역시 궁기병이 군사적으로 주력을 차지하고 있는 세력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청나라의 궁기병이 주위의 다른 궁기병들에 비해 실력이 월등했을 뿐 스웜 전술의 무력화로 인한 군사적 패러다임 변화를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는데 청나라 입장에서는 이를 미리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 [43] 병법이 쓸모가 없다는 핑계로 한족이 병법을 논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무경총요 같은 것들을 살필 때, 중국 군사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병법가들이 중국의 과학 기술을 군사학에 도입하던 것을 생각하면 치명적인 실수다. 실제로 청나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체적으로 발전한 과학 기술들도 있었는데 그것들은 청군에 거의 도입이 되지 않고 있었다. [44] 만주족과 여진족 모두 사냥이나 군공이 아니라 고리대금이나 지주로서 얻는 수입에 의존하면서 만주족 팔기군과 맹안모극의 구성원들은 전투력이 사라지고 말았다. [45]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46] 현재 중화민국이 명목상 주장하는 영토이기도 하다. [47] 1위는 몽골 제국. 다만 몽골 제국을 중국을 지배한 원나라의 강역으로만 한정한다면 청나라가 원나라보다 조금 더 크다. [48] 시베리아 원주민의 역사 참고. 물론 사할린은 퉁구스 계열 민족들이 살던 섬이고 만주어로도 이름이 있을 정도로 인지도 높은 섬이었다. 당장 사할린과 맞닿은 연해주의 경우 진짜 청나라 땅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여진족만 살던 땅도 아니고 여진족은 이곳에 사는 여러 민족들 중 가장 적은 인원의 거주 인구를 가진 민족 중 하나라 이것만으론 북해도와 사할린 및 쿠릴이 청나라의 영토라는 것을 입증하기가 힘들다. 실제로 러시아와 일본의 사할린 공동 관리 조약에 아무런 말도 없던 것이 청이었다. [49] 사할린 섬의 만주어 이름은 '사할리얀 울라 앙가 하다' 였다. 이름의 뜻은 사할린 강 하구에 있는 험준한 돌덩어리이란 뜻. 사할리얀 울라의 뜻은 검은 강이란 뜻이다. 지금의 사할린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다. 물론 만주어 이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르'란 아이누어 이름도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일본인들이 사할린을 부르는 명칭인 가라후토가 유래한다. [50] 발음은 우다이다. 표기의 출처는 여기를 들어가 주석을 보자. 우다란 강이 부랴티야 공화국에도 있는데, 헷갈릴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이 우다 강은 하바로프스크 크라이에 있다. '디'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 보면 '다'의 모음 부분의 키릴 문자 표기는 'a'이며, 발음 역시 우리나라의 모음'ㅏ'에 대응될 수 있다. 키릴 문자 문서 참고. 따라서 우'다'강이 맞는 말이다. 영어권 국가에서도 우'다'라고 한다. 영어권 국가의 발음 방법은 구글 지도의 표기를 참고하였다. [51] 참고로 우다 강 주변은 조약 체결 당시 미결정지로 놔둔 영역이다. 그래도 괜찮았던 이유는 이곳에 오는 사람이 극도로 적어서... 이후 아이훈 조약이 맺어지면서 망했어요. [52] ' 전주 이씨' ' 김해 김씨' 이런 식으로 성을 쓰는 것. [53] 예를 들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경우 코르넬리우스는 씨족의 이름이고 술라가 가문의 이름이다. 코르넬리우스 씨족 자체는 고대 로마의 전체 집정관 중 40%를 차지했을 정도의 최고 명문이지만 정작 술라 가문은 몰락하여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어렸을 때 창녀의 돈을 받아 공부하기도 했다. [54] 그래서 수수기오로 등의 다른 기오로계 성씨도 있다. [55] 당연히 중국을 지배한 나라 중에 몽골족이 세운 제국도 싫어하는 건 덤이다. 괜히 "애산지후무중국(崖山之後無中國, 애산 전투(원vs송) 이후 중국은 없다.)"이란 말이 중국 역덕들 사이에서 도는 게 아니다. [56] 순치제, 강희제.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 이 중 광서제와 선통제의 경우 황위 계승 서열이 한참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실권력자인 서태후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해 즉위한 것이다. [57] 국토라는 뜻도 있음 [58] 承受로 해석. 帱은 휘장, 장막이라는 상반된 뜻을 가지고 있다. [59] 保佑: 보호와 도움. 애국가의 '하느님이 보우하사'의 그것. [60] 만주어로 압카이 풀링가, 몽골어로 텡그린 술데투. [61] 더르기 황제.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62] 거런 구룬버 우지러 겅기연 한. '모든 나라들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군주'라는 의미. [63] 만주어로 압카이 수러. [64] 겅시연 수 황제.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65] 언두링거 한. [66] 복다 카간. [67] 만주어로 워시훈 어르더뭉거, 몽골어로 데게데 에르뎀투. [68] 겅시연 수 황제 [69] 복다 카간. [70]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安民立政誠敬義皇帝) [71] 추후 삭탈. [72] 만주어로 이지슌 다산. [73] 얼덤부러 황제.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74] 아이비어 자사크 칸. [75] 만주어로 얼허 타이핀. [76] 고신 황제.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77] 엔크 암갈란 칸. [78] 만주어로 후왈리야순 톱 [79] 텀거툴러허 황제.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80] 나이랄트 토브 칸. [81] 만주어로 압카이 워이여허. [82] 용키양가 황제.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83] 텡게린 테트게센 칸. [84] 만주어로 사이쿵가 펑션. [85] 숭기연 황제.