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21:55:58

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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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 왕상 위진 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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荀彧
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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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colbgcolor=#FFFFFF,#191919>경후(敬侯)
작위 만세정후(萬歳亭侯)
최종직위 태위(太尉)[1]
성씨 (荀)
(彧)
병음 표기 Xún Yù
문약(文若)
생몰기간 163년 ~ 212년
고향 예주 영천군 영음현(穎陰縣)

1. 개요2. 인물사
2.1. 정사 삼국지
2.1.1. 초기 생애2.1.2. 조조에게 임관2.1.3. 서주 대학살2.1.4. 복양 전투2.1.5. 삼보의 난2.1.6. 조조 휘하2.1.7. 완 전투2.1.8. 양 전투2.1.9. 관도대전2.1.10. 하북 평정2.1.11. 조조 휘하2.1.12. 형주 정벌2.1.13. 조조 휘하2.1.14. 죽음
2.2. 삼국지연의
3. 평가
3.1. 역사가들의 평가3.2. 왕좌지재
3.2.1. 소하로서의 역할3.2.2. 장량으로서의 역할
3.3. 토사구팽
3.3.1. 왕을 거부한 왕좌지재의 비극3.3.2. 순욱의 죽음이 불러온 파장
3.4. 한(漢)에 대한 충정과 관련된 의문
3.4.1. 부정론3.4.2. 긍정론
3.5. 인재를 보는 눈
4. 가족 관계5. 미디어 믹스6. 기타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대 중국 후한 말의 인물이자 조조의 모사로 그의 장자방이라 불리며 왕좌지재라는 단어로 유명하다. 는 문약(文若)으로 예주 영천군 영음현 사람.

후한서 순숙전에 따르면 조부는 순자의 11대손인 순숙,[2] 아버지는 순곤, 형제는 순심, 연상의 7촌 조카는 순유이고 아들로는 순운, 순의, 순찬이 있다.

2. 인물사

2.1. 정사 삼국지

2.1.1. 초기 생애

전략에 따르면 중상시 당형(唐衡)이 자신의 딸을 여남 사람 부공명(傅公明)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공명이 승낙을 하지 않자 순욱에게 보내려고 했다. 순욱의 아버지 순곤은 당형의 권세를 생각하여 순욱에게 당형의 딸을 맞이하게 하였다.[3] 사람들은 순욱이 그 사실을 속였다고 한다.[4]

순욱이 어릴 때 남양의 하옹이 순욱을 기이하게 여기며 이렇게 말했다.[5]
왕을 보좌할 재능을 가지고 있구나! [6]

어림에 따르면 공숭은 젊어서 스무 살이 안 되었을 때, 순욱과 함께 태학에서 유학했다.

2.1.2. 조조에게 임관

종요전 주석 후한서에 따르면 음수는 영천태수로 있을 때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했다. 그 가운데 오관연 장중, 찰공조 종요, 주부 순욱, 주기연 장례, 적조연 두우, 효렴 순유, 계리 곽도 등은 모두 국가의 동량이 되었다.

189년, 효렴으로 천거되어 수궁령에 배수되었다. 동탁의 난 때, 외직으로 나가 보필하는 관리가 되길 구하였다.[7] 항보 현령에 제수되었으나, 마침내 관직으로 버리고 돌아와서 고향의 부로들에게 말했다.
영천은 4면에서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땅인데, 천하에 변란이 있어 항상 군대의 충돌이 생길 것이니, 마땅히 이곳을 떠나 오래 머무르지 마십시오.
고향 사람들이 많이 땅을 생각해 주저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기주목으로 같은 군 사람인 한복이 기병을 보내 맞이하려 하게 되자, 따르는 자가 없으니 순욱만 그의 종족들을 데리고 기주에 이르렀다. 원소가 이미 한복의 지위를 박탈하였으나, 순욱은 중요하고 지위가 높은 손님의 예로 대우했다. 순욱의 형제 순심 및 같은 군 사람인 신평, 곽도는 원소에게 임명되었다. 순욱은 원소가 끝내 대사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조조가 분무장군이 되어 동군에 있었는데, 191년, 순욱은 원소를 버리고 조조를 따랐다.[8] 조조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나의 자방( 장량)이로다.
그리고는 사마로 삼으니, 이때 나이가 29세였다. 밑에서 서술하듯이 이 시기에는 순욱이 항상 종군하며 조조의 전투를 보좌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동탁의 위세가 천하를 능멸하고 있었는데, 조조가 순욱에게 묻자 순욱이 말했다.
동탁의 포학이 이미 극심하여 필히 변란으로 끝날 것이니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동탁이 이각 등을 보내니 관동으로 나가 가는 곳마다 노략질하고 영천, 진류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고향 사람들 중 머물러 있던 자들은 많이 살해되고 노략질당했다.

다음 해 조조가 연주목을 맡고, 후에 진동장군이 되었는데, 순욱을 항상 사마로서 종군케 했다.[9]

2.1.3. 서주 대학살

194년, 조조가 도겸을 정벌하면서 순욱을 연주에 머물게 해 남은 일을 맡겼다. 즉, 당시 순욱은 서주로 같이 가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우기엔 어렵다.[10] 다만 조조의 첫 번째 주(州) 단위 외정인 서주전에서도 순욱의 조언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아니면 '조조의 우발적 행동이었고, 따라서 순욱은 나중에야 이를 알았다'가 될 텐데 일단 조조에 대한 충성과는 별개로 순욱은 백성들 상대로의 학살이 전략적으로 이득이 없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다. 조조가 다시 식량사정 등의 문제로 서주를 치려고 했을 때 순욱은 도겸이 비록 죽는다고 해도 서주는 망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패배를 거울 삼아 단결하고 있다고 했으며 보리를 거두고 성을 굳건히 하고 청야작전을 펼치고 있으니 열흘도 안 되어 10만 병사들이 궁핍해질 것이라 말한 다음[11] 이어서 이런 말로 말리기도 했다.
장군께서는 본래 연주에서 일을 시작하였으니, 먼저 평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서주가 평정되지 않는다면, 장군께서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전에 서주를 토벌할 때 위벌(威罰)이 실행되어 그 자제(子弟)들이 부형(父兄)의 치욕을 생각하니 필시 사람들마다 스스로 지키려 하며 항복하려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설령 격파할 수 있다 해도 가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정사 순욱전

'위벌'이라고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서주 백성들의 자제들이 아버지와 형제가 (조조에게) 치욕을 당해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점에서, 순욱 역시 이걸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으니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순욱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아 서주 대학살로 잃은 민심으로 인해 서주 출신 인재들이 대항 세력에게 가는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 서주 출신이 바로 제갈량 노숙.

2.1.4. 복양 전투

장막 진궁이 연주로써 배반하여 몰래 여포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포가 이르자, 장막이 이에 유익(劉翊)을 시켜 순욱에게 알렸다.
여장군은 조사군(조조)이 도겸을 치는 것을 도우러 왔으니, 마땅히 빨리 군사와 식량을 주시오.
사람들이 다 의심스러워했다.

순욱은 장막이 반란을 일으켰음을 알고 곧 병사를 이끌고 대비를 했으며, 동군태수 하후돈을 빨리 불러들였지만, 연주의 여러 성이 모두 여포에게 호응했다. 이때 조조의 모든 군대는 도겸을 공격하고, 남겨서 수비하던 병사는 적었고, 감독하던 장수와 큰 관리들이 장막, 진궁과 많이 남몰래 서로 통하여 공모하였다. 하후돈이 도착하자, 그날 밤에 모반하였던 자 수십 인을 주살하니, 군대가 이내 평정되었다.

예주자사 곽공이 군사 수만을 이끌고 성 아래에 이르렀다. 혹자들은 곽공이 여포와 같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말하니, 군사들이 심히 두려워했다. 곽공이 순욱을 보려 하니 순욱이 가려고 했다. 하후돈이 말했다.
그대는 한 주의 중요한 인물로, 가면 반드시 위험하게 될 것이니 가면 안 됩니다.
순욱이 말했다.
곽공이 장막과 본래부터 결탁한 것은 아니며, 지금 빨리 온 것은 그 계책이 반드시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오.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그를 설득하면 중립을 하게 할 수 있으나, 만약 먼저 의심한다면 저들은 장차 노하여 계책을 완성할 것이오.
곽공이 순욱을 만나는데 두려운 뜻이 없고, 견성은 쉽게 공격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 하에,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가 버렸다.

정욱전에 따르면 장막이 모반하여 여포를 맞이하자 군현들이 이에 호응했으나, 오직 견성현, 범현, 동아현만은 동요되지 않았다. 이때 당시 연주는 9개 군 80현으로 이루어졌으므로 3현을 제외한 77개 현, 즉 대략 96.25%의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다.

여포군에 항복한 자들이 진군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동아현을 취하려 한다고 말하자, 다시 범의를 시켜 범현을 공취하게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순욱이 정욱에게 말했다.
지금 연주가 반란을 일으켜서, 우린 오직 이 3성만 가지고 있소. 진궁이 막강한 군대로 임한다면, 깊이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 두지 못해 세 성은 반드시 동요할 것이오. 당신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자이니, 돌아가 저들을 설득한다면 거의 괜찮아질 것이오.

정욱과 계획을 세워 범현, 동아현을 설득해, 마침내 3성을 보전하고 조조를 기다렸다.
정욱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정욱이 어렸을 때 일찍이 꿈에 태산(泰山)에 올라 두 손으로 해(日)를 받드는 꿈을 꾸었다. 정욱이 혼자서 이를 기이하게 여기다가 순욱에게 말해 주었다.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정욱의 공에 힘입어 세 성을 보전하게 되었다. 이에 순욱이 정욱의 꿈을 조조에게 말해 주니 조조가 경이 끝내는 내 심복이 되리란 꿈이오라 했다. 정욱의 본래 이름은 립(立)이었는데, 조조가 이에 립(立) 위에 일(日)을 더하게 하여 이름을 욱(昱)이라 고쳤다.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와 복양에서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는 동쪽으로 달아났다.

195년, 조조가 승씨에 주둔했는데,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을 지경이었다. 도겸이 죽으니 조조가 마침내 서주를 취하고, 돌아와 이내 여포를 평정하고자 했다. 순욱이 말했다.
장군께서는 본래 연주에서 일을 시작하였으니, 먼저 평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서주가 평정되지 않는다면, 장군께서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이전에 서주를 토벌함에 위엄과 형벌로 실행해서 사람마다 반드시 스스로 지키며 항복할 마음이 없으니, 가서 격파할 수 있다 해도 아직 우리 소유로 할 수 없습니다.
조조가 이내 그쳤다. 보리를 크게 거두고, 다시 여포와 싸우며, 병사를 나눠 여러 현을 평정하게 했다. 여포는 패주하고, 연주는 마침내 평정되었다.

2.1.5. 삼보의 난

196년, 조조가 황건을 격파했다. 한 헌제가 하동에서 낙양으로 돌아왔다. 조조가 황제를 받들어 맞아 허(허도)에 도읍을 정하는 것을 의논했는데, 혹자가 산동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한섬 양봉이 새로 천자를 데리고 낙양에 도착하고 북으로 장양과 연계되어 있어서, 끝내 제압할 수 없다고 했다. 순욱이 조조에게 천자를 받들어 모시는 것(奉)은 백성들의 여망을 따르는 것으로 이는 큰 순리라 권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장차 천자를 영접하려 하자 제장들 중에 간혹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순욱, 정욱이 권하자 조홍을 보내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천자를 영접하도록 했다. 위장군 동승이 원술의 장수 장노와 함께 험준한 곳을 막고 있었으므로 조홍은 진군할 수 없었다.

조조가 마침내 낙양에 이르러 천자를 받들고 허에 도읍했다. 천자가 조조를 대장군에 배수하고 순욱을 시중으로 승진시켜서 상서령을 관장했다. 항상 중용을 지키며 엄중함을 가졌다.

2.1.6. 조조 휘하

전략에 따르면 순욱은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자신을 낮추었으며,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다. 정치를 행하는 관청에서 정치에 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순욱에게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조카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순욱에게 이렇게 물었다.
일을 처리할 때 조카와 상의하지 않고 왜 반드시 의랑과 함께 논의합니까?
순욱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관직이란 재능이 드러나야 출세를 하는 법이오. 만약 그대의 말처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순욱의 공평하고 공정한 마음은 이와 같았다.

조조가 정벌 때문에 밖에 있으면서, 군무와 국정의 일을 모두 순욱과 계획했다.

전략에 따르면 순욱의 사람됨이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웠다고 했다.

예형전에 따르면 예형은 조조에게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고는, 또 순욱은 큰 몸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조융은 올챙이배를 가진 것을 본 적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문약(순욱)은 상가에 조문이나 가는 데 쓰면 좋을 것이고, 치장(조융)은 주방장이나 하면서 손님 접대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12]

순욱은 용모가 뛰어났고 조융은 배가 커서 아무것이나 잘 먹는 대식가였다.

예형전 주석 순욱의 비문에 따르면 순욱을 아름다운 자태와 기이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했다.

유소전에 따르면 태사(太史)가 글을 올려 말했다.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을 것입니다.
유소는 당시 상서령 순욱의 관부에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의 수가 몇 십 명이었는데, 어떤 이는 새해에 지내는 조묘의 제사를 폐지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조회를 뒤로 물려야 된다고 했다. 유소가 말했다.
성인이 제도를 정할 때, 변이 때문에 먼저 조례를 폐지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때는 재난과 변괴가 점점 사라져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미리 알아보는 기술에 잘못이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순욱은 그의 말에 매우 찬성하였다. 명령을 내려 조회를 옛날처럼 하도록 하자, 일식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만총전에 따르면 이전에 태위를 역임했던 양표가 체포되어 현의 옥으로 보내졌다. 상서령 순욱, 소부 공융 등은 모두 만총에게 부탁했다.
단지 죄상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에 그치고 형벌을 가하지는 마시오.
만총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법에 따라서 심문했다. 며칠이 지나, 만총은 조조에게 만나기를 요청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표를 심문했지만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사형에 처해야만 되는 자는 먼저 그의 죄를 명백히 밝혀야만 하는데, 이 사람은 명성이 있으므로 만일 죄가 명확하지 않으면 명공(明公)은 반드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잃게 될 것입니다.
조조는 그날 중에 양표를 사면하여 석방시켰다. 처음에 순욱과 공융은 만총이 양표를 엄하게 심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매우 화를 냈었지만, 이러한 결과를 얻게 되자 오히려 만총에게 감사했다.

조조가 순욱에게 물었다.
누가 능히 경을 대신해 나를 위해 계모를 짤 수 있겠소?
순욱이 말했다.
순유 종요입니다.
이에 앞서 순욱이 책략을 짜는 선비를 말하면서 희지재를 천거했다. 희지재가 죽자 곽가를 천거했다. 조조는 순욱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여겨서, 여러 순욱이 천거해 이른 사람들은 모두 합당한 직위를 가졌지만, 오직 양주(揚州)자사가 된 엄상과 양주(凉州)자사가 된 위강만이 후에 자리를 잘못 잡아 패망했다.

