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5 23:35:03

양성(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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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A4B2D><colcolor=#ece5b6>
후구지 2대 군주
양성 | 楊盛
출생 364년
전구지 무도군 구지산
(現 간쑤성 룽난시 청현)
사망 425년 6월 (향년 62세)
후구지 무도군 구지산
(現 간쑤성 룽난시 청현)
능묘 없음
재위기간 구지공(仇池公)
394년 10월 ~ 396년 12월
구지공(仇池公)
396년 12월 ~ 398년 12월
구지왕(仇池王)
398년 12월 ~ 405년 7월
구지공(仇池公)
405년 7월 ~ 407년 4월
구지공(仇池公)
407년 4월 ~ 420년 7월 10일
무도왕(武都王)
422년 5월 9일 ~ 4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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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A4B2D><colcolor=#ece5b6> 성씨 양(楊)
성(盛)
불명
부친 양불구(楊佛狗)
아들 양현(楊玄)
작호 구지공(仇池公)
→ 구지왕(仇池王)
→ 무도왕(武都王)
시호 혜문왕(惠文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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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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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구지의 2대 군주.

후구지의 초대 군주인 농서무왕 양정 전진의 부흥을 도모하다가 전사하였는데, 그에게 아들이 없어 사촌형 양성이 구지의 무리를 통솔하게 되었다.

2. 생애

연초 원년(394년) 10월, 농서왕 양정이 전진의 황제 부숭을 돕기 위해 서진의 걸복건귀를 공격하였다가, 평천(平川)에서 대패하여 양정과 부숭 모두 전사하였다. 이에 양성은 사지절•정서장군•진주(秦州) 자사•평강교위•구지공을 자칭하며 양정을 대신해 무리를 이끌었다. 부숭의 아들인 태자 부선(苻宣)은 남은 저족 무리와 함께 양성에게 의탁하였고, 양성은 4산의 여러 저족과 강족을 20부의 호군(護軍)으로 나누어 각기 요충지를 지키게 하되, 군현은 따로 설치하지 않았다.

태원 21년(396년) 12월, 양성이 동진으로 사자를 보내어 명을 내려주길 청하니, 동진 조정에서 그를 진남장군•구지공으로 삼았다. 이후 양성은 조정에 부선을 평북장군으로 삼아달라 상표하였다.

천흥 원년(398년) 12월, 양성이 북위로 사자를 파견해 복속되길 청하니, 도무제 탁발규는 그를 구지왕으로 삼았다.

천흥 7년(404년) 9월, 양성이 후진의 좌현왕 걸복건귀를 죽령(竹嶺)에서 격퇴하였다.

천사 2년(405년) 2월, 초종이 성도(成都)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성도왕을 자칭하자, 익주(益州)가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양성은 이 틈을 이용해 조카(형의 아들)인 평남장군 양무(楊撫)를 보내 한중(漢中)을 점거하였다.

천사 2년(405년) 6월, 후진의 농서공 요석덕이 후구지를 정벌하여 양성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하고, 장수 염구(斂俱)를 따로 파견해 한중을 침공하였다. 염구는 한중군의 성고(成固)를 점령하고, 유민 3,000여 호를 관중(闗中)으로 이주시켰다.

홍시 7년(405년) 7월, 후진군의 공세를 버티다 못한 양성은 하는 수 없이 후진에 투항하였다. 요흥은 양성의 투항을 받아주고, 그를 도독익녕2주제군사(都督益寧二州諸軍事)•정남대장군•익주목으로 삼았다.

홍시 7년(405년) 10월, 좌현왕 걸복건귀과 또다시 후구지를 쳤지만, 양성이 이를 막아냈다.

홍시 9년(407년) 4월, 후진을 배반할 마음을 품은 양성이 부선을 양주(梁州) 독호로 임명해, 군대를 거느리고 한중으로 들어가게 하니, 후진의 양주별가 여형(吕瑩) 등이 거병하여 부선에게 호응하였다. 이에 후진의 양주자사 왕민(王敏)은 여형을 토벌하자, 여형은 양성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결국 양성도 거병하여 진구(濜口)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왕민은 토벌을 중지하고 무흥(武興)으로 퇴각하였다.

의희 3년(407년) 7월, 양성은 다시 동진과 통교하기 시작했고, 동진에서도 그를 받아주어 도독농우제군사(都督隴右諸軍事)•정남대장군•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이때 양성은 부선을 행 양주자사(行梁州刺史)로 임명하였다.

의희 8년(412년) 10월, 후진을 배반한 양성이 기산(祁山)을 침략해 어지럽히니, 요흥은 건위장군 조곤(趙琨)을 선봉으로 삼고, 입절장군 요백수(姚伯夀)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하였다. 또, 전장군 요회(姚恢)는 취협(鷲峽)으로, 진주자사 요숭은 양두협(羊頭峽)으로, 우위장군 호익도(胡翼度)는 견성(汧城)으로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진격해 양성을 토벌하게 하였다. 양성이 조곤의 군대와 대치하였을 때, 요백수는 전투가 두려워 조곤의 뒤를 받쳐주지 않았고, 이로 인해 병력 수가 적은 조곤이 이내 양성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였다. 이에 요흥은 요백수를 참수하고 군대를 거두어들였다.

의희 9년(413년) 12월, 초종이 세운 촉나라를 멸망시킨 동진 조정이 삭막(索邈)을 양주자사로 삼자, 부선은 한중에서 물러나 양성에게로 돌아갔다.

의희 12년(416년) 6월, 양성이 기산을 공격해 마침내 뽑고, 진군하여 진주자사 요숭이 지키고 있는 상규(上邽)를 압박하였다. 이때 후진의 후장군 요평(姚平)이 구원하러 오자, 양성은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는데, 요숭은 이를 보고 성 밖으로 뛰쳐나와 요평과 함께 그 뒤를 추격하였다. 이에 양성은 죽령에서 군대를 돌려 후진군을 격파하고 요숭을 전사시켰다.양성은 승세를 이용해 조카(형의 아들) 양권(楊倦)을 보내 후진을 계속 공격하게 하였다. 양권의 군대는 진창(陳倉)까지 밀고 나아갔으나, 후진의 중상장군 염만외(歛曼嵬)가 이를 쳐서 물리쳤다.

의희 15년(419년) 9월, 강천(漒川)의 강족 팽리화(彭利和)가 서진에게 패하여 후구지로 달아났다.

의희 16년(420년) 6월, 동진의 공제 사마덕문이 송왕 유유에게 선양하면서 동진이 멸망하고, 유송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양성은 안제의 연호인 의희(義熙)를 계속 사용하였다.

의희 18년(422년) 4월 3일[1], 송나라의 무제 유유가 양성을 무도왕에 봉하였다.

의희 21년(425년) 6월, 양성이 세자 양현(楊玄)을 불러
"나는 늙었으니 끝까지 진나라(晉)의 신하로 생을 마칠 것이다. 너는 송나라의 황제를 잘 섬기도록 하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내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 시호는 '혜문왕(惠文王)'.


[1] 임술년 을사월 을해일. 음력으로는 4월 3일이고, 양력으로는 5월 9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