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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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殷浩(? ~ 356)
동진의 인물. 자는 연원(淵源).[1] 예주 진군(陳郡) 장평현(長平縣) 출신. 광록훈 은선(殷羨)의 아들.
2. 생애
은호는 견식과 도량이 청결하고 원대하여 현학에 능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현학적인 말을 구사하는 데에 뛰어나 아름다운 명성을 날렸고, 숙부 은융(殷融)과 함께 《 노자》와 《 주역》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다만 말솜씨에서는 은호가 은융보다 좀 더 나았기에, 둘이 설전을 벌이면 항상 은호가 승리하였다. 이런 현란한 말솜씨 덕에 은호는 청담을 좋아하던 당대 사대부들 사이에서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가 은호에게"사람이 장차 벼슬에 오르기 전에는 관짝이 나오는 꿈을 꾸고, 부자가 되기 전에는 똥이 나오는 꿈을 꾸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라 물었다. 이에 은호는"관리란 본래 부패한 냄새를 풍기기에 벼슬에 오르기 전에 시체 꿈을 꾸는 것이고, 금전이란 본래 똥과 같은 것이기에 부자가 되기 전에 똥 꿈을 꾸는 것이라네."
라 답하니, 당시 사람들은 이 은호의 말을 명언처럼 새겨들었다. 초기에 삼부(三府)의 관청에서 은호를 등용하려 했으나, 은호는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정서장군 유량(庾亮)의 부름에 응해 기실참군으로 임관하였고, 누차 승진하여 사도좌장사, 안서사마를 역임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은호를 시중, 안서군사(安西軍司)로 삼자, 은호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묘지 곁에서 거의 10년간 은거하니, 사람들은 그를 관이오. 제갈량에 비견된다 평하였다. 사상과 왕몽이 함께 은호를 찾아가 출사를 권유해보았고, 안서장군 유익(庾翼)도 편지를 보내 벼슬길에 오를 것을 주장하였으나, 은호는 굳게 사양하였다.
강주자사 유빙(庾冰), 형주자사 유익 형제가 병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주자사(揚州刺史) 하충도 사망하면서 동진은 3년만에 재상 3명을 연달아 잃었다. 섭정을 하던 황태후 저산자는 좌광록대부 채모와 회계왕 사마욱을 중앙으로 불러들여 보정을 명하였다. 이때 저부가 은호를 천거하니, 조정에서 그를 건무장군, 양주자사로 삼았다. 은호는 이번에도 회계왕 사마욱에게 편지를 보내 사양하려 했지만, 사마욱은 재능이 있으면서 나라를 위해 쓰지 않는 은호의 태도를 꾸짖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은호는 사마욱과 4개월 동안 편지를 여러 번 주고받은 끝에, 마침내 은거를 그만두고 관직을 받았다.
영화 4년(348년) 8월, 성한을 멸하고 귀국한 환온이 정서대장군으로 승진하고, 임하군공(臨賀郡公)에 봉해졌다. 촉을 평정한 환온의 위세가 전국을 뒤흔들자, 동진 조정에서 이를 꺼렸다. 이에 회계왕 사마욱은 은호를 조정의 심복으로 만들고, 그의 명성에 기대어 환온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죽마고우였던 환온과 은호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멀어져만 갔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은호는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하였다. 회계왕 사마욱은 은호를 다시 기용할 생각으로, 일단 채모를 보내 임시로 양주를 다스리게 하고 은호의 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부친의 장례를 무사히 마친 은호는 원래의 관직으로 복직되었다. 이때부터 은호는 환온에게 맞서기 위해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순선을 오국내사로 삼고, 왕희지를 호군장군으로 삼아 측근이 되게 하였다. 왕희지는 은호에게 환온과 내외로 협력하여 국가를 이끌어 나갈 것을 진언했으나 은호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화 6년(350년) 정월, 후조의 황제 석호가 죽고 중원이 큰 혼란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동진 조정은 은호를 중군장군, 가절, 도독양예서연청5주제군사(都督揚豫徐兗青五州軍事)로 임명하여 일전에 저부가 실패했던 북벌을 재추진하게 하였다. 이때 환온도 형주군을 거느리고 안륙(安陸)에 주둔하여 북벌을 청했으나, 조정에서 아무런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환온은 조정이 은호에게 의지해 자신을 견제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매우 분노하였으나, 은호의 사람됨을 알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영화 7년(351년) 12월, 여러 번 북벌 요청을 거절당한 환온이 거병하여 4 ~ 5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무창(武昌)에 주둔하니, 조정에서 매우 두려워하였다. 은호 역시 두려운 마음에 관직을 버리고 환온을 피해 도망치려 했지만, 이부상서 왕표지와 사마 고숭의 활약으로 환온이 겨우 진정하고, 군대를 거두어 강릉(江陵)으로 귀환하여 그만두었다.