두기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두기는 형주에서 귀향한 후, 허현에 가서 시중 경기를 만나, 밤을 세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상서령 순욱과 경기는 저택이 인접하였으므로 순욱은 한밤에 두기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훌륭한 인재로 여겨 사람을 보내 경기에게 물었다.
나라의 훌륭한 선비가 있음에도 추천치 않다니, 귀공은 자신이 왜 관직에 있는지도 모르는 건가?
두기와 만난 후 순욱은 그를 이해하기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처럼 하였다. 결국 두기를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

유방전 주석 손자별전에 따르면 상서령 순욱이 손자를 만나 감탄하며 말했다.
북방의 주는 전쟁의 상황이 오래되어 그곳의 현명하고 지혜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손계군(손자)을 만났으니!
그리고는 상주하여 상서랑으로 삼아 머물게 하려고 했으나 집안의 난리를 핑계 삼아 하동으로 돌아왔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순욱은 전후로 뛰어난 인재를 여러 사람 추천했다. 그 가운데 고향 사람으로는 순유, 종요, 진군이 있었으며, 하내에서는 사마의가 있었다. 또 당대에 이름난 사람으로는 치려, 화흠, 왕랑, 순열, 두습, 신비, 조엄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공경의 반열에 오른 사람만 10명이 넘었다. 인재 가운데에는 일반적인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희지재, 곽가 등은 세속의 법도를 어기기도 했으며, 두기는 오만하고 학문이 얕았지만 모두 뛰어난 지혜와 책략으로 천거되어 각자 이름을 날렸다. 순유도 나중에 위의 상서령이 되어 역시 많은 인재를 추천했다. 조조는 이 두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순(二荀)[13]이 논한 사람은 더욱 믿을 만하다. 나는 영원히 그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2.1.7. 완 전투

조조가 천자를 영접한 이후로 원소는 내심 불복할 마음을 품었다. 원소가 이미 황하 이북 지역을 병합하자 천하가 그 강성함을 두려워했다. 조조는 때마침 동으로 여포를 걱정하고 남으로 장수를 막고 있었는데, 장수가 완성에서 조조군을 패배시켰다.

원소가 더욱 교만하져 조조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말이 패악하고 오만하였다. 조조가 크게 노하여 평소와는 달라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장수 일로 이로움을 잃은 것 때문이라 생각했다. 종요가 이를 순욱에게 묻자 순욱이 말했다.
공께선 총명하므로 반드시 지난 날의 허물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마도 다른 생각이 있을 것이오.
이에 순욱이 조조를 뵙고 물어보니 조조가 이내 원소의 편지를 순욱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이제 장차 저 불의한 자를 토벌하고자 하는데, 힘이 상대가 되지 않으니 어찌해야겠소?
순욱이 말했다.
지금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오직 원소뿐입니다. 무릇 네 가지 이기는 것으로 천자를 보필하고, 의를 가지고 정벌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원소의 강성함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 도량: 원소는 겉으로는 관대하나 남에게 일을 맡겨도 그의 마음을 의심하지만, 조조는 재능으로서만 그 마땅한 바를 맡긴다.
  • 모책: 원소는 지지부단하여 결단이 적어 후에 기회를 잃는데, 조조는 대사를 결단하며 임기응변으로 정해진 방법이 없다.
  • 무력: 원소가 비록 사졸들이 많다고 해도 군대를 거느림에 관대하고 느슨하여 법령이 제대로 서지 않으니 그 실상은 쓰기 어렵다. 조조는 비록 사졸이 적지만 법령이 분명하고 상벌을 반드시 행하여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운다.
  • 덕: 원소는 선대의 자금에 힘입어 꾸미고 명예를 거두어들이기에 선비들 중 능력은 작지만 묻기 좋아하는 자들이 많이 그에게 귀부하는데, 조조는 천하의 충정과 실효가 있는 선비들은 모두 기용되길 원한다.

조조가 기뻐했다. 순욱이 말했다.
여포를 먼저 취하지 않으면, 하북 또한 쉽게 도모하지 못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걱정되는 것은 또 원소가 관중을 침범해 소란스럽게 하고, 강족, 호족에게 난을 일으키게 하며, 남으로 촉한을 유인할까 두려우니, 이것은 나 혼자 연주와 예주로써 천하의 5/6를 대항하는 것이오. 장차 어찌하면 좋소?
순욱이 말했다.
관중의 장수는 십수명이지만, 능히 서로 하나로 하지 못하고, 오직 한수 마초만이 가장 강성합니다. 저들이 산동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 필히 자기 군대를 껴안고 스스로를 보호할 것입니다. 종요는 가히 서쪽 일(외교)을 맡길 수 있으니, 공께서는 걱정할 바가 없습니다.

2.1.8. 양 전투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군을 이끌고 퇴각하려 하는데 장수의 군사들이 추격해 와 조조의 군이 전진할 수 없자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했다. 조조가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적이 와서 우리 군을 추격해 와 비록 하루에 몇 리밖에 행군하지 못하지만 내가 헤아려 보건대 남양군 안중현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를 격파할 수 있소.
안중에 도착하자 장수가 유표의 군사와 합쳐 험지를 지키니 조조의 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조조는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조조가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을 풀고 보병과 기병으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가을 7월, 조조가 허도로 돌아왔다. 순욱이 조조에게 물었다.
이전에 적을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조조가 말했다.
적이 퇴각하는 군사인 우리 군을 막아서서 사지(死地)에서 맞붙어 싸우니, 이로써 나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줄 알았소.

2.1.9. 관도대전

헌제춘추에 따르면 동승이 죽고 나자 복황후는 아버지 복완에게 편지를 보내 사공(조조)이 동승을 죽였으니 황제께서 원한을 갚아달라고 한다고 했다. 복완은 그 편지를 순욱에게 보여주었더니 순욱이 그 편지를 보고 증오하면서 오랫동안 감추고 말을 하지 않았다.

198년, 조조가 이미 장수를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여포를 사로잡아 서주를 평정하여, 마침내 원소와 서로 항거하게 되었다. 공융이 순욱에게 일러 말했다.
원소는 땅이 넓고 병사가 강합니다. 전풍, 허유는 지모의 선비로 그를 위해 계책을 짜고, 심배, 봉기는 충성을 다하는 신하로 자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며, 안량 문추는 용맹함이 전체의 군대 중에 으뜸이라 그 병사를 통솔하고 있으니, 아마 이기기 어려울 것이오!
순욱이 말했다.
원소의 병력은 많으나 법령이 정비되어 있지 않소. 전풍은 강하나 윗사람을 거스르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다스리지 못하오. 심배는 제멋대로 하여 지모가 없고, 봉기는 과감하나 스스로를 판단하니, 이 두 사람을 남아 뒷일을 처리케 한다면, 허유의 가족들이 법을 범하여 풀려나지 못하면 허유는 변란을 일으킬 것이오. 안량과 문추는 한갓 필부의 용맹일 뿐이어서, 한번 싸워 사로잡을 수 있소.

그리고 이 평가들은 신기할 정도로 맞아떨어져서, 그 장수들은 순욱이 평가한 단점이 원인이 되어 최후를 맞이하였다.
  • 원소: 병력은 많으나 법령이 정비되어 있지 않음. >"최강의 세력이었으나 자신의 독단과 카리스마만으로 세력을 이끌어 왔고 1인자인 자신이 죽자 세력이 분열되고 결국 조조에게 각개 격파되었다."
  • 전풍: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나 윗사람을 거스른다.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간언하다 원소에게 미움을 사 옥에 갇힘"
  • 허유: 탐욕이 심하여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 반드시 배반할 것이다. > "부정부패가 들통나, 심배가 원소에게 비방할 명분을 주었고 결국 배반하여 조조군에 항복한다, 거기다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말대로 조조군에 항복한 이후 조조에게 심하게 허세와 거만을 떨다가 조조에게 미움을 받아 죽는다"[14]
  • 심배: 독단적이며 계획성이 없다.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봉기와 함께 원상을 제멋대로 옹립해 원가의 분열을 조장"
  • 봉기: 과단성이 있지만, 스스로의 판단에 따른다. >"봉기 또한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심배와 함께 원상을 제멋대로 옹립해 원가의 분열을 조장. 그나마 과단성 있다는 평답게 용기 내어 원담과 원상의 중재를 나섰으나 그 용기가 독이 되어 죽고 만다. 직접 원담에게 찾아가 원담과 원상의 협력을 유도하던 와중 결국 화가 난 원담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 안량, 문추: 필부의 용맹을 가졌으니(= 용맹은 하나 지혜가 없다) 한 번의 싸움만으로도 사로잡을 수 있다. >"안량은 관우의 무예에 패배하여 사망, 문추는 순유의 계략에 의해 사망"

당시 원소군은 대륙 최강이었는데 그에 비해 순욱의 평가는 너무나도 박하다. 아마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세력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단점만을 과장해서 비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순욱의 비평이 그들의 최후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순욱이 원소군을 잘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몇몇 인물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어떤 사람들이 주목하기도 하는데, 원소군에서 지위가 높은 순욱의 친척[15], 동문들의 경우 언급을 피했거나 혹은 원소군 멸망 이후 비판 내용을 생략했을 수 있다는 추측이 있다.[16]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저수는 빠질 이유가 없기 때문에, 어쩌면 순욱이 단점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인재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다만 순욱의 이 비평은 공융의 발언에 대한 반론이라 그냥 단순히 공융이 언급한 인물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보니 생략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후자면 공융이 순욱 눈치본건가

200년, 원소와 연이어 싸웠다. 조조가 관도를 보전하고 있자, 원소가 이를 포위하였다.

무제기에 따르면 이때 조조의 군량이 적어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는 일을 의논했다. 순욱이 말했다.
원소는 모든 군을 관도에 집결시켜 공과 더불어 승패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공은 지극히 약한 것으로 지극히 약한 것을 감당해야 하는데, 만약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필시 저들이 이를 틈탈 것이니 이는 천하를 가름하는 관건입니다. 게다가 원소는 평범한 사내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일에는 능하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는 못합니다.
조조가 이 말에 따랐다.

조조군의 군량이 막 다해가려 하니, 순욱에게 글월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 원소를 유인하고자 하는 방법을 의논했다. 순욱이 말했다.
공께서는 1/10의 군사로 땅을 지키고 있으며, 나아가지 못하게 한 지 이미 반년이나 되었습니다. 정황을 보아하니 세력이 고갈되어 필히 장차 변란이 생길 것이니, 이는 빼어난 계책을 쓸 때이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조조가 이내 머물렀다.

안량과 문추는 진영에 임해 머리를 준 꼴이 되었으며, 심배는 허유의 가족이 법을 어겼다 하여 그 처자를 잡아들이자, 허유는 노하여 원소를 배반했다. 마침내 날랜 병사로 원소가 주둔한 곳을 습격하여 그 장수 순우경을 베어버리니, 원소가 패퇴하여 달아났다. 전풍은 간언하다 주살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순욱이 계책을 세운 바와 같았다.

201년, 조조가 동평군 안민현에 가 곡식을 받았는데 군량이 적어 하북과 서로 상대하기에 부족하여, 원소가 최근 격파된 틈을 타서 그 사이 유표를 쳐서 토벌하고자 했다. 순욱이 말했다.
지금 원소는 패배하여 그 군사들의 마음이 떠났으니, 마땅히 그의 곤란함을 타서 마침내 평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주와 예주를 등지고 멀리 장강과 한수에까지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원소가 그 나머지 무리를 거둬 들여 빈틈을 타 후방에서 나온다면, 공의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입니다.
조조가 다시금 하수(황하)가에 주둔했다.

2.1.10. 하북 평정

원소가 병으로 죽었다. 조조가 하수를 건너 원소의 아들 원담, 원상을 공격하였으나, 고간 곽원이 하동 지역을 침략하자, 관서 지역이 진동했는데 종요 마등 등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했다.

203년, 조조가 순욱의 전후의 공을 기록해 표를 올리니 순욱을 봉하여 만세정후로 삼았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순욱이 야전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사양하자 조조의 표는 시행되지 못했다. 조조는 순욱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와 더불어 함께 일을 해 오면서 조정을 바로 세울 때, 그대는 함께 페하를 크게 보필했으며, 그대와 함께 수많은 인재들을 추천했고, 그대와 함께 여러 가지의 계책을 세웠으며, 그대와 함께 비밀리에 모략을 꾸민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야전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말로 사양을 하지 마시오.
순욱도 더 이상 사양을 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204년, 조조가 업성을 함락시키고, 기주목을 맡았다. 어떤 자가 조조를 설득하길 마땅히 말했다.
옛 제도를 부활해 구주(九州)를 두면, 기주가 담당하는 곳이 광대하여 천하가 복종할 것입니다.
조조가 이 의견을 따르려 하자, 순욱이 말했다.
사람마다 절로 자신의 토지를 보전하지 못하고 그 병사를 지킬 수 없을까 두려워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땅을 나눠 기주에 속하게 하면, 장차 모두 마음이 동요하게 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관서 지방의 여러 장수들에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실을 듣는다면, 반드시 차례대로 빼앗기게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조조가 마침내 구주의 의논을 그치게 하였다.

이때 순유가 항상 일을 주장하여 꾀하는 사람이 되었다. 순욱의 형인 순연은 감군교위로서 업성을 지키며, 하북의 일을 모두 감독하였다. 조조가 원상을 정벌할 때, 고간이 은밀히 병사를 보내 업성을 습격할 것을 모의했는데, 순연이 반역을 알아차리고 모두 다 주살하니, 그 공으로 열후에 봉해졌다.

조조가 그 딸을 순욱의 장자 순운에게 시집보냈는데, 후에 안양공주라 칭해졌다. 순욱과 순유는 같이 귀중해졌지만, 모두 겸손하고 검소해, 녹봉은 종족이나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두기전에 따르면 조조가 하북을 평정한 뒤, 고간이 병주를 이끌고 반역했다. 원소군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고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는 매우 큰 위협으로 닥쳐왔는데, 조조는 초기 진압에 실패하였고, 이에 순욱은 두기를 고간이 장악한 하동군에 보내었다. 예상대로 두기는 내부에서 反고간 세력을 규합해 고간 진영을 혼란시켰다. 이에 고간이 직접 이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으나 실패하였고 마등 또한 조조 측에 가세해 상황이 역전되었다.

두기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순욱은 두기의 용기는 큰 곤란에 맞서기에 충분하고, 지혜는 변화에 응하는 것이 가능하니, 그를 시험삼아 써봐야 한다고 칭찬했다.

