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3:14:06

고평릉 사변

고평릉의 변
高平陵之變
시기
249년
장소
위명제의 매장지 고평릉
원인
조위 황실과 권문세족의 관계 파탄
교전세력
진압군 (조상 파벌) 반란군 (사마의 파벌)
지휘관
황제 조방
대장군 조상[1]
이부상서 하안
산기상서 정밀
시중상서 등양
형주자사 이승
사예교위 필궤
대사농 환범
태부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사마부
태위 장제
진무장군 손례
결과
사마의, 조위 정권 장악
영향
조위 멸망과 서진 개국의 기틀 마련

1. 개요2. 배경
2.1. 정권을 잡은 조상과 사마의2.2. 사마의 축출과 조상의 집권2.3. 조상의 권력 남용과 그에 대한 반발
2.3.1. 조상 정권의 횡포는 프로파간다인가?
3. 과정
3.1. 조상은 왜 사마의를 믿었는가?
4. 결과
4.1. 사마의 사후4.2. 끝없는 숙청, 찬탈의 가시화
5. 창작물에서의 묘사
5.1. 84부작 삼국지5.2. 신삼국
5.2.1. 조씨 친족의 견제5.2.2. 사마의의 대응5.2.3. 조씨의 몰락과 사마씨의 정권찬탈5.2.4. 고평릉 사변의 상징성
5.3. 진삼국무쌍 시리즈5.4. 대군사 사마의5.5. 삼국지 공명전5.6.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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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49년, 위나라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켜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대장군 조상과 그 형제, 일파를 몰살한 사건이다. 이로써 위나라의 세력 판도는 조씨 가문 중심에서 사마씨 가문 중심으로 바뀌게 되며, 이는 다시 위나라가 멸망하는 시발점이 된다.

당시 위나라의 연호를 따서 정시(正始)정변이라고도 한다. 코에이 <삼국지> 같은 일본 창작물에서 주로 이렇게 표시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 표현이 일본식 표기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중국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2. 배경

2.1. 정권을 잡은 조상과 사마의

238년 위나라의 제2대 황제인 명제 조예가 죽어갈 때 대장군 조상과 사마의는 명제의 측근이었던 유방(劉放) 손자(孫資)의 지지를 받았다. 사마의의 공손연 토벌 후 적시 귀환으로 조우[2]를 앞세운 정적 하후헌, 조조(曹肇)[3], 진랑 일파와의 알력에서 우위를 점해 명제의 고명대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239년 조예가 붕어하고 어린 조방이 제3대 황제로 즉위하자 고명대신의 명분으로 정권을 잡았다.

2.2. 사마의 축출과 조상의 집권

조상은 한동안 사마의를 후대했으나 점차 경계심을 품고, 인척이었던 하후현을 끌어들이면서 사마의와 대립했다. 조상은 등양 이승의 권유에 따라 사마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했던 흥세 전투의 패배 후 정밀의 계책에 따라 사마의를 명예직인 태부로 높이면서 병권을 박탈해 병권을 독점하고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권력을 독점한 조상은 사치와 낭비에 빠졌으며, 파당을 조직하여 측근들을 중용하고, 500여 명의 빈객을 거느렸다. 그중 조상 세력의 중심이었던 자들은 사창팔달이라고 불리었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4] 하안, 등양, 정밀, 이승, 필궤 등이 조상의 측근이 되어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조상은 하안, 등양, 정밀에게는 상서 벼슬을 내리고 이승은 하남윤, 필궤는 사례교위로 삼아 요직과 수도 낙양에 관련된 직위를 측근들에게 맡겼다. 군권의 통솔에 있어서도 동생 조희를 중령군, 조훈을 무위장군, 조언을 산기상시로 삼고, 각각 어림군 3,000명을 거느리게 하며 맘대로 황궁에 드나들도록 했다.

2.3. 조상의 권력 남용과 그에 대한 반발

조상이 전횡을 부릴 때 정밀과 필궤는 꾸준히 사마의를 조심하라고 충고했기에 조상의 사마의에 대한 경계는 더욱 심해졌다. 이에 사마의는 정처인 장춘화가 죽은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며 마치 병이 심해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했다.[5] 사마의는 이미 젊은 시절 무제 조조를 속이기 위해 오랫동안 꾀병을 부렸던 적이 있었던 만큼[6] 이미 썼던 전략을 말년에 또 사용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때의 연기는 성공적이었다.[7]

이때 형주자사로 부임하러 가던 조상파의 이승이 도중에 사마의의 저택을 방문했다가 그의 연기를 눈으로 보고는 이를 사실로 여기고
"지금 주상이 아직 어리셔서 천하가 명공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명공의 옛 풍질이 재발했다고 하더니 존체가 이 지경일 줄 어찌 짐작했겠습니까!"
라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이에
"죽을 때가 머지 않은거 같다, 그대는 마땅히 본주로 돌아가면 공훈을 세우도록 하고 (내 아들) 사마사, 사마소 형제와 친한 사이니 그들을 저버리지 말아 달라."
면서 우는 사마의의 연기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가 이승은 마땅히 그리하겠다고 탄식했다. 이승은 조상을 만난 자리에서
"태부께서 병환이 다시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이니 애처로운 일입니다."
라며 눈믈을 흘렸다. 이승의 말만 듣고 조상은 안심하고 종종 사냥을 즐겼다. 환범은 사마의가 병상에 누워있음에도 조심하라고 조상의 동생 조희와 함께 간언을 했으나, 조상은 그중 어느 것도 듣지 않았다.

이는 당시 조상 일파의 핵심인사들도 조위 최대의 국적 전장에서 상대한 '영웅' 사마의에 대해 견제는 했지만, 그를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오히려 이승의 경우처럼 어리고 정통성마저 희박한 황제 조방이 재위하는 시국에서 아직 저런 거목이 쓰러질 때가 아닌데 저리되었다는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드러내는 인사까지 있었을 정도니...그만큼 당대 조위 조정에서 사마의가 가지고 있었던 위상과 세력이 거대했기에 견제한 것이지, 그 외 사마씨 일파에 대해서 정적이라기엔 오히려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줬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명제 조예 사후 사마씨가 군권, 재정권, 인사권을 다 쥐고 있었고, 하안이 차기 사마씨의 가주인 사마사, 하후현과 함께 어울렸다. 조상 정권은 인사 관계에서 무른 구석이 있었다. 조상과 사마의가 대립한다고 해도 사마의는 이승이 봤듯이 언제 죽을지 몰랐고 명예직으로 빠져도 상관없을 고령이기도 했다, 조상 정권은 사마의를 뒷방 늙은이로 모는 것까지는 있었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조씨 종친의 일원이었던 조경은 귀족들의 전횡과 황족들의 권력 한계에 대해 지적했으나 조상은 듣지 않았다. 어찌보면 조상도 결국 위나라 황족의 힘을 기르는 것에 부정적이었거나 호족들을 제어할 힘이 부족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조경이 상소를 올린 6년 후 조씨는 결국 실권을 잃는다.

한편, 이때 심복 등양은 인재 등용을 하면서도 너무 대놓고 돈을 받아 장애라는 사람으로부터는 장애의 부친의 첩을 받기도 했고, 조상 일파에 반대하는 '규태'라는 사람을 무거운 형벌에 처했다. 사마기라는 사람이 이걸 보고 미친 짓이라며 반대했지만 결국 겁에 질려 1년 만에 죽기도 했다. 필궤는 왜곡된 상소로 노육을 관직에서 내쫓기도 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은 정밀로 여러 차례 탄핵하고 논박했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했지만 조상파인지라 뭐 별 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다. 당시 나돌던 방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을 정도였다.
대각 중에 개 세 마리가 있다. 두 마리가 물어뜯으려 덤비면 당할 수가 없고, 한 마리는 묵을 믿고 저낭을 만들어낸다.[8]

개 세 마리라는 것은 하안, 등양, 정밀을 가리키는 것이고, '묵'(默)이란 조상의 어렸을 때 이름이다. 세 마리 개가 모두 사람을 물어뜯으려 덤비는데, 그중에서 정밀이 특히 심하다는 뜻이었다.

대신들은 이런 조상의 월권과 그 측근들의 전횡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재야에서도 조상의 평판이 떨어져 양호는 조상의 초빙을 거절했으며, 이미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던 죽림칠현 중 한명인 완적은 칭병하여 벼슬을 버렸다. 248년 12월 28일에는 점술가 관로가 하안과 등양에게 패망을 예견했지만 이들 또한 늙은이의 헛소리라며 무시해버렸다. 사마의의 정변 때 태위 장제 고유를 비롯한 노대신들과, 명문가이던 진태[9] 등 여러 관료들이 사마씨의 편을 든 것도 이러한 것에서 비롯되었지 않나 여겨진다.

조상 정권의 구상은 하안을 정점으로 하고, 사마사 하후현이 정권의 보좌가 되는 방식으로 사마씨를 포섭하는 형태로도 보인다. 하안과 하후현은 현학을 통해 학계까지 주도하고 있었고 사마사는 하안, 하후현과 자주 어울렸다. 사마소는 아버지 사마의와 형 사마사가 고평릉 사변을 벌이기 전날에야 상황을 깨닫고 당황했으며 훗날엔 그답지 않게 하후현을 살려달라고 형 사마사에게 청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의는 시대의 흐름을 뒷 세대에 맡기고 고문으로만 남을 수도 있었지만, 결국 조상 일파와 같이 가려 했던 차남의 길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야심을 품은 장남의 길을 선택한다.

