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3:48:04

원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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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초대 황제
원제 | 元帝
파일:동진 사마예.jpg
사마예 상상화 (역대고인상찬)
출생 276년
서진 사주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즉위 317년 4월 6일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사망 323년 1월 3일 (향년 47세)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건평릉(建平陵)
재위기간 동진 초대 국왕
317년 4월 6일 ~ 318년 4월 26일
동진 초대 황제
318년 4월 26일 ~ 323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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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하내 사마씨
예(睿)
부모 부왕 낭야공왕
모후 낭야왕비
형제자매 2남 중 장남
배우자 원경황후, 건안군군, 간문선태후
자녀 6남 1녀
경문(景文)
작호 낭야왕(琅邪王)
→ 진왕(晉王) → 황제(皇帝)
묘호 중종(中宗)
시호 원황제(元皇帝)
연호 건무(建武, 317년 ~ 318년)
대흥(大興, 318년 ~ 321년)
영창(永昌, 322년 ~ 3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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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즉위2.3. 붕어
3. 평가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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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晉)의 5대 황제이자, 동진을 세운 황제. 묘호는 중종(中宗)이고, 시호는 원황제(元皇帝). 휘는 예(睿). 자는 경문(景文). 즉위 이전의 작위는 낭야왕(琅邪王)[1]. 당대의 명필이기도 했다.

잡혀간 회제를 대신해 고위직이 되어 조정의 권한 대부분을 부여받았고 친척인 민제가 잡혀가 진나라가 본토를 잃자 강남(중국)으로 천도하여 왕조를 중흥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간성에 결함이 있어 전형(銓衡)[2]을 부당하게 하는 등 여러 실책을 저지르다가 왕돈의 난으로 실권을 뺏기고 이에 분노하다가 병사하였다.

2. 생애

2.1. 초기

함녕 2년(276년), 낙양에서 태어났다.

사마의의 증손자로, 사마의의 4남인 사마주의 손자이며 낭야공왕 사마근과 하후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사마예의 어머니의 이름 하후광희이고 는 동환(銅環)이었다. 친할머니는 제갈태비, 진외종조할아버지는 제갈정, 진외증조할아버지는 제갈탄이고, 외할아버지는 하후장, 외증조할아버지는 하후위이며[3], 외고조할아버지가 하후연이었다. 즉 사마예는 하후연의 외현손자이자 제갈탄의 진외증손 되는 셈이다.[4]

서진 팔왕의 난으로 막장이었을 때, 사마예는 공손하고 검소하며 양보를 잘하고 도량이 넓어서 명성이 높았다. 15세에 부친 사마근의 뒤를 이어 낭야왕(琅邪王)이 되었으며, 원강 2년(292년), 원외산기상시가 되어 업성에 있었다.

건무 원년(304년) 8월, 사마예의 숙부였던 동안왕 사마요가 성도왕 사마영에게 피살되자 사마예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했는데, 사마영은 사마예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남몰래 도망쳐 하양을 거쳐 낙양에 이르러 모친 하후씨를 모시고 임지인 낭야로 돌아왔다.

영흥 2년(305년) 8월, 사공이었던 동해효헌왕 사마월이 그를 평동 장군으로 임명하여 서주를 감독하게 하고 하비를 지키게 했다. 이에 사마예는 자신의 친한 벗이었던 왕도를 사마에 임명하여 병무를 맡겼다.

영가 원년(307년) 7월, 회제 사마치는 6촌 형 사마예를 안동 장군으로 임명하여 양주와 [[강남(중국)][을 총관장하게 하고 건업을 지키게 했다. 사마예는 왕도, 형주자사 왕징, 양주자사 왕돈을 위시한 낭야 왕씨 일가의 지원을 받으며 고영, 하순 등의 명사를 불러들이고 손필, 두선의 반란을 제압하면서 동진 정권의 기틀도 마련한다.

영가 5년(311년) 5월에는 진동 대장군이 되어 양주, 강주, 상주, 교주, 광주 등 5주의 업무를 맡았다.

