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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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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 | Jin Dynasty
파일:전진-동진.png
지도의 노란색 부분 (376년 기준) [1]
317년 ~ 420년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서진 유송
별칭 동진(東晉), 사마진(司馬晉)
위치 중국 화남, 베트남 북부
수도 건강(建康)
면적 2,800,000km² (347년 기준)[2]
인구 17,460,000명 (417년 기준)
민족 한족
언어 중세 남방 중국어, 한문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화폐 오수전, 원형방공전
정치체계 전제군주제 (명목상)
군벌연합체 (실질상)
국가원수 황제
국성 하내 사마씨
주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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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원황제 (318년~323년)
숙조 명황제 (323년~325년)
현종 성황제 (325년~342년)
효종 목황제 (344년~361년)
열종 효무제 (372년~396년)
주요 실권자 왕도, 환온, 유유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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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영가의 난2.2. 초기의 북벌과 반란2.3. 실세 환온과 북벌 원정2.4. 비수대전2.5. 멸망
3. 수도: 건강(建康)4. 농업 발달 및 인구5. 문벌의 발달과 남조 문화의 형성6. 역사적 분석
6.1. 군약신강6.2.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의 대두6.3. 차별 문제6.4. 남송과의 비교
7. 자치통감 기준으로 동진은 과연 정통인가?8. 기타9.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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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내 사마씨(河內 司馬氏)가 세운 진나라 장강 이남으로 천도한 뒤의 존속 기간을 일컫는 이름. 서진 영가의 난으로 이민족들에게 관중과 중원을 뺏기고 팔왕의 난에서 살아남은 종친인 사마예가 장강 남쪽으로 피난을 가서 같이 피난을 온 교성(僑姓)과 원래 강남에서 살았던 오성(吳姓)에게 추대를 받아서 이어 나간 진나라다.[3]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강남을 지킨 한족 국가임과 동시에 화북과 중원에 있던 교성이 예전부터 강남을 지키고 있었던 오성과 연합하여 지켜낸 진나라의 절반이다. 통칭 동진(東晉). 간혹 남진(南晉), 사마진(司馬晉)[4]이라고도 한다.

화북에서는 전량, 서량, 북연, 염위가 한족 국가였으므로 동진이 '유일한' 한족 국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동진 외의 나라는 다른 나라에 칭신할 정도로 영향력이 극히 한정된 약소국이었거나, 화북 전체는커녕 그 중 일부만을 통치했었고, 존속 기간도 매우 짧았으며, 왕족들만 한족이지 나머지는 이민족 출신이 다수 섞여있는 등 한족의 정통 왕조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 반면 동진은 한때 삼국을 통일했던 진나라의 직접적 후계 정권이므로 정통왕조로 간주할 개연성이 더욱 크다.

육조시대 여섯 나라 중 두 번째 왕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손오를 멸망시킨 겨레가 하내 사마씨지만 이들이 남쪽으로 쫓겨와 손오의 뒤를 잇는 2번째 남조 정권이 된다.

2. 역사

2.1. 영가의 난

조위 내부의 권력을 잡은 사마의에서 비롯하여 그 아들 사마소 263년 촉한을 정복하고, 265년 사마소의 뒤를 이은 큰아들 사마염이 조위도 무너트리고 서진을 세웠다. 280년 손오까지 정복해 삼국 통일했지만 얼마 안 있어 팔왕의 난으로 서진은 연이은 혼란에 빠졌고, 311년 영가의 난으로 수도 낙양이 점령당한 후 잔여 세력이 가까스로 장안으로 도피하여 중원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사실상의 식물 정권으로 전락하였고, 316년 장안마저 함락당하고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 사마업이 살해당하며 멸망했다.

서진이 멸망한 이듬해인 317년, 강남의 건업(建業)/건강(建康)[5]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사마씨의 유력 종친 사마예가 진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제위에 올랐고, 이때부터의 진나라를 수도가 동쪽에 있다 해서 훗날 동진으로 불렀다. 이전의 손오와 더불어 이후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 4개국까지 강남에서 한족왕조가 존속한 시기를 따로 육조시대(六朝)라고도 부른다.

2.2. 초기의 북벌과 반란

당시 북쪽은 흉노족의 한나라가 분열하여 후조 석륵 전조 유요가 투쟁하는 구도로 전환되고 있었는데, 동진의 장군 조적이 이때를 틈타 사마예에게 상소를 올려 북벌을 실시했다. 조적은 예주 일대의 군벌들을 정리하면서 석륵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때 동진은 예주와 하남 일대를 수복한다. 그러나 동진 조정은 북벌에 관심이 없었고 이에 조적은 홧병이 나서 사망하고 만다. 조적이 죽자 예주 일대는 다시 석륵의 손에 들어간다.

당시 동진의 군사령관 왕돈은 사마예를 보좌하던 유외와 사이가 나빴는데, 견제가 심해지자 정변을 일으켰다. 왕돈은 감탁이 우물쭈물하는 틈을 타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석두성에서 건강의 수비군을 격파한다.[6] 왕돈이 실권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자 이에 사마예는 분사한다.

사마예의 아들 명제 사마소는 323년에 황제에 즉위한 뒤, 치밀하게 왕돈을 토벌할 준비를 마쳤다. 사마소에게 운이 좋게도 왕돈은 이때 병에 결렸다. 왕돈은 형인 왕함에게 군권을 주었으나 왕함은 왕돈의 반도 못 미치는 인물이었다. 사마소는 간단히 왕함을 격파하고 난을 진압한다. 형이 전투에서 패하자 왕돈은 화가 나서 죽어버린다.

사마소는 왕돈의 난으로 일어난 피해를 빠르게 복구했으나 즉위 2년 만에 사망하고 만다. 이후 사마소의 아들 성제 사마연이 어려 사마연의 외숙부 유량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유량은 역양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소준을 경계했는데 소준에게 지나치게 압력을 가했다. 달리 방법이 없던 소준은 결국 정변을 일으킨다. 328년 소준은 유량을 가볍게 제압하고 건강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유량은 도주한 후 온교, 도간과 손을 잡고 소준을 역관광시킨다.

340년 도간이 죽자 형주의 군대까지 장악한 유량은 북벌에 나섰는데, 후조에게 대패하고 분사한다. 왜 다들 자꾸 화나서 죽어 성제 사마연도 이때 사망한다. 강제 사마악이 즉위하나 곧 죽고 2살에 불과한 목제 사마담이 즉위한다.

2.3. 실세 환온과 북벌 원정

유량의 동생 유익은 환온을 형주에 보내 서부군을 장악하게 했다. 환온은 이세가 다스리던 성한이 내전으로 연약해지자 좋은 기회라 여겨 성한 정벌에 나섰다. 347년 환온은 성한 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성도까지 함락시키고 이세의 항복을 받아냈다. 40년 만에 동진은 익주 일대를 수복한 것이다.

갈족의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동진 조정은 이후 수차례 북벌을 실시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북벌을 실패한 은호는 죽마고우였던 환온에게 실각당하고 만다. 권력을 잡은 환온은 저족이 세운 나라인 전진을 공격했다. 동진군은 초기에 강한 전투력을 보여줘 장안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전진군의 반격을 받고 물러났다.

356년 환온은 사주 일대로 2차 북벌에 나선다. 환온은 은호를 패배시킨 강족의 요양을 격파하고 주성의 항복을 받아내어 낙양을 점령했다. 역시 40년 만의 수복이었다. 이때 환온은 대사마에 임명된다.

