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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B0082><colcolor=#ece5b6> 남연 초대 황제
모용덕 | 慕容德 |
|||
|
|||
출생 | 336년 | ||
전연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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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405년 (향년 69세) | ||
남연
광고 (現 산둥성 웨이팡시) |
|||
능묘 | 동양릉(東陽陵) | ||
재위기간 | 초대 국왕 | ||
398년 ~ 400년 | |||
초대 황제 | |||
400년 ~ 40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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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B0082><colcolor=#ece5b6> 성씨 | 모용(慕容) | |
휘 | 덕(德) → 비덕(備徳) | ||
부모 |
부황
태조 모후 공손부인 |
||
형제자매 | 19남 1녀 중 16남 | ||
배우자 | 계비 단씨 | ||
자녀 | 1녀 | ||
자 | 현명(玄明) | ||
신장 | 194cm | ||
작호 | 양공(梁公) → 범양왕(范陽王) → 연왕(燕王) | ||
묘호 | 세종(世宗) | ||
시호 | 헌무황제(獻武皇帝) | ||
연호 | 건평(建平, 400년 ~ 40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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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남연의 초대 황제.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무황제(獻武皇帝)였으며, 전연의 초대 황제인 태조 문명제 모용황과 공손씨(公孫氏)의 아들이었다.
2. 생애
기록에 따르면 20세가 되기도 전에 키가 8척 2촌[1]에 덩치도 크고 웅장했으며 이마 중앙엔 반달 모양의 겹주름이 있었다고 한다. 모용덕은 어려서부터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박식했고, 성격도 신중해 다재다능했다.354년, 형인 열조 경소제 모용준에 의해 양공(梁公)으로 봉해져 유주자사(幽州刺史), 좌위장군을 역임했다. 360년에 모용준의 뒤를 이어 어린 조카 모용위(헌문제)가 즉위하자 범양왕(范陽王)으로 개봉되었고, 관직도 위윤(魏尹)으로 승진했다.
367년 10월, 전진에서 5공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들 중 위공 부수(苻廋)가 섬성(陝城)을 들어 전연에 항복을 청했다. 이에 모용덕이 상소를 올렸다.
선황(先皇)께서 천명을 받고 그 뜻을 높이 받들어 천하를 평정하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그 뒤를 이으셨으니 그 뜻 또한 마땅히 계승하셔야만 합니다. 현재 부씨들은 골육상쟁하여 나라가 다섯 갈래로 분열되고, 그 반란군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가 전진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늘이 기회를 준 것입니다. 과거
오나라가
월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듯이, 하늘이 주는 기회를 받지 않으면 큰 재앙이 닥치게 됩니다. 태위 황보진(皇甫眞)에게 명을 내려 병주와 기주의 병력을 이끌고 하동군 포판(蒲阪)에 주둔하게 하시고, 오왕
모용수(慕容垂)에게 명을 내려 허창과 낙양의 병력을 이끌고 섬성의 포위를 풀어 부수를 구원하게 하십시오. 또, 태부 모용평(慕容評)에겐
업성의 금위군 2군을 거느리고 그들을 뒤따르게 하여,
삼보(三輔) 지역에 격문을 띄워 포상을 명확히 한다면 반드시 삼보의 무리들도 군사를 일으켜 우리에게 호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용덕의 숙부이자, 황제 모용위의 숙조부인 태부 모용평이 극구 반대하여 채택되지 못했다. 모용덕은 형인 오왕
모용수와 태부 황보진에게 서신을 보내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고 하소연했으나, 그들 또한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에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이때 모용수는 동생의 계책을 듣고 도량이 넓어진 것에 감탄하며,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는 여몽에 비견된다며 칭찬했다.369년 9월, 동진의 명장 환온이 제3차 북벌을 감행하여 전연을 침공하자 정남장군이 되어 총사령관인 형 모용수의 지휘 아래 북벌군을 막았다. 모용수는 모용덕과 유당(劉當)에게 15,000명의 기병을 주어 황하와 변수의 수로를 잇는 석문을 점거하게 했고, 예주자사 이규(李邽)에게 5,000명의 병력을 주어 북벌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버리도록 했다. 환온의 북벌군은 군량이 부족한데다가 기껏 만들어둔 수로까지 못쓰게 되어 배를 불태우고 남은 치중을 버린 뒤, 육로로 걸어서 철수했다. 환온군이 700여리 쯤 퇴각했을 때, 조용히 그 뒤를 쫓던 모용수와 모용덕은 4,000명의 기병으로 방심하던 환온군을 양읍(襄邑)에서 기습하여 30,000명을 참수했다.(양읍 전투)
369년 11월, 모용수가 숙부 모용평(慕容評)과 태후 가족혼씨(可足渾氏)에게 핍박을 받고, 적국인 전진으로 망명했다. 황제 모용위는 평소 모용수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위윤 모용덕과 거기종사중랑 고태(高泰) 등을 연루시켜 모두 면직시켰다. 가족혼 태후가 국정을 휘어잡고, 권신인 태부 모용평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쁘니, 뇌물 먹인 자들만이 관직에 진출하고, 재능이 있는 자들은 선발되지 못했다. 심지어 황제 모용위는 후궁이 4,000명이나 되었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10,000금(金)이 들었을 정도로 사치와 방탕이 매우 심했다. 신하와 백성들도 황제를 본받아 사치를 부리기 시작해, 전연은 급격히 쇠락했다.
