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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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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전량 초대 국왕
장궤 | 張軌
출생 255년
조위 양주 안정군 오씨현
(現 간쑤성 핑량시)
사망 314년 6월 19일 (향년 60세)
서진 장안 추정
(現 산시성 시안시)
능묘 건릉(建陵)
재위기간 1대 국왕
301년 ~ 314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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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성씨 장(張)
궤(軌)
부모 부친 장온(張溫)
모후 농서 신씨
형제자매 2남 중 ?남
자녀 3남 1녀
사언(士彥)
작호 서평군공(西平郡公)
묘호 태조(太祖)
시호 전량: 무왕(武王)[1]
서진: 무공(武公)[2] / 무목공(武穆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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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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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 말기의 인물이자 오호십육국시대의 한족 국가인 전량의 시조.

실제 장궤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진나라로부터 독립하지 않았다.

2. 생애

양주 안정군 오씨현 사람으로 초한전쟁때 활약했던 장이의 17대손이었다. 장씨 집안은 대대로 효렴에 오르면서 유학의 소양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젊어서는 명민하면서도 학문을 좋아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중서감 장화와 함께 경서 및 정사의 손익에 대해 논했는데, 장화가 장궤를 큰 그릇이라 생각하면서 안정의 중정(인재 추천 관리)은 재능을 찾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장궤는 태자서인, 산기상시, 정서군사 등을 역임했다.

장궤는 서진의 상황이 어려운지라 하서를 점거해 보존하려는 생각을 가져 호강교위, 양주자사가 되기를 요구해 301년에 양주자사가 되었으며, 당시 양주의 경계안에 도적이 발호하고, 선비족이 노략질을 하자 그들을 격파해 10,000여 명을 참수했다. 또한 송배와 범원 등을 모주로 삼고 9개 군의 자제 500명을 불러들이면서 학교를 세워 숭문좨주와 별가 등을 두고 춘•추에 향사의 예를 실시했다.

비서감 무세징은 천문을 보고 천하의 대란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곳은 양주 땅 뿐으로 장양주(장궤)가 그것을 해낼 인물이라고 했다. 305년에 장보가 진주자사에 임명되어 진주에 도착해 천수태수 봉상을 죽여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하면서 농서태수 한치를 소환했다가 그의 아들인 한박의 공격으로 장보가 살해당했다.(한치의 난)

이로 인해 양주사마 양윤이 한치를 토벌해야 한다고 하자 장궤는 혜제 사마충에게 사자를 파견해 근왕을 위해 한치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때 혜제가 사마모를 사자로 파견해 장궤에게 검을 하사했으며, 장궤는 중독호 범원에게 20,000명을 주어 한치를 공격해 항복시켰다. 얼마 후에 약라발능이 양주에 침입하자 사마 송배를 파견해 그를 죽이고 100,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 공으로 장궤는 안서장군을 더해 1,000호를 받아 안락향후에 봉해졌고, 이곳에 곳간을 만들었다.

호한의 한족 장수 왕미 등이 낙양을 공격하자 장궤는 독호 북궁순을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경사를 호위하도록 했으며, 북궁순의 군사가 왕연과 유총의 군대를 격파하자 장궤는 서평군공에 책봉되었지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주, 군의 사신 중에서 경사까지 가는 사람이 없었지만 장궤가 홀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쳐 새해와 네 계절이 될 때 끊이지 않았다.

308년에는 중풍으로 인해 입으로 말을 할 수가 없어 그의 아들인 장무가 양주의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양주의 호족 장월이 장궤를 축출하기 위해 장진, 조거 등과 음모를 꾸몄다가 이 일이 드러나면서 장진이 죄를 받기를 청했다. 또한 장궤가 장식에게 명령을 내려 보병과 기병 30,000명으로 조거를 토벌해 그의 목을 베고 장월은 달아났다.

장궤는 유사에게 명령해 주가 설치된 이후에 선행을 밝혀야 할 인물에 대해 보고하도록 하면서 노인들에게 축하의 뜻을 표했으며, 310년에 광록대부 부지, 태상 지우로부터 경사 낙양의 기근과 궁핍함을 알리는 편지를 받자 참군 두훈을 파견해 말 500필, 담요 30,000필 등을 헌납했다. 장궤는 진서장군, 도독농우제군사의 직책이 더해지면서 패성후에 봉해졌고 다시 거기장군,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졌다.

회제 사마치가 보낸 사자가 도착하기 전에 왕미가 낙양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비와 북궁순 등에게 정예 5,000명을 주어 보냈지만 낙양이 함락되어 이들은 붙잡혔으며( 영가의 난), 중원에서 피난하는 자가 잇따르자 무위를 분할해서 무흥군을 설치해 그들을 거주시켰다. 312년에 양주의 주부 마방이 평양을 공격할 것을 주장하면서 황실을 추대해야 한다고 하자 격문을 관중으로 보내서 사마업을 높여 보필하면서 군사를 파견했다. 사마업은 사자를 보내 표기대장군, 의동삼사에 임명했지만 장궤는 이를 사양했으며, 사마업이 다시 벼슬을 내렸지만 또 사양했다.

313년에 사마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사공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했고 참군 색보가 오수전을 부활시킬 것을 건의하자 장궤가 이를 채용해 오수전을 주조해 돈을 많이 유통하여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 이때 유요가 북지를 함락시키자 장궤는 참군에게 3,000명을 주어 장안을 지키도록 했으며, 이에 장궤는 시중, 태위, 양주목에 임명되고 서평군공에 봉해졌지만 사양했다.

314년 장궤가 늙고 병이 들자 민제 사마업의 장안 조정에서 장궤의 아들인 장식을 부자사로 삼았다. 여름 5월에 장궤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에 힘쓰면서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집안을 평안히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20일에 사망했다.

3. 둘러보기

전량의 역대 국왕
전량 건국 초대 태조 무왕 장궤 2대 고조 명왕 장식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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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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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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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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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기(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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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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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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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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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왕(威王) 장조(張祚)가 추존했다. [2] 진민제 사마업이 추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