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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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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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8b><tablebgcolor=#00008b> ||
}}}}}}}}}}}} ||孫資
? ~ 251년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며 자는 언룡(彥龍)으로 병주 태원군 중도현 출신이다.유방과는 진정한 단짝 콤비라 할 정도로 조비 대부터 같은 승진 코스를 밟았다.
2. 정사 삼국지
3살 때 양친을 잃어 형수에게 양육되었다. 어려서 재능이 있어 태학에서 공부하고 경서의 주석을 많이 읽었으며, 같은 군의 왕윤의 눈에 띄었다. 조조가 사공이 되었을 때 그를 초빙하려 했으나, 마침 형이 고향 사람에게 피살되어 손에 칼을 쥐고 복수하고 가족들을 이끌고 하동(河東)으로 피하였다. 그러나 친구 가규가 손자에게 말했다.그대는 발군의 재주를 가지고 있어 옛 나라(한나라)를 기울여 전복할 만하며, 주장(主將)이 은근히 천리 밖에서 목을 길게 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이는 옛 성현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오.
손자는 이 말에 느끼는 바가 있어 나가기로 했다. 도착하여 군의 공조에 임명되었고 하동의 계리(計吏)에 추천되어 허도로 나갔다. 상서령 순욱이 손자를 만나 감탄하며 말했다.
북방의 주는 오래도록 전쟁이 계속되어 현명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손계군(孫計君)을 만났소!
그리고는 상주하여 상서랑으로 삼아 머물게 하려고 했으나 집안의 난리를 핑계 삼아 하동으로 돌아왔다.
이후 현령을 지내다가 조조에 의해 하동의 계리로 천거되어 허도에 가 참승상군사로 임명되었다. 이 때 승상의 관부에서 곽원의 일을 들면서 가규를 천거한다.
가규는 강읍에 있으면서 관리와 백성들을 독려하며 적 곽원과 전투를 했소. 힘을 다했으나 패해 적의 포로가 되었지만 바른 의지를 세워 얼굴과 말에 있어서 굴복의 모양을 나타내지 않았소. 충의로운 말을 대중에게 들려주고, 절개는 당대에 빛났소. 고대에 머리가 바로 섰던 사람이나 솥에 의거한 자 이상이요. 그 재능은 문무를 겸하고 있으니 진실로 현재 유용한 사람이오.
213년에 위나라가 건국되자 유방과 함께 비서랑이 된다.
220년, 조비가 즉위하자 유방과 함께 승진해 상서성 좌우승이 되었으며, 얼마 안되어[1] 비서를 중서로 바꿀 때 손자는 중서령, 유방은 중서감이 된다. 또한 손자에게는 관중후의 작위를 하사하고, 유방에게는 관내후의 작위를 주어 정치의 기밀을 관장하도록 했으며, 223년에 손자는 관내후의 작위로 승진할 때 유방은 위수정후라는 작위로 승진되었다.
226년에 조예가 즉위하자 두 사람은 더욱 총애와 신임을 받으면서 동시에 산기상시가 더해졌고, 승진되어 유방은 작위가 서향후가 되었고 손자는 악양정후가 되었다. 225년, 오나라에서 일어난 팽기의 반란이 조예의 귀에 들어가자 이 기회를 노려야 하냐고 묻자 자신의 식견을 밝히는데 이게 놀랄 정도 딱 맞아 떨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팽기 참고. 반면 제갈량의 북벌에서는 남정에 머물고 있는 제갈량을 공격하는것은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야 하는 일이므로 험요지를 수비하자고 주장했는데 제갈량이 의군을 동원하고 천수, 안정, 남안 삼군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책략이 되고 만다. 228년 쯤에는 손자와 함께 조예의 신임을 받아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어 장제가 표를 올려 이를 주의하면서 신비의 아들 신창은 아버지에게 그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신비는 아들의 그 말을 듣지 않고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가 필궤가 왕사의 직위를 신비에게 주자는 논의가 있었을 때 조예가 이 일을 손자와 유방에게 물으니 그들은 바로 이같은 말로 답한다.
폐하께서 왕사를 기용한 것은 실제로 그의 노력을 취하려고 한 것이었지. 허명을 귀하게 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비는 실제로 총명하고 정직하지만 성정은 강직하고 독단적입니다. 성상께서는 이 점을 깊이 관찰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아들의 말을 듣지 않고 유방, 손자와 친하게 지내지 않은 신비는 밖으로 나가 위위로 임명된다.
학소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기에 228년에 학소가 진창에서 제갈량을 막는 전공을 세우고 귀환한 229년에 조예는 손자에게 말한다.
