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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燕 |
||
384년 ~ 407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전진 | 북연 | |
전연 | 남연 | |
별칭 | 후연(後燕), 모용연(慕容燕) | |
위치 | 중국 화북 동부 | |
수도 | 중산(中山) → 화룡성(和龍城)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성 | 모용(慕容) | |
국가원수 | 왕 → 천왕 | |
주요 황제 |
성무제 모용수 소문제 모용희 |
|
언어 | 중세 중국어, 선비어 | |
문자 | 한자 | |
종교 | 불교, 도교, 유교 | |
종족 | 선비족, 한족 | |
현재 국가 |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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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後燕오호십육국시대의 한 축을 이룬 국가로 모용수가 멸망했던 전연을 그대로 다시 세운 국가이다.
하북과 산동, 요서, 요동 일부 지방을 모두 움켜쥔 강대국이자 북위와 함께 화북 통일의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북위에게 하북을 잃어 그 사이에 모용덕이 남연을 건국해 산동이 떨어져 나가고, 고구려에게 요동을 빼앗기고 반란까지 일어나 무너지면서 모용부의 완전한 몰락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1]
그러나 고국원왕 시기 고구려가 전연과 백제의 양면전선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에게도 양면전선을 강요할 정도 실력은 있었던 만만찮은 국가였다. 고구려의 대백제 전선은 후연이 견제하고, 대후연 전선은 백제-가야-왜 연합이 견제하는 구도였다.
2. 역사
2.1. 전연의 멸망과 부활
전연 태조 문명제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는 간신 모용평의 암살 음모를 피해 전진으로 망명했는데, 이후 전진의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해 무너진 틈을 타 자립하여 멸망했던 연을 다시 세우는데, 이 새로운 연나라를 후대에는 후연으로 칭한다.그는 하북을 평정하고 386년 중산에 정도하여 황제를 선포했다. 이후 아들 모용농을 시켜 여암의 반란을 진압하고 동시에 요동을 차지한 고구려를 고작 4개월 만에 몰아내는 데도 성공한다. 이후 같은 모용씨 국가인 서연을 멸망시키고 산동까지 정복하는 등 당대의 최강자에 오르나, 북위와의 참합피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다.
2.2. 혼란과 수습
참합피 전투 때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보고 충격을 받은 모용수는 화병을 얻은 채로 죽은 병사들을 위해 제를 지내다가 목숨을 잃고 만다. 그리고 그의 4남 모용보가 즉위했으나 그는 난세를 극복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북위의 탁발규에 의해 백사(柏肆)에서 15만 대군이 전멸하고 1년 만에 중산과 화북도 상실해 용성 도망쳐야 했으며, 그의 아우 모용덕이 남연을 세우며 남쪽 지방을 한꺼번에 잃고 말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북연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그러나 요하를 중심으로 한 요서 전체와 요동 일부는 여전히 있었던 걸 감안해보면, 하북을 차지했던 과거와는 비할 수 없으나 그 상태에서도 전국시대 강국 연의 영역과 비슷하였기에 결코 그저그런 약소국까지는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후연 인구는 50만을 넘었던 걸로 추산되는데, 이 정도면 분명 그저그런 허수아비는 아니기 때문이다.[2] 이 인구는 후연이 차지하고 있었던 요동 부분은 제외하고 추산된 것이니 실제 인구는 좀 더 많았겠고, 동한 시대 요서 인구 40만(사마의가 동연을 정복하고 대학살을 저지르며 이후 조위-서진 정권이 일부러 요서 인구를 줄이려 했던 시절엔 20만이었다.)에 비해 약간 늘어난 것이지만 동방의 맞수 고국양왕~광개토대왕 시대의 고구려보다 국력이 확실히 약했던 것만은 분명하다.[3] 그러나 고구려에게 어쨌든 양면전선을 강요할 정도의 국력은 되었고, 말이 50만 이상이지 이 정도로 돌아가는 중앙 집권화된 국가면 고대 세계에서 결코 허수아비라곤 볼 수 없이 꽤 많은 인구였다.
그래도 모용보는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능력으로 여러 반란을 진압해가며 고군분투했으나 먼 친척이자 사돈인 난한에게 죽임을 당하고, 난한이 황위를 찬탈하여 모용씨 왕조는 일시적으로 붕괴되고 만다. 그러나 난한은 곧 모용보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위인 모용성의 반격으로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끝내 모용성이 황위를 회복하여 왕조를 되살리게 된다.
모용성은 공포 정치로 여러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여 반란이 끊이질 않았으나 모두 진압하는 위용을 과시했다. 그 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조공을 받았으나[4] 역으로 사신의 무례함을 명분 삼아 광개토대왕이 평양에서 원정을 준비하는 동안 고구려를 침공,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고 700여 리를 진격하여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까지 위협하였다.[5]
하지만 몰락해가는 후연을 재건하고 고구려까지 위기로 몰아넣은 모용성은 얼마 가지 않아 용성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다가 패잔병의 습격으로 허무하게 사망한다.
