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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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타 · 두기(夔) ,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 |||||||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 |||||||
오환 · 선비 , 가비능, · 부여 · 고구려 · 왜 · 읍루 · 예맥 · 동옥저 · 마한 · 진한 · 변한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8b><tablebgcolor=#00008b> ||
}}}}}}}}}}}} ||馬鈞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이자 발명가로 자는 덕형(德衡). 옹주 부풍군 사람이다.여러 기계들을 발명, 개량한 발명가로 시대를 앞서간 공돌이이자 훌륭한 인재가 제대로 쓰이지 않아 버려진 안타까운 인물이다.
2. 정사 삼국지
젊은 시절에는 허랑방탕하게 생활해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스스로의 재능을 몰랐다고 한다. 뒤늦게 마음을 잡고 관직에 나가 박사가 되었지만, 그동안 놀고 먹은 탓에 가난한 생활 도중에 마침내 능기(능직물을 짜는 베틀)을 바꿀 것을 생각하니 말을 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그 기술을 알게 되었다. 옛날의 능기는 종(綜: 날줄과 씨줄을 교차하게 하는 기구)이 50이면 섭(躡: 답목으로 베틀에 설치되어 사람이 이를 밟을 수 있도록 한 판)이 50, 종이 60이면 섭이 60이었는데 마균은 그 공로를 상하게 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걱정하여 마침내 모두 답목이 12개짜리인 것으로 바꿨다. 이로서 마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2.1. 조예 시절
급사중 자리에 올랐을 때 산기상시 고당륭, 효기장군 진랑과 의논하던 와중에 자석을 이용하지 않고 나침반의 기능을 하는 지남거가 화제에 올랐다. 고당륭과 진랑은 지남거가 단지 기록상에만 등장하는 전설의 도구라 주장했으나 마균은 지남거는 실재해 당대의 기술로 재현할 수 있다고 반박했으며, 이들이 자기 이름까지 걸고 넘어지며 비웃는데도[1] 아랑곳없이 '탁상공론보다 직접 만들어 보는 게 확실하다'며 굽히지 않았다.결국 고당륭과 진랑이 위명제 조예에게 상주해 조예는 조칙을 내려 마균에게 지남거를 재현하라 명했고, 얼마 안되어 마균은 정말로 지남거를 훌륭하게 재현해 크게 명성을 얻었다. 이 지남거 재현의 업적 때문에 천자문에도 이름을 올렸다.[2]
이 이야기는 고금주에도 실려있다.
대가(大駕)에 쓰는 지남거는
황제와
치우가 탁록의 들판에서 싸울 때 시작되었다. 치우가 큰 안개를 만들자 병사들이 모두 헤매자, 이에 지남거를 만들어 사방을 가리키게 하여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고 제위에 올랐다. 이 때문에 후대에 항상 대가에 지남거를 세웠다. 옛말에는
주공이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주공이 나라를 잘 다스려 태평해지자 월상씨(越裳氏)가 거듭 통역을 거쳐 오며 흰 꿩 1마리, 검은 꿩 2마리 상아 1개를 바쳤는데, 사자가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자 주공이 무늬
비단(文錦) 2필과 병거(輧車) 5대를 하사하고는 모두 사남(司南)을 만들어 월상씨의 사자에게 그것을 싣고 남쪽으로 가게 했다. 사신은 부남(扶南)과 임읍(林邑)의 해안가를 따라 1년만에 그들의 나라에 도착했다. 또한 대부 연장(宴將)으로 하여금 그들을 호송해 그 나라로 갔다가 돌아오게 하였는데, 사남거를 타고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등지고서 1년만에 돌아왔다. 처음 수레를 만들 때 그 굴대를 모두 쇠로 만들었는데 돌아오니 그 쇠가 모두 사라졌다. 지남거는 건거씨(巾車氏)에 속했으며 그것을 장치해서 싣고 항상 앞에서 인도하게 했는데, 먼 곳의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사방을 평정한다는 뜻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지남거(方車)의 제작법은 『상방고사(尙方故事)』에 실려있다. 한나라 말에 상란(喪亂)이 일자 그 제작법이 중간에 끊어졌다가 마선생이 뒤이어 제작했다. 오늘날의 지남거는 마선생이 전한 방법으로 만든 것이다.
