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09-17 14:07:31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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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국가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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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조선의 지도.png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와 후기 중심지를 표시한 지도
존속 기간 기원전 ?년 ~ 기원전 108년
위치 요령 일대 → 한반도 북부 일대(추정)[1]
수도 요동 일대 → 왕검성[2]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 원수 단군(檀君)[3]→ 후(侯)[4](王)
국성 (韓)[5](衛)
언어 고대 한국어
종교 토착 종교
종족 예맥, 한(韓), 한(漢)[6], 숙신, 동호
주요 국왕 단군조선[7] 초대 단군왕검
□대 조선후
□대 조선왕
□대 부왕
말대 준왕
위만조선 초대 위만왕
2대 □
3대 우거왕
주요 사건 ? 조선 건국
기원전 4세기 조선후 칭왕
기원전 3세기 연나라- 조선 전투[8]
기원전 195년 위만, 고조선 망명
기원전 194년 위만 반란·위만조선 건국
기원전 109~ 108년 왕검성 전투
(전한에 의해 조선 합병)
성립 이전 성읍국가[9], 환단국
멸망 이후 부여, 고구려, 한사군
현재 국가 대한민국, 북한, 중국
1. 개요2. 출현 시기
2.1. 기원전 24세기~기원전 15세기, 요서설
2.1.1. 문헌학2.1.2. 고고학
2.2. 기원전 10세기~15세기, 한반도 남부설 2.3. 기원전 9세기~8세기, 요서 조양설2.4. 기원전 5세기~4세기, 선양설
2.4.1. 평양 팽이형 토기 문화
3. 역사
3.1. 단군 조선3.2. 역사 속의 등장3.3. 전국시대3.4. · 교체기와 위만의 찬탈3.5. 위만조선의 운영과 멸망3.6. 준왕의 남하3.7. 후대에 미친 영향
4. 역대 국왕5. 위치와 강역 논란6. 문화
6.1. 문자6.2. 청동기와 철기6.3. 신화6.4. 정치 체계6.5. 법률6.6. 음악6.7. 의복 및 금속 문화
7. 현 중국 학계의 관점
7.1. 현 중국 학계 관점의 문제점
8. 대중매체에서의 고조선9. 관련 문서

1. 개요

한반도사 최초의 기록과 유물 증거가 있는 고대 국가

지금의 한반도 북부 중국의 동북지방( 요동, 송화강 유역)에 걸쳐 존재한 것으로 추정하는 고대 국가.

고조선은 《 삼국사기》에서 등장하지 않으며, 《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세운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등장한다. 중국의 사서 가운데 사기(역사책) 정사 삼국지, 한서, 후한서 등에 고조선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서도 위만조선에 대해 다룰 때 이들 중국 사서를 인용하고 있다.

본래는 조선(朝鮮)이라고 불렸다. 《 삼국유사》 에서는 기자조선 단군조선을 고조선으로, 위만조선을 조선으로 일컬었다. 현재는 기자조선설을 부정하여 위만조선을 기존의 고조선과 연속된 실체로 파악하려는 취지와 14세기 말에 고조선의 국명을 가져다 나라 이름으로 삼은 이성계 조선왕조와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조선을 쓰는 용법이 정착되었다.

고조선의 영향력과 문화권을 추측할 수 있는 유물로는 유리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가 있다. 하지만 현재 학설은 이러한 단편적 유물보다는 유적군의 분포 및 사서와의 교차 검증 등을 이용해 더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현재는 평안도 일대 및 요동 내륙 지역, 일부 요서 지역이 주목받는다. 남한에 있는 마니산 참성단은 종교적으로 후대에 개축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유적지로 추정되는 북한 지역에 대한 탐방이 불가능하고 북한 학계에 대한 신용도도 높지 않아서[10] 한반도 지역 고조선 문화에 관련한 내용은 대부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랴오닝 성과 그 근처 지방에서 초기 고조선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기는 하나, 비교 검증할 만한 중국 사서에 남은 문자 기록이 단편적이라는 한계가 있다.[11]

한반도 최초의 국가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 그리 많지 않아[12] 오랜 연구가 이뤄졌음에도 여전히 의문점이 많다.

2. 출현 시기

강역 논란과 함께 고조선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논란이다. 이것에 따라 한국사의 길이 자체가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13] 전통 시대에는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단군조선과 기원전 12세기경 동래한 기자조선을 모두 조상으로 인식하고 제사를 지냈다. 《 삼국유사》에 나온 단군의 나이가 1,800년인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서거정이 '나이가 아니라 연대로 해석해야 한다'라고 하는 등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학설은 없었다. 이는 고고학이란 학문이 없었던 시절이기에 역사서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고조선의 역사를 조선의 역사와 별개의 역사로 취급하려 하거나 왜곡하였고, 그 이후 이어지는 역사는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중국 식민지 상태였다고 보는 등 극단적인 학풍이 일었다. 해방 이후 고조선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고조선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전통 시대와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고고학의 존재 유무인데, 고조선은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시기이므로 사실상 고고학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나친 고고학 편중에 대해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의 묘한 신경전이 있지만, 최근에는 적어도 고조선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역사학과 고고학적 소양을 모두 갖춰야 하므로 점점 사라지는 추세이다.

출현 시기에 대해서는 각 시기별로 아래에 대별해 서술해 놓았다. 지금으로서는 기원전 24~10세기의 고조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학계에서는 그 근거를 희박하게 보고 있기는 하나, 이 문서의 편집자나 독자들이 재야사학적 관점에 대해 알고 싶을 가능성도 있기에 이에 대해서도 같이 서술한다. 혹시 유력한 학자 중 해당 학설에 대해 추가적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는 경우 추가 바람.

2.1. 기원전 24세기~기원전 15세기, 요서설

2.1.1. 문헌학

고조선의 건국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연도는 기원전 2333년(요임금 재위 25년, 당요 무진년)이지만 이는 서거정의 동국통감에 따른 것이며 사서마다 그 기준이 다르다.

일단 조선 건국 이전의 기록을 보자면 고려사 백문보전, 제왕운기 삼국유사가 있다. 이들은 각각 건국년도를 기원전 2361년, 기원전 2333년 (무진년), 기원전 2308년 또는 2284년 (경인년 또는 정사년)으로 언급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서술들이 서로 다른 요임금의 재위연도를 기준으로 산출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심지어 요임금과 비교해 60갑자 연도조차 안 맞는다며 불평하고 있다. [14]

성종 16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은 송나라 소강절이 지은 '황극경세력'에 나오는 상원갑자법(上元甲子法)에 의해 단군기원(단기)의 시작점을 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단군기원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조선의 건국이 과거에는 당요 즉위 25년 뒤요, 지금(조선)의 건국은 홍무제 25년 뒤이다 라는 일종의 사대주의 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일단 근세에도 요임금의 즉위연도는 확실한 정설이 없었으며 갑진년과 무진년 최소 두 가지의 유력 설이 있었다. 이 중 임의로 갑진년을 요임금 원년으로 보고 25년 이후인 무진년이라고 서술한 것은 분명 의도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애초에 현대의 관점으로 보자면 요임금의 즉위 연대는 어느 쪽으로 보아도 이상하다. 당요의 다음다음 왕인 하나라의 건국자 우임금은 2070년경 즉위한 것으로 현재 계산되는데, 그렇다면 요순은 둘이 합쳐서 300년을 왕위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 물론 요임금은 기록상에서 90년 이상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고 순임금도 30여 년 재위한다고는 하지만 300년은 인간의 수명과는 거리가 멀다.

2.1.2. 고고학

재야사학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대해 신석기 문화인 홍산문화 등을 근거로 삼았던 적도 있으나 고고학적으로 홍산문화는 이후 요하 유역 문화와 별다른 접점이 없는 것이 파악되어 이제는 그냥 쉰 떡밥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음으로 근거로서 제시된 것은 근래 연대가 조금 올라간 요서 지방의 초기 청동기 문화이자 농경 문화인 하가점(사자뎬)문화(기원전 20세기 ~ 기원전 15세기)가 있다. 대표적으로 서영수 교수는 2008년 하가점 하층 문화의 큰 특징인 산성 유적의 형태가 마치 고구려 산성과 흡사하기 때문에 고조선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하가점 하층 문화는 이후 위영자 문화(기원전 13세기 ~ 10세기)로 연속되는데, 이후 요서 지방을 남북으로 가르는 큰 산인 노로아호산을 경계로 북쪽은 유목민의 문화(동호의 조상인 산융족)로 추정되고 농경의 흔적이 없는 하가점 상층 문화(기원전 11세기 ~ 기원전 4세기)가 자리잡고 남쪽 조양시 지역에는 현재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농경 문화인 조양시 십이대영자 문화가 자리잡는다. [15]

아쉽게도 정가와자와 같은 고조선 중기 유적에서는 성과 관련된 것이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서영수 교수도 언급하였듯 이 때문에 두 시대의 산성 유적 사이에는 천여 년의 공백이 발생한다. 이 긴 시간의 연결 고리를 이어줄 더 확실한 유적과 연구 성과가 축적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학설의 종착역인 십이대영자 문화는 고조선의 문화적 시류로 추정되기는 하나, 후대의 정가와자, 평양 지역의 조선 문화권과 어떠한 유관 관계에 있는지 역시 의문점이 많다. 또한 공간적으로도 사쟈뎬 문화 자체는 내몽골을 중심으로 하며 십이대영자 문화는 후기에나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1500년 수준의 공백을 어찌 메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 가능한 사람이 없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이 오랜 기간을 두고 상당히 다른 형태의 문화가 나타나는데 이를 하나의 나라로 볼 수 있을지의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2.2. 기원전 10세기~15세기, 한반도 남부설 [16]

전라남도 영암군 장천리의 집터 유적과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고인돌 유적 등에서 출토된 유물 등이 기원전 20세기까지 분포한다는 점에 착안한 주장이다. 특히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인 약 4만여 기가 한반도, 특히 전라남도 지역에 위치하며 이들은 대개 마한 등 한반도 남부 초기 국가 형성과 관련 있는 유적으로 믿어져 왔다. 이 중 일부는 그 연한이 상당히 올라가므로 이를 한반도 내의 조선과 연관지으려는 시도가 있다.

