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휘하의 종교인에 대한 내용은 장수(종교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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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7년
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이자 동탁의 부하인 장제의 조카로[1] 양주 무위군 조려현 사람.2. 생애
어렸을 때부터 무용이 있어 이름이 드높다가 지방관에게 발탁되어 그 밑에서 일한다. 한수, 변장 등의 반란이 일어날 때에 국승(麴勝)이라는 자가 조려현장 유순(劉雋)을 살해하자 장수는 국승을 죽였는데 국승을 죽인 일로 사람들로부터 의로운 자로 여겼으며, 장수는 사람을 불러 모아 마을의 호걸이 되었다. 그 후 동탁을 의지하다가 동탁이 죽자 삼촌 장제의 수하로 들어갔고, 건안 원년( 196년), 장제마저 전사하자 그 세력을 이어받아 완성을 차지한다.장수는 군사력은 있었으나, 물자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따라서 형주 자사 유표와 연합해 그로부터 지원을 받아 조조와 대항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인 건안 2년( 197년), 부족함과 조조의 강성함을 견디지 못하고 바로 굴복한다. 연의에서는 가후가 '기왕 질 거면 미리 항복하는 게 낫다'라고 간언한 걸로 나온다. 그러나 조조가 숙부인 장제의 과부 추씨와 동침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2], 자기 부하 장수인 호거아에게 사사로이 금을 포상하여 호거아를 아예 자기 직속 부하로 포섭해 장수를 죽이는 것에 동원하려는 정황에 분노하며 가후의 계략에 따라 조조군을 야습, 조조의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 맹장 전위를 살해하는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완성을 버리고 양성으로 거점을 옮긴다.
다음 해인 건안 3년( 198년), 다시 유표와 손잡고 양 전투에서 조조에게 맞섰지만 세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고 건안 5년( 200년) 초 수하 가후의 제안[3]을 따라 조조군으로 귀순했다.[4]
하지만 조조 입장에서 장수의 귀순은 호박이 굴러 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장수가 조조에게 들어옴으로써 유표를 견제하는 역할을 받았고, 이에 따라 유표는 원소를 돕는 데 매우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장수는 귀순하고 조조와 사돈을 맺고 열후에 봉해졌으며, 관도대전에서 공을 세워 '파강장군(破羌将軍)'의 직책을 받았고, 원담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이 2,000호에 달하는 등 후한 대접을 받았다. 건안 12년( 207년), 오환족을 정벌하러 유성으로 가는 도중 사망했다.
그의 후손은 금세 대가 끊겼다. 장수의 아들인 장천인데 장천은 훗날 위풍의 난에 연좌되어서 아들과 함께 참살되는 바람에 장수의 대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이 장천의 죽음이 실제로 난에 가담하다가 참살당한 건지, 아니면 억울하게 휘말린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엮어서 참살당한건지 명확치가 않다. 위풍의 난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어서 기껏해야 누가 연좌되어서 죽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3. 토사구팽 의혹