고금주 『여복』
고금주 『여복』
낙양에 거주하면서 성안에 땅이 있어 동산으로 할 수 있었는데 댈만한 물이 없음을 걱정했으므로 마침내 수차를 만들어 아동으로 하여금 돌리게 하자 관개용의 물이 저절로 돌아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나와 그 교묘함이 일반 것의 100배나 되었다.
<명제기>에서 인용한 《 위략》의 기사에 따르면 그 후에 백희라는 인종의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설치는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조예는 그 움직임이 너무 단순하다고 여겨 마균에게 좀더 실감나게 움직이는 인형으로 개조하라고 명했다. 마균은 나무 태엽과 수력을 활용해 인형들이 저마다 다른 도구를 들고 생동감있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새롭게 꾸며 바쳐 조예에게 칭찬을 받았는데, 이것은 수전백희(水轉百戱)라 하여 235년에 지남거와 더불어 헌상되었다고 한다.
2.2. 조방 시절
그는 병기 분야에서도 관심이 깊었는데, (노획당하거나 우연히 얻은 것으로 추측되는) 제갈량이 개발한 연노를 한번 얻어 살펴보더니 '비록 지금의 모양새도 정교하기는 정교하지만 아직 완전히 좋은것은 아니다'라며 (조금 더 개량하면) 가히 5배의 효능을 더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3] 또 여기에 공성병기인 발석차의 개량에도 관심을 가져 발석차에 바퀴 달린 운반장치를 갖추고, 돌을 날릴 때도 바퀴 달린 연발장치를 장착해 기동성과 화력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균이 일찍이 바퀴에 벽돌 수십 개를 매달아 시험해보니 수백보를 날았다고 한다.한편 이때 배수(裴秀)가 상국(上國)의 선비이고 도리에 정통하였는데 이를 듣고 비웃었다. 마침내 배수가 마균을 힐난하니 마균은 입을 다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배수는 스스로의 힐난이 그 요점을 얻었다고 여겨 끝없이 (마균을 비웃고) 말을 쏟아냈다. 이에 마균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부현(傅玄)은 "당신의 장점은 언론이고 단점은 교묘한 기술입니다. 마균의 장점은 교묘한 기술이고 단점은 언론인데, 그대의 장점으로 그의 단점을 공격하니 어찌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박했고 그 발상을 아깝게 여겨 당시 대장군 조상[4]의 동생 조희에게 진언했고, 처음엔 배수와 마찬가지로 말도 안되는 얘기라 생각하던 조희도 마음을 돌려 조상에게 건의했지만 조상은 이 생각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홀대하여 시험해보지 않았고 결국 마균의 병기 개량계획은 구상만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후 마균의 기록은 전하지 않고 부현이 그 재주가 널리 쓰이지 못했고 마균이 공학적 재주와는 전혀 상관없는 직책에만 배치 되었다며 한탄한 것만 사서에 남았으니 끝까지 중히 쓰이지 못한 듯하다.
당시 부현이 간언하는 발언들을 보면 배수의 말만 듣고 보인 조상 정권의 홀대와 무신경한 태도에 '조금만 시험하면 그 시비를 알 수 있을거고 시험해보면 효과가 쉽게 드러나는 일이 될 것이다. 힐난과 언변 때문에 재능을 억누르고 있는데 이게 폐단이 많아지는 이유다. 마균이 처음부터 말한게 모두 맞지 않는다고 쓰지 않는다면 훌륭한 장인이 나올 수가 없다. 사람 때문에 사람을 해치지 말고 시험해 보는것으로 기준에 삼아야한다'면서 거의 분노에 가깝게 진언하는걸 볼 수 있다.
(중략)지금 마씨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국가의 정밀한 기계요 군대의 중요한 도구입니다. 10심의 나무를 사용하고 2사람의 힘을 들여서 얼마간의 시간이 걸리지 않아도 시비가 정해집니다. 시험해보면 효과가 쉽게 드러나는 일을 힐난하여 가벼이 언론으로 사람의 기이한 재능을 억누르니 이는 자기의 지혜로 천하의 일에 임하면서 그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무한한 사물을 제어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폐단이 많아지는 이유입니다. 마씨가 만든 것은 변화를 통해 얻은 것으로 처음에 말한 것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쓰지 않는다면 이로써 불세출의 교장(巧匠)은 나올 길이 없어지게 됩니다. 무릇 같은 감정을 가지는 사람은 서로 질투하고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서로 해치는 것이니 보통사람은 면할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 때문에 사람을 해치지 않으니 반드시 시험해보는 것으로 기준을 삼습니다. 기준을 버리고 쓰지 아니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옥이 무고를 당해 돌이 되고 형화가 박옥을 끌어안고 통곡한 이유입니다.
