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12:45:24

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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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ece5b6>
전진 5대 황제
부등 | 苻登
출생 343년
후조 진주 약양군 임위현
(現 간쑤성 톈수이시 친안현)
사망 394년 7월 (향년 52세)
전진 양주 안정군 조나현 마모산 인근
(現 간쑤성 구위안시 펑양현)
능묘 없음
재위기간 전진 남강공
365년 ~ 386년 7월
전진 약양공
386년 7월 ~ 386년 8월
전진 남안왕
386년 8월 ~ 386년 11월
전진 5대 황제
386년 11월 ~ 3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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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ece5b6> 성씨 부(苻)
등(登)
문고(文高)
부황 부창(苻敞)
형제자매 3남 중 차남
배우자 황후 모씨, 황후 이씨
자녀 4남
작호 남강공(南康公) → 약양공(略陽公)
→ 남안왕(南安王)
묘호 태종(太宗)
시호 고황제(高皇帝)
연호 태초(太初, 386 ~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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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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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16국 중 하나인 전진의 제5대 황제로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였으며 자는 문고(文高)였다.

전진의 황족인 태위 부창의 아들로, 제1대 고조 경명제 부건이나 제3대 세조 선소제 부견의 직계 자손은 아니었다. 그래서 혈통만 놓고 보면 제위와 거리가 멀었지만 제4대 애평제 부비가 동진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 아들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 난세에 적합하지 않자 능력껏 잔존세력을 수습한 뒤 제위에 올랐다.

2. 생애

부등은 어렸을 때부터 용맹하고, 기상이 굳세었으며, 호방한 기운이 있었다. 그러나 성격이 거칠고, 험악하며, 세세한 행동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천왕 부견은 그를 특별히 눈여겨보지 않았다. 부등은 나이가 들면서 태도를 겸손하게 바꾸고, 신중하고 후덕한 성품을 갖추었으며, 책과 열전을 많이 읽었다. 건원(建元) 초기에 이를 기특하게 여긴 부견은 그를 남강공(南康公)에 봉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으로 임명하였다. 부등은 점차 승진하여 우림감(羽林監)•양무장군(揚武將軍)•장안현령(長安縣令)을 지냈으나, 어떤 일에 연루되어 직위를 잃고 적도(狄道)의 장(長)으로 강등되었다.

비수대전 이후 전진의 중앙 조정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관중(關中)이 혼란에 빠지자, 부등은 관직을 버리고 적도를 떠나 부한(枹罕)으로 도망갔다. 그는 부한에서 저족 무리를 통솔하고 있는 하주목(河州牧) 모흥(毛興)에게 의탁하여 그의 장사(長史)가 되었다.[1]

모흥과 익주목(益州牧) 왕광(王廣)이 세력 다툼을 할 당시, 부등의 형인 부동성(苻同成)이 모흥에게 부등을 사마(司馬)로 임명해 항상 군영에서 일을 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모흥의 사마가 된 부등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재능을 지녔고, 기묘한 전략을 잘 세우는 것을 좋아하였다. 부동성은 항상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면 그 직무를 논하려 하지 마라. 수시로 간섭하려 하지 마라. 너를 박식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너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다른 사람이 너를 좋지 않게 여기고, 네가 경솔하게 개입하는 것을 싫어할까 염려된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멈추고, 나중에 네가 뜻을 이룰 기회가 찾아오면 그때 가서 전념해도 늦지 않다."
라며 경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부동성이 부등을 질투하고 억누르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부등은 형의 조언을 새겨듣고,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함부로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았다. 모흥은 일이 있을 때마다 부등을 불러 농담 삼아 말하기를,
"젊은 사마(小司馬)가 앉아서 일에 대해 평가해보고 문서를 정리해 보게."
라고 하였는데, 부등은 말을 할 때마다 이치를 잘 분석하고 맞추었다. 모흥은 속으로 부등을 존경했으나,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아 임무를 맡기지는 않았다.

태안 2년(386년) 4월, 왕광이 결국 모흥에게 패주하자, 모흥은 이어서 왕광을 지원했던 그의 형 진주목(秦州牧) 왕통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한의 여러 저족들은 전쟁의 고통에 지쳐 더 이상 명령을 따르기 힘들어하여 결국 모흥을 습격해 살해하고, 건절장군 위평(衛平)을 사지절•안서장군•하주(河州) 자사로 추대하였다. 모흥은 죽기 직전에 마지막 힘을 내어 부동성에게 말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함께 역적 강족놈을 토벌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으니 그 한이 깊구나. 이제 앞으로의 일은 경에게 맡기겠소. 경의 젊은 동생인 사마(司馬)는 요석덕을 물리칠 사람임에 틀림없으니, 앞으로 사마의 일을 경이 총괄하도록 하시오."