370년 12월, 전진의 명군이었던 세조 선소제 부견이 전연을 멸망시키고, 그 황제인 모용위와 선비족 40,000여 호를 수도 장안으로 옮겼다. 모용덕은 장액(張掖) 태수로 임명되어 그곳에 부임했다.
383년 7월, 부견이 100만 대군을 일으켜 동진 정벌을 선언했다. 모용덕은 분위장군에 임명되어 관군장군 모용수를 따라 남정에 참여했고, 모용수의 군대는 동진의 운성(鄖城)을 공격해 점령했다. 11월, 비수대전에서 참패한 부견이 1,0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모용수에게로 갔다. 모용덕은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慕容寶), 관군행참군 조추(趙秋) 등과 함께 모용수에게 부견을 죽이라고 권했으나, 모용수는 부견에게 받은 은혜는 일단 갚아야 한다며 부견을 호위하여 장안으로 향했다. 이에 모용덕은 형 모용수를 떠나서 전 황제 모용위를 따라 형양(滎陽)으로 갔다. 형양에 도착하여 모용위에게 전연의 재건을 유세했지만 거부당했다.
384년 2월, 형 모용수가 부견을 속인 뒤 형양으로 와 전진에 반란을 일으킨 튀르크계 정령족(퇼레스)의 적빈과 합세해 후연을 건국했다. 모용덕은 모용수에게 합류하여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및 범양왕에 임명되었다. 이에 전진의 장액태수 부창(苻昌)은 늙은 모용덕의 어머니와 임신중이던 모용덕의 형수만 살려두고, 장액에 있는 모용덕의 형인 모용납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을 전부 붙잡아 죽였다. 모용수가 구도 업성을 공략할 때 모용덕은 방두(枋頭)를 공격해 점령하고는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형을 지원했다.
386년 정월, 모용수가 업을 차지하고 황제로 즉위하자 상서령에 임명되었다. 386년 8월, 모용수는 모용덕 등 황족과 장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했다. 모용덕과 고양왕 모용륭은 모용수의 명을 받아 동진의 제북태수 온상(溫詳)을 격파하고, 제북군을 취해 연주를 장악했다. 온상은 팽성으로 도망쳤고, 그 무리 30,000여 호가 후연에 항복했다.
387년 2월, 모용덕은 진류왕 모용소, 용양장군 장숭(張崇)과 함께 보•기 20,000명으로 모용륭과 합세하여 황하를 건너 축아현(祝阿縣) 옹구(甕口)에서 할거하던 태산태수 장원(張願)을 쳤다. 후연군이 두성(斗城)에 도착해 말의 안장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장원의 군대가 기습해왔다. 모용덕은 깜짝 놀라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황급히 퇴각했으나 모용륭은 남은 군사들를 정비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장원이 자신의 아들 장귀(張龜)에게 군사를 주어 후연군의 진영으로 돌격하게 하자, 모용륭은 장수 왕말(王末)을 보내 막고 장귀를 참수했다. 모용덕은 1리 정도 후퇴하다가 이내 정신을 되찾고 돌아와서 모용륭과 합류해 남은 장원의 군사들을 대파했다. 후연군이 역성(歷城)까지 점령하니, 장원은 옹구를 버리고 삼포구(三布口)로 도망쳤으며 주변 군현들이 후연에 항복해왔다.
