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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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 鍾會 [1]
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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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관내후(關內侯) → 무정후(武亭侯) → 진후(陳侯) → 현후(縣侯) |
최종직위 | 사도(司徒)\ |
성씨 | 종(鍾) |
휘 | 회(會) |
자 | 사계(士季)[2] |
아버지 | 종요(鍾繇) |
어머니 | 장창포(張昌蒲) |
생몰기간 | 225년 ~ 264년 1월 18일[3] |
고향 | 예주(豫州) 영천군(穎川郡) 장사현(長社縣) |
사망지 | 익주(益州) 촉군(蜀郡) 성도현(成都縣) |
사도 재임기간 | 263년 12월 19일 ~ 264년 1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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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자 예주 영천군 장사현 사람으로 종요가 74세[4]에 27세인 장창포와의 사이에서 낳은 작은 아들이다. 자는 사계(士季)로 이복형은 종육, 누나는 종부인.삼국지 후반 인물들이 대부분 전반기보다 큰 관심을 못 받고 있고 산악인이라는 아이덴티티가 있는 등애에 비해서도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후반기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네임드 중 한 명으로, 유능한 정치가였고 촉한을 멸망시킨 주역 중 한 명이면서 촉한 부흥에도 참여(혹은 이용당)했다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능력이나 인격면에선 이런저런 논란이 많은 종회지만 하후패가 촉한에 망명할 때 그 시점에선 애송이 취급받던 종회를 고평가하며 촉한의 큰 위협이 될만한 인물로 꼽고 있고, 또한《 세설신어》를 비롯한 이런저런 사서에 종회에 대한 일화가 굉장히 많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위나라 정계에서는 대단한 거물로 여겨졌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종회의 어머니 장창포는 자녀의 교육에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종회는 어릴 때부터 열공을 시작했다.종회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은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종회의 아버지 종요는 중호군 장제가 "사람의 눈동자를 관찰하면 그 사람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다섯 살인 종회를 장제와 만나보게 했다. 장제는 종회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종회에 대한 일화 중 《 세설신어》의 기록으로 연의에도 쓰인 이야기가 하나 있다. 종회가 7세 때 한 살 위인 형 종육과 함께 조비를 알현했는데, 종육은 땀을 비오듯이 흘렸고 종회는 흘리지 않았다. 조비가 그 이유를 물으니, 종육은 '천자의 위엄을 대하니 무섭고 떨리어 땀이 나온다'고 대답했고 종회는 '천자의 위엄을 대하니 무섭고 떨리어 감히 땀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조비가 사망한 226년에 종회는 2세였으므로 그냥 야사일 뿐이지 사실은 아니다.
세설신어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종육(鍾毓) 형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낮잠이 들었기에 함께 약주(藥酒)를 훔쳐 마셨다.
아버지는 이때 일어나 있었지만 우선 거짓으로 잠든 체하며 그들을 봤다. 종육은 절을 한 후에 마시는데, 종회는 절을 하지 않고 마시는 것이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일어나서 종육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절을 하였느냐?"
종육이 말하길
"술은 예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기에, 감히 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종회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절 하지 않았느냐?"
종회가 말하길
"훔치는 것이 애초에 예에 어긋난 일이기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때 일어나 있었지만 우선 거짓으로 잠든 체하며 그들을 봤다. 종육은 절을 한 후에 마시는데, 종회는 절을 하지 않고 마시는 것이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일어나서 종육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절을 하였느냐?"
종육이 말하길
"술은 예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기에, 감히 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종회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절 하지 않았느냐?"
종회가 말하길
"훔치는 것이 애초에 예에 어긋난 일이기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 세설신어》에 또 다른 일화가 있는데, 종회는 순제북( 순욱[5])의 외삼촌이었지만 사이가 안 좋았다. 순제북은 소유한 비싼 보검 한 자루를 어머니 종부인(종회의 누나)에게 맡겨 두고 있었는데 종회는 글씨를 잘 써서 순제북의 필적을 모방해 종부인에게 편지를 써 보검을 얻고 돌려주지 않았다. 순제북은 고민하다가 종육, 종회 형제가 비싸게 지은 집에 몰래들어가 문당에 돌아가신 종요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종육, 종회 형제가 문에 들어서서 이 그림을 보고 크게 부친 생각이 나서 그 집을 그대로 비워두어 폐가가 되어버렸다.
2.2. 하안 살롱의 일원
종회는 어른이 되자 계산과 글씨가 뛰어나고 똑똑해서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종회는 일찍이 역경에 호체와 재성의 이동이 없는 것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순욱전 주석 진양추에 따르면 순의가 종회를 꾸짖으며 역경에는 호체가 없다고 하여 유명해졌다.
조상이 집권했을 때는 당시 정시문인으로서 현학의 대가이자 조상의 측근이던 하안과 친밀하게 지냈으며, 요절한 왕필과도 교류했다.
왕필전에 따르면 왕필과 종회가 친했는데 종회는 정밀한 사고를 근본으로 논의했지만 매번 왕필의 고상한 식견에 굴복했다. 하안이 성인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다고 여긴 논의가 굉장히 정밀해서 종회 등이 논술했다.
하후현과는 딱히 교분이 없었지만 그가 죽을때 그를 희롱하면서 그와 친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2.3. 사마씨의 측근으로
고평릉 사변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정변 당시 종회는 중서랑 신분으로 조방, 조상 등을 따라 고평릉에 가 있었다. 이 때문에 유방, 위관, 하후화 등의 집안이 종회의 어머니 장창포에게 찾아와 지금 아들이 난리에 휘말렸는데 걱정되지 않냐고 물었으나, 장창포는 차분하게 조상의 실책과 사마의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한편 종회는 황제 곁에 머무르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며 사태가 신속하게, 큰 피를 보지 않고 해결될 것임을 예측했다.[6]고평릉 사변 이후 하안이 처형당하자 사마씨에 접근하여 재능을 발휘했다. 이렇게 유연하지만 신의없던 태도는 그의 신망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진춘추》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초
하후패가 촉에 항복하였을 때
강유가 물어 말했다.
"사마의가 이미 그곳의 정권을 얻었으니 응당 다시 정벌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가?"
하후패가 말했다.
"그 쪽은 가문을 경영하고 세우느라 바깥일에 신경쓸 수 없습니다. 종사계(종회)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됨이 비록 어려도 끝내 오, 촉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다만 비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를 쓸 수 없습니다."
15년 후에 종회는 마침내 촉을 멸망 시켰다.