태안 2년(386년) 7월, 부한의 저족들은 임청백(臨清伯) 위평이 나이가 들어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를 폐위하려고 논의했으나, 권세있는 저족 집안 출신이라는 그의 배경을 두려워해 며칠 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때 저족 중 한 명인 담청(啖青)이 나서서 저족 장수들에게 말했다.
"큰일을 결단하고 동쪽으로 나아가 요장을 공격해야할 때에 망설여서는 안 된다. 만약 기회를 놓치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게 될 것이다. 장군들이 위공(衛公)과 모든 장수를 모은다면 내가 그 결정을 내려주겠다."
그러자 장수들이 모두 그의 말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칠석 날에 큰 연회가 열렸을 때, 담청은 검을 빼들고 앞으로 나가서 말했다.
"지금 천하가 대혼란에 빠져 있고, 사방에 이리가 길을 막고 있어, 우리 모두는 이 난국에서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명한 지도자가 아니면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없다. 위공은 나이가 많아 대업을 이루기에는 부족하니 물러나고 길을 비켜야 한다. 적도장(狄道長) 부등은 비록 왕실의 먼 친척이나, 그의 지략과 용맹은 뛰어나니, 나는 그를 추대하여 황제의 대군에 합류하고자 한다. 이 일에 동의하지 않는 자는 바로 이 자리에서 이견을 말하라."
그리고는 검을 들어 올리고 소매를 걷어붙이며 이의를 제기하는 자를 베려고 하니, 모두가 그에게 따랐고, 아무도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였다. 그 후 부한의 저족들은 위평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부등을 추대하여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로써 부한의 저족들에 의해 사지절•도독농우제군사(都督隴右諸軍事)•무군대장군•옹하2주목(雍河二州牧)•약양공(略陽公)으로 추대받은 부등은 5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농(隴)을 넘어서 남안(南安)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한족과 이민족 30,000여 호를 귀순시켰다. 부등은 남안에 자리를 잡고, 부비에게 사신을 파견해 명령을 받드기를 청하였다.

태안 2년(386년) 8월, 부비가 부등을 정서대장군•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사지절, 주목과 도독 등의 직위는 부등이 스스로 칭한 대로 모두 수여하였으며, 아울러 그를 남안왕(南安王)에 봉하였다.

태안 2년(386년) 9월, 후진의 무소제 요장이 정서장군 요석덕을 보내어 상규를 공격하자, 진주목 왕통은 진주를 들어 투항하였다. 요장은 요석덕을 사지절•도독농우제군사•진주자사로 임명하여 상규를 진수케 하였다.

태안 2년(386년) 10월, 남안에서 승리한 부등이 승세를 타고 상규를 공격하였다. 요장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요석덕을 구원하려 했으나, 부등은 호노판(胡奴阪)에서 그들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20,000여 명의 적군을 참수하였다. 장군 담청이 요장에게 화살을 쏘아 상처를 입혔고, 요장은 중상을 입고 상규로 들어가 몸을 피하였다. 요장이 부상을 치유하는 사이에 요석덕은 요장이 데려온 패잔병을 대신 통솔하며 상규를 방어하였다.(호노판 전투)

당시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리고 길가에 쓰러져 죽는 자들이 이어졌다. 부등은 매번 후진군과의 전투에서 적을 죽이고, 이를 '익은 음식(熟食)'이라고 불렀다. 그는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아침에 전투하고 저녁에 고기를 먹을 수 있으니, 굶주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였다. 군사들은 그의 말을 따랐고,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고 배를 채웠으며, 그로 인해 더욱 힘이 나고 싸움을 잘하게 되었다. 요장은 이 소식을 듣고 요석덕에게 말했다.
"네가 오지 않으면 반드시 부등에게 모두 먹히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석덕은 분전하였나, 상규는 부등의 매서운 공세로 인해 함락 직전까지 몰렸다. 얼마 안가 황제 부비가 동진의 낙양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전사하는 사건이 터졌다. 결국 부등은 전진의 후계 문제 처리를 위해 군대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상규 전투)

