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06:10:51

걸복건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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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3854><colcolor=#ece5b6>
서진 2대 군주
걸복건귀 | 乞伏乾歸
출생 불명
전진 하주 농서군
(現 간쑤성 딩시시 룽시현)
사망 412년 6월
서진 사주 형양군 담교성
(現 허난성 정저우시 중무현)
능묘 불명
재위기간 서진 2대 대선우
388년 6월 ~ 394년 12월
서진 초대 진왕
394년 12월 ~ 400년 8월
후진 귀의후 → 좌현왕
400년 11월 ~ 409년 7월
서진 초대 진왕
409년 7월 ~ 4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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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3854><colcolor=#ece5b6> 성씨 걸복(乞伏)
건귀(乾歸)
부왕 걸복사번(乞伏司繁)
배우자 변씨(邉氏)
자녀 15남 1녀 이상
불명
작호 하남왕(河南王) → 금성왕(金城王) → 양왕(梁王)
→하남왕(河南王)
묘호 고조(高祖)
시호 무원왕(武元王)
연호 태초(太初, 388년 ~ 400년)
경시(更始, 409년 ~ 4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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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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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16국 중 하나인 서진의 2대 군주. 선비족 걸복부의 수령 걸복사번(乞伏司繁)의 아들이자, 서진의 건국 군주인 걸복국인의 동생이다. 후진의 요흥에 의해 나라가 한번 멸망당했지만, 다시 세력을 기르고 자립하여 서진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2. 생애

걸복건귀는 용맹하고, 영걸의 기상을 지녔으며, 침착하고 도량이 넓었다.

태초 원년(388년) 6월, 걸복국인이 사망하자, 신하들은 걸복국인의 아들인 걸복공부(乞伏公府)가 아직 어리므로 연장자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 모두 걸복건귀를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河南王)으로 추대하였다. 이리하여 걸복부의 수령이 된 걸복건귀는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태초(太初)'로 개원하였다.

태초 원년(388년) 7월, 걸복건귀는 아내 변씨(邉氏)를 왕후로 세우고, 한나라 제도를 본따 백관을 두었다. 남천후 출련걸도(出連乞都)를 승상•진남장군•남량주자사(南梁州刺史)로 삼고, 막후제권(莫侯悌眷)을 어사대부, 금성(金城) 사람 변병(邉苪)을 좌장사•동진주자사(東秦州刺史), 비의(秘宜)를 우장사, 무시(武始) 사람 적경(翟勍)을 좌사마, 적온(翟瑥)을 우사마, 약양(畧陽) 사람 왕송수(王松壽)를 주부, 사촌동생 걸복가탄(乞伏軻彈)을 양주목(梁州牧), 동생 걸복익주(乞伏益州)를 진주목(秦州牧), 굴권(屈眷)을 하주목(河州牧)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나머지 관직에도 적합한 인물들을 임명하여 봉작하였다.

태초 원년(388년) 9월, 걸복건귀가 도읍을 용사성(勇士城)에서 금성(金城)으로 옮겼다.

태초 2년(389년) 정월, 전진의 황제 부등이 사신을 보내 걸복건귀를 대장군•대선우•금성왕(金城王)으로 삼았다.

태초 2년(389년) 4월, 남강족(南羌) 독여(獨如)가 7,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서진에 귀순하였다.

당시 휴관(休官)과 아돈후(阿敦侯) 두 부락이 각각 5,000여 호를 이끌고 견둔산(牽屯山)을 점거하여 변방에 위협이 되었다. 이에 걸복건귀가 친히 출병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그들의 무리를 모두 항복시키니, 이로 인해 걸복건귀의 명성이 변방에 널리 퍼졌다. 그 결과, 선비족의 두류(豆留)와 의질두혼(猗叱豆渾), 남구(南丘)의 녹결(鹿結), 휴관족의 갈호노(曷呼奴), 노수(盧水), 위지발(尉地拔) 등이 모두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걸복건귀는 그들에게 각자의 관직과 작위를 수여하였다.

태초 2년(389년) 11월, 부한(枹罕)의 강족 팽해념(彭奚念)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귀부하자, 걸복건귀는 그를 북하주자사(北河州刺史)로 임명하였다.

태초 3년(390년) 4월, 토욕혼의 왕 토욕혼시연(吐谷渾視連)이 사신을 보내 걸복건귀에게 신하를 자처하며 토산물을 바쳤다. 이에 걸복건귀는 시연을 사주목(沙州牧)으로 임명하고, 백란왕(白蘭王)에 봉하였다.

태초 3년(390년) 9월, 백란왕 시연이 사망하자, 그 아들 토욕혼시비(吐谷渾視羆)가 왕위에 올랐다. 시비는 영명하고 용감하며, 뛰어난 전략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과 조부가 인자함으로 인해 사방 이웃에게 침략을 당한 것을 보았던 시비는 박사 전포(騫苞)에게 말했다.
"《 주역(周易)》에 '동정(動靜)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고, 강함과 부드러움이 결단된다'고 했소. 선왕들이 인(仁)으로 세상을 다스린 것은 올바른 일이었으나, 지나치게 인자함에 의지하여 위엄과 형벌을 쓰지 않으니 강함과 부드러움이 모두 흐트러졌소. 이로 인해 이웃들에게 가볍게 여겨졌고, 우리는 적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소. 어찌 마땅히 손을 놓고 가만히 있어야 하겠소? 이제 말을 먹이고 병기를 갈아 중원과 대등하게 겨뤄보고자 하니,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전포가 답했다.
"대왕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는 전략이니, 이는 진(秦)과 농(隴) 지방의 영웅들이 듣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 말을 듣고 시비는 마음을 비우고 백성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귀부하듯 모여들었다.