다만 이러한 설은 시공간적으로 비판받을 점이 있다. 한반도 지역에서 기타 지역의 청동기 초기와 조응하는 민무늬 토기 시대 [17] 를 기준으로 국가 형성의 대략적인 연대를 산출해 보더라도 그 최대 연한은 기원전 10세기 위로 올라가기 힘들다. 게다가 다수의 북방식 고인돌의 연대가 기원전 10세기 이후 위치하는 것도 국가 형성 시기를 추론하는 근거가 된다. 이때부터 삼한의 소국의 원형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며(심지어는 재야 사학 내지는 기타 의심스러운 서적을 종합하더라도) 기원전 15세기 경에 한반도 남부에 국체가 성립할 수 있다는 문헌적 고고학적 증거는 현재로서는 매우 희박하다. 또한 이것이 고조선이라고 치더라도 강화도 및 평양 지역에 전설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단군 이야기나 사기의 연나라 침략을 비롯한 다양한 중국 사서 등 고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각종 문헌의 서술과 전혀 조응하지 않는다.

2.3. 기원전 9세기~8세기, 요서 조양설

최근 요서 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기원전 9세기 ~ 8세기경 발호)를 고조선 문화로 보자는 견해가 고고학계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기존의 요서 지역 문화와 다른 석곽묘 형태와 비파형 동검, 잔무늬 거울 등 초기 고조선 문화와 관련이 깊은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1960년대에는 하가점 문화라 하여 (앞의 24세기 설 참고) 내몽골 ~ 요서 지방의 문화권은 하나로 묶어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저 동호족의 유적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최근 국내의 젊은 교수들이 연구에 뛰어들면서 요서 조양 지역에 공반되는 유물의 특성상 동호족보다는 고조선 문화의 특성을 띠고 있어, 고조선의 뿌리가 되는 집단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가설이 생겨났다. 다만 아직도 찬반 논쟁이 팽팽한 상태로[18]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다만 조양 지역은 기원전 3세기경 갑자기 연 문화가 투영되면서 사료 기록과도 맞아떨어져서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덧붙여서 이곳 유적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기존 학설이 제창한 요동보다는 요서 쪽에 무게를 두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최초의 조선 관련 기록인 관중의 일대기를 다룬 관자에서 제의 주변국으로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도 바로 이쯤인 춘추 말기인데 산둥 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제나라 입장에서 제의 주변국으로 인식하기에도 이상함이 없다. (다만 관자라는 책 자체의 연대에 대해 의문이 있다는 점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한국 학계의 요하 일대의 청동기 문화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한국 청동기 문화와 관련짓는 학설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는 점과 관련한 내용은 청동기시대 문서 참조.

한편 요동반도 남단에서도 기원전 7세기 ~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강상 무덤 및 누상 무덤에 100명 ~ 200명이 순장되었다는 과거 북한 고고학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국가 출현에 대한 희망적 시각이 두드러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운데 무덤 주위의 무덤을 순장묘로 생각하던 정황과 달리, 최근에는 순장묘가 아닌 시기차에 따른 무덤 배치로 보는 시각이 강해졌다. 다만 이곳에서 비파형 동검 등 기존 한국 사학계의 학설과 연관성이 높아 보이는 유물이 출토되어 한국 사학계를 고무한 바 있다. 말하자면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으로 연대를 올렸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고고학적으로도 고조선에 대한 긍정적 암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 지역의 경우 조양이나 선양 지역의 기존의 고조선으로 생각되는 유적과는 독립적인 영향을 보이며 연 진개 경략이 추정되는 기원전 3세기 이후에도 나름의 독자적 문화권을 이루며 서서히 중국에 통합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문제가 있다. 이 경우 해당 지역은 고조선에 속한 속국과 같은 존재였으며 연나라의 공격 이후 종주국을 바꾼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는 하다. 고조선의 영역이 너무 쪼그라든다고 느낄 법도 하지만, 해당 시대는 중국도 전국시대로, 전성기 주나라나, 진/제/초 같은 전국 말기 패권국가 급을 제외하고는 동북아 전체에서 재야사학계가 믿는 고조선만큼 영토가 큰 국가가 존재한 적은 없었으며 패권국가라 할지라도 거대한 영토를 유지한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2.4. 기원전 5세기~4세기, 선양설

어떤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기원전 4세기 - 5세기에 이르러 선양 지역을 중심으로 조양 ~ 선양 ~ 평양까지 넓은 영역에 중국의 전국 시대 국가와는 무관한 국가(들)의 존재는 대개 수긍하고 있다. 이 시대에 조선은 확장하던 전국 7웅, 특히 연나라와 부딪히게 되며 동아시아사에 등장한다. 관련 내용은 다음 항목의 전국 시대 편 이후 참고. 만약 이 시기에 조선이 건국이 되었다면 단군조선은 기원전 5/4세기 ~ 기원전 194년 즉 대략 일이백년 동안 존속한 국가, 위만조선은 이후 86년 동안 존속한 국가가 된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단군 조선의 역사는 지중해 지방은 공화정 로마 초~중기, 인도 지방은 아소카 왕의 마우리아 왕조 전후, 중국은 전국시대, 그리스와 근동지방은 키루스의 페르시아 및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후 시대와 비슷하며 이로 보아서도 알 수 있듯 전 구대륙에서 현 국가의 원형이 되는 많은 고대국가들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4.1. 평양 팽이형 토기 문화

다만 첨언하자면, 과연 요동 지방의 이러한 나라가 단군 신화 와 연관이 있는지는 불명확하다. 단군에 대해서는 별도로 평양 지역의 팽이형토기 문화라는 별도의 한반도 고유 문화권과 (기원전 10~3세기, 청천강~강화도 지역) 연관이 있으며, 요동 지방에서 유입된 세력과의 대립 공존을 통해 어느 순간 조선과 융합되어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9] 기원전 3세기 이후 평안도~황해도로 건너온 조선은 단순히 요동/요서 지방의 조선을 이식한 것이 아니라 토착 문화권과의 화학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문화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역사

3.1. 단군 조선

檀君朝鮮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기록되었다. 건국년도는 기원전 2333년이라고 전해지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다양한 년도를 건국년도로 보고 있다(위 항목 참조). 보통 단군 조선이 건국된 년을 잡아 단기가 쓰이기도 한다.

건국자는 단군왕검으로 환인의 아들 환웅 웅녀와의 관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에 대해 두 부족의 통합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 기록에 따르면 단군 왕검은 천 년 동안 재위하다가 신이 되어서 올라갔다고 한다. 보통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직책 이름으로 보며 뜻은 제정일치로 해석하고 있다.

그 다음 시대는 기자조선이라 하나 기자 자서여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설이 부정되기에 다음 시대는 위만조선으로 본다.

3.2. 역사 속의 등장

기원전 11세기 경에 기자가 조선 지역에 와서 법과 예절을 가르치고 다스렸다는 기자조선설이 있어 한때 보편화되었으나 현재는 사실상 사장된 상태다. 관련 내용은 기자조선 문서 참고.

고구려에서 기자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아마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기자 기록을 고구려가 받아들여서 자기들 방식으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 시대 중국의 요동 낙랑 정권과 접하며 중국 문물을 수입하던 과정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고조선이 직접 언급된 것으로는 기원전 7세기의 인물 관중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관자》가 가장 오래된 사료이다. 단 저자가 관중이라고 전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관자'는 관중 본인이 쓴 것이 아니라 관중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며,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수정되었다. 현재의 판본은 한나라 시대의 유향이 정리한 것이기에, 연대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의문은 계속해서 제시되는 상태. 학설에 따라서는 이 단락 전체를 날릴 수도 있다. 다만 춘추 전국 시대 보배조개를 매개체로 랴오둥 반도 ~ 묘도 열도 ~ 산둥 반도에 이르는 교역이 수행된 것이 확인되면서 호의적인 의견도 나름대로 근거가 생겼다.
桓公問管子曰:「吾聞海內玉幣有七筴, 可得而聞乎?」. 管子對曰:「陰山之礝䃉, 一筴也, 燕之紫山白金, 一筴也, 發朝鮮之文皮, 一筴也, … (중략) … 此謂以寡爲多, 以狹爲廣. 天下之數, 盡於輕重矣.」
( 제나라) 환공이 관중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해내(海內)에 옥폐(玉幣)를 얻는데 7가지 길이 있다고 하던데, 들어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관자에 대답해 말하기를 "음산의 옥돌(을 얻는 것)이 한 가지요, 연나라 자산(紫山)의 백금을 얻는 것이 한 가지요, 발조선의 무늬 있는 가죽을 얻는 것이 한 가지요, … (중략) … 이것들(7가지의 옥폐)을 일컬어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당한다고 하고, 좁은 (곳에서 나는) 것으로 넓은 (곳에서 나는) 것을 당한다고 합니다. 천하를 셈하는 법이 경중을 다하는 데 있습니다.
『관자』 규도편

