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06:52:51

사마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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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 )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 [3] 친부는 의양성왕 [4] 친부는 안평헌왕 [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 [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 [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 [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 [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 [13] 친부는 회남충장왕 [14] 여기까지 서진 [15] 친부는 오효왕 [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 [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 [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 [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 [23] 친부는 진무제 [24] 친부는 제헌왕 [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 [26] 친부는 제헌왕 [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 [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 [29] 여기부터 동진 [30] 친부는 진문제 [31] 윤통(閏統) [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 [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 [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 [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 [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 [37] 친부는 남궁현왕 [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 [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 [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 [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 [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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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진 3대 낭야왕
琅邪恭王 | 낭야공왕
시호 공(恭)
작위 낭야군왕(琅邪郡王)
직위 용종복야(冗從僕射, 최종 직위)
성씨 사마(司馬)
근(覲)
사조(思祖)
부왕 사마주(司馬伷)
생몰 256년 ~ 290년
재위 서진의 낭야왕
283년 ~ 290년
1. 개요2. 생애3. 여담4.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중국 서진의 황족이며 자는 사조(思祖)로 할아버지는 사마의, 아버지는 낭야무왕 사마주이며 어머니는 제갈태비이다. 사마근은 사마주의 네 아들중 장남으로 아내는 하후장의 딸 하후광희다.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 생애

256년, 사마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283년에 아버지 사마주가 급사하자, 그 뒤를 이어서 낭야왕(瑯揶王)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유언대로 3명의 동생들과 영토를 분봉해 각각 왕으로 임명됐으며, 동생으로는 동무공 사마담, 동안공 사마요,[1] 광릉공 사마최가 있다.

용종복야를 겸했지만 290년에 35세의 나이로 급사한다. 시호는 공왕(恭王).

그의 차남 사마혼은 숙부 동안왕 사마요가 304년에 성도왕 사마영에게 살해되어 후사가 끊기자 그의 양자가 된다. 그러나 동안왕이 되었다가 자식없이 요절하여 대가 끊기게 되면서 동안국은 폐지된다.

319년, 동진의 황제로 즉위한 아들 사마예가 제사하는 축문에 사마근을 '황고(皇考)'[2]로 칭하였으나 한 신하가 '아들이 부친의 작위를 높일 수 없다'고 지적하자 '황고' 칭호를 철회하였다.

3. 여담

사마근이 사망한 뒤에는 장남 사마예가 뒤를 잇는데 이 사마예에 대한 얘기로 그가 낭야국을 비운 사이에 하후씨가 낭야국의 관리 우금과 사통해서 낳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 말의 최초 출처인 위서( 북위의 역사서로 25사 중 하나) 자체가 25사 중에서도 질이 나쁘기로 악명이 높아 북조측에서 남조측의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참언을 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짙다.[3]

아들 사마예는 사마의의 종통 계승을 명분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부왕을 추존할 필요가 없었으며 원칙상으로도 추존은 불가능했다.

그와 그의 부인 하후광희는 결혼 전에도 사돈 관계였는데 결혼해서 겹사돈이 되었다. 바로 사마근의 백부인 사마사와 하후광희의 고모뻘이자 하후상의 딸인 하후휘가 이미 부부사이였던것. 하지만 이 부부는 삼국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로맨스 스토리 중 하나를 갖고 있다.

4. 가족 관계


[1] 문앙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근데 자기 팔자도 그닥 좋지는 못해서 팔왕의 난에 휩쓸려 끔살당했다. [2] <<晉書/卷019>> 元帝太興二年,有司言琅邪恭王宜稱皇考。 [3] 실제로 위서에서 이 얘기가 나오는 곳은 권96 열전 제84인데, 표제가 (僭)진의 사마예, 곧 황제를 참칭한 사마예란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