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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 추존 황제
이특 | 李特 |
|
<colbgcolor=#CD7F32> 묘호 | 시조(始祖) |
시호 | 경황제(景皇帝) |
연호 | 건초(建初, 302년 ~ 303년) |
성 | 이(李) |
휘 | 특(特) |
자 | 현휴(玄休) |
부왕 | 농서양왕(隴西襄王) |
황후 | 태황후(太皇后) 나씨(羅氏) |
생몰 | ? ~ 303년 |
재위 | 302년 ~ 3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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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성한(成漢)의 실질적인 건국자. 파서군 탕거현의 저족(氐族) 출신이며 동강엽장(東羗獵將) 이모(李募)의 차남이다.2. 생애
2.1. 초창기
이특이 활약하는 때는 서진 혜제가 재위에 있을 때로, 당시 이민족은 지배계층인 한족으로부터 여러 차별을 받았다. 파저족의 경우, 파(巴)의 오랑캐를 뜻하는 종(賨)자를 붙여 종포(賨布)라는 특별 세금을 부과했고, 한족들은 그들을 일컬어 파저인(把氐人)이라 부르며 대놓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특은 저족 출신임에도 용맹함과 범상치 않은 재능을 인정받아 젊어서부터 주(州)의 업무를 처리하는 관리로 일했다.296년, 저족인 제만년이 반란을 일으켜 관서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기근과 역병까지 관중을 덮치니, 298년에 약양, 천수 등 6군에서 유민들이 대규모로 발생하여 한천(漢川) 지역으로 백성 수만 호가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무리에는 이특 형제들도 있었는데, 이특과 형제들이 약자들을 솔선수범하여 챙기면서 많은 유민들의 마음을 얻었다.
2.2. 조흠의 난
유민 무리가 한중에 도착해 서진 조정에 파촉땅으로 들어가 먹고 살 수 있게 해달라 상소하였다. 조정에선 이를 거절하고 되려 시어사 이밀(李宓)을 보내 검각에서 이들을 막게 하고 감시했다. 유민들이 재산을 긁어모아 이밀에게 뇌물을 바치자, 이밀은 조정에 표를 올려 유민들의 파촉 입성 허가를 받아냈다. 조정의 허락을 받은 유민들은 비로소 파촉에 들어가 양주(梁州), 익주(益州)로 흩어졌으며, 이특 형제들 또한 양주에 자리를 잡았다.300년에 가남풍이 퇴출되자 익주 자사인 조흠(趙廞)[1]은 자신도 축출될까 매우 두려워하였다. 조흠은 아예 힘을 키울 작정으로 관아의 창고를 열어 유민들을 지원하며 힘을 길렀는데, 그가 포섭한 유민들 중에는 이특 무리도 있었다. 이특을 포섭한 조흠이 그 무리를 앞잡이로 삼아 강도짓을 벌이니, 촉땅 사람들은 그들을 몹시 미워하였다. 그러던 중 조정에서 익주자사 경등(耿滕)을 새로 보내자 조흠은 군사를 보내 경등을 죽이고 대도독, 대장군, 익주목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특의 동생 이상(李庠), 매부 이함(李含) 등도 저족 기병 4,000명을 이끌고 조흠에게 귀부했다. 조흠은 이상을 위구장군, 양천정후(陽泉亭侯)에 봉하고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조흠의 반란군은 어느새 그 규모가 증가하여 서진으로 통하는 길을 모두 점거하였다.
301년, 이상이 날래고 용맹하여 뭇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을 보고 조흠이 이를 꺼렸다. 이에 장사 두숙(杜淑), 장찬(張粲)이 그를 빨리 제거하지 못하면 화근이 될 것이라 간했는데, 마침 이상이 들어와 조흠에게 칭제할 것을 권했다. 두숙과 장찬은 이를 꼬투리 잡아 대역무도한 발언이라 비난하였고, 조흠도 그들을 거들며 이상과 그의 아들, 조카 10여 명을 붙잡아 참수했다. 그러고는 외지에서 군사를 통솔하던 형제 이특, 이류에게 편지를 보내 "이상이 죽어 마땅한 말을 하였으나 너희 형제와는 관계없다"고 위로했다. 당연하게도 이특과 이류는 조흠을 크게 원망하여 군사를 이끌고 면죽으로 들어갔다.