桓公曰 四夷不服 恐其逆政 游於天下 而傷寡人 寡人之行 爲此有道乎。 管子對曰 吳越不朝 珠象而以爲幣乎。發朝鮮不朝 請文皮毤【他臥切 落毛也。】服而以爲幣乎。 … (중략) …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 (중략) … 故物無主 事無接 遠近無以相因 則四夷不得而朝矣。
(제나라) 환공이 말하기를,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아, 천하를 거스르는 정치를 하여 과인이 해를 입을까 두렵다. 과인의 행함에 길이 있는가?" 관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 오나라 월나라가 입조하지 않으면, (그들의) 구슬과 상아를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발조선이 입조하지 않으면, 무늬있는 털가죽【발음은 타(他)와 와(臥)의 반절이다. 낙모(落毛)를 말한다.】과 옷을 청하여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 (중략) … 하나의 표범 가죽을 값지게 받아들여 준 후에야 8000리 밖의 발조선에게서 입조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중략) … 물건에 주재하는 바가 없고, 일에 접하는 바가 없고, 멀고 가까운 곳이 서로 관계하는 바가 없으면, 사방의 오랑캐가 입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자』 경중 갑 편

이때 조선은 무늬있는 가죽이라는 특산물의 이름을 날리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편 조선의 앞에 꼭 '발(發)'이라는 글자가 붙어 등장하는데, 다른 문헌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方五千里 至于荒服南摭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 羌 北山戎發息愼東長鳥夷 四海之內 咸戴帝舜之功。
사방 5000리를 정복하여, 황복(荒服)에 이르러 남쪽으로 교지와 북발을, 서쪽으로 융과 석지와 거수와 강과 저를, 북쪽으로 산융과 과 식신을, 동쪽으로 장이와 오이를 위무하였다. 사해의 안에 모두 제순의 공이 미쳤다.
사기》 오제본기

위에서 황복(荒服)이란 중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바깥 지역. 중국은 공간적으로 오복(五服)의 세계관을 설정하였다. 왕기(王畿)와 함께 전복(甸服)이 존재하고, 그 밖에 제후국인 후복(侯服)과 빈복(賓服)이 존재하며, 그 밖에는 만(蠻), 이(夷), 융(戎), 적(狄)의 땅인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이 존재하는데, 순임금의 덕이 그까지 미쳤다고 찬양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 기록은 직접 조선이 등장하는 기록은 아니지만, 앞서 『관자』에서 등장한 발(發)이 산융과 식신의 사이에 등장하고 있다. 다만 『사기』 오제본기는 역사서로서 가치가 다소 떨어지지만, 적어도 연원이 제법 오래된 세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발(發)이 고조선을 구성하는 집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김한규 등은 이를 과 통한다고 보기도 한다. '발'과 '맥'이 서로 통한다는 근거라면 후대의 고구려를 토번에서는 무쿠리, 돌궐에서는 뵈클리라고 표기했는데 무쿠리와 뵈클리 모두 '맥고려'의 음차일 것이라고 언어학계에서 추정하는 데 있다.
發人麃麃者 若鹿迅走。【發 亦東夷 迅疾。】
발인이 씩씩하여, 사슴과 같이 빠르게 달린다. 【발은 또한 동이로, 빠르고 날래다.】
『일주서』

이와 같이 발은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사기』의 기록과 합하면 중국의 동쪽 혹은 북쪽에 위치하므로, 우리가 짐작하는 고조선의 위치(요서 ~ 요동)와도 대략 합치한다. 더불어 가죽이 특산물인 것이나 사슴과 같이 빠르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수렵 민족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3.3. 전국시대

좀 더 뚜렷하게 흔적이 나타나는 것은 연나라와 접한 기원전 4세기경의 기록이다. 서한 말의 유향이 정리한 《전국책》에서 고조선은 유세객 소진 연나라 주변의 여러 국가들을 열거하면서 등장한다. 이 즈음 연은 에게 크게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는데, 마침 조선도 나름대로 대부 등의 관직을 두고 왕을 칭하는 등 성장하여 연과 맞섰다. 특히 왕이라는 칭호는 본래 주나라 천자의 칭호로, 전국시대 당시에는 참칭하는 왕조가 늘어나기는 했으나 상당한 지위를 갖고 있는 칭호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미가 크다. 때문에 최근에는 고조선의 중앙 집권화에 주목하여 이 시기를 중요한 기점으로 보는 시각도 늘었다.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기자의 후예 조선후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려 연을 치고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을 설득하게 하여, 연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 《 위략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말부터 3세기 초반까지 이루어진 연 소왕의 개혁으로 연나라는 반전에 성공한다. 이 시기 연은 제나라와 함께 진개의 활약으로 동호, 조선에게서 각각 패수(국경)으로부터 1000리와 2000리의 땅을 얻었다고 한다. 대체로 동호 원정과 조선 원정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져 두 세력에게서 탈취한 지역에 5군을 설치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조선이 잃었다는 이 2000리가 옳은 서술인지는 논란이 많으나, 어쨌건 고조선에게 막대한 타격을 안긴 것임은 분명하다. 근데 이 즈음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1000 단위로 끊기는 걸 보아 대강 어림잡은 것 같다.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 燕亦築長城自 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그 뒤에 연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 동호)에 인질로 갔는데 호가 그를 지극히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하여 깨뜨려, 동호가 1000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을 찔러 죽이려 한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다. 연은 또 장성을 쌓아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렀으며,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고 동호를 막았다. - 《 사기》 흉노 열전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그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은 이에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고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2000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다. 이에 조선이 약해졌다. - 《 위략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연의 전성기 때부터 일찍이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 《 사기》 조선 열전

이후 조선은 세력권 상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연은 요동까지 군현 지배를 확립한 것으로 보이며, 요동 반도 곳곳에 연대가 bc 2세기 ~ 3세기까지 올라가는, 연나라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문화 유적이 이를 뒷받침해준다.[20] 이 시기부터 명도전 등 중국계 화폐를 매개로 교역이 이루어지는 것이 확인이 되고 후대에도 화폐로 계승된다.

3.4. · 교체기와 위만의 찬탈

조선에도 연에게 패퇴한 뒤 반 세기 정도가 지난 뒤에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그 크기만으로도 압박이었을 중국의 통일 국가는 요동에 무언의 군사적 압력을 가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은 이에 스스로 '복속'하는 길을 택했다. 조공을 바친다 해놓고 찾아가지도 않은 걸 보아 눈치를 보고 있던 것 같다. 『염철론』에서는 조선을 멸했다고 말한다. 두 나라 사이에는 안전이 보장된 근거인 공지(空地)가 있었고, 그러나 진에서 발생한 대혼란으로 오히려 부자 세습이 이루어지는 등 이 시기에 조선이 힘을 비축해 나가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否死 其子準立。
진이 천하를 병합한 후에, 몽염을 보내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왕 부가 즉위했는데 진의 공습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자, 그 아들 이 즉위했다. - 《 위략
秦旣幷天下 東絶沛水 幷滅朝鮮 南取陸梁 北卻胡 狄 西略氐 羌 立帝號 朝四夷。
진이 이미 천하를 병탄한 뒤에, 동쪽으로 패수를 끊어 조선을 병탄하여 멸망시키고, 남쪽으로 육량(백월 세력)을 취하고, 북쪽으로 호와 적을 물리쳤으며, 서쪽으로 강과 저를 약취했습니다. 황제의 이름을 세우고, 사방의 오랑캐에게 조공을 받았습니다. - 《염철론》 주진편

그러다가 · 교체기에는 조선이 다시 재도약의 기회를 잡았다. 이 시기 고조선은 공백이 생긴 서북쪽의 패수까지 다시 영토를 회복한 듯하다. 패수 위치에 대한 설은 다양하지만 요동군이 있는 요하 인근은 한이 장악하고 있었고, 청천강이 조선이 위축되었을 당시의 경계로 비정된다고 보면 압록강 설이 유력해진다. 단 이 경우를 떠나면 패수는 고대 한반도 북부 관련 기록에서 원체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강 이름이 패수라기보다는 아예 '패'가 강을 뜻하는 일반 명사가 아니냐는 설도 있다.

