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4 09:39:13

순선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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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荀羡
(322 ~ 359)

동진의 인물. 자는 영칙(令則). 예주 영천군(潁川郡) 임영현(臨潁縣) 출신으로 순숭의 아들.

2. 생애

함화 3년(328년) 2월, 역양내사 소준이 반란군을 거느리고 도성 건강을 함락시켰다. 동진의 군신들이 조정을 장악한 소준에 반발하여 서쪽에서 의군을 일으키자, 소준은 이를 요격하기 위해 성제 사마연을 강제로 수레에 태우고 석두성(石頭)으로 향했다. 순숭도 황제와 함께 석두성으로 향했는데, 당시 7살에 불과하던 순선도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소준은 어린 순선의 효심을 매우 기특히 여겨, 그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게 하였다. 순선은 소준의 수레에 오르면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이제 날카로운 칼만 얻으면 도적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크게 놀라,
"망언하지 마라!"
라 말하며 순선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준의 난이 의군에게 진압된 후, 배를 타고 다시 건강으로 돌아왔으나 도중에 아버지 순숭은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함강 2년(336년), 나이 15세에 이르렀을 때, 원제 사마예의 딸인 심양공주(尋陽公主)와 혼사가 잡혔다. 황실과 연을 맺고 싶지 않았던 순선은 멀리 도망치려 했지만, 이내 관리들의 추격을 받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와 심양공주와 혼인하고 부마도위에 임명되었다.

함강 7년(341년), 약관의 나이로 명성을 얻어, 낭야왕 사마흡(司馬洽), 패국의 유담, 태원왕 사마몽(司馬濛), 진군의 은호 등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다졌다.

함강 8년(342년) 6월, 표기장군 하충이 경구(京口)를 진수하기 위해 출병하자, 순선은 자청하여 하충의 참군으로 배속되었다. 목제 사마담이 그를 징소해 무군참군(撫軍參軍),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삼으려 했으나, 순선은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비서랑, 의흥태수, 정북장사, 건위장군을 역임했다.

영화 4년(348년) 8월, 은호가 환온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친구인 순선을 오국내사에 임명하고, 왕희지를 호군장군에 임명하여 자신의 양익으로 삼았다.

영화 5년(349년) 12월, 호기롭게 북벌에 나섰던 정북장군, 서주자사 저부(褚裒)가 대피(代陂)에서 후조의 남토대도독 이농에게 대패하고 경구로 돌아왔다. 저부가 수치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분사하자, 조정에서 순선을 북중랑장, 서주자사, 감서연2주양주지진릉제군사(監徐兗二州揚州之晉陵諸軍事), 가절로 삼았다. 순선은 부임하여 재빨리 서주와 연주에서 병력을 징발하고, 참군 정습(鄭襲)을 파견해 회음(淮陰)에 주둔하게 했다. 때마침 하북은 후조의 무제 석호가 사망하면서 다시 혼란기에 빠져들었기에, 순선은 동양(東陽)의 석별(石鱉)에 둔전을 시행하며 피난오는 유민들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영화 7년(351년) 2월, 조정에서 광록대부 채모(蔡謨)를 사도에 임명하려 했지만, 채모는 2년 가까이 사양하면서 직책을 받들려 하지 않았다. 당시 어린 목제를 도와 섭정하던 저 태후는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채모를 타일렀으나 소용없었다. 이에 회계왕 사마욱이 나서서 채모에게 신하의 예가 없다 탄핵하니, 채모는 그제서야 두려움에 떨며 집안의 자제들을 이끌고 나와, 궐 앞에 절을 올리면서 용서를 구했다. 은호는 그를 죽이고자 했으나, 소식을 들은 순선이 입조해 변호해준 덕에 채모는 목숨을 구하고 서인이 되었다.

영화 8년(352년) 3월, 양주자사(揚州刺史) 은호가 조정에 표를 올려 북벌을 청했다.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자, 은호는 사상을 안서장군으로 삼아 수양(壽陽)으로 향하게 하고, 순선에게 감청주제군사(監青州諸軍事), 영연주자사(領兗州刺史)를 더해 하비(下邳)로 향하게 했다.

영화 12년(356년) 11월, 전연의 황제 모용준이 태원왕 모용각을 보내, 선비족 단부의 제왕(齊王) 단감을 공격했다. 단감은 홀로 전연 세력을 상대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단온(段蘊)을 동진으로 파견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모용준은 모용각 외에도 장수 왕등(王騰), 조반(趙盤)을 보내 낭야(瑯邪), 견성(鄄城)을 침구했기에, 동진 북부 방어선은 상당히 혼란스웠다. 이에 순선은 국경을 안정시킬 겸 단부의 제나라를 구원하고자, 단온을 좇아 낭야에 도착했지만 전연군의 위세에 눌려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순선은 모용각과 싸우기를 포기하고, 군대를 돌려 낭야군 양도(陽都)에서 왕등을 격파하고, 그를 붙잡아 참수한 뒤 하비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수 제갈유(諸葛攸), 고평태수 유장(劉莊) 등에게 군사 3,000을 주어 낭야군을 수비하게 하고, 참군 대록(戴逯)에게도 군사 2,000을 주어 태산(泰山)을 수비하게 했다.

영화 12년(356년) 12월, 당시 전연의 장수 모용난(慕容蘭)이 수만 군대를 이끌고 변성(汴城)에 주둔하고 있어 심히 위협적이었다. 순선은 군대를 거느리고 동아(東阿)에서 모용난과 전투를 벌여, 전연군을 격파하고 모용난을 참수했다. 목제 사마담은 그 공으로 작위를 하사하려 했지만, 순선이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승평 2년(358년) 10월, 순선이 병에 걸리니, 조정에서 어사중승 치담을 군사(軍司)로 삼아 그를 보좌하도록 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우군장군, 산기상시에 더하려 했으나, 순선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승평 2년(358년) 12월, 조정으로부터 북벌을 명 받고 군대를 일으켜 태산군의 산치(山茌)를 공격했다. 그때 산치를 지키던 전연의 태산태수 가견의 군사는 겨우 700명 뿐으로, 순선이 데려온 병력과 10배 이상 차이 났다. 가견은 열세의 병력으로 싸우면서 순선의 병사 1,000명을 베는 등 혈전을 벌였지만, 병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생포당했다. 순선이 가견을 묶어두고 질책하자, 가견은 되려 순선을 향해 소리쳤다.
"수자(豎子)야! 이 내공(乃公)께서 어찌 아녀자를 섬길 수 있겠느냐?"
이를 들은 순선은 분노하여 가견을 묶어둔 채 그대로 빗속에 내버려 두었고, 가견은 며칠 동안 욕을 퍼붓다가 분사했다. 그러나 얼마 뒤, 순선은 전연의 청주자사 모용진(慕容塵)이 보낸 사마 열명(悅明)에게 공격받았고, 이때 전연군에게 대패하여 산치를 빼앗기고 말았다. 패전 이후로 병세가 더욱 심각해진 순선은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치담이 그 뒤를 이어 서연2주자사에 임명되었다. 그렇게 관직에서 내려온 순선은 오래지 않아 병사하였다. 향년 38세. 순선의 사망 소식을 들은 목제 사마담은 탄식하며 말했다.
"왕경화(敬和: 왕흡의 자)에 이어 순영칙마저 떠나버리면 장차 누구를 고굉(股肱)으로 삼아야 한단 말인가!"
사후 표기장군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