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7 14:54:10

남명

파일:나무위키+유도.png   호가 남명(南冥)인 조선시대 유학자에 대한 내용은 조식(조선)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중국의 역사 中国历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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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7 ~ 1279 오대십국(五代十國) 카라 키탄/대거란, 대요(大契丹, 大遼)
당항(黨項) 대리국(大理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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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南宋) 안춘 구룬/대금(大金)
1270 ~ 1368 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大元)
1368 ~ 1644 대명(大明)
, 남명(南明), , 대순(大順), , 대서(大西), , 명정(明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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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
大明

Dà Míng
1644년 ~ 1662년[1]
이칭 남명(南明), 명조(明朝), 주명(朱明)
위치 중국 남부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皇帝)( 천자)
국성 (朱)
주요 황제 소종 영력제
언어 중국어, 오어, 민남어
문자 한자
종교 성리학, 대승 불교, 도교
종족 한족
통화 영력통보(永曆通寶) 등
성립 이전 명나라
멸망 이후 청나라
정씨 왕국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상세3. 역대 황제4. 관련 문서

1. 개요

명나라가 도성을 잃어버리고 남쪽으로 이동한 1644년에서 1662년까지 존속했던 기간에 구분하여 불린 이름.

2. 상세

파일:남명/순 영토.jpg
1644년의 중국 대륙 세력도

북경( 베이징)을 이자성의 농민군이 함락하고, 숭정제가 자살해 명나라는 멸망했다. 하지만 아직 명의 제2 수도였던 난징에는 명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았고, 황족을 옹립하여 명나라를 재건하려고 했다. 게다가 남경은 제2의 수도였기 때문에 소규모의 조정을 남겨놓았고 물자·장비·군대를 집중시킨 뒤 수시로 관리했다. 거기다 성곽도 튼튼했으므로 설사 북경이 적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나라 자체는 살아남을 만했다. 외적 조건으로만 따지면 오호십육국시대 정강의 변 때보다 엄청나게 좋은 조건이었다. 따라서 명나라 부흥까지는 아니더라도 종묘 사직 유지에는 성공한 전례인 남송이나 동진처럼 강남을 기반으로 중국을 양분할 만 했겠지만...대실패하고 허망하게 멸망했다.

같은 입장의 망명 정권이었던 남송 동진은 각각 송고종 조구, 진 원제 사마예를 옹립하여 하나로 뭉쳤다. 물론 내부적인 갈등이 없진 않았지만 최소한 지도자가 누구인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쫓기는 입장에서 국력은 부족하더라도 일단 그 국력을 외부에서의 침략에 대한 방어 최우선으로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남명은 동시에 여러 황제가 여기저기에서 나와 내부에서 서로 정통성을 놓고 다투는 구도였다. 아래의 황제 목록에 있는 남명 황제들은 차례대로 즉위하지 않고 '병립'한 인물들이다. 각각 정권을 만들어 통치기간이 겹치고, 이 정권들은 서로를 인정하거나 협력도 안 했으며 심지어 싸우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1대 황제인 주유숭은 정통성도 있었고, 명나라 제2의 수도라 할 만한 남경을 먹었기에 남명이 오래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그러지는 못했다.

남송은 지방 군벌들이 송 고종에게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한때 송나라의 신하였다가 금나라에 투항한 인물들이 은밀하게 송나라에 도움을 주는 때마저 있었다. 그러나 남명은 오히려 오삼계 같은 투항한 한족 신하들이 적극적으로 공격해 왔다.

남명은 과거 동진과 남송이 그러했듯 장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청나라의 남진을 막는 전략을 폈다. 북방 출신으로 수전에 상대적으로 약한 청군이 장강을 건너 화남 지방으로 내려오기란 사실 어려운 일. 그런데 북경 함락 뒤 겨우 1년 만에 남경이 다시 함락되었으니 충격적이었다.

여기에는 청군에 투항한 한족 출신 장수 및 군대가 많았다는 점과 함께, 남명 스스로가 멸망의 길을 열어젖힌 것이 크다. 1645년 당시 남명은 장강 방어선 곳곳에 장수와 병력을 주어 청군의 침공에 대비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좌량옥(左良玉)이 남명 조정 실권자인 마사영(馬士英)과의 갈등 끝에 반란을 일으키고 남경을 들이친다. 남명은 또 이걸 막겠다며 최전선에서 청군을 막던 병력들을 소환했고 이런 상황에서 청군이 장강 방어선을 못 뚫을 리가 없다. 그래도 좌량옥의 반란은 어찌어찌 막았는데, 좌량옥이 패배에 격분해 분사하고 그 병력을 이어받은 아들 좌몽경(左夢庚)은 그대로 청에 투항한다. 좌몽경은 이후 청나라의 한인 팔기 중 하나인 상남기한군에 편입된다.

그나마 장강 하류의 양주 ( 양저우)에서는 주유숭의 남명 정권에서 병부 상서를 맡은 사가법(史可法)이 투항을 거부하고 최후까지 항전하여 명 제국의 명줄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애썼으나 언 발에 오줌누기고 청군의 남하를 아주 약간 지연시키는 데 그쳤다. 그전에 사가법이 병부 상서로서 주유숭 정권 초기부터 이른바 강북 4진을 두고 방비를 강화하는 동안 남명 조정의 권신들은 사가법이 권력을 장악할 지 모른다며 사가법의 힘을 최소화시키려고 4진들의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최소화하기 위해 온갖 공작을 다했다(...).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섭정 도르곤의 동생이자 누르하치의 15남인 예친왕 도도가 이끄는 청군을 상대로 비교적 선전하긴 했지만, 외부 지원군이 와서 포위 중인 청군을 협격하기라도 하던가 해야 하는데 그 외부에서 올 수 있는 지원군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는 바로 윗 문단을 보자(...).