태초 3년(390년) 10월, 걸복건귀는 토욕혼으로 사신을 보내, 시비를 사지절•도독파학이서제군사(都督罷涸已西諸軍事)•사주목•백란왕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시비는 이를 받지 않으며 서진의 사신에게 말했다.
"진나라(晉)가 무너진 이래로 도덕이 무너지고, 간웅들이 서로 다투었소. 유씨(劉)와 석씨(石) 두 세력은 잔혹한 혼란을 일으켰고, 진(秦, 전진)과 연(燕, 전연)은 방자하게 굴었소. 하남왕(河南王)은 천하의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니, 마땅히 의로운 군사를 규합해 불순한 자들을 징벌해야 하오. 그런데 어찌 사사로이 서로 관직을 주고받으며 간악한 무리들과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오?

나는 5대(五代)로 이어져 온 조상의 업적을 이어받아 활을 쏠 수 있는 2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소. 이제 나는 진(秦)과 농(隴)의 혼란을 청소하고, 사량(沙凉) 지역을 정리한 후에, 말을 타고 나아가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의 물을 마시게 하며 반역자들을 정벌하려 하오. 그런 후 천자(天子)를 서경(西京)으로 맞이하여 먼 변방의 예의를 다할 생각이오. 어찌 감히 제멋대로 자신을 높이며, 하남왕에게 '백란왕'이란 칭호를 받으려 하겠소? 하남왕이 진실로 황실을 위해 공을 세우고, 왕부(王府)에 이름을 올려 그 업적을 후대에 남기길 바란다면 어찌 지금과 같은 방법을 쓰겠소?"
사신이 돌아가 이 말을 전하자 걸복건귀는 크게 노하였으나, 시비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그와 여전히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태초 3년(390년) 11월, 농서(隴西) 태수 월질힐귀(越質詰歸)가 평양(平襄)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건국장군(建國將軍)', '우현왕(右賢王)'이라 칭하였다.

태초 4년(391년) 정월, 걸복건귀가 군대를 이끌고 월질힐귀를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월질힐귀는 동쪽으로 도망쳐 농산(隴山)에 숨었으나, 이후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왔다. 걸복건귀는 그의 투항을 받아주고, 자신의 종녀(宗女)를 월질힐귀에게 시집보낸 뒤에 그를 의장군(義將軍)으로 임명하였다.

태초 4년(391년) 7월, 전진의 표기장군 몰혁간이 서진으로 사신을 파견해 걸복건귀와 친교를 맺고, 두 아들을 볼모로 보내면서 함께 선비족 대두국(大兠國)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걸복건귀는 이를 받아들여 몰혁간과 함께 안양성(安陽城)에서 대두(大兠)를 공격하였다. 대두는 명선보(鳴蟬堡)로 후퇴하여 그곳을 지켰으나, 이내 걸복건귀가 명선보를 공격하여 함락시켰키니, 대두는 허름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빠져나왔다. 걸복건귀는 대두의 부락을 수용한 후, 몰혁간의 두 아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몰혁간은 아들들을 돌려받자마자 곧 배신하여 동쪽으로 흉노족 철불부 유위진과 연합하였다.

태초 4년(391년) 8월, 걸복건귀가 기병 10,000기를 이끌고 몰혁간을 토벌하자, 몰혁간은 타루성(他樓城)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이때 걸복건귀는 도망가는 몰혁간을 활로 쏘아, 그의 한쪽 눈을 맞춰 실명시켰다.

태초 4년(391년) 10월, 삼하왕 여광(呂光)이 그의 동생이자 우장군인 여보(呂寳)를 보내 걸복건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도읍 금성을 공격하였다. 몰혁간을 쫓던 걸복건귀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군대를 돌렸으나, 여보의 매복에 걸려 명작협(鳴雀峽)에서 패배하였고, 청안(青岸)으로 퇴각해 주둔하였다.

태초 5년(392년) 8월, 여보가 먼저 걸복건귀를 공격해왔다. 이에 걸복건귀는 북하주자사 팽해념에게 명령하여 여보의 퇴로를 차단하게 하고, 스스로 갑옷을 입고 참전하여 여보를 여러 차례 연달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대패한 여보와 그의 장수들은 강에 몸을 던져 익사하였고, 아울러 여보의 병사 10,000여 명이 죽었다. 여광은 다시 그의 아들인 호분중랑장 여찬을 보내 팽희념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여찬 역시 패배하고 도망쳤다.

태초 6년(393년) 정월, 현친(顯親)을 점거하고 있던 휴관족 권천성(權千成)이 전진의 압박을 받아, 사신을 보내 걸복건귀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걸복건귀는 그를 동진주자사(東秦州刺史)•휴관대도통(休官大都統)로 임명하고, 현친공(顯親公) 작위를 수여하였다.

