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4:14

유찬(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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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ece5b6>
전조 제4대 황제
유찬 | 劉粲
출생 연대 미상
서진 병주 신흥군 여치현
(現 산시성 신저우시 우타이현)
사망 319년
전조 평양 황궁 광극전
(現 산시성 린펀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4대 황제
318년 8월 31일 ~ 3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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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ece5b6> 성씨 유(劉)
찬(粲)
부황 열종
형제자매 20남 중 차남
배우자 황후 근씨
자녀 1남
사광(士光)
작호 하내왕(河內王)
시호 효은황제(孝隱皇帝)
연호 한창(漢昌, 318년 ~ 3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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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황태제 유예 제거2.3. 하내 방어전2.4. 황제 즉위2.5. 근준의 난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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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초기 전조(前趙)의 제4대 황제.

제3대 열종 소무제 유총의 차남으로 모친은 알려져 있지 않고, 는 사광(士光)이었다. 묘호는 없고, 시호는 나중에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유요가 추증해준 효은황제(孝隱皇帝)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광흥 원년(310년) 8월, 부친인 초왕 유총이 황제에 즉위하자 하내왕(河內王)에 책봉되고, 무군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에 임명되었다.

광흥 원년(310년) 10월, 시안왕 유요, 정동대장군 왕미와 함께 40,000 대군을 거느리고 낙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때 병주자사 석륵도 기병 20,000기를 이끌고 유찬과 합류해 면지(澠池)에서 감군 배막(裴邈)을 격파하고 낙천(洛川)으로 들어갔다. 이후 환원(軒轅)으로 나와 양국(梁國), 진류(陳留), 여남(汝南), 영천(潁川)을 노략질하고 서진의 100여 개의 보루를 떨어뜨렸다.

가평 원년(311년) 8월, 낙양 함락(영가의 난) 이후 포판(蒲板)을 지키던 남양왕 사마모의 아문 조염이 투항해오자, 소무제 유총이 그를 평서장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안서장군 유아(劉雅)에게 기병 20,000기를 주어 조염과 함께 장안을 공략하게 하는 동시에 유찬과 유요에게 많은 군사로 그 후미를 맡게 하였다. 조염이 사마모가 보내는 군대를 족족 격파하자 사마모는 장안성을 들어 항복하였고, 조염은 사마모를 사로잡아 후미를 지휘하던 유찬의 군중으로 압송하였다.

유찬은 사마모가 끌려오자 그를 곧바로 처형하고, 같이 끌려온 사마모의 아들 범양왕 사마려(司馬黎), 위장군 양분(梁芬), 장사 노요(魯繇), 겸산기상시 두경(杜驁), 신밀, 북궁순 등만 도성 평양으로 보냈다. 소무제 유총이 유찬이 사마모를 멋대로 죽였다는 사실에 크게 노하자, 유찬은
"신이 사마모를 죽인 것은 단지 그가 천명을 늦게 깨달아서가 아니라, 진 왕실의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목숨을 아껴 낙양의 재난을 막지 못한 것은 천하의 악이기 때문에 주살하였습니다."
라며 변명하였다. 유총이 답했다.
"비록 네 말이 옳으나, 나는 네가 항복한 자를 주살함으로 인해 남은 무리가 투항을 꺼릴까 두려운 것이다. 천도(天道)란 신(神)이 주관하므로 천명을 함부로 헤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이후 소무제 유총은 유요를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옹주목으로 삼고, 중산왕(中山王)에 봉해 장안성을 지키게 하였다. 유찬 또한 장안성 동쪽인 신풍(新豐)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복종하지 않는 나머지 관서 지역 공략을 준비하였다.

가평 원년(311년) 10월, 남양왕 사마모의 부하인 빙익태수 삭침(索綝), 안이호군 국윤 등이 아직 항복하지 않은 각 지역의 현령과 태수들을 규합하여 장안성 탈환을 노렸다. 당시 유찬은 조염과 유아으로 하여금 신평(新平)을 공략하게 하였는데, 삭침의 무리가 안정태수 가필을 평서장군으로 추대하고 50,000명의 군사를 일으켜 장안성으로 향하면서 조염, 유아와 더불어 100여 번을 싸워 마침내 패퇴시켰다. 중산왕 유요도 장안에서 군대를 발동해 황구(黃丘)에서 가필 등과 싸웠으나, 결국 패하여 장안성으로 패주하였고 유총이 임명한 양주(梁州)자사 팽탕중(彭蕩仲)은 가필에게 살해당하였다. 삭침과 가필의 연전연승으로 관서 지역은 크게 진동하였고, 유찬은 삭침에게 다시 패하여 신풍에서 쫓겨나 수도 평양(平陽)으로 돌아갔다. 가필에게 포위당한 채 수 개월간 장안성에서 농성하던 유요도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병사와 백성을 거두어 평양으로 도망쳤다.