《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패가 종회와 더불어 등애도 언급하는 것으로 각색했다."사마의가 이미 그곳의 정권을 얻었으니 응당 다시 정벌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가?"
하후패가 말했다.
"그 쪽은 가문을 경영하고 세우느라 바깥일에 신경쓸 수 없습니다. 종사계(종회)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됨이 비록 어려도 끝내 오, 촉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다만 비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를 쓸 수 없습니다."
15년 후에 종회는 마침내 촉을 멸망 시켰다.
종회는 우송이 상소를 짓는걸 도왔고 사마사가 그 상소를 종회가 한 걸 알자 종회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누고 그의 재능을 감탄했다.
<허윤전>에 따르면 허윤이 죽자 사마사가 종회를 시켜 허윤의 아들들을 살피게했는데 완씨의 대처로 허윤의 아들들은 무사했다.
<조모전> 주석 《위씨춘추》에 따르면 사마사는 조모가 즉위하자 종회에게 그에 대해 물었다.
사마사가 사사로이 물었다.
"임금( 조모)은 어떤 군주였는가?"
종회가 대답했다.
"재능은 진사왕( 조식)과 같고, 무용은 태조(조조)와 비슷합니다."
사마사가 말했다.
"만약 경의 말과 같으면 사직의 복이다."
"임금( 조모)은 어떤 군주였는가?"
종회가 대답했다.
"재능은 진사왕( 조식)과 같고, 무용은 태조(조조)와 비슷합니다."
사마사가 말했다.
"만약 경의 말과 같으면 사직의 복이다."
<조모전> 주석 《진제공찬》에 따르면 조모는 항상 사마망, 왕침, 배수, 종회 등과 모여 토론회를 가졌다.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사에게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을 진언해 신임을 얻었다. <부하전>에 따르면 종회는 관구검을 토벌하여 오만해지자 부하가 그에게 신중하라고 충고했다.
문흠과 관구검의 난을 진압하려던 사마사가 죽고 사마소가 그 뒤를 이어 군을 통솔했는데, 낙양의 조모는 군을 수도 밖에 두고 궁으로 입궐하는 것을 명령하였으나, 종회는 부하와 상의해 부하로 하여금 표를 올리도록 하고 사마소와 함께 낙양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조모는 사마소에게 사마사가 가졌던 모든 직위를 그대로 물려주게 된다. 종회는 황문시랑으로 승진하고 무정후로 봉해져 식읍 3백 호를 받았다.
이쯤 종회의 어머니 장창포가 죽어 상을 치렀고, 《위씨춘추》에 따르면 종회가 어머니를 위해 종회모전을 지었다. 257년, 제갈탄이 사공이 되자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상을 치르고 있던 종회는 제갈탄이 반역할 것이라 추측하고 사마소에게 제갈탄의 임명을 취소하라 아뢰었지만, 사마소는 이미 제갈탄의 임명이 끝났으니 돌이킬 수 없었다.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켜 양주자사 악침을 죽이고 오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오에서는 장수 전역, 전단, 당자, 왕조 등과 병사 3만 명을 보냈다. 그러나 이때 건업에서는 전씨 가문 내에서 싸움이 일어나 서로 소송을 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어 전역의 형의 아들 전휘와 전의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마소에게 투항한다. 종회는 이것을 이용해 전휘와 전의가 보낸 것처럼 서신을 꾸며 손침이 수춘에서 이기지 못한 것에 크게 화가 나서 전씨 일가를 모조리 죽이려한다면서 성 안의 전씨 일가도 항복해 화를 면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그 편지에 속아 전역은 조카 전정 형제 다섯 명과 함께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동문으로 나와 사마소에게 투항했다. 그들 모두 작위에 봉해지고 총애를 받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수춘성을 함락시키는데 종회의 계책이 큰 몫을 해 사마소는 날이 갈수록 종회를 더욱 후하게 대접하고 중요시했다.
2.4. 견제질
종회는 당시 비록 지방 관리였지만 정치적으로 크게 관여했다.배수나 양호를 견제하면서 사마소의 신임을 얻고자 하였고, 죽림칠현으로 꼽히던 완적이나 혜강을 모해하고자 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현학(玄學)에도 관심이 많으면서 죽림칠현의 필두이자 당시 현학의 권위자였던 명사 혜강과 친교를 쌓고자 했다. 부하전에 따르면 종회는 부하의 관점을 종합하여 사본론(四本論)을 지었고, 《 세설신어》에 따르면 사본론의 집필을 끝내고 혜강에게 보여주려고 했다가 그의 비판이 두려워 품 속에서 감히 꺼내지 못하고 창문 밖까지 던져 놓고 곧장 돌아서서 도망갔다고 한다.
나중에 사마씨에 붙어 출세한 다음에는 뛰어난 명사들의 행렬을 거느린 채 호화로운 복장으로 혜강을 찾았으나 혜강은 철 단련에만 열중하고 종회를 한참 무시한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종회가 떠나려하자
혜강이 종회에게 물었다.
"무엇을 듣고 왔으며 무엇을 보고 가시는가?"
종회가 말했다.
"들은 바가 있어 왔고 본 바가 있어 갑니다."
종회는 그를 깊이 원망하였다.
"무엇을 듣고 왔으며 무엇을 보고 가시는가?"
종회가 말했다.
"들은 바가 있어 왔고 본 바가 있어 갑니다."
종회는 그를 깊이 원망하였다.
위 제후 왕실의 사위이기도 하면서 사마씨 일족의 전횡을 미워하던 혜강으로서는 사마씨에 붙은 종회를 좋아할 수 없었으며, 결국 혜강은 찾아온 종회를 푸대접해 돌려보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종회는 혜강을 죽이려 마음먹고, 기회를 노려 사마소를 설득해 혜강을 사형에 처하게 한다. 이때 한 말이 걸작인데 "혜강은 와룡이니, 놔둬서는 안됩니다." 당장 사마소의 아버지가 누구랑 대적했나를 생각해보면 이보다 탁월한 모함의 한마디도 없었을 것이다. 사마의도 제갈량을 높이 평가한바 있지만 개인적인 평가였다. 제갈량이 공적으로도 국적을 초월해 위인으로 대접받는건 촉한이 사라진 사마염 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촉과 수시로 교전을 벌이던 이 때 제갈량은 당연히 '대마왕' 취급이었다.
이때 혜강의 명성에 흠을 내는 음모를 꾸며 이를 구실로 삼았으며, 혜강이 사망한 이후 죽림칠현은 완적처럼 현실도피적 음주, 상수처럼 그럭저럭 관리로서의 삶, 왕융처럼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경우, 산도의 경우처럼 고관을 지내는 등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사마씨에 저항하는 세력이 남지 않게 되었다.