3. 삼국지연의
여기에서도 박사 벼슬로 등장하는데, 여러 실용적인 발명 전적들은 모두 빠져 궁궐 개축이나 거대 동상 제작을 감독하면서 조예의 불로장생 망상을 부추기는 엉뚱한 역할로 변형되었다. 원융노 개량 등도 구상에 그친데다가 원융노는 소설상 늦게 등장하기 때문에 시기를 놓쳤고 발석차 개량은 한참 전인 관도대전에서 유엽이 가져간다.군담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 보통 문관은 취급[5]이 좋지 않은데 이는 연의가 역사서가 아닌 군담 소설이라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현재의 역덕들에게는 내정 부분이 흥미로울 수 있겠으나 삼국지연의를 듣거나 읽었던 민중들은 지루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중심소재인 전쟁과 계략에 직접 관련되지 않는 부분은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사족에 불과하다.
4. 평가
흔히들 삼국시대의 뛰어난 공학자라고만 알려져 있지만 좀 더 깊게 파들어가면 뛰어난 공학자가 제대로 된 이론이나 논리가 없다며 무시와 비웃음을 당하고 끝내 홀대당해 결국 그 재주를 다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기록들을 보면 언변이 뛰어나 사람들을 설복시키거나 처음부터 탁월한 구상이나 이론을 가지고 물건을 만드는 타입이라기보다 실제로 계속 몇번이고 실물을 만들어보면서 고쳐나가는 타입에 가까웠던 거 같다.부현은 마균을 일컬어 '선생은 춘추시대의 전설적인 목수 노반(魯班), 축성술로 이름을 남긴 묵적, 후한의 과학자 장형도 따르지 못할 재주를 가졌는데, 노반과 묵적의 재주가 당대 사람들을 이롭게 했지만 장형과 마균은 시대를 잘못 타고나 그 재주가 널리 쓰이지 못했으니 이것은 인재가 적재적소에 쓰이지 못한 결과로 장형은 비록 시중이 되고 마선생은 급사성중이 됐지만 모두 공관을 관장한 것이 아니어서 기교가 세상에 무익하였다. 사람을 쓰는데 있어 그 재주에 맞지 않고 현명하다는 것을 듣고도 실제 일로써 시험해보지 않으니 실로 한탄스럽구나'라고 탄식하는 평을 남겼다.
5. 미디어 믹스
삼국지 11 |
삼국지 12, 13, 14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4편의 경우 무장이 아니라 도사 개념으로 등장했고,[6] 그 이후 시리즈부턴 능력치는 평범하지만 발명이나 제조 특기는 꼬박꼬박 갖추고 나오는 문관계로 나온다. 천자문에도 이름이 올라갈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했으나 대접이 박한 편. 양습이나 두기처럼 연의에서 안 나왔으면 오히려 더 좋은 능력치를 받았을 수도 있었던 인물. 게임상에서 발명이라는 능력을 계략이나 외교, 설전과 관련되는 지력, 정치와 분리시켜 수치화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 교양이 없을 경우 다인이나 유학자들이 병맛 능력치를 보이는 것과도 비슷하다. 추가적으로 연의에서 조예를 부추긴 것 때문인지 의리는 낮게, 야망은 높게 설정되어서 동탁이나 원술스러운 무장이 되었다. 즉 마균에게 절대 태수를 주면 안 된다는 말. 무장으로 등장한 시리즈는 삼국지 6에서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특히 6에서는 하후현과 함께 정치력 90대 투톱으로 등장한다. 마균 최고의 리즈시절.