태초 원년(386년) 11월, 상서 구유(寇遺)가 부비의 황자인 발해왕(渤海王) 부의(苻懿), 제북왕(濟北王) 부창(苻昶)을 모시고, 행성(杏城)에서 남안(南安)으로 도망쳤다. 이에 부등은 황제 부비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부등을 위해 삼군(三軍)이 모두 흰 옷을 입고 장례를 올렸다. 부등은 발해왕 부의를 새로운 황제로 세울 것을 제안하였으나, 부등의 신하들이 모두 반대하며 말했다.
"발해왕은 선제의 아들이시나, 아직 나이가 어려 어려운 국난(國亂)을 감당하시기 어렵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는 어른을 세우는 것이 춘추의 의리입니다. 지금 세 오랑캐가 나라를 침범하고, 그들의 군대는 강력하며, 사방이 이리와 같은 야만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로부터 어려움이 이보다 더 심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서주(西州)에서 칼을 들고 일어나시어, 봉상(鳳翔)과 진농(秦隴)에서 반란군을 격퇴하시고, 잠깐의 전투로 요장을 물리치시어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이는 천지에 빛나는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용양(龍驤)의 기세로 무력을 떨쳐서 옛 수도를 구하고, 사직과 종묘를 우선으로 삼아야 할 때입니다. 조(曹)의 공자 장(臧)과 오(吳)의 공자 계찰(季札)의 선례를 따르시어, 일개 사소한 명분에 얽매여 시기를 놓치지 마시고, 중흥의 업을 이루셔야 합니다."
이에 부등은 신하들의 말을 채택하여 농동(隴東)에 단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태초(太初)'로 개원하였으며, 아래에 백관을 두었다.(고황제 즉위)

태초 원년(386년) 12월, 부등은 선소제 부견의 신주(神主)를 군영 안으로 모셨다. 신주를 실은 수레에는 깃털과 푸른 덮개를 씌웠고, 노란 깃발을 세웠으며, 무분(武賁)의 용사 300명이 이를 호위하였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부등은 반드시 신주에 고하고, 하려는 일은 모두 신주에 아뢴 후에 실행하였다. 부등은 병장기를 수선하고 군사를 정비한 후, 동쪽으로 진격하기 위해 선소제 부견의 신주에 이렇게 아뢰었다.
"오늘날 혜황제(惠皇帝, 부홍)의 증손자, 신하 부등이 태황제(太皇帝, 부견)의 영령에 의해 황제의 자리를 공손히 이어받았습니다. 과거 오장(五將)의 난에서 역도 강(羌)이 성스러운 몸에 해를 끼쳤으니, 이는 실로 이 부등의 죄입니다. 이제 의로운 군사를 모아 50,000의 정예 병력을 갖추었고, 충분히 전쟁에서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풍년으로 곡식이 풍부하여 군량도 충분합니다. 오늘부로 별처럼 빠르게 진군하여 적의 본거지에 도달할 것이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적을 무찌를 것을 기약합니다. 위로는 황제의 깊은 원한을 갚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큰 치욕을 씻어낼 것입니다. 오직 황제의 영령께서 이 진실한 마음을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부등이 흐느껴 울기 시작하니, 장군과 병사들 모두가 슬픔에 잠겨, 각자가 창과 갑옷에 ‘죽어야만 쉴 수 있다(死休)’는 글자를 새기고, 전사할 각오를 보여주었다. 매번 전투에서 긴 창과 갈고리 칼로 방형 또는 원형 진을 펼쳤으며, 진형의 두터운 곳과 얇은 곳을 상황에 맞게 병력을 배치하여 싸웠다. 부등의 군대는 후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장안 인근까지 뚫고 나갔다.

부등의 전진군이 마침내 신평(新平)에 도착하자, 본래 전진의 장수였던 서숭과 호공(胡空)은 각각 5,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부등은 서숭을 진군장군•옹주(雍州) 자사, 호공은 보국장군•경조윤으로 임명하고, 그곳에서 선소제 부견을 천자의 예로 다시 장례를 치렀다.

태초 2년(387년) 정월, 부등이 왕비 모씨(毛氏)를 황후로 세우고, 발해왕 부의를 황태제로 세웠다. 그리고 사자를 파견해 행성(杏城)에서 할거하는 동해왕 부찬(苻纂)을 사지절•시중•도독중외제군사•태사•대사마로 임명하고, 노왕(魯王)으로 진봉하였다. 또한, 부찬의 동생인 부사노(苻師奴)를 무군대장군•병주목(并州牧)으로 삼고, 삭방공(朔方公)에 봉하였다. 하지만 부등의 즉위 소식을 들은 부찬은 분노하여 부등의 사자에게 따지며 말했다.
"발해왕께서는 세조(世祖, 부견)의 손자이시자, 선제(先帝, 부비)의 아들이시다! 한데, 남안왕(南安王, 부등)이 어찌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이냐?"
이때 부찬의 장사 왕려(王旅)가 간언하였다.
"남안왕이 이미 즉위했으니 중간에 바꾸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지금 적들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왕실 내에서 서로 적이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광무제의 예를 따라 성공(聖公)을 천거하시고, 두 오랑캐를 물리친 뒤에 다시 논의하시길 바랍니다."
이에 부찬은 하는 수 없이 부등의 임명을 수락하였다.