태초 6년(393년) 6월, 걸복건귀가 아들 걸복치반을 태자로 세웠다. 걸복치반은 용맹하고 전략적 판단이 뛰어나, 그 아버지인 걸복건귀보다도 우수하였다고 한다.

태초 7년(394년) 정월, 전진의 황제 부등이 다시 사신을 보내, 걸복건귀를 가황월(假黃鉞)•대도독•독농우하서제군사(督隴右河西諸軍事)•좌승상•대장군•하남왕•영 진양익양사5주제군사(領秦梁益涼沙五州牧)로 삼고, 구석(九錫)의 예를 더하였다.

태초 7년(394년) 6월, 부등은 후진의 요흥의 압박을 받아, 그의 아들인 여음왕 부숭을 걸복건귀에게 인질로 보내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걸복건귀는 부등에게 자신을 양왕(梁王)으로 진봉시켜줄 것을 청하고, 관사를 설치하였으며, 부등의 여동생인 동평장공주(東平長公主)를 맞아들여 양왕후(梁王后)로 삼았다. 원하는 것을 얻어낸 걸복건귀는 전장군 걸복익주와 관군장군 적온에게 기병 20,000기를 주어 구원군으로 보냈으나, 부등이 요흥에게 결국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태초 7년(394년) 10월, 부숭이 걸복건귀로부터 도망쳐, 농서왕 양정에게 의탁하였다. 양정은 사마 소강(邵疆)을 남겨 진주(秦州)를 지키게 하고, 보병과 기병 40,000명을 이끌고 부숭과 함께 걸복건귀를 공격하였다. 이에 걸복건귀는 양주목 걸복가탄, 진주목 걸복익주, 의장군 월질힐귀에게 기병 30,000기를 주어 이를 막게 하였다. 걸복익주와 양정은 평천(平川)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익주가 패배하였다. 이를 들은 걸복가탄과 월질힐귀는 군대를 물리려 하였으나, 관군장군 적온이 칼을 빼어 들고 이들을 위협하며 저지하였다. 걸복가탄은 하는 수 없이 기병을 이끌고 걸복익주를 구원하러 나섰고, 월질힐귀 역시 병력을 정비해 진격하였다. 그 결과 양정은 크게 패배하였고, 걸복가탄은 양정과 부숭의 목을 베고 17,000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이로써 걸복건귀는 농서(隴西)와 파서(巴西) 지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태초 8년(395년) 정월, 걸복건귀는 스스로 진왕(秦王)을 칭하고, 그 영내에서 사면령을 내려 사형 이하의 죄를 용서하였다. 태자 걸복치반을 상서령, 출련걸도를 승상, 좌장사 변병을 상서좌복야, 우장사 비의를 상서우복야, 관군장군 적온을 이부상서, 좌사마 적경을 주객상서(主客尚書), 두선(杜宣)을 병부상서(兵部尚書), 왕송수를 민부상서(民部尚書), 번겸(樊謙)을 삼공상서(三公尚書), 방홍(方弘)과 곡경(曲景)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그 외의 직책도 모두 위무제 진문제의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걸복건귀는 여전히 대장군과 대선우의 칭호를 사용하였고, 변병 등은 이전과 같은 부서(府署)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태초 8년(395년) 4월, 선비족 독발부의 독발여구(禿髪如茍)가 20,000여 호를 이끌고 항복해오자, 걸복건귀는 자신의 종녀(宗女)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태초 8년(395년) 6월, 걸복건귀는 도읍을 서성(西城)으로 옮겼다.

태초 8년(395년) 7월, 삼하왕 여광이 직접 100,000 군사를 이끌고 걸복건귀를 공격해왔다. 이때 좌보장군 밀귀주(宻貴周)와 우위장군 막자고정(莫者羖羝)이 걸복건귀에게 말했다.
"여광이 곧 도착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세상을 구원할 영웅의 자질을 타고났고, 업(業)을 열어 지금까지 여러 간악한 무리들을 물리치셨으며, 그 위세가 멀리까지 떨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동쪽 하(夏) 땅에 순풍을 불게 하여 800년의 번영을 이루실 분이십니다. 한데 작은 일로 인해 간사한 무리들과 일시적으로 다투게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번 일이 실패한다면,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을 것이니,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어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걸복건귀는 여광에게 칭번하고, 아들 걸복칙발(乞伏敕勃)을 볼모로 보냈다. 그러나 이내 후회하고는 밀귀주와 막자고정을 죽였다.

태초 9년(396년) 정월, 휴관족 권만세(權萬世)가 무리를 이끌고 걸복건귀에게 투항하였다.

태초 9년(396년) 10월, 양주목 걸복가탄과 진주목 걸복익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결국 걸복가탄이 후량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해, 걸복건귀가 임명한 의장군 월질힐귀가 또 반란하여 20,000여 호를 이끌고 후진에 투항하였다. 이에 현친공 권천성이 무리를 이끌고 후진의 상규(上邽)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약양(畧陽)으로 후퇴해 주둔하였다. 그때 요석덕이 그를 공격하자, 권천성도 항복하였다.

