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5 18:53:07

사마륜



사마진 추존 · 비정통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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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800080> 추존 존령
정서부군 예장부군 영천부군 경조부군
<rowcolor=#800080> 추존 황제
선제 경제 문제
<rowcolor=#800080> 비정통 황제
조왕 원왕 성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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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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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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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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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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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西晉)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사마륜 사마주 사마근 사마예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동진(東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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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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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八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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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ccc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여남문성왕
사마량*
조왕
사마륜
하간왕
사마옹
동해효헌왕
사마월
제무민왕
사마경
초은왕
사마위
장사려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첨자 * :실제 행적을 바탕으로 사마량 대신 예장왕 사마치를 포함시키는 학자도 있다. 사마량은 팔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다.
}}}}}}}}}}}}}}} ||
진선제 사마의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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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ccc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장남 차남 3남
,경황제,
사마사追, 帝
,문황제,
사마소追, 帝
,여남문성왕,
사마량八王
4남 5남 6남
,낭야무왕,
사마주
,연왕,
사마경
,평원왕,
사마간
7남 8남 9남
,부풍무왕,
사마준
,양효왕,
사마융
,조왕,
사마륜帝, 八王
帝표는 황제, 追표는 추증, 八王은 팔왕의 난 관련인물
사마경, 사마간과 사마륜은 시호가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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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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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부군[추존][2] 사마랑 창무정후 하간평왕[3] 의양왕
장무왕
의양성왕[4] 하간평왕[5]
동평왕
고조 선황제[추존] 세종 경황제[추존] 제헌왕[8] 동래왕[9]
북해왕[10]
제무민왕
태조 문황제[추존] 세조 무황제(초) 비릉도왕[12]
효혜황제(2) 민회태자
진헌왕 진왕[13]
효민황제(4)[14][15]
성양회왕
성양상왕
초은왕
동해충왕
시평애왕
회남충장왕 진왕[16]
한왕
신도회왕
청하강왕[17]
장사려왕
성도왕 화용왕[18]
오효왕 효민황제[19]
발해상왕[20]
예장왕효회황제(3)[21]
대애왕
제헌왕[22]
성양애왕 청하강왕[23]
요동도혜왕 동래왕[24] 화용왕[25]
광한상왕 북해왕[26]
낙안평왕
연왕 기[27]
사마영조
낙평왕
여남문성왕[28] 사마수
여남회왕
낭야무왕 낭야공왕 중종 원황제(5)[29]
무릉장왕
동안왕
회릉원왕
연왕 경 연왕 기[30]
부풍무왕 순양왕
신야장왕
평원왕
양효왕
조왕[31]
안평헌왕 안평정왕 남궁현왕[32]
안평왕 돈[33]
의양성왕[34]
태원성왕 하비왕[35]
사마익 남궁현왕 안평왕 우[36]
하비헌왕 하비왕
태원열왕 하간왕
상산왕 안평왕 돈 안평왕 우[37]
패순왕
동무대후 팽성목왕 팽성원왕
고밀문헌왕 동해효헌왕
신채무애왕
고밀효왕
남양왕 진원왕 보[38]
범양왕
사마순 제남왕 중산왕
사마진 초강왕 초정왕 초왕
초민왕
단수현후 안평정후[39]
안성정후 임성왕 릉 임성왕 제
서하무왕
안평정후 안평정후[40][41]
경조부군 이전[추존][43]