2.3.1. 조상 정권의 횡포는 프로파간다인가?

일각에선 조상 정권의 이런 행동이 후대에 과장되었으며, 조상과 그 일파가 호족들의 이해를 침해하는 개혁을 실시했거나 그런 시도를 하여 호족들의 반발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또한, 훗날 중국 대륙을 통일한 것은 사마씨 일가의 서진이다. 그러니 사마의가 조상 정권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고평릉 사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조상 정권의 무능함과 횡포를 부각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하후현의 경우, 도관고과법을 도입해 공•과로 관리의 재능과 자질을 평가해 무제 조조 시절의 유재시거의 기풍을 부활시키려 했고, 일단의 내정개혁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10] 그는 사마의에게도 구품관인법의 개혁을 권유하나 좋게 거절당한다.[11] 물론 하후현 문서에도 나오듯이 그 개혁이 당시 위나라에 먹힐 거라는 보장은 없긴 했지만 말이다.

정사 삼국지》(三國志)와 그 주석에서는 조상 일파의 정치를 거의 폐정으로 서술하나, 중간중간 보면 그렇지 않은 기록들도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하후현전>에 주석으로 달린 《세어》(世語)에선 하후현이 중호군(中護軍) 시절에 임용한 인재들 중에 준걸들이 많았다고 적고 있으며, <조진전> 조상 부분 주석으로 달린 《 위략》(魏略)에선 핵심 인사 중 한 명인 이승에 대해
'이승이 관원으로 봉직할 때 일찍이 직무에 적합하다는 평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라고 했다. 이는 《 진서》(晉書) <부현전>(傅玄傳)에서 하안의 인재 선발이 성공적이었으며, 이승 역시 직무를 잘했다는 기록과 합치된다.

또 등양으로 인해 하안의 인재 선발이 실패했다는 《위략》의 다른 기록도 있으나 이는 그만큼 조상 정권 내에서도 긍정적인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상이 혼재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정사 삼국지》 <조진전> 조상(曹爽) 부분에서 인용된 《위략》의 또다른 기록을 보면 하안을 설명할 때
"정시 초, 조상에 몸을 굽혔고 또 재능이 있었으므로, 조상이 하안을 임용하여 산기시랑으로 삼았고 시중, 상서로 승진시켰다.(중략) 하안이 상서가 되어 선거(選擧)하는 일을 주관했는데 그와 오랫동안 사귀던 자들 여럿이 발탁되었다."
고 하면서 하안이 인재 발굴에 있어서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조상 정권은 훌륭했는데 승자인 사마씨의 서진 왕조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지을 순 없다. 사마씨가 집권한 서진 시절 당시 승리자였던 서진 세력이 남긴 서술 등을 참고하여 서진의 관리였던 진수의 손에 《정사 삼국지》가 쓰여졌다는 점은 분명 주의깊게 살펴야 할 대상임에는 분명하고, <위지> 전반에 보이는 진수의 태도가 석연찮은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 사실의 누락/축소 정도이고, 노골적인 왜곡과 거짓 기술까지 간 경우는 흔치 않다.

종합하여 《정사 삼국지》만이 아니라 《정사 삼국지》와 관련없는 다른 주석에서도 조상 일파의 폐정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기록도 분명히 있다는 점[12], 하후현이 조상 아래서 내놓은 개혁론이 호족들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했다는 점, 《진서》가 당태종 시기에 쓰여졌기에 자료 취득에 있어서는 앞의 저서들보다 아쉬운 데다가 기록의 오류가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결국 저 당시 시대에 대한 더 정확한 역사적 사료가 나오지 않는 한은 양쪽 다 가능성이 있다고 밖에 결론지을 수 없다.

3. 과정

정시 10년( 249년) 정월 갑오일, 환범이 예전에 형제 중 한 명은 남겨두라고 조언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이 황제 조방을 모시고 세 아우 조희, 조훈, 조언과 심복 하안, 어림군 등을 거느리고 조예의 무덤인 고평릉으로 참배를 가자 사마의는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함께 심복 장수들, 사마사가 비밀리에 양성한 사병 3,000여 명을 동원해 수도 낙양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사마의는 사도 고유에게 대장군직을 맡겨 조상의 진지를, 태복 왕관에게 중령군직을 맡겨 조희의 진지를 점거하게 했고, 자신은 명제 조예의 황후였던 곽태후를 찾아가 태위 장제와 상서령 사마부를 시켜 표문을 장서하도록 했다. 조상은 낙양 주둔군의 진채를 전부 낙양성 안에 배치했는데, 그로 인해 낙양성이 사마의의 수중에 떨어지자 조상의 군대는 조상과 단절되어 버렸다. 조씨 형제들이 전부 낙양성 밖에 있었던 탓에 사마씨의 세력에게 점거된 병사들과 장교들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사마의는 적어도 이들 군대가 조상 형제의 명령을 받지 못하게끔 할 수 있었다.[13]

조상의 파벌이었던 수문장 엄세가 궁수들을 이끌고 사마의를 공격했으나 편장 손겸의 설득으로 중지했고, 조상의 수하였던 사마 노지가 참군 신창과 상의해 누이 신헌영과 함께 황제 조방을 찾아갔다. 한편 사마의는 대사농 환범도 중령군으로 불러들였는데, 환범은 이에 응하려다가 황제를 끼고 있는 조상에게 붙어야 유리하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황제가 있는 조상 측으로 마음을 바꾼 후 부하 사번을 물리치고 겨우 낙양성을 빠져나갔다.

사마의는 허윤 진태를 불러 조상에게 항복하면 병권만 거두지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게 했고, 전중교위 윤대목에게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급보를 들은 조상이 낙양성 내에 있는 가족의 처지를 생각하며 망설이는 동안, 환범과 주부 양종은 군사를 일으켜 천자 조방과 함께 허창으로 이동, 사마의를 무찌르자는 강경 대책을 주장했다. 환범도 조상에게 황제를 끼고 있는 장점을 이용해 허창으로 가서 외병을 불러들이고 허창에서 항전을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미 조상은 겁을 먹었으며 낙양성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되어 그 진언을 무시했다. 다시 조희에게 조상 일족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며 결단을 촉구했으나, 조희는 듣지 않았다. 이에 애가 탄 환범은 조희에게 그의 직속 별군과 낙양전농은 성 밖에 있으므로 쓸 수 있으며, 허창에 가면 무기가 있고 군량은 자신의 직임인 대사농을 이용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조희는 또다시 듣지 않았다.

당시 사마의는 겨우 낙양 주변에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훗날 사마씨에 대놓고 반기를 드는 세력까지 있었단걸 고려해 봤을 때 비록 무능력하다 해도 조상의 직위가 대장군이었던 만큼 그가 대장군부가 있는 허창으로 가서 어린 황제인 조방을 앞세워 사마의 일당을 역적으로 선포하는 한편, 비상명령을 발동한 후 지지세력을 있는대로 긁어모아 사마의 일파와 죽기 살기로 싸웠다면 어쨌든 낙양 주변에만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마의보다는 세력 자체는 조상이 앞서는 형태라 판세가 뒤집어졌을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대가 약한 조상은 허윤과 진태, 윤대목이 잇따라 명령을 전해오자 결국 싸우지 않고 병권을 고스란히 넘기기로 했다.

이때 병권을 넘기기로 결정한 조상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별로 잃는 거 없이 부가옹(富家翁, 돈 많은 늙은이)으로 살 수 있다.
기가 막힌 환범은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내어 울며 말했다.
조자단은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당신이 낳은 자식들은 개새끼나 송아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쩌다 오늘날 당신의 자식들에게 연좌되어 일족이 멸망하게 된 겁니까!

조상이 대장군의 인수를 허윤과 진태에게 넘기자 군사들은 모두 흩어지게 되었고, 몇몇 관료들만이 남아 사마의에게 투항했으며, 사마의는 그들을 저택에 감금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된 후 사마의는 환관 장당을 고문해 조상 일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증언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조상의 측근 6인을 옥에 가두고, 조상은 물론이고 세 형제를 포함한 그 가족과 일당 모두를 붙잡아 족멸하며, 재산은 몰수해 국고에 넣어 후환을 끊었다. 일생일대의 도박을 벌였던 환범 역시 일족이 몰살당했다. 오로지 조상의 종제인 조문숙의 아내 하후영녀만이 살아남아 양자를 두어 조씨의 대통을 이었다. 이후 사마의는 태위 장제의 건의로 노지와 신창을 복직시키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렇게 조상의 죄를 다스릴 때, 하안을 옆에 두었는데 하안은 저 혼자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욕하면서[14] 살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사마의가 하안에게
죄인은 모두 8족
이라고 말하자 하안은 필사적으로 살겠다고 정밀, 등양 등 7족을 말했지만 사마의는
아직 부족하오.

라는 대답을 했다. 하안이 이에 급히 자신을 말하는 거냐고 하자 사마의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이들을 모두 죽였다.