당시 노수호족의 팽패곡(彭沛榖), 도각족의 동성(董成)과 장세룡(張龍世), 신평의 강족 뇌악지(雷惡地) 등이 모두 부찬에게 붙었고, 이로 인해 부찬은 휘하에 100,000명의 병력을 두고 있었다. 부찬이 부사노를 보내어 상군(上郡)을 공격하자, 강족의 수령 김대흑(金大黑)과 김낙생(金洛生) 등이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배하였고, 5,800명의 적군이 참수당했다.(상군 전투)

태초 2년(387년) 3월, 부등이 두충을 거기대장군•남진주목(南秦州牧)으로, 양정을 대장군•익주목으로, 양벽(楊璧)을 사공•양주목(梁州牧)으로, 걸복국인을 대선우•범천왕(范川王)으로 삼았다.

태초 2년(387년) 4월, 대장군 양정과 노왕 부찬이 함께 요석덕을 공격하고, 경양(涇陽)에서 전투를 벌여 요석덕을 대파하였다. 이때 요장이 은밀히 구원군을 이끌고 접근하자, 부찬은 퇴각하여 부륙(敷陸)을 지켰다.(경양 전투)

태초 2년(387년) 5월, 거기대장군 두충이 견(汧)과 옹(雍)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요장의 장수 요원평(姚元平)과 장략(張略)을 참수하였다. 그러나 두충은 견 동쪽에서 요장과 다시 전투를 벌였다가 패배하였다.(견 전투)

태초 2년(387년) 7월, 부등이 군대를 이끌고 와정(瓦亭)으로 진격하자, 요장이 팽패곡과 도각족의 여러 요새들을 공략하여 떨어뜨렸고, 팽패곡은 패배하여 행성으로 도망쳤다.

태초 2년(387년) 8월, 전진의 정로장군•빙익(馮翊) 태수 난독(蘭犢)이 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빈양(頻陽)에서 출발하여 화녕(和寧)에 들어가, 노왕 부찬과 협력하여 장안을 도모하려 하였다. 이때 삭방공 부찬이 그의 형 부찬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부찬이 따르지 않자 부사노는 그를 살해하고 자신이 스스로 진공(秦公)을 자칭하여 즉위하였다. 이에 난독은 부사노와 교류를 끊었다.(부사노의 난)

태초 2년(387년) 9월, 요장이 군대를 이끌고 니원(泥源)에 주둔하였다. 부사노가 군대를 이끌고 요격하였으나, 대패하여 선비족의 영역으로 도망쳤고 그의 군대는 대부분 붕괴되었다. 이로써 부찬이 모아두었던 세력은 궤멸되었고, 부찬의 세력을 이용해 장안을 탈환하려던 부등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니원 전투) 이에 부등은 와정에서 전진하여 호공보(胡空堡)를 점령하였고, 100,000명의 이민족과 한족들이 전진으로 귀순하였다.

태초 2년(387년) 12월, 요장이 장수 요방성(姚方成)을 보내 옹주자사 서숭의 보루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서숭을 사로잡았다. 요방성은 서숭을 꾸짖었으나, 서숭이 욕설을 멈추지 않자, 요방성은 분노하여 서숭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힌 병사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인 뒤 그들의 아내와 자식을 군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다.

태초 3년(388년) 2월, 부등이 군대를 이끌고 농(隴)을 넘어 조나(朝那)로 들어갔다.

태초 3년(388년) 5월, 황태제 부의가 사망하자, 시호를 '헌애황태제(獻哀皇太弟)' 시호를 내렸다.

태초 3년(388년) 8월, 부등이 아들 부숭을 황태자로, 부변(苻弁)을 남안왕으로, 부상(苻尚)을 북해왕으로 삼았다.

태초 3년(388년) 10월, 당시 부등은 조나, 요장은 무도(武都)를 점거하였고, 양군은 봄부터 대치하면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승패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승부가 나지 않았고, 이때에 이르러 양측은 각각 포위를 풀고 퇴각하였다. 관서(關西)의 호걸들이 요장이 오랫동안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많은 이들이 부등에게 귀순하였다. 그러나 부등의 군대는 심각한 기근을 겪었고, 매우 적은 양으로 군사들을 겨우 먹여 살리고 있었다. 마침 요장이 안정(安定)으로 물러나자, 부등도 물러나 신평에서 식량을 공급받고 대군을 호공보에 머물게 하였다. 이후 부등은 다시 1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장의 진영을 포위하여 사방에서 큰 소리로 울며 애통해하니, 그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요장은 이를 불쾌하게 여겨 삼군에 명령하여 부등의 울음에 맞춰 함께 울게 하였다. 이에 부등은 포위를 풀고 다시 물러났다.

태초 3년(388년) 12월, 부등이 영천왕(穎川王) 부동성을 태위로 임명하였다.