어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종사계(종회)가 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 글을 한 장 썼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완보병( 완적)의 글이라고 하면서 글자마다 모두 뜻이 살아 있다고 하더니, 그것이 내가 쓴 것임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더군."
"내가 젊었을 때 글을 한 장 썼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완보병( 완적)의 글이라고 하면서 글자마다 모두 뜻이 살아 있다고 하더니, 그것이 내가 쓴 것임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더군."
세설신어에 따르면 종회가 왕융,배해를 평한 기록이 있다.
종사계(종회)가 왕안풍(
왕융)을 이렇게 평하였다.
"아융(왕융)은 남의 속마음을 분명하게 알아낸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다.
"배령공( 배해)은 종일토록 현담을 해도 다함이 없다."
그때 마침 이부랑의 자리가 결원이 생기자 사마소가 종회에게 어떤 인물이 적임이냐고 묻자, 종회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배해는 맑고 사리에 정통하고, 왕융은 대범하면서도 요령이 있다하여 둘 다 적임자입니다.'
이에 사마소는 배해와 왕융을 등용하였다.
"아융(왕융)은 남의 속마음을 분명하게 알아낸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다.
"배령공( 배해)은 종일토록 현담을 해도 다함이 없다."
그때 마침 이부랑의 자리가 결원이 생기자 사마소가 종회에게 어떤 인물이 적임이냐고 묻자, 종회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배해는 맑고 사리에 정통하고, 왕융은 대범하면서도 요령이 있다하여 둘 다 적임자입니다.'
이에 사마소는 배해와 왕융을 등용하였다.
문명왕황후열전에 따르면 왕원희는 사마소에게 종회를 중용하지 말라고 조언했고, 양호열전에 따르면 종회가 총애를 받으면서 양호를 시기해서 양호가 그를 아주 두려워했다.
종회의 이복형 종육은 사마소에게 "종회는 책략에 의지하여 뜻밖의 것을 지키기는 어려우므로 중요한 직책에 위임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고, 한진춘추에 따르면 사마소는 그 충량을 가상하게 여겨 웃으며 종육에게 답했다. "만약 경의 말과 같다면 반드시 종족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다."[7] 종육은 이 말을 했던 덕분에 나중에 종회가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연좌제에서 용서되었다.
2.5. 촉한 정벌군
사마소는 촉한의 강유가 자주 출병하여 전쟁을 벌이고 이 당시 유선이 암약한 정치를 펼쳐 촉의 국력이 쇠약했으리라 추측하고 촉을 멸망시키려했다. 대촉 전선을 담당하던 등애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촉한의 방어선은 아직 튼튼하다며 반대했지만, 유일하게 종회는 사마소와 같은 생각을 하여 촉의 지형을 조사하고 계획을 세웠다.<신헌영전>에 따르면 신헌영은 양호에게서 종회가 서쪽으로 출정한다는 소리를 듣자 그가 반역을 일으킬거라 예측했고 종군하는 아들 양수에게 처신을 조언했다.
문제본기에 따르면 종회가 촉을 공격하자 소제가 사마소에게 "종회는 믿기 어려운 사람이니 그로 하여금 출병하게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자 사마소는 "종회만이 촉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나와 맞았고, 반란을 하더라도 성공시킬 능력이 없네"라 말했다.
263년, 위는 촉한 정벌에 나선다. 옹주자사 제갈서와 정서장군 등애가 각각 3만의 병력을 이끌었고 종회는 진서장군이 되어 10만을 이끌고 촉한을 공격했다. 등애가 강유와 교전하며 그를 묶어두고, 제갈서가 강유의 퇴로를 차단하며, 종회가 한중을 점령하고 촉으로 진격하는 것이 위군의 전략이었다.
이 과정에서 종회는 위나라 개국공신인 허저의 아들 허의에게 선봉을 맡기면서 도로공사를 시켰는데 허의가 만든 다리가 종회가 지나갈때 무너져서 종회가 탄 말이 다리사이에 난 구멍에 빠지고 이로인해 종회는 낙마했다. 이에 머리끝까지 분노한 종회는 모든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의의 목을 베었다.
종회는 촉 정벌 도중 사람을 보내 제갈량의 묘에 제사를 지내거나, 장완전에 따르면 장완의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장완의 묘를 청소했다.
위군의 전략은 거의 완벽하게 성공하는 듯했으나, 강유의 페이크에 속은 제갈서가 길을 터준 사이 강유는 재빠른 기동으로 퇴각에 성공한다. 종회는 한중을 점령하고 강유 등 지키는 검각에 이르렀다. 강유전에 따르면 종회가 강유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공후( 강유)는 문무의 덕을 갖추고 세속을 초월함의 지략을 품고 공을 세워 파, 한을 구제하여 중국에까지 명성을 드날렸으니 멀고 가까운 이들 중 그대의 명성에 귀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소." 강유는 서신에 답하지 않고 수비에 열중했다. 강유와 교전을 치르는 와중에도 휘하 사령관 중 한사람이던 제갈서의 병권을 박탈하고 자신의 군권을 강화하는 등 야심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종회는 강유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인해 별 성과를 얻지 못한다. 게다가 한중 역시 장서의 항복으로 떨어진 양안관 빼고는 어떤 거점도 함락하지 못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
결국 군량보급에 문제가 생기자 종회는 퇴각을 고려해야 할 정도의 상황이 되고 만다. 결국 종회는 나아가 검각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으므로 병사들을 안솔하여 물러났다. 반면 원래 조공이었던 등애는 음평 산길을 타고 강유성과 부성을 지나 제갈첨을 패사시키고 성도에 다가가 유선을 항복시킴으로서 촉한을 멸망시켰다. 이에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강유는 물러나다가 허겁지겁 달려온 종회에게 항복한다.
<강유전> 주석 《진기》에 따르면 종회가 항복하러 온 강유에게 말했다. "항복하러 오는 것이 어찌 이토록 늦었소?" 강유가 정색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사람을 오늘 보는 것만도 빠른 것입니다!" 종회가 그를 매우 높게 여겼다.
종회는 군율을 정돈하고 촉의 관료들과 교분을 맺어 강유와 친해졌다. 강유전에 따르면 종회는 강유와 함께 밖으로 나갈 때는 같은 수레를 타고 좌정할 때는 같은 자리에 앉을 정도였고, 두예에게 "백약(강유)을 중원의 명사에 비교하자면 공휴( 제갈탄)나 태초( 하후현)가 그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이오."라 말했다.
