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3 20:34:46

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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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왕 □왕 우거왕
' 기자'의 재위 및 '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인정되지 아니함.
' 한후'는 고조선 군주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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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후작
韓侯 | 한후
<colbgcolor=#820000><colcolor=#ffd400> 작위 후작
설립 불명
폐지 불명
초대 불명 / 기자
말대 불명
국가 고조선 추정 (논란)
주군 주나라 천자

1. 개요2. 주성왕 시기3. 주여왕 시기
3.1. 시경 한혁편 전문
4. 관련 연구5. 참고

[clearfix]

1. 개요

고대 주나라 제후( 후작). 초기 고조선의 군주로 추정되는[1] 인물들을 지칭하는 말이며, 그들이 세습한 지위이기도 하다. 후한 시기의 인물 왕부(王符, 78 ~ 163)는 <<잠부론(潛夫論)>>을 통해 토착 고조선( 단군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이 한왕을 칭했다는 점에서 한후와의 연관성을 주장하였다. 윤내현 교수는 한후의 한을 조선의 오기로 해석하였다.[2][3]

21세기 기준 이들이 고조선의 군주가 맞는지 여부에 대해 긍정설과 부정설 두 시각이 존재하며, 한 의견으로 귀결되지 못하고 양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문 등이 병존하는 상황이다.

주 시기에 저술된 기록에선 두 명의 한후가 등장하는데, 선대 한후는 주성왕 시기의 기록에서 언급되며 후대 한후는 윤길보(尹吉甫)가 지은 시경 한혁(韓奕)편에 언급된다.

한후의 봉국인 한나라는 전국시대의 한나라와는 별개의 세력으로 최소 400년 차이가 난다. 또한 주무왕이 왕자에게 분봉한 희한(姬韓)과는 다른 별개의 세력, 즉 중국인이 아닌 한인(韓人, Ethnic Koreans)으로 구성된 국가라고 한다.[4]

2. 주성왕 시기

시호 불명
작위 한후(韓侯)
성씨 불명
불명
선대 군주 불명
생몰년도 ? ~ ?
재위년도 기원전 11세기 경
(周成王) 十二年 王帥 燕師城韓 王錫韓侯命
주성왕 12년 왕이 연으로 하여금 한 후국을 위해 성을 쌓게 하고 한후에게 명을 내렸다.
죽서기년

기원전 11세기의 한후로 그의 주군인 성왕은 연나라로 하여금 한(韓) 후국을 위해 성을 쌓게 한 뒤, 한후에게 명(또는 작위)을 내렸다고 한다. 기자가 조선후로 책봉 받은 시기가 무왕조(武王朝) 시기로, 성왕 시기의 한후와 시간차가 적지만 동일 인물은 아니다. 기존의 문헌 및 조선후 세습 설을 따르면 기자의 후손이겠으나, 현대에는 기자 및 그가 세운 기자조선이 부정되기에 토착 고조선 세력의 군주로 분류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고조선의 군주라는 설을 채택할 시, 청주 한씨 족보에 따르면 3대 군주인 경효왕(敬孝王) 순(詢)에 대응하나 족보는 조작의 가능성이 있어 이러한 내용은 인정받지 못한다.

3. 주여왕 시기

시호 불명
작위 한후(韓侯)
성씨 불명
불명
후비 희씨(姬氏)
선대 군주 2의 한후
생몰년도 ? ~ ?
재위년도 기원전 9세기 경

기원전 9세기의 한후로 주나라에 입조해 표범 가죽, 말과 곰 가죽을 비롯한 조공을 바침과 동시에 여왕의 명을 받들고 귀국했으며 주여왕의 질녀 희씨와 혼인해 천자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윤길보는 이 모습을 보고 천자를 칭송하는 시를 남겼다고 한다.

선대 한후와 마찬가지로 기존 문헌 및 조선후 세습 설을 따르면 기자의 후손이겠으나 현대에는 기자, 기자조선이 부정되기에 혈통 여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한 성왕 시기 한후와의 관계 역시 전해지지 않으나, 토착 고조선 세력의 마지막 왕 준왕이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기원전 828년 여왕이 폭정으로 축출당하자 한후의 땅인 분수(汾水)로 도주하였는데 이로 인해 분왕(汾王, 분 땅으로 도주한 왕으로 조롱의 의미)이란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 한후는 주선왕 시기의 기록에도 언급되며, 주선왕은 한후의 영지에 있는 성을 보고 감탄했다는 대목(大矣彼韓國之城)이 전해진다.

고조선의 군주라는 설을 채택할 시, 청주 한씨 족보에 따르면 이 시기의 한후는 문혜왕(文惠王) 염(炎)[5]에 대응하나 족보는 조작의 가능성이 있어 21세기 기준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3.1. 시경 한혁편 전문

다음은 시경(詩經) 한혁편의 전문으로, 주여왕~선왕 시기 한후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奕奕梁山,維禹甸之。 크고 큰 양산(梁山)은 우임금이 다스리셨네

有倬其道,韓侯受命。 밝으신 그 도로 한후(韓侯)가 명을 받았네

王親命之,纘戎祖考, 왕께서 친히 명하시어 그대의 조상 공적을 이어

無廢朕命,夙夜匪解,虔共爾位。 짐의 명령을 저버리지 말고 낮밤 없이 게으르지 말며 그대 지위 삼가 공경하라.