가평 2년(312년) 5월, 소무제 유총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서진의 사도 부지가 수비하는 삼저(三渚)를 공격하였다. 때마침 부지가 급사해 삼저는 손쉽게 함락되었고, 유찬은 부지의 아들인 부창을 비롯한 그 자제와 백성 20,000여 호를 사로잡아 평양으로 돌아왔다.

가평 2년(312년) 7월, 서진의 병주자사 유곤이 진양현(晉陽縣)령 서윤(徐潤)의 참소만 믿고 자주 간언을 올리던 호군 영호성(令狐盛)을 죽였다. 영호성의 아들 영호니(令狐泥)가 한나라로 도주해 소무제 유총에게 유곤 세력의 허실을 전부 털어놓으니, 유총은 무척 기뻐하며 유찬과 중산왕 유요에게 영호니를 길잡이로 삼아 병주를 공략하게 하였다. 이를 들은 유곤은 상산(常山)과 중산(中山)에서 병력을 끌어오기 위해 근거지인 진양에서 나오고, 동맹인 탁발의로에게 구원을 청하는 동시에 장수 학선(郝詵)과 장교(張喬)를 보내 유찬을 막게 하였다. 유찬은 학선과 장교를 모두 무찔러 전사시킨 뒤 곧바로 진양을 포위하였고, 태원태수 고교(高喬), 병주별가 학율(郝聿) 등은 진양을 들어 항복하였다. 진양성에 입성한 유찬은 상서 노지, 시중 허하(許遐), 태자좌위솔 최위(崔瑋)를 평양으로 압송하였다.(진양 전투)

가평 2년(312년) 10월, 유곤이 구원을 청했던 탁발부에서 탁발의로가 아들 탁발육수에게 수만 대군을 주고 선봉에 세워 탁발보근(拓跋普根), 위웅(衛雄), 범반(範班), 희담(姬澹) 등과 함께 진양을 공격해, 궁지에 몰린 유곤을 구원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탁발의로는 친히 200,000 대군으로 그 뒤를 이어 진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곤은 패잔병 수천 명을 겨우 수습하고 탁발부의 군대를 위해 길을 안내했다. 중산왕 유요는 분수(汾水) 동쪽에서 탁발육수의 군대를 영격하려다 도리어 패주하고, 겨우 전장에서 탈출하여 진양으로 들어갔다. 유요와 유찬은 탁발부의 군대가 강해 진양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군사를 풀어 진양의 백성들을 실컷 약탈한 뒤 몽산(夢山)을 넘어 몰래 평양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탁발의로는 유찬과 유요를 추격해 남곡(藍谷)에서 그들의 군대를 대파하면서 3,000여 명이 전사하였고, 한군의 시체가 수백 리에 걸쳐 널렸지만, 유찬과 유요는 겨우 살아남아 평양으로 돌아갔다.(남곡 전투)

가평 3년(313년) 7월, 유곤이 형북(陘北)에서 탁발의로와 접견해 한나라 정벌에 대해 논의한 후 진군하여 남곡을 점거하였다. 이후 유곤은 감군 한거(韓據)에게 서평성(西平城) 공격을 명했으며, 대공 탁발의로도 탁발보근을 보내 북굴(北屈)에 주둔하여 유곤을 원조하였다. 이에 소무제 유총은 유찬을 파견해 남곡의 유곤을 치게 하고, 하간왕 유이에게 표기대장군을 더해 여러 장수들과 함께 탁발보근을 막게 하였으며, 탕진장군 난양(蘭揚) 등은 서평성으로 보내 수비를 돕게 하였다. 유곤이 한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군대를 거두어 철수하니, 소무제 유총은 여러 군대들에게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병주 공략의 계책을 생각해내게 하였다.

가평 4년(314년) 정월, 소무제 유총이 유찬을 승상, 영 대장군(領大將軍), 녹상서사(錄尚書事)로 삼고, 하내왕에서 진왕(晉王)으로 진봉시켰다.