조흠이 장사 비원(費远), 건위태수 이필(李苾), 독호 상준(常俊)에게 10,000여 군사를 주어 면죽군 석정(石亭)에 주둔하게 했다. 이특은 군사 7,000명으로 비원 등을 야습해 격파했고, 군영을 불태워 조흠의 군사 8~9할을 죽인 뒤 곧장 성도로 진격했다. 조흠은 이특이 공격해온다는 사실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장이 이 지경이니 더이상 희망이 없다 판단한 군좨주 장정(張征), 비원, 이필 등 문무관원들은 야밤에 성문을 열어젖히고 자기 살 길을 찾아 도망쳤다. 조흠도 성도를 버리고 처자식들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쳤는데, 광도(廣都)에 이르렀을 때 그를 수행하던 부하 주축(朱竺)에게 살해당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성도를 점거한 이특은 병사를 풀어 마음껏 백성들을 약탈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서이호군 강발(姜髮), 장사 원치(袁治)가 약탈에 반대해 저항했지만 이특에게 참살당했다. 성도를 난장판으로 만든 뒤, 이특은 낙양에 아문 왕각(王角), 이기(李基)를 사신으로 보내 조흠의 죄상을 나열하며 서진 조정에 자신이 난을 진압했음을 알렸다.
2.3. 서진과의 갈등
일찍이 양주자사(梁州刺史) 나상이 표를 올려 조흠의 실패를 예견한 적이 있었다. 진혜제는 나상을 평서장군에 임명하고 척서이교위, 익주자사를 겸하게 하여, 독아문장 왕돈(王敦)[2], 상용도위 의흠(義歆), 촉군태수 서검(徐儉), 광한태수 신염(辛冉) 등과 7,000여 병력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가게 하였다. 나상이 한중까지 왔다는 말을 들은 이특은 몹시 두려워 동생 이양을 보내 진귀한 보물을 바치며 영접하게 했다. 나상은 보물을 받고 매우 기뻐해 이양을 기마독으로 삼았다.나상이 면죽에 도착하자 이특은 동생 이류와 함께 면죽으로 가 소고기와 술을 그에게 대접했다. 왕돈과 신염이 나상에게 이특, 이류 등을 사로잡아 죽일 것을 간하였으나 나상은 듣지 않았다. 신염은 이특과 예전에 교류한 적이 있어 그의 야망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상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이특에게로 가 넌지시 경고했다. 신염의 말을 들은 이특은 깊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성도에 도착한 나상은 문산군(汶山郡)의 강족들을 토벌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왕돈이 전사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제만년의 난을 진압한 서진은 양주, 익주로 흩어졌던 관중의 유민들에게 복귀할 것을 명하고, 아울러 어사 풍해(馮該), 장창(張昌)을 보내 이를 감독 및 집행하게 했다. 이특은 익주를 떠나고 싶지 않았으며, 오히려 촉 땅에서 군림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부하 염식(閻式)을 나상에게 여러 차례 보내 이주를 가을까지만 연기시켜달라 부탁하는 동시에 조정이 파견한 어사들에게 뇌물을 뿌렸다. 뇌물은 받은 어사들의 도움으로 유민들의 이주는 7월로 미뤄둘 수 있었고[3], 서진 조정에선 조흠의 난을 토벌한 공로가 있다고 여겨 이특을 선위장군, 장락향후, 이류를 분무장군, 무양후로 각각 삼았다.