건흥 원년(313년), 민제 사마업이 즉위하자 좌승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마업이 사마예에게 북벌을 명령했으나, 사마예는 강남(중국)의 안정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곧 사마예는 서진의 승상이 되었으며 316년 장안이 곧 유총에게 함락될 것을 예견한 사마업은 사마예에게 조정의 모든 권한을 맡기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이 조서는 길이 늦어서 다음 해인 317년 2월에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3월 사마예는 진왕(晉王)으로 즉위했다.

건흥 2년(314년), 강남 대호족 주씨 일족 중 하나인 주기가 모반을 일으키려 했으나 중단한다. 사마예는 강동 호족들이 부담스러워 낭야 왕씨, 임기 왕씨, 태원 왕씨, 영천 유씨, 고평 치씨, 진군 사씨, 초국 환씨 등의 일가와 같은 이주 집단을 크게 기용했는데 이는 강남 호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기반이 불완전한 사마예는 주기와 같은 집안인 주례의 고변을 듣고도 군사적 움직임을 멈춘 주기를 모른척 한다.

2.2. 즉위

결국 서진이 멸망하고 사마업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마예는 건업에서 사마의의 종통과 진의 계승을 선언하면서 황제에 즉위했고 후대인들은 이 때부터 동진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사마예는 건업(建業)의 이름이 서진 민제 사마업(鄴 또는 業)의 이름과 같다 하여 이름을 건강(建康)으로 바꿨다. 사마예는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는데 대신 서진을 멸망시킨 유총 석륵은 이 사면에서 제외되었다.

사마예는 진나라를 중흥했으나, 초기에는 명성이 낮고 북쪽에서 이주해 온 집단이라 강남(중국) 호족들[5]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사마예는 이 지방 풍속에 따르고 청렴한 정치와 은덕으로 보살피라는 왕도의 조언을 따라 호족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치니 차츰 강남 호족들이 귀순해 와서 서진 시절부터 난리가 났던 나라를 강남에서 겨우 안정시켰다. 사마예는 왕도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그의 사촌형 왕돈을 정남대장군에 봉했는데 장강 북부 일부 지방을 회복해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태흥 2년(319년), 북쪽의 전조 황제 유요가 숭양릉을 도굴한다는 소식을 듣자 분개하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통곡만 했다. 숭양릉은 사마소 왕원희가 죽으면서 합장한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덤을 파헤치는 짓은 예나 지금이나 악질적 행위였고 사마예의 간곡한 부탁으로 유요가 도굴 계획을 뒤를 미루었고, 이후 석륵이 전조를 멸망시켜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동진은 왈칵 뒤집어졌다. 이 때 도굴당한 화북의 진나라계 황릉은 나중에 유유가 북벌을 단행한 뒤 이민족들을 격파하고 황릉의 유물 등을 수습하면서 마무리되었다.

한편 영가의 난에 휘말려 행방불명된[6] 임해공주가 우연히 건강에 들렀다가, 원제 사마예를 만났다. 임해공주는 전온의 딸이 자신에게 온갖 가혹 행위를 저지른 것을 사마예에게 알리며 자신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사마예는 임해공주를 구출하는 동시에 아울러 임해공주에게 가혹 행위로 일관한 전온의 딸과 그 아비 전온을 잡아들여 참수해버렸다. 이후 임해공주와 종정 조통[7]의 중매를 서준 후에 그대로 조통에게 시집보냈다.

사마예가 왕도와 왕돈 등 낭야 지방 호족의 도움과 강남(중국) 호족의 연합으로 진나라를 중흥하여 강남만큼은 진나라의 영토에서 건져낸 것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본토를 수복하여 안정을 시키려는 큰 뜻은 없었고 자질이 평범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고 강남에 안주했다.