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86]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 [87] 永琰(영염)에서 顒琰(옹염)으로 바꿨다. [88] 만주어로 도로 얼덩거. [89] 상간 황제.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90] 터르 게렐트 칸. [91] 綿寧(면녕)에서 旻寧(민녕)으로 바꿨다. [92] 만주어로 굽시 얼기영거. [93] 일러투 황제.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94] 투기멜 엘베그트 칸. [95] 만주어로 요오닌가 다산. [96] 필링가 황제.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97] 부린투 자사그치 칸. [98] 만주어로 바다랑가 도로. [99] 암발링구 황제.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100] 바다라울트 투르 칸. [101] 만주어로 거훙거 요소. [102] 후에 구 황실이 올린 시호로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고 부른다. 참고로 그 의미는 겸손할/사양할 손. [103] 휴브트 요스 칸. [104] 이미 만주족이 중국에 한참 동화된 후의 청의 마지막 황제라 그런지 만주식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알려진 푸이라는 이름은 중국식 발음.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이 있는데, 푸이의 개인 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그의 동생 중 한 명인 푸런(溥任, 1918.8.17~2015.4.10)은 이름을 진유즈(金友之)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씨로 함께 바꾼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 [105] 사후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에 묻혔다가 청서릉(淸西陵) 인근에 마련된 화룡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에 매장되었다. [106] 원황제(原皇帝) [107] 순황제(順皇帝) [108] 흥황제(興皇帝) [109] 정황제(正皇帝) [110] 직황제(直皇帝) [111] 익황제(翼皇帝) [112] 선황제(宣皇帝) [113] 만주어로 압카이 풀링가, 몽골어로 텡그린 술데투. [114] 더르기 황제.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115] 거런 구룬버 우지러 겅기연 한. '모든 나라들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군주'라는 의미. [116] 만주어로 압카이 수러. [117] 만주어로 워시훈 어르더뭉거, 몽골어로 데게데 에르뎀투. [118] 경시연 수 황제 [119] 복다 칸 [120]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安民立政誠敬義皇帝) [121] 만주어로 이지슌 다산. [122] 얼덤부러 황제.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123] 아이비어 자사크 칸. [124] 만주어로 얼허 타이핀. [125] 고신 황제.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126] 엔크 암갈란 칸. [127] 만주어로 후왈리야순 톱 [128] 텀거툴러허 황제.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129] 나이랄트 토브 칸. [130] 만주어로 압카이 워이여허. [131] 용키양가 황제.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132] 텡게린 테트게센 칸. [133] 만주어로 사이쿵가 펑션. [134] 숭기연 황제.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135]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 [136] 永琰(영염)에서 顒琰(옹염)으로 바꿨다. [137] 만주어로 도로 얼덩거. [138] 상간 황제.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139] 터르 게렐트 칸. [140] 綿寧(면녕)에서 旻寧(민녕)으로 바꿨다. [141] 만주어로 굽시 얼기영거. [142] 일러투 황제.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143] 투기멜 엘베그트 칸. [144] 만주어로 요오닌가 다산. [145] 필링가 황제.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146] 부린투 자사그치 칸. [147] 만주어로 바다랑가 도로. [148] 암발링구 황제.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149] 바다라울트 투르 칸. [150] 만주어로 거훙거 요소. [151] 후에 구황실이 올린 시호로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고 부른다. 참고로 그 의미는 겸손할/사양할 손. [152] 휴브트 요스 칸. [153] 이미 만주족이 중국에 한참 동화된 후의 청의 마지막 황제라 그런지 만주식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알려진 푸이라는 이름은 중국식 발음.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이 있는데, 푸이의 개인 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2015년 4월 10일에 사망한 그의 동생 푸런(溥任, 1918년 8월 17일 생)은 이름을 진유즈(金友之)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씨로 함께 바꾼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 [154] 사후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에 묻혔다가 청서릉(淸西陵) 인근에 마련된 화룡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에 매장되었다. [155] 건주위 추장 [156] 기록을 보면 조선군이 왕왕 침략해 여진족들의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건물들을 파괴해서 여인, 노인, 아이들이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선에 쳐들어오기 전에 미리미리 쳐들어가서 학살하고 방화하고 개발살냈다. [157] 초창기 청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이기도 했는데, 청군은 남편이나 아이가 있는 여인도 무자비하게 능욕했으며 심지어 젖먹이 아기들을 무참하게 도륙하고 어미만 끌고 가는 당시 관점으로도 야만인, 오랑캐 같은 짓을 별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태도를 보고 많은 조선인들이 분노했었다. 