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19:23:08

유윤(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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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fff> 남양왕(南陽王)
劉胤 | 유윤
시호 없음
작위 영안왕(永安王) → 남양왕(南陽王)
(劉)
(胤)
의손(義孫)
생몰 ? ~ 329년 9월
출신 병주(幷州) 신흥군(新興郡)
부모 부황 유요
모후 원도황후 복씨
형제자매 9남 1녀 중 차남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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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조의 황족. 유요가 중산왕이던 시절 왕비였던 복씨(卜氏) 소생의 차남. 유검(劉儉)의 친동생. 말제 유희의 이복형. 유요 사후 후조를 상대했으나, 장안을 버린다는 중대한 실책을 저질러 관중 지역을 상실하고, 석호와 단 한 번의 전투로 패망하였다.

2. 생애

유윤은 얼굴과 자태가 아름다웠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있었다. 그가 10살이 되었을 때 신장이 7척 5촌에 달했고, 눈썹과 살쩍은 마치 그림 그린 듯이 또렷하였는데, 소무제 유총이 그를 눈여겨 보고 유요에게 말했다.
"이 아이의 신기(神氣)는 의진(義真: 유검의 자)에 비할 수 없구나! 응당 이 아이를 경(卿)의 적자로 삼아야 한다. 경은 문왕 백읍고를 폐하고 무왕을 세운 뜻을 잘 헤아리도록 하라."
유요가 답했다.
"신(臣)의 번국은 사직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는 일만 가능하다면 대를 잇기에 족하니, 구태여 장유(長幼)의 인륜을 어지럽힐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총이 다시 말했다.
"경의 공로는 천지와 맞닿아 있고, 그 번국은 100개의 성(城)을 겸하고 있으니, 경은 곧 오늘날의 태사(太師)로서 전정(專征)의 임무를 수여받은 존재와 마찬가지일세. 5후9백(五侯九伯)이란 바로 전정의 임무를 맡은 자이거늘, 경의 자손이 어찌 여타 번국들의 후계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의진의 능력으로는 태백의 거센 바람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나, 그대가 정 근심스럽다면 내 그에게 나라 하나를 따로 봉해주겠노라."
이로써 장남 유검은 임해왕(臨海王)에 따로 봉해지고, 차남 유윤이 유요의 세자가 되었다. 이후 장성한 유윤은 키가 8척 3촌이나 되었고, 용맹한데다 민첩함은 바람 같았으며,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난 능력을 선보였다. 유요 역시 이런 유윤의 재능을 인정하고 중히 여겼다.

인가 3년(318년) 8월, 대장군 근준이 난을 일으켜 유총의 자손들을 몰살하자, 유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흉노의 흑익욱국부(黑匿郁鞠部)로 도망쳐 스스로 노예가 됨으로써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유요가 근준의 반란을 진압하고 황제로 즉위했음에도 유윤은 계속 노예로 지내면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유요는 당연히 유윤이 근준에게 죽었을 것이라 생각해, 3남 유희를 태자로 삼았다.

광초 6년(323년) 8월, 유요가 진안의 반란을 토벌하자, 유윤은 그제서야 자신의 정체를 흑익욱국부 대인(大人)에게 말했다. 흑익욱국의 대인은 크게 놀라 그에게 의복과 말을 바치고,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유윤을 전조의 수도인 장안(長安)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유요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을 보고 기쁜 마음에 소리 없이 울었고, 흑익욱국부 대인을 사지절, 산기상시, 충의대장군, 좌현왕에 임명하였다.