361년 사마담이 죽고 애제 사마비가 즉위한다. 3년 뒤에 전연의 명신 모용각은 동진이 수복한 낙양을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5년이 지나고 환온은 다시 북벌을 준비했다. 사마비도 곧 죽고 그의 동생 폐제 사마혁이 즉위했다.

환온은 5만의 병력을 이끌고 모용선비족의 전연을 공격했다. 환온은 수로를 이용해 군량을 운반하였다. 동진군은 모용장이 이끄는 전연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방두까지 진격했다. 전연의 황제 모용위는 이때 수도를 버리고 달아날 생각도 했다. 이에 모용수가 출정하여 동진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진에서 구원군이 등판하자 환온은 결국 퇴각하였다. 이때 모용수가 동진군을 추격하여 격파했다.

이후 환온은 석문을 점거하지 못한 원진에게 패전 책임을 묻는다. 원진은 노하여 수춘을 점거하고 투항했다. 환온은 전연과 전진의 지원군을 격파하고 원진의 세력을 제거한다. 환온은 사마혁을 폐위시키고 사마예의 아들 사마욱을 황제에 즉위시킨다. 환온의 권세는 이미 황제를 넘어섰고 자신이 황제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사안과 왕탄지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사안은 초연한 태도로 그를 제거하려던 환온의 의지를 꺾었고 사마욱이 죽고 효무제 사마요가 즉위한다. 환온은 마지막 압박을 가했으나 사안의 저지로 실패하고 곧 병사한다.

2.4. 비수대전

환온 사후에 화북을 통일한 전진 부견은 천하 통일을 노리고 동진을 침공한다. 우선 부비를 보내 형주를 공격했다. 부비는 양양을 점령하며 주서를 포로로 잡았다. 동진은 사현을 보내 우이에서 전진군을 격파했다. 이에 동진은 명재상 사안을 사령관으로 삼고 전진에 대비했다.

383년 부견이 동진을 총공격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은 모용수를 제외하고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부견은 그 모용수의 말에 기운을 얻어 10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사안은 사현, 사석, 유뢰지 등이 지휘하는 5만 명의 군대를 보내 전진군을 크게 무찌른다. 자세한 전투 내용은 문서 참조.

사현은 전진이 패한 틈을 타 전진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한다. 명재상 사안은 훌륭하게 나라를 통치하다가 사마요의 동생 사마도자의 견제를 받고 정계에서 물러난다. 사마도자가 집권하자 동진은 급속도로 멸망 테크를 탄다.

2.5. 멸망

동진의 권력을 잡은 사마도자는 국정 운영을 점점 포기하면서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조정에는 왕국보 같은 간신배가 들끓었다. 사마도자는 온갖 사치와 전횡을 부리며 간신배들의 아첨을 받았다. 효무제 사마요는 사마도자를 의식해 북부군을 왕공, 서부군을 은중감에게 맡긴다.

그러나 효무제 사마요는 부인 장씨에 의해 이불에 교살되고 안제 사마덕종이 재위에 오른다. 권력자 사마도자는 호족 타도를 계획했지만 397년,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이 북부군의 왕공, 서부군의 은중감을 부추겨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사마도자가 왕공을 달래기 위해 왕국보를 주살하자 반군도 일단 철수했다. 다시 거병한 왕공은 섭정 편에 붙은 부하 유뢰지에 의해 죽고, 서부군의 은중감과 양전기와 환현은 서로 싸웠다.

399년 오두미도 무리를 이끌던 손은이 반기를 들자 동진은 완전히 혼란에 빠진다.[7] 손은은 사안의 아들 사염을 죽이며 기세를 올렸지만 유유(劉裕)의 활약으로 크게 격파된다. 당시 일개 군인에 불과했던 유유는 뛰어난 전술로 손은 군을 무찔러 명망을 쌓아간다.

은중감과 양전기를 격파한 서부군의 환현은 사마원현과의 눈치 싸움에서 결국 선수를 쳤고, 북부군의 유뢰지는 토사구팽을 염려하여 환현을 지지했다. 그덕에 환현은 건강에 손쉬게 입성한다. 이리저리 간보던 유뢰지는 환현이 빈 틈을 보이면 훗날을 도모할 생각이었으나 유뢰지의 부하들이 간에 붙고 쓸개 붙는 행태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비겁한 유뢰지의 모습에 정나미가 다 떨어졌고, 결국 환현에게 실각당하고 만다. 이 와중에 유뢰지의 부하였던 유유가 유뢰지를 떠났고, 결국 환현이 사마덕종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환초(桓楚)를 세운다.

403년 11월 제위에 오른 환현의 지나친 토목 사업과 번잡한 국정 운영으로 반발 세력이 증가했다. 북부군의 고위급 장교들이 숙청된 와중에 살아남은 유유는 하무기, 유의 등과 함께 힘을 모아 역적 환현을 토벌하려고 했다. 유유는 뛰어난 군재로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을 부활시켰다.

404년 전광석화의 속도를 보이며 권력을 잡은 유유는 환현 등이 저질렀던 실수를 범하지 않고 환온과는 다르게 과감히 행동했다. 환현 사후 끈질기게 저항하던 동진의 환씨 잔당을 제거하고, 강족의 후진에게 형북의 12군을 외교로 뜯어낸다.

409년 모용선비족의 남연이 동진에서 노략질을 벌이자 유유는 남연을 공격한다. 남연의 모용초는 유유에게 완전히 농락당하고 대패했다. 이로써 동진은 청주 일대를 거의 100년 만에 얻어냈다. 곧이어 410년에 손은의 잔당 노순이 하무기, 유의를 격파하고 기세를 올리자 유유는 재빠르게 건강으로 남하하여 노순을 쳐부순다. 411년 유유를 평소에 시기하던 형주의 유의는 유유를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다 역관광 당한다. 다른 군벌 제갈장민도 이때 제거된다. 이후 유유는 주령석을 보내 초촉을 점령한다. 415년 형주 자사에 오른 사마휴지도 유유에게 반기를 들다 토벌당한다.

유유는 이어 후진을 표적으로 제2차 북벌을 단행했다. 왕진악 단도제는 낙양 일대을 장악하고 심전자는 무관에 입성했으며, 유유는 황하에서 각월진으로 북위군을 격파했다. 이어 후진군을 격파한 왕진악, 심전자 등이 유유에 합류하여 장안을 함락시켰다. 결국 동진은 두 고도와 청주를 모두 장악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새로 얻은 영토를 관리하기에는 유유의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언제든지 타국에게 잃을 수도 있었다. 사실 그보다도 자기 대신 내정을 맡긴 유목지가 사망하자 건강의 조정내에서 영향력이 떨어져 실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했던 유유는 결국 동진으로 회군하였는데 그 사이 동진군의 내분(왕진악과 심전자의 갈등)과 약탈을 기회삼은 흉노 철불부 북하가 장안을 함락시키자 유유는 구석을 수여받고 단숨에 찬탈 직전까지 직행했다.

건강으로 복귀한 유유는 사마덕종을 죽이고 공제 사마덕문을 즉위시킨다. 결국 420년 마지막 황제였던 공제로부터 선양 받은 다음 공제를 죽이고 황족을 학살한다. 약 400여년이라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맥을 이어오던 팽성 유씨의 한을 무너뜨리고, 사실상 삼국통일을 달성했던 하내 사마씨의 진나라는 160여년 만에 다시 팽성 유씨의 방계 후손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과연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사마초지 등은 북위로 귀순하여 왕 작위를 받고 북위 공주와 결혼하는 등 하내 사마씨의 핏줄은 북조에서 이어가게 된다.