207년, 다시 순욱의 식읍을 1천 호 늘려 이전과 합쳐 2천 호가 되게 하였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조조가 올린 표에서 말했다.
그의 뛰어난 모략과 남다른 공로는 신으로서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상과 녹봉을 받은 것은 순욱의 빼어난 공로를 생각하면 너무도 미약하오니 거듭 그의 공을 가늠하시어 적절하게 식읍을 하사하시기 바랍니다.
순욱이 다시 정중하게 사양하자 조조는 그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책모에 대한 보답은 두 번 표를 올리는 것으로도 모자란다. 두 번 다 다시 사양을 한다면 이는 겸양도 너무 지나친 일이다.
조조는 다시 표를 올려 순욱을 삼공(三公)으로 삼으려 했지만 순욱은 순유를 보내 한사코 사양했다. 몇 차례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자 조조는 더 이상 표를 올리지 않았다.

2.1.11. 조조 휘하

순씨가전에 따르면 진군 공융이 여남과 영천의 인물에 대해 토론을 할 때 진군은 이렇게 말했다.
순문약(순욱), 공달(순유), 휴약(순연), 우약( 순심), 중예( 순열)는 당대에 상대를 할 사람이 없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당시는 정벌을 통해 창업을 하느라고 여러 가지 제도를 다시 수립해야 했다. 순욱은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한 적이 있다.
마땅히 유학에 통달한 인재를 천하에서 널리 모집하고, 그들로 하여금 육경을 연구하고 강론하게 하며, 전기를 간행하고 고금의 학문을 보존하되, 번잡한 것을 없애어 참다운 성인의 학문을 하나로 정립해야 하며, 아울러 예학을 일으켜 점차 교화를 두텁게 하는 일이 왕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순욱이 조조와 함께 정치의 도에 대해 토론한 것이 이와 같았으며, 조조도 항상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병원전 주석 병원별전에 따르면 병원이 조조를 만나고 난 후에 돌아갈 때 군중의 사대부들 가운데 병원을 따라나서는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조조가 그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자, 마침 순욱이 조조의 곁에 앉아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병원에게 물어보아야만 알 것입니다.
조조가 말했다.
저 사람은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사대부의 마음까지 기울게 하는가?
순욱이 말했다.
저 사람은 당대의 이인이자 사대부들의 자존심입니다. 공께서는 예를 다하여 대접해야 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정말 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다.
이후로 조조는 병원을 더욱 정중하게 대했다.

화타전에 따르면 화타는 허현의 감옥으로 넘겨졌으며, 심문을 받고 죄를 시인했다. 순욱이 조조에게 간청하여 말했다.
화타의 의술은 확실히 매우 정통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는 바이니 그를 당연히 용서해야 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천하에는 이런 쥐새끼 같은 자가 없어야만 하오.
그리고 화타를 가혹하게 고문했다.

2.1.12. 형주 정벌

조조가 장차 유표를 토벌하려고 순욱에게 어디로 출정해야 하는지 계책을 물으니 순욱이 말했다.
지금 중원은 이제 평정되었으니 남쪽에서는 곤란함을 알 것입니다. 완성과 엽 사이로 나와 샛길로 가벼이 진군한다면, 불의의 곳에서 엄습하게 될 것입니다.[17]
조조가 마침내 출정했는데, 유표가 병들어 죽었다. 조조가 순욱의 계책처럼 완성과 섭현 사이를 곧장 내달려 가자, 유표의 아들 유종은 형주를 들어 항복했다.

괴월전에 따르면 조조가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형주를 얻은 것은 기쁘지 않으나, 괴이도(괴월)을 얻은 것은 기쁘오
라 하였다고 한다.

2.1.13. 조조 휘하

전주전에 따르면 법을 집행하는 곳의 관리는 전주를 탄핵하여, 그는 본성이 교활하고 도를 어기며 작은 절개를 내세우고 있으니, 응당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형벌로 처벌해야 된다고 했다. 조조는 이 건의를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끌었다.

전주전에 따르면 상서령 순욱과 사예교위 종요 또한 전주 본인의 뜻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주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순욱은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도는 혹은 세상으로 진출하고 혹은 머물러 쉬는 데 있으나, 그것을 적당한 때에 맞출 뿐입니다. 그러므로 필부는 뜻을 고집스럽게 지키기만 하고, 성인은 각자의 할 일을 이루고자 노력합니다.

어림에 따르면 순욱은 나중에 형주자사가 되었으나, 공숭은 집안이 가난하여 신야리의 머슴과 함께 하인이 되었다. 순욱이 어느 날 출타했다가 공숭을 만나 마차에서 내려 손을 붙잡고 말했다.
옛날엔 자네와 함께 부채를 흔들며 함께 태학에서 유학했는데, 지금 자네는 하인이 되었으니 나 역시 애통하네!
순욱이 공숭을 대속해 주라고 명했으나, 공숭은 머슴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곧은 절조가 이와 같았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순욱은 덕행을 두루 갖추었으며, 정도가 아니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외의 영걸과 준재들이 모두 자신의 군주의 조상으로 여겼다. 사마의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책에서 전하는 오랜 일들을 나는 목전에서 나의 눈과 귀로 보고 들었다. 백수십 년 동안 순령군(순욱)에 미치는 남보다 뛰어난 재주는 없었다.[18]

순욱별전에 따르면 종요는 안자(顔子)가 없는 상황에서 구덕(九德)을 갖추고 있으면서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었지만, 순욱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종요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순욱의 우아하고 중후함을 안자와 비유하면서 자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는데, 무슨 근거로 그러한 말을 하십니까?
종요는 이렇게 말했다.
조조는 총명하기가 짝이 없을 정도이지만, 큰 일이 있을 때에는 항상 순군(순욱)에게 먼저 자문을 구합니다. 우리들은 명을 받아 행동을 하지만, 순욱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하더라도 주군의 뜻과 그리 멀지 않습니다.

세설신어보에 따르면 유계화가 일찍이 말했다.
순영군(순욱)이 남의 집에 가면 그가 앉았던 곳에서 늘 사흘 동안 향기가 난다.
[19]

마초의 거병에 대해서도 진언을 했던 기록이 있다. 

마등이 조조에게 귀순한 뒤 몇 년이 지나 건안 16년(211년) 3월, 조조 휘하에서 손꼽히는 부관들인 종요 하후연이 하동을 거쳐 장로를 토벌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마초를 비롯한 관중의 제장들은 이것이 한중 정벌을 핑계 삼아 관서를 압박하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 의심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비단 관서 현지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조조의 속관으로 있던 고유(高柔)가 다음과 같은 진언을 올리기도 했다.
 
대군이 서쪽으로 출병하면 한수와 마초는 자신들을 칠 것이라고 의심하여 반드시 서로를 부추기며 군사를 움직일 것입니다. 마땅히 먼저 삼보三輔(=관중)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평안케 해야 합니다. 삼보가 평정되면 한중은 격문 한 장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능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20]
 
그러나 어째서인지 조조는 고유의 말을 무시했다.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 사례교위 종요는 3천 병을 청해 관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겉으로는 장로를 친다고 칭했으나 내심 실제로는 그를 위협하여 인질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위기 역시 고유와 같은 의견을 냈다.
서방의 제장들은 모두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천하에 웅거할 뜻이 없으니 실로 눈 앞의 안락을 구할 뿐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이들을 후하게 대우해 작호를 더해주어 그 뜻을 이루게 해 준다면 중대한 사고가 없는 한 변고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당 그 후에 도모해야 합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관중으로 들어가 장로를 토벌한다면 장로는 깊은 산에 있어 도로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저들이 필시 의심을 품을 것입니다. 한번 놀라서 동요하게 되면 땅이 험하고 무리들이 강성하니 그 위태로움은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순욱이 위기의 의견을 조조에게 보고했다. 조조는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종요가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관장해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종요의 의견에 따랐다.[21]

그렇게 211년 종요가 부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자 마초가 무리를 통솔하게 된 후 마침내 한수와 굳게 맹세하여 서로 응하고 한수, 후선, 정은, 양추, 이감, 성의, 마완, 장횡, 양흥 등 10명의 제장들이 일제히 거병하여 도합 10부로 함께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각 부곡에서 징집된 병사가 1만 명씩은 되어 연합군의 규모는 총 10만 명을 헤아리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22] 종요와 하후연이 서쪽으로 기어이 출진하고 나자 그들은 더 이상 군사적 위협을 참지 않겠다는 듯 군사를 연합해 조조가 당황하게 만들 대군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은 위수(渭水) 북단을 단숨에 가로질러 관중 지역 최고의 요새인 장안성을 그대로 통과, 그 동쪽에 있는 동관(潼關)을 점거하고 조조군과 대치했다. 이들은 하수, 동수 일대를 점거하고 진영을 벌여 세웠다. 사서에서는 군벌들의 총 병력이 10만이라고 적고 있으며 액면 그대로 믿지 않더라도 6~7만 이상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3]

2.1.14. 죽음

헌제춘추에 따르면 복완이 처의 동생인 번진에게 편지를 보여주자 번진은 그 사실을 조조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조조는 몰래 대비를 했다. 순욱은 그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서 스스로 내막을 밝히려고 사람을 업으로 파견하여 조조의 딸을 황제의 배필로 삼으라고 권고했다.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조정에는 복황후가 있는데, 내 딸을 어떻게 주상의 배필로 삼겠는가? 나는 미미한 공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지만, 어찌 또 딸의 힘을 빌려서 권세를 누리겠는가?
순욱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복황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성정이 흉악하여 항상 그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흉악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황후를 폐해야 합니다.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경은 전에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순욱이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에 이미 공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조조는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지만 내가 잊을 리가 있겠는가?
순욱은 다시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공에게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전에 공께서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하고 있을 때 집안 일로 격정을 많이 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조가 다시 꾸짖듯이 말했다.
관도에서 일이 끝난 후에는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순욱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사죄를 할 뿐이었다. 조조는 이 일로 순욱에게 한을 품게 되었지만 겉으로 용서하는 척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배송지는 순욱처럼 현명한 사람이 멍청하게 나오고 순서가 맞지 않는다며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진위가 의심받기는 하지만 이 헌제춘추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조조와 순욱 사이의 빈틈은 이때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212년, 동소는 조조의 작위를 국공(國公)으로 올리고 구석을 갖추어 남다른 공훈을 표창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은밀히 순욱에게 자문하였다. 순욱은 조조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조정을 바로잡고 나라를 편안히 하기 위함이어서, 충정의 진심을 잡아 물러나 겸양하는 내실을 지켜야 하므로, 군자는 덕으로 남을 사랑해야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24] 조조가 이로 인해서 마음 속으로 평안할 수 없었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동소가 귀공을 세우자고 건의를 했을 때 순욱은 동의를 하지 않고 조조를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고 했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보내 위로를 하도록 하라는 조칙이 내려지자 잔치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순욱은 뒤에 남아서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조조는 순욱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관한 일을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읍을 하고 물러나도록 했다. 순욱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권을 정벌할 때, 표를 올려 순욱이 초에서 군사를 위로하길 청하여, 이로 인해 순욱을 남겨두고 시중 광록대부 지절로서 승상의 군사에 참여케 했다. 여기서 자기 부하인 순욱을 사용하는데 왜 요청이 필요했는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아래 서술하듯 중국 황실 관직은 외조와 내조로 나뉘었는데 외조의 수장은 승상을 비롯한 삼공이었고 조조 집권 당시 승상부가 최고 권력기관에 오르므로 조조 본인이었다. 그리고 순욱은 내조의 최고 권력자인 상서령이었다. 물론 순욱은 조조의 부하였지만 일단 관직상 승상 권력의 밖이자 황제의 직속기관인 내조의 우두머리였으므로 황제에게 표를 올려 허가를 받을 필요는 있었다. 조조가 권력을 다 쥐고 헌제는 꼭두각시였으므로 단지 형식상의 문제였기는 하지만...

이 부분 또한 토사구팽의 개념으로 읽히고는 하는데, 순욱에게 군사적 능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조조를 대신하여 본진을 관리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그가 군사활동에 나선 건 오로지 조조의 세력이 미미하였을 때나, 조조가 없는 동안 조조 세력에게 위기가 닥쳐왔을 때뿐으로, 조조에게 입신한 초창기 혹은 조조가 정벌에 나선 동안 본진에서 군대를 일으켜야 할 때뿐이었다. 여포, 진궁, 장막의 배반에서 연주를 지켰을 때나, 고간의 반란으로 허창에서 군대를 일으켜 사예주를 공격하였을 때가 예시. 그런 그를 조조가 자신의 정벌에 이끌고 간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였고, 직전에 순욱과의 사이가 벌어지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변화는 부정적인 것으로 읽히고는 한다.

문제기 주석 전론제자서에 따르면 후에 군이 남정하며 곡려에서 머무르는데, 상서령 순욱이 사신으로 군을 위로하다, 조비의 담론이 끝나감을 보더니 말했다.
듣기론 군께서 좌우로 활을 쏘는 것이 훌륭하시다던데, 이는 실로 능히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조비가 말했다.
집사께선 아직 제가 목덜미에서 쏘거나 입에서 쏘면, 말굽이 구부러지고 월지(月支)가 젖혀짐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순욱이 즐거워 웃으며 뜻밖이라고 말했다.

진수의 삼국지 정사에 따르면 조조의 군대가 유수에 이르렀을 때 순욱은 병이 걸려 수춘에 남았는데, 걱정하다 죽으니 이때 나이가 49세였다. 다음 해 조조는 마침내 위공이 되었다.

반면 위씨춘추에 따르면 조조가 순욱에게 음식을 내렸는데, 열어 보니 빈 공기여서[25] 이에 독약을 먹고 죽었다. 자치통감도 순욱이 병을 이유로 수춘에 머물다가 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적고 있다. 265년, 순욱에게 태위를 추증했다. 시호를 경후(敬侯)라 했다.[26]

순욱별전에 따르면 순욱은 상서령이 된 이후에 자신이 한 일을 항상 글로 써서 남겨두었다가 죽을 때가 되자 모두 불로 태워 없앴다. 그러므로 그의 기책과 밀모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순욱이 수춘에서 죽자 수춘을 도망친 어떤 사람이 손권을 찾아가 조조가 순욱에게 복황후를 죽이라고 했지만 순욱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자살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손권은 그 사실을 촉에 알렸다. 유비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늙은 도적이 죽지 않았으니 환란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2.2. 삼국지연의

조조가 연주의 황건적 잔당을 평정하고 인재를 모집하자 조조의 부하가 되었다. 조조는 순욱을 장량과 같은 인물로 평가했다. 조조군 최고의 군사로 나오는 것은 정사와 비슷하다. 다만 주요 등장이 하북 정벌정도까지고 이후로는 그다지 등장이 없다가 말년에 조조와의 대립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이는 삼국지 연의 초반부에는 사실상 조조가 주인공이나 다름이 없으며 하북 정벌 이후로는 악역으로써의 비중이 더욱 커진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유비가 삼국지 연의 처음부터 주인공이고, 초선의 삼각관계 일화, 손견일가의 일화 등 기타 등등의 일화가 많지만, 조조는 초반부에 유비 못지 않은 포커스를 받으며 동시에 유비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으며 성장해나간다. 유비가 주인공이더라도 초반부에는 크게 활약이 없는 특성상 영웅담을 대신해줄 대상이 필요하고 그게 조조인 것. 원소세력 타파를 통해 조조 영웅담의 정점을 찍고, 그 이후 중반부-후반부의 또 다른 주인공인 제갈량이 등장하며 조조의 악역 비중이 더욱 커지게 된다. 물론 본인이 불태워 순욱 관련 사료 자체가 적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군략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후반부에 대해서도 연의에서는 언급이 없으며, 순욱이 등장하는 시기는 말년에 조조와의 대립을 제외하면 조조 영웅담의 절정기인 원소와의 대치까지다.