군자좨주 조적이 북벌을 건의했을 때는 마지 못해서 그를 예주 자사로 봉하고 경구를 지키게 했다. 조적은 뛰어난 용병술로 장강을 건너서 회음과 그 일대를 회복하고, 남하하는 석륵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사마예의 무관심과 동진 조정의 지원 미비로 결국 철수해야 했고, 화병을 앓다가 옹구의 진채에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봉조정 주숭은 진원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 북벌을 먼저 해서 중원을 수복하고, 칭제할 것을 간했다가 분노한 사마예에게 죽을 뻔 했다.

무엇보다 사마예는 강동에서의 입지 강화를 최우선시했다. 권세가 나날이 강해지던 낭야 왕씨 가문을 견제하고자 점차 왕도 왕돈 형제를 멀리하고, 허물을 잘 들춰내어 호족들의 미움을 받던 유외 조협을 심복으로 중용했다. 이들은 성품이 워낙 강직해 권세가들을 채찍질할 줄만 알지 다스릴 줄은 몰랐으며, 황권이 분명 강화되긴 했으나 동시에 수많은 호족들의 불만을 샀다. 이에 일찍부터 반역의 뜻을 품게 된 왕돈은 불만을 가지고 상소했으나, 사마예는 그냥 무시하였다.

2.3. 붕어

영창 원년(322년) 정월, 왕돈은 유외와 조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무창에서 군사를 일으켜 3월에 건강으로 쳐들어갔다. 사마예는 조협과 유외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들에게 말을 주어 각기 스스로 살 길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유외는 간신히 후조의 석륵에게 망명했지만[8] 조협은 연로해서 말을 못 타는 바람에 멀리 가지 못했다.

거기에 그는 인심을 잃어 결국 강승에서 사로잡혀 즉결 처형당하고 머리는 건강의 왕돈에게 보내졌다. 그리고 왕돈은 무창으로 돌아가 양주자사 감탁과 상주자사 초민왕 사마승을 죽였다. 후에 왕돈은 승상이 되었으나, 교만하고 횡포함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공물은 대부분 그에게 들어가고 심충, 전봉, 제갈요 등을 앞잡이로 세웠는데 이들은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남의 땅과 가옥을 멋대로 침입하고 빼앗으며 대낮에도 약탈을 일삼고 옛 무덤을 도굴했다. 이로 인해 사마예는 분통이 터져 윤11월, 재위 6년 만에 47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영창 2년(323년) 2월, 건평릉에 안장되었다.

3. 평가

전대의 황제들이 망쳐서 사실상 멸망한 서진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기틀을 다진 만큼 능력은 있었으나 리더십과 인재 등용 등이 부족하여 결국은 동진을 강성하게 유지할 토대를 마련하지 못한 아쉬운 점도 좀 있었다.

가장 크게 꼽히는 아쉬운 점은 동진의 공신-호족 세력들의 분열에 실패했다는 점으로 원제는 서진의 멸망 속에서 낭야-강동 일대의 호족과 연합을 통하여 강남(중국)을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공신-호족 세력에서 가장 세력이 강성했던 낭야 왕씨의 왕도, 왕돈을 견제했는데 문제는 그들의 세력이 동진을 중흥한 중심 세력이자 원제가 오랜 기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써먹었던 세력이라는 점이었다. 본디 공신과 호족의 숙청은 자신의 친위 세력의 강성함을 무기로 그들과 반대되는 정적에 힘을 실어주며 균형을 흔들고 진행하는데[9] 원제는 자신의 친위 세력을 적으로 돌려버리며 오히려 공신과 호족이 자신의 권력을 흔드는 구도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왕돈의 난이 발생하며 자신의 권력을 모두 내주고 원제는 분사했다.