나머지 조상 일파인 하후현은 면직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승진해 복귀했지만 5년 뒤 황제 조방의 친위 정변 모의에 참여하면서 결국 삼족이 멸해지고 친척들은 한반도의 낙랑군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양호를 조상 일파로 끌어들이려고까지 했었던 왕침은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용서받았다.[15]

이후 사마의는 승상에 봉해지고, 구석의 예우가 내려지면서 병권을 완전히 장악해 이로써 사마씨가 조위 제국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다만 사마의는 구석의 예우를 거부함으로서 자신의 야심을 갈무리했다. 그 나이도 이제 칠순이라 굳이 그가 전권을 다 잡는다는 인상을 줄 필요없이 뒷일은 믿음직한 장자인 사마사에게 맡기면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3.1. 조상은 왜 사마의를 믿었는가?

조상이 순순히 군권을 넘기면 권력만 거두고 살려주겠다는 사마의의 약속을 믿고 일체의 저항을 포기한 것을 두고서 멍청한 겁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이후의 전개를 알고 있는 후세 사람들 입장에서나 그렇지 당시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비판받을 정도로 멍청하고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우선 환범 등이 허창으로 건너가서 항전하자고 주장한 것은 결과만 봤을 때는 현명한 선택으로 보이지만, 당시 조상 입장에서 보면 그리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선택이었다. 당시 그 곳에 있었던 조상과 그 측근들은 실전 경험이란게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흥세 전투로 거하게 말아먹어 본인들의 입지만 거하게 축소시킨 전적이 있는 반면,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 당시 그 제갈량과 싸웠을 정도로 뛰어난 당시 위나라 최고의 명장이었다. 즉 그런 사마의를 상대하려니 두려운 게 매우 당연했고, 또한 사마의 정도 되는 사람이면 그들이 허창으로 가서 항전하더라도 그에 대한 대비책도 있을 거라고 쉽게 예상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가족들이 다 도성인 낙양에 남아있으니 걱정되고 두려운 것도 당연했으며, 이렇게 저렇게 병력을 모으면 된다고 했지만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마냥 믿기는 어려웠다. 일단 허창에도 병사는 제법되고, 훗날 사마씨가 정권을 잡자 반발한 세력이 꽤 있었으며, 당시 사마의는 겨우 낙양 주변에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 조상 일파가 황제 조방을 끼고서 사마의를 역적으로 선포해 들고 일어났으면 정말로 이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역시 당시 두려움에 휩싸인 조상 일파 입장에선 알 길도 없었고 알았다 한들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추가로 그렇게 해서 내전이 일어났으면 국적인 촉한 동오 얼씨구나 하고 그 기회를 노렸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그리고 위에서 계속 설명했듯 조상 일파의 군사적 능력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는데, 꾀주머니 환범이 있다 한들 진짜로 황제 조방을 끼고 허창에 가서 이기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애초에 환범도 무관은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마의에게 대항했다가 그대로 패배할 경우 괘씸죄 때문에라도 상황이 더 안좋게 흘러갈 가능성도 컸다. 싸움에 지고서 마지못해 투항하느니 차라리 가능성 없는 싸움은 포기하고, 사마의의 자비를 기대하는게 당시 상황상 더 나을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건, 후세 사람들이야 이후 전개를 알고 있으니 사마의의 목적이 제위 찬탈인 걸 알고 있지만, 당시 조상 시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우선 조상이 사마의를 그렇게 대놓고 핍박한 적이 없었다. < 삼국>을 비롯한 후대의 《삼국지》 창작물에서는 극의 재미를 위해 조상을 포함한 조씨 황족들이 수십년 동안 사마씨를 엄청나게 괴롭혀대서 사마의가 참다참다 결국 터진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남아있는 사료에서 그런 묘사는 거의 없다. 비록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긴 했다지만 그 대신 명예직일 망정 벼슬은 올려줬고, 그외에 뭔가 핍박을 가하지는 않았으며 아들인 사마사와 사마소를 비롯해 사마의 측근들과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왔었다. 그러니까 사마의를 조금 견제했다고는 해도 막 정치적 입지를 뒤흔들 정도로 거하게 한 적은 없으니, 사마의가 들고 일어나긴 했지만 단순히 실권을 뺏기고 명예직으로 쫒겨난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 정도라고 이해했기에 얌전히 정권만 내어주면 끝날 상황이라고 믿은 것이다.

역성혁명이란 건 후한 말처럼 기존 왕조가 통치에 실패해서 체제가 완전히 망가지고 민생이 파탄난 상황에서나 정당화되는 일인데, 이때 조위의 체제는 그 정도로 불안정하던 상황은 아니었기에 찬탈의 명분이 전혀 없었다. 비록 그때까지도 천하 통일은 엄두도 못냈고,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제갈량의 북벌로 위협받고 있었으며, 기껏 본인들이 군사를 끌고간 석정 전투, 흥세 전투 등에서는 대차게 말아먹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후한 말이나 삼보의 난 당시 처럼 나라 자체가 위태로운 개막장 상황은 아니었다. 촉한의 북벌도 꾸역꾸역 잘 막아내고 있었으며 삼국 중 조위가 국력이 가장 강했고 체제도 나름대로 유지되고는 있었다. 게다가 황제인 조방도 나이가 어리고 능력이 특출나진 않았다고는 해도 무슨 후한의 영제 조선 연산군처럼 암군이나 폭군인 건 아니었다. 그나마 문제라면 출신 성분이 불분명하다는 거였는데, 이것도 어디까지나 뒤에서 소문이 조금 나도는 수준이었지 진짜로 황제의 정통성이나 재위 문제가 거론될 정도로 큰 건 아니었다. 그러니 명분을 중시하는 청류파 출신인데다가 제1대 문제 조비와 제2대 명제 조예 두 선대 황제의 총애까지 잔뜩 받았던 사마의가 아무런 명분도 없이 찬탈을 위한 반역을 저질렀다고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고, 그렇지 않을거라고 기대하는게 오히려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실제로 훗날 사마씨 일가는 어떻게든 찬탈 명분을 만들기 위해 삼국 통일을 서둘러야만 했고, 통일의 공로를 명분으로 선양을 받았다. 그럼에도 결국 황제 조모를 죽인 것과 더불어 선양의 명분이 너무나도 부실한 탓에 사람들에게 권위와 정통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서 건국하자마자 망조가 들었다.

그리고 '조상 일당이 원로 공신 사마의를 이유없이 핍박하고 황제를 잘못 모시며 국정을 망쳤다'라는 명분을 내걸고 일으킨 사마의의 정변에서, 수괴라고 지목당한 조상과 그 일파가 일체의 저항을 포기한채 순순히 병권을 반납하며 항복까지 했다. 거기다 이들이 다소 문제는 있었을지언정 객관적으로 후한 말의 동탁, 이각, 곽사 따위처럼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의가 자신의 명분에 입각해 행동한다면 훗날 당나라 초기의 현무문의 변처럼 주모자급은 정리하되 나머지는 포옹하거나 살려주는, 그러니까 조상과 측근 몇 사람만 숙청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것도 숙청이라고 해서 누굴 죽이느니 삼족을 멸하느니 하는 게 아니라, 명분론에 입각한다면 그냥 파직만 시키거나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수준이 한계였다. 만약 그 이상을 저지른다면 저것이 거짓 명분이라고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조상은 사마의가 설마 그런 상황에서 자기 이름을 그런 식으로 더럽히겠냐며 상식적인 판단을 한 셈이다. 즉 당장 자신들은 일시적으로 파면당하더라도, 하후현, 하후패를 비롯한 조위의 측근이나 조상 일파였던 인물들 상당수는 남아 있고 사마씨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포진되어 있으니 사마씨에게 권력이 완전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고, 당장은 사마의의 권력이 다소 강해지겠지만 시간이 지나서 황제인 조방이 장성하여 직접 친정을 하게 되면 조상 일파도 사면받거나 최소한 자손 대에는 다시 등용되거나 하면서 무탈하게 넘어가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사마의 일족이 명분없는 찬탈은 물론 대낮에 황제 조모를 대놓고 창으로 찔러죽일 수도 있을 정도로 비상식적인 악인들이었다는 것이다. 환범이 조상을 비난한 걸 보면 사마의 일족의 이런 면모와 일이 이렇게 흘러가리라는 것을 예상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당대에는 그런 의견은 매우 소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4. 결과

4.1. 사마의 사후

고평릉 사변의 2년 후인 가평 3년( 251년), 수춘삼반의 첫 번째인 왕릉의 난이 터졌다. 사마의는 초왕 조표를 옹립하고 저항한 노신 왕릉을 죽였으며, 조씨 황족들을 으로 이주시켜 감시했다. 보통 이후의 반란들과 엮어 반 사마씨의 기치를 내건 난으로 평가받지만, 사건 자체는 결국 시시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다만 조조 시절부터의 오랜 동지이자 신임하고 태위직까지 맡겼던 친구 왕릉에게 배신을 당한 사마의의 심리적 충격은 작지 않았고 4개월 후 그는 눈을 감는다.