朕命不易,榦不庭方,以佐戎辟。 짐의 명령은 바꾸지 않으리라, 내조하지 않는 제후 바로 잡아 그대의 임금 보좌하라.

四牡奕奕,孔脩且張。 네 필 수말 크기도 하며 길고 큰 몸집 당당하네.

韓侯入覲,以其介圭,入覲于王。 한후가 들어와 왕을 뵈올 제 그 큰 홀[圭]을 받들고 왕에게 인사드리네.

王錫韓侯,淑旂綏章。 왕께서는 한후에게 하사하시니 무늬 있는 깃대와

簟茀錯衡,玄袞赤舄。 새깃 깃발 대자리 덮개와 고운 멍에채. 검은 곤룡포에 붉으신 고리달린 말배띠와

鉤膺鏤鍚,鞹鞃淺幭,鞗革金厄。 무늬 있는 당로 수레의 가로막이 나무 턱, 호피덮개 고삐 줄 황금고리였네.

韓侯出祖,出宿于屠。 한후 노제를 지내고 가다가 도(屠)땅에 머무셨네

顯父餞之,清酒百壺。 현보(顯父)가 송별잔치 하니 맑은 술이 백병이나 되네.

其殽維何?炰鼈鮮魚。 그 안주는 무엇인가 구운 자라와 싱싱한 생선이네.

其蔌維何?維筍及蒲。 그 나물은 무엇인가 죽순과 부들이었네.

其贈維何?乘馬路車。 그 선물은 무엇인가 네 필 말과 큰 수레네.

籩豆有且,侯氏燕胥。 대그릇 나무그릇 많기도 하니 한후 기뻐하여 즐기네.

韓侯取妻,汾王之甥,蹶父之子。 한후가 장가를 드니 분왕(汾王)의 생질이요 궤보(蹶父)의 따님이네.

韓侯迎止,于蹶之里。 한후가 아내로 맞이하러 궤씨네 마을까지 갔네.

百兩彭彭,八鸞鏘鏘,不顯其光。 많은 수레 의젓하게 달리며 여덟 말방울 딸랑거리니 그 빛 매우 밝았네.

諸娣從之,祁祁如雲。 따라오는 여러 몸종들 줄지은 것이 구름 같네.

韓侯顧之,爛其盈門。 한후가 뒤돌아보니 찬란한 빛 그 문 안에 가득하네.

蹶父孔武,靡國不到。 궤보는 매우 용감하여 가보지 않은 나라 없으며

為韓姞相攸,莫如韓樂。 딸 시집보낼 곳을 찾아보니 한나라만한 곳이 없더라네.

孔樂韓土,川澤訏訐。 즐거운 한나라 영토여, 시냇물 못물이 넘쳐흐르고

魴鱮甫甫,麀鹿噳噳。 방어와 서어 뛰놀고 암사슴 떼지어 풀을 뜯고

有熊有羆,有貓有虎。 곰과 말곰이 있으며 살쾡이도 있고 범도 있네.

慶既令居,韓姞燕譽。 이미 좋은 곳을 가려 잔치하니 궤보 딸도 좋아하네.

溥彼韓城,燕師所完。 높은 저 한나라 성은 연나라 백성이 완성시켰네

以先祖受命,因時百蠻。 조상의 명을 받들어 여러 오랑캐를 다스리시니

王錫韓侯,其追其貊。 왕께서 한후에게 추나라와 맥 땅까지 내리셨네

奄受北國,因以其伯。 북쪽 나라 맡아 다스리고 그곳의 제후가 되셨네

實墉實壑,實畝實藉。 성 쌓고 호 파고 밭 정리하고 부세하여

獻其貔皮,赤豹黃羆。 비가죽(貔皮)과 표범가죽 누런 말곰가죽을 바치네.

4. 관련 연구

  • 정형진, 『시경』 한혁편의 한후와 한씨조선에 관한 새로운 견해, 고조선단군학 13, 2005
  • 박준형, 기원전 7세기 중반 동북아시아 국제관계와 고조선의 위상, 백산학보 106, 2010
  • 심재훈, 상쟁하는 고대사 서술과 대안 모색 - 시경 한혁편 다시 읽기 - , 동방학지 137, 2007
  • 조영광, 초기 고구려 종족 계통 고찰, 동북아역사논총 27, 2010
  • 오현수,『詩經』「韓奕」篇의 韓城과 韓侯, 백산학보 96, 2013
  • 오현수, 古朝鮮의 形成과 變遷過程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 조원진, 예맥・조선과 서주・춘추 제와의 교류, 한국고대사학회 33, 2019

5. 참고


[1] (중략) 지금까지의 고찰로서 분명하여진 것은 위의 韓侯가 고조선의 통치자를 지칭하고 있으므로, 고조선은 西周王國의 宣王 때인 기원전 9세기에 이미 중국 동북부지역의 霸者로 군림하여 西周王室과도 통혼관계를 맺고 깊은 교류를 가졌다고 하는 점이다. - 윤내현 [2] 참고. [3] 그외에도 연(춘추전국시대)과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한후 세력을 하북성 북부에 있었던 국가나 정치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4] 참조. [5] 족보에 따르면 의양왕의 아들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