태초 4년(389년) 정월, 부등이 걸복국인 사후 하남왕(河南王)을 자칭한 걸복건귀를 대장군•대선우로 임명하고, 금성왕(金城王)에 봉하였다.

태초 4년(389년) 2월, 부등이 대계(大界)에 치중을 남겨 황후 모씨(毛氏)에게 치중을 맡긴 뒤[2], 친히 10,000기의 경기병을 이끌고 안정을 공격하여 밀조보(宻造堡)를 함락시켰다. 이때 장군 두락(竇洛)과 두건(竇乾) 등이 반란을 모의하였으나, 그 계획이 발각되어 요장에게 도망쳤다.부등이 진격하여 팽지(彭池)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니, 방향을 돌려 미자영(彌姐營)과 번천(繁川)의 여러 요새들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안정 전투)

태초 4년(389년) 4월, 부등은 안정에서 요장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고, 요장은 계속해서 패배하였다. 이에 요장은 중군장군 요숭을 보내 대계를 습격하게 하였으나, 부등이 군사를 나누어 요숭을 안구(安丘)에서 전멸시키고, 안정군을 계속 압박하였다. 이 전투에서 25,000여 명의 적군을 사로잡거나 참수하였다.(안구 전투)

태초 4년(389년) 7월, 부등이 요장의 장수 오충(吳忠)과 당광(唐匡)을 평량(平涼)에서 공격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부등은 상서 부원(苻願)을 전금장군•멸강교위로 임명하여 평량을 수비하게 하였다.(평량 전투)

태초 4년(389년) 8월, 부등이 구두원(茍頭原)으로 진격하여 안정을 위협하였다. 이때 요장은 상서령 요황(姚晃)을 안정에 남겨 수비하게 하고, 군사 30,000명을 밤중에 대계의 군영을 습격하였다. 대계를 지키던 황후 모씨는 10,000명의 군사로 요장의 후진군과 격돌해 수많은 적병을 사살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인해 결국 후진군에게 사로잡혔다. 모씨 소생인 남안왕 부변, 북해왕 부상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들었으나 구하지 못한 채 장렬히 전사하였고, 대계를 지키던 전진군은 그대로 궤멸당하고 말았다.(대계 전투) 요장은 잡혀온 모씨의 외모가 출중한 것을 보고 그녀를 자신의 황후로 삼기 위해 여러번 설득해보았으나[3], 돌아오는 것은 모씨의 욕설뿐이었다. 요장이 그녀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음에도 거듭 망설이자, 요장의 장수들이 나서서 그녀를 처형해야 한다며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요장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처형하였다.

후진군은 이 전투에서 전진의 이름난 장수들 수십 명을 사로잡았고, 전진군의 치중을 모조리 불태웠으며, 백성 50,000명을 노략질하였다. 기세등등해진 후진군의 장수들은 이대로 남안까지 밀어버리자며 요장을 부추겼지만, 후진군 또한 피해가 적지 않았기에 요장은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여겨 후퇴하였다. 부등 또한 후방에 치중이 모두 불 탄 상태로는 보급로를 유지할 수 없어,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호공보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태초 4년(389년) 9월, 구지공 양정이 농(隴)과 기(冀)를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요장의 사촌 요상(姚常)을 참수하였으며, 장수 형노(邢奴)를 사로잡았다. 대승을 거둔 양정은 스스로 진주목•농서왕(隴西王)을 자칭하였고, 부등은 그가 자칭한 관직과 작위를 공식적으로 수여하였다.

태초 4년(389년) 10월, 부등이 사자를 보내어, 두충을 대사마•표기대장군•전봉대도독•독농동제군사(督隴東諸軍事)•옹주목(雍州牧), 양정을 좌승상•상대장군•도독중외제군사•진양2주목(秦梁二州牧), 양벽을 대장군•도독농우제군사(都督隴右諸軍事)•남진익2주목(南秦益二州牧)으로 각각 삼았다.이후 부등은 두충에게 명을 내려, 군을 이끌고 선봉으로 번천(繁川)에서 장안으로 진격하게 하였고, 자신은 직접 신평에서 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신풍(新豐)의 천호(千戶)를 점령하였다. 이어 양정에게는 농상(隴上)에서 군대를 이끌고 후속 부대로 지원하도록 하였고, 양벽은 구지(仇池)를 지키게 하였다.

또한, 부등은 감하서제군사(監河西諸軍事)•병주(并州) 자사 양정(楊政)과 도독하동제군사(都督河東諸軍事)•기주자사 양개(楊楷)에게 각자가 통솔하는 군대를 이끌고 장안에서 대대적으로 모여 후진을 도모할 것을 약조하였다. 당초 양정(政)과 양개는 모두 하동 출신으로, 애평제 부비가 패사했을 때 그들은 흩어진 백성들 수만 가구를 수습하여 모으고, 양정은 하서(河西)를, 양개는 호섬(湖陜) 사이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사신을 보내 부등에게 복종하였고, 이에 부등은 그들에게 해당 직책을 수여하였다.