정서부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 )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 [3] 친부는 의양성왕 [4] 친부는 안평헌왕 [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 [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 [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 [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 [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 [13] 친부는 회남충장왕 [14] 여기까지 서진 [15] 친부는 오효왕 [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 [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 [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 [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 [23] 친부는 진무제 [24] 친부는 제헌왕 [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 [26] 친부는 제헌왕 [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 [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 [29] 여기부터 동진 [30] 친부는 진문제 [31] 윤통(閏統) [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 [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 [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 [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 [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 [37] 친부는 남궁현왕 [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 [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 [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 [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 [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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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px -10px -5px; min-height: 28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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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서진 종실 27인
<rowcolor=#ece5b6> 이름 출생연도 가족관계 책봉 식읍(호)
사마부(孚) 숙달(叔達) 180 사마팔달 삼남 안평왕(安平王) 40,000
사마망(望) 자초(子初) 205 부(孚)의 차남 의양왕(義陽王) 10,000
사마홍(洪) 공업(孔業) 불명 망(望)의 차남 하간왕(河間王) 없음
사마무(楙) 공위(孔偉) 불명 망(望)의 사남 동평왕(東平王) 3,097
사마보(輔) 불명 불명 부(孚)의 삼남 발해왕(渤海王) 5,379
사마황(晃) 자명(子明) 불명 부(孚)의 오남 하비왕(下邳王) 5,176
사마괴(瓌) 자천(子泉) 불명 부(孚)의 육남 태원왕(太原王) 5,496
사마규(珪) 자장(子璋) 235 부(孚)의 칠남 고양왕(高陽王) 5,570
사마형(衡) 자평(子平) 불명 부(孚)의 팔남 상산왕(常山王) 3,790
사마경(景) 자문(子文) 불명 부(孚)의 구남 패왕(沛王) 3,400
<rowcolor=#ece5b6> 이름 출생연도 가족관계 책봉 식읍(호)
사마권(權) 자여(子輿) 불명 규(馗)의 장남 팽성왕(彭城王) 2,900
사마태(泰) 자서(子舒) 불명 규(馗)의 차남 농서왕(隴西王) 3,200
사마수(綏) 자도(子都) 불명 규(馗)의 삼남 범양왕(范陽王) 없음
사마수(遂) 자백(子伯) 불명 순(恂)의 장남 제남왕(濟南王) 없음
사마손(遂) 자제(子悌) 불명 진(進)의 장남 초왕(譙王) 4,400
사마목(睦) 자우(子友) 불명 진(進)의 차남 중산왕(中山王) 5,200
사마릉(陵) 자산(子山) 불명 통(通)의 장남 북해왕(北海王) 4,700
사마빈(斌) 자정(子政) 불명 통(通)의 차남 진왕(陳王) 1,710
<rowcolor=#ece5b6> 이름 출생연도 가족관계 책봉 식읍(호)
사마량(亮) 자익(子翼) 불명 의(懿)의 삼남 부풍왕(扶風王) 10,000
사마주(伷) 자장(子將) 227 의(懿)의 사남 동완왕(東莞王) 10,600
사마간(幹) 자장(子良) 232 의(懿)의 육남 평원왕(平原王) 11,300
사마준(駿) 자장(子臧) 232 의(懿)의 칠남 여음왕(汝陰王) 10,000
사마융(肜) 자미(子微) 불명 의(懿)의 팔남 양왕(梁王) 5,358
사마륜(倫) 자이(子彛) 불명 의(懿)의 구남 낭야왕(琅邪王) 없음
사마기(機) 태현(太玄) 불명 소(昭)의 칠남 연왕(燕王) 6,663
사마유(攸) 대유(大猷) 248 소(昭)의 차남 제왕(齊王) 없음
사마감(鑒) 대명(大明) 246 소(昭)의 육남 낙안왕(樂安王) 없음
}}}}}}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 비정통 황제
사마륜 | 司馬倫
출생 232년 ~ 240년 후반
미상
사망 301년 3월 13일(향년 50대~70대 추정)
서진 금용성
능묘 미상
재위 서진의 황제
301년 1월 10일 ~ 301년 3월 6일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사마(司馬)
륜(倫)
자이(子彝)
부모 부황 고조 선황제
모친 백부인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작위 낭야왕(琅邪王) → 조왕(趙王)
연호 건시(建始, 301년)
}}}}}}}}} ||
1. 개요2. 생애3. 평가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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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의 황족. 자는 자이(子彝). 사마의의 아홉째 아들(막내 아들)로 백부인 소생이었으며, 사마사, 사마소의 배다른 아우이며, 사마주 사마준과도 배다른 형제이다. 사마염의 계부(季父)[1]로, 사마충의 종조부(從祖父)[2]다. 처음에 낭야왕(琅邪王)으로 봉해지고 뒤에 조왕(趙王)으로 개봉(改封)된다.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32년 이후[3] ~ 240년대 후반 사이 출생하였을 것이다. 즉 사망 당시의 나이는 적어도 50세, 많으면 70세가 된다.[4] 만에 하나 종회처럼 사마의가 80세가 다 된 나이에도 가진 아들이라 유복자였다고 가정하더라도 252년생이 되니 쉰 살에 훙서(薨逝)한 게 된다.