경의 향리에 그대들과 같은 쾌인들이 있어 장수로 활약해 이토록 빛나니 짐이 또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지만 이 말을 듣고 얼마 안돼서 학소는 병사했으며, 제갈량이 한중으로부터 공격했을 때는 조예가 장집의 계책을 듣고 자문을 구하니 손자는 장즙의 계책이 풍부하다고 칭찬한다.
태화( 227년 ~ 233년) 말년에 오나라에서 주하를 보내 공손연과 연계하려고 하자 조예는 그 소식을 듣고 중간에서 그들을 붙잡아 토벌하려고 생각했는데, 신하들의 의견은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단지 손자만이 계책을 결행하자고 해 과감하게 주하를 크게 쳐부수니 손자는 관직이 좌향후로 승진했으며, 청룡( 233년 ~ 237년) 초기에 유방과 손자는 둘 다 시중과 광록대부를 겸임하게 된다.
이후 오환교위(烏丸校尉) 전예가 서쪽 선비족 설귀니(泄歸尼) 등을 지휘하여 국경을 나가고, 가비능(軻比能)과 지울축건(智鬱築鞬)을 토벌하여 격파하고, 돌아와 마읍(馬邑)의 옛 성에 이르렀으므로, 가비능과 기병 3만 명을 지휘하여 전예를 포위했다. 조예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으므로, 중서성으로 나가 이 일을 유방과 손자에게 물었다. 손자는 대답하기를
상곡(上谷)태수 염지(閻志)는 염유(閻柔)의 동생인데, 평소부터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에게 명령하여 소칙을 받들어 빨리 가비능을 설득하도록 한다면, 군사를 수고롭게 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포위를 풀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조예는 그것을 따랐는데, 가비능은 과연 전예를 풀어주고 돌아갔다.
이 무렵 손권과 제갈량은 극적(劇賊)이라고 칭해졌으며, 군사를 인솔하여 출전하지는 않는 해가 없었다. 조예는 군신들을 모아서 안으로는 침략을 방어하는 책략을 만들고, 밖으로는 병사를 내어 승리할 계획을 세웠는데, 손자가 모두 그것을 관장했다. 그러나 자신이 심복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생각하고, 항상 조예에게 공을 양보하며 말했다.
군중을 일으키고, 큰 사업을 행하는 경우, 신하들과 협력할 수 있습니다. 방침을 나타내시고 광범위한 의견을 구하십시오.
조정 신하들의 회의가 열리자, 손자는 상주하여 그 시비를 판단할 때에는 그 중 좋은 의견을 선택하여 그것을 추진하여 완성시키고, 끝까지 자신의 덕을 나타내지 않았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에게 책임추궁의 발언이나 감정적인 발언을 할 경우에는 마음을 풀도록 간청하고 참언의 실마리를 막았다.
정동장군 만총과 양주자사 서막 같은 자는 참언과 비난을 받았지만, 손자는 조예에게 그들의 평소 품행을 진술하여 의심을 품지 않게 했다. 만총과 서막이 그 훈공과 명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손자의 힘이다. 같은 마을 사람인 사공연 전예, 양국의 상이었던 종염(宗豔)은 모두 손자를 질투하여 공격하였으며, 양풍(楊豐)이 전예 등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 손자에 대해 갖은 악평을 하여 적대관계는 더욱 심해졌다. 손자는 침묵하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마음속에 한을 품게 되었다. 전예 등은 부끄러워하면서 오랜 유감을 풀기 위해 혼인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손자가 그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원한이 없는데, 무엇을 없애겠소. 이것은 경이 스스로 속박하는 것이고, 경이 스스로 잘 생각한 것뿐이오.
라고 했다. 그리고 맏아들 손굉을 그의 딸과 결혼시켰다.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전예는 늙고 병들어 집에 있었다. 손자는 그를 매우 특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그의 아들을 본적의 군으로 불러 효렴으로 삼았다. 한편 양풍의 아들이 후에 상방(尙方)의 관리가 되었는데, 조예가 직책상의 일로 그를 질책하고 그를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하자, 손자가 간청하여 그를 도왔다. 손자가 옛날의 나쁜 일을 생각하지 않음은 이과 같았다.
238년에 요동이 평정되자 계획에 참가한 공로로 유방과 손자는 향리의 현을 식읍으로 받았으며, 작위가 올라가 손자는 중도후, 유방은 방성후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24일에 조예가 병이 들어 눕게 되자 연왕 조우를 대장군으로 삼으면서 하후헌, 조상, 조조(曹肇)[2], 진랑이 함께 정치를 보좌하도록 했는데, 평소 진랑 등과 사이가 좋지 않던 유방과 손자는 명제가 죽은 후에 진랑 등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 해 조우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몰래 꾸미고 있었지만 항상 조우가 황제 곁에 있어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27일에 기회가 오면서 황제의 의식이 혼미해지자 조우가 조조와 상의할 일이 있다면서 궐 밖으로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황제는 얼마 동안은 오로지 조상과 단 둘이 있게 되자 유방은 이를 알고 손자를 불러서 음모를 꾸몄다가 손자가 너무 위험하다고 만류하나 유방은
함께 끓는 가마솥으로 들어가게 생겼는데, 어찌 불가능한 게 무엇이 있겠소?