그런데 이 기사 자체가 이민족의 침탈을 강조하는 기사로서 고조선의 능동적인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정확한 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연 · 제 · 조 등의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한다.
大夫曰 往者 四夷俱强 幷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東越越東海 略浙江之南 南越內侵 滑服令 … (후략) …。
대부가 이르기를 "지난 날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악을 저질렀습니다. 조선은 요새를 넘어 연의 동쪽을 겁박했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쪽을 약탈했습니다.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습니다. … (후략) …" - 《염철론》 비호편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이 일어나자, 먼 곳을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고쳐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짓고, (조선을) 연에 속하게 했다. - 『위략』
二十餘年而陳 項起 天下亂 燕 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20여 년 뒤 진승 항우가 봉기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제 ·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어 서서히 준에게 망명하니, 준은 이에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했다. 한 대에 이르러 노관이 연왕이 되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 《사기》 조선 열전

그런데 고조 시기 연왕 노관의 난을 틈타 조선에 망명해온 연나라 사람 이 중국 유망민 세력을 결집했다. 위만은 사기에는 만이라고만 하고, 위략에서는 위만이라고 한다. 위(衛)는 성씨가 아니라 관직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남해군위(南海郡尉)였다가 남월을 건국자가 된 조타가 위타(尉陀)로도 불린 것에서 유추한 것이다. 위만이 망명할 당시 상투를 트는 조선식 복색을 하고 있어서, 이병도 등은 위만이 처음부터 조선인이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하지만 현대에는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는 학설이 강세. 어차피 당시에는 국적이나 명확하게 선그어지는 영토 및 국경도 없고, 특히 요동반도 같은 경우 진개의 요동경략 이후 연나라가 선양 등 중심지를 제외하고는 재지세력과 연나라 사람들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그냥 국가적 정체성이 모호한 변경 사람일 수도 있다. 너무 괘념치 말자.

위만이 유망민 세력을 결집한 것은 조선이 대륙의 혼란기에 획득한 빈 땅[21] 에 만을 책봉하고 중국 유망민을 배치하여, 결과적으로 신흥 세력의 결집이 쉬웠던 것이 작용했던 듯하다. 만은 한이 쳐들어온다는 거짓말로 준을 속인 후 준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뒤 수도를 왕험(검)성으로 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3.5. 위만조선의 운영과 멸망

위만은 즉위 직후 한과 외신(外臣)의 약조(約)를 맺고 중국에서 철제 농기구 및 무기, 가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적인 유물은 나오지 않아 철기가 아주 널리 쓰이거나 직접 제작되지는 못한듯 하다. 이러한 선진문화의 전수를 바탕으로 위만은 진번, 임둔까지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였고, 손자 대인 우거왕 대에는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이 (진국, 중국으로 표현) 한나라에 입조하는 것을 막고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였다.
會孝惠 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 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이때는 효혜제와 여후의 때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어, 요동 태수가 곧 만과 외신의 약조를 맺어 요새 밖의 오랑캐를 지켜 국경을 도둑질하지 않게 하고, 여러 오랑캐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듣고 허락하였다. 약조를 통해 만이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고 그 방면의 소읍을 침략해 항복시켜, 진번·임둔이 모두 복속하여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아들을 지나 우거왕에 이르러서는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인 것이 많았고, 입조하지 않았으며, 진번 방향의 여러 나라가 상서를 올려 천자를 뵈려고 해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사기』 조선 열전

이렇게 주변을 복속시켰다고 하였으나, 아래의 마한 왕과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마한과는 마찰이 있었고, 후에 전쟁을 할 때도 주변국의 원조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남부 한반도에 대한 복속은 위기 상황에서 도움이 될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국가들도 초기에는 그랬듯이 일종의 부족 연맹적인 성격을 가졌던 조선은 변방 세력이나 유력자들의 이탈이 때때로 일어나곤 했다. 기원전 128년 의 군장 남려가 이끄는 창해군이 이탈을 시도했고, 준왕의 몰락시에는 토착 군장 세력으로 추정되는 상(相)들 중에서도 이탈하는 사람이 있었다(역계경).

그러나 가장 큰 위협은 단연코 동북아의 패자로 떠오르는 전한이었다.. 한무제 유철이 제위에 오르면서 중국 대륙 주변국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고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강요되기 시작했다. 흉노 제국 원정으로 시작하여 남월이 원정 대상이 되었고, 조선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더불어 『사기』 위현전에서는
東伐朝鮮 起玄菟 樂浪 以斷匈奴之左臂。西伐大宛 並三十六國 結烏孫 起敦煌 酒泉 張掖 以鬲婼羌 裂匈奴之右肩。 單于孤特 遠遁于幕北。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고 현도와 낙랑을 세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서쪽으로 대완을 정벌하고 36국을 아우르며 오손과 관계를 맺고 돈황(敦煌) · 주천(酒泉) · 장액(張掖)을 세워 야강을 막아 흉노의 오른팔을 찢었다. 선우는 홀로 고립되어 멀리 막북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이를 보고 조선과 흉노의 연합전선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근거가 없다. 오히려 중화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다 똑같은 오랑캐라는 수준의 서술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에도 중국에서는 이민족들이 서로 손을 잡고 중국을 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망상을 종종 했으며 임진왜란 때도 조선과 일본이 손을 잡아 명을 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으니...

한나라와의 전쟁의 계기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 대해 불만을 제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섭하가 교섭에 실패하자 조선의 장군을 살해하고 도망간 사건이었다. 섬하가 조선 장군을 죽이고 오자 한 정부는 처벌은 커녕 도리어 섭하를 요동 도위에 부임시켜 공을 치하했다. 이는 조선과의 전쟁을 유인하는 미끼 작전으로 평가되는데, 과연 고조선이 군사를 파견해 섭하를 살해하면서 한과 고조선 사이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수군과 육군의 양동 작전이 이루어졌으나, 수군이 지지부진하고 고조선은 장기 항전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지연되자 한의 장군 측에서는 평화 관계를 제안해 왔으나, 한나라가 태자에게 호위 무장 없이 국경선인 패수를 넘으라고 요구한 것을 고조선 측의 태자가 거부하여 전쟁이 다시 개시되었다.

이후 고조선은 1년 간의 항전에 나섰으나, 장기화된 전쟁으로 조선 상(相) 세력이 이반하여 니계상 혹은 참(參)에 의해 우거왕이 살해당했다. 이후 성기에 의해 항전 세력이 수습되었으나, 끝내 한군에 의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 평양의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며, 산하에 존재했을 읍락국가들이 대두되면서 한국사는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3.6. 준왕의 남하

한편 준왕은 삼한 지역으로 망명하여 왕위를 이었다는 말이 있으나 이후의 대표적인 기록인 삼국지 등에 따르면 그 대가 끊어져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경 ' 마한 왕'이 백제 신라에 압박을 가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온조왕이 이를 멸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를 재야사학 등에서는 준왕의 왕계로 추정하지만 삼국사기 초기 백제 기록은 고고학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마한은 한번에 멸망하지도 않았고 한 나라도 아니다. 이에 더해서, 만일 준왕이 기원전 194년에 내려와서 마한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후에도 마한왕 작위가 이어진다고 한들, 온조왕 시대인 200년 후까지 그 왕가가 보존되었으리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아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내용은 전설적 내용으로서 비슷한 시기의 해모수신화나 삼국의 건국신화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맞다. 삼국사기의 초기의 국가 이름 역시 믿을게 못 되는데, 주변 소국들을 대략 뭉뚱그려서 말갈/마한/왜 등으로 후대에 윤색한 흔적이 보읻다. 삼국지 동이전만 해도 삼한 지역에 최소 80개의 소국이 등장하는데, 삼국사기 초기의 등장국가들은 다 백제, 신라, 낙랑, 말갈, 가야계 국가들, 왜 뿐이라는 것 부터가...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 其子 及 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준왕은) 그 좌우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가 한(韓)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 위략에서 이르기를, 기자와 그 친족들이 나라에 있으면서 한씨를 사칭하였다. 준왕은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그 후손은 끊어졌으나, 지금 한(韓)인들 중에 그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재위 38년(기원전 20) 봄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 진한,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워,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 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본기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
39년(서기전 19)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본기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王慙遂壞其柵。
재위 24년(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唇14)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 錦峴二城 固守不下。
재위 26년(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순망치한의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3.7. 후대에 미친 영향

고조선의 멸망 뒤, 이성계의 조선 왕조가 등장할 때까지는 이 이름을 쓰는 작위나 명칭을 쓴 사례는 고구려 멸망 후에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 당으로부터 조선왕(朝鮮王) 봉작을 받았다거나, 고려 시대에 이자겸이 조선국공(朝鮮國公)이라는 작위명을 사용했던 기록이 있다.

한편으로 고조선 후기와 멸망 시기에 걸쳐 많은 고조선 유이민들이 남하하면서 한반도 남반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고조선의 통치 체계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창기 통치 체계를 비교해볼때 유사성이 상당 부분 발견된다. 삼국 중 고구려는 건국설화에서 고조선이 아닌 부여 계승 의지를 표명했지만, 옛 고조선 중심부에 세워졌던 중국의 군현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평안도 일대 지역을 차지한 때부터 고조선 유민들이 고구려의 백성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이 때부터 기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오며 고조선에 대한 계승 의지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전의 400년 정도를 중국에 복속된 낙랑군 주민들을 고구려로 효과적으로 결속시키는데에는 적어도 춘추 전국 시대부터 존재했던 고조선을 강조하는 것이 가장 먹히는 방법이기는 하다. 그래서 기자에 대한 제사를 국가 주관으로 지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건국설화에서 보이듯 고구려의 정통성은 고조선과 동시기에 존재한 부여에서 갈라져나오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기 때문에 고조선 계승의식은 대놓고 강조하지는 않았고 조상국가 중 하나 정도로 여긴 듯하다.