<장수전>에 주석으로 딸린 어환의 《 위략》에 의하면 조비는 매번 장수를 잔치에 초대한 뒤에 "내 형을 죽인 그대가 어떻게 뻔뻔하게 아버지께서 주는 녹봉을 받아먹고 살 수가 있는가?"이라고 말하면서 하도 갈궈대서 자살했다고 한다.[5] 이를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여러 가지 가설이 나올 수 있다.일단 조조가 장수를 잘 대우해줬다는 기록부터가 뭔가 석연치 않은 냄새를 풍긴다. 이 말인 즉슨 관도대전 당시 장수가 항복하자 조조는 예전 감정 깨끗하게 잊고 환영하고 사돈까지 맺는 등 잘 대해준 반면 조비는 툭하면 과거 얘기 꺼내면서 자살을 할 정도로 갈궈댔다는 것이다. 물론 조조는 용서하고 넘어갔어도 조비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허나 최고 권력자인 조조가 과거를 잊겠다고 천명하고 장수를 후대한다면 다른 인물들도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티를 안 내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조조가 죽은 것도 아니고 노망난 것도 아니고 새파랗게 살아서 우대하는데 아직 후계자로 내정되지도 않은 조비가 툭하면 장수를 불러내서 공개적으로 갈궈댄다. 조비가 성질이 더러워서 대책없이 저지른 짓이라 치부하기도 어려운 것이, 한두 번이라면 몰라도 이런 짓을 사람이 자살할 정도로 빈번하게 했다면 조조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없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조조는 그 어떤 제지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처벌은 고사하고 조비를 꾸짖었다는 기록조차 한 줄도 없다. 그렇다면 조비의 행동에 최소한 조조의 의도적인 방관이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조조는 매우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고[6] 연주목 시절부터 원한이 있으면 악독하게 갚기로 유명했다.[7] 당장 아버지 조숭이 도겸한테 죽었다고 무고한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한 조조가, 장남 조앙, 조카 조안민, 아끼던 장수 전위를 하루 아침에 죽여버린 장수를 과연 정말로 용서했을까?[8] 관도대전 당시야 워낙 상황이 급박했으니 겉으로는 다 잊은 척 하고 장수를 환대했지만 원소도 죽고 원소의 자식들과의 전쟁도 승리하고 하북도 거의 평정했다면 조조가 더 이상 옛 감정을 잊고 장수를 용서할 필요가 있을까? 단순하게 생각해 봐도 그럴 리가 없다. 조비 본인도 장수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고, 기록에 따르면 조비는 형 조앙과의 사이가 상당히 좋았다고 하니 당연히 조비 역시 장수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기도 하다.
즉 조조와 조비는 처음부터 장수에 대해 악감정을 극한으로 품고 있었고, 이 때문에 조비가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시도때도없이 장수를 갈궈댔고, 조조는 앞으로는 그를 후대하고 식읍을 늘려주는 등 대외적인 연기를 하며 뒤로는 조비와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방관한 것이라는 설이다. 조조가 그의 죽음까지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조비가 자기가 대외적으로는 못 하는 일을 대신 해 주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높다. 그리고 여기에서 조금 더 과감한 설을 더하자면, 조비 자신이 장수를 갈궈도 별다른 제재가 없을 것을 계산적으로 파악해 장수를 정신적으로 몰아갔거나, 더 나아가 조비가 조조가 대외적으로 못 하는 갈굼을 대신함으로써 조조에게 어느 정도 점수를 땄다는 가정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설령 장수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든 조비에게 제거되었을 것은 거의 확실하며 심지어 조조 본인도 죽을 때까지 조앙의 죽음에 대해 자책했던 만큼 언제까지나 그를 가만히 놔두었으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이런 토사구팽이 사실이라면 장수의 아들 장천이 위풍의 난에 휘말려 죽은 것도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심을 품은 장천이 유비와 연담하는 난에 실제로 가담했거나, 아니면 조조와 조비가 장수에게 맺힌 원한을 후손에게까지 뒤집어씌워 앙갚음을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여도 개연성은 충분하다. 