7월 초가을이 되자 나상이 종사를 보내 이특에게 유민의 송환을 촉구하고 당장 출발하라 재촉했다. 이때 유민들은 막 자리를 잡아가던 터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고, 여기에 더해서 곡식 수확도 아직 못해 불만이 커져만 갔다. 이특은 다시 염식을 나상에게 보내 겨울까지 연기시켜달라 부탁하지만, 이번엔 신염과 이필이 나서서 반대했다. 나상은 이번엔 신염과 이필의 말을 좇아 익주, 양주 각지 유민들에게 돌아가라는 격문을 뿌리고, 재동태수 장연(張演)을 보내 유민들의 보화를 수색하게 했다. 불만이 극에 달한 유민들은 돌아가길 거부하고 평소 자신들을 대변해주던 이특 형제에게 앞다투어 귀부해왔다.
이특 형제는 면죽에 큰 군영을 세워 유민들을 흡수하고, 신염에게 서신을 보내 기일을 늘려줄 것을 다시 청하니, 신염은 대노하여 촉땅 각지 번화가에 이특 형제의 현상수배서를 붙였다. 이특은 그 현상수배서를 모두 걷어서 이양과 함께 내용을 수정한 뒤 다시 붙였다.
6군 유민들의 우두머리인 이(李), 임(任), 염(閻), 조(趙), 양(楊), 상관(上官)씨와 저족, 수(叟)족의 후왕(侯王)[4] 수급을 보내오는 자에게 수급 1개당 1백 필을 포상할 것.
이렇게 조작된 현상수배서는 유민과 이민족의 엄청난 어그로를 모았고, 이특과 이류에게 귀부하는 자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어느새 그 수가 수만에 달했다. 이특이 다시 한번 나상에게 염식을 보내 기일을 늘려달라 청하지만, 나상은 기한을 늘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호통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염식은 하는 수없이 이특에게 돌아가 탄식하며 변고에 대비하라 경고했다. 2.4. 봉기
10월에 이특과 이류는 무리를 이끌고 적조(赤祖)에 주둔하고, 막사를 2개로 나누어 이특은 북영에, 이류는 동영에 머물렀다. 신염과 이필은 상관 나상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광한도위 증원(曾元), 아문 장현(張顯), 유병(劉幷) 등에게 30,000 보기를 주어 이특의 북영을 기습하게 했다. 나상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독호 전좌(田佐)를 보내 증원 등을 돕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기습을 예견하고 매복해 있던 이특은 증원의 병력 절반 이상이 북영에 진입했을 때, 복병을 일으켜 맹공을 가했다. 오히려 역으로 기습당한 서진군은 대파당했고, 증원, 전좌, 장현은 이특에게 참수되어 그 수급이 나상에게로 보내졌다. 나상은 부하 장수들에게 탄식했다."광한태수 신염이 내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이특이 형세를 타고 새처럼 날아가버렸구나. 이특의 기세는 나날이 높아만 갈 텐데 이제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가?"
한편, 관군을 크게 무찌른 6군의 유민들은 일제히 이특을 행진북대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특은 이류를 동독호, 행진동대장군, 형 이보를 표기장군, 이양을 효기장군으로 각각 임명한 뒤, 광한태수 신염이 지키는 광한을 쳤다. 나상이 이필과 비원을 보내 신염을 구원하니, 신염은 성 밖으로 뛰쳐나가 이특과 싸웠다가 패배하고 덕양(德陽)으로 달아나 형주자사 유홍(劉弘)에게 귀부했다. 이특은 광한을 점거하고 이초(李超)를 광한태수로 삼았다.
302년, 이특이 군대를 이끌고 나상이 있는 성도를 향해 진격했다. 나상은 평소 탐욕스럽고 잔인한 성격 탓에 백성들이 싫어하였는데, 이특이 약법3장을 발표하고 노역 면제, 백성 구휼 등의 정책을 펼쳐 백성들이 항복해왔다. 나상이 이특의 심복 중 하나인 염식에게 서신을 보내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염식은 그에게 간사한 말만 믿다가 일이 이렇게 된 것이라며 꾸짖는 답장을 보냈다. 이후로도 나상은 이특과 수 차례 싸웠지만 전패하여 성을 에워싸 방비를 강화하고 양(梁)과 녕(寧) 두 주에 구원을 요청했다. 나상을 위기에 몰아넣은 이특은 대도독, 진북대장군을 자칭하였다. 이특의 장남 이시(李始)는 무위장군, 차남 이탕(李蕩)은 진동장군, 막내 이웅은 전장군, 이함은 서이교위로 임명되고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관직을 받았다.