가평 4년(314년) 11월, 소무제 유총이 유찬을 상국, 대선우로 삼아 백관을 통할하게 하고 국정을 맡겼다. 일찍이 준수한 재능을 타고나 문무를 겸비한 유찬은 젊은 나이에 재상의 직위에 오르자, 스스로 교만하고 방자해져 현명하고 충성스러운 자들을 멀리하여 간언을 싫어하고, 아첨하는 간사한 자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엄격하고 혹독하여 은혜를 베풀 줄 몰랐다. 또, 사치 부리기를 좋아하여 자신의 궁궐과 상국부의 관청을 황제의 것 마냥 화려하게 축조하니, 모든 백성들이 그를 싫어하였다.

2.2. 황태제 유예 제거

건원 원년(315년) 3월, 동궁(東宮)에 하늘에서 피가 비처럼 내리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자, 황태제 유예가 이를 불길하게 여겨 태부 최위와 태보 허하를 불러 의논하였다. 최위와 허하는 소무제 유총의 마음이 이미 그의 적장자 유찬에게 가 있어, 자객 한 명을 보내 유찬을 암살하고 동궁의 친위대로 황궁을 장악해버리자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유예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역모 논의가 누설되어 소무제 유총은 최위와 허하를 죽이고, 관위장군 복추를 보내 동궁을 감시케 하였다. 유예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스스로 황태제에서 물러나길 청하면서 소무제 유총에게 유찬을 태자로 삼으라 권하려 했으나, 복추의 방해로 인해 그 서신은 유총에게 전달되지 못 하였다.

건원 2년(316년) 정월, 소무제 유총의 총애를 받는 중궁복야 곽의(郭猗)와 중호군 근준은 모두 유예에게 원한이 있어 유찬을 이용해 그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그들은 유찬에게로 가서 3월에 있을 삼짇날 연회 때 황태제 유예가 유찬의 동생인 대장군 유기(劉驥), 위대장군 유매(劉勱)와 함께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참소하였다. 여기에 대장군 종사중랑 왕피(王皮), 위군사마 마돈(劉惇)까지 곽의의 지령을 받고 가세하여 거짓 증언을 하니, 유찬은 그들의 말을 믿었다. 또, 근준은 유찬에게 유예를 죽이면 황태자에 오를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부추기면서 복추를 동궁에서 떠나게 하여 경비를 느슨히 한다면 유예를 죽이는 데에 유리해질 것이라 유세하였다. 유찬은 근준의 말에 넘어가 명을 내려 복추를 동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인가 2년(317년) 3월, 유찬이 부하인 왕평(王平)을 시켜 황태제 유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하였다.
"조서에서 이르기를, 경사(京師)에 장차 변고가 있을 예정이니 옷 속에 갑옷을 입어 대비하라 하였습니다."
황태제 유예는 그 말을 믿고 동궁의 신하들에게 옷 안에 갑옷을 입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찬은 그 즉시 사자를 근준과 왕침에게 파견해 일렀고, 근준은 곧바로 소무제 유총를 알현해 말했다.
"왕평이 이르기를 동궁은 항상 은밀히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하였는데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무제 유총은 크게 놀라서 말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자 왕침 등이 한 목소리로 진언했다.
"신들은 오래도록 들은 바가 있었으나, 폐하께서 믿지 않으실까 두려워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에 소무제 유총은 유찬으로 하여금 동궁을 포위하게 하였다. 유찬은 왕침과 근준을 보내 강족과 저족 추장 10여 명을 체포한 후[1], 그들을 심문하면서 높은 기둥에 머리를 매달아놓고 불에 달군 쇠로 그들의 눈을 지져 유예와 반역을 공모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보고를 받은 소무제 유총은 유예가 진실로 반역을 꾀했다 믿고, 왕침 등에게
"오늘에서야 나는 경들이 얼마나 짐에게 충성을 다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유념치 말고 먼저 말을 꺼내도록 하라."
라 하였다. 이로 인해 유예는 역적으로 확정되었고, 동궁의 소속 친위대인 15,000여 명의 4익위 병사들이 모두 갱살되었다. 아울러 유예와 친하게 지내던 대신이나 동궁의 관속 수십 명이 주살당했는데, 이들 모두 왕침, 근준 등에게 평소 밉보인 자들이었다.

인가 2년(317년) 4월, 유찬이 근준을 보내 황태제에서 폐위되고 북부왕(北部王)으로 강등당한 유예를 암살하게 하였다.

인가 2년(317년) 7월, 소무제 유총이 진왕 유찬을 황태자로 삼고, 상국, 대선우 직위는 이전과 같이 유지토록 하여 국정을 계속 총괄하게 하였다.