태초 10년(397년) 정월, 양왕(涼王) 여광은 걸복건귀가 여러 차례 변심하고 배반하자 군사를 일으켜, 여연(呂延)을 선봉으로 삼아 공격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은 모두 걸복건귀에게 동쪽 성기(成紀)로 도망가 여광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걸복건귀는 따르지 않고 장수들에게 말했다.
"예전에 조맹덕(曹孟德)은 관도(官渡)에서 원본초(袁本初)를 패배시켰고, 육박언(陸伯言)은 백제(白帝)에서 유현덕(劉玄德)을 무너뜨렸다. 이 모두 권모술수를 사용해 이긴 것이다. 군대의 승패는 꾀의 능숙함에 달려 있지, 군사 수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여광이 비록 전 주(州)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멀리 내다보는 계략이 없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그의 정예 병력은 모두 여연에게 있다. 여연은 용맹하지만 계략이 없으니, 기묘한 책략으로 제압하기 쉽다. 만약 여연의 군대가 패배하면 여광도 물러날 것이니, 그때 승세를 타고 추격하면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무리들은 모두 그의 말에 감탄하며 "이 방법은 우리로서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태초 10년(397년) 2월, 여광은 본대를 장최(長最)에 주둔시키고, 아들 여찬에게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주어 금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걸복건귀는 군사 20,000명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여찬이 이미 금성을 함락하였다. 여광의 별장(別將) 양공(梁恭) 등은 갑옷을 입은 군사 10,000여 명을 이끌고 양무(陽武) 아래 협곡으로 나와, 진주자사 몰혁간과 함께 동쪽을 공격하여 서진을 협공하였다. 여연 또한 부한에서 군사를 이끌고 임도(臨洮)와 무시(武始), 하관(河關)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걸복건귀는 장수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상황이 매우 위급하여 도망가 목숨을 구할 곳이 없다. 그러나 죽음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오늘이 그날이다. 양군(涼軍)이 비록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산과 강이 막혀 있어 힘을 합치지 못하고 있다. 그들 중 한 군대를 격파하면 나머지 군대는 저절로 퇴각할 것이다."
이에 반간계를 써서 여연에게 거짓으로 "진왕(秦王) 걸복건귀의 군대가 무너져 동쪽 성기로 도망쳤다"고 전하였다. 여연은 이를 믿고 기병을 이끌고 가볍게 전진하다가, 그의 군대는 대패하고 여연 또한 전장에서 전사하여 참수당했다. 여연의 사마 경치(耿稚)와 부장 강현(姜顯)은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부한으로 퇴각하였고, 여광도 군대를 이끌고 고장(姑臧)으로 귀환하였다.

태초 10년(397년) 6월, 걸복건귀는 북하주자사 팽해념을 진위장군, 진서장군 옥렬파광(屋列破光)을 하주목으로 삼고, 정주자사(定州刺史) 적온을 진흥(晉興) 태수로 삼아 부한을 지키게 하였다.

태초 10년(397년) 10월, 후진의 장수교위 요진(姚珍)이 걸복건귀에게 귀순해오자, 걸복건귀는 자신의 딸을 요진에게 시집보냈다.

태초 11년(398년) 정월, 걸복건귀는 진주목 걸복익주를 파견해 양주(涼州)의 지양(支陽), 전무(鸇武), 윤오(允吾) 세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걸복익주는 세 성을 모두 격파하고, 10,000여 호를 사로잡고 돌아왔다.

태초 11년(398년) 6월, 남량 독발오고가 사신을 보내와 혼인으로 화친을 맺기를 청하였다.

이 시기에 후량에서 반란을 일으킨 산기상시 곽논(郭黁)이 불리해지자 걸복건귀에게 귀순하였고, 걸복건귀는 그를 건충장군•산기상시로 삼았다.

태초 11년(398년) 9월, 걸복건귀가 진주목 걸복익주, 무위장군 모올(慕兀), 관군장군 적온에게 기병 20,000기를 주어 토욕혼을 정벌하게 하였다.

태초 11년(398년) 10월, 걸복익주 등은 백란왕 토욕혼시비와 도주천(度周川)에서 전투를 벌여 그를 대파하였고, 시비는 백란산(白蘭山)으로 퇴각하여 성을 지켰다. 시비는 결국 서진으로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토산물을 바쳤으며, 아들 토욕혼탕기(吐谷渾宕豈)를 인질로 보냈다. 걸복건귀는 이번에도 종녀(宗女)를 볼모로 온 시비의 아들과 혼인시켰다.

태초 12년(399년) 4월, 선비족 질굴(迭掘)이 하내(河內)의 백성 5,000호를 이끌고 북위에서 도망쳐서 걸복건귀에게 투항하였다. 걸복건귀는 질굴을 하내도통(河內都統)으로 삼고, 자신의 종녀(宗女)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태초 12년(399년) 7월, 승상•남천공 출련걸도가 사망하였다. 시호는 '선(宣)'이라 하였다.

태초 12년(399년) 10월, 걸복건귀가 금성태수 신정(辛靜)을 우승상으로 삼았다.

태초 13년(400년) 정월 24일[1], 당시 걸복건귀가 거주하던 금성에서 남경문(南景門)이 아무 이유 없이 무너졌다. 걸복건귀는 이를 매우 불길하게 여겨 도읍을 원천(苑川)으로 옮기고,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태초 13년(400년) 5월, 후진의 요흥이 정서장군 요석덕에게 군사 50,000명을 이끌고 서진을 침공하게 하였다. 요석덕이 남안협(南安峽)을 통해 진입하니, 걸복건귀는 장수들을 이끌고 이를 막으러 친히 출병하여 농서(隴西)에서 대치하였다. 그러자 요흥은 다시 별장(別將)을 보내 몰래 군사를 추가로 파병하였다.