하간왕 사마옹의 명을 받고 이특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한 아박(衙博)이 재동에 주둔했다. 남이교위 이의(李毅)도 군사 5,000명을 보내 나상을 지원했고, 서진 조정에서 새로 임명한 광한태수 장정은 덕양, 독호 장구(張龜)는 번성에 각기 주둔해 성도를 포위 중인 이특을 압박했다. 이에 이특은 하는 수 없이 성도의 포위를 잠시 푼 뒤, 이탕, 이웅을 보내 아박을 쳤고, 자신은 직접 번성으로 가 장구를 공격했다. 이탕과 이웅은 양면(陽沔)에서 아박의 군대를 궤멸시킨 뒤 재동을 점령했고, 이특 또한 장구를 패퇴시켰다. 연이은 전투에서 승승장구하자 이특은 익주목, 대장군, 대도독, 양익2주제군사를 자칭했다.
8월, 이특이 아들 이탕과 함께 덕양의 장정을 쳤다. 장정은 험난한 지세의 의지하여 이특과 여러 날 동안 싸우니 결판이 나지 않았다. 당시 이특과 이탕은 군영을 2개로 나눠 주둔하고 있었는데, 장정이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우회하여 이특의 진영을 기습하자 이특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이특의 사마 나준(羅准)과 임도(任道)가 철수를 권했으나, 이특은 이탕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이라 믿고 듣지 않았다. 과연 이탕은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좁고 험난한 산길을 넘어 겨우 이특의 진영까지 도착했고, 부자가 힘을 합쳐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장정의 군대를 패주시킬 수 있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이특은 부현(涪縣)으로 돌아가 쉬고자 했지만, 이탕의 사마 왕행(王幸)의 간언을 듣고 계속 장정을 공격해 덕양마저 함락시켰다. 대패한 장정은 이특의 포위를 뚫고 도망치다 수륙 양로로 뒤쫓아온 이탕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이특은 장정의 시체를 그의 아들 장존(張存)에게 돌려주는 은혜를 베풀고 장수 건석(騫碩)을 덕양태수로 임명하였다.
이특이 서진의 관군을 토벌하고 있을 때, 이양, 이반(李攀), 임회(任回), 이공(李恭) 등은 비교(毘橋)에 주둔하며 나상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나상이 수 차례 비교로 군사를 보내 공격해왔지만 이양 등이 이를 모두 무찔렀다. 이특이 덕양을 평정하고 이류가 성도에 도착해 성 북쪽 주둔하자, 나상은 급박해져 부하 장흥(張興)을 이양 군영으로 보내 거짓 항복시켜 그 허실을 살피게 하였다. 장흥은 이양의 군대가 2,000명도 안된다 보고하였고, 보고를 받은 나상은 그날 밤에 야습할 계획을 꾸몄다.
이윽고 밤이 되자 나상은 10,000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양의 진영을 야습했다. 이양의 군대는 패하여 이반은 전사하고, 이양, 이공, 임회 등은 도망쳐 이류와 합류했다. 이류는 곧바로 반격을 개시하여 승리에 취해 있는 나상의 군대를 기습해 전멸시켰다. 이류의 맹공에 나상은 병력의 8~9할을 잃은 채 성도로 황급히 들어갔다. 때마침 이특이 서진의 양주자사 허웅의 토벌군까지 대파하니, 이특 세력의 위명은 더욱 빛났다.