아버지 사마의가 사망한 직후 사마사는 무군대장군 직을 제수받으며 조위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 보게 되었다. '무군'은 문제 조비가 사마의에게 제수함으로써 역사에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알린 관직으로, 사마씨로서는 남다른 추억이 있는 관직이었다. 헌데 같은 무군대장군이라 해도 이 시기 사마사는 제 아버지와는 그 입지가 전혀 달랐다. 당시 사마의는 조휴, 조진이라는 막강한 조씨 인척들이 확고한 '상관'으로 있었으나 이 시기 위나라는 대장군 조상이 살해당하고 표기장군이었던 손자가 사망함으로써 1~2품 사이의 주요 장군직에 공백이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거기장군 곽회가 있었지만 그는 거의 평생을 대촉 전선에서 보낸 인물이다 보니 중앙 정계와는 거리가 멀었고 나이가 이미 많았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왕릉의 난 때 (아내가) 연좌될 뻔한 것을 사마의의 은혜를 입어 구명받은 일이 있었으니 사마씨에 선뜻 제동을 걸 인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마의때의 3공은 종요, 왕랑 화흠 등 사마의보다 윗대이고 먼저 무제 조조에게 충성을 바친 조정 원로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었으나 230년을 전후해서 대부분 사망했다.[16] 게다가, 조조 때부터 조방 때까지 무려 4대를 섬겨오며 사마의를 견제하고도 남을 태위 만총도 243년에 사망하면서 태위 자리에도 공백이 남아있었다. 결국, 고평릉 사변을 전후하여 태위는 사마사의 숙부 사마부, 사도에는 노구를 이끌고 고평릉 사변에 앞장선 고유로 앞의 둘은 확실한 사마씨 파벌에 속해있었으며, 사공직인 정충은 살짝 조상과 연이 있었다지만 애시당초 이 양반은 그저 시류를 따르는 조신한 선비로 뚜렷한 정치적 노선이나 야심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훗날 서진 정권에서는 태부까지 지내게 되는 사람이었다. 역시 제동장치는 커녕 사마씨 파벌이 장악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황권 그 자체의 기반 약화였다. 과거 문제 조비, 명제 조예 부자는 유방과 손자라는, 걸출한 그늘의 실력자들을 일종의 비서실장인 중서감/중서령으로 두며 그들을 통해 직접 정치를 이끌어 나갔다. 이런 중서의 영향력은 명제 조예 시절 절정에 달했으나 그가 붕어하고 어린 황제 조방의 대에 이르러 고명대신인 조상/사마의가 전권을 틀어쥐면서 (특히 조상 때문에) 그 비중이 형편없이 줄어들었는데, 고평릉 사변 이후 다시 이들을 기용하면서 중서의 권위가 부활할 듯 보였으나, 다들 연로한 몸이라 얼마 안 가 사망하고 만 것이었다. 당시 조방의 나이 20세였다. 제대로 된 황태자 수업도 받지 못한 채 8세의 나이에 제위에 올라 막강한 고명대신들의 그늘에 눌려 지내던 소년 황제도 이제 성년이 되었고, 때마침 두 명의 고명대신도 세상을 떠났다. 바야흐로 국정의 주도권이 그에게 돌아와야 마땅했던 상황이었다.

허나 현실은 '사마의 섭정 체제'가 오히려 더 젊고 야심찬 인물인 사마사에게 그대로 내리물림된 꼴이었으며, 황제 조방 자신의 수족이 되어야 할 중서 체계는 조상 시절의 파탄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4.2. 끝없는 숙청, 찬탈의 가시화

사마의 사후 이듬해, 사마사는 대장군에 오르며 시중/도독중외제군/녹상서사를 겸하고 가절을 받았다. 이미 쥐고 있는 실권에 형식이 따라온 셈인데, 이 리스트는 조방 즉위 후 사마의가 겸한 직위와 거의 그대로 겹친다. 물론 사마의와는 달리, 사마사에게는 조상 같은 동격의 견제자가 없었다.

진서》가 밝히는 이 시기 사마사 정권의 주요 인사는 다음과 같다. 이후 사마씨와 척을 지게 되는 인물은 밑줄 표시.

이후 사마씨의 찬탈 행보를 둘러싼 투쟁의 무대에 주•조연으로 활약하게 될 인물들의 리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현대의 우리는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고, 이들 중 누가 배신하게 될지 이미 알고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과거 사마씨에게 주살당한 조상의 일파였기 때문에[17] 당대 사람들조차도 이 인사 구성을 보고 충분히 불안한 기류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어찌되었거나 고평릉 사변은 사마씨 찬탈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선이라고 할 만하다.

당장 조상과 친척이자 그 내각의 핵심 인사였던 사마사의 구 처남이자 일생 일대의 라이벌이었던 하후현이 버젓이 끼어 있고, 세트 메뉴인 문흠 관구검에 끼워 넣자면 이쪽도 조상의 덕을 많이 본 세력이었으며[18], 제갈탄 또한 명제 조예 시절 정리해고 당한 것을 조상 일파인 등양/하후현과의 친분 덕에 정계에 복귀한 사람이었다. 이풍은 조상 일파와 사마씨 일파 사이에서 열심히 간을 본 인물이었지만, 고평릉 사변 당시의 반응으로 봐서 일단 그 시점에서는 실세였던 조상 쪽에 더 기울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상을 죽이고 정권을 손에 넣은 사마씨 내각에, 어째서 이렇듯 조상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있는지는 고평릉 사변의 사후처리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겨우 거사를 성공시킨 사마의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제2의 이각/곽사의 난'에 대한 우려였을 가능성이 높다. 반 세기 전, 왕윤은 기껏 역적의 수괴인 동탁을 제거하고 후한의 조정을 바로 잡았으나 그 잔당의 처리에서 미흡한 면을 보였다. 천도한 장안에서는 양주 사람들을 모두 없애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가운데 왕윤은 뚜렷한 사면 의사를 표하지 않은 채 섣불리 소환령을 내렸고, 더군다나 그들을 무마하기 위해 보낸 사신 인선에서도 실수를 저지른 바람에, 그렇잖아도 불안에 떨던 이각 측을 자극해 결국 그들의 공격 앞에 무너졌다.

물론 사마의는 왕윤과는 달랐고, 위나라는 말기의 한나라가 아니었다. 과거 장안 조정은 관동 지방의 지배권을 잃고 완전히 서량의 병력에만 의존한 상황에서 그 서량군의 우두머리들과 척을 지어 자멸했으나 지금은 모반의 위험이 있는 정서장군 하후현의 관중군과 양주자사 제갈탄(+여강태수 문흠)의 양주군이 최전선의 정예군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나라 전체 전력의 일부일 뿐이다. 더군다나 옹주에는 옹주자사 곽회와 진태, 수춘에는 (아직 사마의를 배신하기 전인) 정동장군 왕릉같은 숙장들이 건재한 상황이었으니 최악의 경우라도 싸워야만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으리라. 다만 이들을 빼면 촉한과 동오라는 양대 국적이 있는 상황상 국가 안보상의 문제가 있으므로 함부로 빼기도 힘들긴 했다.

숙청을 최소화하려 했던 사마의는 다른 사방 도독에게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단 한 사람, '진정한 위나라의 충신' 하후현만을 수도 낙양으로 소환했다. 이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상 일파의 범위를 아무리 좁게 잡아도 빠질 수 없는, 조상 정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만큼 하후현이 정서장군으로 위나라 최고의 정예 병력인 관중군을 거느리도록 내버려 둬서는 조상 체제의 해체고 뭐고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과거 사마의가 이 전선에서 쌓아온 위업이 아직 장병에게 남아있고 반대로 하후현과 조상은 얼마 전 흥세에서 대패하여 위신이 꺾였기 때문에 섣불리 군사력을 동원해 사마의에게 적대하지는 못하리란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마의를 믿지 못한 또 한 명의 관중군 주요 인사인 정촉호군 하후패도 자기 통제하의 부대를 동원한 군사적 도전을 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원수국인 촉한으로의 망명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후패는 하후현에게도 함께 망명할 것을 권유했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는 하후현은 이를 거부하고 결국 소환에 응했다. 이 하후현의 처분에 모든 이들의 관심이 쏠렸는데, 사마의는 그의 정서장군 직은 박탈했지만 대홍려라는, 실권은 없어도 결코 낮다고는 할 수 없는 내직에 그를 앉혔다. '천하 명사가 반으로 줄었다'라는 소리가 나왔을 만큼 대대적인 숙청이었던 고평릉 사변이었다. 헌데 그 정권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하후현이, 날개는 꺾였을지언정 목숨을 부지하고 여전히 관직에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사마의가 다른 조상의 잔당들에게 보내는,' 더 이상의 유혈은 없다'는 메세지였던 것이다. 단순한 어필만이 아니었다. 이후 사마의는 왕릉의 난 당시 제갈탄을 진동장군이자 도독양주제군사에 올려 동부 전선 최전방의 총사령관으로 올려 주었고, 그에 맞춰 조상의 비호를 받아온 망나니인 문흠 또한 전장군 겸 제갈탄의 후임 양주자사로 승진시켰다. 결국 서부에선 조상 세력들이 자진해서 퇴장해 준 셈이고, 동부에선 적당히 화해의 제스쳐가 오간 셈이었다.