<장완전>에 따르면 유선이 등애에게 투항한 후 장무( 장완의 아들)가 종회에게 가자 잘 대해주었다. 방덕전 주석 촉기에 따르면 종회는 촉을 평정한 때에 전후에 북과 피리를 울리고 방덕의 유체를 맞이하여 조문하고 업에 보내 장례케 하였는데, 방덕의 묘 안의 머리와 몸이 마치 산 사람 같았다고 한다.
막상 자기가 주공으로서 얻었어야 할 촉한 멸망의 공을 등애가 가져가자 종회는 자신의 공이 많았다면서 장황한 상소를 써댔고 결국 종회는 촉을 완전히 멸망시킨 공으로 삼공의 하나인 사도에 봉해진다. 등애는 태위, 그의 두 아들은 정후에 봉해졌다.
2.6. 종회·강유의 난
여기서 끝내면 좋았지만 종회는 은밀히 사마소에게 역심을 품고 있었고 강유는 촉을 부흥시키려 했기 때문에 둘이 의기투합을 한다. 이 당시 종회는 은근한 야심을 품고 촉한의 인사들과 교분을 쌓으려 했는데 강유는 이점을 파악하고 종회에게 접근해 그의 마음에 들었다.[8][9]종회는 결국 등애를 모함하여[10] 본국으로 송환시켰다.[11]
종회전에 따르면 이때 가호군(가충)이 사마소에게 "종회를 약간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사마소는 "지금 그대를 파견해 일을 시키는데 그대 또한 의심할 수 있겠소?"라 답하자 가충은 아무말 못했다.
종회가 등애를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자 사마소는 서촉으로 가려했는데, 소제가 "종회의 군사가 등애보다 훨 많으니 그냥 종회에게 등애를 체포하도록 명령만 내리시면 되지 직접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라 말하자 사마소는 "그대는 지난번에 종회를 의심했으면서 나보고 출병하지 말라니, 등애가 내게 불충하기 전에 내가 등애를 의심할 수 없으니, 내가 장안에 도착하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오."라 답했다.
유일한 꺼림거리 등애가 없어지니 살판난 종회는 강유와 모반 작전을 구상하나, 사마소가 편지를 보내길 먼저 가충을 보내고 사마소는 이어서 10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에 와 있는 상태라고 하자 종회는 당황하여 장안 공격 계획은 포기한다. 사실 신헌영을 비롯해 이미 그의 행동에게 역심을 읽은 사람은 많았고 사마소의 부인 왕원희를 비롯해 사마소에게 그의 야심을 간언한 이도 많았으며 사마소 자신도 종회의 재주만 높게 샀을 뿐이지 그가 언젠가는 배반하리라는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만큼 그가 위나라에서부터 그런 쪽으로 야심을 풀풀 풍기던 인물이라는 점은 사실인 듯하다. 결국 종회는 속전속결을 단행하고 측근에게 잘되면 천하(天下)를 얻을 것이오, 못 돼도 서촉(西蜀)으로 물러나 지킨다면 유비(劉備)처럼 될 것이외다.라 말한다.[12]
이에 종회는 264년 정월 15일에 성도에 도착해 옛 촉의 관리들을 초청해 태후( 명원황후)의 상을 당했고 태후가 남긴 조서를 거짓으로 만들어 종회에게 병사를 일으켜 사마소를 폐하도록 했다고 알려 반란군을 조성한다.
<강유전> 주석 《 화양국지》에 따르면 강유는 종회에게 먼저 위나라 장수들을 죽이도록 가르쳤고, 그 뒤 종회를 천천히 죽이고 위나라 병사들을 파묻어버릴것을 계획해 은밀히 유선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원컨대 폐하께서 며칠 동안만 모욕을 참으시면 신이 위태로운 사직을 다시 안전하게 하고, 빛을 잃은 해와 달이 다시 밝게 빛나도록 하겠습니다."
종회는 강유의 말을 들어 위나라 제장들을 다 죽이겠다고 호열 등을 가두고 엄중히 지키게했다. 종회는 위관은 남기겠다고 널빤지에 글을 써 "호열 등을 죽이고자 하오."라 위관에게 보였지만 위관은 허락하지 않았다. 위관과 종회는 이로인해 불신하고 위관은 군대에 종회에 대해 널리 말하게했다. 한편 종회의 측근 구건은[13] 호열이 혼자 구금된 것을 불쌍히 여기고 종회를 만나서 친병을 안으로 들여보내 음식을 나르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호열의 친병들이 감금된 호열에게 드나들게 되자 호열은 그의 친병에게 말하여 아들( 호연)에게 종회가 위나라 장수들을 다 죽이려한다는 편지를 보냈고 이 말은 전원에게 퍼졌다. 어떤 사람이 종회에게 "아문기독 이상을 전부 죽여야 합니다."라 말하나 종회는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강유전을 보면 위장들을 죽이고 위군을 습격하는 이런 일을 옆에서 조언한게 강유라는 뉘앙스가 보이며 자치통감에선 위나라의 제장들을 죽이라고 말한 사람이 강유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는 일을 결단하지 못하고 망설이면서 스스로 화를 재촉하였다.
지금까지 종회는 거짓으로 죽은 곽태후( 명원황후)가 남긴 조서를 만들어 반란을 일으키고 반대하는 부하 장수를 모두 감금하는데 까진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본인의 결단력 문제로 진행시키지 못했다. 그 사이, 18일 정오가 되자 감금당한 호열의 병사와 아들 호연이 군사를 이끌고 아버지를 구하러 쳐들어왔다. 종회는 놀라고 당혹해하면서 강유에게 말했다. "이 병사들이 와서 나쁜 행동을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오?" 강유가 말했다. "오직 마땅히 공격할 뿐이오!" 종회는 그제서야 병사를 파견하여 어지러이 싸웠다. 강유는 종회의 의병을 이끌고 싸워 대여섯 명을 직접 죽였다. 병사들은 강유와 결투하여 죽이고 다투어 달려가서 종회를 죽였다. 종회는 당시 39살이었고, 수백 명의 장수들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종회의 모함으로 호송되던 등애 역시 후환을 두려워한 위관과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전속에게 아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일족이 화를 입었다.