3. 수도: 건강(建康)

동진의 수도는 삼국시대 오나라의 도읍이었던 건업(현재의 난징)이었는데, 사마업 피휘를 위해 이름을 바꾸어 건강이라고 했다. 이곳이 장강 이남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인 데다가, 오랫동안 오나라의 도읍이었기 때문에 수도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동아시아사 시험에 도시 문제로 잘 나온다.

4. 농업 발달 및 인구

강남 지방은 한나라 시절에 개발되었던 지역이 장강 유역 일대였다. 장강 유역을 넘어가면 인구도 별로 없고, 땅이 습하고 더워서 열대성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겉보기에 비해 별로 좋지도 않은 땅이었다. 그러나 화북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뛰어난 농업 기술을 강남에 전파하고 활용하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끝내 남송(南宋) 시대 때 절정에 이르며, 강남의 경제력이 제대로 커지기 시작했다.

당장 땅에 물기를 어느 정도 빼니 벼농사를 짓기 최적화 된 땅에 거기다가 더워서 2모작, 3모작, 그러니까 1년에 벼농사를 2번, 3번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점이 발견되어 이는 강남의 경제력을 크게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동아시아사 인구 이동 파트에 잘 나온다.

다음은 동진시기 강남의 발전을 설명한 고려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인 신승하 교수의 책 '중국사'에 나오는 글이다.
(중략)서진 말부터 북방이 오랜 기간 혼란에 빠졌으나 남방은 대체로 안정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북방 인구가 대량으로 강남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수는 100여만 이상에 달한다. 특히, 영가의 난 이후 대규모로 이동하여 '영가남도(永嘉南渡)'라고 부른다. 대체로 이들의 이동로는 동쪽으로 한구(邗溝)와 회하(淮河, 또는 회수)를 따라 지금의 강소성 양주와 장강 건너편의 진강, 상주 일대와 안휘성으로 들어왔고, 서쪽으로 한수를 따라 남하하여 지금의 섬서성 한중(漢中)과 호북성 양번(襄樊)을 거쳐 분산되었다. 대체로 강소성에 유입된 인구가 26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 강남으로 들어온 이들을 교인(僑人)이라고 불러 동진에서는 이들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하여 북쪽의 행정구를 강남에 그대로 두는 교주(僑州), 교군(僑郡), 교현(僑縣)을 설치하여 교인들을 안주시켰다.

교인들은 정부의 호적에 편제되지 않고 교주의 장관에게 속한 백적(白籍)으로 편제되어 부역과 세금을 정부에 납입하지 않았다. 이에 동진에서 끊이지 않고 남하하는 이들 때문에 몇 차례 토단법(土斷法)을 실시하여 백적을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강남 토착인들의 호적인 황적(黃籍)에 편입시켜 교성 세족의 세력을 제한하고 정부의 수입을 증대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에 대한 남쪽 토박이들의 배척도 감소되어 민족을 융합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때, 북쪽에서 남하한 이들은 남방의 노동력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원 지역의 발달된 선진 생산 기술과 문화를 갖고 왔기 때문에 강남의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방의 경제는 비교적 낙후되어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경지에 불을 질러 밭을 갈아 물을 끌어다 농사짓는 화전 경작 수준이었는데, 동진과 남조 시대에 북쪽의 생산 도구와 기술이 남방의 논농사와 결합하여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논농사가 확산되고 우경(牛耕)과 비료가 확대, 보급되었으며, 주로 북쪽 작물이었던 보리와 콩도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속(粟)의 경우, 가뭄에 강하고 재배 기간이 짧아 일찍 수확할 수 있으며, 생산량이 많고, 맛이 좋은 것 등 97종의 품종이 있었다. 벼도 36종의 품종이 있었는데, 생산량도 크게 늘어나 많은 곳은 무(畝)당 19석을, 적은 곳은 3석으로 앞 시대와 비교하여 배 이상의 생산이었다. 수리와 관개 시설이 잘 되어 지금의 강소, 절강, 강서, 호북, 호남과 안휘 일대의 숲과 못이 양질의 전답으로 바뀌었다.

농업과 관계가 깊은 양잠과 사직업도 강남 지역에 상당히 보급되어 예장군(豫章郡)은 일 년에 네다섯 번씩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동진이 후진을 멸망시켰을 때, 장안의 백공(百工)을 건강으로 이주시켜 강남의 직금업(織錦業)을 발전시켰다. 또, 야주업(冶鑄業)도 발전되어 생철과 숙철을 일정 비율로 녹여 이를 두들겨 강도가 높고 성능이 뛰어난 좋은 강철을 만들 수 있었다. 수력을 이용한 풍로를 사용하여 철을 녹이는 방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종이에 염색이나 압축해 빛을 내는 제지 기술을 개발하고 지역마다 질이 우수한 종이를 만들었다. 동진 때 정부 문서도 간(簡)이나 비단 대신 모두 누런 종이에 쓰도록 명령한 것을 보면 종이의 보급을 알 수 있다. 강남의 도자기업 가운데 청자가 중요한 자리를 잡았다. 동진 때 형태나 유채 문양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풍격이 보이고 각종 일상 생활 용구가 만들어졌다. 당시 자기의 문양은 연화문이 비교적 많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에 따라 교통과 상업 활동이 전보다 빈번해졌다. 남방은 수로가 가로와 세로로 되어 있어 강과 호수, 바다가 중요 교통로였다. 조선 기술도 오(吳)보다 향상되어 2만 곡을 실을 수 있는 큰 배를 만들 수 있었고, 건강(建康)·경구(京口)·산음(山陰)·수춘(壽春)·강릉(江陵)·양양(襄陽)·성도(成都)·번우(番禺)는 중요 화물의 집산지였다. 그리고 수도였던 건강에는 성 안에 4개의 시장이 있었고, 진회하(秦淮河) 일대에는 큰 시장과 10여 군데의 작은 시장이 있었다.

- 강남의 북방 인구 유입과 개발 (중국사, 2008. 6. 20, 미래엔)

남북조 내내 남조는 열세에 있었다. 한나라 시절에는 강남 지역이 장강 유역에만 개간이 되어서 장강 유역 남쪽에는 벼의 품종이나 농법 등의 벼농사 기술도 덜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조가 강남 지역을 개발할 동안에도 화북 지역은 전연이 245만호, 북제가 303만호, 북위가 500만호를 찍었고, 강남 지역은 남북조 시대 최강국인 송이 91만호, 진은 50만호를 겨우 찍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후한 말 군웅할거, 5호16국 시대와 같은 전란으로 황폐화가 되었고, 기후변화와 섬서, 산서 일대의 건조화로 인해 환경파괴가 일어났다. 한편 남조에서 강남 개발이 진행되면서 벼농사의 발달로 벼농사와 생산력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과 송대에 들어서 강남은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정강의 변 이후로 완전히 강남이 강북을 압도하였다.[8]
환경의 변화도 있었는데 한나라 이래 진행되어 서진 말에 이르러 대규모로 인구가 이주했던 강남에서는 특기할만한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본시 사마천이 말했던 것처럼 '땅은 넓지만 인구는 희박했고, 죽목(竹木)이 우거진'( 사기, 권 129) , 강북보다 큰 규모의 산림을 가졌던 강남에서 산림의 부족 현상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나 이러한 문제를 촉발했던 것은 후한 말~삼국시대에 걸쳐 발생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적벽, 이릉으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화공, 장강과 한수, 회수 일대에서 발생한 수전에서 사용될 전함의 건조 등은 그 일대의 산림을 크게 훼손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면서 손오 정권[9]과 그 이후의 남조 국가들은 목재 부족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목재의 조달과 소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가령 삼국시대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였던 동진에서는 자사가 임기를 마치고 도성으로 환도하면 소나무 100그루, 태수는 소나무 50그루를 심어야한다는 법이나 관습이 있었는데[10] 이러한 남조 국가들의 산림에 대한 관심은 제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양서에는 회계 건덕현에서 현령의 주도하에 삼림을 조성한 기록이 보인다.[11] 그만큼 당시의 산림 부족 문제가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무성한 수림의 미개척지 이미지를 가진 당대의 강남이지만, 실상 그 곳에 자리잡은 왕조들은 일찍부터 목재 부족에 대한 문제를 겪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서진 말에 이르러 강북의 인구가 강남으로 대규모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심화되었던 것이다.

