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12:07:36

유이(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f> 1권 「전조록일(前趙錄一)」 2권 「전조록이(前趙錄二)」 3권 「전조록삼(前趙錄三)」 4권 「전조록사(前趙錄四)」
유연 · 유화 유총 유총 유총 · 유찬
<rowcolor=#fff> 5권 「전조록오(前趙錄五)」 6권 「전조록육(前趙錄六)」 7권 「전조록칠(前趙錄七)」 8권 「전조록팔(前趙錄八)」
유요 유요 유요 유선 · 유성 · 유익 · 유윤
<rowcolor=#fff> 9권 「전조록구(前趙錄九)」 10권 「전조록십(前趙錄十)」 11권 「후조록일(後趙錄一)」 12권 「후조록이(後趙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석륵 석륵
<rowcolor=#fff> 13권 「후조록삼(後趙錄三)」 14권 「후조록사(後趙錄四)」 15권 「후조록오(後趙錄五)」 16권 「후조록육(後趙錄六)」
석륵 석홍 석호 석호
<rowcolor=#fff> 17권 「후조록칠(後趙錄七)」 18권 「후조록팔(後趙錄八)」 19권 「후조록구(後趙錄九)」 20권 「후조록십(後趙錄十)」
석호 석세 · 석준 · 석감(鑒) 석민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21권 「후조록십일(後趙錄十一)」 22권 「후조록십이(後趙錄十二)」 23권 「전연록일(前燕錄一)」 24권 「전연록이(前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외 모용황
<rowcolor=#fff> 25권 「전연록삼(前燕錄三)」 26권 「전연록사(前燕錄四)」 27권 「전연록오(前燕錄五)」 28권 「전연록육(前燕錄六)」
모용황 모용준 모용준 모용위
<rowcolor=#fff> 29권 -2l 「전연록칠(前燕錄七)」 30권 「전연록팔(前燕錄八)」 31권 「전연록구(前燕錄九)」 32권 「전연록십(前燕錄十)」
모용위 토욕혼· 모용한· 모용인· 모용각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33권 「전진록일(前秦錄一)」 34권 「전진록이(前秦錄二)」 35권 「전진록삼(前秦錄三)」 36권 「전진록사(前秦錄四)」
부홍 부건 부생 부견
<rowcolor=#fff> 37권 「전진록오(前秦錄五)」 38권 「전진록육(前秦錄六)」 39권 「전진록칠(前秦錄七)」 40권 「전진록팔(前秦錄八)」
부견 부견 부비 부등
<rowcolor=#fff> 41권 「전진록구(前秦錄九)」 42권 「전진록십(前秦錄十)」 43권 「후연록일(後燕錄一)」 44권 「후연록이(後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수 모용수
<rowcolor=#fff> 45권 「후연록삼(後燕錄三)」 46권 「후연록사(後燕錄四)」 47권 「후연록오(後燕錄五)」 48권 「후연록육(後燕錄六)」
모용수 모용보 모용성 모용희
<rowcolor=#fff> 49권 「후연록칠(後燕錄七)」 50권 「후연록팔(後燕錄八)」 51권 「후연록구(後燕錄九)」 52권 「후연록십(後燕錄十)」
모용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53권 「후진록일(後秦錄一)」 54권 「후진록이(後秦錄二)」 55권 「후진록삼(後秦錄三)」 56권 「후진록사(後秦錄四)」
요익중 요양 요장 요흥
<rowcolor=#fff> 57권 「후진록오(後秦錄五)」 58권 「후진록육(後秦錄六)」 59권 「후진록칠(後秦錄七)」 60권 「후진록팔(後秦錄八)」
요흥 요흥 요홍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61권 「후진록구(後秦錄九)」 62권 「후진록십(後秦錄十)」 63권 「남연록일(南燕錄一)」 64권 「남연록이(南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덕 모용초
<rowcolor=#fff> 65권 「남연록삼(南燕錄三)」 66권 「하록일(夏錄一)」 67권 「하록이(夏錄二)」 68권 「하록삼(夏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혁련발발 혁련창 혁련정
<rowcolor=#fff> 69권 「하록사(夏錄四)」 70권 「전량록일(前涼錄一)」 71권 「전량록이(前涼錄二)」 72권 「전량록삼(前涼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장궤 장실 장준
<rowcolor=#fff> 73권 「전량록사(前涼錄四)」 74권 「전량록오(前涼錄五)」 75권 「전량록육(前涼錄六)」 76권 「촉록일(蜀錄一)」
장중화 · 장령요 · 장조 장현정 · 장천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특
<rowcolor=#fff> 77권 「촉록이(蜀錄二)」 78권 「촉록삼(蜀錄三)」 79권 「촉록사(蜀錄四)」 80권 「촉록오(蜀錄五)」
이류 · 이웅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81권 「후량록일(後涼錄一)」 82권 「후량록이(後涼錄二)」 83권 「후량록삼(後涼錄三)」 84권 「후량록사(後涼錄四)」
여광 여소 · 여찬 여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85권 「서진록일(西秦錄一)」 86권 「서진록이(西秦錄二)」 87권 「서진록삼(西秦錄三)」 88권 「남량록일(南涼錄一)」
걸복국인 · 걸복건귀 걸복치반 · 걸복모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rowcolor=#fff> 89권 「남량록이(南涼錄二)」 90권 「남량록삼(南涼錄三)」 91권 「서량록일(西涼錄一)」 92권 「서량록이(西涼錄二)」
독발녹단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고 이흠
<rowcolor=#fff> 93권 「서량록삼(西涼錄三)」 94권 「북량록일(北涼錄一)」 95권 「북량록이(北涼錄二)」 96권 「북량록삼(北涼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저거몽손 저거무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97권 「북량록사(北涼錄四)」 98권 「북연록일(北燕錄一)」 99권 「북연록이(北燕錄二)」 100권 「북연록삼(北燕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풍발 풍홍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colbgcolor=#7C283F><colcolor=#fff> 하간왕(河間王)
劉易 | 유이
시호 없음
작위 하간왕(河間王)
(劉)
(易)
불명
생몰 ? ~ 316년 3월
출신 병주(幷州) 신흥군(新興郡)
부황 열종 소무황제(烈宗 昭武帝)
형제자매 20남 중 장남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전조의 황족. 소무제 유총의 서장자. 가끔 "유역"으로 음차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이"가 옳은 발음이다.[1]