위치상 고조선과 별로 관계가 없어보이는 신라 귀족층이 될 건국시기 6촌(=6부) 주민들이 고조선 멸망으로 남하한 유민들이라고 삼국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식이 언제부터 만들어 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22] 적어도 어느 시절부터는 신라가 고조선과의 관련성을 인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고조선이 멸망하는 시점쯤부터 영남지역 무덤의 부장품에서 선주민 세력 외에, 외래선진문물이 부장되는 사례가 늘어나는데 고조선과 한사군 유민이 남하해 선주민 세력과 공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와 가야의 건국신화와 여러 문헌기록에서도 고조선계 유민의 남하를 대놓고 시사하는 부분이 많다.

다만 남아있는 기록이 별로 없고 의외로 삼국 세 나라 모두 고조선에 대한 계승 의지를 구체적으로 표명한 것은 아니기에 현재로서는 알수 있는게 그리 많지 않을 뿐이다. 고려는 발해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고, 고조선에 대해서는 궁궐 내에 조선궁을 두었기는 했지만 서경 일대를 제외하면 그저 최초의 국가라는 점 정도의 인식이 고작이었는데, 12세기 이후에 혼란을 겪게 되기 시작하면서 백제 신라의 부흥 운동을 겪기도 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몽골 침입 이후 한반도 전체의 민족 의식이 성립되면서 의미가 부각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이용하였다. 한반도 최고의 국가라는 명분 외에도 고조선 세력권인 북방과 준왕이 왕위를 찬탈당한 이후 내려가 장악했다는 남방을 포괄할 수 있는 국가로 의미가 있었고, 고려 후기 들면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 이후에 고조선에 대한 의미 부각도 더욱더 강해져 이전보다 고조선을 자세히 기록한 역사서의 편찬 및 제사 의식으로 한동안 부각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기자 - 단군 - 동명왕을 한 곳에서 모시는 제사를 평양에서 지냈지만, 위만은 찬탈자로 취급하여 제사를 지내주지 않았다. 한편 단군을 평양에 배향하면서 삼성사는 잠시 훼철되었으나 성종 대에 삼성사가 복원되었다. 이곳을 계승한다고 하는 곳이 바로 현재 지리산의 삼성궁이다. 한편 양반 사이에서는 기자 8조법에도 노비제가 있다고 하여 노비 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인 모양이다. 안습. 이외에 8조법 중 전하지 않는 5가지는 분명히 오륜일 것이라고 억측을 하기도 했다.

중국 기록에 고구려의 제사 중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나, 중국 문헌에는 음사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숙종 이후 평양에 기자 사당이 세워졌고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황해도 구월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을 제사 지내는 삼성사가 존재했다. 조선 초에 나타난 『삼성당사적』에 따르면 9세기 초반에 세워졌다는 패엽사와의 갈등이 그려져 있어 연대를 그만큼 소급할 수 있겠으나 신빙성은 의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후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면서 한반도 전체의 숭배 대상이 될 수 있는 대상으로 한국사 최고(最古)의 국가인 조선 계승 의식을 폈다.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현재는 고조선(古朝鮮)이라는 명칭을 쓴다. 일부에선 더 이전에 존재한 국가에 고(古)를 붙이는 것은 잘못된 용법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렇지만 고려 시대에 지어진 삼국유사에서도 이미 위만 조선과의 구분을 위해 단군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러한 용법의 유래가 제법 깊다.

조선 후기에는 소중화 의식 및 자국 의식이 높아지면서, 단군과 기자에 대한 연구 및 추숭 작업이 활발해졌다. 16세기부터는 아예 기자 조선 시대의 계보도가 작성되는 등 존숭을 위한 일종의 역사 왜곡이 행하지기도 하였고, 17세기 후반부터는 단군 조선 또한 본기(세가가 아니라 본기인 것은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식화이기도 하다)에 포함되는 등 권별, 허목, 홍만종 등에 대해 역사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20세기 들어서 한국 민족주의의 핵심이 되기도 하였으며, 민족 사학자들에 의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기존에 있던 한국 측 사료가 빈약하고 근대에 발견된 사서들은 학계에서 위서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문헌적 연구 보다는 현재 사학계에서는 고고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상당한 진보가 있었다. 위/아래에 기록된 십이대영자 문화나 정가와자 문화를 고조선의 영향권과 관련짓는 시도는 21세기 한국고대사학계에서 고조선이 차지하는 시공간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 하나의 큰 이정표가 되고 있다.

4. 역대 국왕

고조선 역대 군주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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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
단군조선
1대 단군왕검 □대 기자왕*
□대 조선후 □대 조선왕
□대 부왕 말대 준왕
위만조선
1대 위만왕 2대 □□왕** 3대 우거왕
* 현재 기자 기자조선의 실존은 부정되는 추세이나, 엄연히 후대 임금의 조상으로서 문헌상 언급이 되고 있고 순서를 표시할 필요가 있어 서술해둔다.
** 위만조선 2대 임금의 실존은 분명하나 문헌상 특정되지 않아서 이름은 알 수 없다.
}}} ||

사실 자료 자체도 별로 없고, 남아있는 자료들도 신빙성이 의심되는 것들이 많다.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왕사 문서 참고.

5. 위치와 강역 논란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문제 또한 사학계의 꾸준한 떡밥이다. 기존의 사서 기록 및 평양 지역에 남은 다수의 설화, 그리고 일제강점기 본격화된 발굴 작업으로 인해 평양에 고조선의 수도가 존재했다는 평양 중심설이 주류설이었다. 다만 일찍이 신채호는 ' 삼조선설'을 제시하여 고조선의 범주를 확장했으나, 삼조선설 자체가 사료의 오독에서 비롯되었고 고고학적 근거보다는 본인의 추측에 의거하여 설을 전개하는 경향이 커 현재는 사장된 상태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고대사가들에게는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 북방식 고인돌, 거친 무늬 거울 등의 출토 지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영역을 파악하는 태도가 있어 왔으나, 비파형 동검 자체가 하나의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양식이 아니었으며, 토기 양식 또한 특정 문화의 파급 정도는 알 수 있어도, 국가의 영역을 파악하는 척도로 활용하기에는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어, 최근의 학자들은 이에 부정적이다. 애당초 비파형 동검 자체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세 가지 이상의 양식으로 나뉘어져 있다. 때문에 복식 등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조선의 영역을 추측하려는 시도 등도 존재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밝혀진 고조선의 영역은 실제로는 고조선을 중심으로 한 '문화권'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60년대 이후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 등이 종합되면서 북한 학계에서 요령 인근설이 제시되었다. 이후 한국 사학계도 이를 받아들였으나, 평양 중심설 또한 부정하기에는 많은 사료가 이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혼란상을 보였다. 고조선의 위치를 요령 인근으로 옮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료 중의 하나가 기원전 4세기 『전국책』 연 조에 등장하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다.
蘇秦將爲從 北說燕 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呼沱·易水, … (생략) …。
소진이 합종책을 위해서 북으로 가 연나라 문후에게 말하기를, "연의 동쪽에는 조선 · 요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 · 누번이 있고, 서쪽으로는 운중 · 구원이 있고, 남쪽으로는 호타와 역수가 있습니다. … (중략. 조나라와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설득함) …" 하였다.
『전국책』 연책편

현재 하북성 근처에 위치한 연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조선의 위치가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서다. 다만 '조선 요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논란이 많다. 다른 방위의 서술을 따져볼 때 조선과 요동을 별도로 해석하는 것이 설득력이 높지만, 조선은 국체이고 요동은 지명인데 둘이 병렬되어 있는 것이 이례적이라 해석을 놓고 논란이 많다. 이를 놓고 '조선의 요동'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요동 지역에 별개의 공동체가 존재했으리라는 가정을 하기도 한다. 아니면 요서 지역이 고조선의 중심지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어찌되었건 연의 가시권에 들어올 정도로 조선이 분명히 인식되었다는 점을 알려주며, 조선과 요동과 병렬되어 고조선이 요하 인근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강화해주는 사료 중 하나다.

한편 앞서 인용한 『사기』 오제본기에서도 약간의 단서가 주어진다. 조선의 구성원으로 추정되는 발(發)은 중국 기준의 북방에 존재했으며 산융과 식신 사이에 나타나는데, 산융이 요서 인근에서, 식신( 숙신)이 동만주 일대에서 활동했음을 감안하면 대략 그 사이에 존재했을 것이다. 대략 중국의 동북방이므로, 이는 발을 동이로 파악한 『일주서』의 기록과도 어느 정도 합치한다.