유윤은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노예로 지내면서 많은 풍파에 시달렸으나, 그 풍채와 골격은 쇠함이 없이 준수하였다. 유능한 유윤과 이미 태자로 삼은 유희를 두고 고민에 빠진 유요가 조정의 대신들을 모아 말했다.
"의손(義孫)은 심한 추위에도 시들지 않고, 진흙에 담가도 물들지 않는 자이다. 이미 의광(義光: 유희의 자)을 태자로 세웠으나, 나이도 어린데다 성정은 점잖고 신중해 아마 이번 생에 태자로 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며, 위로는 사직을 지키지 못 하고 아래로는 의광이 사랑받지 못 할까 두렵도다. 그에 반해 의손은 연장자인데다 명덕(明德)이 있고 또, 원래 세자를 지내기도 하였다. 짐은 멀리는 문왕의 뜻을 좇고, 가까이로는 광무제의 뜻을 좇아, 종묘에 태산 같은 안정을 주고, 의광에게 끝없는 복을 선사하고 싶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태부 호연안(呼延晏) 등이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폐하께서 멀리 주나라 한나라를 따르려 하시는 것은 국가를 위한 무궁한 계책이니, 어찌 신(臣)들이 그것에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종묘와 천하를 위한 경축일 뿐입니다."
이때 좌광록대부 복태(卜泰), 태자태부 한광(韓廣)이 진언했다.
"만약 폐하께서 진실로 폐립이 옳다 여기셨다면 해와 달의 밝음처럼 명확히 결단을 내리셨지, 저희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고 계신다면 저희의 이동(異同)의 말을 듣고 태자를 져버리시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과거 주나라의 문왕은 세자를 세우기 전에 무왕을 후사로 삼으려 했으니, 이는 성스러운 조정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것이 맞습니다. 하나, 광무제는 황후에 대한 총애가 떨어져 태자의 폐립을 결정하였는데, 어찌 이를 두고 성스러운 조정의 모범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광무제가 동해왕의 통치의 기회를 빼앗을 뿐이니, 그가 어찌 명제에 미치지 못 했을 것이란 보장이 있습니까! 황자 유윤은 문무의 재략을 겸비하고, 그 도량은 넓고 원대하여 주발에 비할만 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태자의 효우(孝友)와 인자함은 국가를 통치하기에 충분하며, 필시 태평성대를 여는 현명한 주군이 될 것입니다. 하물며 태자궁은 육합(六合)의 인간과 신령이 연결되는 곳이니, 폐하께서 이를 가벼이 여기셔서는 아니 됩니다. 폐하께서 그래도 폐립을 원하신다면 저희에게는 죽음 뿐인 즉, 감히 조서를 받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요는 깊은 고민에 빠져 묵묵부답하였다. 그때 유윤이 어전 앞으로 나아가 눈물 흘리며 아뢰었다.
"신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아들이고,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마땅히 《시구(尸鳩)》의 인(仁)을 이룩하기 위해 힘써 왔는데, 어찌 이제와서 유희 대신 신을 세우려 하시나이까! 폐하께서 그릇된 은혜를 베푸신다면 신은 여기서 죽음을 청해서라도 진심을 밝히겠습니다. 또, 폐하께서는 신이 천하의 대업을 감당할 수 있는 자라 여기시면서 어찌하여 의광을 보좌해 성궤(聖軌)를 삼가 따르게 할 생각은 못 하십니까!"
그리고 한숨을 쉬며 눈물을 계속 흘리니, 조정의 신하들도 슬픈 기색을 띄웠다. 심지어 유희는 유요가 총애하던 헌문황후 양씨 소생이었기에, 결국 유요는 차마 태자를 폐하지 못 하고 이내 중지하였다. 그 대신 유윤의 생모인 전처 복씨를 '원도황후(元悼皇后)'로 추존해주고, 유윤을 영안왕(永安王)에 봉한 뒤, 시중, 위대장군, 도독2궁금위제군사(都督二宮禁衛諸軍事), 개부의동삼사, 녹상서사, 영 태자태부(領太子太傅)를 겸하게 하고 '황자(皇子)'로 존호를 올렸다. 여기에 더해서 유요는 유희에게 집 안에서는 유윤을 형 대접할 것을 당부하였다.

광초 8년(325년) 6월, 유요가 유윤을 대사마, 대선우로 삼고, 남양왕(南陽王)으로 진봉시켜, 한양(漢陽)의 13개의 군(郡)을 묶어 남양국으로 편성하였다. 또, 위수(渭水) 북부에 위치한 위성(渭城)에 선우대(單于臺)를 설치하고, 좌우현왕 이하를 두어 흉노족, 갈족, 선비족, 저족, 강족 5개 부족 출신의 호걸들로 채웠다.