사실 이 대목에서 종회의 행동은 많은 의문점을 남긴다. 강유에게 푹 빠져서 군권이고 뭐고 다 돌려주고 강유의 제안대로 위장들을 죄다 죽이려는 모습은 강유에 대한 신뢰가 커서라고 퉁치기엔 지나친 부분이다. 위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조차 종회는 스스로 뭔가 하려는 모습 대신 놀라서 강유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매달리기만 했다. 오죽했으면 배송지가 '종회는 위장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버리고 강유에게 대군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자 하였다. 만약 위장들이 모두 죽고 병사가 강유의 손에 주어졌다면 종회를 죽이고 촉을 회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라고까지 평했다. 한편 삼국지집해의 지은이인 노필(盧弼)은 , "종회가 강유를 임용한 것은 그가 사마씨(司馬氏)의 일당이 아닌데다 망국의 장수로서 그 재주가 또한 임용할만 했기 때문이다."라는 평가를 내렸다.[14]
사마소가 이끈 대군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 종회의 난은 과연 실패로 끝나 종회는 이미 죽었고, 모든 것이 사마소가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2.7. 사후
종회는 원래 형 종육의 아들들을 키웠는데 형의 아들인 종옹은 종회의 반란을 수행하다가 함께 죽었다. 결국 종회는 반역을 저질렀기에 일가가 모두 죽어야 했고 형의 아들 종의 및 종준, 종천 등은 하옥되었으며 당연히 참수되어야만 했다. 사마소는 형식상으로 황제 조환에게 이를 상주했고 조환은 조서를 내렸다.비록 종회의 죄는 크지만 아버지 종요는 세 조씨( 조조, 조비, 조예)의 시대에 최고의 직위인 태사에 임명되었다. 또 그의 형 종육은 국사를 처리하는데 공적이 있었고 무엇보다 종육이 살아있을때 동생 종회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 중용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어서 그걸 보아 종준과 종천은 용서하고 관직과 작위를 그대로 하게 했다. 그러나 종회를 따라 수행했던 종의와 종웅의 자손은 멸족되었다.
이것은 공손강의 아들 공손황과 공손연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한데 결과는 정반대다. 공손강이 죽은 후에 공손강의 아우이자 공손연의 숙부였던 공손공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무능한 데다가 고자이기까지 한 공손공을 밀어내고 공손연이 찬탈했는데, 공손연의 형이었던 공손황은 당시 공손공에 의해 221년부터 낙양에 인질로 있었다. 공손황은 공손연이 장차 공손씨 일가를 망칠 것을 예감하고 당시 조예에게 공손연이 모반을 꾀하고 있으니 처리하라고 상주했지만 묵살당했다. 결국 237년 공손연이 난을 일으켰고 조예는 고유의 상소에도 불과하고 공손황과 그 일가를 죽였다. 결국 공손연도 토벌되어 멸족당함으로써 공손황의 예감은 적중했다. 다만 공손씨 일가는 종회 일가와는 다르게 사실상의 독립 국가였으므로, 타 세력 볼모의 특성 상 할 수 없이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안 그러면 타세력이나 이민족들로부터 볼모를 잡는 행위가 무용해지니 일종의 본보기인 셈.
한진춘추에 따르면 종회의 공조 상웅이 종회를 거두어 장사 지내주자 사마소가 상웅을 불러 책망했는데 상웅이 옳은 말을 하자 도로 보내주었다.
종회가 죽은 이후, 종회의 집에서 도론(道論)이라는 서적 20편을 얻었는데, 실제로는 형명가의 저작이었고 글이 종회가 쓴 것과 비슷했다.
장화열전에 따르면 풍담은 사마염에게 "사마소가 한계가 있는 종회를 우대해서 종회가 반란을 일으킬 마음을 품었다."고 말했다.
《 수신기》에 따르면 상제가 세 장군 조공명, 종사계(종회) 등으로써 각자 귀신들을 감독하여 사람들을 잡아가도록 하였다.[15]
3. 평가
인격 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승장이면서 패장 강유에게 이용당해 반란을 일으켜 전우인 제갈서와 등애[16]를 모함[17]하거나 죽림칠현 중 한 명이었던 혜강을 죽이고[18], 허저의 아들 허의조차도 길을 닦던 도중 실수했다는 이유로 죽여버리는 일련의 행동을 볼 때 인격적으로 절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허의가 만든 길을 종회가 건너던 중 말이 넘어지고 바로 촉이 공습해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가긴 했지만 이때 종회의 부하들 모두가 그래도 명색이 허저쯤 되는 공신의 혈육인데 함부로 죽이면 안된다고 반대했었다. 그럼에도 종회는 다 씹고 기어이 허의를 베고야 말았다. 허저 정도면 오자양장 다음가는 위나라의 공신급 장수이다. 이 역시 원인이 되어 종회와 척을 진 부하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종회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너도 나도 종회를 죽이겠다고 들이닥쳤고 종회 휘하의 병사들마저 대부분 이반해 버렸으니 평소 그의 인망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능력 면에서도 문제가 좀 있는데 종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명분이나 일처리도 허접하기 그지 없다. 지금까지 사마소에게 잘 붙어먹으면서 권력을 휘둘렸던 작자가 하루 아침에 사마소의 전횡을 비판하며 반역을 하는데 대체 누가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고 따르겠는가. 반란씩이나 되는 큰일을 도모하는데 정작 명분이 없는 게 문제였다. 그런 주제에 결단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상술했듯이 부하들한테 인심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주변에서 위장들을 가둔 이상 어서 죽이라고 한 것이 아마 종회에겐 거의 유일무이한 찬스였을텐데 종회가 망설이며 우물거릴 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고 그 사이 위의 제장들이 다 갇혔다는 소식은 위군 전체에게 퍼진 뒤였다.