이외에 고조선이 요하 인근(요서 ~ 요동)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로는 연대 미상의 『 산해경』이 있다. 다만 『산해경』은 굉장히 판타지한 서술 때문에 사료의 신뢰성이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은 알아두자.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
『산해경』 해내북경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어 이름을 조선 천독이라고 한다(?). 그 사람들은 물에 살고[23] ,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 - 『산해경』 해내경

각주에는 '지금의 낙랑현이며 기자가 책봉을 받은 곳'이라고 하고 있으나, 평양에 고조선이 위치했을 경우 '바다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라는 서술과 어긋나게 된다. 이 때문에 보하이 해 인근(요서~요동)에 고조선이 위치했으리라고 보는 주장의 주요한 근거가 된다. 해내경에서는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라고 해 확인사살도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동해', '북해'라고 하는 것이 꼭 '동쪽의 바다', '북쪽의 바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중국의 주변이 '사해(동해, 서해, 남해, 북해)'로 둘러싸여 있다고 보는 고대 중국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표현이므로, 그냥 일반적인 '동방', '북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해내경의 구절은 뜬금없는 천독(天毒) 때문에 해석에 논란이 많다. 후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창료현(昌遼, 교려, 창려), 옛 천료(天遼)이며 요서(遼西)에 속했다.(昌遼, 故天遼, 屬遼西)라는 대목이 나오는 데다, 선비족이었던 모용황이 이곳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선공에 임명되는 일도 있었다. 또 한서 지리지에는 신찬이 말하기로는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 그래서 험독이다.(臣瓉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라고 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외에 조선이 ' 요하' 인근에 위치했다는 추정에서 시작해, 『산해경』 해내경에서 '요수가 위고의 동쪽으로부터 나서, 동남으로 흘러 발해 방향으로 흘러 요양으로 들어간다(潦水出衛皋東, 東南注渤海, 入潦陽)'이라고 한 것을 근거로 조선이 '동남쪽으로 흐르는' 대릉하 인근에 위치한다는 재야사학의 주장이 있으나, 이는 '潦水出衛皋東'에 달린 각주 '出塞外衛皋山. 玄菟高句驪縣有潦山, 小潦水所出. 西河(南)注大潦, 音遼(새외의 위고산이다. 현도(군)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어 소요수(小潦水)가 나온다. 서쪽 강이/서남쪽으로 대요(大潦)에 물을 대는데, 음을 '요(遼)'라고 한다)를 잘라먹은 것이다. 즉 해내경의 요(潦)는 소요수로 대요(大潦), 즉 요(遼) = 요하의 지류이며, 발해 방향으로 흐르다가 요양에서 합쳐지는 지류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고조선을 요령에 비정할 경우 고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지목하던 기존의 사료들이 붕 떠버리게 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일종의 절충설이 중심지 이동설이었다. 이동설에 따르면 이렇게 요령 지역에 존재했던 고조선이 평양을 중심으로 옮겨가게 된 계기는 앞서 말한 연과의 충돌이었다. 이는 후대에 나온 설이니만큼 양측 설과 고고학 유물에 따른 세력권에 대한 포괄이 가능해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학설 내에서도 연의 세력이 어디까지 미쳤는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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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번한은 문현과 번한현을 연칭한 것이 만번한으로 보인 것입니다. 문현의 위치는 지금의 계주 지역으로 보는데 이론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번한현이 어디있냐 했을 때 문현과 번한현은 소위 인접한 지역으로 상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번한현의 위치도 청천강 유역에서 찾기 보다는 오히려 요동 반도 쪽에서 찾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번한현은 성경통지에 의하면 대체로 지금 해성 지역으로 보입니다.”
서울대 노태돈 교수

이동설은 연이 조선을 쳐 강역 2000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에 의거하며 이는 청천강 이남으로 제한된 세형 동검의 출토 범위, 한반도 북부까지 진출한 연의 흔적(연화보 - 세죽리 문화권)과도 대강 합치한다. 이는 연이 최종적으로 획득했다는 '만번한'을 평안북도 박천에 비정한 이병도 이래 통설이었으나, 2000리가 과장된 표현일 것으로 추정하며 연의 세력이 청천강 북쪽까지 미쳤다는 것은 무리라는 설도 있다. 연이 고조선 땅을 쭉 밀어버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쭉 진출했다기보다는, 요동 반도의 해안을 중심으로 진출해 제나라와의 교점을 끊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고, 그 해안 인근의 중요 거점이 만번한이었다는 것.

2011년에 들어 연군현에 해당하는 요서 ~ 요동 일부의 일대의 미안구유형 유적과 주변의 연군현에 해당하지 않는 요동 지역 중앙 지역의 유적 / 유물간 비교 조사를 통해 요하 일대의 고조선과 연의 국경을 최대한 확실하게 알아보고자 하는 연구가 이루어져, 기존의 문헌과 추측에 의존한 연구에 비해 정확한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24] 위 논문을 기초로 만들어진 지도 링크. 연나라의 영역이 대동강 근처까지 뻗어있지만, 동시에 요동 지역 상당수를 토착 집단이 지배하고 있다. 어째 고조선 영역 관련 설 전체를 그럭저럭 만족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편 일부 사료를 들어 후기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 기사와 『수경』의 기록이다. 그러나 살펴보면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전기 고조선의 수도가 요서와 요동 사이에 있었으며 후기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이라는 설의 설득력이 좀 더 높은 편.
險瀆【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 臣瓉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 師古曰瓚説是也浿音普大反。】
험독【응소가 말하기를 조선의 왕 (위)만이 도읍한 곳으로, 물이 험하여서 '험독'이라고 했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 이곳은 마땅히 험독이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맞다. 패는 '보'와 '대'의 반절이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 조 주석

이 구절은 기본적으로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의 주석이므로 이미 본문에서 험독현이 요동군에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곳을 낙랑군이라고 본다면 일관성을 해치고 본문의 내용과 충돌하게 된다. '(요동군의) 험독은 마땅히 (원래부터) 험독이다'라고 해석하는 쪽이 자연스럽다. 참고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於海。
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고,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6세기의 역도원은 위와 같이 읽고 자신이 들은 내용을 주석으로 달았는데 이것이 수록된 책이 『수경주』이다. '서쪽으로 흐르는 대동강이 패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패수는 난하나 대릉하다'라고 주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許慎云 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十三州志》曰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蓋出其縣南/逕鏤方也。 … (중략) …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討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高句麗之國治 余訪蕃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 浿水西至增地縣入海。又漢興 以朝鮮為遠 (循)'脩'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 於事差謬, 蓋《經》誤證也.】
【허신이 말하기를 '패수가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일설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고도 한다.'고 하였다. 《십삼주지》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군의 동북쪽에 있고, 누방현은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 남쪽에서 나와 누방을 지나는 것이다. … (중략) … 우거왕 대에 이르러 한 무제 원봉 2년에 누선 장군 양복과 좌 장군 순체를 파견하여 우거를 토벌하였는데, 패수에서 우거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너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땅이 지금 고구려가 다스리는데, 내가 번국의 사신에게 물어보니 성이 패수의 남쪽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 물이 서쪽으로 흘러 낙랑의 조선현을 지나가므로 낙랑군의 치소가 있던 곳이며 한 무제가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패수는) 서북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한서》 지리지)에서 이르기를 '패수가 서쪽에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고 했던 것이다. 또 한이 흥할 때 조선이 멀었다고 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 지금과 옛 것을 고증해보면 차이가 있고 그릇된 것은, 아마 《수경》의 틀린 증명이다.】
참고

즉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본 결과 《수경》이 틀렸다는 것이다. 이미 6세기부터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고구려의 수도인 대동강 유역에 비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낙랑군과 직접 싸웠던 고구려가 틀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부의 주장으로는 동쪽으로 흐르면 모순이 생기고 서쪽으로 흐르면 모순이 안생기냐면서 역도원을 비난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일단 허신이나 십삼주지에서 말하고 있는 패수는 명백히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역도원 당시에는 이미 패수는 다른 하천을 지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아예 패수란 명칭을 가지는 하천 자체가 없어졌다.) 역도원 당시의 패수는 한반도 부근의 강을 지칭했던 것 같다. 따라서 한반도의 강이 동쪽으로 흘러가면, 굳이 강을 건너가지 않아도 되고, 서쪽으로 흘러야만 강을 건너서 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을 고구려 사람들에게 확인했고 그래서 수경이 틀렸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한편 정약용은 끊어 읽기를 다르게 하여 해석을 달리 했다.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東 入於海。
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임패현의 동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띄어쓰기의 중요성 어렵지 않게 풀린다. 이외의 설이나 이 부분의 내용은 이쪽을 참고. 대동강이 흐르는 지역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부분을 입해지로 보기도 한다.

이후석 숭실대 교수는 고조선의 강역과 만번한, 패수의 위치 문제를 고고학적으로 접근하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만번하는 천산 산맥 서변의 자연계선이고, 패수는 압록강이라고 주장한다. 고고학적으로 물질 문화를 살펴보면, 천산 산맥이라는 자연 경계를 기점으로 연의 물질 문화와 고조선의 물질 문화가 구분되어 나타난다. 또한 압록강을 기점으로 한의 물질 문화 분포와 위만 조선의 물질 문화 분포가 구분된다. 관련정보

6. 문화

6.1. 문자

고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남겨진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고조선 멸망 직후에 적힌 사기나 후대의 염철론, 삼국지 같은 서적에서 고조선에 대해 나오기는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적힌데다가 그다지 상세하게 적히지 않아 이것만으로 고조선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아내기에 한계점이 분명하다. 그리고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의 화폐와 에서 수입된 진과(秦戈)의 명문 등 극소수의 한자 유물을 제외하면 고조선에서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고조선 후기에 중국으로부터 유민들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문자의 사용이 시작될수도 있지만 이것 또한 불확실하다. 덕택에 현재까지 고조선에 대한 연구에 크나큰 장애물로 남고 있다. 물론 음성언어나 기타 타국 언어로라도 기록된 자체적 기록물 역시 남아있는 것이 없다.

6.2. 청동기와 철기

과거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도기, 탁자식 고인돌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권 전체를 고조선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는 고조선 및 관련 문화권 전체로 보아야 마땅하다. 어쨌거나 고조선은 요서 지역, 요동 반도, 남만주부터 한반도 북부에 걸쳐 있는 문화권을 기반으로 한다. 기원전 어느 시점부터 중국의 철기 문화를 수입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2세기 경에는 한과의 약조를 통해 철기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반도 전체로 철기의 제작이 확대되는 것은 원삼국시대 중후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다.