순욱이 이호경식지계를 쓰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조조는 서주를 다스리고 있던 유비가 여포와 함께 힘을 합치는 것을 불안해하고 있었다. 조조가 유비를 직접 공격하는 것을 반대하던 순욱이 이호경식지계를 조조에게 권했다. 이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다른 한 마리를 잡아먹게 한다는 의미로서 적의 동맹을 깨기 위한 계략이다. 조조가 동의하여 황제의 이름으로 유비를 서주목으로 임명하고 여포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유비가 여포를 죽이면 성공하는 것이지만 만약 실패하면 여포는 유비의 배신에 분노하여 유비를 공격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의 계략을 간파하여 시간을 두고 생각하겠다는 정도의 대답을 조조에게 보냈다.

이어서 구호탄랑지계를 쓰는 장면이 추가된다. 계략대로 유비와 여포가 싸우지 않자 순욱은 다른 계략을 제시한다. 원술을 개입시켜 유비를 끌어내고 이 싸움에서 유비가 타격을 받을 때 여포로 하여금 서주를 차지하도록 한다. 둘이 서로 미워하여 싸움이 일어날 환경을 만든 후 싸움을 벌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범을 몰아 이리를 삼키게 한다는 구호탄랑지계다. 이호경식지계를 사용했다 실패했지만 구호탄랑지계는 성공했다.

순욱 같은 큰 인물이 병사하면 당연히 재미가 없다보니 연의에서는 조조의 심기를 거스르다 자살을 명령받아 생을 마감한 것으로 묘사된다. 조조가 구석을 받는 것을 반대한 순욱은 조조로부터 손권과의 전쟁에 나서라는 명령을 받지만 순욱은 조조가 어떻게든 자신을 죽일 것[27]임을 눈치채고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눕는다. 이에 조조는 핑계가 치졸하다며 빈 찬합(餐盒, 밥그릇)을 보내는데, 순욱은 여기에 "이제 내가 그대(순욱)에게 담아 보낼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대 손으로 해결하라." 라는 의미가 들어 있음을 알아채고 "당신(조조) 또한 권력의 마수에 사로잡혔나 보오." 라고 씁쓸해하면서 독을 마시고 자결한다. 순욱이 자결하도록 한 것은 조조 본인이지만, 오랜 시간 자신을 위하여 많은 공을 세웠던 순욱이기에 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주었다고 한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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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의 순욱 동상
순욱(筍彧): 패도 위에서 태평성대를 염원한 대정치가

3.1. 역사가들의 평가

중국 역사가들은 조조군 최고 모사는 순욱이라 평가한다. 조조군 내에서 순욱이 가졌던 위상과 중요성은 부동의 1위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으며 곽가나 사마의는 실리만 채웠을 뿐 명분을 살리지 못한 비판이 있지만[28] 오히려 순욱은 명분, 실리 둘 다 취하였기 때문이다.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었다면 조조에게는 순욱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29]

조조의 최고 공신이자 심복이었지만 동시에 한나라의 충신으로도 평가받는 아이러니한 캐릭터이다. 이는 이런저런 일이 있었기는 했지만 말년에 조조와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한나라라고 하는 가치에 대한 수호 의지'는 객관적으로 인정받기 때문.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그와 연장자인 조카 순유, 그리고 모사 가후, 이 세 사람을 조조의 모사 중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 같은 권에 넣었고, 그중에서 순욱을 제일 앞에 넣었다. 순욱에 대해 청아한 풍모와 왕좌의 품격, 선견지명을 갖추었지만 뜻을 달성하는 것에는 뛰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결국에는 위나라 세력에 의해 숙청당한 것에 대한 평가로 보여진다.

배송지는 조씨가 한나라를 무너뜨린 게 순욱의 책임이라는 세상의 비난을 변호하려고 했다. 배송지는 당시와 같은 난세를 평화로 이끌기 위해, 순욱은 조조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었고 이 일로 인해 한은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백성들은 구해졌다고 평가했다. 또한 배송지는 가후가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데 진수가 순욱, 순유랑 동렬로 평가했던 것이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범엽은 순욱을 한실의 충신으로 평하여 후한서에 순욱의 열전을 따로 실었다. 범엽은 순욱이 난세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위해 힘썼지만 조조와 양립할 수 없어서 자신을 희생했다고 극찬한다. 청나라 시대의 조익도 저서 이십이사차기에서 범엽이 순욱을 한나라의 신하로 열전을 실은 것을 공감했다.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목은 저서 한기에서 순욱이 조조를 전한의 건국자 한고조, 후한의 건국자 광무제에 비유하며 조조를 응원한 기록이 있으면서 조씨를 도와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비판했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두목의 비판에 대해 순욱이 조조를 광무제, 한고조에 비유한 것은 단지 사가의 창작이라고 두목의 의견에 반박했다. 또한 순욱이 조조를 황제에 올려 부와 영예를 쫓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죽은 충신이라고 찬양했다.

고려,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그다지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제현은 업성(鄴城)이라는 시에서 "알겠네 이 업성 밑에 있던 순문약은 요동의 관유안( 관녕)에게 부끄러울 거야"(須知鄴下荀文若/永愧遼東管幼安)라고 읊었고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사마광을 까면서 "사마온공은 경에서는 맹자를 의심하고, 사서에서는 위나라를 황제로 칭했으며, 양웅을 성인으로 과장하고, 순욱을 왕좌지재라고 했으니, 비판할 점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흠잡지 못하는 것은 그의 행실이 상도에 맞아 비난할 만한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司馬溫公以經則疑孟, 以史則帝魏, 詡揚雄以聖人, 目荀彧以王佐, 可議者多, 然人不得以疵之者, 以庸行之無可議也)라고 하기까지 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무통론을 주장했고 단지 위나라의 연호만 빌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하기까지 한 혹평이지만 어쨌든 이 시대의 기록을 보면 대체로 절의를 잃은 선비의 예를 들 때 쓰인다. 한나라에 충성을 바쳤든 말든, 조조 밑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 보기 영 좋지 않았던 듯하다. 조조가 황실에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철저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정이었던 고려와 조선에게 있어 조조는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30]

3.2. 왕좌지재

그는 조조의 장량이자 소하였다. 조조는 처음에 순욱을 일컫어 자신의 장자방(장량)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장량이 한고제 유방의 패업에 끼친 영향과 그의 역할을 조조의 세력에 비유하면 이러한 조조의 칭찬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조조의 세력 안에서 그가 위치했던 자리와 그가 조조를 도와 이루었던 업적을 평가하면 그는 장량과 비교될 만하고, 그가 본진을 관리하며 뒤를 봐주는 역할을 맡은 점을 생각하면 그는 소하의 역할도 겸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토사구팽을 생각하면 최후는 한신과 비슷하다. 행정가 이미지만 강하지만 군략 쪽으로도 유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과 비교된다는 평가는 사리에 들어맞는다. 조조 세력에 임군한 초창기에도 종군하였으며 196년 즈음에도 종군하였다고 하는데, 위에서 언급하였듯 앞뒤를 맞추어 보면 '조조 세력 초창기 전쟁터에 종군 -> 세력 성장 후 본진 관리 역할 -> 여포의 배반으로 조조 세력이 멸망 직전 수준까지 몰림에 따라 다시 종군 -> 세력이 다시 성장 한 후 다시 본진 관리 역할'의 흐름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조조 세력 본진을 맡는 2인자지만 세력이 크지 않을 때는 항상 종군을 했다는 점에서 군략 쪽에서도 믿음직한 인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사 쪽으로 순욱의 입지는 아주 확고했는데, 조조의 참모진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조의 핵심 참모인 순유, 가후, 곽가, 정욱, 진군 등등 각 분야에서 출중한 대표적인 인재들 무리에서 순욱은 이들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니, 그가 인재를 대하는 수완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반증한다.

사실 오히려 군략 쪽이 메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정가로 보기에는 치적 부분에서 크게 눈에 띄는 이야기는 없는 편. 소하는 관중에 기근이 들었을 때에도 군량과 병력을 유방에게 꾸준히 조달했던 반면, 순욱이 후방을 책임졌던 조조군은 군량 부분은 곤란한 일이 꽤 있었다. 보급에 있어서 레전설인 소하를 제치고 당대에서 비교해도 조조군은 인육까지 섭취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보급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물론 이건 정욱에 대한 정치적 모함에 가까운 일화로 보이나, 어쨌든 저런 소리가 어느 정도 돌 수 있을 정도로 보급에 곤란이 있었다는 증거라 볼 수는 있다. 이건 흔히 쩌리 취급을 받는 한복이나 도겸은 보급에 있어서 오히려 꽤나 여유로웠던 편. 원소 쪽도 상당히 쪼들렸던 것으로 보이나, 관도대전을 보면 오소 전투 이전까지는 조조 쪽이 더 쪼들린 것으로 보아 조조보다는 확실히 나았던 듯.

다만 이건 연주 지방에서 무지막지한 재앙 수준의 흉년[31] + 이후로는 서주 대학살로 서주 지역의 기반 초토화를 감안할 필요는 있다. 물자를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최고 세력인 원소와의 대결을 이겨낼 때까지 다른 세력들의 견제를 생각하면서도 버텼으니 굳이 폄하할 정도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뭐 어쨌든 최후에 순욱이 자신에 대한 모든 기록을 불태웠다고는 하지만, 외부 기록들을 보더라도 내정적 업적을 보면 내부 관리, 인재 관리에서 업적이 두드러지는 편이기는 하다.

때문에 조조 세력에서 문관직 중 조조 다음으로 가장 높은 벼슬을 받은 사람이 순욱이었다. 순욱하면 쉽게 떠올리는 상서령이라는 관직은 단순 직위 자체의 경우 (어디까지나 다른 최고위 직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지 않으나, 실권에 있어서는 행정관리를 총괄하는 수준으로 사실상 문관 최고봉 중 하나인 셈이었다. 문관의 대장군 포지션. 지금으로 따지자면 부총리 정도의 느낌. 덤으로 황제의 최측근 직위인 시중의 벼슬도 겸임하였다. 당시 중국 관직제도를 크게 외조와 내조로 나누는데 외조는 실질적인 행정실무를 포함한 행정기관이었고 내조는 황제 직속 행정기구였다. 삼국 시대 당시 내조는 상서령이 최고 권력자였고, 외조는 승상을 포함한 삼공이 최고 권력자였다. 조조의 체계 아래 승상부가 최고권력 기관이 되어 외조를 장악하고, 그와 별개로 결국 순욱은 조조의 최측근이었으므로 사실상 조조는 내조와 외조의 모든 권력기관을 장악한 셈이었다. 순욱은 승상인 조조 본인의 직계에 속하지 않는 집단인 내조의 우두머리를 맡긴 최측근 핵심이었던 것이다.

3.2.1. 소하로서의 역할

유방이 군사를 이끄는 동안 소하가 본거지를 담당하였듯, 조조가 군사를 이끄는 동안 본거지의 관리는 순욱의 역할이었다.

연주의 위기 상황에서 조조의 근거지를 간신히 살려내어 그것을 기반으로 천하를 평정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닫게 한 것으로 보아, 순욱이 아니었다면 조조는 원술처럼 잠시 반짝하고 끝난 군웅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더욱이 당시의 조조의 세력은 원소의 영향력이 강하였기에 근거지가 없었다면 원소 아래의 객장으로 흡수되었을 테지만,이 경우 원소가 잠재적 위협인 조조를 그냥 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원소가 스스로 조조를 내보내지 않는 한 조조의 독립은 힘들었을 것이며 형주를 얻기 전의 유비와 비슷한 신세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 직후 조조 세력은 원소의 도움으로 연명하기도 했고, 원소는 흔들렸던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던지 조조의 처자식을 자신에게 보내는 인질로 요구하는 등 조조는 한동안 온갖 수난을 겪었다.

또 관도대전의 승리 이후 조조군이 막 업성을 접수했을 즈음, 원담이 항복하고 원상이 조조에게 패퇴하자 고간 또한 조조에게 항복해왔는데, 아직 하북의 입지가 안정적이지 않은 조조는 고간의 지위를 인정해 주었다. 이후 조조가 오환으로 달아난 원상을 처리하기 위해 북방 원정을 계획하자 고간은 조조의 부재를 틈타 업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순연의 활약으로 계획이 발각되어 내응자들이 처형당했다. 이에 고간은 상당태수를 인질로 잡고 호관을 봉쇄해 기주 방면에서의 군세를 차단한 뒤 사예주를 공격하여 조조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업성 장악은 실패하였으나 사예주에서 홍농, 하동, 하내의 3군이 호응해 조조에게 매우 큰 위기로 다가왔다.

당시 고간은 원소군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후계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만일 3군을 거점으로 싸움을 장기화해 밖으로는 유표의 협공을 약속받고 조조에게 넘어간 하북의 세력을 조금씩 흔든다면 조조의 하북 평정이 말짱 도루묵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조조는 이전과 악진으로 하여금 호관을 공격하게 하고 사예주에서는 종요가 고간을 공격하였으나, 이전과 악진은 호관 공략에 실패하고 사예주 3군은 고간 세력이 결국 군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조조 본인이 직접 나서 호관을 공략했고, 허도에서는 순욱이 하후돈과 중앙군을 이끌고 종요와 합류하였다. 사예주 3군의 반란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한 순욱은 두기를 하동으로 파견했는데, 순욱의 예상대로 두기는 하동군 내부에서 반(反) 고간 세력을 규합해 고간 진영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에 고간이 직접 이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으나 관서군벌 마등의 변심으로 인한 협력과 그의 아들 마초가 뛰어난 군략으로 가세해 명장 곽원을 잃어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상황이 역전되었다. 마초 때문에 사예주의 군세가 약화되었고 서쪽에서는 마등, 동쪽에서는 조조, 남쪽에서는 순욱의 협공을 받는 상황이 되자 결국 고간은 유표 세력에 망명한다.

