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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부 慕容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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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욕혼 吐谷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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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07731><colcolor=#ece5b6> 토욕혼 3대 군주
모용엽연 | 慕容葉延 |
|||
출생 | 309년 | ||
진
옹주
농서군 부한현 (現 간쑤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 린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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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351년 | ||
토욕혼
사주 백란 (現 칭하이성 궈뤄 티베트족 자치주 마친현)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3대 토욕혼왕 | ||
329년 ~ 35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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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07731><colcolor=#ece5b6> 성씨 | 모용(慕容) → 토욕혼(吐谷渾) | |
휘 | 엽연(葉延) | ||
자 | 엽연(葉延) | ||
부친 | 모용토연 | ||
아들 | 벽해(辟奚) | ||
작호 | 토욕혼왕(吐谷渾王) | ||
묘호 | 불명 | ||
시호 |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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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욕혼의 제3대 군주로 모용토연의 장남.2. 생애
329년, 모용토연이 강족 수령인 강총(姜聰)에게 암살당하자 그의 뒤를 이어 토욕혼 부락을 이끌었다. 모용토연이 죽기 직전에 흘발니(紇拔泥)를 불러, 모용엽연을 보필하고 백란(白蘭)을 보위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흘발니는 그 유언을 따랐다.엽연은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 한번은 어머니가 병으로 다섯 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자, 엽연도 음식을 먹지 않았다. 또, 그가 10살이 되었을 때는 풀을 엮어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고, 그것을 가리켜 "강총(姜聰)"이라 이름 붙이고 이를 울면서 활로 쏘았다. 이때 하늘을 향해 울부짖다가 강총을 맞히지 못하면 눈을 감지 못했고, 크게 외치며 화살을 맞추면 그제야 멈추었다. 보다못한 엽연의 어머니가 그에게 말하기를,
"역적 강총(姜聰)과 그의 장수들은 이미 토벌되어 죽었는데, 너는 왜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느냐?"
라고 묻자, 엽연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풀 인형을 쏜다고 해서 선친의 원수를 갚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는 것은 그 깊은 원한을 마음에 남기기 위함입니다."
엽연은 장성하여서 침착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사주(沙洲)에 모극천총부(慕克川總部)를 세우고, 사마, 장사, 장군 등의 관제 개편을 진행하는 등 단순한 이민족 부락에서 벗어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그는 천지의 조화와 황제의 연대기를 묻는 것을 좋아하였다. 한번은 그의 사마 박락린(薄洛鄰)이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저희는 배우지 못해 잘 모르겠습니다. 삼왕(三王)의 아버지가 누구이고, 오제(五帝)는 어느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라 말하자, 엽연은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복희(羲皇) 이래로 부명(符命)과 천문은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그 기록은 명확하다. 그럼에도 그대들은 벽을 보고 서 있는 것처럼 무지하다니, 어찌 그리도 어리석은가! 속담에 이르기를, 여름 벌레는 겨울 얼음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헛된 것이 아니로다."
이후 엽연은 다시 말했다."나는 공손(公孫)의 자손이다. 예법에 따르면 공손의 자손은 그 조부(祖父)의 자(字)를 성씨로 삼을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토욕혼(吐谷渾)’을 성씨로 삼겠다. 또, 나의 시조는 창려(昌黎)에서 시작하여 이곳에서 번성하였으니, 그때부터 우리 국호를 ‘토욕혼(吐谷渾)’이라 하여 조상을 존경하는 의미로 삼겠다."
이리하여 엽연은 국호를 '토욕혼(吐谷渾)'으로 정하고, 성씨도 '모용(慕容)'에서 '토욕혼(吐谷渾)'으로 고쳤다.351년에 엽연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벽해가 토욕혼의 왕위를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