6.3. 신화

건국 신화로는 단군 신화가 존재하나, 그것이 고조선 시대부터 전하던 것인지 아니면 고조선 이후 어느 시점에 만들어져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고기(古記) 및 『위서(魏書)』라는 출처를 명시했으나, 고기의 정체는 불분명하고 『위서』 또한 어느 위나라의 문서인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위서』의 '위'가 위(魏)로 적힌 것과 삼국유사에서 '위만'이 '魏滿'(반면 위략에서는 衛滿)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대에 위만 조선에 대한 역사 의식을 표방한 독립적인 사서가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잠부론』 등에서도 '魏滿'이라고 했으므로 근거는 빈약한 편. 한편 동명왕편을 지으며 이규보는 『위서』와 『통전』의 기록을 읽어보았으나 중국의 기록이라 그런지 기록이 자세하지 못하다고 했는데, 이 『위서』가 일연이 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현재 단군 신화가 기록된 문헌들도 삼국유사 제왕운기, 묘향산지 등의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또한 황해도의 점제현 신사비가 고조선 계통의 신앙 구조를 반영한 것이라면, 산신(山神)에 대한 숭배가 존재했을 수 있다. 삼국사기 동천왕 본기 21년 조에서는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고려 중기 김부식이 덧단 기록일 가능성이 크나 후에 고조선이 신선 사상과 관련하여 연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6.4. 정치 체계

미흡하나마 왕, 장군, 대부, 상, 비왕 등의 관직 제도가 확인되기 때문에, 중국식의 관료제에 관한 문화를 수입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혹은 토착 세력을 중앙 관료화 시킨 이후 중국 측에서 이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중국 관직 제도가 투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조선에서 10월에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그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牛蹄占)을 행했다'

7세기 경의 『토원책부』에 인용된 『위략』의 내용이 발굴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흔히 동예의 제천 행사로 알려진 무천이 고조선의 풍속이었다고 한다. 또한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 이는 전형적인 예 계통의 풍습이기는 하나, 동북아 전역에서 널리 행해지는 제천행사의 형태들이 그리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점이 고조선의 주요 구성 세력을 추정하는 한 가지 단서는 될 수 있다.

6.5. 법률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한의 법률은 시행 흔적만 보이고, 독자적인 8조법이 유지되었다. 초보적인 법률의 모습을 보이며, 강한 강도의 처벌법으로 평가된다. 노비제의 출현이니 인명의 존중이니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사 한국사 시간에 배우는 내용이니 여기서는 생략. 기자에 의해 8조법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료의 오독으로 전하게 된 것이다.

한서』의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기자가 조선으로 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전잠, 직조를 가르쳤다. 낙랑 조선 백성의 범금 8조는…)를 『 후한서』 등에서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 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기자가 조선으로 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전잠, 직조를 가르쳤으며, 낙랑 조선민에게 범금 8조를 가르쳤다.)로 오독하였고, 이것이 후대의 사서에 답습되면서 벌어진 오해다.

다만 후에는 한의 상인 등이 유입되면서 사회 생활이 복잡해지고 60여 개의 법 조항으로 늘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거 낙랑군에는 한의 법률이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나, 최근 한의 법률이 담긴 목간의 발굴로 재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함몰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25]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26]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고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8조의 법금(法禁) 중 현재 전해지는 3개 조항에서, 화폐 개념과 노비의 존재, 그리고 사유 재산에 대한 보호 조치를 볼 수 있다. 청동기 후기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 분화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촌락에선 공동체적 관계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

6.6. 음악

공무도하가(공후인)가 고조선의 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문헌을 읽기에 따라 고조선인 백수광부의 아내가 지었다는 설, 지나가던 뱃사람 곽리자고가 지었다는 설,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었다는 설로 나뉠 수 있다.

6.7. 의복 및 금속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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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갑옷은 위만 조선 이전 대에는 옷에 청동 단추를 잔뜩 단 형태였다. 위만 조선 시대에 철기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작 고고학적 근거는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는 석기가 널리 사용되었으며 제기를 중심으로 청동이 일부 쓰인 듯 하다.

『한서』 지리지를 통해 고조선의 풍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며, 위만의 입국 기록을 볼 때 상투를 틀었으며 중국과는 다른 복식을 갖췄음을 알 수 있다.

7. 현 중국 학계의 관점

출처는 바이두 백과 古朝鮮

(해석)

고조선은 한무제 당시 설립된 한사군(기원전 108년) 이전, 고대 한반도 북부의 초기 국가의 명칭이며 주로 중국 역사에 기록된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2개 왕조는 제후국이자, 번속국이다. 이들 조선은 남한이나 북한의 역사에 속하지 않는, 중국 고대의 지방정권이다. 문화와 혈통 모두 남한이나 북한의 역사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북한과 남한은 후세에 지어낸 전설에 나오는 단군조선이 고조선이라고 주장한다.
  • 개요
고조선을 다루는 개념은, 기타 국가(타국)의 학자와 남, 북한학자들의 이해가 다르다. 기타 국가의 학자들의 주요 핵심 단어는 신사(信史 : 기자, 위만 그리고 한사군) 생성 이전, 한반도 지역의 고대 문명이다. 그리고 북한과 한국이 말하는 고조선, 대부분 합쳐 부르길 단군 조선과 위만 조선이고, 기자 조선의 존재는 승인하지 않는다. 13세기 말 고려 왕조 사기 삼국유사엔 기자 조선, 위만 조선을 말하고 있다. 근거로 한사지리지에 적힌 현만, 낙랑, 한 무제 시기에 선립, 이름 조선, 예초(더러운 담비), 구려만이(구려 오랑캐)등 이곳을 조선과 고려로 합쳐 불렀다. 고조선과 고구려 당시를 두 곳을 별개의 부족 군체로 설명하고 있다. 후한서 고구려전에 따르면, 고구려 남부와 조선은 상접해있다. 고구려 당시 고조선을 영유하지 않다고 설명하며, 고조선은 고구려에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 전설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이 집필한 사서인 삼국유사와 이승휴가 집칠한 제왕운기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제석환인(환인즉제석, 제석천, 별도의 명칭으론 환인)의 얼자환웅이 인류와 함께 생활하기를 원했다. 환인의 동의를 얻은 후, 환웅은 약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강림, 신시를 건립한다. 데리고온 풍백, 우사, 운사 등을 제외하고도, 환웅은 법률과 불규, 그리고 강종각양의 예술과 의학, 그리고 농업 기술을 인류에게 알려준다.

이를 근거로, 당시 산동(중국의 산동 지방)중의 호랑이와 곰 한마리씩이 와 환웅에게 인간으로 변하게 해주기를 권한다. 환웅은 그들에게 20편의 쑥과 마늘을 건네준 뒤, 백일동안 이것을 먹으며 태양을 보지 말고 살라고 일러준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이로 인해 인간이 되지 못한다. 곰은 21일째 되는날 여자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다. 웅녀는 남편이 없음으로, 신단수 아래에서 재차 환웅에게 자식을 달라고 기도한다. 환웅은 웅녀의 기도를 받아들여 웅녀를 처로 받아들인다. 서오로 삼는다. 후에 웅녀가 아이를 낳자, 그것이 바로 단군 왕검이다. 단군은 신화 전설 중에 산신이 된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민족 의식과 애국심을 높이기 위해서, 단군이 조선을 건국한 전설을 북한과 한국 교과서 중엔 쓰여지고 있다. 단군은 중국 역사 교과서를 근거로하면, 단군 조선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의 교과서 안에서 역시 단군 조선의 기록은 없다.

조선과 한국학자들이 말하길, 단군 조선 전설 중 조선 정권이 존재함이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이를 이를 들어 말하자면, Willian T. Sanders와Barbara J. Price이 제안하는 4단계인 유단, 부락, 족장제(酋邦), 국가, 그리고 국가 형성에 필요한 2개의 논술인 (1)혈연 관계의 국가 조직상 피지록관계와 그 치환, (2)합법적 무력을 가짐, 등 단군 조선 문화는 부락 혹은 족장제 문화일 가능성은 있을지언정 국가가 아니다. 일단 발전된 농업과 초보적인 수공예,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민족 문자가 없거니와 한자(汉字 : 동시에 한자는 이미 발전이 성국해져있다.)의 사용 등이 있다. 그러나 중국 동북 지역에 출토도는 많은 수의 상, 은, 주 초기 시대 청동기와 아후(亚侯 : 제후국),기후아실(其侯亚矢), 연나라 제후국(匽侯 즉 연후燕侯)등이 새겨져 있다.

