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袁眞(? ~ 370년)
동진의 장수.
2. 생애
342년, 목제가 붕어하고 강제가 즉위한 뒤 유익이 북벌을 추진하려고 할 때 유익의 상소를 통해 심양 태수임이 언급된다.영화 원년(345년), 유익이 죽은 뒤 유익의 부장이었던 간찬(干瓚)과 대희(戴羲) 등이 반란을 일으켜 조거(曹據)를 살해하자 원진은 유익의 장사 강반, 사마 주도(朱燾), 모목지와 함께 간찬과 대희를 토벌하였다.
영화 6년(350년), 여강 태수가 되었다. 이때 후조에서는 실권을 장악했던 염민이 석감을 살해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원진은 합비를 공격하여 남만교위(南蠻校尉) 상탄(桑坦)을 사로잡았다.
영화 12년(356년), 용양장군(龍驤將軍)이 되어 사공(司空) 겸 산기상시(散騎常侍) 차관(車灌)과 함께 부절을 지니고 낙양으로 향하여 황릉을 수리하였다.
융화 원년(362년), 서중랑장(西中郞將), 감호예사병익4주제군사(監護豫司幷冀四州諸軍事), 예주 자사가 되어 여남(汝南)에 진수하였으며 여남에 도착한 뒤 낙양으로 군량을 보냈다. 이후 유희(庾希)가 하비(下邳)에서 산양(山陽)으로 퇴각하자 원진도 여남에서 수양(壽陽)으로 퇴각하였다.
흥녕 원년(363년), 동진 조정에서 환온에게 시중(侍中), 대사마(大司馬),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녹상서사(錄尙書事), 가황월(假黃鉞)을 더하고 원진을 도독사익병3주제군사(都督司冀幷三州諸軍事)로 임명하고 북중랑장(北中郞將) 수희(廋希)를 도독청주제군사(都督靑州諸軍事)로 임명하였다. 이후 원진은 전연의 공격을 받았다.
흥녕 2년(364년), 원진은 환온의 명으로 강하상(江夏相) 유호(劉岵) 등과 함께 양의도(楊儀道)를 뚫어 배가 지나다닐 수 있게 했고 환온은 수군을 이끌어 합비로 도착했다.
태화 4년(369년), 원진은 환온의 북벌에 다시 참가하였다. 원진은 환온의 명으로 초량(譙梁)을 공격했지만 석문(石門)을 개방하지는 못해서 결국 군량이 바닥나는 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전연의 추격을 허용하게 되었고 환온의 북벌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환온은 원진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으며 그를 폐서인할 것을 청했고 원진은 환온이 자신을 무고했다는 것을 원망하여 수양(壽陽)을 점령한 뒤 모용위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태화 5년(370년), 조정에서는 원진을 폐서인했다. 한편 원진의 아들인 원쌍지(袁雙之)와 원애지(袁愛之)는 양국(梁國) 내사 주헌(朱憲)과 여남 내사 주빈(朱斌)을 살해하였다. 전연의 모용위는 대홍려(大鴻臚) 온통(溫統)을 파견하여 원진을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회남제군사(都督淮南諸軍事),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겸 호남만교위(護南蠻校尉), 양주(揚州) 자사로 임명하고 선성공(宣城公)으로 봉하고자 했으나 그 직전에 원진과 온통이 죽으면서 이는 성사되지 못했다.
원진이 죽은 뒤 원진의 부하인 주보(朱輔)는 원진의 아들 원근(袁瑾)을 건위장군(建威將軍), 예주 자사로 세우는 한편 모용위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환온의 장수인 축요(竺瑤)가 무구(武丘)에서 원근을 물리쳤고 환온이 수양에서 원근을 공격하면서 판세는 환온에게 기울었다.
태화 6년(371년), 전진의 부견이 장수 왕감(王鑒)을 원근에게 구원군으로 보냈으나 환이(桓伊), 환석건의 역공으로 패배했고 결국 환온이 수양을 함락하고 원근을 참수하면서 원진의 반란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한편 원쌍지와 원애지가 주헌, 주빈을 살해했을 때 주헌의 아우 주작(朱綽)은 환온에게로 달아났는데 환온이 원진을 물리친 뒤 원진의 관을 열어 그 시신을 도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