영화 8년(352년) 정월, 북벌 준비를 마친 은호가 상소를 올려 허창과 낙양 수복을 청하니, 조정에서 이를 허하였다. 측근인 왕희지가 서신을 보내 북벌을 하면 안 된다 주장했지만 은호는 무시하였다. 은호는 회남태수 진규(陳逵)와 연주자사 채예(蔡裔)가 선봉이 되게 하고, 안서장군 사상과 북중랑장 순선으로 하여금 한 방면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리고 강서 지방의 논 1,000여 경을 수확해 군량으로 삼았다. 순선과 사상의 군대가 수양(壽陽)에 주둔했을 때, 염위의 예주목 장우(張遇)와 형주자사 악홍(楽弘)이 각각 허창(許昌)과 단구(廩丘)를 들고 동진에 투항해왔다. 그러나 사상이 장우와 악홍을 위무하는 데 실패하니, 장우는 노하여 허창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고 장수 상관은(上官恩)을 보내 낙양을 점거하였고, 악홍도 독호 대시(戴施)가 지키고 있는 창원(倉垣)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은호군은 길이 가로막혀 진군할 수 없었다.
영화 8년(352년) 3월, 은호는 순선에게 명을 내려 일단 회음(淮陰)으로 물러나게 하였고, 얼마 뒤 감청주제군사(監青州諸軍事), 영 연주자사(領兗州刺史)를 더해 하비(下邳)를 진수하게 하였다. 이 무렵 마전(麻田) 전투에서 전진에게 패배한 강족 요양은 동진에 동생 5명을 인질로 보내면서 귀순해왔다.
영화 8년(352년) 6월, 은호가 진군을 개시하고, 사상과 요양에게 명해 전진에 투항한 허창의 장우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전진의 경명제 부건은 아우인 승상 부웅에게 보•기 20,000을 주어 장우를 구원할 겸 관동 지역도 평정할 것을 명하였다. 사상은 계교(誡橋)에서 부웅에게 대패해 15,000명의 병력을 잃고 도주했으며, 후방에서 지원하고 있던 요양도 치중을 모두 버린 채 사상을 따라 작피(芍陂)로 도망쳤다. 사상의 패전 보고를 들은 은호는 군대를 수양으로 물렸다.
영화 8년(352년) 8월, 은호가 다시 북벌에 나서려 하자, 일전에 반대했던 왕희지가 다시 서신을 보내 북벌을 그만두고 돌아와달라 간했다. 상서좌승 공엄(孔嚴)도 오랑캐가 항복하더라도 함부로 신뢰하지 말 것을 당부했으나, 은호는 또 가볍게 흘려 듣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영화 8년(352년) 9월, 은호가 거병하면서 태학생들까지 징집하는 바람에 학교가 폐지되었다. 장차 출병하려던 찰나에 은호가 낙마하니, 사람들은 이를 모두 불길한 징조로 여겼으나, 은호는 신경쓰지 않고 북벌을 밀어붙였다. 은호는 군대를 사구(泗口)에 주둔시킨 뒤, 하남태수 대시를 보내 석문(石門)을 점거하고, 형양태수 유둔(劉遯)을 보내 창원(倉垣)을 점거하였다. 그리고 전진의 우장사 양안(梁安), 대사마 뇌약아 등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그들이 경명제 부건을 죽이면 관우(關右) 지역의 통치를 일임시켜 주겠다며 유인하였다. 뇌약아는 이를 짐짓 승낙하고, 은호에게 동진군이 오면 안에서 내응하겠다 약속하였다.