태초 4년(389년) 12월, 요장은 장수 왕파로(王破虜)를 보내 진주(秦州)의 땅을 침략하게 하였으나, 좌승상 양정(定)이 왕파로와 청수(清水)의 격노판(格奴阪)에서 싸워 그를 크게 패배시켰다.(격노판 전투) 부등도 앙천보(鴦泉堡)에 주둔하고 있는 후진의 장수 장룡세(張龍世)를 공격하였으나, 요장이 장룡세를 구원하러 오자 퇴각하였다.(앙천보 전투)

요장이 안정성의 동문장군 임옹종(任甕宗)을 시켜, 내부의 응모자인 척 위장하여 부등을 속이게 하였고, 임옹종은 사자를 보내 부등에게 성문을 열고 그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부등이 이를 믿고 나아가려 하자, 외지에 주둔하고 있던 강족 뇌악지(雷惡地)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말을 타고 부등을 찾아와 말했다.
"요장은 계략이 많고, 사람들을 잘 다루므로 반드시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니, 이를 쉽사리 믿을 수는 없습니다. 부디 깊이 생각해주십시오."
부등은 그의 충고를 듣고 계획을 중단하였다. 요장은 뇌악지가 부등을 찾아간 것을 듣고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강족은 계략이 많다. 그가 부등을 찾아갔으니, 이번 일은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다."
이후 부등은 요장이 성문을 열어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며 측근들에게 말했다.
"뇌 정동장군은 성인(聖人)에 가까운 존재가 아닌가? 그가 없었다면 짐이 이 하찮은 자식들에게 속을 뻔했구나."

이 무렵, 부등이 안성왕(安成王) 부광(苻廣)을 사도로 임명하였다.

태초 5년(390년) 3월, 요장이 신라보(新羅堡)를 공격해 함락시키자, 전진의 부풍태수 제익남(齊益男)은 부풍군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에 전진의 장군 노시(路祡)와 강무(強武) 등은 모두 군사를 이끌고 요장에게 항복하였다.(신라보 전투)

부등이 후진의 천수(天水) 태수 장업생(張業生)을 농동(隴東)에서 공격하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요장이 그를 구원하러 오자, 부등은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농동 전투)

태초 5년(390년) 4월, 전진의 진동장군 위게비(魏掲飛)가 스스로 '충천왕(衝天王)'이라 자칭하고, 거병하여 저족을 비롯한 이민족 수만 명을 이끌고 후진을 침략하였다. 이때 후진의 진동장군 뇌악지도 요장을 배반하고 위게비에게 호응해 이윤(李潤)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후진의 안북장군 요당성(姚當成)이 행성에서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위게비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위게비와 그 병사 10,000여 명이 참수당했다. 뇌악지는 위게비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요장에게 귀순하였다.(위게비의 난)

태초 5년(390년) 7월, 빙익 사람 곽질(郭質)이 광향(廣鄉)에서 군대를 일으켜 부등을 지원하였다. 곽질은 삼보(三輔)에 격문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정의는 군자를 감동시키고 이익은 소인을 움직이는 법이다. 우리들은 태어나서 선제(先帝)의 요순(堯舜)과 같은 덕화를 만나, 여러 세대에 걸쳐 은혜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과 관료의 후손들인 너희들이 앉아서 이리떼가 군부(君父)를 해치는 것을 보고도 참아낼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군주의 시신이 가시덤불 위에 놓이고, 저승에서까지 고통받는 것을 참아낼 수 있단 말인가? 산과 숲에 묻히는 장례도 없고, 영령을 위한 사당에서 기리는 예도 없으니, 이는 역적의 최대한의 악행으로, 예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다. 차라리 쓴 것을 씹고, 매운 것을 삼키는 고통도 이보다 낫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요장은 극악무도한 행위를 벌이며, 그 독이 사람과 신령에게 미쳤다. 그는 도참이나 운명에도 맞지 않는 자이면서, 감히 스스로에게 중한 이름을 붙이고 뻔뻔하게 행동하고 있다. 하늘은 결코 그를 두고보지 않을 것이며, 세상도 그를 키우지 않을 것이다. 황천이 그를 멸하려 한다면, 충성스러운 사람의 손을 빌릴 것이다. 모든 군자들이 이 신성한 정의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니, 수치를 품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정의를 따르며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이에 동의했으나, 유독 정현(鄭縣) 사람인 순요(荀曜)는 이에 따르지 않고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아 요장에게 가담하였다. 부등은 곽질을 평동장군•빙익태수로 삼았고, 곽질은 보장(歩將)을 보내어 순요를 공격하였으나, 보장은 크게 패배하고 돌아왔다. 이에 곽질은 동쪽으로 가서 기주자사 양개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태초 5년(390년) 12월, 곽질이 순요와 정현 동쪽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순요에게 또 패배하였다. 곽질의 군대는 모두 흩어져 버렸고, 그는 결국 낙양(洛陽)으로 도망쳤다.