태초 13년(400년) 7월, 걸복건귀는 장차 요흥의 군대가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내가 나라를 세운 이래로 강한 적들을 여러 차례 물리쳤으며, 때를 타고 계산을 잘하여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지금 요흥은 중원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와서 군세가 매우 강성하고, 이곳은 산천이 험해 기병을 펼치기 어려운 곳이다. 그러므로 평탄한 지역으로 군을 이끌어 가며 그들의 허점을 노려 공격하는 것이 좋다. 우리의 생사 여부는 이번 전투에 달려 있으니,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 만약 요흥을 쓰러뜨리면, 관중(關中) 지역은 모두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는 무위장군 모올 등에게 진군하게 하여, 후진군이 나무를 벌목하러 다니는 길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후 요흥이 몰래 군대를 파병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올에게 중군(中軍) 20,000명을 이끌고 백양(栢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진군장군 나돈(羅敦)에게 외군(外軍) 40,000명을 이끌고 후진곡(侯辰谷)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그리고 걸복건귀는 직접 경기병 수천 기를 이끌고 적의 군세를 탐지하러 나갔다. 하지만 이때 큰 바람과 짙은 안개로 인해 중군과 연락이 두절되었고, 걸복건귀는 적의 추격 기병에게 쫓기다 외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걸복건귀는 후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원천(苑川)으로 도망쳤고, 서진군 36,000여 명은 모두 후진에 투항하였다. 요흥이 부한으로 진군하자, 걸복건귀는 다시 금성으로 도망치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나는 세상을 다스릴 재능이 부족한데, 그대들이 나를 추대해 왕위에 올랐다. 내 마음은 혼란을 평정하고자 했으나, 덕이 모자라 시대를 이끌지 못하고, 명예를 도둑질한 지 벌써 10년이나 지났다. 이제 군대는 패배하여 안정될 수 없으니, 나는 서쪽으로 윤오(允吾)로 가서 요흥의 군대를 피하려 한다. 그대들은 각자 이곳에 남아 진나라(秦, 후진)에 항복하고 가족을 보존하라."
그러나 모든 장수들은
"옛날 고공단보가 지팡이를 짚고 빈인(豳人)들과 함께 피난했듯이, 저희 또한 임금의 은덕을 잊지 않고 따를 것입니다. 저희는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며 따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걸복건귀는
"예로부터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고, 패하지 않는 집안도 없다. 흥망은 운명에 달렸다. 만약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면,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 복구할 날이 올 것이다. 내 덕을 세우지 못했으니 같이 죽을 이유가 없다. 그대들은 스스로를 잘 보살피고, 나는 타국에 몸을 맡겨 남은 생을 마칠 것이다."
라 말했다. 그리고 크게 울면서 장수들과 작별하고, 기병 수백 기만 거느린 채 윤오로 달려가 무위왕(武威王) 독발리록고에게 항복하였다. 독발리록고는 거기장군 독발녹단을 보내 걸복건귀를 맞이해 진흥(晉興)에 머물게 했고, 상빈(上賓)의 예로 대우하였다.

후진군이 물러난 뒤, 남강족(南羌)의 양익(梁弋) 등이 비밀리에 사신을 보내 걸복건귀에게 귀순을 요청했으며, 걸복건귀는 이에 응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하 옥인(屋引)과 아락(阿洛)이 이를 남량의 진흥태수 음창(陰暢)에게 고발하였고, 음창은 다시 독발리록고에게 이를 보고하였다. 이에 독발리록고는 동생 독발토뢰(禿髮吐雷)를 보내 기병 3,000기를 이끌고 문천령(捫天嶺)에 주둔하게 하였다. 걸복건귀는 독발리록고가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하며, 태자 걸복치반에게 말했다.
"나는 대업을 짊어질 능력이 없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독발리록고는 나와 친밀한 관계에 있어 구원해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의리를 저버리고 우리를 배신했다. 그들은 내 위세를 두려워해 나를 온전히 세워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요씨(姚氏)가 강성하니, 나는 차라리 그들에게 귀순할 것이다. 만약 온 가족이 함께 떠난다면, 우리는 추격 기병에게 잡힐 것이다. 내가 너와 형제들, 그리고 네 어머니를 인질로 두면 그들은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장안에 머무르는 한, 그들은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걸복치반과 형제들을 남량의 수도 서평(西平)으로 보냈다.

홍시 2년(400년) 8월, 걸복건귀가 남쪽 부한으로 달아나 후진에 항복하였다.

홍시 2년(400년) 11월, 걸복건귀가 장안에 이르자, 요흥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지절•도독하남제군사(都督河南諸軍事)•진원장군•하주자사(河州刺史)•귀의후(歸義侯)로 삼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태자 걸복치반이 아버지를 따라서 후진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무위왕 독발리록고가 군사를 보내 그를 추격해 붙잡았다. 독발리록고가 걸복치반을 죽이려 하니, 광무공 독발녹단이 이를 만류하며 말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가려는 것은 그리 큰 잘못이 아닙니다. 그를 용서하시어 큰 도량을 보여주십시오."
독발리록고가 그의 말에 따랐다.