더군다나 자신이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도 아닌 게 그 전에 소위 수춘삼반이라 불리는 왕릉과 관구검과 제갈탄-문흠의 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했다. 관구검은 최소한 해당 지역에서 인망이 있었고 최소한의 명분이 확실했으며 사마의 사후인 시점이고 아직까지 사마사의 능력이 검증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다. 제갈탄은 관구검의 반란을 반면교사 삼아서 인심 확보에 더욱 주력했으며 명분도 갖췄고 사마사가 죽고 난 이후라 타이밍마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제갈탄에게는 문앙이라는 인간흉기와 동맹인 동오가 있고 동오 역시 혼자서 무쌍을 찍는 정봉이 있었으며 위의 근심거리 중 하나인 촉도 이때를 틈타 군대를 움직였다는 기록도 있기에 확실히 승부를 걸어 볼만 했다.무엇보다도 수춘삼반 당시 종회는 매 반란마다 진압군으로서 종군하며 큰 활약을 하였기에 누구보다도 반란의 현장을 잘 알았다. 근데 종회는 반란씩이나 꿈꾸면서 인망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고 명분이 아예 없는 수준이었는데다 자기가 활용할 장수라고는 자기 사람들인지도 확실치 않고 본인이 일방적으로 러브콜을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던 촉한 출신 항장들인 강유, 장익, 요화 등 밖에 없으며 사마소와 중앙군이 건재하고 각 군의 장수들마저 병권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데도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거기에 등애를 견제하는 거까지는 좋았지만 지나치게 견제하는 바람에 사마소의 의심을 샀고[19] 위관의 경우 알면서도 막지 못했으며 반란을 일으킨 자신에게 찬동하지 않는 위의 장수들을 가두는 병크까지 저지른다. 당연한거 아닌가 싶겠지만 한두명도 아니고 거의 대부분의 장수가 찬동하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를 가둬 그 부하들을 적으로 만든데다 임시방편으로 가두기만 했을 뿐 병권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죽여서 후환을 없앤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허술한 일처리 때문에 반란이 성공하기는 커녕 오히려 역풍을 맞아 본인의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강유의 일족은 몰살당하고 촉한의 2세대 명장인 장익을 포함해 수백명의 장수와 이전 촉한의 태자였던 유선(劉璿)마저 살해당하는 성도대학살이 벌어지는 참사가 일어난다.
제갈탄의 난을 제압할 때 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똑똑해 보였고 사마소가 신뢰했던 점이나 세실신어 등에 그가 똑똑했다는 평가가 곳곳에 나오는 만큼 명성이나 능력이 제법 대단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 까보니 제갈각의 오만함과 자기 과신 및 막장 처세, 마속의 아집과 지휘능력부재, 위연의 불량한 성격과 무모함, 양의의 충성심 결핍과 개판인 대인관계, 이막의 증오심[20]이라는 단점이란 단점은 죄다 합쳐놓은 인간이었다.
그나마도 제갈각은 최소한 권력자에 오르기 전까지는 처세를 잘한데다 그 자신이 독단으로 실천해서 성공한 일이 많았다는 점에서 종회랑은 비교가 안 된다. 비록 명문가의 자제라거나 병크를 저질러서 일족이 몰살당했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마속의 경우도 실책을 저질러서 전쟁을 하나 말아먹은 거 뿐이지 자기 고집으로 명분 없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학살전을 초래하진 않았기에 종회보단 나은 점이 분명히 있다. 물론 둘 다 제갈탄의 반란, 남중정벌에 참가해 권력자의 신임을 얻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병신짓만 저지른 점은 비슷하다. 그리고 위연은 성격은 영 아니었지만 실력은 확실했고, 양의는 적어도 진짜로 촉한을 배신 하지는 않았다.
물론 아무 것도 안한 건 아니라 강유를 우대했고 성도 입성 후에도 촉한 출신의 관리들과 친하게 지내는 등 최소한의 관리는 했지만, 애초에 자기 수하도 관리 못하는데 이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가끔 고도의 촉까들은 성도대학살과 강유의 몰락을 순전히 강유 탓으로만 돌리는데 잘 생각해보면 강유의 불운은 종회랑 손을 잡은 거였다. 그리고 강유의 목적이 촉한의 부흥인 이상 좋건 싫건 야심가 종회와 손을 잡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성도 및 전 촉 지역이 점령당하고 촉장들은 군권을 잃어버리고 유선도 위군의 수중에 넘어간 상황에서 강유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포기하고 은퇴해 조용히 여생을 마치던가, 아니면 빠른 시일 내에 위나라 세력을 이용해 내분을 일으켜 촉의 부활을 시도하는 도박 뿐이었다. 사실 시간을 오래 끌 수도 없었다. 오래 끌면 국력이 넘사벽인 위 정부에 의해 촉 영토 전체가 완전히 통제되고 유선을 비롯한 황족들은 위로 갈 테니까. 실제로 촉정벌 이후 등애는 촉의 병사들과 촉이 힘들게 쌓아놓은 재산들을 고스란히 위나라 것으로 이용해 동오를 칠 궁리를 시작했으며 성도반란 이후 촉의 구신들과 황족들은 낙양으로 끌려 가고 남아있던 촉장들은 진나라 장수로서 서촉을 다스리는 처지가 된다.
여기서 만일 종회가 명분, 인망 관리, 결단력 등 뭐 하나라도 제대로 갖췄다면 성도를 점령하고 위와 대치하면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강유는 촉한의 부흥을, 종회는 자기 나라를 세우는 것을 염두에 뒀으므로 각자의 목적이 달랐으니 암투는 감수해야겠지만. 다만 종회가 자립하는 경우에도 소수의 촉한 정벌군의 병력만 가지고 위나라 본토의 사마씨랑 촉한 현지인 간에 고립되는 상황이니 위나라 정벌군에 토벌당하거나 강유가 통수쳐서 촉한 부흥을 시키는 와중에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다분하였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반란을 실행한 그 순간부터 살해당하는 것은 확정이었다는 것.
3.1. 종회에 대한 어록
會
見利忘義, 好爲事端, 寵過必亂, 不可大任.
종회는 눈앞의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어버리고 사달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며, 총애가 지나치면 틀림없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대임을 맡길 수 없습니다.
『 진서(역사책)』, 「후비전(后妃傳)」, 왕원희
종회는 눈앞의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어버리고 사달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며, 총애가 지나치면 틀림없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대임을 맡길 수 없습니다.
『 진서(역사책)』, 「후비전(后妃傳)」, 왕원희
鍾會不得遂其亂者, 以有衛瓘故也. 語曰: 『猛獸不如群狐』, 卿等十餘人, 何懼王鎭惡!
종회가 결국 반란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위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맹수 한 마리가 여우 떼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열 명 남짓 되는 경들이 어찌 왕진악을 두려워하느냐![21]
『 자치통감』, 유유
종회가 결국 반란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위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맹수 한 마리가 여우 떼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열 명 남짓 되는 경들이 어찌 왕진악을 두려워하느냐![21]
『 자치통감』, 유유
4. 이야깃거리
4.1. 동성애자?