지나친 문치주의로 군대와 국방의 약화를 불러왔다는 남송만 하더라도 양양 - 번성을 거점으로 몽골군을 수십년동안 막아냈을 뿐더러, 양양 - 번성 포위전에서도 무려 5년을 버텼다. 그리고 그 5년 동안 남송 조정은 놀지 않고 몽골군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지원군과 물자를 양양성으로 보내기 위해 무단히도 애를 썼다. 결국 양번이 함락되고 벌어진 남송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에서도 아무도 항복하지 않고 다같이 싸우다 죽었다.

그런데 남명의 경우 남경으로 향하는 길목인 양주가 위급한 상황에서 권력 투쟁이나 하다가 지원병 하나 보내지도 못했다. 사가법의 최후에 대해선 전사했다는 설, 포로로 잡힌 후 투항을 거부하여 처형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쪽을 따르든 명조에 충성하다 죽은 것은 분명하다. 비록 후대이긴 하지만 청나라조차 그에게 충장의 시호를 내려 기렸고 지금도 양저우에는 사가법 기념관이 있다. 다만 후대에 사가법을 기리는 것과 별개로 당대의 청군은 양주에서의 격렬한 저항에 격분하여 양주에서 대살상을 벌였다. 그 유명한 양주십일이 바로 이 사건이다. 그런데 이러고도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긴 커녕 외면했다. 이들은 청군이 상당히 잔혹한 대우를 해서 청군도 싫어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남명의 역사는 < 명사>에 있는데, 본기가 아니라 열전에 있다. 이것은 청나라에서 남명을 공식적으로 왕조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xinga_territory.jpg
정성공의 세력 범위
빨강색: 정성공의 직할령, 주황색: 정성공의 영향권.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은 중국 본토에서의 명나라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거기에 정씨 왕국을 건국한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 복명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도 이 남명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송시열은 상소를 올렸을 때 '중국 남녘 외진 곳에 한 줄기 정통이...(중략)'이라는 구절을 넣었고 남명 최후의 황제 영력제의 연호를 쓰기도 했으며 심지어 영력제가 죽자 자체적으로 기려서 청나라와 외교분쟁까지 갈 뻔했다. 다만 송시열의 상소에서 '그들을 돕고 있는데 아무도 모르게 하는 건가요?' 하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조선에서는 최소한 청나라가 대놓고 눈치 챌 정도로 남명을 지원하지 않는 모양이다. 어차피 거리가 너무 멀어 지원해주고 싶어도 못했을 것이다. 송시열의 상소에는 전체적으로 남명에 우호적이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 어쩌구 하는 내용이 있지만, 송시열의 행보를 살펴보면 '북벌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자신과 자신의 세력에 정당성을 가져다 줄 수 있으니' 지지한 듯하다.

영력제 사후 양반들이 영력제를 기렸음을 청나라에서 눈치를 챘던 걸 보면, 아무래도 조선은 남명의 존재를 알았지만 적대하지도 우호하지도 않은 듯하다. 대신 반청인사들이 숭정 연호를 알음알음 계속 사용했다.

3. 역대 황제

남명 정권은 스스로를 명나라의 연장이라 주장했지만, 제위가 체계적으로 계승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황제를 옹립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제위의 계승을 따지기가 무의미하다. 따라서 억지로 정통이니 비정통이니를 따지지 않고 여기서는 대수를 생략한다.
묘호 연호 재위기간 비고
안종(安宗) 홍광
(弘光)
주유숭
(朱由崧)
1644 - 45 만력제의 3남인 복왕(福王) 주상순 장남으로 남경에서 옹립되었다. 처음 올린 시호는 질종(質宗)이었지만 후에 안종으로 바꾸었다.
소종(紹宗) 융무
(隆武)
주율건
(朱聿鍵)
1645 - 46 주원장의 23남 당왕(唐王) 주경의 8세손으로 홍광제가 죽은 뒤 복건성 복주에서 옹립되었다.
의종(義宗) 감국
(監國)
주이해
(朱以海)
1645 - 46(?) 주원장의 제10자인 노왕(魯王) 주단의 9세손이다. 남경이 떨어진 뒤, 칭제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절강성에서 감국(監國)을 자칭하여 독립하고 감국(監國) 또는 감국노(監國魯)라는 연호를 쓰면서 복건성의 융무제 정권과 대립하다가 훗날 정성공 정권에 몸을 의지했다. 감국 원년이 1645년인지 46년인지 기록에 따라 다르다.
문종(文宗) 소무
(紹武)
주율오
(朱聿鐭)
1646 - 47 융무제 주율건의 동생으로 융무제 정권이 붕괴한 뒤 복건성 광주에서 즉위했다.
경종(敬宗) 동무
(東武)
주상청
(朱常淸)
1647 - 49 홍희제의 7남 유왕(淮王) 주담환(朱瞻墺)의 7대손이다. 1647년 소무제가 후사 없이 갑자기 죽자 황제로 추대받아 즉위했다.
소종(昭宗) 영력
(永曆)
주유랑
(朱由榔)
1646 - 62 만력제의 손자로 융무제가 굶어 죽자 조경에서 즉위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버마로 도피했지만 오삼계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남명의 마지막 황제.
평종(平宗) 정무
(定武)
주본현?
(朱本鉉)
1646? - 64? 홍무제의 20남 한왕(韓王) 주송의 자손이라고 전하는 인물. 1646년에 융무제나 영력제와 별개로 남명의 황제로 즉위하여 1664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이라면 남명의 마지막 황제라 하겠지만, 실존인물인지 논란이 있어 일반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4. 관련 문서



[1] 혹은 166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