389년 5월, 조왕 모용린과 함께 진군해 독자적으로 행동하던 하눌(賀訥)[2]을 격파하고 물근산(勿根山)에서 하눌의 항복을 받아냈다.
393년 4월, 모용수가 태자 모용보를 대선우에 봉할 때 모용덕을 사도에 임명했다.
394년, 모용수가 서연 정벌을 선포하자, 모든 대신들이 불가능하다며 말렸으나 모용덕만이 찬성했다. 모용수는 아우 모용덕을 매우 신뢰했기에 서연 토벌군을 편성해 서연을 쳤다. 서연군은 대패하여 도읍인 장자가 함락되었고, 서연의 황제인 모용영은 후연군에게 잡혀 참수당했다.
395년 11월, 모용수는 선비 탁발부가 다시 일으킨 북위에 대한 정벌을 결심했다. 태자 모용보를 대장으로 삼아 요서왕 모용농, 조왕 모용린에게 80,000명의 대군을 주어 오원(五原)에서부터 치고 올라가게 했고, 범양왕 모용덕, 진류왕 모용소에겐 별도로 18,000여 명의 군사를 주어 그 뒤를 잇도록 했다. 그러나 참합피 전투에서 후연군이 크게 패하면서 모용소가 전사하고, 노양왕 모용왜노(慕容倭奴), 계림왕 모용도성(慕容道成), 제음공 모용윤국(慕容尹國) 등 문무 군신 수천 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다. 태조 도무제 탁발규는 이들 중 쓸모있다고 판단되는 대군태수 가윤(賈閏), 표기장사 가이, 태사랑 조숭(晁崇)만 등용하고, 나머진 모두 땅에 생매장해 죽였다.
396년 3월, 모용수가 북위를 정벌하기 위해 친정에 나서면서 모용덕에게 도읍인 중산(中山)을 지키도록 했다. 후연군은 참합피에서 참패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지만, 황제 모용수와 고양왕 모용융의 눈부신 지휘로 북위의 진류공 탁발건(拓跋建)을 격파하고, 계속 북쪽으로 진격했다. 후연군이 마침내 참합피의 전장을 지나는데 그곳에 해골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모용수는 제사를 지내 과거의 전사자들을 위로하고자 했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던 중 모용수는 그 날의 수치와 분노가 끌어올라와 갑자기 피롤 토하고 쓰러졌다. 노령의 모용수는 이내 병에 걸렸고, 후연군은 어쩔 수 없이 평성(平城)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4월, 모용수가 평성에서 붕어하고 모용수의 4남 모용보(열종 혜민제)가 즉위하자, 모용덕은 도독기연청서형예6주제군사, 거기대장군, 기주목에 임명되어 여성의 방위를 맡았다.
396년 11월, 황실 내분 등으로 인해 쇠약해진 후연은 북위에게 도성인 중산, 위군 업성, 장낙군 신도(信都)성을 제외한 전 국토를 유린당했다. 중산은 당연히 황제 모용보가 지켰고, 업은 모용덕이, 신도는 기주자사 의도왕 모용봉이 지키고 있었다. 도무제 탁발규는 50,000명의 기병을 나누어 동평공 탁발의에겐 업을 공략하게 하고, 관군장군 왕건(王建), 좌장군 이율(李栗)에겐 신도를 공략하도록 했다. 그리고 본인은 본대를 이끌고 후연의 도읍인 중산을 쳤다. 탁발의가 업으로 가던 중, 하눌의 동생인 요서공 하로(賀盧)[3]가 후연을 배신하고, 기병 20,000명을 끌고와 탁발의의 군대와 합류하여 함께 업성을 쳤다. 모용덕은 참군 유조(劉薻)를 후진으로 보내 요흥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답이 오지 않았다.
397년 정월, 북위의 사마 정건(丁建)을 포섭해 하로와 탁발의의 사이를 이간질시켜 내분을 유도했다. 이간책은 성공적이어서 하로의 군대는 탁발의와 불화해 이내 물러났고, 모용덕은 장수를 보내 홀로 남은 탁발의를 물리쳤다.