사실 조조가 장천의 목을 날려버린 것만으로 충분히 설명이 되는데, 설령 반란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진짜로 과거를 다 잊고 받아들였다면 장천은 조조의 나름 공신인 장수의 아들이니 폐서인하는 걸로 끝내는 방법도 있었을 수 있는데 그냥 죽여버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정도까지 조조 부자와 감정적으로 골이 났는데도 문제 없을 거라고 장수에게 투항을 권유한 가후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다. 갈굼당하다가 끝내 죽음을 택한 장수와 달리 정작 가후는 조조를 거치고 조비 밑에서 천수를 누리며 살아갔다. 즉, 장수는 가후의 변설에 넘어간 셈이다. 가후는 조조에게 투항해야 할 세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로 조조가 천자를 받들고 있어 명분이 있고, 둘째로 원소의 군대는 강세하여 장수가 가도 그리 환영해줄지 알 수 없는 반면 열세인 조조는 크게 환영해줄 것이며, 셋째로 조조가 패왕의 뜻을 가졌다면 사사로운 원한을 잊을 거란 것이었다. 이것이 그럴듯해 보여도 장수가 아니라 가후와 장수의 다른 부하들에게만 통용되는 말이었다.[9]
첫번째 이유로 조조가 천자를 받들고 있기에 명분이 있다는 점은 중요한 요소긴 하지만, 장수는 세력의 수장이기 때문에 원소와 조조 중 누가 실제로 이기냐 지냐가 중요하지, 천자가 주는 벼슬을 받고 중앙정계에 진출해서 인맥을 쌓는 것은 장수와 그의 일족보다는 장수 휘하의 부하들에게 더 이익이 된다. 왜냐하면 원소가 이겨도 조정의 신하들을 몰살하지는 않을 것이며, 조조를 택해서 손해가 생길 경우 수장을 따라간 것 뿐인 장수의 부하들보다는 직접적으로 조조를 택한 장수에게 더 큰 손해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원소의 군대는 강해서 장수를 그저 그렇게 대할 것이지만 조조는 약하니 장수를 환영해줄 것이란 것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장수에게 더 중요한 것은 상술했듯이 누가 이기느냐지 누가 더 중요하게 대해주냐가 아니다. 당연히 이기는 쪽에 붙어서 홀대를 받을지언정 계속 살아남는게 지는 쪽에 붙었다가 쪽박 차는 것보다는 더 낫다. 원소와 조조가 최소 10년은 승패가 갈리지 않고 아웅다웅하면서 싸워댄다면 누가 더 중하게 대우해주느냐가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겠지만 관도대전은 1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끝나버렸다.
셋째 이유로 조조 정도의 그릇이라면 사사로운 원한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것 역시 궤변이다. 조조는 용서할지 몰라도 조조의 주변 사람들은 용서해준다는 보장이 없으며 장수의 사례가 그대로 들어맞았다. 게다가 가후는 지속적으로 쓸모를 증명하며 처신을 잘 했기에 용서를 받을 수 있었지만, 장수는 조조 세력이 원소 세력에게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나자 이용가치가 떨어져서 평범한 무장 1, 2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저 세 가지 이유가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결정적인 이유는 조조가 이겼다는 점과, 말한 사람이 가후라는 대단한 모략가였기 때문이다. 위 세 가지 이유가 장수에게는 별다른 득이 되지 않는 반면, 가후는 저 이유들로 득을 보는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심지어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이긴 것도 어느 정도 상술되어 있지만 만약 유표의 지원을 받은 장수가 계속 조조를 괴롭혔다면 관도대전의 결과가 달라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훗날 관우가 양양과 번성을 위협하자 천도하겠다고 호들갑을 떨던 조조인데, 양번에서 허창까지의 거리보다야 장수가 있던 남양에서 허창까지의 거리가 훨씬 가깝다.[10] 또 조조가 오환을 정벌할 때 유비와 유표의 뒤치기를 신하들이 우려했고 실제로 유비가 뒤치기를 하자고 주장하기까지 했는데, 신야보다 더 가깝고 더 큰 남양에서 허창을 노린다면 얼마나 위협적이겠는가? 괜히 조조가 두 번이나 직접 장수를 정리하러 간 것이 아니다. 장수의 합류로 인해 원래는 조조가 직접 힘을 썼어야 했을 유표 방면의 수비가 조조는 힘 하나 쏟을 필요 없이 안정되었고, 그 덕에 조조는 유벽이나 유비 등 원소의 후방교란을 훨씬 수월하게 진압할 수 있었다. 만약 장수가 여전히 유표 밑에서 허도를 노리고 있었다면?