2.3. 하내 방어전

인가 2년(317년) 12월, 동진의 하남태수 조고와 하내태수 곽묵이 하동을 침범해 강(絳)에 이르렀다. 우사예(右司隸)의 백성 30,000여 명이 동진군의 진영으로 도주하자, 소무제 유총은 기병장군 유훈(劉勲)을 보내 그 뒤를 쫓아 10,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그때 조고와 곽묵가 군대를 물려 후퇴하니, 유찬은 100,000 군대를 통솔하여 소평진(小平津)에 주둔하고 다시 민제 사마업을 주살하면 조고가 알아서 무너질 것이라 상표하며 유총에게 빠른 시일 내로 사마업을 죽이라 독촉하였다. 마침내 결심이 선 소무제 유총은 민제 사마업을 살해하였다. 한편, 조고의 군대와 대치하던 유찬은 장군 유아생(劉雅生)에게 지름길로 나아가 낙양을 습격케 하여 탈환하였고, 본거지를 잃은 조고는 놀라 양성산(陽城山)으로 도망쳤다.

인가 3년(318년) 3월, 유찬과 유아생은 양성산으로 도망친 조고를 추격하였다. 이에 이구는 곽송과 곽묵을 보내 조고를 구원하게 하니, 곽송은 낙구(洛口)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상황을 살피던 곽송이 장수 경치(耿稚), 장혁(張皮)에게 정예병 1,000명을 주고 야밤에 황하를 건너서 전조군 진영을 기습하게 했다. 전조의 패구왕(貝丘王) 유익광(劉益光)이 정찰병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유찬에게 대비하라 했으나 유찬은 듣지 않았다. 이윽고 황하를 다 건넌 경치와 장혁이 10갈래로 전조의 군영을 야습하자 전조군은 순식간에 붕괴했고 죽은 이가 반이 넘었다. 이때 경치가 노획한 병장기와 군수품이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유찬은 양향(陽鄉)으로 달아났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경치 등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패잔병들을 수습해 반격을 개시했다. 소무제 유총도 태위 범륭에게 기병을 주어 유찬을 돕게 하니, 경치와 장혁은 혈전을 벌여가며 20일을 버텼다. 이구와 곽묵은 황하에 배를 띄워 군사 3,000명으로 경치 등을 지원하려 했으나, 전조군이 이미 황하 건너편을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어 상륙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구는 야밤에 부장들을 강에 잠수시켜 적군 몰래 경치 등의 진영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구의 지시를 전달받은 경치는 정예 기병 1,000명을 선발하고, 남은 소와 말을 전부 찔러 죽였으며, 노획한 물자들을 모두 불태운 뒤, 포위망을 뚫고 호뢰(虎牢)로 도망쳤다.

중상시 왕침에게는 그 해로 14세가 되는 수양딸이 있었는데, 그 미색이 절묘하게 아름다워 소무제 유총이 그녀를 들이고 좌황후로 삼았다. 이에 대해 상서령 왕감(王鑒), 중서감 최의지(崔懿之), 중서령 조준(曹恂)이 간언하자, 소무제 유총은 대로하여 선회를 유찬에게로 보내
"왕감 등의 소인배들이 나라를 업신여기고 그 입으로 광언(狂言)을 내뱉어 군신간에 상하의 예가 없어졌으니 속히 처리하도록 하라."
라는 말을 전했다. 이에 유찬은 왕감 등을 체포해 평양성 동시(東市)로 끌고가 참수하였다.

2.4. 황제 즉위

한창 원년(318년) 7월 20일, 소무제 유총이 붕어하고 황태자 유찬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소무제의 황후들 중 근월화(靳月華)가 황태후로 세워졌고, 나머지 황후들인 번씨는 홍도황후, 무씨는 홍덕황후, 왕씨는 홍효황후에 임명되었다. 은제 유찬의 처 근씨 역시 황후로 높여졌고, 유찬의 아들 유원공(劉元公)은 태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경내에 대사면령을 발령하고, 연호는 '한창(漢昌)'으로 개원하였다. 선제 유총은 선광릉(宣光陵)에 안장되었고, 시호는 '소무(昭武)', 묘호는 '열종(烈宗)'으로 정하였다. 이 날, 또 하늘에서 피가 비처럼 내렸다고 한다.