당초 동진에 투항한 요양은 평북장군에 임명되어 역양(歷陽)에 주둔했는데, 전진과 전연이 워낙 강성하여 당장은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고 회수가에서 자신의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요양의 위세와 명성을 꺼리던 은호는 그가 인질로 보낸 동생들을 사로잡고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요양을 암살하려 하였다. 하지만 자객들이 번번이 요양을 암살하기는 커녕 그에게 모든 사실을 일러바치면서 은호의 암살 기도는 항상 실패하였다. 결국 은호는 장수 위경(魏憬)에게 군사 5,000을 주어 요양을 습격하는 초강수를 두었으나, 이마저도 요양이 위경을 베고 그 병력을 모두 흡수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요양을 향한 증오가 한층 높아진 은호는 용양장군 유계(劉啟)를 초(譙)로 보내고, 요양의 무리를 여대(蠡臺)로 옮겨 주둔시킴으로써 가까이 두고 감시하였다. 죽은 위경의 자제들이 수양을 왕래하는 것을 본 요양 역시 의심이 강해져, 부하 중 은호에게 귀순하려는 자를 잡아 주살하였다.
영화 9년(353년) 10월, 전진의 사공 장우가 관중의 호족들과 결탁해 반란을 꾸미다 주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관중의 여러 호족들이 일시에 거병했고, 보국장군 부황미도 낙양을 버린 채 도주했다는 소식이 은호에게 들려왔다. 은호는 양안과 뇌약아 등이 마침내 성공한 것이라 여겨, 낙양을 탈환하고 원릉을 수복하기 위해 수양에서 70,000 대군을 일으켜 진군하였다. 그리고 미리 조정에 양주자사직 해임과 낙양의 주둔을 허락해줄 것을 상표하였으나, 조정에서 불허하였다. 이부상서 왕표지가 은호에게 서신을 보내 뇌약아를 믿지 말 것을 경고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은호는 양국내사 요양을 선봉에 세우고, 관군장군 유흡(劉洽)을 녹대(鹿臺)에 보냈으며, 건무장군 유둔은 창원을 그대로 지키게 하였다. 이때부터 배반할 계획을 세운 요양은 일단 은호의 명령에 따라 북쪽으로 향하는 척하다가, 은호군의 경로를 미리 헤아려 복병을 숨기고 은호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은호가 산상(山桑)에 이르렀을 때, 숨어있던 요양이 복병을 일으켜 은호군을 공격하자, 은호는 대패하여 치중을 버리고 황급히 초성(譙城)으로 도주하였다. 10,000여 명 이상이 요양군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었고, 요양은 은호의 군수물자와 병장기를 전부 취한 뒤, 자신은 회남군으로 가고 형 요익(姚益)을 남겨 산상을 지키게 하였다.
영화 9년(353년) 11월, 은호가 용양장군 유계와 부장 왕빈지(王彬之)를 보내 산상을 쳤으나, 회남에 있던 요양이 구원군을 이끌고 동진군을 격파하고 유계와 왕빈지를 죽였다. 요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작피까지 빼앗아버렸다.
영화 10년(354년) 정월, 은호의 북벌이 연달아 실패하여 군량과 병장기가 모두 소진되자, 조야로 은호를 향한 원성이 자자하였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환온이 은호의 죄상을 나열하며 파면을 상주하니,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은호를 서인으로 폐출시키고 신안현(信安縣)으로 유배보냈다.
은호는 비록 정계에서 폐출되어 유배지에서 생활하였지만, 불평의 말을 하지 않았고, 안색과 행동도 평소와 같았으며, 가족들 앞에서도 슬퍼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다만 하루종일 허공에 대고 손가락으로 "돌돌괴사(咄咄怪事)" 4글자를 하염없이 적을 뿐이었다. 얼마 뒤, 환온이 은호를 상서령으로 임명한다는 서신을 보내자, 은호는 무척 기뻐하며 수락한다는 답장을 작성하였다. 그는 다 쓰고 나서도 혹시 잘못된 내용이 있을까 염려하여 서신을 수 차례 열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다가 봉투에 서신을 넣는 것을 깜빡하여 실수로 빈 봉투만 보냈다. 환온은 은호가 아직도 자신을 원망한다는 생각에 매우 미워하며 그와 완전히 절교하였다.
영화 12년(356년), 은호는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아들 은연(殷涓)은 임관하여 저작랑을 지냈으나, 환온이 꾸민 무릉왕 사마희(司馬晞)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훗날 은호가 이장될 때, 은호 밑에서 오랜 기간 일했던 고열지가 상소하여 은호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을 상소하였다. 조정에서도 고열지의 의견에 동의하여 은호의 본래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그대로 추증해주었다.