허나 이 공존은 하후현 자신이 말한
"사마의는 나를 살려주겠지만 사마사 형제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처럼 어디까지나 하후현 등을 훨씬 압도하는 위나라 최대의 영웅인 사마의의 위광 덕분에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마의가 죽고 난 후 그 뒤를 잇게 된 사마사나 사마소는 비록 그 권력과 권위를 승계받았다고는 해도, 나이나 경력, 평판 등이 기껏해야 하후현과 동렬 정도에 머무르는 인물들이었고[19], 더군다나 대외적인 군공은 전무했다. 잠시 사마의의 자비에 기대어 숨을 돌린 조상의 잔당들이 그보다 훨씬 못 미치는 이 후계자 밑에서도 과연 숨을 죽이며 살아갈 것인가? 누구도 그렇게까지 낙관적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당사자들인 사마사, 사마소 역시 이들을 곱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이들을 내칠 수도 없었다. 사마의가 이렇게 반쯤은 타의적으로 타협하여 고평릉 사변을 종결시킨 이상 사마씨의 찬탈을 위해서 이미 하후현의 처분으로 종결된 조상 잔당에 대한 단죄를 다시 꺼내든다는 것도 불가능했고, 더군다나 사마의 덕분에 동부의 제갈탄 등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군사적 권한을 쥐게 된 상태였다. 여기에 고명대신들이 물러나고 친정 의지가 싹트기 시작한 황제 조방의 존재 역시 변수였다. 섣불리 행동을 했다간 오히려 양쪽에서 역공이 들어올 수 있었다.

결국 현실적으로 사마사와 사마소는 이들 불안한 '시한폭탄'들을 안고 가는 수밖에 없었고, 사마씨 형제가 '시한폭탄'을 제거하는 과정은 사마의 사후 10여 년간 위나라를 피로 물들이는 사마씨의 찬탈을 위한 숙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조상의 숙청을 용인해준 다른 파벌들도 이때까지는 사마씨의 찬탈까지 동조해줄 생각은 별로 없었다. 조씨를 대체하는 신왕조를 개창해야만 할 정도로 조위의 상태가 후한 말처럼 심각했던 것도 아니었고, 사마사와 사마소가 사마의만한 명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찬탈을 할 명분이 없었다.[20] 사마의 사후 사마사와 사마소는 이들에게 거역하는 관구검, 문흠, 제갈탄 지방군을 진압하고, 호족들과 명사들을 회유하며 파당을 형성하며[21] 본격적인 찬탈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사마사는 조방을 폐위하고, 자신에게 저항한 하후현, 장집 등을 죽였으며, 사마소는 조위 왕조 세력 최후의 저항이었던 조모의 친위 정변을 제압, 그를 백주대낮에 시해하고 허수아비 황제 조환을 옹립하며 사실상 조위 왕조를 멸망시켰다. 조모의 시해 이후 그 어떤 세력들도 다시는 사마씨에게 저항할 생각을 품지 못했으며 구석과 상국 같은 권리가 없어도 대장군의 직책을 가진 사마소가 황제에 등극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22]

이후 사마소는 궁극적으로 진나라를 세울 목적[23]으로 촉한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진공(晉公)과 상국에 봉해졌고, 구석의 예우가 내려진 다음 곧바로 촉한이 멸망하자 진왕(晉王)으로 승진하며 황제와 똑같은 모습을 행사할 권리를 가져와 찬탈을 눈 앞에 두고 있었지만 급사했고, 뒤를 이어 사마염이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했다. 무제 사마염은 오나라까지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지만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서진은 통일한지 고작 반세기도 안 되어서 멸망해버렸고 중국 대륙은 동진 및 5호 16국으로 다시 분열되고 말았다.

결국, 조위와 서진은 파란만장한 삼국통일의 마무리를 제대로 장식하지도 못한 채로 멸망했다.

훗날 동진의 명제 사마소[24]가 이 이야기를 접하자
'선조가 그런 짓을 했으니 나라가 얼마 못 갔다.'
라고 창피하게 여겼을만큼 후손들에게도 그리 떳떳하지 못하게 받아들여졌다.

5. 창작물에서의 묘사

대부분의 《삼국지》 매체가 제갈량의 사후 이후 간략한 한 두줄로 퉁치고 끝내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후반부의 사건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축에 속한다.

5.1. 84부작 삼국지

제갈량 사후 주요 이벤트로 생생히 묘사된다. 보통 《어린이용 삼국지》 등 축약본에서는 공명 사후 한, 두 줄로 이야기를 끝내는게 대부분이고 84부작 삼국지도 강유의 북벌 등 많은 이벤트를 축소한 반면, 조위의 정치 격변은 충실히 다루고 있고, 무엇보다 고평릉 사변에 대해서는 꼼꼼히 다루고 있다.

다만 여기서 조상은 삼국에 나오는 조진의 이미지로 주지육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인간 쓰레기로 나오고 있다. 이례적으로 조상의 연회 부분이 길게 다루어지고 있고, 사마의는 중풍으로 죽기 직전으로 위장한 후 사변을 일으킨다. 삼국과는 달리 84부작 삼국지에서 조상은 연회장에서 목숨만을 구걸하다가 벼슬만 깎지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준다는 말만 믿고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의에게 투항. 이후 사마사가 이끄는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것으로 마무리.

전반적으로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연전연패하는 패장의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이전편들과 달리 야심가로서의 모습이 극명하게 보이는 에피소드로서 배우의 이미지가 확실히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사마의가 실권자로서의 짧은 시간을 누리고서 병으로 숨진 후, 두 아들이 권력을 승계하는 것으로 마무리.

참고로 MBC판에서는 제갈량 사후의 경우 재미없어서 시청률이 낮을 거라는 판단하에 대폭 편집당한다.

5.2. 신삼국

5.2.1. 조씨 친족의 견제

사마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제갈량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명심해라. 그를 영원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문제 조비에게 남긴 조조의 유언[25]

작중에서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내는 도중에도 명제 조예와 대장군 조진, 대사마 조휴에게 끊임없이 의심을 받는다.

1차 북벌 때는 마속이 지키는 가정을 탈환하고 촉군을 한중으로 패퇴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제갈량의 거문고 연주에 속아 제갈량을 포획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퇴각하게 된다. 비록 사마의가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이런 실책을 범한 것을 명제 조예가 가만 놔둘 리가 없었고, 긴급 모병 사건 및 신의 사건[26]에 대해 막아주는 듯 선심써주는 척 하며 자연스럽게 병권을 박탈한다.

2차와 3차 북벌 때는 사마의의 문하생으로 각색된 학소가 혼자서 진창성에서 고군분투하지만, 조진은 학소가 패배하면 그를 추천한 사마의도 깨지리라고 예측하여 지원을 해주기는 커녕 방해만 한다. 심지어 병사 5만을 자기 휘하로 빼앗아서 진격하다 털리고, 위군 갑주를 걸친 촉군 5만에게 진창성이 함락되기도 한다. 조진이 패퇴하자 위군은 모랄빵이 나서 탈영병이 속출하지만 사마의가 다시 대도독으로 기용되었고 그의 노력으로 위군은 사기가 다시 부활한다. 그러나 조진은 '사마의는 싸움을 피하는 겁쟁이고 그러다가 장합 장군도 전사했대요' 하면서 상소문을 올리고 사마의는 부도독으로 강등되어 조진의 지휘 아래 놓인다.

4차 북벌 때는 진법 싸움에서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언비어 살포로 제갈량을 물러나게 하는 기량을 선보이고 5차 북벌 때는 여자 옷으로 조롱을 당하고 군량을 빼앗기며 결국엔 상방곡에서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기적적으로 비가 와서 살아남고 마침 제갈량의 수명이 다해 그의 침공을 막아내는 대공을 세우게 된다. 위나라에서 누구도 이 공을 능가할 자가 없었지만 명제 조예는 상을 준답시고 또 병권을 빼앗아 하후패에게 넘겨주고 명목뿐인 태위직에 임명해 조정으로 소환한다.

요약하자면 조씨 친족의 견제 → 사마의의 병권박탈 → 제갈량의 북벌 → 조씨 친족 참패 → 사마의의 재기용 → 제갈량 퇴각 → 다시 견제가 계속 반복되는, 분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참고 버틴 것이다. 또한 문제 조비가 포상이랍시고 수도에 저택과 여자 정주를 하사하는데 저택은 호분군에게 둘러싸여 연금된 상태이고 정주는 사마씨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부 황제에게 고해바치는 스파이였다. 사마의는 집 안에서조차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문제 조비의 스파이에서 명제 조예로, 명제 조예에서 어린 황제 조방을 대리하는 조상에게로 이어지자 사마의는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조예의 재위 기간까지는 잘 참았지만, 제갈량 사후 약 십수 년 동안 조상 일파에게 견제당하자[27]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것이다. 결국 사마의는 본인의 말마따나 "십수 년 동안의 위중한 삶"을 사는 동안, 꾀병을 부리며 쿠테타를 준비한다.

5.2.2. 사마의의 대응

조조: 어째서 얼굴이나 손보다 발이 더 하얀지 알고 있나?
사마의: 잘 모르겠습니다.
조조: 감춰져 있기 때문이지.