2.3. 폭정과 멸망
모용성이 죽고 그의 숙부이자 모용수의 늦둥이 아들 모용희가 고작 17세에 즉위하게 된다. 모용성의 두 아들을 제치고 그가 즉위한 것엔 형 모용보의 부인, 형수 태후 정씨의 공이 컸다. 정씨는 모용희와 간통하면서 그와 정을 나눈 대가로 모용희의 즉위를 강력하게 지원했던 것이다. 게다가 모용희는 즉위 이전에 북위와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우며 능력을 입증 받아 모용수에 버금간다고 할 만큼 뛰어난 평을 받던 인재였으며, 표기대장군으로 고구려 정벌에서 공을 세우기도 한 명장이었다. 태후라는 빽이 있는데다 능력까지 입증 받았기에 모용희가 어린 나이에도 후연의 군권을 휘어잡을 정도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모용희는 즉위 이후에는 기대와는 정반대의 막장일로를 걷는다. 모용희는 황후와 귀비로 삼은 부씨 자매를 총애하면서 그들을 위해 초호화 잔치를 벌였고 사치스런 토목 공사도 마구잡이로 실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후연의 경제력과 민심은 바닥을 치게 된다. 귀비 부씨가 앓다 죽었을 때는 태의였던 왕온을 성의가 없었다며 잔인하게 죽였을 정도다. 한편 태후 정씨는 총애를 잃고 절망하다가 병부상서 정신과 함께 모용희를 폐위시키려 했으나 발각되어 자살했다.
한편 신라 원정에서 돌아온 고구려의 침공으로 후연은 요동 전역과 요서의 상당 부분을 잃은 것을 넘어, 용성으로 통하는 요충지인 숙군성과 연군을 공격받아 이제는 반대로 후연이 고구려에게 수도 용성을 위협받는 전세역전이 일어났다.[6] 게다가 아예 이 시기에는 요서 일대에 고구려가 오늘날 대한민국 충청남도 면적에 해당하는 영토를 직접 지배화하려 할 정도였다.[7]
그러자 모용희는 고구려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는데 요동성을 공격해서 함락 직전까지 몰아 갔다. 그런데 자신이 황후 부씨와 함께 먼저 요동성에 입성하겠다며 공격을 멈추고 요동성을 무너뜨려 평지로 만들어 가도를 뚫으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렸다가 완전히 대패하고 만다. 이후 거란을 원정했다가 거란군의 머릿수가 많음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공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황후 부씨가 퇴각을 거절하자 칼이라도 뽑았으면 무라도 베자는 마인드였는지 이번에는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때 이동의 신속함을 위해 치중과 무거운 것을 모두 버리고 경무장으로 무려 3,000리를 행군하여 목저성을 공격했으나 경무장의 한계 탓인지 또 패퇴했다.
이후 황후 부씨가 죽자 모용희는 슬픔에 잠겨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는데 크고 아름다운 무덤을 축조토록 했다. 또 전국에 명을 내려 눈물을 흘리지 않거나 곡을 하지 않은 자는 처벌하도록 했고 대신들을 그 무덤에 순장시키려고 해서 나쁘던 민심을 더욱 잃는다. 모용희는 이미 염습이 끝난 부씨의 관을 열고 시간을 한 뒤[8]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맨발로 그 상여를 직접 메고 용성을 나섰다.[9] 그래도 이 시기에 광개토대왕이 황해도 일대까지 밀고 들어온 백제-가야-왜 연합군에게 집중하기 위해, 점령해두었던 후연의 요서 강역 일대에서 요하 건너편 군사적 요지들을 제외하고 철군[10]했고, 그나마 덕택에 요서 일대는 되찾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내정이 혼란한 틈을 타 호한 혼혈로 한족이던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모용보의 양자인 고구려계 모용운(慕容雲)을 황제로 추대했다. 모용희는 용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군대마저 흩어져 자신이 세웠던 용등원으로 달아났다가 끝내 잡혀 죽는 인간 말종다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래도 모용운은 예의를 갖춰 그를 부씨와 합장해 주었다. 이렇게 모용씨 왕조의 후연은 외우내환으로 멸망하였고, 모용운이 북연을 건국하며 명맥을 이어나갔다.