정치적으로 봐도 장소가 조조에게 투항한 것은 원소-유표 라인에서 원소와 유표를 동시에 직접적으로 엿먹이고 조조에게로 배반한 것이다. 원소와 유표가 이긴다면 장수는 살아남기 어렵고 다른 어딘가로 도망치는게 답이다. 더군다나 사실 그 당시 객관적인 승률도 원소가 높았다. 그래서 조조 밑에서는 결과적으로도 그렇고 상술된 조조의 성격도 그렇고 좋을 게 없었다. 이런 극단적이면서 장수에게 좋을 구석이 없는 안건을 심리전과 처세술의 화신인 가후가 제안했다는 것은 아마도 좋은 의미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가후의 모략 가운데 가장 음험하고 사악한 모략이 바로 원소와 유표를 버리고 조조에게로 항복하는 계책일 것이다.
결국 이 설들을 종합하자면 "조조는 천하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뒤로 했다"라는 미담 이면에 가후는 자신의 처세를 위해 주군인 장수를 팔았고 조비가 아니더라도 조조 휘하의 누군가에게 장수가 갈궈지는 것은 순리대로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조조 편에 서기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설사 지더라도 원소 편에 서서 사생결단을 내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4. 기타
- 자식으로는 앞서 언급된 장천 외에도 딸이 있었다.
- 진수는 이공손도사장[11]전으로 한꺼번에 싸잡아 세트로 묶었다. 공손찬과 공손도, 도겸, 장양 등은 일반 백성보다도 못하니 평할 가치도 없는 인물이라고 했고 장연과 장수, 장로는 현명하게도 조조에게 항복해 제사를 지켰으니 공손찬과 비교하면 좀 낫다고 했다. 진수는 위촉오 삼국의 인물을 제외하곤 장수 뿐만 아니라 원소를 필두로 해서 후한 군벌들에 대해 박한 평가를 했다.
- 마이너급 군벌들 중 조조에게 큰 타격을 주고도 살아남은 특이한 경우이다. 군웅으로서의 활동 연간도 196년 후반 ~ 200년 초반으로 매우 협소하다. 하지만 여포, 원술을 신경쓰느라 정신 없는 조조와 두 번 싸워서 두 번 모두 짭짤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조조를 낮추고 가후를 띄우는 데 매우 괜찮은 소재로서 삼국지연의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긴 군주다.[12] 좀 나쁘게 말하면 가후 셔틀인데다 군사적 능력 측면에서는 가후가 조조보다는 못하다고 평가했지만, 관도대전과 원담과의 대전에서 상당한 공적을 세운 것을 보면 뛰어난 장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조가 당대의 뛰어난 먼치킨 지휘관임을 감안하면 인물평을 나쁘게 말했음에도 높게 쳐준 격.
- 마오쩌둥의 삼국지 24명장에서 최하위권이긴 하지만 귀신 같은 창술의 소유자로 안량, 문추와 함께 거론된다. 링크에서는 조운처럼 상산 출신이라 띄워진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상산 출신이 아니다. 숙부인 장제의 출신지를 생각하면 장수 역시 서량으로 일컫는 양주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 이름인 장수가 일반명사인 장수와 한국어 독음이 같기에, 유상무상무놀이가 가능하지만, 張繡의 독음이 중국어로는 [Zhang Xiu], 일본어로는 [ちょうしゅう, 쵸-슈-]가 된다.[13]
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장수(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장제는 장수의 막내 삼촌이다.
원굉의 《
후한기》 29권에 장제가 장수의 계부(季父, 막내 삼촌)라는 기록이 있다.
[2]
정사에서의 추씨의 성씨는 불명이고 추씨라는 성씨는 연의의 창작이다. 그러나 정사 장수전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조조가 무슨 성씨인지는 몰라도 장제의 과부를 거둬들였고, 이에 장수가 분노하여 조조군을 공격한 것은 기록에 남아있는 사실이다. 장수전의 내용을 추가하자면 조조가 자신이 그녀를 거둔 것을 장수가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 은밀히 죽이려는 계책을 짠 게 누설되어 장수에게 습격당했다고 적고 있다.