삼국지 9에서는 공성 600의 병법숙련도를 들고 나오며[7] 게다가 연노까지 가지고 다닌다. 그러나 능력치는 통솔력 6/무력 8/지력 60/정치력 72라 무력이 너무 낮아 연노가 쓸모가 없다. 게다가 삼국지 9 공성계 병법 자체가 흔해빠진 정란이면 거의 90% 해결되며 충차, 투석은 특별한 상황 아니면 쓸 일이 없는지라 이런 장수의 대접이 좋지 않다. 상병을 익힐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상병도 없으면 말고 수준인지라... 더해서 범용 모략계나 책략계 병법도 없어서 그냥 내정을 시키거나 노병계 병법 숙련도가 높은 장수와 같이 다니며 연노 습득을 노리는 게 전부. 시스템 때문에 묻힌 장수.
삼국지 10에서는 통솔력 5/무력 8/지력 64/정치력 56/매력 13의 D급 문관. 특기는 발명 능력을 반영하여 오로지 기술 하나 뿐이다.
삼국지 11에서의 보유 특기도 변함없이 발명. 지력 60에 정치력 70으로 삼국지 10 때보다는 능력치가 좀 상향되었다.
삼국지 12에서는 PS3판과 PK에서 오른손에 턱을 만진 채 왼손으로 지남거의 축소 모형을 들고 있는 멋진 모습으로 추가되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2/무력 17/지력 71/정치력 60. 특이하게도 삼국지 13의 무장들 중에 유일하게 병기 레벨이 9로, 공순이 황월영(레벨 7)보다 병기 레벨이 높다. 나머지 특기는 상업 2, 문화 4. 전수특기는 병기이고 전법은 3포인트를 소모하고 방어를 30 깎는 수비약화다. 정사에서의 모습을 반영한 듯하면서도 정작 병기흥미가 설정되어 있지 않고 물욕이 탐욕으로 설정된 등 연의의 사기꾼 같은 캐릭터성이 혼재해 있다. 왜 이런 식으로 원칙 없이 반영을 했는지 의문스럽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 무력 8, 지력 64, 정치 60, 매력 27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17, 무력이 9, 지력이 7 하락했다. 개성은 발명, 학자, 주의는 명리, 정책은 시설개발 Lv 3, 진형은 정란, 충차, 투석, 전법 역시 정란, 충차, 투석, 친애무장은 제갈량, 혐오무장은 없다. 드디어 정사를 제대로 반영했다고 볼 수 있는데 적색 개성 중에 탐욕 같은 게 없고 내면도 의리는 보통, 야망은 최저로 설정되어 있는데다 특이하게 제갈량이 친애무장이 되었다.
[1]
'선생의 이름은 균이고 자는 덕형(德衡)인데, 균(鈞)은 기구의 표준이고,또 형(衡)은 물품의 경중을 잴 수 있는 것이니 만일 경중에 기준이 없다면 표준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해석하면 '댁은 물품의 경중에도 기준이 없는데 기구의 표준을 제대로 정할 수 있긴 하냐?' 거의 이런 식의 비방.
[2]
恬筆倫紙 鈞巧任釣(염필륜지 균교임조):
몽염의 붓,
채륜의 종이, 마균의 지남거, 임공자의 낚시다.
[3]
제갈량의 개량 연노인 원융(元戎)노는 후세 사람인
남송(南宋)의 학자 왕응린(王應麟)이 "서촉의 노(弩)는 그 이름도 무척 많았는데, 크기로는 연노만한 것이 없었다. 십시(十矢)를 군아(群雅)라 불렀으며, 시(矢)를 비창(飛槍) 또는 통칭 최산노(摧山弩, 산을 무너뜨리는 쇠뇌)라 불렀는데, 바로 공명(孔明)이 만든 원융이다."하였다 라고 평가할 정도로 강력한 무기였는데 마균은 거기서 5배나 더 강화시킬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4]
239년, 조예 승하 당시 조예가 조상에게 탁고를 맡기면서 대장군을 조상에게 맡기고 승하했으니 당연히 이 일화도 조방 때의 일화로 볼 수 있다.
[5]
장소를 제외한 설전 패배자들로 전락한 동오의 문관들(
우번,
보즐,
엄준,
낙통 등)이나 최후가 처참해진
유복 등.
[6]
달마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며, 플레이어가 지배하는 도시에 왔을 때 말을 걸어보면 주로 타국의 도시나 무장, 보물 등에 대해 말해주지만 매우 낮은 확률로 해당 도시의 기술치를 올려준다.
[7]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는
유엽과
제갈량밖에 없다. 물론 마균과 이 둘의 능력차이는 어마어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