사실상 팔왕의 난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인물이며, 가남풍을 죽이고 혜제를 내쫓아 칭제했으나 2개월도 못 된 재위기간[5] 끝에 도로 폐위당해 몰락했다. 그나마도 손수라는 모사꾼 부하에게 휘둘려서, 잘 보면 이게 사마륜 문서인지 손수 문서인지 모를 지경이다. 이름이 윤리의 륜(倫)이고 도 이름에 맞춰서 떳떳할 이(彛)를 넣었으니 이름과 자하고 반대로 살았다.

2. 생애

265년에 조카 사마염이 즉위하여 서진을 개창하자 낭야왕이 되었다가 277년에 조왕이 되어 독업성수사가 되어 을 지키는 일을 감독했다.

296년에 서쪽에서 저족과 강족이 일어나자 사마륜의 총신인 손수 옹주 자사 해계가 군사적인 문제로 다투면서 구양견이 사마륜의 죄악을 표문에 올렸다. 그러자 조정에서 사마륜이 관우 지역을 소란스럽게 한다고 여겨 소환, 거기장군이 되었다.

이때 바로 위 이복형(8남) 사마융이 빈자리가 된 정서 대장군에 대신 임명되어 도독옹량이주제군사가 되었다. 이에 해계, 해결 등이 손수를 죽여 저족 강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한다라고 청했고, 장화가 이를 보고하면서 시행 여부를 묻자 사마융이 이를 허락했다. 사실상 손수의 목숨은 죽은 목숨이 되었지만, 신염이 저족과 강족이 스스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손수의 죄가 아니라고 설득해 손수를 죽이는 것을 거뒀다.

이렇게 손수가 위기를 면하자 그의 계책에 따라 곽씨, 가씨 등과 깊이 교제했으며, 혜제의 황후 가남풍의 신임을 받게 되자 녹상서사와 상서령의 직책을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장화, 배외 등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손수와 함께 그들을 원망했다.

300년에 우장군을 지내면서 병권을 잡고 가남풍의 무고로 태자 사마휼이 폐위될 때 우위독 사마, 상장독 허초, 전중중랑 사의 등이 사마휼을 회복시키기 위해 사마륜의 힘을 빌리려고 했는데, 손수의 의견에 따라 가남풍이 사마휼을 죽이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사마휼이 살해되자 군사를 동원해 가남풍을 몰아냈다. 상서 화욱을 시켜 가남풍을 금용성에 유폐하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면서 스스로 사지절, 도독중외제군사, 상국[6], 시중이 되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관직을 내리면서 병권을 장악했다.

4월 9일에 조서를 고쳐 상서 유홍을 파견해 금설주[7]를 가지고 가남풍을 금용성에서 죽게 했으며, 이때 제왕 사마경 등의 황족과 손을 잡았다. 또한 개인적으로 원한을 품던 장화, 배외, 해계, 해결 등을 주살했다.

사마륜은 용렬하고 어리석었기 때문에 손수의 통제를 받았고, 부족한 인망을 얻기 위해 명성과 덕망이 있는 자들을 뽑았으며, 5월 9일에 행태손태부가 되었다.

이때 회남왕 사마윤이 몰래 자신을 토벌하려는 것을 알고 꺼려 가을 8월에 명예직인 태위로 임명해 실권인 지방력과 병권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사마윤이 알고 칭병하며 조서를 거부하자 이를 계기로 역모로 몰아 죽이려다가 결국 사마윤이 지휘하는 군사의 공격을 받게 된다. 사마윤에게 낙양 상국부를 포위당하면서 여러 번 싸웠지만 패배하자 궁노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주서사마 휴비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며, 여음왕 사마건의 설득에 넘어간 친위대의 사마복호 복윤이 혜제의 조서로 속여 사마윤을 살해하고 그 군사를 격파하자 살아남았다. 팔왕의 난 최초이자 유일의 방어전 성공 사례.