소수의 마니아 중심으로 반 장난식의 게이설이 제기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저 낭설로 치부하기엔 상당한 근거를 갖춘 견해인데, 일단 중년의 나이에 처자를 뒀다는 기록이 일절 없다. 종회는 역모죄로 죽었으니 보통 같으면 '삼족을 멸했다'는 일반인에게도 상당히 친숙한 서술이 뒤에 붙어야 한다. 그러나 종회의 경우, 맡아 기르던 조카들에 대한 처분만이 거론될 뿐이다. 서술이 아예 없으면 그냥 일족을 멸했는데 안 적었구나 할 법한데, 조카들에 대한 처분은 적어두었으면서도 처자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진짜로 '자식'과 '처가'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는 21세기 현재보다 결혼 연령이 훨씬 낮았고 지체 높은 집안 자식이라 혼담도 많이 들어왔을 게 분명한지라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다.[22] 다만, 종회 본인도 매우 특이하게 태어나긴 했다. 그 아버지인 종요의 나이가 70살이 넘어간 이후에 태어난 게 종회라서 종요가 천수를 모두 누리고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요가 사망했을 때의 종회의 나이가 불과 5살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는 21세기와는 달리 '인권'이라는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시대였던지라 원한다면 어디 오랑캐 진영에 쳐들어가서 여자 하나 잡아다가 결혼해도 되는 시대였고 실제로종회가 꽃미남이면서 여장 취향을 가진 하안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세설신어에 따르면, 당시 종회는 옥에 갇힌 하후현에게 狎하려 했다고 한다. 狎는 허물없이 친하게 지낸다는 뜻이지만 희롱한다는 뜻도 있다. 원래 하후현과 아무 교분도 없고 16세나 연하였던 종회가, 이제 사형을 눈 앞에 둔 그를 상대로 갑자기 집적거렸다는 이야기. 하후현은 "내가 비록 형장의 길로 가는 사람이지만, 그대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다."고 종회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만약 순수하게 하후현을 존경해서 교분을 갖고자 한 것이라면 "내가 비록 죽을 사람이지만" 이라는 표현으로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희롱했다는 의미 쪽이 문맥에 맞는다. 여담으로 이때 하후현의 심문을 담당한 정위가 종회의 형 종육. 종육은 죽음 앞에 의연한 하후현의 모습에 울며 조서를 꾸몄다. 하후현 시점에서 보면 죽는 마당에 형은 눈물 쏟으며 조서 쓰고 생전 처음보는 동생은 난데없이 추파를 던지는 요상한 그림이 나온다.
촉 정벌 이후 반란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어처구니없는 행보도 강유한테 반해서 그랬다고 하면 말이 되긴 한다.[23][24]
물론 단순히 인성이 덜되고 성격이 더러워서 결혼을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후현을 희롱했다는 것도 출처가 세설신어라서 신빙성이 높지는 않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당시에도 이미 종회가 게이였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일 수도 있다. 현대에도 부유하고 잘생긴 유명인사가 이성에 관심을 안보이면 동성애 스캔들이 도는데 권세 있으면 여자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던 그 시절 중국에서야.
4.2. 마더 콤플렉스?
종회의 저서로 자신의 어머니 장창포에 대한 기록을 담은 《종회모전》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4세에 효경, 7세에 논어를 가르치는 등 현대의 강남엄마 치맛바람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극성스런 교육을 받았으며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또 종회도 그런 어머니를 많이 따랐다는 내용이 상당히 자세히 나온다. 이를 통해 어머니의 그늘이 종회의 생 전반을 뒤덮고 있었고 마더 콤플렉스 증상이 있었다는 추측까지 무리없이 가능한데, 이 때문에 여성과 만나는데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이런 설을 채용한 것이 시미즈 아키의 괴력란신 쿠완 4권에 수록된 단편 종회전. 여기서의 종회는 종요의 총애를 얻기위해 자신을 이용하기만 하고 한 번도 사랑해주지 않은 어머니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여성을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론 자랑스런 아들이 되어 그런 어머니에게 사랑받기를 평생 갈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종회/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링크된 인물화를 보면 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종회가 반역을 일으킨다는 암시를 담았다.
[2]
이복형
종육의 자가 치숙(稚叔)으로 셋째를 뜻하는 숙(叔)자가 들어가 있으며, 종회의 자에 넷째를 뜻하는 계(季)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아 종회는 넷째이며, 종육은 바로 손윗형임을 짐작할 수 있다.
[3]
양력으로는 동년 3월 3일
[4]
이는
고조부 종호(87 ~ 155)가 아버지 종요를 봤을 때의 나이보다 9살이나 많은 것이다. 참고로 종호는
증손자 종요를 본 뒤에 사망하였고, 아버지의 나이가 아들보다는 고조부에 더 가까운 셈이 되는 것이다.
[5]
조조가 자신의 장자방이라 칭한 것으로 유명한 그 순욱과는 동명이인이며, 같은 집안 사람이다. 다만 저 문서 보면 알겠지만 조조의 그 순욱과는 인성이나 능력이 무지막지한 차이가 있는 인물...
[6]
이건 종회 본인이 저술한 종회모전에서 나온 기록으로 종회 스스로는 '우리 엄마가 이렇게 잘났어'라며 기록해 놓은 모양이다.
[7]
사마소의 이 말은 "네 말이 맞다면 네가 종회 때문에 피해 입을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8]
개인적으로도 강유를 좋아했던지 검각농성 당시에 그에게 편지를 보낸적도 있었고 항복한 강유의 태도를 보고 높게 사기도 했고, 자기 수레에 같이 태우고 다니며 중원 최고의 명사들인
하후현과
제갈탄보다도 높이 평가했다.
[9]
거기에 종회는 촉을 정벌할 때 제갈량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며 그에게 경외를 표했다는 기록까지 있는 걸로 보아, 종회는 아무래도 한 세대 전 자신의 나라를 위협한 최대의 국적과 그의 후계자격인 강유에 대해 여러가지로 의식하고 있었던듯.
[10]
세어에 따르면 종회가 다른 사람의 글씨체 모방을 잘해서 검각에서 등애에게 오고가는 편지를 가로채 등애의 편지는 불손하고 교만하게 만들고, 사마소의 답서도 손을 댔다. 이후 등애가 모반할 조짐이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
[11]
종회의 난이 진압된 후에 등애는 누명을 벗고 풀려나는 듯했으나, 평소 등애에게 악감정도 많았고 등애가 보복할 것을 두려워한
위관과
전속에 의해 살해당한다.