3.2.2. 장량으로서의 역할

유방의 거시적 방향성을 비롯한 세력의 대소사에 장량이 큰 영향을 끼쳤듯이, 조조는 순욱과 크고 작은 많은 일을 의논하였다. 아래에 서술하듯 결국 순욱 본인이 전부 불태워버렸지만, 조조가 전장에 나와 있는 동안에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상담을 하였다 하니 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순욱의 조언으로 헌제를 맞이한 것으로 조조는 도의적으로 크나큰 방패를 얻어, 이후 정치와 전략 양쪽에서 유리한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천자 옹립은 위나라를 세워낸 조조의 패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도 그럴 것이 헌제를 끼고 있으면 자신의 행동이 모두 조정의 행동이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힘이 없는 헌제의 생각이 어땠다 한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왔다고 외치면 장땡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들이 쳐들어올 경우 너 역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었다. 다른 군주들에게도 그렇겠지만, 특히 서주 대학살로 악명을 얻은 조조에게 있어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자체로는 허울 없는 것이더라도 벼슬 자리를 쥐고 있는 셈이기도 했다. 원소 역시 주위의 책사들로부터 헌제를 받아들일 것을 권유받았으나 본인이 헌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어 이를 실천하지 않았다.

헌제를 옹립한 조조는 당시 자신의 우군격인 원소에게 태위를 제수했지만, 원소는 이 자리를 반기지 않았다. 이 시기의 태위는 실권이 없던 명예직으로, 은퇴를 앞둔 명망 있는 노신들이 받던 자리였다. 결국 조조는 원소를 높이는 척 했지만, 실권이 있는 대장군 자리는 자신이 갖고 원소는 뒷방 늙은이처럼 취급한 것이다.[32] 이러한 조조의 생각을 모를 리 없던 원소는 장문의 장계를 조정에 올려 태위 자리를 거부했고, 조조는 결국 원소에게 대장군 자리를 양보했다. 대신, 자신은 사공 행 거기장군이 되었다.[33] 이후로도 조조는 끝까지 실리를 챙기고 실직을 차지함으로써 원소를 견제했다.

헌제의 옹립은 명사들의 지지를 회복하는 '비장의 카드'였다. 다만 이 비장의 카드는 양면성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헌제의 명의로 다른 군웅들에게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한나라의 부흥의 대의로 여기는 명사들'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조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다. 순욱은 이점을 들어 헌제를 옹립하라고 권해 그가 패자가 되게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협천자는 조조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조는 이후 한나라를 등에 업고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계속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한나라를 멸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조조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를 순욱의 도움으로 과감하게 손에 넣었다. 서주에서의 횡포로 인한 명사들의 반발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또 영천군 허현을 근거로 삼은 이상, 영천군의 명사 순욱의 건계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순욱이라는 존재감의 무게가 서주 대학살 이후 조조의 방향성을 결정지었던 것이다.

조조군 세력이 약한 초기에는 항상 조조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여 전략 전술을 내주었지만 나중에 조조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2인자로서 본진을 맡게 되었다. 조조가 전장에서 싸우는 동안 내정을 완벽하게 해내며, 조조가 중원을 통일하는 데 있어 실질적으로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의 전술을 멀리 떨어진 이에게 상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본진을 관리하느라 전장에 나설 수 없는 순욱을 대신하여 조조는 순욱이 추천한 다른 인재들과 상담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 전체를 통괄하는 방침은 언제나 순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언을 구했다.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틀은 순욱이 이끌었다는 것.

이와 같이 순욱은 조조에게 수많은 답장으로 국가를 다스리고 전쟁을 도모하는 법에 대한 헌책을 하였으나, 이 헌책을 담은 편지들은 아쉽게도 순욱이 죽기 전 모두 불태워, 관도대전 때 후퇴를 고민하는 조조에게 조언한 내용과 같이 같이 다른 기록물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모두 알 수 없게 되었다.[34]

3.3. 토사구팽

그의 최후는 위씨춘추와 배송지 및 후한서에서의 기록과 진수의 삼국지 정사의 기록이 충돌한다. 위씨춘추의 기록에 따르면 명백한 토사구팽이고, 진수의 삼국지 정사 역시 읽기에 따라서 좌천( 토사구팽)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남아 있다. 여담으로 순욱을 높게 평가한 사마광 자치통감에서 역시 자살로 적고 있으나 빈 그릇 이야기는 없고, 그냥 약을 먹고 죽었다고 적었다. 평생 본거지를 지키던 순욱이 조조와 사이가 틀어진 직후에 전장으로 발령받은 후, 출정 시기에 맞춰서 사망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공교롭다. 뜻이 달라 지방으로 발령냈으면 그게 전형적인 좌천 패턴 아닌가?

아무튼 순욱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 조조와 순욱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며, 조조 세력이 안정적이던 와중 순욱이 전장으로 발령난 것은 그의 생애를 통틀어 이때가 거의 유일하다. 간단하게 말해 적벽대전이나 관도대전에서조차 순욱은 본거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오로지 조조 세력에 제대로 된 밑천이 존재하지 않을 때나(완전 초창기), 여포-장막-진궁 측의 배반에 의해 본거지가 거의 다 홀라당 날아갔을 때만이 순욱의 종군 시기다. 사실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투에 단 한 번 종군 처분을 받은 것이다. 어거지로 해석한다면야 좌천이 아니라 할 수 있겠으나 이것을 좌천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롭다. 애초에 병사하였다고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 뿐더러, 순욱은 병으로 수춘에 머물렀다가 근심 속에 죽었다.고 되어있는 걸 병사하였다고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기도 하다.

위씨춘추에서 조조가 순욱에게 빈 그릇을 보낸 것은 ' 이제 네 먹을 것은 챙겨주지 않겠다. 네 놈을 살려두긴 쌀이 아까워!', 정도로 해석된다.[35][36] 순욱의 죽음도, 순욱 본인이 죽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혹은 버림받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굽힐 수 없음을 자각하여 자결을 택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든 조조군의 핵심 중에서도 최고 핵심인 순욱과 정치적으로 완전히 틀어진 만큼, 그대로 두기에는 조조 입장에서 신경 쓰였을 것임이 분명하다.[37] 어떻게 죽었든지 그의 퇴장은 조조의 이런 움직임과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위씨춘추, 배송지, 후한서, 자치통감의 자살과 진수의 삼국지 정사에 분사로 되어있는 등 사서들의 내용이 충돌하고, 어느 쪽의 기록이 맞는지는 입증할 근거가 없기에 순욱의 죽음에 조조가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은 사실상 오리무중이다. 단 중국 사서에는 조조가 순욱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것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는 편이며, 일단 진수의 삼국지 정사가 진나라 때 쓰여져 조조와 사마의 일족의 치부는 왜곡 혹은 누락하는 모습을 몇번도 아니고 자주 보여 주었기에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편이다. 사실 어느 쪽을 믿든 토사구팽 자체는 거의 확실하기도 하다.

그리고 순욱이 죽은 다음 해, 조조는 끝내 구석을 받고 위공이 되었으며 후일 위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불과 8년 후, 한나라는 망하고 조위가 건국되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순욱의 정치 기반이었던 영천 호족은 조씨를 버리고 사마씨를 지지하여 위나라는 망하고 서진이 건국된다.

3.3.1. 왕을 거부한 왕좌지재의 비극

그는 조조의 세력 강화에 있어 누구도 비할 수 없는 독보적인 공을 세운 전략가이자 정치가였지만, 조조가 위공의 작위를 받는 것에 반대함으로써 실권하고 자살했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순욱은 조조를 섬기었지만 근본적으로 한나라의 충신이었다는 것이고, 주인의 힘이 한나라의 복권에 쓰이기를 바랐던 것이지 그것이 찬탈로 이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

국가의 재건을 위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신을 보좌하는, 어찌보면 역적 그 자체의 행동을 고수한 순욱을 후대로부터 현대의 역사가들에 이르기까지 하여금 충신으로 인정하고 변호하게끔 만든 이례적인 현상의 원천은 유교적 신념의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천자마저 자기 주인의 꼭두각시로 만들고, 그 자기 주인의 뜻에도 반대해가며 지키고자 한 것은 "망해가던 한(漢)나라"라고 하는 수백 년 된 하나의 거대한 이념이었던 것이고, 그것이 순욱 본인의 최종적이고 본질적인 충성의 대상이었던 것.

아무튼 일단 순욱의 업적과 조조 세력 내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에 대해 살펴보면, 순욱의 가장 유명한 업적인 인재 선발의 경우 조조 세력의 정치적 역량과 사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공적 중 하나였다. 그가 수많은 인재를 천거한 것을 농담삼아 일명 '순욱 피라미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 인재 선발의 기초적인 배경은 그가 속한 집단인 영천 호족 인재풀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순욱은 이렇게 명사의 조조 세력 참여를 주도함으로써 일종의 그룹을 형성하고 영천 호족들의 영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순욱은 '영천 청류파 세력'들을 '탁류파인 조조 가문'과 결합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그리고 후한이 무너지기 시작한 군웅할거 시기엔 호족들은 훗날 권력의 중추에 오르게 되는 사마씨든, 순씨든, 진군 일가든 작은 소요에도 고향을 버리고 피난가는 힘없는 사인층에 더 가까웠다. 순욱의 집안 자체도 조부 순숙 때부터 유명해진 집안이고, 어쨌거나 이들이 생존하고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결국엔 순욱이 조조와 손을 잡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들이 특별히 독자적인 집단의식을 표출하거나 순욱의 권위를 독보적으로 여기지는 않았음을 생각하면[38] 이를 당(黨)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순욱 본인의 능력과 권력 그리고 명망을 생각하면 하나의 거대한 집단의 중심에 순욱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순욱과 그의 추천을 받은 명사들은 당대의 인텔리들로서 높은 수준의 유교 소양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순욱이 조조가 한나라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언가를 이유로 조씨 일가와 반목한다면 조씨 일가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으로 돌변할 소지가 다분했을 것이다. 실제로 후일 조씨의 위나라가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순욱 본인의 자손을 비롯한 이 영천 호족들의 2세대'가 조씨와 멀어지며 마찬가지로 영천 청류파였던 사마씨를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조의 또 다른 참모 동소가 순욱에게 위공 관련 논의를 꺼냈을 때, 순욱은 충정(忠貞)을 이유로 반대했다. 조조의 권력과 순욱의 이념이 정면으로 맞부딪힌 순간이었다. 순욱의 저항은 조롱과 풍자를 기본 골자로 한 공융과는 형식 면에서 달랐지만 정치적 필요에 의해 변질의 위기에 직면한 유교를 유교로 재반박했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다르지 않다. 이를 통해 조조가 순욱에게 빈 그릇을 보낸 것은 그를 죽이는 대신 단지 실권시키는 선에서 상황을 마무리하겠다는 의도의 표출이었다는 해석은, 꽤 설득력 있는 해석인 듯 싶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순욱이 자살한 것은 조조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저항이자 한편으로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순욱은 한나라를 지키려다 죽었다. 순욱은 그 어떤 문제가 쌓여있는 시대라 해도 모든 정치적, 군사적 행동은 한나라를 위한 의(義)와 충(忠)의 구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의 원천은 유교에서 나왔다. 사상적 깊이와는 별개로 파격적인 언동을 무기 삼았던 공융과는 달리, 순욱은 철저한 정도의 길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세심하게 감쌌고 현실적 상황과 타협하며 본인의 생각대로 국가를 재건할 초석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당대 정치가이자 유학자로서 정점에 다다른 사람조차 마지막에 이르러 자살 외에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인간으로서의 품격 외에도 힘이 부족할 때의 사상이란 얼마나 무력한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출처: 강명의 삼국지 - 국교를 벗어나, 한나라의 바깥에서

순욱 사후에 조조는 실책을 거듭하며 힘을 제대로 못 쓴다. 물론 순욱이 살아있었을 때도 조조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실책을 이겨내어 더 큰 성장을 해낸 반면, 순욱 사후에는 역경을 이겨내더라도 현상유지 정도에 불과하였다. 순욱이 좀 더 오래 살아서 조조 세력의 안정성이 더 확보되었다면 사마의의 제위 찬탈이 힘들어져서 사마씨의 세상이 아닌 조씨의 세상이었을 거라는 평도 존재한다.[39]

또 재밌는 의견으로 만일 조조가 유비처럼 유씨 황족 출신이라면 순욱은 조조가 황제에 자리에 오르는 것에도 본질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순욱의 행보를 보면 '한 황실'에는 집착하면서 한 황실의 인물들, 심지어 황제마저도 냉혹하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 황후를 비롯한 친인척들의 패악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조조의 동귀인 세력 축출, 즉 황제의 외척 축출에 별 다른 반응이 없었고[40] 황제마저도 자신의 주인인 조조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씨의 ' 한나라' 그 자체가 흔들리는 것에는 자신을 걸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하듯 순욱은 한나라라고 하는 그 가치에는 크게 충성하나, 혼란스러운 당시 천하에서 황족, 심지어 황제를 포함한 인물 그 자체에 대해서는 천하의 안정을 위한 하나의 소품에 불과하다는 수준의 냉정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조조가 유씨 황족이었을 경우 찬탈하더라도 유씨의 한나라라고 하는 근본은 흔들리지 않는 셈이기에, 순욱은 조조의 찬탈에 대해 조조 세력에게 미칠 실리적 이익만을 따져 판단할 것이지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하지만 그의 식견을 생각할 때 만약 왕위찬탈을 벌였다 미래에 벌어질 참혹한 대난세를 우려해서 반대했을 수도 있다. 순욱이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수도 없이 읽었을 역사서에서 이미 몇 차례고 증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수 백 년 간 난세가 계속되었고, 진시황 진나라가 무너지고 벌어진 전쟁 유린, 그리고 다행히 유방에 의해 전한이 세워지고 평화가 맞이하지만, 왕망 신나라 찬탈과 광무제 후한이 들어서기까지의 혼란 등 그가 수도 없이 읽고 공부했을 역사의 결과물이 나와 있다.

순욱은 그런 미래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평한 것처럼 결실을 맺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결국 조조 한나라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기나긴 혼란의 시작을 여는 셈이었다.

왕좌지재라는 칭호에 걸맞게 결국 자신이 모시던 군주를 왕의 위치로 올려 놓았으나, 정작 주군 조조와의 이념적 갈등으로 자신의 재능과 이상 간의 딜레마 속에서 씁쓸한 최후를 맞았다.