2. 생애

광흥 원년(310년) 7월, 초왕 유총이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아들들을 왕작에 봉했는데, 이때 서장자인 유이도 하간왕(河間王)에 책봉되었다.

가평 2년(312년) 6월, 소무제 유총이 유이를 거기대장군, 팽성왕 유익을 위장군으로 삼아, 함께 황궁의 금군을 통솔케 하고 궁중에서 숙영하도록 하였다. 또, 고평왕 유괴(劉悝)를 정남장군에 임명해 과거 도읍이었던 이석(離石)에 주둔시켰고, 제남왕 유기(劉驥)를 정서장군에 임명해 도읍 평양 근교에 서평성(西平城)을 축성케 하였으며, 위왕 유조(劉操)를 정동장군에 임명해 평양 북서쪽에 위치한 포자(蒲子)를 진수케 하였다. 이로써 유총은 황자들에게 각기 군권을 쥐어주어 권력을 확고히 다지고자 하였다.

가평 3년(313년) 3월, 정위 진원달이 소무제 유총에게 세 번째 황후인 유아(劉娥)를 위해 황의전(鷬儀殿)을 축조하는 것에 대해 간언했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태재를 지내고 있던 유이는 대사도 임의(任顗), 광록대부 주기(朱紀), 태위 범륭 등과 더불어 소무제 유총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다행히 유아가 친필로 진원달을 용서해달라는 탄원서를 써줌으로써 소무제 유총이 진정하였고, 덕분에 진원달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가평 3년(313년) 7월, 서진의 병주(幷州)자사 유곤이 쳐들어와 남곡(藍谷)을 점령하고 감군 한거(韓據)에게 서평성(西平城) 공격을 명했으며, 대공 탁발의로도 탁발보근을 보내 북굴(北屈)에 주둔하여 유곤을 원조하였다. 이에 소무제 유총은 대장군 유찬을 파견해 남곡의 유곤을 치게 하고, 유이에게 표기대장군을 더해 여러 장수들과 함께 탁발보근을 막게 하였으며, 탕진장군 난양(蘭揚) 등은 서평성으로 보내 수비를 돕게 하였다. 유곤이 한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군대를 거두어 철수하니, 소무제 유총은 여러 군대들에게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병주 공략의 계책을 생각해내게 하였다.