2.5. 패배 후 죽음
303년 1월, 서진의 토벌군들을 성공적으로 격퇴시킨 이특은 군사를 거느리고 몰래 비수(郫水)를 건너 다시 성도 공략을 시작했다. 성도성 내의 소성(小城)을 지키던 촉군태수 서검이 성을 들어 항복하자, 이특은 입성하여 약탈을 엄금하고 연호를 건초(建初)로 개원했다. 이류가 서안(西岸)에 주둔하니, 태성(太城)에 있던 나상은 두려워 사신을 보내 화의의 뜻을 비쳤다. 이에 완전히 승리한 것이라 판단한 이특은 서서히 방심하기 시작했다. 동생 이류가 항복해온 성도의 백성들을 경계하라 조언했으나 한 귀로 듣고 흘렸다.익주종사 임명(任明)이 나상에게 말하였다.
"이특은 본래 흉악한 반역자라 군사를 풀어 각 마을을 침략하고 성도의 백성을 해쳤던 전적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교만하고 태만하여 아무런 방비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은 하늘이 그를 멸망시키려 함이 틀림없습니다. 성도 각 마을에 거사 날짜를 통보하고 안팎으로 이특을 협공하면 그를 무찌를 수 있을 겁니다."
나상은 그의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임명과 임예(任睿)를 이특 진영에 거짓 투항시켰다. 이때 마침 서진의 형주자사 종대(宗岱)와 건평태수 손부(孫阜)가 30,000 군사로 익주를 구원하러 오고 있어, 이특은 이탕, 이황(李璜), 임장(任臧) 보내 막게 했다. 임명은 이특의 신뢰를 얻은 후, 이탕의 군사가 빠져나가는 날짜를 나상에게 밀서로 알려, 그날을 기일로 잡았다. 나상은 성도 각 마을에 사람을 파견해 2월 10일, 약속된 날에 다함께 일어나 이특을 치자는 협의를 하고 때를 기다렸다.2월 10일, 나상이 군사를 일으켜 이특을 기습했다. 성도의 여러 마을들도 나상에게 호응하여 성도에 들어온 이특의 군영을 급습했고, 임명, 임예까지 군영 내부에서 큰 혼란을 일으켰다. 이특은 군사를 지휘하며 이틀 밤낮으로 성도성 내에서 혈전을 벌였지만 군사가 적어 이내 패배했다. 이특은 잠시 신번(新繁)으로 물러나 패잔병을 수습하고, 다시 성도를 쳤으나 나상에게 또 패하여 사로잡혔다. 나상은 사로잡은 이특, 이보, 이원을 모두 참수해 그 수급을 낙양에 보내고 그들의 시체는 불태웠다. 종대와 싸우던 이탕은 후방이 위험한 채로 계속 싸울 수 없었기에, 적조로 퇴각해 그곳을 지켰다. 유민들은 매우 놀라 두려워했으며 그의 지도자 자리는 동생 이류가 계승했다.
후에 304년 성한이 건국되고 아들 이웅이 그를 시조(始祖) 경황제(景皇帝)로 추존했다.
3. 여담
익주에 입촉했을 때 이특이 '이런 땅 뺏긴 유선이 한심하다'라고 깐 적이 있다 카더라. 근데 정작 성한은 나라를 더 말아먹었다. 촉한은 유비가 익주에 입촉한 것 기준으로 50년은 갔는데, 성한은 익주 들어온 지 40여 년 좀 넘고 망했으니...다만 성한의 초대 황제에 등극한 이웅은 제법 정치를 잘해서 과거 촉한의 신하였던 범장생을 승상에 올리며 30년 가까운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문젠 그의 사후 후손들이 골육상쟁을 벌여 얼마 못 가 망했다는 거지만. 한편, 성한 왕조는 과거 촉한에 향수가 있었던 익주 주민들을 회유하려 했는데, 성한 멸망 이후에도 기록들을 보면 촉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제갈량을 그리워하고, 강유가 촉을 회복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4.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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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남풍의 친척이다.
[2]
동진의
왕돈과는 시기도 이름도 비슷하지만 다른 사람이다.
[3]
음력을 따르므로 여기서 7월은 사실상 9월 초가을이다.
[4]
이민족의 후왕은 우두머리 즉, 그 족장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