5. 문벌의 발달과 남조 문화의 형성

세계사에서 잘 나오는 부분이다. 전대미문의 대혼란 군벌의 난립으로 현실 정치에서 유교는 크게 쇠퇴하고 상대적으로 도교, 불교가 주목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문화 예술의 발전이 눈부셔서 늘 북쪽의 북조 국가들을 오랑캐라고 무시했지만 실상은 남조 막장. 당최 하루도 나라가 편할 날이 없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아웅다웅 열심히 내분을 일으켰다. 하지만 어떻게 명줄은 길어서 비수대전 등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전쟁에서도 이겼다. 비수 대전에서도 전진(前秦)의 87만 대군을 고작 몇 만으로 격파하는 등의 기적이 발생했는데, 이건 동진 출신이라서 도움을 줬던 주서 덕이 크지만 전진 황제인 부견의 결정적인 실수가 주 원인이었다. 문제는 이를 교훈 삼아서 나라를 발전시킬 생각은 안하고 전쟁에 이긴 덕분에 안심하고 더욱 더 막장 짓에 탐닉했다는 것이다. 비수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광의 업적을 남긴 황제인 효무제는 기분 좋게 이기고 기분도 좋겠다 후궁 장귀인 끼고 너 한잔 나 두잔 하다가 '야 너도 이제 늙었구나. 내일부터는 영계끼고 잘 거다.'라고 했다가 열받은 장귀인이 황제가 자고 있는 동안 베개로 눌러서 질식사했다. 많고 많은 중국 왕조들의 황제들 중에서도 후궁에게 살해당한 황제는 동진 왕조가 처음 배출하는 막장이 행해지고 말았다.

6. 역사적 분석

서진이 매우 실망스러운 형태로 붕괴했고 이후 전 중국은 마땅한 정통 통일 왕조 없이 혼란의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이러한 시점만으로 남조 전체를 폄하할 수는 없다. 그래도 동진이 과거 통일 왕조의 저력을 이어받았던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석륵과 석호의 후조는 가장 강성할 때도 회수 일대를 지키는 옛 서진 군단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유민 군사 집단에게 막혀서 회수 이남으론 손을 뻗지 못했으며, 적어도 석륵 이상은 될 부견의 전진에게 한참 밀릴 때도 영토들을 그렇게 호락호락 내줬던 건 아니었다. 또한, 오호가 세운 국가들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상태로 막장 서진보다 국력/국민 총화/체제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꽤 성공한 케이스인 전진과 북위만을 부각하는 행태는, 전진과 동시기의 동진이 끝내 북방 야만족에게 망하지 않고 백 년 이상 사직을 지켜냈으며,[12][13] 일방적인 열위에만 있지 않았고 몇 차례 큰 공세를 퍼부은 것은 싹 잊고[14] 취사 선택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어찌되었든 오호 십육국 시대의 여러 정권도 동진의 이런 우위 정도는 인정했다. 전연이 상당히 눈치보면서 동진에게 먼저 사신 파견해가며 황제를 칭하고, 또 전진에서도 왕맹 같은 대신이 '우리나라에 있는 한족은 아직 동진을 그리워하고 있고, 그 동진은 현재 위아래가 일치단결되었으니 부견의 남벌이 때이르다'고 한 이들이 괜히 있었던 게 아니다.

적어도 동진은 북방 이민족에게 망하지 않고 사직을 지켜냈으며, 일방적인 열위에만 있지 않았고 몇 차례 큰 공세를 퍼부은 적도 있었다. 남조는 남량 이전에도 여전히 북방 오호들의 불안정한 국가들보다는 안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서진의 남은 기반을 긁어모은 동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치통감만 해도 삼국 시대에 대해선 무통으로 보면서도 위나라 위주로 기재하다가, 그 뒤엔 주로 동진-유송-남제-남량-남진으로 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동진을 비롯한 남조 정권들의 지배층들은 국가적 역량이 쇠퇴한 것을 무작정 무기력하게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또한 동진이 훗날의 남조 국가들에게 남긴 유산이 또 있는데, 바로 정통성이다. 가장 정통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쪽은 오히려 갑자기 황제에 즉위하여 의문을 남긴 손오에게 향해야 할 비판이다. 서진은 한나라에서 조위를 통해 건너건너 선양을 받으며 정통성을 갖췄다. 그리고 촉한정통론적인 관점에서도 서진은 정통성을 과시할 수 있는데 서진의 실질적인 시조인 태조 문제 사마소가 최후의 한나라 왕조인 촉한을 멸망시키고 그 공로로 진왕이 된 것을 유래로 하는 게 바로 서진 왕조이기 때문이다. 촉한정통론이 최초로 나타난 시기가 동진 시기임을 감안하면 서진-동진 역시 촉한이 내세운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유송이 북위에 대해 정통임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후한-조위/촉한-서진-동진-유송으로 내려오는 중국 왕조 정통성의 계승 덕분이었다. 사실 북위도 정통성 문제를 의식하고는 있었고, 이름을 북위라고 한 것도 국가시조인 탁발부가 조위에게 조공을 바쳐서였다. 그래도 형식상이나마 선양을 통해(혹은 직접 나라를 멸망시켜) 계승한 동진의 정통성 앞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남조는 남량 이전에도 여전히 북방 오호의 불안정한 국가들보다 안정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미 서진의 기반을 계승한 동진에게서 정통성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조 정권의 강력한 정통성은 오호 국가 및 북위에서 가끔씩 부정했으나, 역사적으로 남조가 더 강력한 정통성을 가졌다는 부정하기 힘들다. 서구 학계에서도 전반적으로 남조를 동양판 동로마 제국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며, 일본의 연구자들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결국 세력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북조였지만, 남조와는 달리 5호 16국에게는 정통성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 불신과 반목을 일삼으며 국가의 생사를 걸고 치열하게 싸우는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결국 승리한 건 북조 아니냐고 하지만, 남조와는 달리 5호 16국들은 서로 간에 체제 계승성도 없고[15], 호한 상호 간의 불신과 반목에서 비틀거리면서 국가 자체의 생사를 위해 치열하게 실사판 부족전쟁을 찍으며 고투하던 시기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남조 자체도 서진과 동진에서 이어지는 연속성은 있을망정 큰 변화의 굴곡을 겪긴 했다. 오로지 삼국지연의 독자의 일변도식인 시선만으로 이 중요한 시기를 보는 것은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동진의 공적은 확실히 유효했다. 서진 말기의 모든 혼란을 수습하고 남조 역사상 유일하게 북쪽의 국가를 멸망시킨 바 있고, 북벌을 통해 후대의 남조가 북위와 맞설 힘을 갖추게 하였으며 군벌을 토벌하여 남조 내부를 안정시켰다. 비록 유송 말기와 남제 시기에 내전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동진 말기처럼 혼란스러운 때는 남량 말기 밖에 없었는데, 이는 유유가 동진을 평정하고(417년) 133년이 지나서야 등장했다. 유유가 동진 내부의 군벌을 정리한 덕분에 유의륭이나 소연 같은 명군들이 남조를 부강시킬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6.1. 군약신강

