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00:53:46

자사(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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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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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刺史

고대 중국의 관직. 전한 무제 원봉 5년(기원전 106년)에 신설된 지방 관직이다. 전한 건국 초기에는 승상이 속관을 임시 파견하여 각 군에 감시 감독을 할 뿐, 상시 감독하는 관직은 없었는데, 무제가 군현에 대한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각 지방 파견하는 관리의 수를 늘리는 한편, 이 관리들을 감시 감독하기 위한 관직을 신설했는데, 이 관직이 자사이다.

만들어질 당시 녹봉은 6백 석으로 낮았는데,[1] 자사의 하급직으로 여겨진 태수가 2천 석이었다. 자사는 성제 시기인 수화 원년(기원전 8년)에 ()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녹봉도 태수와 동급인 2천 석으로 늘렸다. 애제 때는 자사로 바꾸었다가 다시 목으로 바꾸었으며 후한 때는 다시 자사로 돌아갔다.

한나라의 주는 기본적으로 단순한 행정적 구분에 가까웠기 때문에 자사는 태수의 상관이 아니라 조정에서 각 군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가진 태수를 감찰하기 위해 몇 개의 군()마다 파견된 감찰관이었다. 다만 중앙정부의 감찰관이라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태수의 상관처럼 군림하곤 했던 것은 사실이다. 자사는 크게 호족의 토지 소유 실태를 감시했고, 태수의 조서 이행 여부 및 학정 여부, 태수가 추천하는 인재의 타당성, 태수와 호족의 결탁 여부 등을 감시했다. 목으로 개편하면서 각 주의 일반 행정을 담당하도록 임무 역시 바뀌었다. 기존에 자사가 수행하던 임무는 어사중승이 담당했다.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언이 1개 군의 태수의 군사력으로는 반란이나 여러 혼란을 평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들어 각 주에 목을 두고 이들에게 군사권을 줘야 한다는 건의를 했고,[2] 이것이 받아들여져 목이 부활했다. 이외에도 독자적으로 군사권을 갖는 등 후한의 지방 지배 체제가 문란해졌고, 그 결과 후한말 삼국시대 군웅할거 난세 가 열렸다.

2. 관련 문서



[1] 현령급이 이 정도 녹봉을 받았다. [2] 유언은 이를 빌미로 독립해 버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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