북경 대학 동북아 연구소 소장, 세계사 연국소 소장, 원북대 역사계 부계 주임, 역사학자 송성유 교수가 소개한, "한국 역사가가 강조한 국사, 한국 역사가 가지는 5천년에 대해, 고조선 건국 신화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는가?"의 신화 중 천신 단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백산 산정의 신단수 아래에 건립한 하나의 신지 세계이며, 그(환웅)와 웅녀가 낳은 아이 단군, 즉 인간이 창건한 고조선, 조선의 시조 왕의 탄생이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삼킨 후,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중국에 망명하였고, 침략에 반항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웠으며, 그 역사학자들은 힘을 흡수하여(합치며) 한국의 독립성을 강조, 후에 이르러 한국 역사계 중 민족 사학이 유파가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성립 후, 민족 사학들은 한국 교단 사학의 삼대 유파 중 하나가 된다. 또한 환빠라 불리는 비학자민간 인사들, 신화 이야기를 좋아하고 민간 전설과 평서 강의와 진실의 역사를 혼란에 빠뜨리게되어, 사회 안에서 크게 유효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불교 용어 중 환인은 제석환인으로 약칭되어 제석천으로 이르며 그 때문에 제석환인은 약칭 제석 혹은 석제 등으로 불릴 수 있다. 환인은 즉 제석의 관념에서 나온 불교 사상이며, 원천은 법화경, 그 이야기는 관불삼미해겨으 화엄경 등 불교 경전 중 자주 등장하는 우두 전환(소머리 괴물이다.) 또한 등장하는 천왕과 부인 등은 종교 용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본기에 의거하면 372년 전주후진이 보낸 견사(사신)및 부도(사탑 혹은 승려)가 불상, 경문 등을 보냈다, 374년 승아도래(승려가 오다), 375년 소수림왕 : 소문사를 창립이 매우 순조롭다. 이불람사를 역시 도달해 해동의 불법이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불교는 372년부터 시작, 단군 왕검 신화는 적어도 공년 4세기 이전엔 불가능했을 것이다.
  • 단군 신화 중 태백산에 대하여
고려 승려인 일연(1206년 ~ 1289년) 삼국유사의 설명에 따르면 태백은 곧 소향산이라고 한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선 소향성, 부동 130리, 일명태백산이라고 하며, 후세 학자 역시 대부분 태백산을 초기엔 소향산으로 생각했으나, 대략 18세기 말 조선인의 시작을 태백산 정립을 백두산 혹은 장백산이라고 했다. 그 대표 인물은 안정복(1712년 ~ 1791년)의 동사강목 태백산고 에서 신라 문인 최치원의 상태사시중태의 고구려의 남은 사람끼리 끼리끼리 모여 있여(残孽类聚), 북은 태백산 아래에서 국호를 발해라고 설명함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 사람이 해설하기를 태백산은 백두산 혹은 장백산, 그후 줏대없는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다(附和者渐众) 현재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그르치고 있는데, 단군 신화의 태백산은 장백산과 동일함으로 오늘날의 중국 동북 시각에선 고조선은 중국의 강역(지배지)에 속한다.

7.1. 현 중국 학계 관점의 문제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국가적인 능력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베트남 또한 한자를 예전에 사용한 바 있고 일본 또한 한자를 사용하는 와중에서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일본이나 벨기에 같은 나라가 국가적인 능력이 없다 말할 수 있을까? 특히 민족 문자로 국가의 성립을 논한다면 문자가 없던 국가들은 무엇이 되는가?

다만 단군 조선의 역사성에 대한 논란은 국내 학계에서도 있다.

우리 역사가들이 고조선을 역사로 올리는 이유가 민족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분명 우리 나라 고대 국가들이 고조선을 정신적으로 계승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8. 대중매체에서의 고조선

  • 아스달 연대기

9. 관련 문서



[1] 고조선에 관한 한국 중국의 문헌에 따르면 고조선의 남부 영역은 한강 이북( 경기도 북부), 강원도, 경상도 북부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제왕운기, 사기에도 고조선의 영역이 진한 땅과 접하고 있었다고 나온다. 이 때문에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 중남부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중국 사서( 사기, 후한서)에서는 의 영역을 전부 고조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유물의 수효도 매우 적고 고조선 멸망 이후 여러 소국이 난무하였다는 점을 들어 고조선은 거대한 영역 국가가 아닌 읍락 국가들을 통솔하는 세력으로 볼 수 있고, 국가의 경계선을 특정 사서를 기준으로 소급하는 것은 무모한 행위라는 의견도 있다. [2] 지금의 평양이다. [3] 고조선의 군주가 단군이라고 불렸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단군 신화를 통해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록이 시작된 이래로 조선 안에서든 밖에서든 지배자를 단군이라고 한 기록은 환단고기밖에 없는 듯. [4] 조선의 지도자를 중국에서 후로 불렀다고 한다. 물론 주나라 왕실이 직접적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전국시대 각국의 지배자인 제후들과 동등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王)의 경우는 중국의 전국칠웅 주나라의 약화와 더불어 공, 왕을 칭하게 된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기록에서 연나라를 따라 고조선의 군주( 조선후)가 후(侯)에서 왕(王)을 칭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5] 한씨 족보 등을 통해 전해지나, 실제로 해당 시대에 성씨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고구려 초기까지도 당시 중국에서 사용되던 의 의미로 사용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6] 춘추전국시대 진한교체기, 위만조선기에 유입되었다. [7] 현대 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단군조선 다음은 위만조선으로 본다. [8] 연소왕이 진개를 보내 조선을 토벌한다. [9] 성립 이전이라는 말은 학문적으로는 옳지 않다. 성읍국가라는 현상 자체는 고조선보다 앞선 시대에 나타나 이들과 공존하였으며 삼국시대 초중기까지 혼재. 단순히 선후관계로 파악할 수는 없다. [10] 북한에서도 고조선 유적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어 1960년대에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에 있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1960년대 중후반에 고고학계에 한 차례 숙청 바람이 분 이후에 여러 문제로 신뢰성이 낮아졌다. [11] 그나마 제나라 등 중국 동부 국가들과 무역이 이루어졌다는 걸 확인할 수준은 되기는 하다. [12]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역사서를 없앤 진시황 분서갱유도 고조선과 관련한 서적 부족에 한몫했다. 이 과정에서 진나라가 편찬한 역사책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국가의 역사책을 분서했는데 특히 고조선과 치고박았던 연나라가 집필한 사서 대부분이 분서갱유로 소실됐다. 다만, 연나라가 고조선에 관한 사서를 남겼다는 보장이 없기는 하다. [13] 다만 이런 관점 자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애초에 역사는 진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인데, 사실 자료도 부족하고 시대적 한계도 있는 고대국가의 강역이나 길이 문제는 답없는 논쟁이라 잘못하면 걍 맹목적인 국수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 사실 미국만 봐도 알 수 있듯 한 나라 역사의 길고 짧음은 그 나라의 번영과는 크게 관련없다. 심지어 단일민족 환상이 깨지는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어선 더더욱.. [14] 삼국유사에는 주석으로 "고조선이 요임금 즉위 50년인 경인년에 건국되었으나... 요임금은 무진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 이라고 서술하였다 [15] 이에 관해서는 아래 9세기 ~ 8세기 설 참조 [16] 사실 이는 고조선의 건국이라기보다는 한반도 문명의 시작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7] 한반도의 청동기 유물들은 실제로 청동기가 아니라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는 토기, 석기류를 포함하기 때문에 실제 청동 제품이 나오는 연대는 생각보다 짧은 편이다. 한반도 내에서 청동기의 발굴 연대는 보편적으로 기원전 10세기 정도를 상한으로 보고 있으며, 고조선의 성립 지역으로 유력하게 보는 요령 지방에서는 기원전 12세기 경으로 잡히고, 빨라도 기원전 15세기를 넘기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청동기 유물의 수량이 매우 적거나 다른 유적에서 청동기와 병행되는 토기 등만 출토되는 것을 청동기로 편입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한국 고고학계 내에서 신석기 후기와 청동기 전기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다. 때문에 최근에는 청동기 시대라는 단어 대신 토기를 기준으로 삼아 민무늬 토기 시대라고 부르는 경향도 혼재되어 있다. [18] 대체로 원로 교수나 서울대 쪽 교수들이 부정적이고, 젊은 교수들이 긍정적이다. [19] 다만 조선의 국호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요동 지방의 선대 고조선 문화는 오히려 한반도 남부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반도 북부는 고유의 문화적 양상이 비교적 보존된다는 점은 아직까지는 미스터리이다. [20] 요동 반도 전체를 연나라가 점령했다는 것이 과거 학계의 중론이었지만, 최근에는 고고학의 성과로 인해 요동 반도 곳곳에 아직도 상당수의 고조선 문화가 남아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즉, 연나라가 요동 반도의 중요 거점만 장악하고 전 요동을 장악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21] 한반도 서북단 및 요동반도 동부 일대로 추정 [22] 다만 삼국사기 저술시 삼국지를 참조했다면, 진나라 유민들이 진한에 부역을 피해 다수 왔다는 등의 전승을 이용했을 수도 있겠다 [23] 현재까지 드러난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해보면 요서부터 랴오둥 반도, 한반도 북부 황해도와 강화도까지 보하이 해 황해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보면 산해경의 이러한 진술은 해상 중심의 국가였음을 지칭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24] 관련 논문 : 기원전 3세기 요령 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 유적과 연 문화의 관계 / 오강원, 한국 상고사 학보 / 2011년 [25] 50만 전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액수인데, 사마천이 사형 혹은 궁형을 면하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돈이 50만 전이었으나 마련하지 못했다라는 점에서 한나라의 규정과 관련 있다고 본다. 이는 고조선 시기에는 없던 단서 조항을 낙랑 대 이후 삽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26] 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 [27] 참고로 이때는 마을 회관에 전투력이 없었고, 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28] 개천절 특집으로 고조선을 소재로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