[3]
《
삼국지연의》에서
원소와 조조 사이에서 조조를 골라야할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명장면.
은하영웅전설에서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가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가 아닌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을 따라야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도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4]
사실 장수 입장에서는 조조에게 귀순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후환이 남을 수 밖에 없는 결정이었다. 결과만 보면, 자신도 핍박받아 죽었으며, 가문도 멸문당했다. 오히려 원소 쪽에 항복했어도 크게 손해받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장수가 조조와 원소 양쪽 모두에게 상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장수가 원소 쪽과 연합하면 친원소 세력에 가까웠던 유표 세력과 대놓고 친원소 라인을 표방한 여남군 대부분과 연계해 조조를 협공하기에 상당히 유리한 형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원소와 조조의 결전 당시엔 장수가 원소에게 경시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5]
다만 년도에 오류가 있는데 《
위략》에는
207년에 오관장 조비가 장수를 갈구어서 죽게 했다는데 실제로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된 것은 《위서》 <문제기>에 따르면
211년이다.
[6]
조조란 인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타고난 예술가 기질로 인한 감정적인 면인데 말년에는 이게 심해져서 주변인들의 죽음 혹은 위협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연주목 때부터 따랐던 측근
왕필이
경기,
위황의 난으로 죽었을 땐 아버지가 죽었을 때만큼이나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순 말도 안 되는 OX 문제를 낸 다음 한바탕 도살극을 벌였고,
한중 공방전에서
하후연이 죽었을 때도 정신줄을 놓았으며,
형주 공방전 당시
조인이 번성에서
관우한테 포위당하자 멘붕 와서 대오전선 방위도 무시하고 합비의
장료까지 불러들였다.
[7]
변양,
환엽을 죽인 일도 이에 해당한다.
[8]
심지어 조앙을 잃고 그로 인해 아내와 이혼한 일은 서주 대학살조차 평생 후회하지 않던 조조가 오랜 시간이 지난 말년에도 후회된다고 말했을 정도로 깊은 한으로 남아있었다.
[9]
공교롭게도 연의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할 때 "만약 손권이 조조에게 항복한다면 손권의 부하들이야 능력을 봐서 조조 밑에서 호사를 누릴 수 있겠지만, 손권이 조조에게 받을 대우는 찬밥이거나
유종 꼴이 날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는 장수가 딱 이 꼴이었다.
[10]
장수가 남양군 완현에서 양성으로 후퇴했는데 조금 남쪽으로 후퇴한 셈이다. 그러나 뻥 뚫려있는 남양군 치소인 완현보다 양성은 방어에 이점이 있어 보이고, 이 시기 남양 인근의 영향력은 조조와 유표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으므로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를 장수 세력이 점유하고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 양 전투 전까지 유표와 장수는 조홍을 남양군 섭현까지 물러나게 했다고 하는데 농담이 아니라 섭현에서 허창까지는 보병이 하루 걸으면 되는 거리다. 조조가 원술과 싸우고 있는 1년 동안 유표와 장수가 대단한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원술을 치다가 말고 물러나고 싶은 조조의 마음 또한 이해가 된다. 즉 원소와 조조가 싸우는 거의 1년 동안 유표의 강한 지원을 받는다면 천자가 있는 허도를 딸 수도 있는 것이 당시 유표와 장수였다. 심지어 유비가 예주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조조가 원술과 싸울 때보다 훨씬 더 강하게 몰아칠 수 있었다.
[11]
2공손, 도, 4장 등 성씨로 묶은 것으로 공손찬, 공손도, 도겸, 장연, 장수, 장양, 장로를 말한다.
[12]
이 시기에 조조는 유비, 여포, 원술, 이각 등과 싸우는 족족 이겼는데, 장수와 싸울 때만 그것도 두 번이나 패한 걸 생각하면 꽤 놀라운 전적이다.
[13]
장군과 동의어인 일반명사의 장수(將帥)는 중국어, 일본어 각각 '쟝슈아이', '쇼-스이'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