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1 21:02:12

장식(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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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전량 2대 국왕
장식 | 張寔
출생 271년
서진 양주 안정군 오씨현
(現 간쑤성 핑량시)
사망 320년 7월 25일 (향년 50세)
서진 양주 추정
능묘 영릉(宁陵)
재위기간 2대 국왕
314년 ~ 3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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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성씨 장(張)
식(寔))
부모 부친 장궤
모친 불명
형제자매 3남 1녀 중 장남
자녀 외아들 장준
안손(安遜)
작호 서평공(西平公)
묘호 고조(高祖)
시호 전량: 명왕(明王)[1]
서진: 원공(元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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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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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과 동진의 인물.

자는 안손(安遜)이었다. 아버지인 장궤의 직책과 영지를 그대로 물려받아 전량 독립의 기반을 다졌으며 서진, 서진 멸망 후엔 동진과 끝까지 원만한 군신 관계를 유지했다. 그도 아버지 장궤와 같이 생전에 왕을 칭하거나 사마씨의 진나라로부터 독립하진 않았다.

2. 생애

젊었을 때 학식이 높고 관찰력이 뛰어나서 수재로 추천받아 낭중에 임명되었다. 307년에는 효기장군직을 사양하고 아버지 장궤가 다스리고 있는 양주(涼州)로 돌아가길 청하자 서진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양주에는 서평태수 조거, 농서내사 장월, 장진 등이 장궤를 죽이고 양주를 도모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는 일이 터졌다. 장진은 겁을 먹고 자신의 부하인 노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 모든 것을 일러바치고 항복했다. 이에 장궤가 아들 장식에게 전봉독호 송배, 장수 윤원과 보•기 30,000명을 주어 조거를 토벌하게 하니, 조거는 잡혀 죽고 장월은 하북으로 도망쳤다. 서진 조정에서는 장식의 활약을 전해받고 그를 건무정후에 봉했다가, 이후 서중랑장에 임명했고 복록현후(福祿縣侯)에 봉했다.

314년 6월 19일, 장궤가 사망하자 장사 장새(張璽) 등의 무리들이 장식을 양주자사 대행으로 옹립했고, 장식은 서진 조정에 사람을 보내 정식으로 아버지의 직위를 승계하길 청했다. 이에 진민제 사마업은 장식을 지절도독양주제군사, 양주자사, 영호강교위직에 임명하면서 서평공(西平公)에 봉했다. 양주를 장악한 장식은 간언을 독려하고,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기 전엔 항상 신하들과 의논하여 의견을 받았으며, 이주민 정착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316년, 유요가 빙익군과 상군을 함락시키고 장안 부근에 접근했다. 장식이 장수 왕해(王該)에게 5,000명의 병력을 주어 서진 조정을 돕게 하자 진민제는 장식을 도독섬서제군사로 삼았다. 그해(316), 진민제는 조서를 보내 장식을 대도독, 시중, 사공에 임명한 뒤, 장안의 포위를 버티지 못하고 유요에게 투항했다. 조서를 받은 장식은 민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을 알고 직위를 극구 사양했다. 318년에 채충을 강동으로 보내 직접 사마예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319년, 사마보가 멋대로 진왕(晉王)을 칭한 뒤, 장식을 정서대장군으로 삼고 식읍 3,000호를 준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듬해(320), 사마보는 상성(桑城)에서 유요에게 격파당하고 장식이 있는 양주로 도망치려 했으나, 사마보의 존재가 거슬렸던 장식은 장수 음감(陰監)을 보내 사마보를 맞이하는 척하며 다른 곳으로 안내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마보가 도망치다가 자신의 부하인 장춘(張春)에게 피살되는 바람에 음감은 공중분해 되어버린 사마보 세력의 난민들만 거두고 양주로 귀환했다.

양주 천제산(天梯山)에는 유홍이라는 도인이 살고 있었는데 신묘함 때문에 따르는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심지어 장식의 측근들 중에도 유홍에게 심취한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로 유명했다. 유홍과 동향 사람인 염섭은 하늘이 자신에게 양주를 넘겨주는 꿈을 꿨다며 유홍에게 말했다. 유홍은 그의 말을 믿고 자신을 따르는 아문 조앙 등 장식의 측근 10여 명과 결탁하여 장식 암살 계획을 꾸몄으나 실행 당일에 장식의 동생 장무에게 발각당했다. 장무는 즉시 아문장 사초(史初)를 보내 유홍을 체포하게 했지만 이미 조앙 등의 암살자들은 계획을 실행하러 출발한 뒤였다. 체포당한 유홍은
"지금쯤 네 주군은 이미 죽었을텐데 날 죽여서 어쩌려는 거냐"
며 소리치다가 그 자리에서 사초에게 혀가 베이고 감옥에 갇혔다.

장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형 장식은 숨이 끊긴 뒤였다. 장무는 먼저 유홍을 거열형에 처하고 나머지 암살자들과 유홍의 신도 수백 명을 추적하여 잡아 죽였다. 장식의 아들 장준은 나이가 13살에 불과했으므로 동생 장무가 뒤를 이어 양주를 다스렸다.

장식의 암살 소식을 전해들은 동진의 중종 원황제 사마예는 슬퍼하며 그를 원공(元公)에 봉했고, 훗날 칭제한 위왕 장조[3]가 장식을 명왕(明王)으로 추존했다.

3. 둘러보기

전량의 역대 국왕
초대 태조 무왕 장궤 2대 고조 명왕 장식 3대 태종 성왕 장무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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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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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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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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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기(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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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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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왕(威王) 장조(張祚)가 추존했다. [2] 동진 중종 원황제 사마예가 추존했다. [3] 황제를 칭했지만 나중에 즉위한 장천석이 스스로 황제 칭호를 포기하면서 그를 왕으로 내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