3. 기타
2011년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 고구려의 메인 적국으로 등장하는데 후연과 고구려 인물들이 연이 아니라 후연이라는 호칭을 자주 사용한다.후연은 후대에 역사가들이 먼저 있던 춘추전국시대의 연, 전연과 나누려고 본래 국호인 연나라에 뒤 후(後)자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국호가 같으면 후(後)나 고(古)를 붙여 나누는 일이 있는데도(예를 들면 고조선과 조선, 고구려와 후고구려, 백제와 후백제) 드라마에서 연나라라고 한 건 얼마 없고 인물들이 전부 호칭하는 나라 이름이 후연으로 언급하고 넘어가 버리니 역사를 좀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수 밖어 없다.
어쩌면 제작진이 알면서도 시청자들이 헷갈릴까봐 그냥 후연으로 불렀을 수도 있으나 그럴 개연성은 없다. 시청자들은 그런 거 의외로 관심이 없고 후연이 전연의 연장이니 전연이나 후연이나 거기서 거기다. 거기다가 북연까지 쭉 (대)연이라는 국호를 잇고, 이로 말미암아 북연의 시작이 모용보냐 모용운이냐 풍발이냐라는 논쟁까지 나는 마당인데 그런 배려가 얼마나 도움일까? 게다가 후고구려( 태봉)와 후백제도 태조 왕건에서는 극중에서는 고증에 맞게 인물들이 다 작중에 고려, 백제로 국호를 언급하며 칭했다.
그냥 당시 드라마 제작진이 역사에 관심이 매우 부족해서 지식이 모자라 그랬다는 간단한 이유로 넘길 수 있겠다.
4. 역대 군주
<rowcolor=#fff>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 | 연왕(燕王) | 모용수 | 연원(燕元) 384년 ~ 386년 | 384년 ~ 386년 | 선평릉(宣平陵) |
1대 | 세조(世祖) | 성무황제(成武皇帝) | 모용수 | 건흥(建興) 386년 ~ 396년 | 386년 ~ 396년 | 선평릉(宣平陵) |
2대 | 열종(烈宗) | 혜민황제(惠愍皇帝) | 모용보 | 영강(永康) 396년 ~ 398년 | 396년 ~ 398년 | - |
임시 | - | 창려왕(昌黎王) | 난한 | 청룡(靑龍) 398년 | 398년 | - |
3대 | 중종(中宗) | 소무황제(昭武皇帝) | 모용성 |
건평(建平) 398년 장락(長樂) 399년 ~ 401년 |
398년 ~ 401년 | 흥평릉(興平陵) |
4대 | - | 소문황제(昭文皇帝) | 모용희 |
광시(光始) 401년 ~ 406년 건시(建始) 407년 |
401년 ~ 407년 | - |
[1]
다만 모용부가 후연이 망했다고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었다. 아직 남연이 남아있었고 또 모용외의 이복형 모용토욕혼이 세운 토욕혼은 7세기까지 있었다. 다만 남연의 멸망으로 모용외의 후손들은 망했다. 심지어 후연이 북위와의 전쟁으로 멸망한 와중에 토욕혼은 오히려 북위와 손잡고 사이에 있는 북하를 공격하기도 했다.
[2]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요서 편 참조. 이 서적은 국가기관인 한성백제박물관 측이 백제사를 전공하는 여러 학자들의 논문 제출 및 그 논문들을 검증하는 공개 토론회를 거친 후 발간되는 책으로서, 학자 1인의 연구결과물이 아니다.
[3]
이 정도 국력이면 총 인구수만 따질 경우 진사왕과 아신왕 시절의 백제보다도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백제는 가야, 왜와의 외교도 잘해서 원래 국력을 초과한 병력도 뽑아낼 정도였는데 후연은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4]
황제로 등극한 모용성이 이해 설날에 자신의 칭호를 천왕으로 삼았는데 이를 기념하는 명분으로 사신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으며, 고구려의 요동 점령 때문에 후연을 달래 놓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다. 특히 이 시기에 고구려는 가야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후연의 기습을 막을 조치를 취해 놓을 필요도 있었다.
[5]
이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가 적에게 당했던 가장 큰 피해였다.
[6]
연군은 원래는
베이징 부근이지만, 앞서 연군 태수가 이미 북위에게 항복한 사건이 있었으니 옮겨진 대릉하 유역으로 옮겨진 행정구역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다만 북경이라는 견해도 여전히 어느 정도의 근거를 갖추고 있다.
[7]
이 영토는 곧 백제의 침공을 받은 고구려가 포기하고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요하 서쪽의 거점으로 기능하던 고구려 요새들은 무려 수양제 시기 이전까지도 유지되고 있었는데, 이 시기 광개토대왕이 확보한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8]
대렴이 이미 끝나,
그 관을 열어서 겹쳐 더불어 교접하였다. 大斂既訖,複啟其棺而與交接。 ─ 《진서》 124권
[9]
상여가 너무 커서 북문을 무너뜨리고 나갈 정도였다.
[10]
이 군사적 요지들은 무려 훗날 수양제의 1차 정벌 때까지 고구려의 영역으로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