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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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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申3. 新
3.1. 역대 황제

1. 개요

중국 역사 속에서 이라는 국명을 사용했던 국가.

2.

사실상 춘추전국시대의 원흉.

주나라의 서주(西周) 시기에 있었던 국가. 백이의 후예라고 하며 성씨(姜), 작위 후작. 현재의 남양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나라의 태자가 외손자였기 때문에 권력의 실세로 자리잡았으나, 태자가 물러날 위기에 처하자 , 서융, 견융 등을 불러들여서 이들과 연합하여 주나라를 공격, 춘추전국시대의 계기를 제공한다. 이윽고 춘추시대 초기였던 기원전 688년에 초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3.

중국의 역사 中國歷史
{{{#!folding 열기 · 닫기 기원전 1600년 ~ 기원전 206년 기원전 206년 ~ 907년 907년 ~ 1644년 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년 ~ 907년
기원전 206 ~ 220 십팔제후왕(十八諸侯王)
초한전쟁(楚漢戰爭)
한(漢)
전한(前漢)
신(新)
현한(玄漢)
후한(後漢)
220 ~ 265 삼국(三國) 위(魏) 촉한(蜀漢) 오(吳)
265 ~ 436 진(晉) 서진(西晉)
동진(東晉)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439 ~ 589 남북조(南北朝) 송(宋) 북위(北魏)
제(齊)
양(梁)
한(漢)
후량(後梁)
서위(西魏) 동위(東魏)
진(陳) 북주(北周) 북제(北齊)
581 ~ 619 수(隋)
618 ~ 907 당(唐)
무주(武周)
}}}
중국의 역사
전한(서한) 현한

위의 신(申)나라가 춘추전국시대의 원흉이라면 이쪽은 어떻게 보면 ( 동탁 십상시를 넘어) 결과적으로 삼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의 진정한 원흉이라고 볼 수 있다.

전한 후한 사이에서 잠깐 있었던 단명 왕조로 일반적인 역사 구분에는 역대 왕조에 포함되지 않지만 전한과 후한 사이에 공백이 있기 때문에 서술한다. 전한의 관료였던 왕망 쿠데타를 통해서 건국했다. 당시의 문제였던 호족 지배를 타파하고자 급진적인 토지 제도와 정책을 시행했으며, 흉노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인 정책 때문에 각계각층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를테면 왕망은 신을 건국하면서, 모든 관료의 봉급을 없애고 순수 봉사직으로 만들어버렸다. 충공깽 왕망은 모름지기 관리란 백성에게 봉사할 마음으로 해야지 돈 벌 목적으로 해먹으면 한나라 꼴 난다 생각하여 이렇게 관료제를 개편한다. 신 왕조에 빌붙으면서 그래도 개국 공신인데 좀 챙겨주겠지 설레발 치던 신나라 처음이자 마지막 관료 계층은 문자 그대로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뇌물에 의존하게 되었고[1] 이는 신을 말아먹는 직격탄이 되었다. 농민은 농민대로 망한 것이 유교제당, 유학소 등의 몇몇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유재산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고, 은주 시대의 정전제(井田制)를 강제로 시행하게 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공산주의자? 그나마도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후닥 끝내버려서 호족, 평민 할 것 없이 엄청난 혼돈에 빠지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호족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는 의도는 좋았지만, 그 방법이 너무 막가파라서 제대로 시행되지도 못하고 혼란만 가중된 셈.

흉노 선비, 고구려와 같은 주변국 지도자의 칭호를 제멋대로 고치고, 특히 고구려왕의 칭호를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모멸적인 명칭인 하구려후(下句麗侯)(...)로 부르게 해 고구려의 유리명왕, 대무신왕과 충돌하였으며, 이는 이민족들의 반발과 관계 악화로 이어져 이를 토벌하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대외 원정을 위한 물자 공출까지 더해지자, 관료들의 엄청난 수탈+사유 재산 불허+호족의 반발 등 모든 국가 막장 테크의 징조가 더해져 각지에서 적미당, 녹오미당과 같은 반란이 속출, 훗날 광무제가 되는 유수(劉秀)에게 곤양대전에서의 대참패, 결국 왕망은 경시제 군대에 의해서 붙잡혀 죽음을 당하고 신도 멸망한다. # 특히 왕망의 최후는 대단히 끔찍해서 그야말로 천참만륙을 당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장안이 함락될 당시에 농민군들이 먼저 왕망을 발견했고, 경시제가 왕망을 죽이는 자에게는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했기에 공적을 탐한 농민군은 왕망의 몸뚱이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팔다리까지 잘라서 바쳤다고 한다. 초의 항우도 비슷한 이유로 산산조각 나긴 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최후를 맞은 왕망은 훗날 역적 대명사로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 망탁조의 문서 참조. 심지어 1,800여년이 지난 청나라 때까지도 까인다. 안습 그래도 닥치고 놀자식의 폭군은 아니었고 호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과 시도만큼은 좋았기에 이부분은 현대에 와서 어느 정도 평가를 받는 편이다. 실제로 신나라를 무너트리고 세워진 후한은 입김이 쎄진 호족들과의 연합 정권에 가까워서 외척의 힘이 강화되었고, 그럼에도 꽤 오래 가긴 했지만 결국 그런 점 때문에 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실제 왕망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물론 상당히 부정적인 서술이긴 하다) 왕망을 단순히 왕조 뒤엎고 폭정을 일삼은 암군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왕망에 대한 평가는 주로 후한서와 같은 사서와 많은 전근대 문인들의 글에 의존하여 이루어졌는데, 를 최고 가치로 놓는 유교의 영향 아래에서 반역을 일으킨 왕망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극도로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왕망은 물론이고, 그가 세운 신 왕조 역시 흑역사로 남게 된 것이다.

당시 전한의 상태가 꽤나 막장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왕망은 개혁이 필요한 시점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어쨌든간에 혼란한 시대를 보며 개혁을 단행한 것은 맞다.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 사학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도 왕망의 정책들은 그 취지에서 상당히 진보적이고 이치에 맞는 점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그 이후 실행이 개판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뜻은 좋았으나 그걸 실현해내는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인물이 세운 단명 왕조였다고 볼 수 있다.

3.1. 역대 황제

대수 시호 이름 출생 사망 연호 재위기간 능호
1대 가황제(假皇帝)
섭황제(攝皇帝)
왕망(王莽) BC 45 AD 23 시건국(始建國) 9 ~ 13
천봉(天鳳) 14 ~ 19
지황(地皇) 20 ~ 23
8 ~ 23 -


[1] 이는 현대 행정학의 인사론에서도 가르치는 부분인데, 개인에게 바랄 수 있는 공명심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공무원에게 적정 수준의 봉급과 노후보장을 제공하지 않으면 공무원은 필연적으로 뇌물을 받게 된다는 것. 근데 국회의원 월급 없애고 봉사직으로 돌리자는 주장이 현대에도 진지하게 거론되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