하고는 곧바로 황제 앞으로 달려가서 엎드려 울면서 말한다.
폐하께서 이처럼 쇠약하시니 만약 피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장차 천하를 누구에게 부탁하시렵니까.
조예로서는 이미 조우를 대장군으로 임명했는데,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유방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유방에게 자기가 조우를 대장군으로 임명했다고 말한다. 이에 유방은
폐하께서는 선제의 조칙을 잊으셨습니까? 선제께서는 번왕은 정사를 보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막 병이 심해지시자 조조와 진랑 등이 곧바로 입궁해 궐내의 재인을 데리고 놀고 병수발을 드는 궁녀들을 말로 희롱했습니다.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또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남면하고는 조신들은 전각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조고와 마찬가지로 국권을 훔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황태자께서 유약하시어 정사를 통할할 수 없는데, 바깥에는 강하고 난폭한 도적들이 있고 안에는 노역으로 인해 원망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멀리 존망을 생각하시지 아니하시고 옛정과 온정에 얽매여 조종의 기업을 이 두세 사람에게 위탁하려 하십니다. 폐하께서 앓아누우신지 며칠 동안 안팎에 차단되어 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이나 이를 알지 못하시니 이는 신들이 마음 아파하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있는 사실 없는 사실을 자신이 총애하는 유방과 손자가 다 꾸며서 말해놓으니 그들을 철석같이 믿는 조예는 노했으며, 그래서 조예는 태자를 누구에게 맡기냐고 묻는다. 유방과 손자는 계획대로라 여기고 조상이 조우를 대신할 수 있다고 했다가 사마의를 불러서 상의하라고 하니 황제는 이를 따르기로 하고 유방과 손자는 밖으로 나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조가 다시 황제에게 와서 울면서 간하니 조예는 또다시 마음이 바뀌어 조조에게 명해 방금 전에 행했던 칙서를 정지시키도록 했으며, 그렇게 조조가 물러가니 유방과 손자는 다시 들어와 황제를 설득한다. 그리고 조예는 또다시 마음을 바꿔 유방의 말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유방은 이번에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친필로 쓴 칙서를 만들 것을 권한다.
힘없는 황제는 자기 힘으로 조서 쓸 힘조차 없던 상황이라 이 말을 들은 유방은 즉시 침상 위로 올라가 조예의 손을 잡고 힘을 주어 조서를 쓰고 옥새를 찍은 다음 큰 소리로 외친다.
연왕 조우 등의 관직을 면하라는 조서가 있다. 조우 등은 궁성 내에 머물지 마라.
이렇게 되면서 조우, 하후헌, 조조, 진랑 등은 모두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갔다.
239년에 조방이 즉위해 중대한 계획을 결정하는데, 참여해 식읍이 3백 호 증가되어 손자는 1천 호, 유방은 이전 것과 합쳐 1천 1백호가 되었으며, 이와 별도로 두 사람의 사랑하는 아들 한 명을 정후에 봉하고 두 번째로 사랑하는 아들은 기도위에 두면서 그 나머지 아들도 모두 낭중에 봉했다. 유방과 손자의 계획대로 권력을 잡은 조상이 정밀의 헌책을 통해 사마의를 태부로 임명하기 위해 표를 올리자 조방은 유방을 시켜 손자에게 조서를 쓰게 한다.
240년 2월 1일에 손자는 우광록대부, 유방은 좌광록대부로 승진했으며, 245년 8월 19일에 손자는 위장군, 유방은 표기장군이 되었다가 248년 2월 30일에 유방과 함께 사임한다. 이때 대장군 조상은 정치를 독점하고, 옛날 제도를 대부분 바꾸려고 했다. 손자는 현재의 정치를 바로잡을 수 없다며 한탄하여 병이 났고 광록훈이 되었다. 조상이 주살된 후에 다시 손자를 시중으로 삼았으며, 중서령의 관직을 담당하게 했다.
250년에 사망한 유방을 뒤로 하고 혼자 표기장군에 임명되었다가 251년 8월 27일 세상을 떠난다. 시호는 정후. 후손으로는 동진의 역사가 손성이 있다.