홍시 3년(401년) 2월, 요흥이 걸복건귀를 다시 원천(苑川)으로 보내어 그의 옛 부하들을 모두 배속시켰다.

홍시 3년(401년) 4월, 원천에 도착한 걸복건귀는 변병을 장사, 왕송수를 사마, 적경을 상서령으로 임명하였다. 서진이 멸망하기 전에 공경대장(公卿大將) 이하를 지내던 모든 신하들은 강등되어 요직에서 물러나 편장(偏將)과 비장(裨將)으로 임명되었다.

홍시 4년(402년) 4월, 걸복치반이 마침내 서평에서 도망쳐 원천으로 왔다. 이때 남량왕 독발녹단은 걸복치반의 아내와 자녀들을 돌려보냈다. 걸복건귀는 걸복치반으로 하여금 후진의 조정으로 보내어 요흥을 알현하도록 하였고, 요흥은 그를 진충장군•흥진(興晉) 태수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흥은 사자를 보내 걸복건귀에게 산기상시•좌현왕 직위를 추가로 내렸다.

홍시 5년(403년) 7월, 걸복건귀는 제난(齊難) 등과 함께 하서(河西)에서 갑옷 입은 병사들을 이끌고 멸망한 후량의 군주 여륭을 영접하였다.

홍시 5년(403년) 11월, 걸복건귀는 반란 일으킨 강족 무리 용두(龍頭)를 자천(滋川)에서 토벌하였다.

홍시 6년(404년) 9월, 걸복건귀가 구지를 공격하여, 구지왕 양성의 장수 부백(苻帛)을 피씨보(皮氏堡)에서 격파하였다. 이때 양성이 친히 병력을 이끌고 구원하러 와서 양측은 죽령(竹嶺)에서 전투를 벌였고, 결국 걸복건귀는 양성에 패배하여 물러났다.

홍시 7년(405년) 정월, 걸복건귀가 입조하기 위해 장안으로 갔다.

당시 토욕혼의 장수 대해(大孩)가 여러 차례 걸복건귀의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걸복건귀는 분노하여 기병을 이끌고 대해를 토벌하였다. 대해는 대패하여 10,000여 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죽었고, 걸복건귀는 돌아가 개선하였다. 대해는 남량으로 도망쳐 호원(胡園)에 몸을 숨겼고 그곳에서 죽었다.

토욕혼의 세자 토욕혼수락간(吐谷渾樹洛干)은 남은 무리 수천 호를 이끌고 모하천(莫何川)으로 도망가 스스로 대도독•거기대장군•대선우•토욕혼왕을 칭하였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그들이 안락하게 살도록 하였고, 백성들은 그를 "무인가한(戊寅可汗)"이라 부르며 따랐다. 사강(沙漒) 일대의 여러 잡족들도 모두 토욕혼에 귀부하니, 수락간은 스스로 이렇게 선포하였다.
"우리 선조가 이곳에 피난 온 지 일곱 대가 지났고, 나는 이제 여러 현자들과 함께 태평성대를 이루려 한다. 지금 우리는 병력과 군마가 강성하여 활을 당길 병사가 수만 명에 이른다. 나는 이 병력으로 양익(梁益)에서 위세를 떨치고, 서융(西戎)의 제패하여 삼진(三秦)을 살피며, 천자를 알현하고자 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리들이 모두 말했다.
"이는 위대한 덕행의 일입니다. 대왕께서는 스스로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걸복건귀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경계하였다.

홍시 7년(405년) 10월, 걸복건귀가 또다시 구지를 쳤지만 양성에게 패하여 물러났다. 이후 다시 병력을 이끌고 양성의 장수 양옥(楊玉)을 서양보(西陽堡)에서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홍시 8년(406년) 7월, 원천에서 지진이 발생해 땅이 갈라졌고, 그 틈에서 털이 난 여우와 꿩이 걸복건귀의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또한, 들판의 모든 풀들이 스스로 뒤집히는 일이 발생하니, 걸복건귀는 이를 매우 불길하게 여겼다.

홍시 8년(406년) 12월, 걸복건귀가 다시 장안으로 가서 입조하였다.

홍시 9년(407년) 정월, 요흥은 걸복건귀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져서 통제하기 어려워지고 결국 서쪽의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하였다. 마침 걸복건귀가 장안에 입조하러 오자, 요흥은 그를 주객상서로 삼아서 장안에 머물게 하고, 그의 세자 걸복치반을 건무장군•서이교위로 삼아 그 무리를 감독하며 원천을 진수하게 하였다.

홍시 9년(407년) 7월, 남량의 독발녹단이 후진에 반기를 들고, 사자를 보내 걸복치반과 연합하려 했으나, 걸복치반은 도리어 사자의 목을 베어 장안으로 보내었다. 이에 후진 조정은 무척 기뻐하였다.

홍시 9년(407년) 11월, 후진의 하주자사 팽해념이 반란을 일으켜 독발녹단에게 귀부하자, 후진 조정은 걸복치반을 하주자사로 삼았다.

홍시 10년(408년) 5월, 요흥이 걸복건귀를 진원장군으로 삼아, 광평공 요필(姚弼) 등과 함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독발녹단을 습격하게 하였다.

홍시 10년(408년) 10월, 걸복치반은 후진의 정치가 점점 쇠퇴하고 병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여러 부족들을 소집하여 27,000여 명을 거느려 강랑산(嵻崀山)에 성을 쌓고 그곳을 점거하였다.