3.3.2. 순욱의 죽음이 불러온 파장

순욱의 죽음은 단순히 한나라에 충성한 개인의 비극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조를 중심으로 한 집권 세력 내부분열의 본격적인 시발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영향이 어마어마했다. 그 이유는 순욱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지와, 그가 대표하고 있던 정치집단이 후한말 역사에 가장 중요한 세력 중 하나인 호족과 청류파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정사를 읽던, 연의를 읽던 간에 독자들은 후한말~삼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유달리 반란이 잦다는 것과 그 반란이 위/오에서 어마어마한 빈도로 발생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군현제를 통해 지방 호족들에게 느슨하게나마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던 한나라 중앙정부가 실질적으로 붕괴하면서, 각 지방 호족들이 이합집산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 정말로 크다.

특히 후한 말까지만 해도 아직까지 중앙 정부가 강력하게 지방호족들을 장악할 수 있을만큼 영향력이 크기 힘든 시기였다. 애시당초 군현제를 통해 지방관과 지방호족이 서로 티키타카해가면서 적절히 서로 견제와 협력을 주고 받으며, 여차하며 중앙정부의 군사력과 수도권 호족의 힘을 통해서 찍어누르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연결고리가 환관 정치로 인해 완전히 박살나버렸다보니, 지방 호족들이 겉으로는 실권자와 군벌들에게 굽신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차하면 다른 인물을 옹립하면서 그들의 모가지를 수틀리면 잘라버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삼국 정립 직전 중원 최대의 세력을 구가했던 원소가 전풍, 저수 등을 숙청한 것은 원소 특유의 심각한 패권주의적 성향 탓이기도 했지만, 전풍과 저수 등으로 대표되는 지방 호족 + 유학 엘리트가 가진 영향력을 힘으로 찍어누르려 했던 결과라는 해석 또한 가능할 정도니...

특히 오나라의 경우에는 아예 중앙정권의 영향력이 차단된 지역에서 형성된 호족연합정권이며, 손씨 일가는 그들 연합의 정치적 맹주로서의 위상을 가졌을 뿐, 그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광범위한 중원 영토를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출신성분과 지역으로 뒤엉킨 인재풀을 가졌던 조조 휘하의 위나라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조조가 여러 정치세력들을 자기 휘하에 둘 수 있었던 것은 협천자를 통해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정치적 명분, 그리고 수도권을 둘러싼 지방호족 및 청류파의 대표 인사이며 사실상 그들의 가장 큰 소통구 역할을 해준 순욱을 비롯한 영천 순씨 일족과 청류파 문인들을 대거 중앙 정계의 핵심인사를 등용하면서 중임한 것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본인의 탁월한 군사적 역량과 조인과 하후돈을 위시한 탄탄한 조씨 일족 인사들의 활약, 항장 무인들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독점한 조조의 용인술과 본인의 막강한 카리스마를 통해서 휘하의 정치세력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순욱의 역할은 정말로 컸다. 본인의 능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탁류파에 의해 숙청 당한 유학자들이 밀려난 지역호족들을 중심으로 청류파로 부활하는 과정에서 영천 순씨 일가의 영향력이 워낙 막대했던 지라 순욱 본인의 영향력 또한 결코 작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지방호족들이 조조 휘하로 투신했고, 이들의 결속은 조위가 삼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막대한 정치적 자산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토사구팽과 숙청을 일삼으며 법가식 통치를 지향한 조조의 통치 성향 서주대학살에서 비롯된 서주 일대 명사들의 이탈 탓인지 조위는 항상 정치적으로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있었으며 역설적으로 조위는 조조 생전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끊임없이 이름난 명사들과 군사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들의 무수한 반란에 시달렸다.

그런 와중에 조위에 투신하여 세력을 굳히고, 중앙정권으로 진출한 지방호족 세력들의 불안을 달래줄 뿐만 아니라, 조조 정권 내에서 그들과 집권자 조조 사이의 균형을 굳혔으며, 결정적으로 출신성분 덕분에 지방 호족들로 하여금 조위가 지방 호족들을 무시하지 않으리라는 정치적 시그널 역할을 해줬던 것이 순욱이었다. 그러나 순욱이 어떤 이유로든 간에 허무하게 팽당한 뒤에 죽게 되고 나서부터는 지방호족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더욱더 활발하게 이합집산하게 되며, 조위에 대한 충성은 날이 가면 갈수록 약화되게 된다. 특히 순욱의 사망 이후부터 또 다른 정치적 명가 출신이자 호족가의 인물이었던 사마의가 부상하게 되었으며, 그를 중심으로 정계개편이 점차 진행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후한말 최고의 명가로 꼽혔던 여남 원씨와 홍농 양씨와 같은 대표적인 호족가들이 몰락한 마당에, 그 뒤를 이어 지방호족의 원탑은 당연히 청류파의 원조나 다름없던 순욱을 배출한 영천 순씨였다. 그런 순씨가 조조와 뜻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한 것은, 결국 조씨 일가를 제외한 다른 정치세력은 시다바리 노릇이나 하라는 뜻으로 비쳐졌고, 실제로 조위를 이은 조비, 조예, 그리고 사마의에게 휘둘리다 주살 당한 조상같은 실권자들의 의도는 노골적으로 조씨 천하에 있었다. 문제는 순욱을 비롯한 이러한 청류파/지방호족/유학 엘리트의 조합을 견제할만한 친위세력 양성에 조조가 근본적으로 실패했다는데 있었다. 특히 군사력으로 이들을 찍어누를 수 있었던 항장을 비롯한 무인 집단들은, 그들의 반란 가능성과 배반에 대한 병적인 의심에 시달린 조조 덕분에 친위세력화하지 못한 채 빠르게 수명이 다해버렸다.[41] 결국 지방호족들을 컨트롤 하는 것은 조씨 혈족과 그들의 분신이나 다름 없는 하후씨 일가, 아이러니하게도 조조가 그 젊은 시절 그토록 병적으로 혐오하던 몇몇 사돈을 위시로 한 혼맥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이런저런 다툼과 후계자들의 병크, 그리고 사마의를 비롯한 사마씨 일족의 능수능란한 정치적 숙청에 휘말려 몰락했고, 이는 지방 호족들의 연립정권 내지는 혼맥집단인 진나라의 발흥과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위진남북조 시대라는 또 다른 난세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즉 순욱의 죽음은 단순히 한나라의 멸망과 개인의 흥망과 더불어 조조 정권의 흐름 자체를 바꿔놓은 나비효과의 시발점 중 하나였다.

3.4. 한(漢)에 대한 충정과 관련된 의문

3.4.1. 부정론

"옛날 고조는 관중(關中)을 보전했고, 광무제는 하내(河內)에 근거하여, 모두 근본을 깊고 굳건히 하여 천하를 제압하고, 나아가면 족히 적에게 이길 수 있었고, 물러나도 견고히 지킬 수 있었으니, 그래서 비록 곤경이나 패배가 있었어도 끝에는 대업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본래 연주에서 일을 시작하였고, 산동(山東)의 난을 평정하였으니, 백성들이 귀의하여 기뻐하며 감복하지 않은 자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수(河水, 황하)와 제수(濟水)는 천하의 요충지로 지금 비록 잔멸되어 무너졌으나 오히려 쉽게 스스로 보전할 수 있으니, 이것은 또한 장군의 관중과 하내가 되는 것이니, 먼저 평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사 삼국지 순욱열전

전근대 시기엔 지금보다도 오히려 순욱의 평가가 좋지 않았다. 한의 충신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측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위에서도 언급된 당나라의 시인 두목. 정사 삼국지 순욱전에는 순욱이 조조에게 후한의 재건이 아닌 신왕조 창건의 야심을 부채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을 만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조조가 연주를 보전하는 것은 각각 한고제가 관중을 보전해 천하를 제압하고 광무제가 하내에 근거하여 천하를 제패한 것에 비하고 있다. 이는 조조더러 이들과 같이 연주를 바탕으로 삼아 천하를 얻으라고 조언한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신하의 입장이 아니라 군주의 입장에서 말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당시의 이념상 "한나라"를 지키겠다면서 천자를 겁박하고 황후를 폐하는 등의 폭거를 용인하는 것은 분명한 자가당착이다. 한(漢)에서 태어나 충성을 강요하는 유학을 국시로 공부하며 자란 영천의 명문가 엘리트인 순욱이 기존 '천자(天子)-충신(忠臣)-안민(安民)'으로 이어지는 당대 유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부정하고 '천자나 황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漢)이라는 질서가 어떻게든 유지되는 게 중요하다'라고 생각했다는 평가들은 당시 한나라 기준으로는 동탁개혁론에 버금가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즉, 이러한 생각을 하며 살았다는 지점에서 이미 순욱은 손씨孫氏를 추종하며 새천하를 꿈꿨던 동오의 인사들만큼이나 '한의 충신'으로 보기 어렵다. 순욱이 제세안민에는 관심이 있었을지언정 한나라에 충심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해석이다,

긍정론에서는 원소를 언급하며 한나라와 천자를 구분하는 시선도 존재했다고 하는데, 그 원소부터가 스스로도 제위에 오를 야심을 보인 역적에 불과함을 고려해야 한다. 원소는 역심을 품고 있으니 헌제의 전통성을 부정하고 이를 이용하려 했을 뿐이며, 순욱이 진정 한에 대한 충심이 있었다면 원소와 같은 시선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원소와 순욱의 헌제에 대한 입장도 서로 다른데, 원소는 헌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헌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한황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순욱은 헌제를 천자로 인정하고 그 권위를 복구하는데 앞장섰음에도 조조가 헌제를 겁박하는 것을 묵인했기 때문에 이것이 한황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미 동승 등을 위시하여 조조를 공적으로 선포하고 천자가 밀지를 내렸다는 주장이 드러난 상태에서, 그 순욱이 천자의 밀지가 사실인지 아닌지 파악하지 못했을리도 없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천자를 겁박해놓고도 자신이 '한'에 충성한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순욱이 생전에 한에 대한 충성에는 관심이 그다지 없었는데, 자신이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줄 알았던 조조가 점차 자신의 영향력을 벗어나자 이를 제어하려다 정면으로 부딪힌 것이 위공 등극 건이고, 그리하여 파워게임에서 진 순욱이 선택할 수 있었던 자신의 최후 중 가장 나은 결말이 한의 충신으로 자신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는 견해이다.

의혹을 제기하는 측에서는 순욱이 자료를 모두 불태워 자신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부분도 근거로 삼기도 한다. 순욱이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한의 충신이었다면 자신의 저작이나 기록은 남겨서 후대에 조조의 평가를 박하게 만드는 것이 낫지, 이렇게 기록을 깡그리 없애는 선택은 충신의 일반적인 행태에 전혀 맞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이상이 현실적인 힘의 부족으로 좌절되면 으레 기록이나 유산 따위를 남겨 후대의 평가에 대한 준비를 하고 떠나기 마련인데, 이렇게 기록을 싸그리 없애는 경우는 오히려 그것이 남았을 때 자신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불리하다고 생각해 인멸하는 것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다.

조조가 정말 만고의 대역죄인이 되게 생겼고, 순욱 자신이 그것에 동조하지 못하겠어서 자살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자신이 그 대역죄인의 앞잡이였다는 역사적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에 충성하려던 자신의 내밀한 기록이나 유지를 남겨 조조에게서 손절하고 자살해야 논리적으로 타당한 선택이다. 특히나 사세삼공, 이세삼공 따위의 가문에 대한 평가가 절대적이었던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보면 더욱 더 기록을 남겨서, 자신은 조조의 역적질에 동조했던 게 아니라 조조에게 속아서 이 꼴이 났다고 변명이라도 해야 합당한 처세이다. 순욱 정도의 인물이 이런 생각을 못하고 주군에게 버려져 비탄의 감상에 빠진 나머지 자신의 친족들에게 무책임한 기록 불놀이를 해버렸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추측이다.

즉, 순욱의 내심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으니 음모론에 불과하긴 해도, 순욱이 생전에 조조가 천자 등 당대 한나라의 질서를 유린하는 걸 묵과하고 말미에 자신의 기록을 인멸한 것은 그가 정녕 한나라 질서에 충성하는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무엇보다 순욱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접어두고 생각하면, 위공등극에 반대해 죽은 것 말고는 한(漢)에 충성하는 그 어떠한 행동도 한 적이 없는 순욱을 위공등극에 반대해 죽었다고 순식간에 한의 충신으로 둔갑시키기에는 그간 순욱이 조조의 휘하에서 군소리 한번 없이 한황실에 씻지 못할 대역죄를 여러번 저지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의견이다.

또한 순욱의 급작스러운 노선 변경이 온전히 한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고 생각할수도 없다. 순욱이 "변란이 일어날것이다"며 집안 어르신들까지 설득하며 다같이 고향을 버렸다가 조조가 동군태수가 되자 가족을 전부 다 이끌고 연주로 다시 돌아간 것. 이게 황실에만 충성하는 사람의 행보인가?

그리고 원소에서 조조진영으로 바꿔서 대박난 문관들은 전부 연주나 예주 출신이고 순욱이랑 지인이다, 굳이 따지면 최염 정도가 예외일까? 소위 순욱 피라미드라고 일컬어지는 인맥은 이런것이다. 이후 순욱이 추천한 사람들의 명단, 그리고 조조가 예주출신이었던 순욱의 동향사람들을 전부 기용한 것으로 보아 순욱은 적어도 새로운 수도 허도 인근 예주 호족들을 중심으로 황실의 수복을 꾀하는 야망이 확실하게 있었다고 봐야한다. 순욱 피라미드를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순욱은 외지의 인사나 몰락한 사족들을 천거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순욱은 조조를 바지사장으로 본 거고, 한나라에 대한 충성보다 예주, 영천 사족을 우선시한 누구보다 배타적이었고 연고주의적인 인물이었다. 순욱이 주도하고 조조가 자초한 연,예주-사예 호족집단 사이의 결합이 결국 한나라, 위나라, 진나라를 연달아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순욱을 긍정적으로 볼 순 없다.