건원 2년(316년) 2월, 소무제 유총의 총애를 받는 환관 왕침(王沈)이 자신을 무시하는 조정의 대신들을 모함하였다. 유총이 왕침의 말만 믿고 그들을 모두 붙잡아 참수하자, 유이는 어사대부 진원달, 대장군·발해왕 유부, 금자광록대부 왕연과 대궐로 나와 표문을 올려 간하였다.
"신(臣)이 듣기로는, 선한 사람은 하늘과 땅의 규율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과거 문왕 주나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고, 환제 영제는 환관들의 말만 듣다가 한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자고로 명왕(明王)의 시대라 할지라도 환관이 정사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것은 무제, 순제, 안제의 고사만 보아도 족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왕침 등은 상백(常伯)의 지위에 있으면서 대신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어, 궁 밖으로 세를 떨쳐 사사로운 감정으로 정사에 임하고, 폐하께 빌붙어 아첨함으로써 조정과 임금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또, 형벌을 제멋대로 내리고 뇌물이 아니면 관리의 천거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나라의 왕공(王公)들도 이들을 보면 깜짝 놀라며, 대신과 재상들은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합니다. 이는 폐하께 절개를 지키던 상서 왕염(王琰) 등의 충직한 신하들이 그 간사한 것들에 의해 극형에 처해져 죽은 것만 봐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서너 차례 더 살피지 않으시고 외람되게 그들을 주육하셨으니, 신들은 그 원한과 고통이 구천에 사무치고 천하가 비통해할까 두렵습니다. 왕침 등은 모두 칼과 톱을 휘두르는 배은망덕한 무리로, 그들을 향한 총애가 어찌 선비와 군자에게 베푸는 은혜보다 더 많은 보답이 나오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을 가까이 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귀중한 임무를 맡기십니까? 과거 제환공 역아로 문란해졌고, 효회황제 황호로 멸망하였는데, 이는 모두 먼 과거의 일만이 아닙니다. 지금 장안의 진(晉)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고, 파촉의 이웅 성(成)을 세웠으며, 석륵과 조억(曹嶷)은 자립할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시국이 이와 같을진대, 왕침과 같은 자를 요직에 앉힌다면 그 누가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부디 왕침 등을 면직시키고 그들을 정죄(定罪)토록 하소서."
유총은 유이의 상소문을 받아서 왕침 등에게 보이며 말했다.
"내 아들이 진원달에게 이끌려 결국 바보가 되었구려."
왕침 등은 유총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 흘리며 말했다.
"신을 비롯한 소인들은 무지몽매함에도 폐하께서 발탁해주신 덕에 궁각(宮閣)의 청소라도 할 수 있었으나, 왕공과 조정의 신하들이 저희를 원수 보듯이 미워하고 또, 폐하를 심히 원망하나이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대조(大造)의 은혜를 거두시고, 신들의 고깃덩어리를 가마솥에 넣어 황조(皇朝) 위아래의 화목함을 도모하소서."
그러자 유총은
"저들이 미친 소리를 계속 늘어놓을 뿐인데, 내 어찌 경들을 원망하겠나!"
라 탄식하였다. 그때 곁에 있던 차남 유찬이 왕침의 충정을 칭찬하니, 유총은 크게 흡족해하며 이를 이유로 왕침 등을 모두 열후(列侯)에 봉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유이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왕침을 열후에 봉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상소문 쓰고 다시 대궐로 나와 유총에게 간곡히 간하였다. 그러나 유총은 몹시 분노하여 유이의 손에서 상소문을 낚아채 보란 듯이 손수 찢어 버렸다.

건원 2년(316년) 3월, 유이는 아버지의 행실에 분노와 원한이 사무친 나머지 분사하였다. 그동안 유이의 상소문을 도왔던 진원달은 그의 사망에 절망하여 더이상 직언할 생각을 포기하고 자택으로 돌아가 자결하였다.

3. 둘러보기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애초에 "易"자가 이름으로 쓰일 때는 "바꿀 역"보다 경사스럽다는 뜻도 내포하는 "쉬울 이"의 의미로 훨씬 자주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