사마윤의 동생인 오왕 사마안을 죽이려고 했지만 광록대부 부지가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치라고 간언하자 죽이지 않는 대신 작위를 깎아 빈도현왕으로 삼았으며, 손수가 혜제에게 구석을 더해줄 것을 논의하자 사마륜은 구석을 받았다.

301년 정월에 산기상시인 의양왕 사마위, 상서령 만분 등을 시켜 선양할 준비를 마련했다가 9일에 황제로 즉위해[8][9] 연호를 건시(建始)라고 고쳤으며, 혜제를 폐위해 금용성에 살게 했다가 10일에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높이면서 금용성을 영창궁으로 고쳤다. 황태손을 폐위해 복양왕으로 삼고 아들 사마과를 태자로 삼으면서 다른 아들이나 친척들을 왕으로 임명했으며, 그 밖의 부하들도 관직을 승진시켰다. 이때의 만행은 구미속초라는 고사성어로 비유된다.

17일에 손수와 사이가 나빴던 위장군 장림이 태자 사마과에게 손수가 권력을 전횡하니 그를 죽여야 한다는 편지를 보내서 사마과가 이를 사마륜에게 보여줬는데, 사마륜이 다시 손수에게 보여주어 장림과 그 삼족을 죽게 만들었다.

3월에 제왕 사마경이 여러 왕들에게 격문을 돌려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신야군왕 사마흠 등과 연합해 공격하자 패했으며, 결국 혜제 사마충이 2개월 만에 황제로 복귀했다. 3월 7일에 금용성에 유폐되었다가 9일에 양왕 사마융이 사마륜 부자는 역적이라 죽여야 한다는 표문을 올리자 13일에 아들들과 함께 주살되었다. 죽기 전 사마륜은 부끄러움에 얼굴에 천을 덮고 "손수가 나를 망쳤다, 손수가 나를 망쳤다!"라고 말했다. 묘호와 시호는 없다.

3. 평가

가남풍이 사마휼을 죽이는 걸 동조하면서, 서진을 망조의 길로 이끈 인물. 총명했던 혜제의 후계자 사마휼을 비롯해 회남왕 사마윤, 장화 등 능력있는 황족과 신하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기껏 가남풍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했음에도 모사꾼 손수한테 휘둘렸으며, 지적장애가 있던걸로 추정되지만 사마염의 후계자라는 정통성을 가진 혜제를 손수의 말만 듣고 무리하게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면서 사마경을 포함해 함께 거병했던 황족들은 의양왕 사마위를 빼면 반대파로 돌아섰다.

결국 2달도 채 지나지 않나 사마륜은 폐위되었고, 최후에는 손수를 원망하는 발언을 하면서 후회했던 것 같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시작할 때 좋은 일화 하나 정도는 써주는 열전에서도, 사마륜 열전만큼은 칭찬은 커녕 죽을 죄를 지었는데 사마염이 용서해줘 겨우 살아남았다는 추문이 맨 첫장에 적혀있다.

4. 미디어 믹스

파일:조조전_사마륜.png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2019년 6월 업데이트에서 추가되었다. 계보 마왕재림의 패에 소속된 장수로 병과는 경전차. 능력치는 무력 61, 지력 63, 통솔 60, 민첩 80, 행운 84이고 성격은 경솔이다. 성우는 홍후백.

토탈 워: 삼국 팔왕의 난 DLC에서 플레이 가능 군주로 등장한다. 타입은 지휘관. 트레일러에서는 사마경, 사마영과 엮이는데 직접 싸우지는 않고, 사마륜의 군대와 사마경-사마영이 이끄는 군대가 교전을 벌인다. 시작 지역은 기주 위군(업).

키워보면 알겠지만 터무니없을 정도로 스탯이 높다. 특히 지휘관 주제에 책략 스탯이 웬만한 유니크 책사를 씹어먹을 정도. 실제 역사와 비교해보면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4.1. 대군사 사마의

역사상 모습을 반영한 건지 어린 나이인데도 전체적으로 음흉하고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첫 등장이 좀 웃긴데, 낙향했던 사마의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집에 웬 아이가 있어서 봤더니, 낙향하기 전날 백령균과 딱 한 번 거사를 치렀는데 그 때 생긴 아이였다.