[12]
이 발언은 혜강에 대한 와룡발언, 제갈량 사당-장완 묘 참배 등과 함께, 종회가 유비와 제갈량이 세운 촉한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적국의 수괴(?) 제갈량의 사당에 굳이 참배를 하고 그 묘를 함부로 건들지 못하게 하며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의 아들 장빈에게 편지 보내서는 '나도 제갈첨이나 당신처럼 같은 천지의 기를 받았다, 우리는 사실상 동류'라는 드립을 치는가 하면 강유에게는 끝없이 구애(?)의 메시지를 보냈다. 만약 종회가 강유를 제갈량의 총애를 받던 후계자 위치로 보아서 '강유=제갈량'의 보좌를 받는 나는 유비와도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면 이 '나도 유비처럼 될 것이다' 발언이나 강유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신뢰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역사상 최초의
촉빠
[13]
구건은 본래 호열의 부하였는데, 호열이 그를 사마소에게 추천하였고, 종회는 사마소에게
구건이 자기를 따르게 해달라고 정하여 그를 매우 신임하고 아꼈다. 상식적으로 호열을 감금한 시점에서 호열이 추천한 구건 역시 의심이 대상이 되어 구금되어야 하건만, 이 때 종회는 이미 그럴 만한 정신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
사실 간단히 종회가 '야망에 비해 능력이 부족했다'고 보면 설명이 되긴 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유비처럼 천하를 도모해보고, 안되면 서촉에 만족해 익주에 기반한 지배자가 되려고 했다. 다만 그의 능력이 현저히 부족해 강유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렇기에 그에게 전권을 주고 따르다가 일이 틀어지니 별 도리없이 망한 것.
[15]
즉 죽은 뒤 저승사자가 되었다고 민간에 알려진 종회.
[16]
다만 등애 또한
촉한을 치는 과정에서
병사들의 원망을 많이 샀으며 아군과 적군 가리지 않고 시신들을 쌓아 올린 전공기념물 경관을 세워 당시에 크게 논란이 되었다. 다만 호의적으로 보는 시각에선 위군과 촉군을 차별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쉴드 치기도 한다. 물론 냉소적인 측에서는 자신을 따라 고생한 아군의 시신을 자신의 전공을 과시하는 것에 써먹은 해괴하고 끔찍한 짓거리라고 평가한다.
[17]
등애의 보고서를 전달하는 부하를 잡아다 서신을 등애의 필체와 똑같이 베껴 날조해서 불경한 내용으로 적은 보고서로 바꿔치기 했다.
[18]
《
세설신어》에선 원래 종회가 혜강을 흠모하고 친교를 맺고 싶어했으나 혜강 쪽에서 그를 무시하고 매몰차게 대하자 앙심을 품었다고 적고있다.
[19]
하지만 이는 의심이 많은 사마소의 성격에서 기인했다. 실제로 사마소는 이후 등애가 무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도 등애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아 끝끝내 등애를 복권시켜주지 않았다.
[20]
종회 역시 이막처럼 사람을 잘 증오하는 성격이다. 허의가 고의도 아니고 실수를 저질렀다고, 더군다나 허의는 무려 허저 씩이나 되는 공신의 아들인데도 그냥 참수해버릴 정도로 허의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있었는데 이막 역시 유비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심만 넘쳐나는 인물이었고 유비한테 '너같은 사람은 내가 힘이 없어서 억지로 섬긴다'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죽게 생긴 걸 제갈량이 구명해줬더니 나중에 읍참마속 일로 제갈량에게 개기다 짤리고 그것 때문에 제갈량에 대한 증오심만 넘쳐나서 제갈량이 사망했을 때 쌤통이라고 했다가 유선에게 참수당했다.
[21]
유유는 왕진악을 믿을 수 없다는 심전자와 부홍지의 발언에 대해 왕진악이 만약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자멸했을 것이라며 일축했다. 하지만 위의 발언을 살펴보면 북벌군의 핵심인 왕진악을 종회에 비유한 것인데 만약 왕진악이 반기를 들려고 하면 심전자가 왕진악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뜻이 된다.
[22]
정사 삼국지 종회전에서 종회가 촉을 멸망시킨 후 치하하는 조서 내용 '종회에게 식읍 1만호를 더함과 더불어 아들 2명을 정후로 봉하고 각기 식읍 1000호씩을 주었다'을 바탕으로 종회에게 자식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오역으로 '아들 2명'은 종회가 아니라 등애의 아들이다.
[23]
백약을 중원의 명사에 비교하자면 공휴나 태초도 그보다 더 뛰어나진 않을 것."이라는 종회의 평가는 발언자는 물론 논하는 대상,대조군 두 명,심지어 들어주는 사람(두예)까지 삼국시대 말기의 슈퍼스타들이라 유명한 발언이다. 다만 제갈탄과 하후현(그리고 강유)가 각각 유명한 포인트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왜 저들을 나란히? 싶은 반응이 나올 수도 있는데. 사실 하후현에 비해 좀 묻히는 감이 있다 뿐이지 제갈탄도 나름 당대의 손꼽히는 셀럽이었다. 하후현의 최고 간지 일화가 사실 제갈탄의 일화였다는 기록도 존재하고. 한편으로 제갈탄/하후현 두사람이 반사마씨 세력이었기 때문에 하필 이들을 들먹인게 종회의 역심과 관련있다는 해석도 있는데, 하후현이야 뭐 종회 본인도 확실히 껄덕대긴 했다만 제갈탄은 종회 자신이 기책을 내가며 진압에 앞장섰던 입장이라 미묘. 물론 종회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훨씬 간단한 접근법도 있다. 바로 얼평이었다는 것. 하후현이야 말할 필요가 없는 자체발광 미남이었고. 제갈탄 역시 그의 사위였던 왕광이 아내에게 '장인 어른은 그렇게 잘생겼는데 자기는 왜 이 모양임'이란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역으로 털렸다는 일화가 있는데, 아내 얼굴에 대해 장모님도 아니고 장인어른을 들먹인걸 보면 확실히 한 얼굴했던 모양. 결국 종회의 발언은 강유가 하후현 못지 않게 낭랑하고 제갈탄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기품있는 얼굴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것.
[24]
다만 말하는 대상이 두예라는 점에서 이 시점에서 군사 분야는 물론 이렇다할 능력을 드러낸 바 없는 그를 종회가 눈여겨 봤다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하안 살롱 붕괴 후 왕필, 하후현, 부하까지 연달아 죽어버려 지적/철학적 교류에 대한 갈증이 심각했던 종회가 훗날의 좌전벽이자 경전 연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길 인재인 두예를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만약 이 관점에서 접근할 경우, 문제의 발언과 얽힌 인물 중 종회, 두예, 강유 모두가 무장이지만 경서에 꽤 통달해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제갈탄이 애매하지만), 종회가 한 것이 얼평이 아니라 이런 '인텔리' 적인 동질감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