3.4.2. 긍정론

황실과 황제를 구분하는 시각은 그 당시부터 있었으며, 실제로 원소가 헌제를 받아들이는데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이유도 연의처럼 "무능해서"가 아니라 헌제라고 하는 "황제의 정통성"에 회의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원소 뿐만 아니라 한 황실과 헌제를 따로 구분하는 입장은 물론 대놓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당시 여럿 존재하였다. 명분상으로야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니니. 게다가 멀쩡하던 후소제 황제를 권신 동탁이 아무 이유없이 내치고 새로 내세운 황제가 헌제였기에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데다가, 이곽 곽사의 난을 거치며 황실의 권위마저 크게 떨어져 조조가 황제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전까지는 그 권위와 정통성에 크게 문제가 있었기까지 했다. 언급했듯 원소는 아예 헌제 부정파에 가까웠고, 조조가 헌제의 권위를 그런대로 복구시키기 전까지는 아예 새로운 유씨 황제를 내세울 생각까지 있었다. 여러모로 꼬여서 실행하지는 못했지만.[42] 그렇기에 한 황실에는 충성하되 헌제에게는 충성하지 않고 어찌되었든 공식적으로는 황제이기는 하니 이 권위를 냉정하게 이용했다는 평가가 보편적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동귀인과 복황후, 즉 황제의 아내들에 대해 잔혹한 대처를 한 것을 묵인한 것에 대해서도 합당한 이유가 주장된다. 순욱과 조조는 한창 외척과 환관들에 의해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겪었던 인물들이다. 실제로 단순히 저들 뿐만 아니라 조위는 전체적으로 조씨의 친인척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과 정 반대로 외척들에게는 매우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마찬가지로 황제의 외척은 그들에게 주요 경계대상이었고, 이들이 조조세력에게 반목한다면 강력히 대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계획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모르겠으나 그러하지 않았으니. 다만 이런 행동들에 대한 조조 입장에서의 당위성과는 별개로 조조가 그들에게 했던 행동이 과하게 잔인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또한 기록물을 불태워 조조에 대한 비판을 흐렸다는 부분도, 헌제와 달리 조조는 어찌되었든 본인이 한 때 충성을 맹세하였던 대상이었던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유교 문화권의 수 많은 역사는 물론 이 삼국시대에 한정해서만이라도 어리석은 주군을 끝까지 모시는 것은 충분히 많이 존재하는 경우였다. 위의 헌제에 대한 설명과 달리, 조조는 순욱이 충성을 바쳤던 "개인"이었고 역적이나 다름 없는 존재가 된 그를 배신한다고 지탄받을 일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충성을 바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조조가 한황실을 폐하고 세운 위나라와 그뒤를 이은 진나라의 결말이 남북조라는 중국역사상 최악의 난세였다는 것을 생각해볼만 하다. 가끔 예지수준의 예측능력을 보여 주었던 순욱이 이러한 최악의 난세를 예측하여 조조가 위공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러한 난세를 열게 만들 계기를 마련해버린 조조에 대한 실망과 후세에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나빠질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기록을 태운것이라면 앞서 말한 순욱의 행적에 대해서도 설명이 된다. [43] 실제로 남북국시대에 중국 전체가 개판이 된 것은 이민족의 침입도 있지만 너도 나도 나야말로 한황실의 정통후계자라고 주장하면서 세력들이 난립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황실이 남아 있었다면 이러한 난립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리하면 분명 순욱이 한나라의 질서를 유린하는 것을 묵과하고, 헌제라고 하는 황제를 이용하였으며, 조조에게는 끝까지 충성을 바친 것이 맞다. 그렇기에 그런 행동을 하였다는 것만으로 역적이라는 평가와 이에 대한 옹호가 오랫동안 꾸준히 존재하였다. 그러나 실리적 관점에서 한과 황제를 구분해서 행동하고, 당시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잔혹한 행위도 상황에 따라 취하였다는 해석에 모순이 없음에 따라 보편적으로는 한과 동시에 조조에게 충성을 바쳤다는 특이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역사에도 순욱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던 충신의 대명사가 있는데 바로 정몽주. 여기는 아예 복권을 꿈꾸는 왕을 주도적으로 폐위시킬 정도였으나 마찬가지로 나라의 멸망은 목숨걸고 막으려고 하였다. 재밌는 점은 순욱과 정몽주, 둘 다 나라의 충신이었다해도 정작 그 나라의 정통성(황제, 왕)을 무너트려서 그들이 충성하는 나라를 죽이는데 일조한 사람들이란 점이다.

3.5. 인재를 보는 눈

파일:attachment/순욱/Example.jpg
순욱의 인재 추천 피라미드

조조가 순욱에게 "그대를 대신하여 전장에서 책략을 상담할 이가 누가 있는가?"라는 조조의 질문에 그가 추천한 이는 희지재였고, 희지재가 일찍 죽은 후 순욱이 다음으로 조조에게 추천한 사람이 바로 곽가였다. 본진을 관리하느라 전장에 나설 수 없는 순욱을 대신하여 조조가 옆에 두고 책략을 논하던 인재들은 순욱이 추천한 순유, 종요, 희지재, 그리고 곽가였다.

그의 능력은 관료의 추천에서도 빛을 내었는데, 수많은 조조군의 중역들이 발굴되었다. 순욱은 수많은 인재들을 추천하였고, 추천받은 많은 인물들은 조조를 위하여 엄청난 활약을 하였다. 게다가 순욱을 필두로 수많은 인재가 줄줄이 이어져 들어온다. 이를 두고 우스갯소리로 순욱의 인재 천거를 삼국지판 다단계 마케팅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44]

단순히 많은 인재들을 추천한 걸로 유명한 걸 떠나서 구체적인 일화들을 보면, 조조군 위기의 순간에 적재적소의 인재를 파견해 그들 하나로 적을 곤란하게 하고 아군을 이롭게 한 일이 여러 번 있다.
  • 여포에 의한 연주 세력의 반란 당시, 정욱을 보내 일부 세력을 설득하여 조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 원소와의 대결 당시 종요를 보내 관중 지역의 외교를 안정화시킬 수 있어 원소와의 대결 동안 많은 협력을 얻어냈다.
  • 고간의 반란 당시 두기를 보내 반(反) 고간 세력을 규합시켜 고간 세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공융과의 논쟁에서 원소군 인재들에 대한 순욱의 비판 요소가 그들의 최후로 이어졌음을 보건데도 그의 인물 파악 능력이 탁월함을 알 수가 있다.

조조는 "순 상서령의 인물 감정은 때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신뢰할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세상이 떠날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유비에 비교될 수준의 인물 감정 능력.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 순욱이 보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주군 조조의 한 황실에 대한 역심이었다. 파악을 못 한 것인지, 알았지만 제어 가능한 범위라 믿었던 것인지, 혹은 조조가 처음에는 한 왕조의 부흥을 목표로 했으나 권력에 취하며 나중에 변질된 것인지, 여러 가지 경우는 많지만 무엇이 진실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 혹은 진짜 헬게이트가 열린 시기였으니 만큼 숨겨진 야심의 위혐성을 알고있다 한들 이 이상의 답이 없다 생각헀을지도 모른다.

4. 가족 관계

삼국지 시대에는 인물평이 상당히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보통 뛰어난 형제들이나 단체에는 명칭을 붙여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당대 청류파의 명문인 순욱 집안도 순숙의 아들들이 뛰어나 8형제들을 묶어 순씨팔룡이라고 칭했다.
  • 순숙(荀淑): 순욱의 조부. 자(字)는 계화(季和). 낭릉(郞陵) 현령.
    • 순검(荀儉): 순숙의 장남. 랑릉장(朗陵長).
      • 순열: 순검의 막내 아들, 순욱의 종부형. 자(字)는 중예(仲豫). 비서감(秘書監), 시중. 한기의 저자.
    • 순곤(荀緄): 순숙의 차남, 순욱의 아버지. 제남상(濟南相).
      • 순연: 순욱의 형제.
        • 순소(荀紹): 순연의 아들. 태복.
          • 순융(荀融): 순소의 아들. 자(字)는 백아(伯雅). 낙양령.
      • 순심: 순욱의 형제. 자(字)는 우약(友若).
        • 순굉(荀閎): 순심의 아들. 자(字)는 중무(仲茂). 태자문학연(太子文學掾).
          • 순휘(荀煇): 순굉의 종손. 자(字)는 경문(景文).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역집해(易集解)의 저자.
      • 순욱
    • 순정(荀靖): 순숙의 삼남. 자(字)는 숙자(叔慈).
    • 순도(荀燾): 순숙의 사남.
    • 순선(荀詵): 순숙의 오남.
    • 순상: 순숙의 육남. 자(字)는 자명(慈明). 사공(司空).
    • 순숙(荀淑): 순숙의 칠남.
    • 순부(荀敷): 순숙의 팔남.

순욱은 자식으로 5남( 순운, 순우, 순선, 순의, 순찬) 1녀(순씨)가 있었다. 자식들의 자의 뒷글자는 모두 '천(倩)' 자였다.
  • 순운: 순욱의 장남. 자(字)는 장천(長倩).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요절. 부인은 조조의 딸 안양공주.
    • 순감: 순운의 장남으로 광양향후(廣陽鄕侯), 산기상시(散騎常侍). 30세로 사망.
      • 순군: 순감의 아들. 자(字)는 온박(溫泊). 안릉향후(安陵鄉侯). 우림우감(羽林右監). 요절.
        • 순숭: 순군의 아들. 자(字)는 경유(景猷). 평락백(平樂伯) 광록대부(光祿大夫).
          • 순유: 순숭의 아들. 동진(東晉)의 건위장군(建威將軍), 오국내사(吳國內史).
            • 순적: 순유의 아들. 동진의 산기상시(散騎常侍). 대장추(大長秋).
          • 순선: 순유의 형제. 자(字)는 영칙(令則). 동진의 북중랑장(北中郞將), 서연2주자사·가절(假節).
            • 순의(荀猗): 순선의 아들. 비서랑(秘書郞).
              • 순백자: 순의의 아들, 순선의 손자. 송의 어사중승(御史中丞). 순씨가전의 저자.
                • 순적송(荀赤松): 순백자의 아들. 송의 상서좌승(尙書左丞).
              • 순창(荀昶): 순백자의 족제(族弟). 송의 중서랑(中書郞).
                • 순만추(荀萬秋): 순창의 아들. 송의 어사중승(禦史中丞).
          • 순관(荀灌): 순숭(荀崧)의 막내딸.
    • 순익: 순운의 차남. 중령군(中領軍). 부인은 사마의의 딸 남양공주.
      • 순담: 순익의 장남. 서진(西晉)의 소부(少府).
      • 순개: 순익의 차남. 서진의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 순리: 순익의 삼남. 서진의 호군장군(護軍將軍).
  • 순우(荀俁): 순욱의 차남. 어사중승. 요절.
    • 순우(荀寓): 순우(荀俁)의 아들. 자(字)는 경백(景伯). 서진의 상서.
      • 순우(荀羽): 순우(荀寓)의 아들. 서진의 상서.
  • 순선: 순욱의 삼남. 자(字)는 만천(曼倩). 대장군종사중랑(大將軍從事中郞). 요절.
  • 순씨(荀氏): 순욱의 딸, 진군의 부인, 진태(陳泰)의 어머니.
    • 진태: 진군의 아들, 순욱의 외손자.
  • 순의: 순욱의 사남. 자(字)는 경천(景倩). 사공(司空). 후에 서진의 태위(太尉). 참고로 위에 표기된, 진태의 외숙부. 사실 순욱의 아들들은 다 진태의 외백부 아니면 외숙부기는 하지만(...).
  • 순찬: 순욱의 오남. 자(字)는 봉천(奉倩). 29세로 사망. 부인은 조홍(曹洪)의 딸.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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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상술하였듯 예형의 순욱 비난에 대해 배송지는 예형마저도 순욱의 외모가 빼어난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참신한 해석을 덧붙였는데, 실제로 순욱은 "아름다운 자태와 기이한 용모" "용모가 뛰어났다"라는 기록이 있었다. 또한 재미있게도 위, 촉, 오 들의 오른팔이자 세력의 대표 인재들인 순욱, 제갈량, 주유 모두 정사에 기록된 미남이다.[45]

위에서 언급한대로 정몽주와 묘하게 겹치는 이미지가 많다. 양쪽 다 왕좌지재라 불렸으며, 재상의 자질을 가지고 군사적으로도 능력이 있어 종군할 때가 있었고[46], 망해가는 나라(한, 고려)를 권력자(조조, 이성계)를 통해 복권하려는 의도를 가졌으며, 그 권신들이 왕실을 상대로 충격적인 짓을 해도 묵인할 정도나, 나라 자체가 망하는 것에는 해당 권력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대립하며 막았으며, 그 권력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고 당시에 엄청난 명성을 떨쳤다는 것. 행보상 중요하게 다른 점을 꼽자면 순욱이 목숨걸고 반대한 정도에 그친 반면 정몽주는 아예 정치적으로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려고 마음 먹었었다. 이성계 세력에 속해있되 부하라고 할 입장은 아니었던 게 컸을지도.