태초 6년(391년) 3월, 부등은 옹(雍)에서 출병하여 후진의 안동장군 김온(金溫)을 범씨보(范氏堡)에서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후 부등은 위수(渭水)를 건너, 후진의 경조(京兆) 태수 위범(韋範)을 단씨보(叚氏堡)에서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부등은 곡뢰(曲牢)로 진군하여 주둔하였다.

태초 6년(391년) 4월, 순요가 1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역만보(逆萬堡)를 점령하고, 비밀리에 부등에게 연락하여 내부에서 호응할 것을 약속하였다. 부등은 곡뢰에서 출발하여, 번천의 마두원(馬頭原)에 도착해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태초 6년(391년) 5월, 요장이 기병을 이끌고 와서 부등을 공격하였다. 양측은 크게 전투를 벌인 끝에, 부등이 승리하여 요장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후진의 우장군 오충을 붙잡아 참수하였다. 그러나 요장은 군대를 수습하여 다시 전투를 벌였고, 이번에는 부등이 패배하여 퇴각하고 미(郿)에서 주둔하였다. 이에 전진의 연주자사 강금추(強金槌)가 부등을 배반하고 요장에게 투항하였다.(마두원 전투)

태초 6년(391년) 7월, 부등이 신평으로 진공하였으나, 요장이 구원하러 오자 퇴각하였다.

태초 6년(391년) 12월, 부등이 다시 안정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였으나, 도중에 요장에 의해 음밀(陰密)에서 저지당했다. 부등은 요장에게 패배하여 퇴각하고, 노승보(路承堡)에 주둔하였다.(음밀 전투) 이때 요장의 태자 요흥이 배신자 순요를 주살하였다.

태초 7년(392년) 정월, 부등이 농서(隴西) 출신인 소의(昭儀) 이씨(李氏)를 황후로 세웠다.

태초 7년(392년) 3월, 전진에 복속했었던 선비족 다란부의 수령 몰혁간이 전진을 배반하고, 6,000여 호를 거느리고 요장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마침 요장은 병에 걸렸는데, 그는 부견의 혼령이 자신에게 해를 끼친 것이라 여겼다.

태초 7년(392년) 7월, 부등은 요장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을 먹이고 병력을 정비하였다. 그는 부견의 신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증손자 부등이 무기를 들고 싸운 지 어언 십 년이 되어가는데, 아직 한 번도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황제의 신령께서 항상 저를 지켜주셨고, 제가 있는 곳마다 적군은 마치 얼음이 깨지듯이 무너졌습니다. 지금 태황제(太皇帝, 부견)의 혼령께서 강족(羌族) 역적에게 재앙과 질병을 내렸으니, 이로 인해 그들은 반드시 무너지리라 추측됩니다. 저, 부등은 요장의 몰락을 틈타 하늘의 벌을 집행하고, 태황제의 관을 되찾아 사죄하고 종묘를 깨끗이 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후 부등은 대사면령을 내려 경내를 용서하고, 모든 관리들의 지위를 두 등급씩 승진시켰다. 이후 부등은 출진하여 안정성에서 90여 리 떨어진 곳에서 진군을 멈추었다.

태초 7년(392년) 8월, 요장은 병이 조금 나아지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부등에 맞서 싸우러 나섰다. 부등도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요장과 맞서 싸우려 하였으나, 요장이 안남장군 요희륭(姚熙隆)을 보내어 부등의 진영을 습격하니, 부등은 이를 두려워하여 군대를 후퇴시켰다.

그날 밤, 요장은 군대를 이끌고 부등의 진영을 지나 30여 리를 몰래 이동하여 전진군의 후방에서 대기하였다. 다음 날, 전방에 이미 비어있는 후진군의 진영을 살핀 부등의 척후병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적의 진영이 모두 비었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부등은 놀라며 말했다.
"그들은 어떻게 짐이 알지 못하게 떠났다가, 짐이 눈치채지 못하게 다시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짐이 이 강족(羌族)과 같은 시대에 살다니, 참으로 고통스럽구나!"
그러고는 군대를 철수하고 옹(雍)으로 돌아갔다. 이에 요장도 다시 안정으로 돌아갔다.