2부 초중반부에서 조예가 곽조를 죽이는 일을 위해 관병을 동원해 사마 가문의 저택을 포위하자 개구멍을 통해 빠져나가 장안에 있는 사마의에게 가서 관병이 사마 가문의 저택을 포위한 사실을 알린다.

이렇게 2부 초반 등장은 그냥 좀 똑똑한 아이였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어두운 본성이 드러난다. 본인은 첩의 자식인데다 본처의 자식인 사마사, 사마소의 존재 때문에 빛을 발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사마소[10]에게 협력해 장남인 사마사를 견제하게 된다.

조방 즉위 후 사마사, 사마소가 관직을 받자 자신도 받고 싶어했지만 어머니인 백령균으로부터 조급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우선 길러야 한다는 충고를 듣는다. 사마소가 낙곡대전에서 돌아오자 아버지 사마의가 낙양의 북망산에서 몰래 사병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후휘가 사마사의 지도를 훔쳐보고 실제로 사병을 기르는 것을 확인하지만 뒤를 밟은 사마륜이 돌로 머리를 내려쳐 기절시키고 납치한다. 이 일로 외출한 것으로 인해 백령균이 어디 갔다 왔냐고 추궁하자 어머니가 아들을 의심하냐고 대꾸했으며, 사마소가 하후휘를 죽일 때 사마사의 옥패를 하후휘의 손에 놓아 사마사를 하후휘 살해 사건의 용의자로 추궁받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조상에 대한 사마의의 반감을 증폭시키기 위해 맏형이자 장래의 정적인 사마사의 목숨을 이용한 것이다. 이후 사마소와 사마륜의 역사적 행적을 본다면 소름끼칠 정도의 장면. 이 일로 사마의는 맏며느리와 본처인 장춘화를 잃은데다 최후의 보루인 옹주와 양주의 지휘권을 조상에게 헌납해야 했고, 결국에는 역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중풍+치매를 연기해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백령균이 죽은 후에는 사마소에게 자신의 어머니가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는 말을 해서 소원을 살해하게 충동질한다.
[1] 막내 삼촌이다. [2] 할아버지의 형제다. [3] 바로 위의 형이자 이복형인 사마융 역시 출생년도는 미상이고 그 다음 위의 이복형 사마간이 232년생이기 때문에 사마간보다 동생인 사마륜은 그보다 더 늦게 태어나야 한다. [4] 이는 친아버지 사마의가 179년생인 것을 감안할 때 사마의가 거의 60이 다 되어서 사마륜을 낳은 것이다. 물론 종요, 종회 부자보다는 덜하지만. 사마의의 손자들이자 사마륜의 조카들 중 최연장자인 진무제 사마염과 비슷한 또래였을 것이다. [5] 굳이 재위를 따지면 301년 음력 1월 9일 ~ 음력 3월 6일이다. [6] 동탁 다음으로 삼공의 위에 있는 벼슬을 억지로 받아낸 꼴인데 이것 때문에 상국은 별칭으로만 쓰일 뿐 아예 봉쇄되었고 위진남북조 시대의 강신(强臣)들이 상국이 아니라 승상을 받게 되었다. 이것으로 태위· 어사대부와 더불어 승상이 나란히 삼공이 되는 체제는 다시는 살아나지 못 했다. [7] 황금 가루를 에 탄 독주다. [8] 이 찬탈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이냐면 동아시아 대륙은 계승을 종법(宗法)에 따르는데 종법에서 계승자는 아들이거나 아우여야 한다. 적어도 항렬 역주행하는 건 절대 금지다. 수양대군 단종에게 양위를 받은 게 이래서 엄청난 국기문란(國紀紊亂)인 것이다. 그런데 무려 종조부가 종손자(從孫子)에게 선양을 받으니 더욱 황당한 일이다. [9] 우스운 건, 사마륜도 옛 적에 죽을 죄를 지었으나 사마염이 용서해 풀려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 [10] 본인도 잘나가는 형에 대한 열등감과 그런 형만 챙겨주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형을 이기고 싶어하는 욕구가 컸다. 사마륜 뿐만 아니라 종회나 하안 같은 인물들도 이를 부추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