이에 사마의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인내의 시간을 보낸다. 조조가 자신의 재주를 경계하자 흙바닥을 손으로 쓸고 자신이 스스로 마차의 계단이 되는 등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조비가 병권을 주지 않자 일부러 자신의 예상이 빗나감을 들어 벌을 내려달라 청한다. 조예가 의심을 품자 오히려 솔직히 자신이 모병한 사실을 털어놓으며 작위를 박탈당하는 것에 대해 사마소가 불만을 토로하자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 혼을 낸다. 또한 조진의 모함으로 인해 부도독으로 강등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을 치하하는 상주문을 올리자, 조정에서는 사마의가 조진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며 사적인 일보다 공적인 일을 더 우선하는 충신이라는 여론이 형성된다.

하지만 사마의는 몰래 적을 제거하고 아군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조진이 실수하고 있음에도 별다른 조언을 해주지 않아 조진이 몰락하는 기반을 마련했으며,[28] 말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친 조진에게 사마의 본인이 등을 토닥이는 척 최후의 일격을 날려 조진을 저 세상으로 보낸다.[29] 곽회에게는 탈영병 관리를 잘못했다며 공개참수형을 내린 후 부하장수들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곤장 40대로 감형을 시키고 나중에 혼자 불러 몸은 좀 괜찮냐고 다독여준다. 그 뒤에 강력한 지도력으로 추락한 군심을 휘어잡는 것을 본 곽회는 사마의의 오른팔이 되고 사마의가 낙향하자 눈물을 흘리며 가지 말아달라는 등 철저한 심복이 된다. 손례가 제갈량의 도발에 분노하여 출전하려하자 "지금 나가서 싸우면 역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네가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너의 식구들은 변경을 떠돌며 노비생활을 하겠지."라며 협박을 하여 손례의 출전을 막는다. 그 후 부드러운 말투로 자신을 믿어달라며 호소하자 곽회와 마찬가지로 손례도 사마의의 왼팔로 활약한다.

제갈량이 죽은 후 사마의는 낙양으로 귀환하여 아무 욕심이 없는 듯이 군권을 반납하고 관직에도 뜻을 보이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서도 오직 문제 조비에게서 받은 애첩 정주와 함께 알콩달콩 신혼분위기만 낼 뿐이어서 청렴결백하고 야심이 없는 충신으로 보일 뿐이었다. 조예가 임종 전 사마의를 떠보기 위해 태자의 섭정을 맡겨보지만 사마의는 사양하며 오히려 조진의 아들 조상을 추천한다. 조예는 조상에게 사마의를 명대로 살게 놔두라고 유언을 남기며 사마의의 집에 심어놓은 스파이 정주도 조상에게 넘긴다.

얼마 후 정주가 난산으로 죽자 사마의가 충격으로 쓰러지며 중풍에 걸린다. 이 소식을 들은 조상은 쾌재를 부르며 안심을 하게 되고 어린 황제 조방과 함께 청명절에 문무백관들을 모아 선제 조예의 고평릉으로 참배를 가는데…

5.2.3. 조씨의 몰락과 사마씨의 정권찬탈

검은 한 번 휘둘렀지만 난 그 검을 십수년 간 갈았지. 네 선조인 조조가 가르쳐준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사마의가 조상을 속이기 위한 술책이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두 아들, 특히 장남인 사마사도 알아채지 못했다.[30] 사마의는 재빠르게 곽회와 손례 등 예전의 심복들을 소집하고 비어있는 궁궐로 진군한 후 곽태후( 명원황후 곽씨)를 협박하여 조서를 얻어낸다. 바로 고평릉으로 달려가 태후의 조서를 명분으로 조상을 역적으로 규정하였으며 문무백관들의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여 조상을 무력화시킨다. 이제 더 이상 야심을 숨길 이유가 없어진 사마의는 맨발로 땅을 밟고, 엎드려있는 조상을 발길질한다. 이에 조상이 너희 사마씨가 조씨 4대 강산을 빼앗아갔다고 울분을 터트리지만, 사마의는 십수 년 동안 간 검을 한 번 휘둘렀다며 응수하고 조상을 처형한다.

고평릉 사변 이후 정주의 무덤에서 과거 정주를 데려온 늙은 환관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의 입을 통해 문제 조비가 심어놓은 스파이가 정주임을 듣게 된다. 늙은 환관은 정주를 죽인 것이 혹시 사마의가 아니냐고 묻는데 사마의는 산파를 매수해서 정주를 죽게 한 것을[31] 고백한다. 늙은 환관은 사랑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죽일 수 있냐며 비난하고 '당신이 사랑한 것은 공명대업 뿐이었군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마의는 본인도 사랑했다며 말하고, 마차에 올라타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연출된다.[32]

시간이 흘러 사마의는 정원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어린 사마염이 당랑포선의 고사[33]를 외우는 것을 들으며 숨을 거둔다. 그와 함께 정권을 장악한 사마 가문이 촉, 위, 오를 차례대로 무너뜨리며 삼국통일을 이룬다는 내용이 나레이션으로 흘러나오며 드라마가 종영된다.

5.2.4. 고평릉 사변의 상징성

드라마 상에서는 고평릉 사변을 묘사하는데 마지막 화를 통째로 사용했다.

고평릉에서 과거 조조와 사마의가 현재와 오버랩되며 맨발로 천천히 걸어가 조상을 지그시 밟는 장면은 이 드라마 최고의 백미다. 당고의 금으로 세력을 잃은 청류파, 십상시의 난으로 대표되는 환관세력, 하진으로 대표되는 외척세력의 다툼으로 인해 《삼국지》가 시작되는데[34] 사마의, 늙은 환관이 만난 곳이 정주의 무덤이며 정주는 바로 하진의 후손이다.[35] 또한 사마의가 청류파 가문 출신인 것을 생각하면 정주의 무덤 씬은 상징성이 매우 강하다.

마지막에 사마염이 외우는 당랑포선의 고사는 유씨 천하 조씨가 찬탈하고, 조씨 천하 사마씨가 찬탈하는 과정이 매미와 사마귀, 참새의 고사를 통해 잘 나타내고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사마씨는 나중에 유씨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참 얄궂은 것이 서진이 먼저 전조[36] 유총에게 멸망을 당하고[37] 이후 잔존 세력이 겨우 도망쳐 나와 남쪽으로 망명해 동진을 세웠으나 이 또한 유송 유유에게 멸망당한다.[38] 다시 말하면 왕조가 두 번에 걸쳐서 멸망당하였는데 둘다 유씨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이다. 조씨가 유씨를 멸하고 그 조씨를 사마씨가 멸하며 다시 그 사마씨를 유씨가 멸한 셈. 또한 이 유씨는 다시 소씨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는데[39] 이때 소도성이 유송의 마지막 황제에게 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죽이진 않을 겁니다. 사실 폐하의 조상(유유)도 사마씨(동진)에게 이러지 않았습니까?"

저 말은 정말 죽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비꼬는 거다. 왜냐하면 유유는 사마씨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 후 몰래 암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즉, "너네 조상이 사마씨 안 죽인 것처럼 우리도 너네 안 죽임^^" 정도의 의미이다.

이후 소씨는 다시 진씨에게 멸망을 당하며, 진씨의 멸망으로 그 기나긴 남북조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후 수나라의 통일로 이어진다.

5.3.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6부터 독자 세력으로 편성된 진나라의 스토리 모드 시나리오에 '정시의 변(正始の変)'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었다.

6편에서의 조작무장은 사마의. 조상이 사냥 나간 틈을 타 궁성을 습격하여 조상에게 습격 소식을 전하려는 전령을 저지하고, 환범, 하안 등 조상의 부하들을 처리하며 궁성을 제압한 후, 뒤늦게 돌아온 조상을 사마의 특유의 시원스러운 웃음과 함께 밟아 주면 클리어. 조상이 죽은 후에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낀 하후패는 촉으로 망명하고, 이를 바라보는 사마소는 그를 '자유롭다'고 평한다.

7편에서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장춘화 중에 한 명을 선택해서 플레이 가능. 특이하게도 가충이 사변을 돕는 아군으로 등장한다. 또한 장춘화는 실제 역사상에서는 사변 2년 전에 사망했지만 여기서는 멀쩡히 살아서 가담했다. 먼저 덤벼드는 조상의 첩자들 4명을 제거하면 본격적으로 낙양을 평정할 준비를 한다. 병기고(사마의, 장춘화), 병량고(사마사, 사마소)를 제압하고 적들을 전부 제거하면 조상이 돌아온다. 처음 오는 부하들을 격파하면 조상은 심복 셋을 이끌고 돌아오다가 도망치는데 조상이 탈출지점에 가기 전에 격파하면 승리. 조상을 격파하기 전에 조상의 부하들을 전부 다 제거하면 가충이 조상 다음가는 세력인 하후씨의 일원인 하후패를 경계해야 될 것 같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이 나오면 IF 루트를 플레이하기 위해 클리어해야 하는 스테이지 중 하나인 '하후패 천리행'이 개방된다.

8편에서도 등장. 전작 이벤트들이 부가 임무로 등장하며 전작의 1차 목표인 왕궁 제압 역시 부가임무로 빠져 조상군을 약화시키는 기믹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전작에선 사냥나간 조상을 꿰어내는 것과 달리 이번작에선 아예 사냥장소에서 척살한다. 아마 조상이 사냥나간 중 낙양 제압하는 상황을 재현한 모양.