홍시 10년(408년) 11월, 걸복치반이 팽해념을 공격하기 위해 부한으로 진군했으나, 팽해념에게 패배하고 되돌아왔다.

홍시 11년(409년) 3월, 걸복치반은 후진의 태원공 요의(姚懿)를 만나기 위해 상규(上邽)로 이동하였다. 이때 팽해념은 걸복치반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원천을 기습하였다. 걸복치반은 이를 듣고 분노하여 요의에게 알리지 않고 곧바로 돌아가, 팽해념을 공격하여 그를 격파하고 부한(枹罕)을 포위하였다.

한편, 걸복건귀는 진왕 요흥과 함께 평량(平涼)으로 가고 있었는데, 걸복치반이 부한을 점령하자 사신을 보내 걸복건귀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걸복건귀는 이를 듣고 원천으로 돌아갔다. 이때 선비족 대열견(大恱堅)이 5,000여 명을 이끌고 용마원(龍馬苑)에서 걸복건귀에게 항복해왔다.

홍시 11년(409년) 4월, 걸복건귀는 부한으로 가서 걸복치반을 그곳에 남게 하여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그곳에서 20,000여 명의 무리를 수습해 도견산(度堅山)으로 도읍을 옮겼다.

경시 원년(409년) 7월, 신하들이 걸복건귀에게 다시 왕을 칭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아직 세력이 미약하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다시 간청하며 말했다.
"하늘의 도는 때에 맞아 응하고, 하늘의 명에 맞는 자는 반드시 흥하며, 하늘의 뜻에서 벗어난 자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본초(本初)의 병력이 많았으나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조조(曹操)가 전략을 세웠으나 네 주는 분열되었고, 읍에 모인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성조(成祖)의 용한 덕이 없으면 결국 새가 흩어지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늘의 명은 억지로 구할 수 없고, 부록(符籙)은 망령되이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요씨(姚氏)의 운명이 끝나가고 있기에, 성군께서 기회를 잡고 나라를 다스리시면 대업을 이루실 것입니다. 지금 병력 30,000명이면 진(秦)과 농(隴)을 지키고 청정한 다호(洮河)를 다스리기에 충분합니다. 폐하께서 다시 흥하시어 천하의 기대에 부응하셔야 합니다. 사사로운 겸양을 지키고만 계시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니, 대위에 즉위하시어 백성들의 바람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걸복간귀는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연호를 '경시(更始)'로 개원하고, 진왕(秦王)을 자칭하며, 백관을 두고 공경들을 모두 이전의 직책으로 복직시켰다.

경시 원년(409년) 10월, 걸복건귀가 다시 변씨를 왕후로 세우고, 세자 걸복치반을 태자로 세우면서 관군대장군•도독중외제군사•녹상서사 직위를 겸하게 하였다. 옥인파광(屋引破光)을 하주자사로 임명하여 부한을 진수하게 하고, 남안 사람 초유(焦遺)를 태자태사로 삼아 군국의 중대사를 함께 논의하게 하였다. 또, 그의 아들 초화(焦華)를 상서민부랑(尚書民部郎)으로 임명하였다.

경시 2년(410년) 정월, 걸복건귀는 태자 걸복치반을 파견하여 박지연(薄地延)을 회유하게 하였고, 걸복치반은 그 군대를 번우(煩于)에서 만나자 박지연 스스로 항복하였다. 걸복건귀는 박지연을 상서에 임명하고, 그의 부민들을 원천으로 이주시켰다.

경시 2년(410년) 3월, 농서 강족 창하(昌何)를 보내어 후진의 금성군(金城郡)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용양장군 걸복무화(乞伏務和)를 동금성(東金城) 태수로 임명하였다.

경시 2년(410년) 7월 15일[2], 걸복건귀는 월질(越質)과 굴기(屈機) 등 16부락을 토벌하고, 그들의 무리 25,000여 명을 항복시켜 원천으로 이주시켰다.

경시 2년(410년) 8월, 걸복건귀는 다시 원천으로 천도하였다.

경시 2년(410년) 9월, 걸복건귀는 후진의 약양, 남안, 농서 등 여러 군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키고, 백성 15,000여 호를 원천과 부한으로 이주시켰다.

경시 2년(410년) 10월, 선비족 부락 복혼(僕渾)과 강족 구개수(句豈輸) 등이 등약(鄧若)을 포함한 20,000여 호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경시 3년(411년) 2월, 걸복건귀는 선비족 복혼부 3,000여 호를 도견성(度堅城)으로 이주시키고, 아들 걸복칙발을 진흥(秦興) 태수로 임명하여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후진의 요흥은 아직 서쪽으로 진격할 힘이 부족해 변경에서의 위협을 우려하여, 태상 삭릉(索棱)을 태위•농서내사로 삼아 걸복건귀를 회유하였다. 걸복건귀는 이에 감화를 받아 사신을 보내 그동안 사로잡았던 후진의 관리들을 돌려보내고, 사죄하며 후진에게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 후진은 다시 사신을 보내어 걸복건귀를 사지절•산기상시•도독농서영북호강흉노잡호제군사(都督隴西嶺北護羌匃奴雜胡諸軍事)•정서대장군•하주목•대선우•하남왕으로 삼고, 태자 걸복치반을 가절•진서장군•좌현왕•평창공(平昌公)으로 삼았다. 걸복건귀는 하서(河西)를 도모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이 관작을 받아들였으며, 다시 후진에 신하로서의 예를 표하였다.