6.1. 빈 찬합 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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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도 , 공손연,
장연 · 장수 · 장로
9권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10권 「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하후돈 , 하후무 한호 사환, · 하후연 , 하후패, · 조인 , 조순, · 조홍 · 조휴 , 조조(肇),
조진 , 조상 이승 환범 하안, · 하후상 , 하후현 이풍 허윤,
순욱 , 순의 예형, · 순유 · 가후
11권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12권 「최모서하형포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 13권 「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원환 · 장범 , 장승, · 양무 · 국연
전주 · 왕수 · 병원 · 관녕 , 왕렬 장천 호소,
최염 , 공융 허유 누규, · 모개 · 서혁
하기 · 형옹 · 포훈 · 사마지
종요 , 종육, · 화흠 · 왕랑 , 왕숙,
14권 「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15권 「유사마량장온가전(劉司馬梁張溫賈傳)」 16권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정욱 , 정효, · 곽가 · 동소
유엽 , 유도, · 장제 · 유방 , 손자,
유복 , 유정, · 사마랑 · 양습 , 왕사,
장기 , 유초 장집, · 온회 , 맹건, · 가규 , 가충,
임준 · 소칙 · 두기(畿) , 두서 악상,
정혼 , 정태, · 창자 , 안비 영호소,
17권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18권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장료 · 악진 · 우금 · 장합 · 서황 , 주령, 이전 · 이통 · 장패 , 손관, · 문빙 · 여건 , 왕상,
허저 · 전위 · 방덕 · 방육 , 조아, · 염온
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창 · 조식 , 양수 정의 정이, · 조웅 조앙 · 조삭 · 조충 · 조거 · 조우 · 조림(林) · 조곤 · 조현 · 조간 · 조표 · 조정 · 조림(霖)
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왕찬 , 진림 완우 유정, · 위기 · 유이 · 유소 · 부하 환계 · 진군 , 진태, · 진교 · 서선 · 위진 · 노육 화흡 · 상림 , 시묘, · 양준 · 두습 · 조엄 · 배잠 , 배수,
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한기 · 최림 · 고유 · 손례 · 왕관 신비 , 신헌영, · 양부 , 왕이, · 고당륭 , 잔잠, 만총 · 전예 · 견초 · 곽회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서막 · 호질 , 호위, · 왕창 · 왕기 왕릉 , 선고 영호우, · 관구검 , 문흠, · 제갈탄 , 당자, · 등애 , 주태, · 종회 , 장창포 왕필,
29권 「방기전(方技傳)」
화타 · 두기(夔) ,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 · 선비 , 가비능, · 부여 · 고구려 · · 읍루 · 예맥 · 동옥저 · 마한 · 진한 ·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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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증된 관직으로 생전에는 상서령이었다. [2] 여담으로 자신의 주인이었던 조조의 이름과 자는 순자가 쓴 글의 권학편에서 언급되는 덕조(德操)에서 따와 조조, 맹덕이라 지었다. 재밌게도 조조는 법가적 특징을 지녔다고 평가되는데 순자는 한비자, 이사라고 하는 법가의 대표주자들의 스승이다. 이렇게 순자와 조조세력의 핵심들이 여러모로 재밌는 연관점을 가진 편. [3] 당형은 164년에 죽었으니 당시 순욱이 결혼할 때 나이는 유아기였다. [4] 청류파 명사였던 순씨의 자제가 환관 일족과 맺어지는 것에 대하여 주변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이다. [5] 하옹은 젊을 적 조조의 재능을 간파했고, 후에 순유와 함께 동탁 암살을 계획한 인물이다. [6] 보통 연의의 영향을 받아 관상을 통해 그 인물의 운명을 파악한 것처럼 묘사하는 작품들이 많고 많은 사람들의 인식도 그러한 편이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실제로는 단순한 인물평으로, 저런 신비적 요소가 아닌 해당 인물의 언행을 잘 관찰한 후에 그것을 기초로 평가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인물평. 당대에는 유력인사의 이런 인물평이 출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7] 당시는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제위에 올리던 시기이다. [8] 삼방순욱라는 고사성어가 있지만 삼고초려와 다르게 정사에는 없으며 사후 민중들에 의한 창작인 것으로 보인다. 순욱이 제갈량에 자연스레 대치되다 보니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냥 단순히 이런 이야기가 창작될 정도로 조조 세력 내 순욱의 위상이 높았다 정도로 생각해둘 썰이라고 보면 된다. 이 부분에서 각색되어 삼국전투기, 삼국지톡 등에서는 본래 원소의 부하였다가 조조로 넘어간 것으로 묘사하나, 위에 설명하듯 부하가 아니라 손님으로 대접받다 넘어간 것이다. [9]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진동장군이 된 것은 196년 협천자 이후이고 진동장군 고작 3개월 하고 9월에 대장군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순욱이 조조를 종군한 것은 이때까지의 초기 정도뿐이고 대체적으로 순욱은 조조를 대신해 본거지 수비와 내정을 주로 맡게 된다. 191년에 조조의 밑으로 갔고, 아래 내용을 보면 194년 전후로는 이미 본거지를 담당하였다가 여포 세력의 배신으로 조조 세력이 크게 약화됨에 따라 종군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1년부터 196년까지의 기간 도중에 본진 관리 역할을 맡던 적도 있으니 순욱의 참군 경력은 길어도 3년 정도일 것이다. [10] 192년에 조조가 연주목을 맡고, 후에 진동장군이 되었는데, 순욱을 항상 사마로써 종군케 한 적이 있다. 무제기의 일에 따르면 조조가 진동장군이 된 것은 196년의 일이므로 196년 즈음에도 종군하는 일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포-진궁-장막의 배반 당시(194년) 본거지를 맡고 있던 걸 생각하면 이 시기 이전에도 이미 안방관리를 전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서주 관련 첫 사건이 일어난 초평 4년 (193년)을 기준으로 했을 시 순욱의 정확한 행보를 예측하기는 어려우나 순욱의 다른 발언들을 볼 때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포 측이 대립하며 조조 세력은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 2년에 거쳐 회복하였는데, 이때가 대략 196년이다. 이를 고려하면 "조조 세력 초창기 종군 > 조조 세력이 확장되며 본진 관리 > 여포 세력의 득세로 조조세력이 큰 타격을 입으며 세력 축소 > 다시 종군 > 조조 세력 회복 > 다시 본진 관리에 전념"이라는 흐름일 경우 대략적으로 앞뒤가 맞는다. [11] 배송지는 이때 서주를 평정하지 못하고 연주 또한 반란을 일으켜 십만의 군사라 말하였다. 비록 억누르고 막는 말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작고 약한 전쟁이 아닌 것이다. 관도의 일을 하는 것이 이로운 것을 알게 되어, 부득이하게 병사들이 불만을 많이 가질 것이라 일컬었다고 했다. 이는 파성넷 등지에서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정사 삼국지 주석으로 나무위키에서 번역되었음을 밝혀둔다. [12] 예형의 이 비방에 대해 배송지는 참신한 해석을 하였는데, 다른 사람의 험담만을 말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예형도 순욱의 외모가 좋은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는 실례로써 들고 있다. 조조 패거리를 대표해서 조문을 가는 얼굴마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 [13] =순욱과 순유 [14] 연의에선 화가 난 허저에게 죽임을 당한다. [15] 당장 순욱의 형인 순심이 원소 휘하에서 종사하고 있었다. [16] 실제로 원소 휘하 인물 중 순욱과 같은 영천군 호족 출신 인물들( 순심, 곽도, 신평 등) 중에서 비판을 한 이는 없다. 특히 이들 중 곽도는 위에서 깐 인물들 이상의 삽질을 한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17] 중원이 평정되었으니 조조 세력의 강성함을 남쪽 지역도 알고 있다. 크게 전쟁을 벌이기보다 가볍게 군사를 일으켜 위협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 [18] 사마의 또한 순욱을 크게 존경하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크게 존경하면서 동시에 본인과 같은 청류파 출신인 순욱이 조조에게 반쯤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후 사마 가문이 조조 가문을 배신하는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을 거라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19] 이 일화에 대해서는 다른 2차 창작엔 나오지 않았지만, 대군사 사마의에서 채택하여 작중 순욱은 언제나 손님을 맞이할 때 집안에 여러 개의 향초를 태워 은은한 향을 낸 다음 대화를 나누었다. [20] 삼국지 위서 고유전 [21] 위기전 주석 위서 [22] 배송지 주 전략 [23] 연의와 달리 마초가 장안을 점거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정사 삼국지 내에 없다. 장안 너머에 있는 동관을 포위했다고 나와 정황상 장안을 점거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있으나 직접적으로 마초가 장안을 함락했다는 식의 기록은 없으며 장안 점거를 한 건 아니고, 장안에서 못 기어나오게 위협만 한 후 우회를 하였다는 것이 대세. 실제 드라마 삼국에서도 이걸 염두에 둬 마초가 장안을 무시하고 동관으로 바로 진격하는 식으로 나온다. [24] 순욱은 한나라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25] 순욱의 존재가 조조에겐 빈 공기와 같다는 뜻이다. "쓸모가 다 한 그대를 다시는 중히 써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또는 빈 공기를 보냄으로써 "너는 이제 내가 녹(음식, 월급)을 주는 게 아까우니까 앞으로 내가 주는 밥 먹을 생각도 하지 마라."처럼 음식을 일체 취하지 말라는 뜻으로, 스스로 죽으라는 의미다. [26] 시법에서 공경 경(敬)은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공경하게 하고 훌륭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27] 나선다고 하면 사지로 내몰 것이요, 나서지 않는다면 명령 불복종으로 처형할 것이라고 여겼다. [28] 애초에 사마의는 조조 때 중신이 아니며 개국 공신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멸망에 더 지분이 많다면 모를까... 물론 임관 초기부터 촉망받는 인재로 후계자인 조비와 가깝게 지낼 정도였지만 어찌되었든 조조 때에는 크게 눈에 띄는 활약이나 업적이 많이 없다. 이후 조비부터 조예에 걸치며 업적을 쌓았는데, 즉 조조의 핵심 인재가 아니라 그 이후 황제국 위나라의 핵심 인재였다. [29] 촉한의 제갈량, 조위의 순욱, 동오의 주유/노숙은 전부 핵심 개국공신이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연의에서 제갈량의 라이벌로 부각되는 인물은 주유와 사마의지만, 사마의는 이들과 입장이 다르다. [30] 고려와 조선은 신하와 왕이 설전을 자주 벌여서 왕의 힘이 약했다는 오해를 받는데, 오히려 당대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봐도 철저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정 관료제 국가였다. [31] 참고로 이건 처음 발생했을 때는 오히려 조조 세력에게 호재에 가까웠는데 여포-장막-진궁의 반란으로부터 아무리 순욱을 비롯한 측근들이 몇 개 성을 지켜냈다지만 사실상 연주의 대세는 완전히 넘어간 상황이라 조조 세력 독자적으로는 상대하기 벅찬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조가 서주에서 군을 물렸다는 소식에 여포가 우물쭈물거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메뚜기 떼로 대흉년이 들면서 군사를 운영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서로 군사를 물리게 되었다. 이때 연주를 막 장악한 여포 세력이 지배를 확고히 하기는 커녕 분열되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흉년은 조조 세력에게 적들의 기세가 약해질 때까지 숨을 돌릴 기회가 되어 주었다. 특히나 메뚜기 떼로 인한 흉년 직전 우물쭈물하는 여포를 상대로 승기를 잡고자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여포에게 대패해 크게 위험한 상황이었다. [32] 대장군은 군부를 대표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실질적인 최고 명령권자로 중요한 자리였다. 태위보다 실질적인 권한은 강했다. [33] 행(行)은 낮은 직급에 있는 사람이 높은 직급을 겸임할 때 붙이는 관사이다. 반대로 높은 직급의 사람이 낮은 실직을 겸임할 때는 영(領)를 붙인다. [34] 말년에 조조와의 불화로 인해 이런 꼬접 행동을 할 만큼 상심이 컸다고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만일 순욱이 없애지 않았다면, 당대 최고 권력자이면서 본인의 정치적 세력도 큰 만큼, 그런대로 오래 전해졌을 것이고 도중에 원본이 실종되더라도 타 기록물들을 통해 지금보다는 정말로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집이 많이 산일되었다고 해도 후인들이 어떻게든 기록을 끌어모아 오늘날 제갈량이라는 사람의 사상과 업적,그 시대의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처럼, 순욱의 저작물은 후한 말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을 중요한 사료물이 되었을 테니 역사학적으로 매우 아쉬운 부분. [35] 이문열 삼국지에서는 순욱이 빈 그릇을 본 후 조조가 '이제 그대가 먹을 것은 없다. 내가 그대에게 보낼 것은 이 빈 그릇과 같은 옛정의 껍질뿐이다.'라는 뜻으로 보낸 것이라 생각하고 자살한다. [36] 별 생각 없이 그냥 그릇을 보낸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사소한 부분에서도 행간을 매우 중시하던 고대 중국에서 그러한 행동은 여러모로 오해를 사기 쉽다. 무엇보다 조조도 순욱도 빼어난 지략가였는데 그런 조조가 아무런 이유 없이 빈 그릇을 보낼 이유도, 순욱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할 리도 전무하다. 애초에 그냥 빈 찬합만 보낸 것도 아니고, 분명히 '음식이랍시고 보낸 찬합을 열어보니 텅 비어있었던 것'이라 엿먹이려는 의도가 명백하다. 많이 드시게! 뭐를요? 엿을? '의견 차이가 있었어도 내 생각은 계속 해 주는구나. 그래 우리가 어떤 사인데' 하고 싱글벙글 하면서 열었는데 꿈 깨라는 양 텅 비어 있는 찬합을 본 순욱의 심정을 이해하긴 어렵지 않다. [37] 만약 순욱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본격적으로 조조와 대립을 하게 된다면 조조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큰 정치적 악재가 없으며, 아무리 군부가 온전히 조조 휘하에 있다지만 적절한 명분 없이 개국공신인 순욱을 제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순욱이 그러지 않고 자살을 택했다는 점에서 순욱은 그래도 자신의 개인적인 주군에게는 끝까지 충성심과 의리를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조조 역시 오랜 시간 자신을 따라준 순욱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그의 장례를 크게 치르고 그의 넋을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38] 라고는 하지만 서술하듯 본래 탁류파인 조조 가문에 많은 청류파 가문들을 끌어와 순욱은 그들의 상징적 존재이면서, 실권적인 부분에서도 세력 내 2인자가 될 수 있었다. [39] 다만 말년에 순욱이 죽은 것도 자연사가 아닌 조조와의 대립에 의한 자살이므로 순욱이 죽지 않았다 한들 예전처럼 조조 세력이 잘 굴러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목숨을 빼앗지는 않아도 조조가 예전처럼 순욱에게 권력을 맡길지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 그러나 순욱은 단순 참모가 아니라 조조의 한 축인 호족들의 우두머리나 다름 없다. 그런 점에서 명예직이라도 조조의 한 축을 계속 담당했다면 조조의 세력이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조조도 계속 순욱을 대접하고 이로 인해 영예롭게 세상을 떠났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지 모른다. [40] 이는 단순 순욱만의 특징이 아니라 조씨 세력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한나라의 외척뿐만 아니라 조씨 정권의 외척들도 배척하였다. 설명하였듯 순욱과 조조가 한창 외척에 의한 나라의 망조를 경험했던 이들이라 그런 것으로 보인다. [41] 당장에 위의 오자양장들이 한 지방의 군권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를 말해준다. 관중을 수비하던 장합과 서황은 하후연의 휘하였으며, 장료 또한 뒤에 하후돈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오환 토벌을 나섰던 것도 아들인 조창이었고, 형주 방면은 조인이 맡았다. 이는 조조 사후에도 기조가 지켜져서 대촉전선은 조진이, 대오전선은 조휴가 총괄하게 된다. 조조 대부터 군공이 높았던 장합이 조진 사후에도 사마의의 휘하가 되어야 했다는 것은 적어도 조조 대부터 친족 외의 장수들을 신뢰하지 못하던 기조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2] 원래 원소는 나이도 많고 명성도 높은 유우라는 황족을 황제로 내세우려 했으나 유우 본인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그 제의를 거절했고 후에는 공손찬의 손에 죽게 된다. 이 사건 또한 나비효과가 상당해서 유비, 전해, 조운같은 특급 인재들이 전부 공손찬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43] 나관중의 삼국지 소설의 기반이된 삼국지 평화에서 알수 있듯이 조조와 위나라의 악평은 절대 나관중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평가를 따랐을 뿐이다. 실제로 삼국지 평화에서 조조는 훨씬 잔악 무도하고 찌질하게 나오며 이를 카리스마 있는 악역으로 재창조 한것이 나관중이다. [44]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었듯 연주와 예주를 연고지로 하는 귀족 중심이었을 뿐이라는 비판 또한 피할 수 없다. [45] 물론 당시 명문가 출신들이 모두 다 외모가 뛰어났다고 평가받지는 않은 만큼 타고난 유전자 빨이 제일 중요하겠다만, 셋 모두 다 명문가 출신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좋은 관리를 받아 외모가 준수하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 그나마 제갈량의 경우 셋중 가장 집안이 딸리고 20대 초중반 시절에는 손수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나머지 둘보다는 고생을 좀 했다. [46] 언급하였 듯 순욱은 조조 세력 초창기, 또 정몽주도 이성계의 군사 활동에 참군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