5.4. 대군사 사마의

명제 조예 사후 사마의, 조상이 보정 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조상이 사마의를 죽이기 위해 온갖 술수를 써서 사마 가문을 핍박했다. 사마의의 부인인 장춘화가 사마 가문이 오랫동안 정쟁으로 마음 고생을 한 것으로 사망했는데, 장춘화의 장례식에서 어린 황제 조방이 사마의의 귓 속에다가 세 마리의 말이 구유를 함께 먹는다는 말로 조롱하자 사마의는 장례식 도중에 갑자기 쓰러진다.

2년 후에 조상이 고평릉에 참배하려고 하는 것을 정밀이 사마의가 살아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류하자 하안이 낙양에 남기로 하면서 사마소를 떠보기로 하며, 정밀은 이승을 시켜 사마의의 병세를 알아보도록 한다. 하안은 사마소에게 사마의의 태부 직을 이을 것을 부추기면서 사마사에 대한 우려를 표하자 사마소는 형 사마사가 아내 하후휘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에 대해 한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알려준다.

사마의의 꾀병에 이승이 속아넘어가자, 사마의는 누운 상태에서 사마소에게 귓속말로 사람을 보내 사마사, 장제 등에게 편지를 보낼 것을 지시하며, 거사 전날 밤에 백령균이 사마의가 꾀병인 것을 깨닫는다. 백령균은 사마의의 나이가 늙었고 장안에 하후현의 10만 대군, 조상이 낙양, 수춘을 장악한 것을 들어 거사를 반대하지만 사마의는 자신이 칼을 휘두르겠다면서 거사할 뜻을 밝힌다.

사마의는 사마부, 사마사에게 병사 1,000명을 주어 금위군을 통제하도록 지시하고, 사마소에게는 영녕궁으로 가서 곽태후로부터 조상을 파직시키라는 성지를 받게 하며, 장제, 진태 등에게는 상서대로 가서 낙양을 지키는 대신이 외출하지 못하게 한다. 사마의는 급포와 함께 결사대를 이끌고 무기고를 공격하러 가고 전원이 일을 마친 후에는 낙수의 부교로 가서 조상을 막기로 한다.

하안이 낙양에서 투호를 하면서 노는 동안에 사마의의 군사가 움직인다는 보고를 받아 군사들에게 무기고로 향하는 사마의의 결사대에게 화살을 쏠 것을 지시하지만 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을 허용하며, 사마 가문의 군사들은 무기고, 금위군 등을 제압하고 곽태후의 성지를 받아낸다. 한편 하안이 겸가, 조린을 피신시키려 했지만 사마의의 결사대에게 포위되어 붙잡힌다.

사마의가 군사가 적어 조상을 제압하는 것을 논의하다가 장제를 보내 조상을 설득해 무장 해제시키기로 하며, 장제는 사마의에게 조상을 살려주길 요청해 사마의는 병권만 빼앗기로 약속한다. 조상에게 사마의가 낙양을 장악했다는 보고가 당도하자 정밀이 사마의가 병권이 없는 점을 들어 모반을 꾀했다고 천자 명의로 조서를 써서 낙양 금군을 투항시키고 자신들의 군사를 동원해 사마의를 포위하면 된다고 진언하지만, 조상은 확실히 이길 수 있냐면서 머뭇거린다.

사마의는 하안, 겸가 등에게 편지를 조상에게 쓰도록 하는데, 하안이 따르지 않자 사마소가 친분이 있어서 하안을 설득하고 겸가에게는 사마부를 보내 설득해 조상에게 편지를 보낸다. 장제는 조상에게 가서 사마의가 낙양에 오면 병권만 뺏고 귀족의 자리는 유지시켜 준다고 설득하며, 정밀은 장제가 군심을 동요시키려 한다면서 장제를 죽이고 사마의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희를 비롯한 조상의 부하들은 사마의가 용병술의 귀재라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데다가 낙양 내에 가족들이 있다면서 투항을 주장하며, 황제 조방도 옆에서 싸우지 말고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조상도 투항을 고민하다가 하안, 겸가의 편지를 읽어보고 울면서 투항하기로 하자 정밀은 조상에게 충성한 것에 대해 한탄하면서 멸문당할 것이라고 울부짖는다.

조상이 투항하자 사마의는 조상의 병권을 거두기만 하고 살려주기로 하며, 조상이 정밀과는 집에서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하자 사마의는 서로 모른 척 하는 것이 좋을 거라면서 거절한다. 황제 조방은 사마의에게 조상이 한 짓이고 자신은 모른다면서 조상을 살려달라고 하자 사마의는 조정 회의를 거쳐서 해야한다고 말하며, 정밀은 사마의에게 역적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할 것이라고 비난한다.

조상의 세력을 제압하자 사마의는 종회를 중서시랑에 임명해 조상의 사건을 심문하게 하고 등애는 관중의 사무를 한 바가 있으므로 서방으로 보내 강유를 막도록 했으며, 사마사, 사마소를 시켜 조상의 병권을 빼앗고 장안에 있는 하후현을 낙양으로 불러들이게 한다. 종회를 통해 한림으로부터 조상이 황궁의 물건을 멋대로 가져갔다거나 3월 중에 조방에게 선위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아내며, 하안으로부터 조상의 역모에 대한 자백을 받아냈다.

사마소가 하안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하안을 출세시키겠다면서 설득해 정위로 임명해 조상 사건을 조사하도록 하며, 하안이 조상 일당이 한 행적을 모두 기록하자 하안도 같이 체포한다. 사마소는 사마사에게 가서 조상 일당이 하후휘를 죽여놓고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전하며, 종회가 병사들을 이끌고 조상, 조린 등 조상의 일가를 모조리 체포한다.

사마부는 조상을 죽이지 않겠다는 장제와의 약속을 이야기하면서 조상을 죽이지 말 것을 요청하지만 사마의는 자신이 죽은 후의 일을 생각해 조상을 죽이라고 지시하며, 사마의가 조정 회의를 소집해 조상에 대한 처벌을 논의하자 장제가 조상을 살려줄 것을 이야기하지만 사마의는 국법을 들어 반대하고 황제 조방이 조상이 종친이라는 점 때문에 조상을 살려줄 것을 이야기한다.

장제는 조상을 살릴 수 없자 태위에서 물러나기로 하고 사마사를 비롯해 여러 대신들이 조상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결국 조상 일당만 죽이고 조상의 막료나 하급 관리들은 참작해서 처벌하지 않기로 한다.[40] 사마의가 부른 하후현은 하후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낙양으로 돌아오며, 조상 일당을 처형하기 직전에 겸가가 사마부의 배려로 조상을 만난다.

조상의 어린 아이인 조린까지 죽이는 것을 보고 사마부는 반대해 사마의에게 물어보겠다면서 집행을 보류시켜 사마의에게 물어보지만, 사마의는 조린이 자라서 조씨인 것을 알 것이라면서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 형을 집행하게 한다. 사마사는 조상과 함께 죽으려는 겸가를 끌어내고 조상, 조린을 포함한 조상의 일족과 그 일당들을 모조리 죽인다.

사마의는 식읍을 하사받고 입궐해서 절하지 않아도 되며, 승상에 임명되고 피휘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하후현이 이를 반대하고 조방은 하후현의 말을 묵살한다. 그러나 사마의가 승상 자리를 받는 것을 사양하고 조상이 죽은 일로 조정이 요동칠 것으로 여겨 조정에 입궐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힌다.

5.5. 삼국지 공명전

흥세 전투가 아닌 장안 침공전1에서 조상이 패배한 뒤에 고평릉 사변이 전개된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지 않기에 원래대로라면 제갈량 사후의 사건인 이 고평릉 사변도 게임에서 다뤄진 것.

5.6.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대체적으로는 역사 기록과 비슷하게 흐른다.

조상이 흥세 전투로 패하고 돌아온 이후에 사마의에게 병권을 빼앗지 못하자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정국만은 보존하겠다면서 중호군을 폐지해 금군을 빼앗기로 하며, 사마의가 조상에게 찾아와 자신과 약조를 어겼다고 하자 조상은 모른 척을 하고 사마의는 조상과 싸우기로 하면서도 일단 관직에서 물러나 때를 기다리려고 한다.

마침 장춘화가 사망하자 사마의는 사직을 청하고 아들 사마사를 시켜 결사대를 양성하며, 조상 파벌은 낙양을 장악하고 제멋대로 지내다가 하안이 불길한 꿈을 꾼 것을 계기로 사마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느껴 조상에게 이승을 시켜 확인하도록 진언한다. 사마의는 이승이 찾아오자 자신이 병에 걸린 척 하고 이를 믿은 이승은 조상에게 보고한다.

조상은 사마의가 병에 걸렸다고 착각해 방심하면서 수개월 후에는 형제들과 함께 천자를 데려가서 고평릉에 참배하러 가기로 하는데, 환범이 형제 중 한 명만 남길 것을 진언하지만 문제없을 것이라 여기고 형제들과 함께 고평릉에 가기로 한다.