동진의 황제들은 원제 사마예가 강남에 내려왔을 때부터 상당히 위치가 불안했다. 일단 화북의 서진 시절부터 사마씨는 멀쩡히 작동 중이던 조위 체제를 상대로 빈약한 명분으로 강제 찬탈을 저질렀기 때문에, 건국 초기부터 정통성이 취약한 상태로 시작했다. 만약 건국 초기에 명군이 나와서 국정을 잘 이끌면서 취약한 정통성을 보강해줬다면 또 몰랐겠으나, 초대 사마염부터가 통일 성취 이후로는 나사가 풀려가던 한편, 2대 황제 암군 사마충과 악녀 가남풍이 국정을 망쳐서 팔왕의 난, 영가의 난 등 큰 재앙을 연달아 맞으면서 중국사에 그때까지 유례없던 이민족 침략을 야기했다.[16] 기껏 통일한지 한 세대 만에 이런 난리가 났으니 당연히 '사마씨가 과연 정말 하늘의 선택을 받은 천자가 맞긴 한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며 황실의 권위는 더 추락할 수 밖에 없었다. 단지 더 나은 대체재나 대안이 없어서 사마씨가 간신히 제위를 계속 이어가는 걸 합의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진에서 내려온 귀족 집단 사이에서조차 황실의 권위는 튼튼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중앙 출신과 지방 출신의 갈등은 적었던 손오 정권[17]과는 달리, 동진은 애초부터 북방에서 내려온 귀족 집단 및 유민 군사집단이 지방 호족들을 찍어누르는 형태였다. 역시 서진의 귀족 사회를 거의 그대로 계승해서 지역 호족들을 압박했다. 물론 토착 호족들은 이런 현상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서진 출신 귀족들과 화북에서 내려온 유민 군사집단들 또한 이해 관계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착 호족들에겐 이런 틈을 파고들 역량이 없었고[18], 그럴 사정이 아니어서 내내 눌려 지내야 했다.

한편 서진의 귀족 집단은 유민 군사집단을 천하다 여겨 무시했지만 그 군사적 실력을 두려워했으며, 후자의 지휘관들은 전자를 전통과 학식 외엔 아무 것도 아닌 집단이라고 내심 비웃었지만 병력의 통솔에 있어 필수적인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건 바로 그들이었기에, 전자에게 함부로 정면도전하진 못했다.

사마예의 경우 황제로 즉위할 때 즉위식에서 승상 왕도에게 같이 용상에 올라달라는 말을 할 정도로 황권이 취약했고, "'임금(王)과 말(馬)[19]이 천하를 공유한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긴 했지만, 감히 지방 호족 따위에게 무시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스스로 주도적으로 나라를 세운 게 아니라, 위에서 언급되는 서진 귀족 집단, 서진 정예 군단 출신이 상당수 섞인 화북 유민 군사집단, 강남 토착 호족 집단[20] 등에게, 일종의 편리한 최대공약수로서 옹립된 한계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런 걸 감안해도, 사마예가 심하게 현실 안주적이었던 데다 군주로서의 역량이 뛰어나지 않아, 형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왕도의 사촌형 대장군 왕돈이 반란을 일으켜서 사마예의 측근 유외 등을 축출하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어서 즉위한 명제 사마소가 왕돈의 반란을 진압 하고, 그동안에 이런 사회 갈등도 북방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역설적으로 일시 봉합된다. 명제 자체는 꽤 괜찮은 군주여서 어떻게든 뭔가 일을 많이 해보려 했지만, 27세로 요절하고 만다. 이런 요절은 대대로 이어져서, 아들 성제 사마연은 5세로 즉위해서 22세로 사망. 사마연의 동생 강제 사마악은 역시 23세로 사망. 사마악의 아들 목제 사마담은 2세로 즉위해서 19세로 사망. 사마담의 사촌 애제 사마비는 21세로 즉위해서 25세로 사망했다. 이 덕에 사마담 시절부터 권력을 잡은 환온은 효무제 사마요까지 5황제를 꼭두각시를 삼는다.[21] 반면 실권자였던 환온이나 사안은 60넘게 살았고 왕돈도 58세에 사망했으니 황제의 권한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는데, 때문에 왕조가 상당히 불안정해져서 중앙이 허약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22][23] 간문제 사마욱처럼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오래 살던 인물이 막상 황제 자리에 오르니 몇 년 살지도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폐제 사마혁처럼 황제 자리에서 폐위된 사람은 또 오래 살았다.[24]

이렇게 황실이 부실해서 통제를 제대로 못하는 사이, 귀족들인 왕씨(王氏)·환씨(桓氏)·사씨(謝氏) 등이 각 지방의 유민 군사집단 및 토착 호족 집단과 서로 각축을 벌이고 합종연횡하는 상황이 진행된다. 그러나 이를 동진만의 특성으로 보는 건 대단히 잘못된 시각. 유민 군사집단 및 토착 호족의 문제는 북조들도 겪었던 문제였고[25], 5호 16국은 아예 종족들이 들고 일어나 나라 자체가 갈리고 찢겨지며 황제를 칭하는 자들이 사방에서 속출했으며 부족전쟁으로 혼돈의 극치를 연출했다. 당시 중국의 전체적인 시대상 자체가 황실의 정통성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풍조였기에 온갖 배신과 하극상이 난무했다.

6.2.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의 대두

국가적 대사업인 북쪽 영토 수복을, 황제가 모은 관군은 실패하는데 유력자나 장군이었던 조적, 환온, 유유가 사비로 모은 군대는 일격에 성공하는 상황이 3번이나 일어난다. 다만, 황제가 모은 관군은 실패하는데 각 장군이 사비로 모은 군대가 성공하는 상황은 놀라워도, 화북을 차지한 오호들에게 동진의 체제를 앞서는 어떤 뚜렷한 장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동진이 환온이나 유유를 통해 옛 수도이자 중심지인 낙양과 장안을 탈환한 것 자체는 그렇게 이상한 일까진 못된다. 문제는 조정이 점차 유명무실해지고, 귀족 집단은 실무 능력을 잃고 점점 형해화되어 가는데 조정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각 지방 군단들은 저마다 수장을 내세워서 부귀영달을 누리는 국가 해체 현상의 단초가 이때부터 보인다는 것.