2.5. 근준의 난

한창 원년(318년) 8월, 황태후 근월화를 비롯한 4명의 소무제의 황후들은 모두 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고 미모 또한 빼어났다. 아버지를 위한 복상조차 하지 않은 은제 유찬은 그녀들을 태후로 대우하지 않고, 모두 취해 밤낮으로 음란한 행각을 즐겼다. 이때 근 태후와 근 황후의 아버지인 외척 근준은 마침내 모반을 실행할 뜻을 품고 은제 유찬에게 진언하였다.
"듣자 하니, 여러 공(公)들이 이윤 곽광의 고사를 행하고자 신(臣)과 태보(호연안)를 주살하고, 대사마(유기)에게 만기(萬機)를 맡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합니다. 신은 폐하께서 먼저 손을 쓰지 않다가 화를 입으실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은제 유찬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근준은 두려운 마음을 품고 두 딸에게 부탁하며 말하였다.
"지금 여러 공후(公侯)들이 황제를 폐위하고 제남왕(濟南王)을 옹립하려 하는데, 이 일이 성공한다면 우리 집안이 멸족될까 두렵구나. 부디 이 일을 황제께 전해다오."
이에 근 태후와 근 황후가 기회를 보아 은제 유찬에게 근준의 말을 전하니, 그제서야 유찬은 근준의 주장을 믿고 태재•상낙왕 유경(劉景), 태사•창국공 유의(劉顗), 대사마•제남왕 유기, 거기대장군•오왕 유령(劉逞), 대사도•제왕 유매 등 자신의 동생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형하였다. 소무제 유총에게서 직접 보정을 부탁받은 태부 주기(朱紀)와 태위 범륭은 심상치 않은 낌새를 감지하고 장안의 승상 유요에게로 도망쳤다.

은제 유찬이 상림원(上林苑)에서 군사 훈련을 감독하고, 사실상 한나라로부터 독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대장군 석륵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유찬은 승상 유요에게 상국, 도독중외제군사를 더해 장안을 그대로 지키게 하고, 근준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삼았다. 그러나 은제 유찬은 항상 후궁에 머물면서 연회를 즐기기에 바빴고, 군사와 국정은 모두 대장군 근준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에 근준은 유찬의 명령을 사칭해 사촌동생 근명(靳明)을 거기장군에 임명하고, 근강(靳康)을 위장군에 임명하여 병권을 장악하였다.

어느덧 때가 되었다 생각한 근준은 금자광록대부 왕연을 찾아가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왕연은 근준의 뜻을 따르지 않고, 말에 올라 유찬에게 급히 이 일을 보고하려 하였으나, 근준이 보낸 위장군 근강에게 붙잡혀 억류당하였다. 이후 근준은 곧바로 발동하고, 광극전(光極殿)에 올라 갑사들과 함께 후궁으로 들이닥쳐 은제 유찬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유찬의 죄상을 조목조목 읊은 다음 유찬을 처형하고, 유찬의 시호를 '은제(隠帝)'라 하였다.

곧이어 근준은 유찬의 외아들이자 태자인 유원공을 비롯해서 수도 평양에 있었던 태조 광문제 유연, 열종 소무제 유총의 자손을 비롯한 모든 유씨 황족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 없애고, 유연의 능묘인 영광릉과 유총의 능묘인 선광릉을 도굴해 부장품과 보물들을 손에 넣은 다음 죽은 그들의 관을 꺼내 부관참시하고 불태워버렸다.

근준은 선제 유총 시절부터 박대를 당하지 않고 외척의 지위에 올랐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근준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충 짐작할 수는 있다. 《 진서》 <이구전>에 의하면 황제 유찬을 시해한 근준은 옥새를 얻어[2] 동진의 도독하남삼군군사였던 이구에게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유연은 도각(屠各)[3]의 작은 우두머리이며 진나라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틈타 유주와 병주에서 난을 일으켜 천명을 멋대로 들먹이고 를 유폐하여 오랑캐의 조정에서 시해하는 데 이르렀소. 항상 군사를 이끌고 재궁을 도울 것이니 이로 인해 이를 들어달라고 청하오."
이구는 이 사실을 동진의 중종 원황제 사마예에게 알렸고 사마예는 이 틈을 타서 태상 한윤(韓胤) 등을 보내 소무제 유총에 의해 피살된 회제 사마치와 민제 사마업의 영구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근준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은 서진을 멸망으로 몰고 간 흉노에 대한 증오심이 일찍부터 있었고[4] 기회를 보아 자신이 실권을 차지한 후, 유씨 황실를 도륙내고 다시 진나라를 부흥시킬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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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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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예는 대선우로서 저족과 강족 등 이민족의 통치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고 있어 이들과 친밀했다. [2] 역사상 유명한 보물인 전국옥새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전국옥새는 나중에 염위가 멸망할 때 동진에 보냈기 때문이다. [3] 북방 오랑캐의 일종 [4] 《진서》에서도 항상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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