397년 2월, 백사(柏肆) 전투에서 북위군에 패배한 황제 모용보가 수도 중산(中山)을 버리고 용성(龍城)[4]으로 도주하자 후연은 남북으로 세력권이 갈리게 되었다. 모용보는 도망치면서 수도 중산의 수비를 개봉공 모용상(慕容詳)에게 맡겼는데, 모용상은 정남장군 고녹관기(庫傉官驥)를 죽이고, 스스로 북위를 물리칠 수 있다고 여겨 황제에 즉위했다. 이에 모용덕도 따라서 존호를 칭하려다가 얼마 전 중산에서 도망쳐온 모용달(慕容達)로부터 황제 모용보가 아직 살아있음을 듣고 그만두었다. 모용상은 얼마 못가 조왕 모용린에게 살해되었고, 모용상을 죽인 후 존호를 사용한 모용린 또한 11월에 북위군에게 패망하면서 중산이 완전히 함락되었다. 황제 모용보는 홍려 노수(魯邃)를 보내 모용덕을 승상, 기주목으로 삼으니, 모용덕은 남쪽에서 독립할 뜻을 품고, 자주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398년 정월, 중산에서 도망쳐 나온 조왕 모용린이 모용덕에게로 가 업을 버리고 활대(滑台)에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자고 권했다. 때마침 활대를 지키던 모양왕 모용화(慕容和)도 서신을 보내 모용덕을 맞이하려 하니, 모용덕은 40,000여 호와 27,000여 개의 수레를 거느리고 남하를 시작해, 그날 밤 얼어있던 황하를 건넜다.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는 이를 서둘러 추격했지만 추격군이 황하에 도착했을 땐 얼음이 어느정도 녹아 건너기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추격을 중지했다. 이윽고 무사히 활대에 도착한 모용덕은 황제를 칭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치고 연왕(燕王)만을 칭하면서 남연을 건국했고, 백관을 설치했다. 조왕 모용린을 사공으로 임명해 상서령을 겸하게 했으며, 모용법(慕容法)은 중군장군, 모여발(慕輿拔)은 상서좌복야, 정통(丁通)은 우복야로 각각 임명했다. 텅 빈 업성은 북위군이 들어가 점거했으며, 모용린은 이후 모반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용덕에게 처형당했다.
398년 4월, 북쪽의 용성에서 상서 난한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황제 모용보는 숙부인 모용덕에게 가기 위해 종황문려 조사(趙奢)를 남연에 보내어 자신을 영접하라고 전했다. 이미 독립할 뜻을 품고 존호를 사용하고 있었던 모용덕은 신하들을 불러모아 의논했다.
"경들이 예전에 국가 대계를 위해 내게 존호를 사용하고 정사를 돌볼 것을 권했다. 내가 이를 수락한 것은 국군(國君)께서 밖으로 떠돌아 백성들은 주군(主君)이 없는 상태가 되어 뭇 사람들을 어루만져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시고 황상을 다시 되돌려보내니, 나는 지금 예를 갖추어 폐하를 맞이하고 행궐 앞에서 사죄하고자 한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러자 화문시랑 장화(張華)를 비롯한 대신들이 반대하여 취소하고, 도리어 모용보를 도모하기로 결론을 냈다. 모여호(慕輿護)가 자청하여 장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여양에서 모용보를 맞이하는 척 살해하기로 하니, 모용덕은 눈물을 흘리며 그리 하도록 했다. 하지만 모용보는 남하하던 중 우연히 만난 나무꾼으로부터 모용덕이 제멋대로 왕을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다시 북쪽으로 도망쳤다. 모여호는 모용보를 만나지도 못한 채 다시 되돌아왔다. 모용덕은 사신으로 왔던 조사가 법과 제도에 능통함을 알고 그를 등용하려 했지만, 조사는 자신을
신포서, 모용덕을
왕망에 비유해 귀순하길 거부했다. 모용덕은 대노하여 조사를 죽였다.398년 8월, 남연의 장사 이변(李辯)이 동진과 내통하여 동진의 영삭장군 등계방(鄧啓方)과 남양태수 여구선(閭丘羨)이 20,000명의 군사로 남연을 침공해왔다. 모용법과 모용화가 관성(管城)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399년 3월, 전진에서 귀순해 온 태종 고황제 부등의 동생 관군장군 부광(苻廣)이 걸활대(乞活堡)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부광은 진왕(秦王)을 자칭하고, 모용덕의 조카인 북지왕 모용종(慕容鍾)을 격파했다. 당시 활대는 땅이 작아 성이 10개도 안되었고, 남연의 군대도 수만 명에 불과한데, 여기에 모용종까지 패배하자 몇몇 이들이 모용덕을 배신하고 부광에게 붙었다. 모용덕은 모용화에게 활대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64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친히 출정해 부광의 난을 진압한 뒤 부광을 처형했다.