사마의가 이 소식을 접하고는 군사를 움직여 낙양의 북문만 집중해서 공격하기로 하고 결사대를 내부에 배치해 내응하도록 하고 낙양을 공격하는데, 성문을 여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봉화가 울리는 바람에 적들이 알아챈다. 그러자 사마의는 영녕궁, 사마사, 사마소는 무기고 쪽으로 군사를 분산하고 조상이 돌아오기 전에 영녕궁, 무기고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1] 조상의 동생인 조희, 조훈, 조언 포함. [2] 조우 자체는 욕심이 없었다고도 한다. [3] 조휴의 아들 [4] 선제인 조예는 이런 걸 싫어해서 사치를 금지시키고, 이를 지키지 않았던 이들을 체포해서 벌을 내렸다. 이승은 이때 친구들의 죄목을 불어서 금고형으로 풀려났다. [5] 장춘화가 죽은 것이 247년 4월이고, 사마의가 일선에서 물러난 것이 5월, 고평릉 사변은 249년 정월에 발생했다. 사마의의 병자 코스프레 기간이 무려 1년 7개월이나 되었던 셈이다. [6] 꾀병임을 알게 된 여종을 13세의 장춘화가 입막음으로 살해한 것이 유명하다. [7] 일단 나이가 나이인데다가 실제로도 몇 년안에 죽었으니 어느 정도 병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사마의가 179년에 출생했으니 이 때 나이는 이미 70이었고, 불과 2년 뒤인 251년 세상을 떠난다. [8] 台中有三狗,二狗崖柴不可當,一狗憑默作疽囊。 [9] 특히 진태가 훗날 사마소 조모 시해 문제로 척을 진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10] 여기에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이 사마씨 일파이자 호족 인사였던 부하였다. 《삼국전투기》에선 부하가 선견지명이 있어 실속없는 하후현을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이 둘은 정책적 대립 때문에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11] 루쉰의 경우엔 강연에서 이를 지적하여 대권을 쥔 사마의는 지방의 친위 군벌을 토벌하고, 중앙에서 자신들의 권력 강화에 매진했으니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보았다. [12] 《세어》, 《한진춘추》, 《위략》 등의 당대와 가까운 시절에 저술된 사서들. 특히 《세어》는 조상이 꾸었던 꿈을 두고 마훈(馬訓)이 병란이 우려된다며 '장차 조상은 병란으로 망할 것이니 열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실었지만 한편으로는 하후현의 인재 선정에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서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3] 이후 사마씨는 군을 새로 배치해서 낙양 성벽 외부에도 진채를 설치해 군을 나누어 주둔시키게 된다. [14] 이 기록이 《위씨춘추》에 있는데 사마사와 친했다는 내용 바로 밑에 있다. 이걸 믿고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5] 왕침 사마염 서진을 건국하는 것을 보고 266년에 죽었다. [16] 왕랑은 228년, 종요는 230년, 화흠은 231년에 사망했다. 왕랑의 경우는 손녀 왕원희와 사마의의 차남 사마소가 결혼을 맺으면서 살아있어도 사실상 사마의를 지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17] 특히 조상의 사촌이자 조위 왕조의 마지막 친황제파 거물이라고 부를 만한 하후현이 아직 건재했다. [18] 관구검도 조상을 비롯한 조씨 황실 가문과 동향 출신으로 친분이 있긴 했다. [19] 드라마의 설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지만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사마사가 하후현에게 존댓말을, 하후현이 사마사에게 하게체를 쓰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20] 이것이 사마씨 찬탈에서 무려 재위 중인 황제 조모를 살해하고 무리수에 가까웠던 촉한 정벌을 강행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서진 건국 후에도 가깝게는 건국군주인 무제 사마염이 제대로 나라를 통치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를 제공했으며, 조금 멀게는 서진이 삼국통일을 한지 얼마 못가 붕괴된 이유를 제공했고 멀게는 동진으로 이어나간 후 환온이 권신으로 떠오르면서 촉한정통론이라는 카드를 꺼내는 이유가 된다. [21] 부실한 찬탈 명분을 덮기 위해 이들에게 각종 이득을 주며 꼬셔서 만든 파당이기 때문에, 서진이 건국된 후로도 이들이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들 맘대로 심각한 부정부패와 권력형 범죄를 저질러대도 사마씨들은 그들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22] 재밌는 점은 조조가 헌제 유협에게 보낸 딸 헌목황후 조절은 220년에 한나라가 멸망하고 조비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사자를 보내 인수를 달라고 했을 때 몇 차례나 성을 내면서 주지 않았으나 끝내 막을 수 없을 것 같자 결국 옥새를 난간 아래에 집어던지고 나서 소리내어 울며 말하기를 "하늘이 절대로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치면서 통곡했다. 참고로 조절은 고평릉 사변과 황제 조모가 백주대낮에 사마씨 가문에게 죽는 꼴까지 다보고 사망했으며 그뒤 5년 뒤에 위나라는 멸망했다. [23] 훗날 사마씨가 황제로 군림하게 될 '진나라'는 이미 사마소가 진공(晉公)의 권리를 수없이 받았으나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는 판단하에서 받지만 않고 있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사마씨의 본적인 하내가 바로 옛 진(晉)의 땅이었으니 다들 위라고 쓰고, 진으로 읽고 있었던 것이다. [24]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소와는 다른 인물이다. [25] 이 유언 전까지만 해도 조비와 사마의는 서로 조조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서로에게는 할 정도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나 이 시점부터 조비가 사마의를 경계하게 되며, 진심으로 충성하던 사마의가 형식적인 충성이 되고 결국 이는 고평릉 사변의 씨앗이 뿌려지는 장면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고평릉 사변의 씨앗은 조조가 뿌렸다는 매우 중요한 연출이다. [26] 신의가 낸 계책 중 제갈량의 공격을 틈타 위나라를 먹으라는 내용도 있었는데, 사마의는 거절하고 제갈량을 막는 선택지를 택한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단 둘이 대화했던 것 같은 내용도 이미 명제 조예가 알고 있었고, 배신과 충성이라는 선택지에서 충성을 택했음에도 배신이라는 선택지도 있었음에 의심을 받는 처지에 몰린다. [27] 드라마 상으로는 십수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묘사도 없어서 간과하기가 쉽다. 묘사가 안 된 사마의의 조정 생활이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사마의가 제갈량의 북벌을 막기 위해 옹양에 부임되었을 때 조씨 일족의 견제를 피할 수 있어서 매우 기뻐하던 장면과 연결지어 보면 좋다. [28] 조진이 자신을 죽일 각만 노리고 모함해대기에 조진에게 조언을 하지 않은 것일 뿐 사마의가 의도적으로 조진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아니다. [29] 처음엔 모르고 토닥였지만 토닥이고 허리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말에서 떨어져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번엔 모르는 척 한 번 더 내리쳐 숨통을 끊어 놓는다. [30] 본작에서는 사마사가 엑스트라급 비중으로 원래 사마사의 행적을 사마의와 사마소가 가져간다. 본작에서는 오히려 사마소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식이거나 사마의의 심중을 빨리 읽는 식의 묘사가 나온다. [31] 산파에게 출혈제를 진통제로 속여서 주라고 하며 줬다. [32] 정주는 사마의에게 하사된 종이었으나 실은 스파이였고, 사마의의 사람이지만 사마의의 사람이 아닌 모순된 존재였다. 정주는 절세미녀로 사마의가 사랑했지만 진정한 사랑할 수 없는 그런 관계라 볼 수 있다. 사랑하고 싶었으나 사랑할 수 없었던 자신의 운명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장면은 충성하고 싶었으나 충성할 수 없었던 작중 내 사마의의 운명도 오버랩되는 명장면으로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사마의 문서 참조. [33] 나무 위의 매미(한)를 사마귀(위)가 노리고 사마귀를 참새(진)가 노린다는 이야기다. [34] 다만 본작에서는 동탁부터 시작되긴 한다. 이들은 배경지식과 짤막한 언급으로 묘사한다. [35] 95화의 시작도 무너진 하진의 사당에서 시작한다. [36] 원래 한나라였으나 추후 조로 이름을 고친다. [37] 이는 《삼국지 평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단 유총은 원래 흉노족으로 유씨 성을 하사받은 경우니 이는 창작에 가깝다. 그러나 사마씨가 다시 유씨에 의하여 멸망당했다는 상징성은 있는 편이며 유총도 이를 써먹기 좋다고 생각했던지 애초에 나라 이름도 처음엔 한나라였으며 스스로를 촉한의 정통 후계자로 칭하긴 했다. 《 삼국지평화》의 모티브가 아주 솟아난 소재는 아닌 셈이다. [38] 역시 유송 또한 촉한의 정통 후계자를 칭하긴 하였으나 친척 관계에서는 좀 차이가 나는 편이다. 이쪽은 그 진짜 한나라 유씨는 맞는데 한고제(고조) 유방의 동생 유교의 후손이라 아주 머나먼 방계다. [39] 이 소도성은 공교롭게도 전한의 개국공신 소하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40] 이때 황제 조방이 사마의를 직접 부르며 조상을 살려달라 청하나 사마의는 아무런 대꾸없이 등을 돌린채 가만히 있는 것이 압권으로 신하가 황제에게 대하는 자세가 아니다. 이에 조방이 일어나 사마의에게 가서 조상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할 생각이라면 넘겨주겠다는 폭탄발언을 하자 사마의가 엎드려 군주와 신하의 역할을 언급하며 그런 의도는 없음을 피력한다. 그리고 절충안으로 조상의 막료나 하급관료를 용서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