강도록 등에는 이와 같은 비참한 정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 업보인지 몰라도 신해혁명 때 만주족이 한족 혁명군에게 학살되는 과정에서 젖먹이 아기들도 무참하게 도륙되었을 뿐더러 한족 혁명군은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과 달리 그 아기의 어미들까지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정확히는 중원에 입관한 청나라가 변발과 호복을 거부한 한족들을 대량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 내지는 부패하고 무능한 기득권에 대한 분노라고 봐야겠지만 [158] 당시 만주족을 말 탄 미개인으로 규정하고 청군에 의해 명의 신민들이 당했던 고초를 끊임없이 강조한 한족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만주족 탄압과 학살에 관한 기록은 후덜덜한 편이다. 혁명군이 공개처형 등을 통하여 살해하거나 서안에서처럼 식량 공급을 중단하여 굶겨 죽였고, 돈이 많아도 혁명군이 가산을 몰수하였기에 또한 굶어죽거나 얼어죽었다. "만주인들이 살던 거리는 텅 비었고 사방에는 만주족의 시체가 즐비하며, 수많은 시신이 성문 밖의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혁명군은 여전히 만주족을 사냥하고 있고, 만주족 800여 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같은 기사가 나올 정도였으며 가산이 억만에 이르렀다는 경친왕 혁광의 손자는 쓰레기를 뒤지는 처지가 되었고 팔기자제들 또한 각지에서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였다. 사실 중국 소수민족들 중 자기들 언어가 거의 소멸된 소수민족은 한족이나 다름없는 회족과 만주족밖에 없는데, 이러한 학살의 여파로 진짜 만주족이 이미 사라져서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한족이 양자로 들어가거나 한 경우가 아닌 만주족 직계 혈통이면 의외로 만주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나 혁명군의 학살 후 루쉰의 전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노인 2명만 남거나 해서 농담이 아니라 한족들과 관계가 깊거나 일부 혁명군이 동정심에 살려준 경우처럼 예외를 제외하면 전부 살던 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쯤 되면 현대에 들어서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만주족이 점점 늘어나는 것 자체가 엄청난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 [159] 어혈이 생기고 하체 마비가 올 때까지 맞았다. [160] 당나라나 요나라 같은 경우도 있지만 당나라 같은 케이스는 한족 정권으로 여겨졌고 당시 관념상 요나라보다 송이 중국을 지배하는 통일 왕조 취급을 받았다. [161] 당시 필수 교재였다. [162] 당시 청의 상태도 막장이었기에 의외로 대등한 관계였다. [163] 사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는 조선에게 일본도 입조(!) 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후 청나라가 중국 본토 점령에 올인하는 와중에 흐지부지된듯 하다. 실제로 청나라는 병자호란 직후에도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에는 전혀 관여를 안하는 등 일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하는 등 어느 정도는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어느 정도 중계 무역을 통해 교역을 하였다. 명과 조선을 대상으로 전쟁을 했었던 일본인들은 청나라의 팽창에 대해서 꽤 우호적인 시선을 보여주었는데, 실제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 명과 조선이 크게 분노하기도 했었고 청나라의 팽창 덕분에 굉장한 실리를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왜인들이 기세가 더욱 살아난다는 기록도 있고 쓰시마는 인조의 어필과 대장경, 향로, 범종, 화병, 촛대 등을 공물로 요구하며 "두 나라의 안녕과 우호를 위해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이며 조선이 거부할 경우 이전까지의 우호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다른 왜인들 역시 명과 조선의 세력이 약해진 것을 믿고[166] 조선에게 무례하게 굴었는데 1638년 2월 경상감사 이경증은 "왜인들에게 품질이 나쁜 공포를 주면 왜인들이 분노하고, 품질이 좋은 공포를 주면 백성들이 원망한다. 하지만 결국 품질이 좋은 것을 줄 수밖에 없다."라고 통탄하였으며 인조는 이에 대해서 "백성들이 원망하고 왜인들이 분노하는 상황이 난처하다"라고 하였다. 심지어 일본에게 유리한 세견선 파견을 더 많이 요청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위치 상 연해주 및 함경도 동해안과 맞닿아서 살던 여진 내지는 만주 부족들이 존재를 모를 리가 없고 고려 시대에는 도이라고 일종의 해적 집단을 만들어 실제로 도호쿠 등에 쳐들어간 적이 있다. [164] 특히 일대일로 방향은 중화사상 같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옛날부터 진출하려고 했던 곳들이라 고전적인 느낌까지 있다. [165] 여러 사정으로 인해 돌아가지 않고 유럽에 남은 칼미크인들은 훗날 러시아 연방의 자치 공화국인 칼미키야 공화국을 이루게 된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