이때 이변은 모용덕이 밖에 나가있는 틈을 타 모용화에게 반란을 일으키자고 권했지만, 모용화가 따르지 않자 그를 죽이고 활대를 들어 북위에 바쳤다. 북위는 행대상서 화발(和跋)를 파견해 활대를 접수했다. 모용덕이 계양왕 모용진(慕容鎭)을 보내 활대를 공격했지만 격파되어 포로로 1,000여 명이 잡혔다. 하지만 활대에 있었던 남연의 우위장군 모용운(慕容雲)이 남은 병사와 장수들을 수습해 배신한 이변을 죽이고, 활대를 빠져나와 모용덕에게 갔다. 모용덕은 활대를 되찾으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그만두고 남하해 동진군을 쫓아내고 연주와 서주를 점거한 후 광고(廣固)를 새로운 도읍으로 정했다.
400년, 칭제건원하여 건평(建平)으로 개원하고, 피휘해야하는 관리와 백성들의 불편을 덜어주고자 모용비덕(慕容備徳)으로 개명했다.
402년, 두홍(杜弘)을 먼 서쪽의 장액에 보내 가족들을 모셔오도록 했다. 물론, 그들은 이미 태수 부창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두홍이 이 잡듯이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두홍은 아무런 결실도 없이 돌아오던 중 도적을 만나 피살되었다. 10월에 환현(桓玄)의 난을 피해 동진의 기주자사 유궤(劉軌)와 양성태수 사마휴지(司馬休之), 유뢰지의 아들 유경선(劉敬宣)이 남연으로 귀순했다.
403년 4월, 장액태수 시절 부하였던 조융(趙融)이 와서 모용비덕에게 가족들이 부창에게 살해당했음을 알렸다. 모용비덕은 이를 듣자마자 울부짓고 통곡하다가 쓰러졌다. 그러나 하필이면 사예교위 모용달이 이때 반란을 일으켜 궁문을 쳤고, 전중수 후적미(侯赤眉)가 궁궐 내에서 호응했다. 중황문 손진(孫進)은 쓰러져있는 황제 모용비덕을 부축해 궁궐의 벽을 넘어서 빠져나와 자신의 집에 모셨다. 원외랑 단굉(段宏)이 황궁 밖에서 군사들을 정비해 돌입할 준비를 마쳤고, 얼마 안지나 깨어난 모용비덕이 군사를 지휘해 역적 후적미를 참살했다. 반란에 실패한 모용달은 북위로 망명했다.(모용달의 난) 뒤이어 왕시가 태산군(泰山郡)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모용진을 보내 진압했다.
404년 3월, 동진에서 항복해온 유경선이 고아지(高雅之) 등과 모용비덕을 살해하고, 사마휴지를 옹립할 계획을 모의했다. 유경선이 고아지의 반대를 무시하고 같이 온 유궤도 참여시키려고 했으나, 유궤는 모용비덕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얼마 안 가 모의가 누설되어 유궤는 바로 알리지 않았다는 죄로 처형당했고, 고아지는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도망치던 유경선과 사마휴지는 마침 환현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동진으로 귀환했다. 이후 모용종과 함께 동진 정벌을 계획했지만 모용비덕이 병에 걸려 누우면서 무산되었다.
405년 4월, 모용비덕은 형 모용납의 아들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 장안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형의 아들 모용초를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이 비수대전에 참전하러 떠나기 전 어머니 공손씨에게 주고 갔던 금장도를 모용초가 증표삼아 꺼내서 보여주자 모용비덕은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통곡했다. 모용비덕은 자신의 조카인 모용초를 북해왕, 시중, 사예교위, 표기대장군, 개부로 임명하고는 10월에 대신들을 불러모아 자신에겐 아들이 없으니 모용초를 태자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얼마 뒤, 모용비덕은 70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그의 뒤를 이은 모용초는 도굴을 염려해 모용비덕의 관을 10개 이상 만들어서 야밤에 4개의 문으로 나눠 보내 각각 따로 산골짜기에 몰래 묻었다. 이후 동양릉(東陽陵)에 빈 관을 매장하고는 모용비덕의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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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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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 |||||
사마욱 · 사마요 | 사마덕종 · 사마덕문 | |||||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 열전(列傳) ]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 재기(戴記) ]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