그래서였는지 동진은 내부 단결용으로 고토 수복 및 이민족 정벌이라는 괜찮은 명분이 있었음에도 현실에 안주하는 답답한 모습을 계속 보이게 된다. 그러나 환온, 유유 등이 등장하는 시점이 되면, 영토는 계속 넓어지고 국력도 꽤나 강해진다. 중앙 정부가 그로기 상태였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황실 기준이었지, 유력한 장군들의 통제가 통하는 한은 그럭저럭 기능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대두는 자연스러운 면이기도 하다. 황실과 중앙귀족은 북쪽 근거지를 잃고 남쪽으로 내려와 남쪽의 호족과 군벌들에게 더부살이하는 신세로 달리 말하면 황실은 동진 군사력의 주체가 아니다. 그러니까 동진의 황제가 믿을만한 장수를 불러 "북벌로 북쪽 오랑캐들을 쓸어버리고 고토를 되찾아라!" 이럴 입장이 못 된 것. 이 얘기는 북벌의 성공은 그 공로가 고스란히 이를 성공시킨 무장에게 돌아간다는 얘기로 그렇게 되면 그 인물의 힘이 커져 끝내는 찬탈 엔딩으로 끝날 수 있다. 당장에 사마소가 촉한정벌로 찬탈의 기초를 세운걸 감안하면 "네가 한거 나는 못 할거 같냐?" 라며 똑같이 나올 수 있다. 실제로 동진의 찬탈을 시도하거나 성공시킨 환온, 유우 모두 북벌에서의 공훈을 매개로 찬탈을 노렸다. 때문에 북벌의 성공은 동진에게 영광이 아니라 멸망의 씨앗이 될 수 있었다.[26]

6.3. 차별 문제

북방에서 내려온 귀족이 아닌 이상 현지 호족이더라도 한미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차별을 받는 등 그리 좋지 못한 대접을 받았다. 양상은 다음과 같다. 아예 호적에서부터 화북 출신 귀족들은 하얀색 호적인 백적을, 강남 출신 호족들은 노란색 호적인 황적을 써서 차별화시켰고, 또한 강남 지역과 피난 온 강북 사람들은 서로 다른 말을 써,[27] 강북 사람들이 강남 사람들을 " 에휴...저 촌것들...니네는 세련된 표준어도 몰라?"라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같은 화북 출신이라도 사마예와 같이 강남으로 내려온 창립멤버들은 권력의 중심이 되었지만 천도 이후에 내려온 귀족들은 그런 거 없었다. 결국 강남 토착이나 북래 호족들이었던 소준, 환현 등이 몇 차례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환온과 유유 같은 실력자들이 토단령을 내려 백적 철폐를 단행하여 국가 재정 확충 및 군사력 확보에서 대단히 큰 이득을 발견하게 되고, 이와 같은 문제는 송, 제, 양, 진의 왕조를 거치면서 서서히 해결된다. 조위 말부터 서진까지 이어져 내려온 근본적인 문제인 문벌귀족이 좌지우지하는 정치나 청담사상, 구품중정제같은 건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다만 운용이 잘못되었을 뿐. 지배층의 도덕적 해이와 무기력함 같은 것도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크다. 환온과 유유 시대에 한문 출신들이 실권을 잡긴 했으나 이 시절에는 아직 문벌 귀족 세력 역시 강했던 건, 적어도 그때까진 실력 있는 관료가 문벌 귀족층에서만 배출되었던 아주 중요한 배경이 있었다. 동진의 뒤를 이은 유송의 한문 출신 황제들은 이들을 보면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으나, 문벌 귀족층 또한 점점 유리되어가는 실권을 보고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6.4. 남송과의 비교

동진은 남송과 닮았다. 둘 다 내부문제로 국가가 막장이 된 사이 이민족에 의해 화북이 점령당하며 황제와 황족들에서 공백이 생긴 사이 강남에 있던 황족이 여명을 이어가며 화북과 대립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꼴은 남송이 더 나았는데 남송은 동진과는 달리 황실의 권위가 강해서 힘을 한군데로 집중할 수 있었고 동진처럼 군약신강의 경향이 대두되긴 했어도 대놓고 찬탈을 노리는 환온 같은 위험분자를 어찌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그렇기에 동진처럼 북벌 시도가 있었지만 이것도 조정 중심으로 행한 일이었다.

7. 자치통감 기준으로 동진은 과연 정통인가?

남조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 가운데에선 저명한 역사서인 자치통감의 권위에 기댄다. 삼국 시대는 무통으로 보면서도 위나라 위주로 기재하다가 진부터 유송, 남제, 양, 진까지의 연호를 사용했으니 이들을 정통으로 본 것이고 따라서 동진이 정통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정통론은 시대와 역사가들의 입장에 따라 달라져 왔다. 당장 북송 초기 정통론에 많은 영향을 미친 구양수의 책부원구에선 주, 진, 한, 위, 서진, 북위, 북주, 북제, 수, 당을 정통으로 보았다. 즉 서진이 멸망하고 이후 생긴 동진은 정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구양수는 남조보다 오히려 북조 왕조들을 정통으로 보았다. 이것은 북송 초기에 '동진에 중국의 아름다운 풍속이 남았으니까 정통 아니겠느냐?'라는 인식에 대한 정면 반박의 성격으로 나온것이다. 거기다가 구양수는 '정통은 단절될 수 있다.'라는 논리를 내세웠는데 구양수는 심지어 정당성의 원류를 엄격하게 밝히면 한, 당, 송 외엔 정통이 없다고 까기까지 했다.

실상 사마광의 자치통감도 구양수의 논리를 어느 정도 이은 것이다. 자치통감이 삼국 시대에 대해서만 정통이 없다고 생각하고 서진 이후부턴 서진을 이은 왕조들인 남조가 정통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사마광이 연대를 잇기 위해서 조위, 남조, 오대를 기년에 끼워넣은 거지 사마광이 본 정통 왕조는 주, 진, 한, 진(서진), 수, 당뿐이었다.[28] 즉 사마광 입장에선 삼국 시대 건 남북조 시대건 간에 정통이 없는 시대로 보았고 일단 연도를 서술하려고 해당 왕조들의 연호나 기년을 이용한 거지 동진이 포함된 남조의 정통성 같은 건 인정한 적이 없다는 거다. 한마디로 중국이 통일된 왕조 시대라면 쉽게 어디가 정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엄연히 분열된 시기에 어느 한 왕조만이 정통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후대의 정통론)은 자신의 한쪽으로 치우친 논의이며 공정한 통론이 아니다. (중략) 어찌하여 일국만을 존중하여 정통으로 삼고, 그 나머지를 참위라 할 수 있겠는가. (중략) 위[29]·송·제·양·진·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의 연호로써 각각 나라들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 귀함과 비천함을 구별하여 정윤(정통과 비정통)을 따로 구분한 것은 아니다. -《자치통감》권69 위기일 황초이년 -
결국 자치통감에 따르면 동진이 특별히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보기 어렵다. 사마광의 기준에 따르면 서진이 멸망함으로써 서진의 정통성은 끝났고 중국 대륙은 또다시 여러 나라가 난립함으로서 어느 나라를 정통으로 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30] 이걸 가지고 동진과 이후 남조 왕조들을 사마광이 정통으로 인정했다고 할 수는 없다.

8. 기타

이 동진 시대부터 습착치 한진춘추 촉한정통론을 다루는 책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민중들 사이에서 삼국 시대, 특히 촉한에 대한 동정적인 민담이나 설화등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 반대편에선 조조, 사마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이미 세설신어나 북조의 석륵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 시대 이후 보편화되기 시작하여 북송 무렵에는 상당히 대중화되기에 이른다.[31]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바탕하에서 이후 촉한 정통론은 주자가 성리학을 완성한 남송 시절에 확실히 정립되었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묘호 인플레를 촉발한 왕조이기도 한데 동진 이전까지는 묘호 올리기를 신중히 해서 한나라 이전에는 아얘 사례 자체가 거의 없고 한나라때는 황제가 29명이었지만 전한 후한 각각 7명씩이었지만 그마저도 유지된건 총합 6명 뿐이었다. 삼국시대와 서진도 창업군주 외에 묘호가 올려진 이는 열조 위명제 뿐이다.