광초 10년(327년) 5월, 전량의 왕 장준이 유요가 내린 관직과 작위를 모두 버리고, 금성(金城)태수 장랑(張閬), 부한(枹罕)호군 신안(辛晏), 무흥(武興)태수 신암(辛巖), 양열장군 송집(宋輯), 장수 한박(韓璞) 등에게 병력 수만 명을 주어 진주(秦州)를 침공하게 하였다. 이에 유윤은 적도(狄道)에서 적을 기다리다가, 적이 당도하자 진군하여 조수(洮水)를 사이에 둔 채 70여 일 동안 한박 등과 대치하였다.

광초 10년(327년) 10월, 한박이 신암에게 명해 금성의 군량을 운반해오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윤이 기뻐하며 부하 장수들에게 말했다.
"한박의 병력은 우리의 열 배였고, 우리 군은 군량도 적어 지금까지 힘들게 버텨왔다. 한데, 지금 적이 병력을 나누어 군량을 운반한다 하니, 이는 우리에게 있어서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여기서 신암을 쳐부순다면 한박 역시 마땅히 자멸할 것이다."
유윤은 일단 관군장군 호연나계(呼延那雞)에게 명해 직속 친위 기병 2,000명으로 보급로를 끊게 하고, 본인은 친히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옥천령(沃干嶺)에서 신암을 습격해 격파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한박군의 진영까지 공격해 대파하고, 도망치는 한박을 추격해 황하를 건너 영거(令居)에서 적군을 다시 한번 격파하였다. 한박군은 궤멸당해 뿔뿔이 흩어졌으며, 유윤은 적군 20,000명의 수급을 얻고, 진무(振武)를 점거하였다. 황하 이서 지역은 크게 진동하여 장랑과 신안은 수만 명을 이끌고 전조에 투항하였다. 이로써 전조는 하남(河南)의 땅을 전부 제패할 수 있었다.

광초 12년(329년) 정월, 낙양을 공략하던 유요가 석륵에게 사로잡혔다는 급보를 들은 태자 유희는 유윤에게 연락해 함께 서쪽의 진주를 보위하고자 하였다. 상서 호훈(胡勲)이 아직 영토는 온전하고 장수와 병사들도 배반하지 않았으니 자리를 지켜야 한다 주장했지만, 유윤이 이를 전해듣고 감히 방해하려 한다며 호훈을 붙잡아 참수하고, 백관들을 이끌고 상규(上邽)로 철수하였다. 유후(劉厚), 유책(劉策) 등 4정, 4진의 장군들도 조정의 철수 소식에 혼란에 빠져 수비하던 지역을 내비둔 채 상규로 달려가니, 관중(關中)이 크게 소란스러워 졌다. 이때 장안의 수비를 맡았던 장수 장영(張英)과 신서(辛恕)가 사자를 보내 후조에게 장안을 통째로 바치면서 장안도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광초 12년(329년) 8월, 유윤이 수만 병력을 이끌고 장안으로 향하자, 후조의 통치를 거부하던 관중의 여러 지역들이 일시에 거병하여 유윤에게 호응하였다. 유윤이 군대를 중교(仲橋)에 주둔시키니, 후조의 위장군 석생(石生)을 장안의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하였다.

광초 12년(329년) 9월, 유윤이 장안성을 함락시키기도 전에 후조의 중산공 석호가 기병 20,000기를 이끌고 달려와 장안을 구원하였다. 유윤은 의거(義渠)에서 석호를 맞받아쳤으나, 대패하여 병력 5,000여 명을 잃고 상규로 후퇴하였다. 석호는 승세를 타고 유윤의 뒤를 추격해 상규까지 죽은 전조군의 시체 1,000여 리 이어졌고, 뒤이어 상규마저 석호에게 손쉽게 함락당했다. 석호는 태자 유희와 남양왕 유윤, 장군, 왕후, 공경, 교위 3,000여 명을 사로잡아 모두 처형하고, 아울러 유윤을 따라 상규로 도망쳤던 대성(臺省)의 문무관원, 관동의 유민, 관중의 호족들 9,000여 명을 생포하여 후조의 도읍인 양국(襄國)으로 끌고갔다. 전조의 왕공과 5개 군의 흉노 도각 부족 인원 5,000여 명이 낙양에서 생매장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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