경시 3년(411년) 4월, 걸복건귀는 다시 강족 구개수 등의 부민 5,000여 호를 질란성(迭蘭城)으로 이주시켰고, 형 걸복국인의 아들 걸복아시(乞伏阿柴)를 흥국(興國) 태수로 임명하여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경시 3년(411년) 5월, 걸복건귀는 아들 걸복목혁건(乞伏木奕乾)을 무위(武威) 태수로 임명하여 강랑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경시 3년(411년) 7월, 걸복건귀는 태자 걸복치반과 차남인 중군장군 걸복심건(乞伏審虔)을 보내 보병과 기병 10,000명을 이끌고, 남량의 독발녹단을 공격하게 하였다.

경시 3년(411년) 8월, 걸복치반이 군대를 거느리고 하천을 건너서 독발녹단의 태자 독발호대(禿髮虎臺)를 영남(嶺南)에서 패배시키고, 소와 말 100,000여 마리를 노획하여 돌아왔다.

경시 3년(411년) 10월, 걸복건귀는 다시 후진을 공격해, 후진의 약양태수 요룡(姚龍)을 백양보(栢陽堡)에서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경시 3년(411년) 11월, 걸복건귀는 후진의 남평(南平) 태수 왕경(王憬)을 영락성(永洛城)에서 공격하여 승리하고, 백성 4,000여 호를 원천으로, 3,000여 호를 담교(譚郊)로 이주시켰다. 아울러 중군장군 걸복심건에게 군사 20,000명을 이끌고 담교로 가서 성을 쌓게 하였다.

경시 3년(411년) 12월, 서강족 팽리발(彭利髪)이 부한을 습격해 점거하고 스스로 대장군•하주목을 자처하자, 걸복건귀는 기병 30,000기를 이끌고 이를 토벌하였으나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였다.

경시 4년(412년) 정월, 걸복건귀는 다시 팽리발을 토벌하기 위해 노규곡(奴葵谷)으로 진군하였다. 그러자 팽리발은 자신의 무리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쳤고, 걸복건귀는 형의 아들 진위장군 걸복공부를 보내 청수(清水)까지 추격하여 팽리발을 마침내 참수하였다. 이어서 걸복건귀는 부한으로 들어가 강족 13,000여 호를 거두고, 걸복심건을 하주자사로 임명하여 부한을 진수하게 한 뒤에 수도로 귀환하였다.

경시 4년(412년) 2월, 걸복건귀는 담교로 천도하고, 태자 걸복치반에게는 그대로 원천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이후 그는 20,000 기병을 이끌고 토욕혼의 토욕혼아약간(吐谷渾阿若干)을 적수(赤水)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토욕혼왕 토욕혼수락간은 항복을 청하였고, 걸복건귀는 그를 평북장군•적수도호(赤水都護)로 삼았다. 또, 그 동생 토욕혼토호진(吐谷渾吐護真)을 포로장군(捕虜將軍)•층성도위(層城都尉)로, 아약간을 호군도위로 각각 임명하였다.

경시 4년(412년) 5월, 태자 걸복치반이 군사를 이끌고 남량의 삼하(三河) 태수 오음(呉陰)을 백토(白土)에서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걸복건귀는 걸복출누(乞伏出累)를 삼하태수로 삼아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경시 4년(412년) 6월, 걸복건귀가 오계(五谿)에서 사냥을 하던 중 손바닥 위에 올빼미가 모여들었고, 걸복건귀는 이를 매우 흉한 징조로 여겼다. 결국, 그는 형의 아들인 진위장군 걸복공부에 의해 암살당하였고, 그의 자식들 10여 명도 함께 살해되었다. 걸복건귀를 시해한 걸복공부는 대하(大夏)로 도망갔다. 걸복치반은 그의 동생 광무장군 걸복지달(乞伏智逹)과 양무장군 걸복목혁건에게 기병 3,000기로 걸복공부를 토벌하게 하였다.

앞서 걸복건귀가 살아있을 때, 부한과 금성에서 수만 마리의 쥐가 나타나, 각자 말의 배설물을 물고 다니며 도수(洮水)와 쇄수(灑水)를 건너 부한으로 모여들었고, 그로부터 2년 후에 걸복치반이 부한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경시 4년(412년) 7월, 걸복공부는 대하에서 걸복지달 등에게 격파되어, 동생 걸복아시에게로 도망쳐 의지하였다. 걸복지달 등은 다시 걸복아시도 격파하였고, 걸복공부는 강랑성 남쪽 산으로 도망쳤다가 추격병에게 사로잡혀 담교에서 처형되었다.

경시 4년(412년) 8월, 걸복건귀의 뒤를 이은 걸복치반이 부한에서 그의 장사를 지내고, 그의 시호를 '무원왕(武元王)', 묘호를 '고조(高祖)'라 정하였다.


[1] 경자년 무인월 을해일. 음력으로는 1월 24일이고, 양력으로 3월 5일이다. [2] 경술년 갑신월 을축일. 음력으로는 7월 15일이고, 양력으로 8월 3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