이렇게 동진 전만 해도 묘호 올리기를 까다롭게 하고 기껏 올려도 취소하곤 했는데 동진때는 11명 중 6명이 받을 정도로 흔해진다. 물론 화북에서도 묘호가 늘어난 경향을 보이나 화북은 수시로 나라가 갈려가 오래 유지 못되어 감을 잡기 힘든데 동진은 나름 장기간 이어갔기에 체감되기 쉽다. 이후인 남북조시대에 이르러도 변하지 않아 결국 황제라면 묘호도 당연히 얻게 된다.[32]

9. 역대 황제

진나라에서 서진 시절을 제외하면 총 11대 103년이다.

본디 서진과 동진은 황제의 혈통이 동일한, 지속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원래 서진이나 동진이나 국호는 진(晉)이며, 전한 후한처럼 도중에 아예 왕조 자체가 단절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마씨 황족도 변동이 없으나 주변 정세와 국가의 영토 변화가 너무 달라져서 북송 남송처럼 구분해서 부르는 것뿐이지만 해당 항목에서는 서진이 강남 지역으로 쫓겨나 남은 사마씨 일족들이 동진을 세운 뒤부터를 다루기 때문에 아래 표에서는 대수를 1부터 다시 센다.[33] 따라서 서진 시절의 황제들까지 알고 싶다면 서진/역대 황제 항목을 참고하라.

서진 황제의 대수까지 포함해서 계산하려면 동진 황제 대수 +4를 하면 전체 대수가 나온다

앞서 말했듯이 군약신강체제라 종(宗) 같은 묘호가 붙지 않은 황제는 그냥 이름만 황제인 꼭두각시 내지 허수아비며 애제(哀帝)나 간문제(簡文帝)는 그 뜻 자체가 그냥 무늬만 황제라는 이야기다. 물론 해서공(海西公)같이 공(公)자가 붙은 황제는 폐위된 황제다. 그래서 역대 황제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특이 사항이라면 죄다 수명이 짧았다는 것인데 50살이 되고도 살아있는 황제가 사마욱 하나뿐이었으며 그나마도 과반수가 30대 이내에 사망했다. 그래도 북위나 중후기 후한에 비하면야 양호한 편. 40 이상 산 사마예, 사마혁, 사마욱 세 사람을 뺀 동진의 황제들은 13세 정도에 즉위해서 27세에 사망했다.
대수 재위기간 묘호 시호 성명 약력 능호
초대 318-323년 중종(中宗) 원황제(元皇帝) 사마예(睿) 사마업의 재종숙, 사마근(覲)의 아들.
276년 출생, 323년 사망. 향년 48세.
건평릉(建平陵)
2대 323-325년 숙조(肅祖) 명황제(明皇帝) 사마소(紹) 사마예의 아들.
299년 출생, 325년 사망. 향년 27세.
무평릉(武平陵)
3대 325-342년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 사마연(衍) 사마소의 아들.
321년 출생, 342년 사망. 향년 22세.
흥평릉(興平陵)
4대 342-344년 강황제(康皇帝) 사마악(岳) 사마연의 동생.
322년 출생, 344년 사망. 향년 23세.
숭평릉(崇平陵)
5대 344-361년 효종(孝宗) 목황제(穆皇帝) 사마담(聃) 사마악의 아들.
343년 출생, 361년 사망. 향년 19세.
영평릉(永平陵)
6대 361-365년 애황제(哀皇帝) 사마비(丕) 사마악의 종형, 사마연의 아들.
341년 출생, 365년 사망. 향년 25세.
안평릉(安平陵)
7대 365-371년   폐황제(廢皇帝) 사마혁(奕) 사마비의 동생.
342년 출생, 386년 사망. 향년 4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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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371-372년 태종(太宗) 간문황제(簡文皇帝) 사마욱(昱) 사마혁의 숙조부, 사마예의 아들.
320년 출생, 372년 사망. 향년 53세.
고평릉(高平陵)
9대 372-396년 열종(烈宗) 효무황제(孝武皇帝) 사마요(曜) 사마욱의 아들.
362년 출생, 396년 사망. 향년 35세.
융평릉(隆平陵)
10대 396-418년 안황제(安皇帝) 사마덕종(德宗) 사마요의 아들.
382년 출생, 418년 사망. 향년 37세.
휴평릉(休平陵)
11대 418-420년 공황제(恭皇帝) 사마덕문(德文) 사마덕종의 동생.
386년 출생, 422년 사망. 향년 37세.
충평릉(冲平陵)