태초 7년(392년) 10월, 파촉(巴蜀) 출신 사람들이 관중(關中)에서 모두 요장에게 반란을 일으켜, 홍농(弘農)을 점거하고 부등에게 귀순하였다. 부등은 두충을 우승상으로 삼아 화음(華陰)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동진의 하남태수 양전기가 두충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태초 8년(393년) 6월, 우승상 두충은 스스로 재능을 자랑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였고, 부등에게 자신을 '천수왕(天水王)'으로 봉해달라 요청하였다. 부등이 이를 불허하자, 두충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진왕(秦王)을 자칭하고, 연호를 '원광(元光)'으로 개원하였다.

태초 8년(393년) 7월, 부등은 야인보(野人堡)에서 두충을 공격하였다. 두충은 요장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요장은 태자 요흥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고 호공보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두충을 구원하였다. 이에 부등은 두충에 대한 포위를 풀고 군대를 이끌고 호공보로 향하였다. 두충은 요장과 연합하여 화친을 맺었다. 그리고 요장은 병이 심해져 안정에서 장안으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태초 9년(394년) 정월, 태자 요흥이 요장의 붕어 소식을 숨겼음에도, 첩보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등은 기뻐하며 말했다.
"요흥은 애송이니, 내 몽둥이를 꺾어 볼기를 치겠다."
이후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모든 군대를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부등은 사도•안성왕 부광을 남겨 옹(雍)을 지키게 하고, 태자 부숭을 남겨 호공보를 지키게 하였다. 또한, 사신을 보내 금성왕 걸복건귀를 좌승상•영 진양익양하5주목(領秦梁益涼河五州牧)으로 삼고, 하남왕(河南王)으로 고쳐 봉하였으며, 구석을 더하였다.

태초 9년(394년) 2월, 부등이 도각족의 요노(姚奴), 백포(帛蒲) 두 요새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태초 9년(394년) 4월, 부등은 감천(甘泉)에서 출발하여 관중(關中)으로 향하였고, 요흥은 부등을 추격하였으나 수십 리 차이로 미치지 못하였다. 부등이 육맥(六陌)을 거쳐 폐교(廢橋)로 향하니, 후진의 시평(始平) 태수 요상(姚詳)은 마외보(馬嵬堡)를 지키며 부등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이후 요흥이 윤위를 보내 전진군보다 먼저 폐교를 점거한 뒤 위수의 물줄기를 끊게 하자 하루아침에 마실 물이 말라버린 전진군은 갈증으로 죽어나갔다. 윤위와 요상이 이때를 노려 전진군을 습격하니 부등은 패배하여 군사를 모두 잃고, 홀로 옹성(雍城)으로 달아났다.(마외보 전투) 옹성을 수비하던 부등의 아우 안성왕 부광은 형의 패전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대동한채 어디론가 도망쳤고, 호공보를 지키던 태자 부숭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진의 군사들이 뒤를 끊는 바람에 본거지로 돌아가는 길까지 막히자, 부등은 돌아갈 곳이 없어 결국 평량으로 도망쳐,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고 마모산(馬毛山)으로 들어갔다.

태초 9년(394년) 7월, 요흥의 군대가 마모산으로 향하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급박해진 부등은 아들 여음왕 부종(苻宗)을 서진의 하남왕 걸복건귀에게 인질로 보내면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아울러 부등은 걸복건귀를 양왕(梁王)에 봉하고, 자신의 여동생 부씨를 보내 왕후로 맞이하게 하였다. 이에 걸복건귀가 전장군 걸복익주에게 10,000여 명의 병력을 주어 부등을 구원하게 하였고, 부등은 이들을 영접하기 위해 마모산을 나왔다가 산 남쪽에서 요흥이 이끄는 후진군과 만나고 말았다. 부등이 이끌던 병력은 매우 적었으므로 요흥에게 금세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향년 52세, 재위 9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마모산 전투)

부등이 비참하게 죽고 후진의 군대가 본거지인 남안까지 밀고 들어오자 태자 부숭은 황중(湟中)까지 달아나 그곳에서 제위를 계승하였다. 부숭은 아버지 부등의 시호를 '고황제(高皇帝)',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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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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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의 역대 황제
4대 애평제 부비 5대 고황제 부등 6대 부숭


[1] 비수대전이 벌어지기 전 부견은 병주와 하주에 저족을 이주시키고, 자사를 파견해 적게나마 군대를 배치했다. [2] 황후 모씨는 키가 훤칠했으며,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힌데다가 기마술과 궁술에 능했다고 한다. 그 용맹함이 당시 장수들과 맞먹을 정도였는지, 부등은 평소 황후를 아내이자 용장(勇將)으로 대했으며, 이에 그녀를 믿고 군대를 맡긴 것이었다. [3] 당시 요장에겐 정처가 이미 있었음에도 "우리 둘이 사이가 좋아지면, 그대는 국모(國母)가 될 수 있을 것이오."라며 유혹한 것을 보면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