4. 여담

삼국지 마초보다 생년과 몰년이 둘 다 정확히 100년이 늦는다. 마초는 176년생에 222년 몰, 원제는 276년생에 322년 몰이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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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정후 안평정후[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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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부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 )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 [3] 친부는 의양성왕 [4] 친부는 안평헌왕 [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 [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 [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 [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 [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 [13] 친부는 회남충장왕 [14] 여기까지 서진 [15] 친부는 오효왕 [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 [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 [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 [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 [23] 친부는 진무제 [24] 친부는 제헌왕 [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 [26] 친부는 제헌왕 [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 [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 [29] 여기부터 동진 [30] 친부는 진문제 [31] 윤통(閏統) [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 [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 [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 [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 [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 [37] 친부는 남궁현왕 [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 [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 [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 [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 [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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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황후 · 효정황후
14권 「신원·평문제제자손전(神元平文諸帝子孫傳)」
탁발흘라 , 탁발제,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진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15권 「소성자손전(昭成子孫傳)」 16권 「도무7왕전(道武七王傳)」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虔) · 탁발순 · 탁발의열
탁발굴돌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17권 「명원6왕전(明元六王傳)」 18권 「태무5왕전(太武五王傳)」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9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 · 탁발간(簡) · 탁발약 · 탁발맹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22권 「효문5왕전(孝文五王傳)」 23권 「위조등전(衛操等傳)」 24권 「연봉등전(燕鳳等傳)」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위조 · 막함 · 유고인 연봉 · 허겸 · 장곤 · 최현백 · 등연
25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26권 「장손비등전(長孫肥等傳)」 27권 「목숭전(穆崇傳)」
장손숭 · 장손도생 장손비 · 울고진 목숭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화발 · 해목 · 막제 · 유업연 · 하적간 · 이율 · 유결 · 고필 · 장려 해근 · 숙손건
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왕건 · 안동 · 누복련 · 구퇴 · 아청 · 유니 · 해권 · 차이락 · 숙석 · 내대천 · 주기 · 두대전 · 주관 · 염대비 · 울발 · 육진 · 여락발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차노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정희 · 최변 고우 · 최정 양파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한기린 · 정준 설안도 · 필중경 · 심문수 · 장당 · 전익종 · 맹표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이표 · 고도열 왕숙 · 송변 곽조 · 장이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형만 · 이평 이숭 · 최량 최광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견침 · 고총 최휴 · 배정준 · 원번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이주영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노동 · 장열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손소(孫紹) · 장보혜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이염지 · 조영 · 상경
83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84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85권 「문원전(文苑傳)」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사마예 · 이웅 환현 · 풍발 · 유유 소도성 · 소연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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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마예를 도운 왕씨가 낭야 출신이다. [2] 시험이나 추천, 음서 등으로 사람을 뽑는 것 [3] 점괘 상 하후위는 나중에 황제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존재하게 된다는 점괘가 있었는데 그걸 죽은 후에 이루게 되었다. [4] 사마근의 부장이었던 우금 썸씽이 있어서 사마예는 사실 우금의 아들이란 이야기가 있는데 진실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 이야기는 남북조시대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에 나오는 것으로, 북조에서 남조의 정통성을 폄하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5] 황제의 성씨는 손씨에서 사마씨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한나라 시절부터 번영하던 육씨 등의 강남 호족들이 건재했다. [6] 실은 전온에게 팔려가서 노비가 되었다. [7] 조운의 아들과는 동명이인. [8] 그러나 유외는 이로부터 11년 후인 333년에 석호가 석랑과 석생의 난을 토벌하러 갈 때 종군했다가 석생의 장수 곽권에게 패하고 전사했다. [9] 공신 숙청으로 유명한 한고제를 생각하면 편하다. 한고제도 조참, 번쾌, 주발, 하후영 등 자신과 오랜 기간 활동했던 무장 세력을 활용하여 한신, 영포, 팽월 등 이성왕들을 먼저 숙청했고 이후에 소하, 번쾌, 여후의 여씨 일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소하도 잠시 상국의 자리에서 내려온 정황이 있으며 번쾌나 여씨 일족은 대놓고 숙청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한고제가 만약 5년 정도 더 생존했다면 한고제와 한문제 사이의 여씨 일족으로 인한 제위의 혼란기는 없었을 것이다. 공신 숙청의 교본이라 할만한 움직임으로 조참 등 자신의 친위 세력을 이용하여 숙청을 진행한 이후에 강해진 황권으로 친위 세력의 숙청을 시작하는 정치적으로 대단한 판단력을 보여줬던 한고제에 걸맞은 통제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