[1] 분홍색은 전진이다. [2] Taagepera, Rein (1979).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600 B.C. to 600 A.D.". Social Science History. 3 (3/4): 128. # [3] 현대인은 피난 전후를 서진과 동진으로 구분하지만 당시에는 명목상 같은 나라가 쭉 이어진 것으로 봤기 때문에, 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 진서에서도 동서진 둘을 모두 다루고 있다. [4] 동진의 정통성을 인정치 않은 북조에선 우진(牛晉)이라 멸칭을 붙였다. 우금(서진) 항목 참조. [5] 서진의 마지막 황제였던 사마업의 업 자를 피휘하여 바꾼 것이다. [6] 감탁은 명장 주방이 양성한 정예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군사력이 왕돈보다 막강했음에도 탐욕과 우유부단함으로 일을 단단히 망쳤다. 재빨리 군사를 몰아 사실상 텅 빈 거나 마찬가지인 왕돈의 본거지 무창을 털었으면 왕돈의 군대는 양면으로 협공당해 간단히 제압됐을 확률이 높았다. 이에 왕돈도 원제 사마예의 항복을 받기 전까지 감탁이 무창을 공격할까 매우 걱정했다고 한다. [7] 결국 형주의 은중감, 양전기, 환현, 경구의 유뢰지, 회계의 손은, 예주 자사 유해, 초왕 사마상지, 강주 자사 왕유 등 군벌이 할거하는 난세가 동진에 찾아왔다. 왕공을 중심으로 한 반란을 일으킨 군벌은 은중감, 양전기, 환현, 유해가 있었고, 토벌을 맡은 군벌은 사마상지, 왕유가 있었다. 손은은 독자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8] 단, 그래도 저 앞의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여 정말로 북위가 500만호였는데 유송이 91만호였던 건 아니다. 화북은 중앙집권도가 높았지만 남조는 여기저기 호족들의 세력이 강해서 호구 파악이 잘 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봐야 한다. 유송 같은 경우 적어도 회수 일대에 더해 산동 지방도 장악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남조들은 대체로 삼국 시대로 비교해볼 경우 촉한 + 손오 +( 그 외 회수 지역 영토에 북에서 넘어온 많은 유민) 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대강 5:4 정도였다고 보면 간단하다. [9] 손호가 2천석 이하 관리까지 직접 보내서 벌목을 감독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10] 《금릉지기(金陵地記)》에서 이르길 : 장산(蔣山)은 본래 수목이 적었는데, 동진 때에 임기를 마치고 도성으로 귀환한 자사에게 소나무 100그루, 군수(郡守)에게는 50그루를 심게하였다. ( 태평어람) [11] 영태(永泰) 원년, 건덕(建德)현의 현령이 백성 1정(丁)마다 15그루의 뽕나무, 4그루의 감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심게하고 여성에게도 절반을 심게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였고 얼마 뒤 숲이 조성되었다.( 양서) [12] 실제로 그 혼란기 속에서도 103년이라는 기간 동안 나라가 이어졌는데 화북에서는 1년 ~ 2년밖에 존속되지 않은 나라가 있던 걸 감안하면 꽤 안정적이었다. [13] 삼국 시대 ~ 남북조 시대까지 100년을 버텨낸 나라는 동진과 북위뿐이며 씨, , 만이 100년 넘게 왕위를 지켰다. 그런데 사마씨는 탁발씨나 소씨와는 달리 큰 페널티가 있었다. 한족 왕조 역사상 화북과 중원을 상실하고 강남으로 쫓겨난 첫 국가가 사마씨인데 그러고도 100년이나 버틴건 상당히 대단하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선 사마씨뿐 아닌 문벌 귀족들도 나름의 책임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화북을 두번째로 통일하고 안정시킨 북위의 탁발씨, 막장 송나라를 무너뜨린 제나라와 양나라의 소씨 등 일단 나머지는 그래도 100년이나 유지할 명분이나마 있었다. [14] 실제로 동진 말기 유유의 부대가 산동 반도까지 차지해서 동진의 뒤를 이은 송은 남조 중에서 제일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그리고 양나라 때도 북위의 혼란을 틈타 양나라가 공세를 취한 적도 있었다. [15] 그나마 같은 민족, 씨족 사이에서는 나름 계승 의식이 있긴 했지만 이것마저도 서로 갈리는 경우가 있어서. [16] 물론 사마씨만의 죄는 아니고, 서진 기득권 전체의 책임이 크다. [17] 황실인 손씨 가문부터 원래 강남 지역에 살고 있었고 기득권 대부분이 강남/강동 그 자체인 양주와 인근의 형주, 서주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동진과 같은 갈등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지역 출신으로써 손오 정권에 합류한 사람을 찾는게 더 빠를 정도. 오히려 기득권이 대부분 해당 지역 호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타 지역으로 침공하는 것에 딱히 절실하지 않았던 것이 손오가 결국 영토확장을 거의 못하고 끝까지 지역정권 수준을 면치 못한 가장 큰 이유다. [18] 손오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가 지역 호족들을 마구 죽여대서 그들의 인적 역량을 심각하게 저해시킨지 아직 30~40년밖에 안 지난 시기였다. [19] 또는 왕씨와 마씨(사마씨) [20] 앞서 말했듯 화북 출신 떨거지들이 대단히 맘에 들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걸핏하면 사람 목을 날려대는 오호 야만족들의 노예가 될 순 없었다. [21] 환온이 실권을 잡은 때가 5대 황제 사마담 재위 시절인데 환온이 사망한 때가 9대 황제 사마요 재위 시절이다. 즉, 환온이 정권을 잡을 동안 4명의 황제나 교체된 것이다. 게다가 서진과 동진의 모든 황제 중 환갑을 넘겼던 환온보다 오래산 황제가 없었고 사마소 이후의 황제는 모두 환온보다 어렸다. [22] 게다가 처음에 북쪽에서 내려왔을 때는 강남의 풍토병에 걸려서 그렇게 일찍 죽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미 토착 세력이 된 몇 십 년 뒤에도 나름대로 건강 관리를 가장 많이 받는 황제와 황족이 이렇게 일찍 죽는 일이 많다는 것은 역사서에는 병사했다고 써놓고 실제로는 암살 당했을 확률이 높다고 볼 수도 있다. 심각한 지체 장애가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위협적이지 않은 꼭두각시인 안제 사마덕종은 20년 이상 황제 자리를 유지했다. [23] 일부에선 유유가 사마덕종을 죽인 것을 일생 일대의 실수라고 하나 유유가 아닌 누가 되더라도 결과는 대동소이한 것이 사마덕종이란 인물이 똑같은 바보 황제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지능은 되었던 사마충보다도 덜떨어지는 지능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골치 아픈 존재였다. 선양이 아무리 정치적 쇼였지만 그래도 기본 지적 능력은 있는 황제가 해야 자연스러운데 사마덕종처럼 자기 몸도 간수 못하는 1급 지적 장애자가 갑자기 선양한다고 하면 부자연스럽다. 그나마 사마덕종의 나이가 어리거나 어리지 않더라도 워낙에 상태가 그렇다 보니 태후를 대신 선양 쇼에 나오게 할 수 있었겠지만 생모인 진귀녀는 사마덕종이 즉위하기 6년 전에 죽었고 할머니인 이능용도 이 시기 기준으로 19년 전에 죽고 없었다. [24] 이 사람은 억지 폐위된 후 유배되었는데 아마 그래서 중앙정계와 멀어져 일찍 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또한 화가 닥칠까봐 주색에만 빠져지내다 44세로 죽었기에 별 의미는 없다. [25] 북조의 경우 지배계급에 아예 정체성이 다른 유목 민족이 대거 섞이면서 정체성 혼란은 더 심했다. [26] 반면에 비슷한 입장에 있던 남송은 황실과 중앙정부가 각지를 확실하게 잡고 있었다. 개희북벌이나 단평의 입락도 전적으로 중앙정부에서 결정하고 시행했다. [27] 현재도 중국어 방언들은 끔찍하게 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언어학적으로는 아예 다른 언어 취급받을정도. 이 경우 중국어는 1개의 언어가 아닌 이들을 포함한 어파로 간주된다. [28] 사마광은 구주(천하)를 모두 차지하지 못하면 정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어쨌든 천하에 영향력을 미친 주나라나 통일왕조로서의 존속기간은 짧지만 어쨌든 천하를 통일해본 진, 진(서진), 수는 정통왕조이고 존속기간은 길지만 어쨌든 천하를 통일하진 못한 동진, 북위는 정통이 아니라는 것.근데 본인 나라도 얼마 못가 동진 루트를 탔다. [29] 편의상 사마광은 위-진(서진)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런데 어쨌거나 위진의 연호를 썼다는 이유로 후대에 촉한정통론자들에게서 소극적으로나마 조위정통론을 지지한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고 때문에 주희는 자치통감강목을 편찬하며 촉한정통론을 주장했다. [30] 굳이 내세우자면 전조(서진을 멸망시킴)-후조(전조를 멸망시킴)-염위(후조를 멸망시킴)-전연(염위를 멸망시킴-전진(전연을 멸망시킴)-북위(전진 멸망 후 분립, 화북을 통일함)-서위-북주(화북 통일) 라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염위 같이 존속기간이 1년도 못 되는 나라가 껴있고 전진과 북위를 제외하면 너무 협소한 강역만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나라-전진-북위로 정리하자니 대나라 역시도 강역이 좁긴 마찬가지다. [31] 이들이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었다면 몰라도 두고두고 까일 치부를 남겼으니 더더욱 이미지가 나빠질 수밖에 없게 됐다. [32] 문제는 묘호가 너무 쓰이다 보니 암군에게도 주어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업적에 비해 터무니없는 묘호를 받은 케이스가 많아진다. 명나라 세종이 이 예시. [33] 물론 서진 시절까지 포함시키면 동진을 세운 사마예는 통합 진(晉)나라의 5번째 황제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