3. 삼국지연의
사마의가 가정 싸움에서 촉군을 이기자 조비에게 과거에 조조가 장로를 공격할 때 처음에는 위험했다가 성공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현재 있는 군사들을 대장들에게 나누어 험하고 중요한 곳들을 차지해 지키도록 하면서 힘을 기르고 오와 촉이 서로 해치게 되면 그 때 움직이면 된다고 진언했다.조예가 병에 걸리자 유방과 함께 추밀원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으며, 조예가 종족 가운데 누가 일을 맡길 만하냐고 묻자 유방과 함께 조진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어 조진의 아들인 조상을 추천했다. 죽기 직전에 조방, 조상, 유방, 사마의 등과 함께 침상 앞에 모여 그의 유언을 들었다.
4. 평가
진수의 평가에서도 유방과 함께 엮여있는 세트 취급으로 평가는 다음과 같다.유방의 재능과 계책은 손자보다 우수했으나 자신의 수양에 있어서는 손자보다 못했다. 유방과 손자는 이미 군왕과 주상을 받드는 데 뛰어났고, 또 일찍이 이렇다 할 만한 말의 실수나 이득도 없었다. 단지 이 두 사람은 신비를 누르고 왕사를 도왔으므로 세상 사람의 조소를 받았다. 그러나 때로는 신하들의 간언과 논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이 바른 것을 곁에서 도와주었으며, 아울러 국사의 손해와 이익을 몰래 진술했으며, 아첨하는 말로 조주를 인도하는데 진력하지 않았다. 함희 연간에 이르러 다섯 등급의 작위 제도를 설치하자고 건의했을 때, 유방과 손자는 이전 왕조에서 두드러진 공적을 세웠으므로 유정은 방성자에 봉해졌고, 손굉은 이석자가 되었다.
유방은 문사가 유려했고, 손자는 근면하고 삼가 두 사람 모두 제왕의 중요한 정책을 관장했다. 권세가 그 당시 유명했으나 아정하고 청량함은 부족했고, 조롱과 야유의 평가가 이들의 실제 모습을 매번 능가했다.
유방은 문사가 유려했고, 손자는 근면하고 삼가 두 사람 모두 제왕의 중요한 정책을 관장했다. 권세가 그 당시 유명했으나 아정하고 청량함은 부족했고, 조롱과 야유의 평가가 이들의 실제 모습을 매번 능가했다.
위나라의 초대 중서감/중서령이었던 유방과 손자는 (비록 유방이 유씨 황실의 후예라고는 하나), 먼 북방 유주/병주 출신으로 위나라의 중역 신료 세력 - 즉 주류 호족 계층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인물들. 그 자신의 능력과 황제의 총애 외에는 아무런 권력의 기반이 없는 이들은 황제의 수족이라는 중서 본연의 포지션에 철저하게 충실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타 관료와의 충돌과 그들의 원한 또한 불사한 이들은 환관과 외척에 형제들까지 배제하며 스스로를 덩그러니 노출시킨 조씨 황실이 주류 호족들에게 완전히 삼켜지지 않도록 하는 '근왕'의 역할을 수행해냈다. 한편으로 이들은 조예/조방 계승기에 과거 탁류 환관들의 전횡을 답습하긴 했으나, 그들처럼 독자적인 지배권을 확립시키지 못한 채 결국 조상/사마의와 삼자균형 구도를 형성하는 걸로 만족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5. 미디어 믹스
5.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4 일러스트 |
삼국지 14부터 등장하고 능력치는 통솔 22, 무력 13, 지력 79, 정치 70, 매력 58이다. 개성은 선동, 능리, 주의는 명리, 정책은 세출개선 Lv 3, 진형은 안행, 전법은 혼란, 진정, 친애무장은 가규, 사마의, 유방, 조상, 조예, 혐오무장은 진랑, 하후헌이다. 생년은 174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5.2. 삼국전투기
이름 때문인지 누라리횬의 손자의 누라 리쿠오(각성 후)로 등장한다. 그런데 사실 누라 리쿠오는 이미 손자병법을 만든 손자의 패러디로 여러번 등장한 적이 있다.[3] 이름이 비슷해서 캐릭터도 같은 패러디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단짝인 유방과 처음 등장했을 때, 유방이 병법의 달인과 같은 느낌의 멋진 이름이라고 칭찬한다. 유방과 더불어 능력은 있는 인물들이었으나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간상이라고 평가되었다.전투외편 2편에서 처음 등장. 238년 기준 산기상시로 유방과 함께 위의 파워 랭킹 4위였다고 묘사된다. 세트메뉴인 유방과 행적이 일치하므로 그 외 행적은 유방 항목 참조.
5.3.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연의에서처럼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라고 건의한다. 이때 사마의가 군말없이 일리가 있다고 의견을 존중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